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3,  2014

 

 
 
 
 

 

 

 

 

 
 

 

 

 
 

 

 
 
 
 
 

 

 

 
 
 

 
 
 
 
 

 

<주변인과 문학> 편집인
보광고 교사

 
 

서시(序詩)

 

내 영혼의 밭에서 캐어 온
잡티 하나 없는 백토 한 짐으로
구워 낸 그릇들이
어느 부잣집 서재에 놓이는
장식품이 될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느 집 저녁 밥상 위에 올라
오순도순 이야기
꽃 속에
밥과 국이
한 그릇의 사랑으로 담겨 있는
사그릇 한 벌로 익었으면 한다.
내 영혼의 밭에서 캐어 온
붉디붉은 황토 한 달구지로
구워 낸 그릇들이
먼 훗날 박물관 전시실에 놓이는
골동품이 될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느 양지바른 장독대 한 구석을 잡아
옹기종기 햇살 속에
간장도 된장도 익히고
고추장도 익히는
크고 작은 옹기로 익었으면 한다.

 
 

 
 
 

 

 

 

 

 

 

 

 

 

 

서울시, "동대문교회 존치해 보자" 전격 선회

박원순 시장과 존치 위한 실무팀 구성해 협의해 가기로

감리회와 의견 일치.

 

비전통신이 깊이 있게 다룬 바 있는 서울 동대문교회 철거 이전 반대 기사와 더불어 뜻있는 교회 관계기관과 교인들의 기도에 힘입어 역사적인 동대문교회 건물이 보존 될 희망을 보게 되었다.

 

동대문교회 철거가 시작되고 이전을 반대하는 감리회 성도들이 촛불 기도회를 이어 가는 중에 동대문교회의 존치(存置)가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커졌다.

 

합의서를 작성한 수준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지만 서울시가 동대문교회의 역사성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며 흥인문 언덕에 동대문교회를 존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서울시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실무팀을 구성해 협의해 가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의견 일치'는 '서울특별시 교회와시청협의회(이하 교시협)'가 주최한 '서울 시민을 위한 기도회' 직후 노화산 목사(신월중앙교회)의 주선으로 전용재 유지재단이사장, 김영헌 서울연회 감독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설득하여 이뤄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자리에서 두 감독이 시장에게 동대문교회의 존치를 주장하자 서울 시장은 "동대문교회에 가 보니 건물 등을 볼 때 역사성이 없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영헌 감독은 "건물이 역사가 아니라 동대문교회 자체가 역사"라며 "헐버트, 김상옥, 손정도 목사 등 한국 독립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인물들을 배출한 교회가 아니냐. 현 자리에 교회가 있어야지 수원으로 내려가 동대문교회 간판을 건다고 해서 역사성을 공감받겠느냐"고 현 위치 존치를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박원순 시장이 주무부장을 불러 대화를 이어 갔고 동대문교회의 존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전용재 이사장과 김영헌 감독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서울시가 추진하는 공원 지하(대로에서 보면 1층)에 NCCK와 협조하여 기독교박물관을 만들어 기념관과 예배당을 마련하고 지상에는 여명의 종을 위한 종각을 설치하고 1910년 당시의 동대문교회의 원형을 복원하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서울시는 이 구상을 가지고 문화디자인부장을 통해 문화재청과 협의를 시작해 보겠다고 했으며 보다 구체적인 진행을 위해 양자가 실무 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감리회는 이용윤 부장, 이강전 장로(동대문교회보존위), 한휘언 장로 등으로 실무 팀을 구상하여 오는 2월 4일 오후 2시에 서울연회 감독실에서 실무 접촉을 갖기로 했다.

 

김영헌 감독은 이러한 성과에 대해 "그동안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나왔지만 이제 동대문교회 존치의 물꼬가 텃다.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다만 "서울시장이 동대문교회 존치에 소요되는 예산을 감리회가 감당해야 한다는 조건을 어떻게 실현시킬지가 관건"이라고 했다.

 

김영헌 감독은 "땅은 이미 등기가 서울시로 넘어갔으니 서울시 것으로 하고 감리회에 영구 임대하는 방안도 있다고 서울시가 제안했다"며 실무 접촉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 볼 것이라고 했다.

 

이 외 이미 광교에 부지를 계약하고 이전을 추진 중인 동대문교회와의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문화재청으로 부터 인가를 받아 내야 하는 산도 넘어야 할 것이고 했다.

 

존치를 위한 기도회를 이어 가고 있는 한휘언 장로는 그럼에도 "박원순 시장께서 감리교회의 강한 의지를 받아들여 동대문교회 존치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는 "아직도 조정 연구하여야 할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감리교회의 강한 의지로 큰 틀은 합의를 본 것"이라고 평가했다.

 

 

 

 

 

 

말라위 여인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럽무대에 선 성악가
말라위 빈촌 루수빌로 뮤직센터 원장이 되다... 김청자 .....

 

 

 

Lusubilo Music Center

 

한국과 독일에서 성악가로 활동하다 교수직을 은퇴하고

말라위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김청자 교수.

 

첫 번째 돌은 믿음
두 번째 돌은 사랑
세 번째 돌은 열정
네 번재 돌은 훈련
다섯 번째 돌은 감사하는 마음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말라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2010년 9월에 아프리카 말라위로 떠나
학교도 많지 않은 곳에 뮤직센터를 지었습니다.

 

이들이 음악을 시작한지는 2~3년이 되지 않았지만,

학생들과 경찰들까지 단원들의 구성이 다양하고
밴드 결성 후 말라위 전국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는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게하고,
주변의 도움으로 청소년 지원센터도 건립해서 아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그릴 수 있는 곳
한국의 후원자들이 보내 준 옷도 보입니다. 

 

 

 

환갑을 맞이할 때

교수 퇴임 후 어떻게 살지 고민 후 준비 끝에 실행에 옮겼답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고,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학교도 신축하고, 남은 여생을 이곳에서 살기고 다짐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제가 많아
스스로 독립을 위해 카톨릭 단체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간호보조원으로 건너갑니다.

 

 

그녀의 열정에 독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음대에 진학하고,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녀는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합니다.

 

김청자 교수(1944년생)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

 

 

 

2010년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퇴임하고,
한국의 집을 처분하고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면 미련이 남기 때문입니다.

 

2011년 7월 자신의 한국 제자들이 이곳까지 와서

학생들을 가르쳐주고 뜻깊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뮤직센터에서 음악을 배우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도 찾아오고,
학생들이 많아지면 기숙사도 지을 생각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뮤직센터의 학생을 김청자의 도움으로 한국의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외국인 우수인재 장학생으로 공부하러 보내기도 한답니다.

 

 

노란색 옷의 왼쪽 람바니와 빨간 옷의 오른쪽 필립
이들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성공해서 이들이 다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난 설날 아침에는 말라위에 혼자 있지만,
뮤직센터 학생들을 초대하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솥단지에 갈비찜 등의 음식을 장만해서 

학생들과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 학생 둘을 유학시키기 위해서

한국어 공부를 준비시키는데요
말라위 미래를 위한 투자와 한국과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청자 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인생 뿐아니라

제 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지도

다시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도전을 받습니다.(언)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9천명의 고아를 돌보는 현지 가톨릭 공동체에 합류해 말라위 아이들을 위한 봉사로 인생 2막을 열었다.

 

김 교수는 그 동안 예술가로 누린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제는 그 감사함을 되돌려줄 때"라며 "새로운 삶,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아프리카로 가기로 했다.

 

그가 아프리카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된 것은 2005년 안식년 때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부터. 노후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유럽, 미국, 아프리카 3대륙을 여행한 그는 아프리카의 매력에 푹 빠졌고, 한국에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돕기에 나섰다.

 

"그때부터 매년 두 차례씩 아프리카를 방문했어요. 제가 가톨릭 신자다 보니 선교 현장을 방문해 크고 작은 숙제를 받아왔죠. 우물을 파고, 병상을 마련하고, 학교를 짓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시작했어요."

 

다행히 주변의 뜻있는 여러 사람이 동참했고, 우물을 파는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1억2천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모아 아프리카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말라위로 떠났다. 지금 사는 집을 내놓은 그는 집을 처분한 돈 2억원 가량을 아프리카와 말라위를 위해 기부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아프리카와의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떠날 결심을 했어요. 멀리서 살면 구체적으로 뭐가 필요한지 안보일 수도 있으니까, 곁에서 가까이 살아야겠다 싶었죠."

 

잠비아, 모잠비크,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이제껏 방문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 중에 특별히 말라위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어느 곳보다 도움이 절실한 곳이기 때문이다.

 

"말라위는 정말 가난하고, 열악하고, 고아가 많은 곳이에요. 하지만 사람들 성품이 온유하고, 평화로운 곳이기도 하죠.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어요. 한 나라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렸으니까요."

 

그는 현지에서 학교를 짓고, 교사들을 지원하고, 장학금을 마련하고, 우물을 파는 데 필요한 재원 마련에 도움을 줄 후원자를 모집하는 한편, 아이들도 직접 가르치고 있다.

 

"음악과 춤이 그곳 사람들 생활에 자연스레 녹아 있어요. 음악적으로도 기여할 일이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알아요? 그곳에서 제2의 김청자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죠."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그는 고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제가 많아 스스로 독립을 위해 카톨릭 단체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간호보조원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아우구스부르크의 레오폴드 모차르트음대, 오스트리아의 빈국립음대에서 공부한 뒤 1970년 한국 성악가 최초로 유럽 무대에 데뷔해 25년간 오페라 본고장에서 활약한 '원조' 해외파 성악가가 되었다.

 

그는 "음악가로서의 꿈을 다 이뤘으니, 이제 제가 아프리카 아이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며 "육체의 고향이 한국, 정신의 고향이 독일이라면, 이제 제 영혼의 고향은 아프리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편리함과 동떨어진 생활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요. 하지만 조금만 그 불편함을 감수하면 여러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니, 기쁩니다."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몸과 마음으로 함께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떠나는 저를 위하여, 이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총장님을 비롯한 모든 교수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주시는 학부형님들, 또 사랑하는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악과 학생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에도 쓰여 있듯이 우리 인간의 삶에는 시작할 때가 있고 끝날 때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시작할 때는 잘 모르던 것들을, 끝날 때가 되는 오늘에서야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15년 전, 초빙교수로 와달라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초청은,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독일에서 보내고 있던 저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 준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50대에 접어든 저는 한국의 재능 있는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은 욕망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돌아와 여러분들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한국최고의 예술대학에서 재능과 열정으로 넘치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우면산이 나의 산책길이 되어준 이 아름다운 예술의 전당 속에서 일 할 수 있었던 저는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Steinway 피아노와 오디오, 비디오 시설까지 잘 갖춰진 아름다운 교수실에서 재능 있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마다 얼마나 자주 감격하고 감사했던지요! 우리는 진정 풍요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 누리는 것이며,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최상의 것을 누리는 것에 감사해야 하며 이 좋은 환경에서 얼마나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 동안 저는 여러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총장님을 비롯해 음악원 교수님들과 교직원님들, 학부형님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걸어준 성악과 교수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제가 열정과 원칙만을 앞세워 혹시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께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용서를 청합니다. 저도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모든 상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기쁨과 감사로 40년 음악인생을 달려왔고 저의 꿈을 이루었기에 그 큰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열정과 재능, 또 시간과 물질을 아프리카 말라위의 고아들을 위해 쓰려고 올7월말에 다시 한국을 떠납니다.

 

저의 “순례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이미 이 땅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을 마음에 담고 떠납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함께 하시는 후원회원님들, 그 동안 안녕하신지요?

 

저는 지금 아프리카 말라위 북부 지역 카롱가라는 마을에서 첫 번째 소식을 드립니다.

 

저는 7월26일 한국을 떠나 독일에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아들 다니엘의 왕성한 연주활동을 지켜보는 엄마로서 누리는 기쁨도 맛보았고, 또 독일에 사는 동생도 만나서 지쳤던 몸과 마음을 좋은 에너지로 충전 시킨 후, 8월 말에는 5년 전 부터 영적으로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아프리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여 한인 카톨릭 공동체에서 머물다가, 어제서야 최종목적지인 말라위 카롱가에 도착하였습니다.

 

말라위의 수도 릴롱웨에서도 8시간이나 자동차를 타고 와야 하는 먼 곳이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 같은 말라위 호수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피곤한 줄 모르고 긴 여행을 마쳤습니다. 7월부터 시작된 긴 여정이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살 곳은 마리아니스트 수도회의 수사님들이 살고 계신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인데, 루수빌로의 책임자이신 미국인 피터 선교사님의 배려로 오게 된 이곳은 루수빌로 공동체에서 약 8km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현재 고등학교와 기술학교를 운영하시는 케냐에서 오신 흑인 수사님들의 공동체가 있는 곳이고, 제가 들어온 집은 미국인 자원 봉사자들을 위해 3년 전에 지여진 집인데, 프로젝트가 끝난 올 8월에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마침 빈 집에 제가 세를 들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얼마나 완벽한 타이밍인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루수빌로 공동체의 어린이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기쁨에 찬 환영 노래를 들었고, 베아트리스 수녀님과 피터 선교사님은 제가 다시 살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감동으로 저를 힘껏 안아 주셨습니다.

 

저의 가슴도 터질 듯이 기뻤습니다.제가 살 집에 들어오니 마음이 평화로웠습니다. 양지에 있었던 나의 집과는 전혀 다른 공간들이지만, 아직은 자주 끊어지지만,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고 인터넷이 되는 특혜 받은 곳입니다.

 

아직 이삿짐과 구호물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집수리 좀하고 꾸며놓으면 카롱가에서는 제일가는 호화주택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녁을 제 이웃이 되어주실 수사님들의 초대로 풍성한 식사를 하고 난 후 새집에 들어오니 비로서 내가 광야에 홀로 서있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눈물은 결코 외로워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눈물은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정든 집을 떠나왔더니 이곳에 나를 위하여 더 좋은, 영혼을 위한 집을 마련해 놓으신 그분의 사랑에 가슴이 벅찼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부터 수사님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수도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일이 우선이 아닌, 기도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니 제가 바라던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그 힘으로 제가 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아프리카에서의 나의 삶은 영혼을 위한 끝나지 않는 피정이 되어 질 것이며, 육체를 위해서는 끝나지 않는 유익한 다이어트를 실행 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곧 은총입니다.

 

또 나의 정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날마다 숨 쉬며 감사의 찬양으로 한없이 크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시고 신뢰해주시는 후원회원님들의 성원에 감사하는 기도가 멀리 아프리카 땅에서도 울려 퍼짐을  기억해주시고 기도와 물질로 지속적인 지원을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9월 10일 말라위 카롱가에서 김청자 아녜스 드림 

 

 

 

 

 

 

 

 

 

 

카페를 연다는 것은, 마치 집을 하나 새로 짓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나도 10년 전에 양지에 전원주택을 지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갈 가구와 장식품을 사들이며 집안을 아름답게 꾸며가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흥분시키는 일인지, 경험해본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요즘 카페를 열고 난 후, 나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컴퓨터 앞에서 쏟아 붓고 있다. 조금씩 변해가는 카페의 모습을 보며, 더 많이, 더 새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컴퓨터에 거부반응을 갖고 있던 사람 중의 하나로, 이메일과 사진 저장하는 일정도 밖에는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위한 일을 시작하고 보니 컴퓨터 없이는 이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어 급히 카페를 열게 된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더 많이 준비해서 멋지게 완성된 카페나 홈페이지를 열고 싶었다.

 

그러나 완성이라는 단어는 우리 삶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 그저 우리는 하루하루 완성을 향해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주어진 환경에 이끌려 나는 이제 컴퓨터와 많이 친해지고 있다. 정말 다행한 일이다.

 

아프리카에서 한국에 나의 활동 소식을 전하려면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지금 쌓아야 하며 꾸준한 연습을 통해서만이 컴퓨터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사실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 아니 더 젊은 50대의 후배들도 컴퓨터에 무관심 내지 무능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나는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이 다음카페에 카페를 열었다고 모든 친지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아침 잘 알고 지내는 후원자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그분은 내가 아프리카를 위해 모금 할 때 마다 동참해 주신 고마운 분이다.

 

그분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카페를 여셨다면서요.

어디에다 카페를 여셨어요? "

 

그분은 조금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내가 아프리카를 위해 후원회를 모집하고 모금을 하니 돈이 필요해서 커피 마시는 카페를 열었다고 생각 하신 것이었다.

 

나는 최근에 그렇게 웃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웃음이 폭발했다. 오늘 하루 종일 그 전화만 생각하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IT강국이라고 자랑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달나라 이야기다. 나의 소망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나처럼) 컴퓨터와 친해지면 좋겠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편리함을 제공해주는 큰 매력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독일에 있는 아들과의 대화가 필요해서 메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나를 카페 운영자로 만들어줬다. 나는 이 도전을 받아드려서 또 한 번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떠나 보려고 한다.

 

나의 사랑하는 후원자님들이 "김청자의 카페'를 강남이나 명동에서 찾지 말고 다음(daum)이라는 공간을 통해 찾아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들의 특별한 만남의 장소, 우리 카페를 열어주시느라 수고해주신 운영진들과 카페지기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 멋진 우리들의 집을 함께 꾸며 나가기를 바란다. 

 

 

 

 

 

 

 

 

 

 

 

 

 

 

말라위 루수빌로 어린이들은 식사 전에 이렇게 손을 씻는다. 손으로 밥을 먹으니까.

 

 

 

성탄절이다.

루수빌로 고아원에 소고기와 쌀을 사서 맛있는 성탄절 음식을 준비했다.

예수님께서 차려주시는 특별한 밥상이다.

아프리카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 어느 신부님을 통해

한 후원자님이 후원금을 넉넉히 보내오셨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성탄절을 기해

루수빌로 고아원 70명, 마키홤바 마을  100명

윌리로 마을 200명 아이들을 위해 쌀밥과 소고기로 성탄절 밥상을 차렸다.

 

 

맛있게 밥을 먹는 천진한 어린이들

 

 

밥상을 기다리는 모습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동생을 통해 독일 국제 부인회에서 보내온 티셔츠,

루수빌로 고아원 아가씨들이 더욱 예뻐 보인다.

 

 

식사 후에는 독일에서 보내온 티셔츠와 묵주를 선물로 나눠줬다.

아이들 티셔츠 숫자가 부족해서 묵주기도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특별상으로 티셔츠를 나누어주니 불평이 없었다.

 

 

독일에 사시는 형제님 한 분이 묵주 100개를 손수 만들어 기증해주셨다. 

 

 

 

 

 

 

 
 
 
 

 
 
 

 

사진:팀 체스터(Tim Chester)

 

영국 복음주의 교회운동가인 팀 체스터(Tim Chester)는 “친밀한 식사를 함께 나누는 밥상이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쓴 책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에서 체스터는 ‘식사와 복음’이라는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식사가 그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생명과 베풂, 섬김과 감사의 의미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교회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밥상에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읽어 보면서 이런 답을 얻게 되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밥상...
경계를 뛰어넘어 주변인을 품는 밥상...
환대와 공동체를 경험케 하는 밥상...
자연과 타인에게 의존적인 존재임을 고백하게 하는 밥상.....

 

이 같은 질문은 내 평생에 밥을 먹고 살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격이었다.

 

음식/식탁은 사실 교회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오던 주제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성만찬(holy supper)을 제정하신 이후, 기독교는 음식 / 그것도 함께 나누는 식탁을 매우 중요한 신앙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겨왔다.

 

그렇다면 음식/식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자신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인간이 매일 음식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음식을 섭취해야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데,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이란 동식물이 그들의 생명을 희생하지 않고는 공급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가 오늘도 섭취하는 음식은 대부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먹기 좋게 요리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음식/식탁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조차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지속적인 은혜를 공급받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의 재미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내일 먹어야 할 음식을 오늘 먼저 먹어둘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늘 배를 든든히 채웠다고 하더라도, 내일이면 인간의 몸은 또 다른 음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음식을 미리 먹어 둘 수도 없고, 밀린 음식을 나중에 보충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하루하루의 음식을 매일 섭취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인간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 음식과 식탁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다.

 

음식/식탁은 인간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극명하게 보여주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그 위에 한 층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팀 체스터는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A Meal With Jesus / Discovering Grace, Community, and Mission around the Table)에서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을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분으로 그린다.

그는 예수님께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라”(눅 7:34)는 성경구절에 주목하면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셨던 식탁을 곧 은혜, 공동체, 소망, 선교, 구원, 그리고 약속이 구현되는 자리로 묘사한다.
 

이처럼 음식/식탁은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정수가 드러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베풀고 참여하는 밥상/식탁이 언제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의 식탁이 위선 교만의 현장이었듯, 기독교인들의 식탁 또한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복음의 정수가 사라져버린 채 종교인의 위선만이 남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팀 체스터는 성경을 통해 밥상의 의미를 더욱 구체화하였다.

 

인자(人子)는 와서 먹고 마셨다
1. 밥상은 은혜가 구현되는 자리다: 누가복음 5장
2. 밥상은 공동체가 구현되는 자리다: 누가복음 7장
3. 밥상은 소망이 구현되는 자리다: 누가복음 9장
4. 밥상은 선교가 구현되는 자리다: 누가복음 14장
5. 밥상은 구원이 구현되는 자리다: 누가복음 22장
6. 밥상은 약속이 구현되는 자리다: 누가복음 24장

 

교회로 돌아가 보자.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음성.

[식사하셨어요? 밥 한술 뜨고 가세요.]

밥을 먹자는 것은 이야기 좀 하자, 교제하자는 의미다. 배고픈 배를 단순하게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교회에서 밥을 나누는 행위는 마음이 오가는 사랑의 표현이다. 관심이다. 밥을 나누는 교회 공동체는 그래서 아름답다.

 

함께 먹는, 밥

 

가정에서 예배 드리는 부산 로고스교회 주일 풍경은 한마디로 ‘잔치’다.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의 손에는 성경·찬송가와 함께 뭔가 하나씩 들려 있다. 오전 11시 성도들은 전 주에 전달받은 성경 본문을 함께 묵상하고 말씀을 나눈다.

김기현 목사가 10분 정도 메시지를 전하고 나면 12시30분쯤 된다. ‘밥상’을 차린다. 그리고 각자 들고 온 것들을 상에 펼쳐 놓는다. 함께 나눌 음식이다. 밥과 국은 교회에서 준비한다.

로고스교회는 다른 교회처럼 주일 예배를 드린 뒤 모두 함께 밥을 먹는다. 다소 번거로울 것 같은 이 사역에 대해 김 목사는 “교회 공동체이기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뭔가 일을 진행하실 때 이벤트를 열지 않으셨다. 같이 식사하셨다. 밥상에서 함께 음식을 먹다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귀 있는 자는 구원을 받았다.

교회는 밥상 공동체다. 영의 양식 ‘말씀’과 일용할 양식 ‘밥’을 나누는 곳이다. 김 목사는 “그러면 성도들은 식사를 같이 하는 ‘한솥밥 식구’가 된다”며 “주일에 못다한 이야기는 주중에 만나 밥을 먹으며 교제를 계속 이어간다”고 했다.

 

함께 만드는, 밥

 

교회의 사회봉사를 의미하는 ‘디아코니아’는 헬라어로 ‘식탁에서 시중드는 일’을 뜻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식당 봉사는 여성 성도의 고유 권한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남성 성도, 남성 사역자들이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봉사하는 곳이 눈에 많이 띈다.

 

경기도 평택 제자들루터교회(김경회 목사)의 주일 식당 풍경은 여느 교회와 많이 달랐다. 예배가 끝나자 남성 성도들이 식당으로 들어와 노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과 홀에서 일을 찾아 한다. 남성 성도들은 익숙하게 밥과 반찬을 그릇에 담아 성도들에게 즐겁게 배식했다.

목장별로 순번이 정해져 있는 식당 봉사는 처음에는 여자 목장만 했다. 그러다 남편들이 동참해 아내들의 수고를 덜어주고 봉사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함께 만나는, 밥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의 일터로 찾아가셨다. 바닷가로 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마 4:17∼22).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면서 이처럼 직장을 찾아 심방하는 경우도 있다. 또 가족이 집에 다 모이기 어려워지면서 1대 1 심방이 늘어나는 분위기다. 목회자가 심방을 하게 되면 말씀을 나누고 기도한 뒤 식사를 한다.

 

경기도 오산 대한성공회 제자교회 김장환 사제는 교인들의 일터를 자주 찾는다.

김 사제는 “가게나 회사에서 교인들을 만나면 더 가깝게 말씀을 나누고 식사 교제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성도가 평일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면 직장을 방문해 말씀을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한다”며 “식탁 교제를 통해 더 친밀해지고 그 안에서 신앙 고백이 더욱 풍성해진다”고 말했다.

 

장 칼뱅은 바울의 말(행 20:20)을 인용해 집집마다 다니며 설교하라고 했다. 직장심방은 그 자체가 찾아가는 설교이자 교제다. 목회자는 직장심방을 통해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상담할 수 있다. 시간을 내기 어려운 교인은 맞춤형 설교를 듣고 기도제목을 나누면서 ‘신앙적 영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능력 있는 밥상을 차릴 수 있느냐는 문제를 안고 사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장재언) 

 
 
 

 

 

 

 
 
 
 

 
 

단파 라디오로 북한 성도 신앙교육하는 ‘북방선교방송’

 

‘큐’ 사인이 떨어졌다.

 

“북녘에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드러운 음성의 권모(K신학대) 교수가 인사말을 건네면서 9시간짜리 ‘설교학’ 강의 녹음 작업이 시작됐다. 스튜디오에 들어서기 전, 그는 몇 가지 녹음 수칙을 머릿속으로 체크했다.

 

‘천천히 말한다’

‘특정교단 교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영어를 쓰지 않는다’

‘정치적 언급을 삼간다’

‘반복해서 설명한다….’

 

서울 관악구 봉천로의 한 낡은 빌딩 4층. TWR(Trans World Radio) KOREA(북방선교방송) 사무실. 3.3㎡(1평) 남짓한 녹음 스튜디오 안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 양육 프로그램 방송을 녹음하고 있다.

 

1995년 9월 출범한 북방선교방송은 단파라디오 방송으로 북한의 지하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20년째 전파를 쏘아올리고 있다.

 

본사 격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TWR(총재 로렌 립비)은 1954년 설립돼 현재 230개 이상의 언어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국제 방송선교단체다.

 

북방선교방송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복음방송인 극동방송과 구별된다.

극동방송이 북한 내 새 신자를 위한 복음 전파에 비중을 둔 선교방송이라면 북방선교방송은 기존 북한성도들의 양육·훈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동방송이 중파를 이용해 24시간 방송하는 데 반해 북방선교방송은 단파를 이용해 매일 밤 75분간(오후 10시45분∼자정) 방송한다. 단파는 주로 국경을 넘어 넓은 지역까지 포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서울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방송은 태평양 에 있는 TWR 송출소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다시 북한으로 전파를 쏘면 북한 성도들이 단파 라디오를 이용해 방송내용을 듣는 것이다.

 

북방선교방송 대표 성훈경(47) 목사는 “모퉁이돌선교회자유북한방송 등 한국어 대북 단파방송만 현재 10여 개에 이른다”면서 “단파 방송이 북한에 정보를 보내는 효율적인 수단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 목사는 어른 손바닥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 단파라디오 신·구형과 이어폰, 소형안테나, 방송프로그램 목록이 적힌 소책자 등을 각각 보여줬다.

 

지금까지 북한에 보내진 단파 라디오는 대략 3만대. 하지만 북한 성도들이 들키지 않기 위해 땅속 등에 보관하는 경우가 많아 3분의 1 정도는 고장 났을 것으로 그는 추정했다.

 

편성 프로그램은 강해설교와 여성 및 어린이 주일학교 프로그램 등 4∼5가지.

 

정말 북한 성도들이 이 방송을 듣고 있을까?

 

성 목사는 “수년 전 어린이 프로그램을 편성했다가 중단했는데, ‘어린이 방송이 왜 없어졌느냐’는 청취자 반응을 다양한 루트로 접한 뒤 재편성한 적이 있다”는 사례로 답변을 대신했다. 적어도 꾸준히 듣고 있는 청취자와 연락책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북방선교방송은 현재 1만원 후원자 1000명을 모집 중이다. 

 
 
 
 

 

 

 

 

 
 
 
 

 
 

 
 

 
 

실력도 신앙도 ‘에이스’ 커쇼 “믿음으로 보면 세상이 달라져”

 

‘커쇼의 어라이즈’ 출간 미주 교계서도 열독 바람

 

프로야구 LA 다저스팀의 류현진 투수는 ‘괴물’로 불린다. 그만큼 잘 던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더 괴물 같은 실력을 가진 선수가 같은 팀에 있다. 바로 클레이튼 커쇼다. 커쇼는 2011년 사이영상을 수상한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다.

 

최근 그가 쓴 책 ‘커쇼의 어라이즈’가 한인사회와 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야구팬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소문이 나면서 이 책을 구해 읽는 열독 바람까지 일고 있다. 커쇼가 그의 아내 앨런과 함께 집필한 책이 지난해 한국에서 번역돼 출간되면서 이제 미주 한인교계에서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커쇼는 단지 야구 잘하는 선수만이 아니다. 빼어난 야구 실력만큼이나 신실한 신앙, 성실한 훈련 자세 그리고 훌륭한 성품도 인정받고 있다. 류현진 선수 역시 커쇼를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배울 점이 많은 선수라고 여러 차례 극찬한 바 있다.

1988년생으로 올해 나이 26세에 불과한 커쇼가 야구 인생과 일상의 삶에서 모두 모범적인 열매를 거두는 비밀은 그의 신앙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커쇼는 텍사스 달라스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신앙심을 키워왔다. 그의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골로새서 3장23절을 읽으면서 일어났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이 구절은 사춘기 커쇼의 중심을 잡아줬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야구 실력을 키우기 위해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그의 신앙적 결단은 버스 바닥에서 쪽잠을 자며 수백 마일씩 장거리 이동을 감수하던 마이너리그 시절에도 절대적인 힘이 됐다.

 

하나님은 커쇼 인생에서 늘 든든한 후원자였다.

커쇼와 아내 엘런은 지난 2007년 아프리카의 잠비아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첫 선교활동을 시작한 이후 2011년에는 아예 ‘커쇼의 도전’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커쇼가 삼진을 잡을 때마다 100달러씩 기부하는 돈으로 아프리카 어린이들과 미국 내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자선활동을 벌이고 있다.

 

커쇼는 “아내와 함께 떠난 아프리카 여행은 놀라운 경험이었고 잠비아 친구들 및 고아들과 같이 보낸 시간이 가치관을 통째로 바꿨다”고 고백했다.

지난 2012년에는 사회 공헌과 모범에 뛰어난 활동을 벌인 선수에게 수여하는 ‘로베르트 클레멘테 상’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브랜치 리키 상’을 수상했다.

 

커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 아내는 크리스천이다. 당연히 기독교인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세계를 이해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 보인다”

 

엄청난 연봉을 받는 최고의 메이저리스 선수이지만 그가 갖는 ‘돈 철학’도 믿음의 근간을 떠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눈이 변화되면 인생에서 돈과 지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그 안에 머물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게 되고 인생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치열한 경쟁을 벌어야 하는 프로야구 선수로서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경험도 자신의 책에서 털어 놓았다.

 

“지난 2009년 시즌이 시작됐을 때 내 능력에 대해 고민했다. 우리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능력과 관계없이 한결같이 사랑하신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면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를 위해 쓴 시

 

날마다 묵은 음식을 새 음식처럼

차려 주는 사람 어디 있을까?

사철을 두고 봄 여름 가을 겨울

헌 옷을 새 옷처럼 챙겨 주는 사람 어디 있을까?

('아내는 이런 사람이다' 부분)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시 부문 심사위원이며 공주문화원장인 나태주(69) 시인이 아내를 위한 신작 시집 '울지마라 아내여'(푸른길 펴냄)를 출간했다.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 ‘풀꽃'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흔히 ‘풀꽃 시인'으로 불리는 작가로, 새 시집에는 그가 자세히 보고 오래 지켜본 대상, 그의 곁을 오랫동안 지킨 아내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집에 밥이 있어도 나는

아내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 사람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아내는

서울 딸네 집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면서

반편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완성’ 전문)

 

올해 내 나이 68세

아내는 64세

 

나는 아내가

밥을 줄 때만 좋아하고

 

아내는 내가 용돈을

줄 때만 좋아한다

 

그런 우리는 서로

개밥을 준다고 말을 한다.

(‘개밥’ 전문)

 

나 시인은 앞서 사랑이야기를 모은 사랑 시집을 출간한 바 있지만 이번에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따로 묶어낸 것은 “아내에 대한 예의요 신의요 또 의무”라고 그는 말한다.

아내는 “인생의 동행인이며 삶의 동지이며 가족이며 아이들의 모친”이며, “더 나아가 나의 보호자이며 마지막 기댈 언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서 페북 로그인하면 개인정보 노출

트위터로 로케이션 업로드땐 위치·ID 드러나

 

스마트폰을 통하여 개인의 정보가 새나가고 있다. 커피숍이나 식당에서 무료 와이파이로 페이스북을 로그인하면 성별, 이름, 나이 등 개인정보가 모두 수집된다. 트위터로 로케이션을 업로드하는 순간 사용자의 위치와 ID가 수집된다. 소셜미디어로 로그인을 하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의 와이파이 신호를 통하여 이용자의 동선이 모두 추적된다.

월스트릿저널은 스마트폰의 위치신호를 수집하는 토론토 소재 두 기업의 활동을 중심으로 개인의 위치정보가 어떻게 수집되고 있으며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를 밝혔다.

 

틴에이저 학생들이 카페에서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 검색에 열중하고 있다.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할 때 이용자의 개인정보가 수집된다.

 

◆턴스타일 솔루션스 (Turnstyle Solutions Inc.)

 

스마트폰의 와이파이 신호를 추적하여 스마트폰 소유자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선도기업은 턴스타일 솔루션스이다. 창업한지 1년 된 이 기업은 캐나다 토론토 다운타운지역의 반경 0.7마일 내에 200여 개의 센서를 설치하고 쇼핑객의 움직임을 추적한다.

카드 한 벌 크기의 센서는 스마트폰의 와이파이에서 방출되는 신호를 취합하여 약 200만 명의 일상생활을 낱낱이 기록한다. 요가 스튜디오에서 식당으로, 커피숍으로, 호텔로, 나이트클럽으로 이동하는 것을 모두 모니터한다.

 

이렇게 취합된 정보는 기업이나 로컬 비즈니스의 마케팅 도구로 사용된다. 한 예로 토론토에 있는 한 아시안 레스토랑은 턴스타일 솔루션스를 이용하여 고객들의 신상을 알아냈다. 한 마디 설문조사 없이 고객의 한달 간의 행적을 알아냈다. 170명이 클럽에 갔으며, 250명이 헬스장에 갔고, 216명이 부촌인 요크빌에서 왔다는 것을 파악했다. 레스토랑 업주는 250명의 고객이 헬스클럽에 다닌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식당로고가 새겨진 홍보용 탱크탑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턴스타일 솔루션스는 스마트폰의 와이파이 신호를 추적하여 그 사람들이 어디에 거주하며,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서 쇼핑하는지를 분석해 낸다. 수집되는 정보에 이용자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커피숍 등 공공장소에서 프리 와이파이를 이용하여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면 이름을 포함하여 나이, 성별까지 개인정보를 고스란히 수집할 수 있다. 수집된 신호의 동선을 분석하여 그 사람이 영화광인지, 재즈광인지, 요가를 좋아하는지 알아낸다.

 

한 식당에서는 턴스타일 솔루션스의 정보를 이용하여 고객의 60% 이상이 30대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DJ를 고용하여 매주 금요일마다 80년대의 음악을 틀어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행인들이 걸어가면서

휴대폰을 이용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와이파이 신호를 통하여

이용자들의 동선이 모두 추적된다.

 

◆바이어센스 (Viasense Inc.)

 

토론토에 있는 또 다른 신생기업인 바이어센스는 마케팅회사에서 수집한 정보와 위치정보를 조합하여 고객들의 라이프스타일 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 이 회사는 토론토 인근 반경 250마일 내에서 300~600만 개의 기기를 모니터한다. 또 캐나다 전화회사로부터 대량의 전화 신호 데이터를 구입한다. 모니터한 정보와 전화 신호를 분석하여 이 회사는 사용자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구분해 낸다.

 

예를들어, 고객이 한 달에 골프코스를 몇 번 갔는가를 파악하여 캐주얼골퍼, 중급골퍼, 골프 마니아로 구분한다. 휴대폰 신호가 매일 아침 5시30분에서 8시30분사이 시 공원에서 잡히면 "매일 아침 조깅하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휴대폰 신호가 학교 수업시간대에 학교에서 수집되면 "청년"으로 분류된다. 매일 밤 셀폰의 위치가 잡히는 곳은 주택의 위치를 나타낸다.

 

바이어센스는 인구센서스 데이터와 데이터 브로커를 통해 구입한 마케팅 리스트를 분석하여 인구통계적 정보도 만들어 낸다. 분류된 정보는 식료품 체인, 대형 콘서트장, 빌보드 회사 등에게 제공된다. 이 회사는 개인 정보나 이름을 수집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이어센스의 CEO 모삽 바시르는 이름을 찾아내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트위터로 공공장소에서 로케이션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면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노출시키게 된다. 바시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보가 쉽게 노출되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구글과 애플

 

이용자들 모르게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곳은 구글과 애플이다. 각 기업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인 안드로이드와 iOS를 통해 위치분석 기업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위치 데이터를 를 수집한다. 이 두 기업이 수집한 정보는 밖에서 접속할 수 없다.

 

버라이즌 와이어리스도 고객들의 위치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위치정보를 이용하여 고객의 거주지, 쇼핑 습성 등을 찾아내서 기업들에게 제공한다.

애플은 최근 아이비콘이라는 기술을 공개했다. 이는 스마트폰의 신호를 감지하여 쇼핑몰에서 고객이 움직이는 동선을 모두 수집하는 기술이다.

 

◆사생활 침해 우려

 

스마트폰 사용자의 위치를 추적하는 산업이 부상함에 따라 사생활 침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특정병원이나 의사를 방문한 정보를 마케팅업체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 전문 변호사 엘로이스 그래튼은 "위치정보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케팅업체는 고객의 인터넷 검색정보로 어느 질병에 걸렸는지 유추한다. 위치추적 업체는 그 사람이 특정병원을 방문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정보가 결합하면 어떤 개인이 어떤 질병에 걸렸는지 거의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위치정보 수집 기업들은 건강정보 등의 개인 의료정보는 수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용자 동의만 얻으면 캐나다에서는 합법이다.

 

유저 네임은 개인정보로 간주되어 캐나다에서는 정보를 수집하기 전에 유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승인이 필요 없다. 미국 기업은 사용자의 승인이 없이도 위치정보 및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미네소타주의 앨 프랭큰 상원의원은 위치정보를 수집하기 전에 사용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법안을 상정했다. 최근 연방거래위원회는 사용자의 위치 프라이버시 케이스를 중재하기도 했다.

 

한 대학생은 카페에서 와이파이로 접속하면 개인의 동선이 추적되고, 수집된 정보가 로컬 사업체에 제공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사용자 동의서에 위치추적이 되고 있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지만 분석된 정보가 유통된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는 개인정보가 너무 값싸게 유통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는 없습니다.
아침이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은 절대로 없습니다.
- 이케다 다이사쿠

그날 그날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날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둬라.
- 에머슨

배움이란 일생동안 알고 있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 도리스 레싱

우리는 받아서 삶을 꾸려 나가고 주면서 인생을 꾸며 나간다.
- 윈스턴 처칠

한 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결국에는 가능한 것이 된다.
- K. 오브라이언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을 제어한다.
- 미셀 드 몽테뉴

성실함의 잣대로 스스로를 평가하라.

그리고 관대함의 잣대로 남들을 평가하라.
- 존 미첼 메이슨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승자는 책임지는 태도로 살며 패자는 약속을 남발한다.
- 유태경전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라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가능성이다.
- 프랑수와 드 라 로슈푸코

인간의 삶 전체는 단지 한 순간에 불과하다. 인생을 즐기자
- 플루타르코스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던 사회자가 말했다. 곧 본당 앞쪽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목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작년 3월, 50세의 나이로 타계한 김성수 목사였다. 본당을 가득 메운 700여 명의 교인들은 그렇게 영상으로 김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영상 속에서 김 목사가 농담을 하면 교인들은 웃었다. 설교 내용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교인들도 많았다.

 

서울 반포동에 있는 서울서머나교회의 주일예배 풍경이다. 서울서머나교회는 김성수 목사가 2012년 4월 설립한 교회다.

처음에는 CTS 건물을 빌려서 예배 장소로 사용하다가, 2013년 11월 반포동에 장소를 얻었다. 교인들은 김 목사가 사망한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김 목사의 영상 설교를 들으며 1년째 예배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 서울서머나교회는 김성수 목사가 2012년 4월 설립한 교회다. 김 목사는 2013년 3월 사망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인들은 흩어지지 않고 장소를 얻어 김 목사의 영상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지속하고 있다. 주일예배 때는 본당에 빼곡히 앉고서도 자리가 없어 바깥 로비까지 의자를 놓는다.

 

현재 서울서머나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700여 명이다. 김성수 목사가 살아 있을 때보다 오히려 200명가량 늘었다.

교회는 노방전도 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사람을 데려오라고 독려하지도 않는다.

모두 인터넷에서 김 목사의 설교를 접하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교인들을 관리하지 않는다. 등록 절차도 소그룹도 없다.

 

교인들은 오로지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온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김 목사가 성경을 진리에 가깝게 풀어낸다고 입을 모았다. 일반적인 교회에서 들을 수 없는 설교라는 것이다. 한 교인은 매주 인천에서 온다. 그는 김 목사의 설교가 철저히 말씀 중심이고, 영상 설교라도 한자리에 모여서 들으면 새로운 은혜가 있다고 말했다.

 

죽은 사람을 우상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교인들은, 하나님이 김 목사를 통해 주신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지 김 목사 자체를 추앙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빨리 데려가셔서 목사가 우상이 되는 현상을 막으신 것 같다고도 했다. 생전에 김 목사를 연예인 보듯 했던 교인들은 지금 모두 교회를 떠났다고 전했다. 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겼고, 그 질그릇이 깨져 이제 보배만 남게 됐다고 했다.

 

미국에 있는 서머나교회'들'도 김성수 목사의 영상으로 설교를 대신하고 있다.

김 목사는 2004년 LA에 남가주서머나교회를 개척했고 2012년 한국에 갈 때까지 사역했다. 그동안 북가주와 뉴저지, 산타바바라에도 김 목사의 설교 영상을 틀고 예배하는 교회가 생겼다. 이들은 김 목사 생전은 물론 사후(死後)에도 김 목사의 영상으로 예배하고 있다.

 

남가주서머나교회는 최근 교회가 가입한 교단이 영상 설교로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교회 내에서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교인 총회에서 조사한 결과, 김 목사의 영상을 계속 보기 원하는 교인들이 전체 교인의 77%였다. 이들은 다수였지만 건물을 놔두고 나왔다. 미주LA서머나교회라는 이름으로 매주 유대교 회당을 빌려 김 목사의 영상 설교로 예배를 하고 있다.

 

김성수 목사, 심장마비가 아닌 자살이라는데

 

 

▲ 고 김성수 목사는 개혁주의에 입각한 성경 중심의 설교자로 유명했다.

김성수 목사는 원래 가수였다.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고 CCM 가수로 한동안 활동했다.

한 정당에서 총재 직속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CBS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해, 당시 정당에 드나들면서 권력과 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2004년 남가주서머나교회를 개척하고 미국에서 사역할 때 그는 한인 교계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개혁주의에 입각한 성경 중심의 설교는 기복적인 한인 교계 분위기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강하고 확신 있는 어투, 빈틈없는 논리, 직설적인 화법은 김 목사의 설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김 목사는 기복주의에 물든 교계를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서 자주 위협을 당했다고 교인들은 전했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2013년 3월 6일 돌연 세상을 떠났다. 언론은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취재 결과 김성수 목사는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택에서 목을 맸다. 수년째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고 이전에도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유족들과 교회를 운영하는 팀장들은 김 목사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교인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했다.

 

미주LA서머나교회 교인들도 김성수 목사의 사인에 개의치 않았다. 한국과 미국 서머나교회 교인들이 김 목사의 사인을 알게 되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가 한 설교를 잘 들은 사람들에게는 자살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금관의 예수'라는 설교에서 자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자살한 사람 중에서도 천국에 간 사람이 있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생명을 해한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이 있어서 '자살한 사람은 전부 지옥 간다'라고 말하는 것인데요.

사람이 누구를 살해해도 제정신이 아니고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었으면 율법도 그를 용서합니다.

만약에 우울증에 걸린 어떤 사람이 뇌에 신경 물질이 전해지지 않아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어요. 그건 고의적인 자살입니까 병사(病死)입니까. 그건 병사인 거예요. 하나님은 그러실 거예요. '그래,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이 내 자식을 이렇게 우울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내 은혜는 그보다 더 커서 그를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권세를 보여 주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자살을)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김 목사의 아내와 세 자녀는 김 목사가 사망하고 난 후 다시 미국으로 가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김 목사의 판권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과 미국 서머나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서머나교회의 교인은 점점 늘고 있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듣고 스스로 찾아온다. 교회의 공식적인 일정은 주일예배 두 번이 전부다.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소그룹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가 관리하지는 않는다. 헌금을 강요하거나 헌금 바구니를 돌리지도 않는다. 팀장들은 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만 갖추려고 한다고 말했다.

 

예배를 인도하는 한 팀장은 서머나교회가 김성수 목사의 영상 설교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새로운 목사가 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김 목사의 입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 말씀을 잘 흘려보내는 게 교회의 역할 같다고 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 어떤 목표나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반드시 살아 있는 목사가 설교해야 한다거나, 영상 설교이기 때문에 뭔가 부족한 예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목사가 있거나 없거나 올바른 메시지가 전파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교인들 간의 교제도 자발적인 모임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를 참고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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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활동하는 김일성대 총동문회

 

김일성종합대학 전경(왼쪽)과 졸업 증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은 노동당 간부와 엘리트 양성의 원종장(原種場)이다.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가 300명 넘으면 북한이 뒤집힐 것이다.(김광진·46·외국어문학부)

 

“종합대학 졸업생은 북한의 최고 엘리트다. 북한도 국가다. 지식인층, 전문가들이 있다. 그 많은 인구 가운데 쓸 만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 왜 없겠는가. 해외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적잖다. 북한을 수준 이하의 비정상적 집단으로만 치부하면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디로 가려 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최세웅·54·외국어문학부)

 

“김일성대를 나오면 출세 길이 열린다. 서울대 졸업생의 사회적 위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A씨·외국어문학부)

 

1990년대 이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김일성대 졸업생 30명이 넘는다. 김일성대에서 유학한 후 서울에서 근무하는 옛 사회주의권 국가 외교관을 포함하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이 대학 졸업자는 5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졸업생’도 있다.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문건은 박종철(조선어문학부), 임수경(외국어문학부), 강경대(경제학부), 김태훈(경제학부), 조성만(화학부), 최덕수(법학부) 씨가 명예졸업생이라고 밝힌다.

 

고(故) 박종철(1964~1987) 군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된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다. 박군의 아버지 박정기 옹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200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를 참관한 후 북한을 떠나기 전날 밤 김영성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부위원장이 숙소인 평양시 봉화초대소로 찾아와 종철이의 명예졸업장을 낭독하고 전달했다. 졸업장은 종철이의 졸업연도인 1989년경 만들어졌다고 전해 들었다. 김일성대는 1987년 강의실에 종철이 책상과 의자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렇듯 명예졸업장을 받은 한국인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김일성대가 멋대로 수여한 것이다.

 

“잘난 놈이 뭣 하러”

 

“서울에 김일성대 총동문회가 만들어진 것을 아십니까?”

 

2011년 여름, 조명철 당시 통일연구원장(현 새누리당 의원)이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기심이 동했다. “회장은 누군가요?”라고 묻자 동석한 한 탈북자가 “조명철 원장이 회장입니다”라고 답했다.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에게 부탁해 총동문회 모임에 가보려고 했으나 매번 퇴짜를 맞았다. 하나같이 외부에 총동문회가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A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에게 탈북자는 동포가 아니라 경계의 대상입니다. 호기심의 대상이지 함께 일할 상대는 아닌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탈북자를 믿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한국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청와대에 있을 때 탈북자 관련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에서 오신 분이 2만 명 남짓인데 그중 3700명이 한국에서 못 살겠다는 겁니다. 북한이 싫어 천신만고 끝에 넘어온 동포를 껴안지도 못하면서 무슨 통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한국에 오신 분들이 북쪽에 남은 가족에게 한국 사정을 전할 텐데 북쪽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김일성대 졸업생은 보통의 탈북자와 달리 대부분 한국 사회에 안착(安着)했다. 상당수가 공무원, 언론인, 연구원, 시민단체 간부 등으로 활동한다. 국가정보원 등 특수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이렇듯 반듯한 직장을 가진 이가 대다수지만 배타적 문화와 비딱한 시선 탓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보통의 탈북자와 똑같다.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상실감 또한 크다.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를 졸업한 한 인사는 “탈북자가 아니라 난민으로 대우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엘리트 탈북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두 갈래예요.

첫째는 경계심입니다. 둘째는 잘난 놈이 뭣 하러 넘어왔느냐는 힐난입니다.

한국 사람은 자기보다 머리 좋은 북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탈북자보다 난민이 차라리 나아요. 난민은 무조건 도와줄 대상이잖아요. 난민이라면 마음대로, 사실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탈북자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한국인의 선입관에 어긋나지 않는 말만 해야 합니다.

탈북자가 언론에 나와서 하는 말은 대부분 거짓입니다. 한국인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겁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거든요. 북한과 관련해 눈곱만큼이라도 호의적인 얘기를 하면 의심의 대상이 되고요.”

 

“탈북 엘리트는 통일의 자산”

 

한국에서 활동하는 김일성대 졸업생 모임의 정식 명칭은 ‘재한 김일성종합대학 총동문회’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는 김광진 씨는 “김정은을 괴롭히는 일을 함께 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면서 “북한과 관련해 엘리트 탈북자가 역할을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김일성대 총동문회장인 조명철(55) 의원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조 의원은 북한의 명문가 출신이다. 김일성대 경영업무자동화학부를 졸업했다. 당 간부 자제들만 다니는 남산고등중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부친 조철준 씨는 정무원(현재 명칭은 내각) 건설부장을 지냈다. 한국으로 치면 장관급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북한은 노동당의 국가다. 내각의 상(옛 정무원의 부장)은, 노동당의 부부장과 비슷하거나 낮은 위치다.

 

조 의원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북정책, 통일정책과 관련해 정치권이 제일로 문제예요. 북한을 잘 다루려면 누구와 함께해야 하는지를 몰라요. 함께 할 사람은 멀리하고, 경계할 자는 가까이 합니다. 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야 한다고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지금 해야 한다고 합니다.

북한 실상에 대해 무엇을 오판하는지, 대북정책, 통일정책에서 무엇이 잘못돼 있는지 모릅니다. 정치권이 앞장서 오판을 바탕으로 잘못된 정책을 주동하고 있어요. 과거에 실패한 것에서 교훈을 찾지 않고 앵무새모양으로 재탕, 삼탕 합니다.”

 

조 의원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으나 대북정책 수립이나 집행에 참여한 적은 없다.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는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에서 일하다 탈북해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 몸담았다. 뉴포커스는 북한 내부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 매체다.

 

“한국 사회는 탈북 엘리트가 자부심을 갖고 활동할 수 없는 곳이에요. 탈북 엘리트를 통일의 자산으로 여겨야 하는데, 실제로는 배척의 대상 아닙니까. 국회의원 한 명 배출한 게 전부죠. 우리는 증언자일 뿐입니다. 조언자나 입안자가 될 수 없어요.”

 

장 대표는 최근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라는 제목의 책을 탈고했다. 글로벌 출판사 랜덤하우스와 계약을 맺었다.

 

“세계에서 탈북자 대우를 가장 잘 안 해주는 곳 한국입니다. 4월 독일에서 시사주간지 타임 기자를 만나 출간되는 책과 관련해 인터뷰를 하기로 했습니다. 표지에 얼굴이 나간다고 해요.”

 

 
 

언론계서도 맹활약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 최세웅 전 에스엔뱅크 대표.

 

1995년 탈북한 최세웅(54) 씨는 조 의원보다 집안이 더 좋다. 노동당 재정경리부장을 지낸 최희벽 씨의 차남. 1979년 평양외국어학원, 1984년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를 졸업했다.

노동당의 대외결제를 담당하는 조선대성은행에 입행해 외환담당 과장과 국제부 차장을 거쳤다.

이후 런던 현지법인에서 대표로 일하며 금과 외환선물을 거래하다 조선통일발전은행 부총재보를 끝으로 서울에 왔다. 금융결제원, 나라종금, 외국계 기업 한국지사에서 일했다.

 

김광진 씨는 “탈북 초기에 최세웅 선배가 고급 술집에서 술을 사주곤 했다”고 말했다. 최세웅 씨는 “찾아오는 후배가 여럿 있었다”면서 웃었다.

“대한민국 사람이 탈북자를 자기 국민으로 여겨요, 안 여겨요?”라고 물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존심을 없애는 데 20년이 걸렸습니다. 탈북하면 그해가 한 살이에요. 한국 사회는 그것을 고려를 안 해줍디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서 일하는 현성일(55) 씨도 북한의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다.

부친 현철규 씨는 노동당의 핵심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간부부장을 지냈다. 삼촌은 김정일의 측근 중 한 명이던 현철해 전 인민부력부 제1부부장.

현씨는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잠비아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일하다 부인과 함께 1996년 탈북했다.

부인 최선영(54) 씨는 연합뉴스 기자로 일한다. 현씨는 경남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인 ‘북한의 국가전략과 간부정책 변화에 관한 연구’는 북한 연구자의 필독서다.

김일성대 조선어문학부 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부인 최씨는 ‘북한 김정일, 후계자 삼남 김정은 지명’ 기사로 2011년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하는 한국기자상 대상을 받았다.

 

박진희 KBS 북한전문기자도 김일성대를 졸업했다.

 

2010년 12월 첫 모임

 

한국에 거주하는 김일성대 졸업생들은 2010년 12월 첫 모임을 가졌다. ‘재한 김일성종합대학 총동문회’를 결성한 것은 2011년 여름이다.

 

2012년 2월엔 ‘조명철 회장’ 명의로 중국에 거주하는 김일성대 동문에게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재중 김일성종합대학 동문 동지들께’로 시작하는 서신엔 북한으로 강제 송환될 위기에 처한 탈북자를 유엔 난민협약과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처리해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담겼다.

김일성대에서 공부한 중국 공산당 간부가 적지 않다. 장더장(張德江)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 천하이(陳海) 주한 중국 대리대사 등이 김일성대를 졸업했다.

 

김일성대 졸업자들은 하나같이 모교를 ‘김대’나 ‘김일성대’가 아닌 ‘종합대학’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종합대학이 오랫동안 김일성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건설대학 철도대학 농업대학 음악대학 식의 단과대학이었다.

 

현재는 김일성대를 포함해 종합대학 세 곳이 있다. 김책공대가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확대됐으며 개성경공업기술대가 고려성균관대학교로 명칭을 바꾸면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480여 개 대학이 북한에 설립돼 있으며 재학생 51만 명, 신입생 12만 7000명으로 추산된다.

 

학생들이 선호하는 김일성대의 전공은 시기마다 달랐다고 한다. 1980년대 학교를 다닌 A씨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법학부 안에 종교학 전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압니다. 목사를 키우는 곳이었는데요. 문화교류 행사 등으로 해외에 자주 나가 그 나름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경제학부에 우수한 학생이 몰렸어요. 사회가 발전하면서 외국어문학부가 가장 인기 있는 곳이 됐고요. 외국어문학부를 졸업하면 해외 근무를 할 기회가 생겼거든요.”

 

A씨는 명문 고등중학교인 평양외국어학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에서도 독일어를 전공했다.

한국에 정착한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 중 A씨처럼 외국어문학부 출신 비율이 높은 것은 해외 근무를 하다 탈북한 경우가 많아서다.

 

“외국어학원 우리 반이 12명이었는데, 7명은 종합대학 합격할 자신 없으니까 다른 대학에 갔습니다. 김책공대 간 놈, 의대 간 놈….

평양외대에는 독일어과가 없었거든요. 종합대학에 5명이 합격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전공이요? 공부 잘하는 애들이 영어과로 빠졌습니다.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가 영어 다음이었고 노어는 한심한 애들이 갔어요.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북한은 러시아에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머저리 같은 과가 중국어과였습니다. 중국에는 대사로 가도 돈을 벌 수 없었거든요. 요즘은 중국어가 최고라고 합디다.”

 

평양외국어학원은 평양외국어대학 부설 고등중학교다. 거칠게 비유하면 한국의 외국어고와 비슷하다.

 

김일성대 졸업 사칭하기도

 

1990년대 김일생대를 다닌 졸업생의 설명이다.

 

“김일성대에서도 외국어문학부가 최고였습니다. 외국어문학부에 들어가려면 울타리 3개를 넘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외국어 실력만 따지면 평균적으로는 평양외대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고등중학교 때부터 외국어만 전문적으로 배운 덕분입니다. 평양외대는 평양외국어학원 출신만 받았습니다.

평양외국어학원 졸업생은 외대에 남거나 김일성대로 옮기거나 다른 대학에 가는 세 부류로 나뉘었고요.”

 

김일성대는 이렇듯 북한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입학하는 곳이다. 1980년대 김일성대를 다닌 졸업생의 설명이다.

 

“도에서 각 군별로 대학 갈 사람을 10명씩 할당했다고 합시다. 군에서 시험을 쳐요. 10개 군이 있다고 가정하면 도에 100명이 모일 것 아닙니까. 도에서 또 시험을 칩니다.

1지망 종합대학, 2지망 김책공대 이런 식으로 지원합니다. 성적이 우수하면 종합대학에 가는 겁니다. 수재 중에서도 핀트가 약간 어긋나게 똑똑한 아이들은 이학대학으로 진학했어요. 수학 같은 것은 잘하는데, 조금 이상한 녀석들 있지 않습니까. 출신성분에 따른 혜택이요? 그런 것 없습니다. 간부 자식도 똑같이 시험 봐야 합니다. 간첩, 매국노의 자식이 아닌 이상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북한에서 성공한다고 알던데, 제일 좋은 성분은 농민, 노동자의 아들이에요. 성분이 좋다는 게 별 게 아니라 일제 때 지주 자식만 아니면 되는 겁니다.

자강도 촌구석에서 스스로 머리 좋다고 여기는 아이들도 김일성대 입학하려고 혁명 역사 달달 외우고 죽어라 공부하는 겁니다. 방학 때면 교복 입고 한번씩 고향에 내려가잖아요. 다들 출세가도 달리는 아이라고 부러워하죠. 대부분 미래가 보장되니까요. 간부 자식이면 나중에 일자리 얻을 때 힘쓰는 것은 당연히 있죠.”

 

북한에서 공대는 인기가 별로라고 한다. 1990년대 김일성대를 다닌 졸업생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대학에 서열 같은 것은 없지만, 김일성대의 위상은 서울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노동당 교육부 안에 5개 처가 있습니다. 중앙대학, 지방대학, 고등중학,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처가 각각 하나씩 있고, 김일성대만 맡은 처가 따로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선호도를 따지면 김책공대는 10위권 안에 못 들어갑니다. 김일성대에서도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레벨이 다릅니다. 북한이 한국보다 더 공대를 괄시해요. 공대 출신은 당 간부가 되기 어렵거든요.

김일성대를 졸업해도 지리학, 지질학을 공부하면 당 간부가 되지 못하고 지질관측소 같은 곳에서 일해야 합니다.”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들은 하나같이 한국에 ‘가짜 김일성대 출신’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한두 시간 얘기하다보면 김일성대 졸업했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챈다고 했다. 한 김일성대 졸업자의 설명이다.

 

“○○○, ○○○은 김일성대 출신이 아닙니다. 한국에 와 사기 친 거예요. 김일성대 통신과정을 나왔다는 사람도 있던데, 거짓말입니다. 통신과정이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어요.

평양의대, 사리원농대가 종합대학에 통합됐는데, 통합되기 전 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한국에 와서 김일성대 졸업생으로 행세합니다.

옛날에 평양의대를 졸업한 사람들이나 사리원 농대 출신은 최고 엘리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김일성대 출신 인사는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가 성공하려면 사기를 쳐야 한다. 그 사람들은 진실이 까발려질까봐 통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사랑, 너그러움으로 풀어야”

 

 

북한에서도 의사는 선호하는 직업이다. 당 간부가 되긴 어렵지만 뇌물 받을 기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최우등생이 의대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법학대학은 김일성대에만 있다. 북한 검찰의 위계질서는 한국보다 훨씬 엄격하다고 한다. 판사, 검사 모두가 동문이기 때문이다.

판사와 검사의 권력은 강하지 않다. 검사 대신 예심원이 취조하고 검사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기소만 한다. 판사는 기소 내용대로 형량을 정한다. 판사, 검사가 아니라 예심원이 뇌물을 받는다는 것이다.

 

김일성대 출신이라고 해서 동문 선배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일은 없다고 졸업생 대부분이 말했다.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만 다르게 말했다.

 

“세상 이치는 비슷해요. 간부 사업할 때 내가 종합대학 졸업생인데, 후배가 있으면 봐주는 거죠. 김책공대 졸업생도 비슷하게 할 거고요. 대놓고 하다가는 혼나죠. 뭔가 챙겨주지 않을까 기대를 갖기도 하고, 실제로 챙겨주기도 하고요.”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서 일하는 김광진 씨는 노동당 행정부 산하 대외보험총국 싱가포르 지사에서 일하다 탈북했다. 북한대학원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에서 NBA 과정을 마쳤다. 미국 워싱턴의 NGO 북한인권위원회에서도 2년간 일했다. 현재는 국민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장성택 부장을 7년 동안 모신 부하로서 장 부장의 뜻과 불씨를 계속 살려 북한의 3대 세습을 종식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통일 후에는 북한지역에서 금융산업을 건설하는 일을 하고 싶고요. 탈북 엘리트들의 사회 진출과 관련해 ‘첫 술에 배부르랴’는 말이 있지만 한국 사회가 탈북자를 포용해 탈북자들이 더 많은 역할, 기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소금 녹이듯이 북한 체제 변화를 이끄는 게 방법인 것 같습니다. 겨울에는 북쪽 주민이 제주도로 휴가를 가고, 여름에는 남쪽 주민들이 백두산에 스키 타러 가는 통일된 조국을 꿈꿉니다. 수령절대주의 김가왕조 정권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를 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북한을 얕잡아보거나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도 잘못이고요. 북한을 같은 민족과 동포가 아닌 외계 세계처럼 인식하는 것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한 겁니다.

한국 사회와 탈북인의 소통 문제는 사랑과 너그러움을 통해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46년 10월 1일 설립된 이래 지난해까지 김일성대 졸업생은 9만 명가량으로 추산된다. 한국에 정착한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 30명은 0.00033%에 해당하는 셈이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북한 엘리트들의 탈북이 줄고 있다. 한 탈북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북한에서 먹고 살 만한데 탈북을 할 이유가 없죠. 위험부담을 감수하기 싫겠지요.”

 

김일성대를 졸업한 B씨는 여덟 살 아들, 다섯 살 딸을 데리고 탈북했다. 아들은 지난해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딸은 명문 여대 시각디자인학과를 다닌다. 자녀들은 한국에 오기 전 외국에서 자랐다. 평양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자식들을 보면 후회가 될 때가 있습니다. 아들이 취업을 못해요. 아들보다 못한 녀석들도 합격을 한답디다. 대기업에서 탈북자라고 직업을 잘 안 줍니다.

탈북자는 믿지 못할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어요. 회사에서는 국정원이 간섭하지 않나 하는 걱정도 한답니다. 자식들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차별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혼자 탈북해 북한으로 돈을 부쳐주며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에서보다 훨씬 나은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 탓에 아들 인생은 꽝이 된 겁니다.”

 

엘리트 離反 늘리려면…

 

김광진 씨의 말대로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가 300명이 넘으면 북한이 뒤집힐지도 모른다. 엘리트들의 탈북 러시는 북한 체제의 수명이 다해간다는 방증으로 해석될 것이다.

한국 사회와 탈북인의 소통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잖다. 장진성 씨의 말처럼 탈북 엘리트는 통일의 자산일진대, 사회 각 영역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진출한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포용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믿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북한의 김일성대 졸업생은 탈북한 동문들이 남쪽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풍문으로 들었을 것이다.

성공한 탈북자가 늘어야 북한 엘리트들의 이반(離反), 이탈도 가속화하지 않을까. 천신만고 끝에 탈북한 북한의 엘리트들조차 끌어안지 못하면서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송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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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최고의 고혈압 치료제이다

 

소금이 고혈압의 주범이라고 알려져왔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소금은 오히려 고혈압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1953년 매니리 박사의 실험오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의학계의 실수입니다.

소금이 고혈압을 유발한다는 논리는 소금을 섭취하면 물을 섭취해서 물로인해 혈압이 높아진다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인현상이며 만일 소금으로인한 물때문에 혈압이 높아지는 것이 문제라면 고혈압 예방을 위해서는 물을 섭취하지 말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소금 2.5그램에 약 0.9mHg 상승하는데(동국대 이무용교수 분석) 이정도는 일상생활중 하루에 40mmHg나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있는 혈압상승입니다.  

혈압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심장의 기능과 세포들이 필요로 하는 요소를 이해를 해야 하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알아야할 지식은,

 

첫째, 혈압이란 심장이 세포에 필요한 것(혈액)을 공급할 때 혈관이 미치는 압력이다.

둘째, 세포는 “물”과 “영양”과 “산소를 필요로 한다.

셋째, 심장은 적혈구를 통해 세포에 “물과 영양과 산소를 공급”하는 일을 한다.

넷째, 혈압은 시시각각 변한다.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고혈압은 심장이 정상보다 큰 힘을 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큰 힘을 가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힘만으로는 각 장기나 세포가 필요로 하는 요소(혈액)가 충분하게 공급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더 보내려고 큰 힘을 가하다 보니 결국 혈관에 미치는 압력이 커지는 것이죠. 무엇을 더 보내려고 큰 힘을 가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혈압에 대한 지식의 본질입니다.

혈압이 높아지는 경우를 통해 무엇 때문에 혈압이 높이 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운동할 때 혈압이 높아지는데 이는 인체가 산소를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부족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숨이차면서 호흡이 가파지는 이유는 사로 산소를 공급해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물과 영양이 부족하여 혈압이 올라 갔다면 배고픔을 느낄 것이고 몸마름을 느낄것입니다. 운동할 때 혈압이 올라가는 데 물이나 음식이 몸속으로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혈압이 높이지는 이유는 오직 산소 때문입니다. 운동할 때 외에도 혈압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역시 산소 때문입니다.

수면 무 호흡상태 에서는 혈압이 높이지는데 역시 인체에 산소공급이 안되어 혈중산소 포화도가 떨어져 혈압이 올라갑니다.

그 외에도 혈압이 올라가는 경우는 예외 없이 산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지혈증환자들이 혈압이 높아지는 것도 혈액의 점도가 높아지면 혈류가 원활치 못해 산소공급이 잘 안되어 혈압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일단 간단히 나마 혈압이 높아지는 이유는 세포에 산소공급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다음 논의가 가능합니다.

 

우선 혈압약 논쟁인데요. 혈압약은.

그 원리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심장으로 가는 칼슘통로를 차단해서 심장이 힘을 못 쓰게 하여 혈압을 못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혈압은 심장이 세포에 산소공급을 하기 위함이라 했는데 힘을 못 쓰게하여 혈류를 못보내게 하면 세포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혈압이 높아진다는 것은 인체가 세포에 산소공급이 잘안돼 심장이 산소공급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데 심장의 힘을 무력화 시킨다면 세포에는 산소공급(적형구)이 안 돼 세포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산소공급이 안되니 운동능력이 떨어지겠죠.? 남성들의 경우 필요할 때 생식기에 혈류를 못 보내니 성 능력이 떨어지겠죠?

 

두 번 째 방법이 혈관을 이완시키는 것입니다. 혈관이 축 늘어지게 만드는 것이죠.

심장은 힘을 못쓰고 혈관은 늘어져 있으니 혈압이 못오릅니다.
여성들의 경우 혈관이 수축을 못하게 하니 자궁수축력이 떨이지겠죠?
가타 등등 지면관계로 다 언급을 못합니다.

 

세 번째 방법이 강제로 이뇨를 시키는 것입니다. 몸속의 물을 강제로 빼내기 때문에 혈관에 물이 부족하여 혈압은 떨어지지만 세포에 산소공급이 안되니 빈혈이 고 머리가 아프고(산소를 공급해달라고) 또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 물을 잃는 것이 곧 노화로 죽는 것이라 했는데 생명현상을 잃는 것이겠죠?

 

이는 의학계가 혈압은 산소공급을 위함이고 고혈압은 심장이 산소부족으로 죽어가는 (뇌)세포를 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혈압 이라도 낮춰보자며 취한 조치입니다. 우리 몸으로서는 고통을 이중삼중으로 가중시키는 조치죠.

 

 

다만 소금과 혈압과의 관계를 규명해 보겠습니다.

 

● 소금의 고혈압 예방효능
 의학계에서 소금을 고혈압의 주범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혈압은 산소공급을 위한 심장의 생명활동이라는 사실을 몰라 나온 판단오류다. 그렇다면 소금이 고혈압 치료에 큰 효과가 있음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 소금은 피를 맑게하여 혈압을 낮춘다

소금을 섭취하면 물을 많이 섭취하으로 물이 배출되면서 노폐물을 배출시켜 피를 맑게하기 때문에 혈류를 개선해 포에 산소공급이 원활하게 해준다.

따라서 혈압을 높이지 않아도 세포가 필요로하는 산소(혈액)공급이 충분하기 때문에 혈압을 높일 이유가 없다.

 

● 소금은 지방을 흡착 배설한다.

소금은 지방을 흡착하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소금을 섭취하면 체내 지방을 흡착하여 땀이나 소변으로 염분이 나올 때 함께 배출한다. 수육을 할 때 된장을 넣고 고기를 삶는 이유가 된장 속의 소금 성분이 지방을 빨아내는 효과를 이용하는 것이다. 고기를 재울 때도 소금에 재우면 지방이 잘 빠져 나온다.

2010년 1월 11일 MBC 프라임의 방송내용을 보면 2008년 브라질 상파울로 의대 니칸다케네 교수팀이 고혈압환자에게 소금을 권장량 이하(3g)로 섭취했더니 지방과 지단백질이 혈관에 침착하여 고지혈증을 일으킨다고 보고한바 있다.

또 일반 물만 섭취한 실험군에 비해 소금물을 섭취한 실험군에서 중성지질이 훨씬 낮아진 것을 밝혀냈다.

 

나트륨이 지방을 원활하게 운반해 주는 역할을 하는 데, 소금의 양이 부족하면 고지혈 등으로 고혈압이 될 수 있다는 중요한 논리다.

오리고기 요리사들 중에는 오리고기 지방에 소금을 뿌려두면 저지방으로 섭취할 수가 있다고 설명한다. 생선의 기름을 빼는 데도 소금이 사용된다. 소금이 지방을 흡착하는 기능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소금을 적게 섭취하면 고콜레스테롤과 고지혈증으로 인해 혈액순환을 방해하기 때문에 결국 혈압이 높아지는 것이다.

 

미국 코넬대학의 논문에서도 소금을 적게 섭취할 수록 더많은 고지혈증을 우발하다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다만 왜 그렇게 되는지 논리적인 설명을 못해 강하게 어필을 못하는 실정입니다. 산소공급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몰라 설명이 안 되는 것이지요.

 

● 소금은 중금속을 배출한다.

2008년까지 국내산 천일염에는 중금속이 들어 있다며 절임용에만 허용하고 김치·된장 등의 식품에 사용을 금지해온 적이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소금에는 보통의 경우 수은· 납·카드뮴등 80여 가지의 중금속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소금이 해로운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중금속이 들어 있는 소금을 섭취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중금속을 뺀 소금을 섭취해야 한다.

중금속을 뺀 소금을 섭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중금속을 뺀 소금은 다시 중금속을 흡착하는 에너지가 있다.

앞서 소금에는 중금속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중금속이 들어 있다는 것은 중금속을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따라서 중금속을 제거한 순수한 소금을 섭취하면 몸속의 중금속을 흡착하여 소변이나 땀으로 배설한다. 그 결과 적혈구용적률을 높여 혈압을 내리는 효과가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소금이 중금속을 흡착 배설한다는 증거를 좀 더 들어보자. 과일 야채를 씻을 때 소금에 담그면 농약 성분이 제거된다.

 

대전 보건환경연구원에서  4년간 김치의 잔류농약성분을 연구 조사했는데 배추를 물로 씻었을 때는 잔류농약이 50%가 남아 있었지만 소금으로 절인 직후 86%가 제거됐고 5일이 지난 후에는 모든 잔류농약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이다.

농약봉지의 주의사항을 자세히 읽어보면 “잘못하여 농약을 먹었을 때는 소금물을 먹여 토하게 하라”고 쓰여 있다. 시골에서 개가 쥐약을 먹고 죽은 쥐를 먹은 후 죽게 되면 소금물을 먹여 토하게 한다. 소금의 중금속 흡착능력을 적용한 예다.

 

소금사우나를 하면 몸에서 나오는 땀에서 매우 역한 냄새가 난다. 소금이 중금속과 노폐물이 흡착하여 빠져나온 것이다. 암 환자들이 드나드는 소금 방에 들어가면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여 견딜 수가 없다. 소금이 암환자의 몸속에서 중금속을 빼내어 흡착한 것이다.

 

또 소금에는 항박테리아와 항염증성 성분이 들어 있다. 따라서 소금을 들이마시면 폐 속의 소금입자들이 박테리아를 흡수해 끈끈한 점액이 생성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또 혈관 내에 끼어 있는 각종 이물질을 흡착 배출한다. 따라서 기도가 좁아지거나 막힐 위험이 사라진다고 KBS 생로병사의 비밀팀은 밝히고 있다.

그 결과 산소공급이 원활해져 혈압강하 효과가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소금을 뿌려 놓기도 한다. 소금의 유해가스 흡착력이 가스를 흡착하여 공기를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소금을 가열 할 때 뽀얀 연기 같은 것이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소금이 끌어당긴 가스를 배출하는 것이다.

 

만일 소금에 들어있는 중금속 성분이 소금이라면 소금을 적게 먹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소금에 흡착된 것들은 소금이 아니고 이물질이다.

 

만일 소금에 붙어있는 중금속을 소금과 동일체로 판단하고 적게 먹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는 마치 과일에 잔류농약이 붙어있다 하여 과일을 조금만 섭취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물이 오염되었다고 물을 조금만 섭취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공기가 오염되었다고 숨을 조금만 쉬라고 하지 않는다. 정수된 물을 충분히 마시라고 하고 맑은 공기를 충분히 들이쉬라고 말한다.

소금도 순수 좋은 소금을 적당하게 섭취해야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참고: 고혈압 산소가 길이다(윤태호/도서출판행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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