
October 27,
2013




이 노래는 파바로티가 살아생전
전쟁의 피해로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자선 콘서트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노래도 노래지만
그의 귀한 뜻을 기리는 마음으로
함께 듣고 싶어 여기 소개합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여 주소서
주여 주여 먹여
주소서
주님이 해변서 떡을 떼심과 같이
하늘의 양식을 내려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여 주소서
주여 주여 먹여 먹여
주소서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
Dat panis coelicus figuris terminum
O res mirabilis, manducat dominum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
Dat panis coelicus figuris terminum
O res mirabilis, manducat dominum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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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
이번 호의 특집이 까치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일 중에 감이 으뜸입니다. 밥을 대신 할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예를 들자면 우리 집 감나무에 달린 마지막 홍시가 가장 맛있을 텐데 할머니의 말씀처럼 따먹지 말고 까치밥으로 남겨두려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남김과 드림의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삭을 다 거두지 말라, 포도열매를 다 따지 말라 하신 성경말씀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경제 원리 정치원리가 따로 있겠습니까? 삶의 원칙이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남김과 드림이 있으면 되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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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한번 더
강조합니다. 할로윈은 사탄의 축제입니다. 할로윈과 선을 그어야 합니다. 재미로 한다고 끌려가면
안됩니다. 단호하게 배격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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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교개혁주일
.....
오늘의
종교개혁(교회개혁)은...
교회의 영적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자성(自省)운동입니다.
그리고
성직자의 삶이 평신도의 복음이 될 때 한국교회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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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트와 아마존
.....
아마존과
월마트는 이미 손꼽히는 1등 기업입니다. 그 매출액을 보면 기절할 정도입니다. 잘 나가는
기업입니다. 이번 호에 그들의 잘나가는 모습을 단순히 소개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면
넘겨다 볼 기업이 없는 그 기업들이 마치 생명을 내 걸 듯이 새로운 경영전략을 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경영도 저절로 성공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란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 그리고 작은 사역
하나도 사력(死力)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하고 있는가?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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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죽어 살아요.
떨어지진 말고 죽은 듯이 살아요.
꽃샘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꽃잎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우리 곱게 곱게 익기로 해요.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 내고
금싸라기 가을볕에 단맛이 스미는
그런 성숙의 연륜대로 익기로 해요.
우리 죽은 듯이 죽어 살아요.
메주가 썩어서 장맛이 들고
떫은 감도 서리맞은 뒤에 맛들듯이
우리 고난받은 뒤에 단맛을 익혀요.
정겹고 꽃답게 인생을 익혀요.
목이 시려운 하늘 드높이
홍시로 익어 지내다가
새소식 가지고 오시는 까치에게
쭈구렁바가지로 쪼아 먹히우고
이듬해 새 봄에 속잎이 필 때
흙 속에 묻혔다가 싹이 나는 섭리
그렇게 물 흐르듯
순애(殉愛)하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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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낯설다. '깊이갈이'라니 무슨 말일까. 저자인
황송문(72·사진) 시인은 "한국 문학에 있어 철학의 빈곤을 극복하는 길은 시의 깊이갈이에
있다는 점에 착안해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대충 간 밭에 심은 작물은 한 번의 소나기에 휩쓸려 사라지지만, 땅을
깊이 파고 심은 곡식은 폭우 등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이 풍년을 일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시의 깊이갈이와 응축의 묘미'(국학자료원)는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 창작 방법론을 쉽게 풀어쓴 책이다. 저자가 시의 핵심으로 꼽는 건 언어의 '응축'이다. 그는
"현대시가 아무리 실험이나 변모를 거치더라도 그 본질적 요소인 응축의 묘미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한다.

시인의 해설을 곁들여 문학작품을 다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서정주·황금찬·최은하·전봉건·전규태·이기반·박미란·최문자·엄한정·최재환·유광렬·함동선·손보순의 시,
김규련·하유상·박연구의 수필과 오승우 화백의 그림을 거쳐 재중동포 리상각의 시조까지 폭넓게 분석한다.
노시인의 넘치는 재능과 기운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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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주고 있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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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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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Love
Enjoy
First
Give
High
Imagine
Joy
Kind
Leave
Memory
Not
Only
Plan
Question
Remember
Show
Test
Use
Vex
Will
X
Yesterday
Z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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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라.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라.
늘 믿음 안에 있나 체크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라.
내 영혼에게 날마다 기쁨이 되게 하라.
항상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어라.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사랑을
주라.
저 높은 곳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으신지
상상하라.
항상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라.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떠나지
말라.
은혜 받았던 것을 잊지 말라.
무조건 하나님을 믿어라.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아라.
하나님의 계획이
크고도 크심을
깨달아라.
의심을 품고 물어 보지 말라.
늘 하나님을 기억하라.
나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라.
시험에 빠지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라.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라.
미래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맡겨라.
"아니오"라는 불순종을 제거하라.
지나간 과거에 붙잡히지 마라.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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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오늘도 주님과의 만남이 있었는가?
02. 진정한 회개가 있었는가?
03. 말씀을 읽고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했는가?
04.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았는가?
05.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렸는가?
06. 복음 전도자로 살았는가?
07. 구원의 기쁨이 오늘도 내게 넘치고 있는가?
08. 남에게 상처 준 일은 없는가?
09. 가정을 돌아보며 사랑을 나누었는가?
10.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에 순종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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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지금부터
490년전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 어느
대학교수가 그 당시 중세 카톨릭 교회의 부패에 대한 항의를 별로 특별하지도 않게 제기한 데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항의(protest)는
즉각 반응을 일으켰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웅장한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혁명은 단순히 기독교
역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과 세계의 역사를 돌려놓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개신교를 가리켜 흔히
“Protestant”라고
합니다.
“저항하는
자”,
“항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개신교가 이처럼
“Protestant”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불의와 부패에 항거하며,
저항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혁명을
“종교개혁”이라고
하는데
“교회개혁”
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개혁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참된 교회건설은
그들의 일관된 개혁정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리포메이션(The
Reformation)을
일본에서
‘종교개혁’이라고
변역하고
우리가 이 번역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웨슬리가 살았던
18세기 영국 사회는
총체적 파탄의 시대였습니다.
거리의
1/4은 술집으로 가득
찼으며,
골목은 창녀들로 넘쳐났습니다.
빈곤과 무지에 찌든 일반
대중들은 술과 향락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교회 또한 질세라 부패와 타락이 도를
넘고 있었습니다.
뇌물에 의해 성직이 매매
되고 힘을 잃은 메시지는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급기야 기독교는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냉대 받고 무시를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종교 개혁은 변질된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경 본래의 기독교로의 회복운동이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하나님
중심”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황이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사죄와 은혜의 수여자라는 당시 교회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바로 하나님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유일한 그리고 최종 권위 임을 확인 함과 동시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는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 교회 개혁 운동이 가져온 신학적 성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교회 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영적 부흥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사회 곳곳에 그
개혁의 물줄기에 역행하는 모습이 도사리고 있음을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변해버린 구석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기관과 단체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 속에 하나님은 뒷전에 두고 사람들의 소리만 무성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보니 말씀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간의 냄새에 싸여 성직자의 부패 타락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기독교가 사회적 지탄(指彈) 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복음,
그 자체 때문에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것과
기독교인들의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위 때문에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목회자가 가는 대로 교회가 가고,
신학이 가는 대로 교역자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의 분쟁,
문제,
불화 등등 이 모두는
일차적으로 목회자에게서 비롯된 문제라는 말이 맞습니다.
분명 목회자의 그릇
만큼 교회가 크고 목회자가 자라는 만큼 교회가 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에게 있는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셨을까요?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우심이고 또한 목사는 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훈련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신학교를 가졌다는
것,
가장
크고 많은 목회자와 교회를
가졌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면류관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영적권위를 회복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자성(自省)운동입니다.
중세기말 성직자의 타락,
그 영적 폐허의 현장에서
나온 경구가 지금 필요합니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
(Vita
cleric est evangelium laice)
맞습니다. 성직자의 삶이 평신도의 복음이 될 때
한국교회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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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그저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멈출 수도, 곁길로 벗어날 수도 없어서 그저 앞을
향해 발부터 떼어놓던 시절.
그때의 두려움과
막막함이란, 그 상태에서는 절대로 스스로를 조망(眺望)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선명하게 느끼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내게는
1990년의 봄이 그런 시절이었다. 1990년 3월, 나는 오래도록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한국을
떠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그때의 상황이며 내 나이가 막무가내로 나를 떠밀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들어 간 부다페스트를 나는 낯설고 두렵게만 여겼고, 그 이면의 설렘과 떨림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방콕과 파리를
경유해 부다페스트까지 스물두 시간의 비행 동안, 내 머릿속에는 1989년 겨울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일들이 자동으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달려온 영화 <파업전야>의 취재와 시나리오
작성, 강추위 속에서의 촬영, 그리고 곧바로 이어졌던 편집……. 어느 과정 하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작 가장 힘든 후반 작업과 영화 상영 과정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도망치듯 부다페스트로 유학을 떠났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장산곶매 선배들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의연한 선배들 앞에서 나는 혼자
떠난다는 두려움과 미안함, 안타까움을 감춰야만 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 더 크게 싸워야 하는 이상한 나라, 그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 나는,
반대로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문을 연 동유럽의 새로운 땅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땅, 부다페스트에도
역시 한 점 기대감조차 가질 수 없었다. 동과 서를 가르는 정치의 벽이 아직 무너지기 전, 함부로
문부터 일찍 열어젖힌 그 동쪽 나라의 공기는 과연 순수하기만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씁쓸함이 먼저
마음을 내리쳤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3월의 스산한 부다페스트 밤공기는 서울의 그것보다 차가웠다. 교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다가, 마치 재회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과장스럽게 반겨주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굳어졌다. 저마다 어색하게 따로 노는 일행들과 학교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향했다. 낯선 도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눌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서울의 밤에
비해 어두운, 납작 엎드려 일찍 잠이 든 도심에선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그곳의 모든
골목과 건물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덤덤하게 밤풍경을 보아 넘겼다. 지독한 피로가 무겁게 몰려왔다. 가장
큰 싸움을 뒤로하고 떠나와서일까, 나는 이 도시에서 오래 외롭고 피곤할 것이라는 예감에 몸서리쳤다.
다음 날 새벽,
시차 때문에 일찍 일어나 기숙사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도시는 아직 어두웠다. 벌써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허름한 겨울 외투 차림으로 총총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1990년의
부다페스트는 마르크스와 시인 페테피 산도르의 이름을 딴 거리와, 레닌과 음악가리스트의 동상이
이물스럽지 않게 뒤섞여 있었다. 어떤 사상이나 책을 금하는 땅, 길을 가다가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보여주는 일이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온 나에겐 그 조화가 오히려 낯설었다.
그 낯섦은 곧
불편함과 어색함으로, 마침내는 불쾌함으로 변해갔다. 그곳에선 서투른 영어조차 통하지 않았다. 원,
투, 스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부다페스트의 상인들은 부러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고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만의 세상에 잘못 섞여든 이물질처럼 어색해져서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와야만 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노란 전차 노선을 갈아타는 법을 익히는 데 반나절이 걸리기도 했고,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시장 가는 길을 익힐 수 있었다. 시장이나 전차,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마자르어(Magyar,
헝가리어를 그들이 부르는 이름)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랄알타이어, 한국어와 뿌리가
같으니 좀 더 친근할 것이라는 짐작은 곧 오해로 밝혀졌다. 마자르어는 화가 난 사람이 감정을 억누른
채 툭툭 내뱉는 말처럼 딱딱했다.
50시간도 채
되지 않아 벌써 김치와 쌀밥이 그리웠다. 가게에 가도 선뜻 손이 가는 것이 없었다. 조잡하거나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겨우 오렌지 몇 개, 우유, 달걀과 시큼한 맛이 나는 둥근 빵
같은 것만 집어 들곤 했다. 계속 같은 가게를 찾았지만 비닐봉지 한 장 건네주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담을
것을 달라고 영어와 수신호를 함께 보내자, 마지못해 누런 종이봉투 하나를 내주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차가운 우윳병에 맺혀 있던 물방울에 젖어 종이봉투는 힘없이 찢어졌다. 오렌지와 병우유와 빵과
깨진 달걀이 함부로 바닥에 뒹굴었다. 난감함이 몇 초 만에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고 온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얼음을 깨며 촬영했던 영화 <파업전야>의
장면들도 떠올랐다. 당장 그 사람들과 편집이 끝나 상영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작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야,
그래 이건 아니야. 돌아가자,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자.’
하지만 내겐
돌아갈 용기조차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화를 냈고, 모든 것에 투덜대면서
부다페스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첫 주말, 나는 부다페스트의 심장이라고 하는 도심 광장의 가장 오래된 카페에 앉았다.
관광객들이 자주 온다는 그곳에서는 그나마 짧은 영어를 쓸 수 있었다.
나는 커피를
시켰다. 삶에서 커피한잔이 가장 간절한 순간이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무거운 기분을
조금은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되는 밤샘
작업 동안 뜨거운 물에 훌훌 타 마시곤 했던, 설탕과 프림이 적당히 들어간 그 커피가 그리웠다.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맛일 거야. 커피는 서양 음료니까.’
나는 입맛에
익숙한 한국의 그 커피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앞에 커피 잔이 놓였다.
아니었다.
커피가 아니었다. 한국의 그 커피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흔한 물 한 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커피 잔은 소녀들의 장난감 살림 도구만큼 작았고 그 안, 갈색 거품이 층을 이룬 커피는
엑기스를 응고시켜놓은 젤리처럼 보였다. 우유나 프림을 담은 그릇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탕 그릇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짧은 영어로는 뭔가를 더 주문하거나 불평할 수도 없었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제대로 된 커피 한잔마저 내주지 않는 도시라니, 당장이라도 커피 잔을 집어 던지고 싶을 만큼 싫었다.
‘이건
커피가 아니잖아. 따뜻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넓은 커피 잔에 찰랑이는 커피를 달란 말이야. 프림의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커피!’
일주일 동안 이
낯설고 불친절한 도시를 참을 만큼은 참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그만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웨이터를 찾아 불만을 쏟아내려 했다. 그러나 웨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황당함에
동의를 구하는 심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상한 풍경을 발견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나를 뺀 카페 사람들 모두가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아니, 행복하고도 느긋해
보였다. 카페를 가득 메운 대부분의 관광객과 손님들은 주말의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 세상에 단
둘만이 존재한다는 듯 앞에 앉은 상대에게만 눈길을 보내는 연인들,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수다를
떠는 여자들, 친구처럼 사이좋아 보이는 할머니와 손자….
마침 그때 내게
커피를 가져다준 웨이터가 옆 자리 다른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상냥하게 물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당황스러웠다.
“워터
플리즈.” 얼결에 그렇게
말했다. 웨이터는 눈인사를 하고 물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물을 들이켜며 생각했다.
‘왜
아무도 불만이 없는 걸까?’
당연했다. 그 작은 잔에 담긴 것이 바로 그들이 바라는 커피, 동유럽과 부다페스트의 커피였으니까.
그곳은 한국이 아니었고, 당연히 나는 한국에서 즐겨 마시던 커피를 주문할 수 없었다. 나는 어쩌면
그곳에 있는 사람 누구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금발의 미녀 앞에, 바로 내 앞에 놓인 것과 꼭 같은 커피 잔이 놓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커피 잔에 설탕을 타서 휘휘 젓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고는 입술에 묻은 커피를 혀로
날름 핥아 먹으며 음미했다. 술꾼이 소주 첫 잔을 탁 털어 마시는 것처럼 날렵하고도 능숙한
동작이었다. 나도 그녀처럼 커피 잔에 설탕을 타보았다. 휘휘 저어 단숨에 마셨다.
그건 커피였다.
그동안 내가 마셔왔던 커피와는 달랐지만 분명한 커피였다. 쓴맛과 달콤한, 전혀 다른 두 맛이 과하게
섞여 있었지만 맛있었다.

나의 첫 번째
부다페스트 커피였다. 문득 볼에 닿는 햇볕의 따스함이 느껴져 카페 창밖을 내다봤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제야 내가 처음으로 부다페스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봄이었다. 아직 쌀쌀했지만 햇살 속에서 따뜻한 부다페스트의 봄이 느껴졌다. 그제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새로운 땅에 와서도 나는 여전히 지난 추억에 묶여 있었다. 두 주먹 꽉
쥐고 아무것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난 뒤, 나는 오히려 한국을 더욱 억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 자세로 부다페스트를 향해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진한 커피 한
모금이, 그 낯설고 강한 맛이 온몸에 퍼지는 동안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주먹을
펴고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커피 한 잔을 더 시켰다. 웨이터가 새로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양 여전히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 커피가 도착했다. 다시 한 번, 에스프레소였다. 그들에게 별다른
조건을 달지 않는 커피는 당연히 에스프레소인 모양이었다. 그 커피를 마시며 나는 처음으로 부다페스트로
들어가는 문 하나를 열었다.
이념이 달라
우리에게 오래도록 금단의 땅이었던 동유럽의 부다페스트는 그 후로도 여전히 낯설었다. 예약 없이는 아무
미용실에 불쑥 들어가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었고, 일하기로 작정한 시간에서 딱 5분이 지났다 는
이유로 노점상은, 주섬주섬 좌판을 정리하는 중에도 바나나를 팔지 않았다. 햄버거 하나를 먹기 위해
맥도날드 가게 앞에 10여분 긴 줄을 서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수많은 겹겹의 문을 만났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의 낯선 맛과 화해하고 난 다음부터는,
조금씩 더 큰 설렘과 기대감을 느끼며 활짝 그 문을 열곤 했다. 거기엔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소박한 우아함에 감동했고, 여유로운 마음에 동화되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세계를 조우(遭遇)할 때, 그래서 두렵고 막막할 때면 부다페스트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에스프레소를 떠올린다.
그리고 내 두
손이 잘 비어 있는지, 새로운 발견을 선사할 그 겹겹의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혹시
새로운 세계가 낯설고 두려워 움츠리고 있다면 마음을 열고 발을 내딛자. 낯섦과 두려움은 설렘과 떨림의
다른 이름이곤 하니까. 그 세계는 당신에게 이제껏 볼 수 없던 것들을 보게 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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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건강 칼럼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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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에는 한국인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호주 출신인 샘 해밍턴은 한 방송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한국 남자들처럼 군(軍) 생활까지 체험하고 있지요.
2013년 현재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무려 154만여 명.
이들이 바라보는 한국, 한국 사람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혜진(연세대 식품영양학과 4학년) 권소영(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명재연(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동아일보 인턴기자가
각 대학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학생들,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인 직장인과
주부들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24시간 무엇이든 가능
한국에서는 24시간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정말 즐겁다. 유럽은 저녁에는 사람들이 자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오후 9시, 10시면 상점들도 다 문을 닫는다. 집에서 TV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대부분이다. 독일에서는 노동법상 점원들이 일요일에 일하지 않아 주말에는 가게가 다 문을 닫는다. 한국의 일요일 쇼핑은 최고다. (독일·여·학생)
동대문에서 새벽 2시까지 구경한 적이 있는데 잠 안 자고 그 시간까지 장사하는 상인들이 신기했다. 층마다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구경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즈베키스탄·여·학생)
한국은 안전한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는 오후 9시가 되면 남자인데도 못 나가게 한다. 한국은 자정이든, 새벽이든 사람들이 잘 돌아다닌다. 한국은 ‘밤이 없는 나라’로 외국에서 유명하다. ‘한국은 24시간 난리다’라고 외국 사람들은 말한다. (이란·남·직장인)
24시간 편의점이 참 신기하다. 덴마크에도 작은 가게가 있긴 하지만 오후 8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파는 물건도 담배, 음료수밖에 없다. 한국의 24시간 편의점에서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덴마크·여·학생)
새벽까지 운영되는 클럽이 많고 늦게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밤에도 심심할 틈이 없다. (미국·여·학생)
족발, 보쌈, 중국집 음식 등 다양한 음식이 새벽까지 배달되는 게 신기하다. 배달시킨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편리해서 좋다. (이탈리아·남·학생)
돌솥비빔밥을 시켜 먹었는데 나중에 그릇을 다시 찾으러 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핀란드·여·학생)
새벽까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도 다음 날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 가는 한국 사람들이 신기하다. 술을 마시면서도 컨디션을 잘 조절하는 거 같다. (중국·여·직장인)
BB크림 바르는 남자들
한국 남자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옷도 단정하게 입는다. 밖에 나갈 때 머리 손질은 기본에 화장품을 바르기도 한다. 특히 남자들이 BB크림을 바르는 것은 충격이었다. 독일에서는 남자들이 옷차림에 크게 관심이 없다.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만 차려 입는다. (독일·남·학생)
한국 여자들은 학교에 갈 때, 잠깐 어디에 나갈 때까지 화장을 하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파티를 갈 때나 여자들이 화장을 한다. 미국 대학생들은 학교 갈 때 그냥 티 입고 운동화 신고 다니는데 한국 여학생들은 화장, 머리 손질은 기본에 옷도 차려 입는다. 학교에서 하이힐까지 신고 다니는 게 신기했다. (미국·여·학생)
한국 여자 친구들하고 밥을 먹을 때, “이건 몇 칼로리다” 하면서 살찐다고 하는 게 신경 쓰였다. 미국에서는 다이어트라고 하면 채소를 많이 먹고 운동하면서 몸을 건강하게 하는 건데 한국에서는 굶어서까지 살을 빼는 것이었다. 오히려 건강에 안 좋을 거 같다. (미국·여·직장인)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길에서 패션쇼가 열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남자들도 예뻤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옷 입는 스타일이 다 비슷했다. (미국·남·사업가)
너무 솔직하다.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가 있는데 진짜 친형님 같다. 부탁하면 뭐든지 들어준다.
“형, 부탁 좀 해도 되요?” 하면 “알았어, 말해봐”라고 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만나봤지만 한국 사람들이 확실히 정이 많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술 한잔하면서 말하고 푼다. 거짓말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할 이야기는 해버린다. (이란·남·학생)
시골에 가서 밥을 먹고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 와서 같이 먹자”고 부른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먹을 것을 나눠 주고 술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먹을 것을 챙겨 줄 때도 있고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에서 한국 사람들의 정을 느꼈다. (미국·남·학생)
한국 사람들이 솔직한 것은 사실 겉모습이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것이다. 자기가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바나 가치관, 정치적 의견 등은 오히려 드러내지 않는다. 친해지기 전에는 오히려 더 무뚝뚝하다. (네덜란드·남·학생)
한국 사람들은 영역이 분명하다. 자기 집단의 경계가 뚜렷해서 들어가기 어렵다. 일단 내 집단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끈끈하고 살갑게 챙겨 주지만 외국인에게 그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한국어와 문화를 열심히 배워도 나는 영원히 한국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남·직장인)
한국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한다. 중국 사람들은 특히 외모에 대해서 별로 말하지 않는데 한국 여자들은 “너 살쪘다”, “피부가 안 좋아졌다” 등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한 말도 거리낌 없이 하는 것 같다. (중국·여·학생)
일-스마트폰 중독
한국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 신입으로 들어가면 오후 10시나 11시까지 일하기 일쑤다. 독일은 유럽에서 일을 많이 하는 나라이지만 한국만큼 많이 하진 않는다. 한국 사람들 너무 힘들 것 같다. (독일·남·학생)
한국 남자들은 ‘일’에 자신의 정체성까지 두는 것 같다. 삶의 우선순위 중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둔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사에게 충성하다 보니 하라는 대로 무작정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다. (미국·남·직장인)
작년 1월에 사업을 하려고 한국에 왔는데 한국인들이 매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길 가다가도 사람들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봐서 부딪힌 적이 많다. (이탈리아·남·직장인)
지하철 안에서 모든 사람이 드라마나 야구 경기를 본다. 카페 안에서 커플이 앉아 있어도 눈은 각자 스마트폰을 보는 경우도 봤다. (일본·여·주부)
성형의 나라
어느 나라를 가도 이렇게 성형외과 광고가 지하철이나 버스에 많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도 성형을 하지만 이렇게 광고가 어디에나 있지는 않다. 성형수술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도 수술인데…. (미국·여·학생)
위생 부분은 정말 아쉽다. 사람들이 의외로 길거리에 침을 많이 뱉고 특히 큰 그릇에다가 찌개를 떠서 나눠 먹는 부분이 문화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낯설고 위생적이지 않아 보였다. (영국·남·학생)
남녀가 화장실을 같이 쓰는 식당이나 술집이 이해가 안 간다. 남자 화장실에 여성이 들어와 청소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국·남·학생)
한국 사람들은 가족 간의 유대를 중요시하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며느리들이 시댁에 대해 부담을 갖지 않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연락도 한국 사람들만큼 자주 하지 않는다. (일본·여·주부)
한국 여자들은 일을 하면서 집안일까지 대부분 떠맡는 것 같다. 중국은 가사일을 남녀가 균등하게 하는데 한국은 이런 게 불평등해 보인다. (중국·여·직장인)
한국 드라마를 보면 꼭 한 여자를 두 남자가 좋아한다. 드라마만 보면 사람들의 인생에서 연애, 사랑이 최우선이고 일은 부차적인 것 같아 보인다. (미국·남·학생)
한국은 영어 광풍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사람이 영어교육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 (캐나다·남·학생)
서울은 굉장히 국제적인 도시여서 사실 영어만 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내가 영어로만 이야기할 때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먼저 다가왔다는 것이다. 한국말을 어느 정도 잘하게 되자 사람들이 더 이상 나와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영어 연습을 하기 위해 외국인들과 친해지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국·남·직장인)
한국 사람들은 부모, 자식과의 관계가 유난히 끈끈하다. 미국에서는 자식이 18세가 되면 부모가 나가라고 한다. 30대에 대학원생인데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한국 남자들을 많이 봤다. 자식이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남·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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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알아보려다가 돼지고기의 부위별 영어이름도 알아 볼 겸 좀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1. 돼지고기는
Pork인 것은
아실 거고요.
고기의 부위는 Part로
쓰시는 것이 아니고 Cut이라고 씁니다. 따라서
Pork Cut이라고
하시면 우리가 말하는 돼지고기의 부위로 통용이 됩니다.
2. 돼지고기의 부위는 한글로 해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요...
저부터서..
3. 위에서 보시듯이, 한국에서는 돼지고기를 크게 약 7가지로 분류하는데
비해서, 외국에서는 부위와 자른 방법 및 가공 방법 등에 따라 수십가지로
돼지고기를 분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생고기 (냉동고기)에 대해서...
Back Ribs,
Blade Chop,
Blade (Boston)
Roast,
Blade Steak,
Butterfly Chop,
Center Loin Roast,
Center Rib Roast,
Country Style Ribs,
Cube Steak,
Fresh
Sausage Links,
Ground Pork,
Loin Chop,
Rib Chop,
Sirloin Chop,
Sirloin Cutlet
(boneless),
Sirloin Roast,
Spareribs,
Tenderloin Roast,
Top Loin Chop
(boneless),
Top Loin Roast (double
boneless) 등으로...
2) 가공육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Bacon,
Canadian Style Bacon,
Ham -
Boneless,
Ham - Center Slice,
Ham - Rump
Portion,
Ham - Shank Portion
Smoked Hocks,
Smoked Loin Chops,
Smoked
Picnic,
Smoked Rib Chops 등으로 분류합니다.
(참고로... Bacon은 돼지고기 뱃살(삼겹살) 중에서 고기로 쓰고
남은 부분을 사용해서 만듭니다. 즉, 서양사람들은 우리가 삼겹살을
생고기로 먹는데 반해 주로 삼겹살을 베이컨으로 만들어 먹으니, 조리방법만
다르다 뿐이지 삼겹살을 얇게 해서 먹는 것은 똑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돼지고기를 간단히 부위별로 말하는 것은 4가지 입니다.
1) Shoulder (한국에서 목심에 해당)
2) Loin
(등심과 안심에 해당 -
Sirloin은 등심의 윗부분이고,
Tenderloin은 등심 뒷쪽의 부드러운 안심 부분입니다. 또한 등뼈도
Loin에 들어가는데 Baby Back Ribs는 아기돼지의 등뼈구이
입니다.)
3) Leg
(족발, 허벅지살 등...)
4) Belly (돼지의 배부분으로서 갈비와 삼겹살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삼겹살은 일단 Belly에 속합니다. Belly야 원래 배라는
뜻이구요... (Belly Button은 배꼽... 하하하..)
그런데,
Belly에는 갈비뼈가 있는 부분이 있고, 순수한 살만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돼지갈비와 삼겹살로 구분하고 있죠. 외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Belly에서 갈비 부분은
Side Ribs라고 하고,
삼겹살 부분은 그냥 Side라고 합니다.
5.
삼겹살은...
1) 그냥
Side라고 하거나
2) 배부분 중에서 뼈가 없는 부분이라는 뜻의
Boneless Belly
또는 Belly (Boneless)라고 하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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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한국의 국정감사를 보고 있다. 이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국회의원 자격을 제한
하는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국회의원들이 민간 기업인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여 놓고서
국감
증인에서 빼주는 대가로 5천만 원을 요구했다는 문화일보 기사를 보고서 국회가 이제 갈 때까지 다 갔다는 생각이다.
기업인들은 기업하기가 어렵다고 아우성들인데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이 기업인을 상대로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여 기업인 망신주기를 하고, 증인들이 많아서 증언할 기회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국감증인으로 출두시켜 놓고서 하루 종일 앉아 기다리게 하면서 기업 경영에 차질을 주며 기업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짓을
하고 있다니 개탄스럽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가면 기업 관계자들이 대부분 대표나
오너의 국감 증인 빼내기 로비를 하며 의원이나 보좌관을 만나서 사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라고 한다.
대한민국 경제가 하락기조에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나 국회의원들이 기업인들을 도와서 기업하기 좋게 만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업인들을 국회의원들이 국감 증인
채택으로 궁지에 몰고 있다니 한심스럽다. 일부 의원실에서는 국감 증인을 빼주는 대가로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으라고 흥정을 하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국회의원들이 이런 부분별 하게 후원금 강탈 행위를 하는 것은
정치는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합법을 가장해서 기업인들에게 불법 거액 후원금을 내게 하는 것은 정당이 후보를
잘못 공천하고 국민들도 또한 국회의원들을 잘못 뽑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있다는 것이 정말 창피한
짓이다.
이런 일련의 행위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공직선거 후보자의
자격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텃밭에서 개나 소나 다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에
당선은 따 논 당상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자격 제한이 없다 보니 현 19대 국회의원의 20%가
전과자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것이다.
국회의원 300명 중에 60명이 전과자라고 한다. 정당별로 전과자 출신 의원을 나눠보면
새누리당 출신 의원 150명 중 7명, 민주당 127명 중 44명, 통진당으로 당선된 13명 중 8명이 전과자 출신이란
것이다. 또한 군대 가지 않은 의원이 민주당이 26명, 새누리당도 18명이나 된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으로 영남이나 호남에서 살인자나, 사기꾼이나,
조폭 출신이나, 종북좌파로 활동을 하고 전향하지 않은 자나, 군대 가지 않은 자나, 부정부패 혐의 자나,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무대포로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국회의원에 대한 자격제한이 없다 보니 속된 말로 미안한
표현이지만 개나 소나 다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이 되는 세상이다. 부정한 전과자들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개과천선이라도 하면 다행이겠으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을 갖고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종북좌파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개과천선을 하여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석기 류들이 국회의원의 권력을 이용하여 국가기밀을 제출 받아서
내란음모를 획책하는 짓을 하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북한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돕는 짓을 하자고 모의나 하고 있지
아니한가?
민주당의 19대 국회의원 127명 중 44명이 전과자들이다.
전체의 34.6%에 해당한다. 22명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자들이다, 바로 반국가 범죄 전과자란 뜻이다. 20명은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자들로 민주적 법질서를 위반한 이들이다. 민주적 법질서를 위반한 이들이 법을 만드는 입법부에서
활동하는 것이 옳은 짓인가?
통진당으로 국회의원에 당선 된 의원 13명 중 8명이
잔과자이다. 61.5%가 국보법과 집시법 위반자들이다. 민주당과 통진당의 국회의원 당선자는 140 명 이 중 약 37%인
52명이 전과자들이다. 통진당 출신 전과자 국회의원들은 북괴 지하당 연루자, 혁명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상해범, 현주건조물
방화시도범, 화염병 투척자, 민간인에 대한 가혹행위자 등 반역적 파렴치범들이 많다.
새누리당 출신 150명 의원 중 4.7%인 7명이 전과자인데 그
가운데 국보법, 반공법 위반자는 3명이다. 이렇게 국회의원 후보자 자격 제한이 없다보니 국회의원 300명 중 60명이나
전과자 출신들이다. 이 중에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억울하게 전과자가 된 분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은 되나 전과자 출신들이
이렇게 국회의원이 많은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민주당의 병역 대상자 102명 중 25.2%인 26명이
군면제자이다. 새누리당은 병역 대상자 135명 중 13.3%인 18명이 군면제자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공천 기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면 대한민국 법을 얼마나 잘 준수 했는 지와
애국심을 가장 중요한 공천 기준으로 삼아야 할 터인데, 민주당과 민통당은 헌법과 자유민주주의 등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우대하여 공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국회의원의 공천 기준도 없고 국회의원 자격에 대한 기준도
없다보니 이석기의 내란음모 사건이 터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공직 선거에 나오는
후보자의 제한 규정을 두어서 부정부패 전과자, 특별사유 없는 병역 면제자, 대한민국 법을 위반하고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자, 논문을 표절한 자, 부동산 투기 혐의자,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자 등을 공직선거에 입후보 하지 못하도록
공직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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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Weekly)으로 발행되는 비전통신
2009년부터
2012년 까지 4년 분을
한번 클릭으로
열어볼 수
있도록 이곳에 모았습니다.
위 등대 그림을 클릭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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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상권의 양대 기업인 월마트와 아마존의 온-오프라인 경쟁이 전면전으로 번지고 있다.
월마트와
아마존은 그동안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영역을 분할하여 패권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온-오프라인이 융합된 형태가 필요하게 되자 유통업계의
패권을 잡기 위한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게 됐다. 특히 두 회사는 "당일 배달"의 새 영토를 놓고 정면충돌하고 있다.
두 회사는 이번 경합을
단순한 인터넷 쇼핑전이 아니라 전면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월마트는 테크놀로지 분야에 돈을 쏟아 붓고,
아마존은 물류센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아마존은 시애틀에서 5년간 시범운영하던 식료품 사업 '아마존 프레시(AmazonFresh)'를 최근 엘에이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확대했다. 아마존은 향후 40개 도시로 확산시킬 계획이다. 식료품 사업은 연간 소매판매액 5680억 달러로 간과할 수 없는 시장이다.
아마존의 식료품 사업 확산에 위협을 느낀 월마트는 온라인 쇼핑몰 강화안을 발표하고, 고객들이 온라인으로 주문한 물건을 월마트 보관소에서 직접
픽업하는 새로운 전략으로 즉각 맞받아쳤다. 그리고 당일 배송 시스템을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확대했다.
뿐만 아니라 닷컴비즈니스에 본격진출하기 위해 월마트랩 (walmartLabs)을 앞세워 실리콘 밸리로 진출했다.
뉴욕타임스는 월마트가 3년전부터 샌 브루노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는데, 올 가을 야후가 있는 서니베일에 또 다른 사무실을 오픈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월마트랩은 올해 토빗(Torbit), 원옵스(OneOps), 테이스티(Tasty), 인키루(Inkiru) 등 4개의 쇼핑관련 신생기업을
사들였다. 이 회사들은 웹사이트 속도를 높이거나 데이터를 분석하는 툴을 개발하는 회사들이다.
월마트는 회사 합병에 그치지 않고 실리콘밸리에서
웹과 모바일 전문가들을 대거 고용하고 있다. 올 여름에만 야후와 이베이에서 근무하던 150명의 전문인력을 고용했다. 월마트랩에는 아직도 수
백개의 일자리가 오픈되어 있다.
시애틀에 본사를 둔 아마존 역시 실리콘 밸리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애플 본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랩126(Lab126)이라는 연구소를
운영한다. 이곳에서 킨들을 개발하고 여러 가지 모바일 기기들을 연구하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인재 스카우트 회사인 탤런트스카이(TalentSky)사는 빅데이터나 이커머스 관련 전문가를 영입하려는 두 회사의 경쟁이 뜨겁다고
말했다.
월마트와 비교할 때
아마존은 온라인 쇼핑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아마존의 올 예상 총 수입액은 744억 달러이다. 반면에 월마트는 총 수입
5000억 달러 중에서 2014년 1월까지의 온라인 예상매출액은 100억 달러로 미미한 편이다.
순 방문자 수 (unique visitors)로 비교하면, 아마존이 1억3300만 명이고 월마트닷컴은 절반 수준인 6250만 명이다.
웰스파고은행의 한 분석가는 "월마트의 미래 모델이 바로 아마존"이라고 말했다.
월마트는 그동안 온라인쇼핑을 수용하는데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요즘 월마트는 4100개의 미국 내 점포와 6200개의 해외점포를 모두 이커머스
체제로 바꾸고 있다. 월마트에 의하면 월마트 점포의 5마일 이내에 미국인의 3분의 2가 거주하며, 아이템 중의 10% 이상이 온라인주문으로
판매된다. 브라질, 중국, 영국에서는 이커머스를 위한 오프라인 사무실을 갖추고 있다.
월마트는 현재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점포에서 픽업하는 시스템, 워싱턴에서는 물품보관소(locker)로 배달하는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또 5개
마켓에서는 당일배달,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과 덴버에서는 식료품 배달을 하고 있다. 월마트측은 아마존처럼 이틀 내 무료 배송 시스템을 최대한
빨리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반면 아마존은 오프라인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전국에 웨어하우스를 짓고 온라인 주문의 선적을 신속히 처리하는
한편 식료품 배달에서도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아마존은 일 년 전부터
세븐 일레븐과 연계하여 물품보관소로 배달하는 시스템을
해오고 있다. 해외지점들은 당일 배달과 식료품 배달 시스템을 빠르게 구축해 나가고 있다.
아마존과 경쟁하기 위하여
월마트는 모바일 기술도 개선 중이다. 월마트는 소셜미디어를 관찰하는 소프트웨어, 온라인 가격을 모니터하고 가격을 낮추는
소프트웨어 등을 운용하고 있다. 또 고객이 매장에 들어오면 인스트어 (in-store) 모드로 변환해주는 모바일 앱을 개발, 찾는 제품이 어디
있는지 안내하고 디지털 쿠폰을 제공하고 있다. 월마트는 아마존에 비해 규모나 수익 면에서는 앞서지만 아직
웹 기능은 뒤떨어진다.
아마존과 월마트 중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온라인 플랫폼과 오프라인 유통체계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기업이
승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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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의 비전통신 애독자 수가
6만8천760명이었습니다.
7월보다 3500명이 는 숫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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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B.S. Hwang |
5000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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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Lee
J Chong
F Chang JJ Cho J
Park YJ Kim
합계 |
$100.00
$20.00
$20.00
$20.00
$50.00 $20.00
$20.00
$2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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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목사(오른쪽)가 지난 7월28일
북한 평양의 봉수교회 앞에서
송민철 봉수교회 목사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아래는 봉수교회 성도들이 축도시간에 기도하는 모습.
지난 7월 28일 북한 평양의 봉수교회. 미국에서 북한 선교활동을 하는 최재영(51) 목사가 강대상에 섰다.
‘사마리아로 간 예수’를 주제로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설교를 했다. 20분간의 설교가 끝난 뒤 김진경
평양과기대 총장과 외국인 교수 등 10여명은 특송을 했다.
재건축으로 예배가 중단된 평양 칠골교회의 교인들도
예배에 참석했다. 최 목사는 북한선교단체 ‘엔케이비전(NKvision) 2020’의 대표다.
최 목사는 “당시 북한 성도들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감사인사를 받고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북녘 땅에서도 일부는 예배당에 나와 신앙을 지킨다는 안도감과 대부분은 이러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최 목사는 “평양의 공식적 기독교 신자가 다 모인 연합예배인 셈인데 참석 교인이 300명 정도밖에 안됐다”며
“그마저도 대부분이 50대 이상이어서 북한에서 신앙의 대가 끊길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16세 이하 청소년의
종교활동은 북한 당국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북한에는 공인교회를 포함해 10여개의 교회가 있지만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기 어렵다고 한다.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도 당국 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 목사에 따르면 평양 제일교회는 북한주민 참석불가 방침으로 현재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고, 평양과기대
채플실에서 외국인 교수가 예배를 인도하긴 하지만 북한의 교수나 학생은 참석할 수 없다. 그는 “개성공단 내
개성교회와 같은 민간교회가 몇 곳 있지만 주민은 갈 수 없다”고 밝혔다.
최 목사는 평양의 가정교회도 몇 차례 방문했다. 그는 “형편이 제일 나은 성도의 집에서 10∼15명 정도가
모이는데 목회자가 없어 장로나 집사가 예배를 인도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심지어 평신도들이 성경만 읽고
예배를 마치기도 했다”고 전했다.
최 목사는 “오경우 조선그리스도연맹 서기장으로부터 북한 목회자는 30명
안팎이고 유일한 신학대학인 평양신학원의 재학생이 12명에 그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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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기 / 건강에
좋은 ‘발끝 부딪히기'
장준봉 국학원 상임고문
건강한 사람도 70대 고비를 넘기면 예외가 있긴 하지만 몸의 어딘가에 이상(고장)이 생긴다. 친구들을 보면
심장질환과 관절 등 하체가 약해진 경우가 많다. 그밖에 당뇨병 고혈압 전립선비대증 등으로 고생한다. 또
불면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병원을 찾거나 약을 복용한다. 그러나 성인 특히 원로들의 신병은 심신수련을 통해 혼자서도
고치거나 예방할 수 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건강에 좋은 수련법을 알게 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한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있다.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 심신수련법의 하나인 '발끝 부딪히기'가 그 중 하나다.
내가 ‘발끝 부딪히기’수련을 하게 된 것은 지난 2005년 늦여름부터였다. 휴가기간 중 3일 동안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집에 돌아와 자동차트렁크에서 골프채를 꺼내 들고 오다 앞으로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고희(일흔) 전후의 나이가 되면 무릎도 약해지고 다리 힘도 떨어진다더니 그게 남의 일이 아니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한참을 낑낑대며 아파트 계단(2층)을 겨우 올라갔다.
마침 내가 원장으로 있던 국학원의 후원기관의 수련지도자 한 분이 ‘발끝 부딪히기’를 해 보라고 권해서 매일
200번씩 하기 시작했다. 200번씩 하는데 소요 시간은 2분정도. 처음에는 그것도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한번 시작했으니 효과를 볼 때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틈이 나는 대로 ‘발끝 부딪히기’를 계속했다.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무릎은 물론이고 다리 힘이 상당히 좋아져 행동도 민첩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매주 수요일에 대학동기생들과 테니스를 하는데 운동을 하고 난 다음날엔 허벅지와 종아리가 당기고 자주
쥐(경련)가 나곤했다. 그 다음날까지도 다리가 뻑뻑해서 애를 먹곤 했다.
그러던 것이 ‘발끝 부딪히기’를 계속하는 동안 3개 여 월이 지난 어느 때부턴가 그런 증상이 모두 사라졌고
잠도 잘 왔다. 또 다리 힘이 좋아지다 보니 골프의 비(飛)거리가 10〜15% 정도(나의 기준) 늘었다.
이렇게 몇 가지 효과를 몸으로 느끼게 되자 '발끝 부딪히기'를 하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발끝 부딪치기'는 많이 할수록 좋다는 말에 200번에서 500번으로 그리고 5개월 뒤에는 1,000번으로
숫자를 차츰 늘려 나갔다. 7년차에 들어간 지금은 잠자리에 들면서 1,000번,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1,000번씩 규칙적으로 '발끝 부딪히기'를 한다. 가끔은 저녁 뉴스시간에 TV를 시청하거나 라디오의
음악을 들으면서 '발끝 부딪히기'를 즐긴다. 이렇게 하면 천천히 해도 하루에 3,000번 정도는 족히 할 수
있다. 이제는 하루라도 발끝 부딪히기를 하지 않으면 몸이 찌뿌듯 하고 뭔가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릎 때문에 ‘발끝 부딪히기’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무릎만 좋아진 게 아니라 그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늘
배변이 잘 안 되어 고생했는데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60대 후반 또는 일흔이 넘은 분들을 만나면 자연히 건강얘기를 많이 한다. 조찬이나 오찬 모임에 나가면
모처럼 만난 분들은 찰색(얼굴색)이 밝아졌고 아주 건강해 보인다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또는 무슨 약을
먹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때마다 ‘발끝 부딪히기’를 한다면서 그 요령을 알려 준다. 처음 들어보는 건강법이라며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는 거냐고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한다.
나는 사범으로부터 배운 대로 ‘발끝 부딪치기’ 요령을 아래와 같이 알려주곤 한다.
"다리와 팔을 편안하게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어께 팔 다리 등 몸의 긴장을 푼다. 입으로 숨을 길게
‘후〜’하고 토해내듯 내쉰다. 그리고 양쪽 발뒤꿈치를 모아 축으로 삼고 발을 벌렸다 모았다 하면서 엄지발가락
모서리를 툭툭 쳐 준다."
요즘은 친구와 지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만나는 지인마다 ‘발끝 부딪히기’에 대해 묻는다. 나는 분위기가
되면 시범을 보이며 설명을 해주거나 발끝 부딪히기’에 관하여 나의 체험담을 쓴 졸고(拙稿)를 e메일 또는
팩스로 보내 준다. 이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은 1,000번을 친다는데 어떻게 세느냐 힘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100번마다 손가락을 곱으면서 세었으나 나중에는 핸드폰이 10분후에 울리도록 시간을 맞춰놓고 ‘발끝
부딪히기’를 한다고 내가 해온 방식을 알려준다. 나의 경우 발끝을 1,000번 부딪히는데 8분 정도 걸린다.
현재까지 ‘발끝 부딪히기’의 요령을 팩스나 프린트로 전해준 친구나 지인들이 2,000여명이 넘는다. 하나
같이 그 효과에 감탄하며 부작용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 친구는 2시간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여행도 가기 어려웠고 밤중에 잠을 자주 깨곤 했는데 요즘은 5시간 정도 숙면을 취한단다. 전립선질환에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친구는 머리가 맑아지고 집중력이 좋아져 머리 회전이 빨라진 것 같다고 했다. ‘발끝
부딪히기’로 혈액순환이 잘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발끝 부딪히기’로 얻은 효과를 몇 가지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가장 큰 소득은 눈이 좋아진
것이다. 하루는 친구랑 바둑을 두기로 한 약속장소로 가려고 자동차를 몰고 나왔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생각해보니 안경을 두고 나온 것이 아닌가. 불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엔 안경을 안 쓰면 잘 보이지 않던 길 건너편에 있는 도로표지판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따로 시력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안경을 벗고 다닐 만큼 시력이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발끝
부딪히기’를 한 지 일 년 반이 지난 시기였다. 7년 가까이 ‘발끝 부딪히기’를 해온 지금은 시력이 더
좋아져 안경을 쓰지 않고 골프와 테니스는 물론 자동차 운전도 한다.
나는 1976년 여름부터 31년간 써오던 안경을 ‘발끝 부딪히기’를 한 지 2년도 안 돼서 완전히
벗어버렸다. 평소 책을 한두어 시간 보면 눈이 흐릿해진다. 그럴 때 ‘발끝 부딪히기’를 300〜500번 정도
하면 눈이 맑아진다. 내가 아는 분들 중에 ‘발끝 부딪히기’를 해서 안경을 벗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
했으나 눈이 좋아졌다는 분들이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선배 중에 90세가 된 원로 한 분이 있다. 80대 초반까지 스키를 타던 분인데 86세부터 잘
걷지 못해 골프를 칠 때 캐디가 공을 앞에 갖다 놓아 주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말도 더듬었다. 나의
권고에 따라 족욕과 '발끝 부딪히기’를 아침저녁으로 2시간 이상 꾸준히 했다. 4년여 동안 이 수련을 해 온
결과 지금은 걸어 다니면서 골프를 칠뿐만 아니라 이제는 말씀도 술술 잘한다.
지난 2009년 8월에 고등학교 동기생 및 후배 동문들이 함께 백두산 관광을 갔다. 중국에서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북파北坡 서파西坡 남파南坡 3코스가 있다. 우리는 서파로 올라갔다. 북파는 자동차로 백두산 정상까지
타고 갈 수 있고 남파는 등산코스로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택한 서파코스는 산 중턱까지 자동차로 이동하고
그곳서부터 1,236개의 돌계단을 걸어서 정상까지 가야한다. 돌계단 한 개의 높이는 우리 지하철 계단의
1.5배나 되어 올라가는 게 녹록치 않았다. 중간에 2, 3분씩 서너 번 쉬고서 해발 2,744m의 정상까지
오르는 데 50분 정도 걸렸다.
일행 중 내가 가장 선배였다. 나머지는 8년 후배인 예비역 장군과 그 동기생들이었다. 이들은 혹시 내가
낙오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뒤따라 올라왔다. 한참 올라오다보니 그들 중 몇 명이 뒤에 쳐져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나이도 적지 않은 선배가 왜 그렇게 잘 오르느냐면서 비결을 묻는다.‘발끝 부딪히기’효과인 것 같다고
하자 그날부터 그들도 배워서 그 수련을 시작했다.
‘발끝 부딪히기’는 걷기나 마찬가지로 다리만 튼튼하게 해줄 뿐 아니라 암의 발생을 예방하거나 악화를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암환자에게 걷기를 많이 하라고 권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발끝 부딪히기’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실내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걷기보다 하기 쉬고 효과도 더
클 것이 라고 생각한다. 걷기도 하고 ‘발끝 부딪히기’도 한다면 상승효과를 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입안이 자주 마른다. 나는 언제부턴가 입안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곤 했다. 그런데 ‘발끝
부딪히기’를 한 지 2, 3개월 뒤부터는 입안에 침이 많이 고이는 현상이 생겼다. 또 늘 코를 풀어도 코
안에 코딱지가 굳어서 나오지 않아 손가락으로 파내곤 했다. 지금은 코가 뻥 뚫려서 기분이 상쾌하다. ‘발끝
부딪히기’로 하체의 찬 물 기운이 위로 올라오고 상체의 뜨거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는 수승화강(水昇火降)현상이
일어나는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발끝 부딪히기’를 하루 1,000번 이상 하면 스트레스와 피로가 풀려 몸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져 퍽
젊어진 기분을 느낀다. 나와 자주 만나는 분들도 인사치레 말이 아니라면서 퍽 젊어 보인다고 인사한다. 골프나
테니스를 하거나 육체적 정신적인 노동을 많이 한 날 밤에 ‘발끝 부딪히기’를 하면 다음날 아침에 몸이
거뜬해진다. 나이가 젊은 원로일수록 그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바 회춘효과라고 생각한다. 50대
중반의 어느 공기업 전직 사장은 ‘발끝 부딪히기’로 부부간 금슬(琴瑟)이 좋아졌다면서 나에게 좋은 수련법을
가르쳐 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적도 있다.
‘발끝 부딪히기’는 뇌경색 당뇨병 신장병 간경화 등에도 효험이 있는 것으로 나는 느끼고 있다. 나는 한 동안
우측 머리가 아파(쑤셔)서 병원에 가볼까 생각 했는데 솔직히 말해 겁이 나 ‘발끝 부딪히기’를 열심히 많게는
하루에 여러 차례 나누어 5,000번이나 했다. 그렇게 한 3개월이 지난 후 머리의 아픈 현상이 없어졌다.
당뇨도 심해서 발뒤꿈치가 터서 갈라지고 발톱이 검게 변하는 등 아팠으나 ‘발끝 부딪히기’를 계속하는 동안
깨끗해졌다. 신장병은 내가 은행에 있을 때 족욕을 해서 치유가 되었는데 그 후 ‘발끝 부딪히기’로 종목을
바꾸었으나 효과는 마찬가지로 좋았다. 간경화는 스트레스 해소로 자연히 치유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발끝 부딪히기’를 하면 우리 몸의 모든 기능이 되살아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내면에 간직된 ‘내부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분은 이 내부의 힘을 자연치유력(自然治癒力)이 라고 한다. 어떤 수련이든지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효과를 많이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발끝 부딪히기’는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나에게는 여러 가지로 효과가 남달리 크다고 생각한다.
‘발끝 부딪히기’는 앉아서도 할 수 있고 누워서도 할 수 있다. 나는 주로 잠자리에 들 때와 일어나기 전에
누워서 한다. 내 경험으로는 누워서 하면 허리와 어깨가 펴지고 또한 눈을 지그시 감고함으로 명상효과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발끝 부딪히기’ 등 그 밖의 수련을 심신수련법(心身修練法)이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을을
함께 단련(鍛鍊)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발끝 부딪히기’를 지속적으로 해오면서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 운동이나 수련도 이것저것 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으면 한 가지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해줄 때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발끝 부딪히기’로 내 몸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걸음걸이 등 움직임이 나이에 비해 예전보다
더 민첩해졌다. 나의 이런 체험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도(道)를 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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