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6, 2014

 

 

 
 
 
 

 

 

 

 

 

 

 

 

 

 

 

 

 

 

아름답다 저 동산 우리 다 같이 가 보세

무궁세월 흐르는 풍파가 일지 않는 곳

평화의 동산 백합화 피고 공기는 신선

아 저 아름당운 저 동산 저동산 저동산

저 아름다운 저기 묘한 음악 천군 천사 화답함이라

아름답다 저 동산 우리 다 같이 가 보세

무궁세월 흐르는 풍파가 일지 않는 곳

저 아름다운 동산은 저 아름다운 동산은

저 아름다운 동산은 저 아름다운 동산은

저 아름다운 동산은 저 아름다운 동산은

주님이 계신 곳이로다

 

주님의 동산 아름다운 산 주님의 집은 아름답고 좋도다

영원무궁 변함없는 우리들의 집이라

평화의 동산 고요한 미풍 천사의 노래

곱게 곱게 들린다 사면으로 사면으로 이리저리 퍼진다

아아 평화의 동산 백합화 피고 공기는 신선

아 저 아름다운 저 동산 저동산 저동산

저 아름다운 저기 묘한 음악 천군 천사 화답함이라

아름다운 곳 주의 동산 가 보세 가 보세

 

밝고도 화려한 동산에 주의 동산에

천사 노래가 아름답게 들린다 천사의 노래가

아름답게 들린다 곱게 들린다

아름답다 저 동산 우리 다 같이 가 보세

무궁세월 흐르는 화려한 곳으로

백합화 피는 곳 평화의 동산에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계신 곳 평화의 동산 

 

 

 

 

 
 
 
 
 
 
 

 
 

 

 

 

 

 

 

 

 

 

부모는 말한다. “공부 열심히 해.” 그런데 ‘어떻게’ 공부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부모는 많지 않다.

 

유대인은 다르다. 졸업과 동시에 끝나버리는 공부가 아닌, 성공하는 인생을 위해 평생 공부한다. 유대인의 공부 법은 학과공부를 넘어 마음, 오감, 신체, 지식, 지혜에 이르는 전인적 공부요, 자녀뿐 아니라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전천후 공부 법이다.

 

유대인의 공부 법은 인간 자체를 공부하는 것이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시험을 잘 보게 하는 공부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게 한다. 무엇을 이루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이 행복한 공부를 하면 나머지는 자연히 따라온다.

 

유대인의 핵심 교육서는 토라탈무드다.

토라는 유대인의 율법서로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토라 속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들어 있다.

 

"위대한 연구’라는 뜻의 탈무드는 이런 토라를 연구하는 책이다. 탈무드에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내용이 망라돼 있다.

토라와 탈무드를 통해 영성과 인성, 성품을 충분히 공부한 후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 쌓는 것이 유대인의 공부 시스템이다.

 

유대인 공부 법은 5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마음·

오감·

신체·

지식·

지혜에 이르는 전인적인 공부 법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평생 적용할 수 있다.

 

첫째 마음공부는 마음을 열어 동기를 부여한다. 공부의 목적은 출세가 아닌 관계를 바르게 하는 데 있다. 일찌감치 인성과 관계성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둘째는 오감공부.  유대인이 평생 공부할 수 있는 이유는 공부가 즐겁기 때문이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공부의 맛부터 알려주는 꿀맛공부 법부터 모든 행동과 예식에 교훈을 적용한 절기공부 법, 감각을 융합해 이해력과 암기력을 높이는 육감공부 법까지 유대인은 오감 공부를 통해 자녀에게 공부의 힘을 길러준다.

 

셋째는 신체공부다. 어떻게 하면 머리가 좋아질 수 있을까. 몸을 움직이는 공부 법은 몸과 두뇌를 향상시키는 일거양득(一擧兩得) 공부 법이다. 건강한 몸으로 공부를 점화해야 한다.

 

넷째는 지식공부로, 탈무드식 논쟁법이다. 질문과 토론, 프레젠테이션 등 신개념 공부 시스템으로 창의력_사고력 신장에 효과가 크다.

 

끝으로 지혜공부다. 본질 즉 성경집중할수록 창의력이 커진다. 창의력을 발휘해 실행에 옮겨야 한다.(언) 

 

 

 

 

 

 
 

 

 
 
 
 
 

 
 

 

 

 

 

 

 

어설프게 썩은 마음

확실히 썩혀내자

흔적조차 없이 썩혀

새 마음 밭(田) 두엄 되자

 

맑은 샘 파 생수 긷고

무화과 익을 즈음에

첫사랑 휘파람새는

휘익~휘익~ 찾아 든다

 

세상 모두 위를 볼 때

덩달아 까치발 선 내게

휘파람새는 속삭인다

 

낮아지라..

작아지라.. 

 

 

 

 

지나가는 바람이건만

어린 나무 가지에

 

눈물 강 넘쳐

마음 둑 무너질까

 

그의 가슴으로

비바람을 담으신다

 

함께 짊어질 십자가도

아가야.. 무겁다..

홀로 메고 가시더니

 

내 고난의 배 띄워

빨리 건너오너라

 

눈물 강 저편에서

손 내밀며 부르신다

 

무엇으로 가슴 가득

이토록 뜨거울까

 

내가 이제는 알 수 있네

그가 쏟은 대속의 피인 것을.

 

 

 

 
 
 

 
 

 

 

 

 

 

 

Will make the Valley of Achor a door of hope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15절)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을 처형했던 장소로, 죽음과 형벌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그 어두운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신다.

 

(호세아2: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5. There I will give her back her vineyards, and will make the Valley of Achor a door of hope. There she will sing as in the days of her youth, as in the day she came up out of Egypt. 

 

 

 

 

 

 

 

 

 

 

 

 

모든 나라엔 금기(禁忌)가 있다. 한국의 경우는 섹스, 즉 성(性)이 그런 거 같다.

성에 대한 이야기나 호기심, 공공장소에서의 ‘진하다’고 생각되는 몸짓은 한국 사회에선 금지되는 것으로 취급 받아 왔다.

 

요즘 10대는 조부모·부모의 생각보다 더 빨리 성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유혹적인 영상이 도처에 깔려 있다. 심지어 섹스 파트너를 찾는 애플리케이션까지 생겼다고 한다.

 

룸살롱은 또 어떤가. 이런 곳에서의 문란한 쇼는 유명하다. 한국 곳곳엔 시간제 러브호텔도 넘쳐난다. 그럼에도 성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된다.

이런 면이 많은 외국인의 눈엔 이중적이며 일종의 정신분열적(schizophrenic)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다. 한마디로 다들 ‘할 건 하면서 안 하는 척’ 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 대중문화에 대해 매우 솔직하다. 일부 여성 아이돌그룹의 춤은 아예 노골적이고 낯뜨겁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많은 한국인은 여전히 ‘모르는 척’을 한다. 외국인 입장에선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성인들이라면 자유롭게 성을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게 아니지 않나.

 

필자는 여기에서 한국인의 성적 생활이나 습관·취향을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하고 싶은 걸 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점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여전히 금기의 영역이라면, 왜 한국은 성을 거리낌없이 수출하고 있는가.

‘성 수출(sexporting)’이라는 말이 생소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수출품인 한류 문화의 일부 콘텐트가 성적인 자극 무기로 삼고 있지 않느냐고.

 

한국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며 경제성장을 이뤄냈고 여러 수출품으로 세계 시장을 놀라게 했다. 한강의 기적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대 한국 문화, 특히 K팝은 어떤가.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채 무대에서 성적인 흥분을 목표로 한 춤을 추는 어린 여성들을 K팝 스타로 키워내고 있는 건 방 안의 코끼리처럼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거의 모두가 이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게 나로선 참 이상하다.

마치 속으로는 “우리 한국인들은 섹시한 여성들(때론 남성들)을 만들어내 쇼케이스 해서 한류 열풍을 만들어낼 거고, 그 결과로 어떻게든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외국인에게 인지시키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외국인들은 많이들 그런 인상을 받는다.

 

약 60년 전 미국인들이 뉴욕 매디슨가에서 시작한 을 이용한 마케팅이 한국에서 거의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섹시하고 젊고 성형외과적 도움을 받은 여성들을 내세워 남성들이 만들어낸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를 부르게 하는 것. 이게 한국의 매력을 전하는 거라고 여기는 듯하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목적은 물론 인간의 매력을 사고파는 것이다. 내가 지난해 인터뷰한 뮤직비디오 감독은 “팬들이 보고 싶어하는 걸 보여줄 뿐”이라고 항변했다. 한국의 전통적 유교 가치를 옹호하자는 것도 아니다.

 

일부 K팝은 현재 서구식 자유, MTV와 물질주의가 얄팍함으로 버무려진 뷔페 상차림 같다. 한국 대중문화 업계 전체를 탓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줬으면 한다.

문제는 이런 현상을 나 몰라라 하는 대다수 한국인이 아닐까. 성이 상품화된 콘텐트를 해외에 수출하면서도 정작 성을 터부시하는 태도 말이다.

 

지난해 나는 한류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선 갈 길이 멀다고 주장한 바 있다(2013년 7월 7~8일자 31면).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팔기 위해선 현재 한류 콘텐트가 진정 한국을 대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적인 콘텐트에 대해 눈 가리고 아웅으로 일관한다는 건 위선자가 되는 것뿐이다. 성을 금기시하면서 성을 파는 현실이 바뀌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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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학사를, 하버드대에서 교육심리학 석사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수전 리 맥도널드 아리랑TV 토크쇼 ‘인터뷰’ 진행자

 

 

 

 

 

 

 

 

 

 

리오데자네이로에 있는 꼬르꼬바도 언덕 (Mountain of Corcovado)은
1931년 브라질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수님 상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 상은 높이가 30m이고, 좌우로 벌린 두 팔의 너비도 28m,
무게 1145t에 이릅니다.

 

예수님 상을 사진에 담으려면 거의 누운 자세에서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어야 할 정도로 큽니다.

 

1926년부터 5년간 공사기 이루어졌는데 기단내부에는
150명을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이 있으며 또한
리오의 시내경관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코파카바나 해안 등의
유려한 곡선까지도 감상할 수 있는 15명 정원의 전망대가 있습니다.

 

 

브라질의 수도 히오데자네이로의 상징이면서

브라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꼬르꼬바도 언덕(Morro do Corcovado)의 예수님 동상입니다.

 

 

가까이서 본 예수님 동상  

 

 

건축 당시의 예수님 상 모습입니다.

 

 

산 아래서 본 예수님 동상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전동궤도차

 

 

산에서 내려다 본 뻥지 아수까르 바위산

 

 

동상 앞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관광객 

 

 

예수님 동상 바로 밑에서 촬영

 

 

비행기에서 촬영

 

 

저녁노을이 깃든 동산과 리오 시가지  

 

 

전동차가 동상 밑에까지 올라간다. 

 

 

때로는 구름에 가린 동상 앞에 신비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맑은 날  아름다운 리오의 모습 

 

 

 

 

바다가 보이고 호수가 있고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리오

 

 

 

구름을 배경으로 한 동상

 

 

시가지를 내려다 보는 관광객

 

 

 

 

 

 

 

 

 

 

 

 

 

 

 

 

 

1917년 11월 7일은 러시아의 최후의 날이었다. 이날은 곧 이른바 볼세비키 혁명에 의한 <레린>의 공산당이 소련을 집권한 날이기도 하다.

 

이 무렵 공산당의 코카사스 기병대가 모스코바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때 소련의 성직자들은 <축도 할 때 손가락을 어떻게 펼 것인가> <성직자의 까운(robe)의 색깔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이 아닌 <대설전(大舌戰)>으로 머리통이 터지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공산당의 혁명군이 쳐들어 와 그 처절한 러시아의 최후의 날을 만들고 말았다.

 

러시아에는 십자가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밥그릇에도, 가구에도, 벽에도, 거리에도 십자가뿐이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도, 그 어느 교육과 문화예술과 사회 풍토 하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최후의 날은 너무나도 처참하게 다가 왔다.

 

한 예로 금은 보화를 가득 싣고 처녀들과 도망가던 사제(司祭-Priest)들과 귀족 125만 명이 영하 40도의 추위에서 몰살당했는데 어떤 산모는 애기를 반쯤 낳다가 엄마도 애기도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이 때 옆에 있던 어떤 양심적인 성직자가 <하나님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소서>라고 통곡하며 울부짖더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최후를 기억하는가?

 

얼마나 이스라엘은 <종교적>이었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 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라고 책망 하셨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이 십자가의 비밀을 모르게 하고, 이 비밀을 모른 채 살아가게 한다.

 

1863년, 아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선언한 일로 인해서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자기 생명을 흑인들의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바친 것이다. 흑인들은 평생 아브라함 링컨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링컨이 땅에 묻힌 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역사학자가 남부 알라바마에 있는 농장에서 여전히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흑인을 발견했다.

 

"당신은 링컨을 아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예, 링컨에 관한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링컨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해방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노예들의 무식함을 농장 주인들은 최대한 이용해서 계속 흑인들을 노예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식한 채 내버려두어라. 그리고 일만 시키자.'

이것이 노예 주인의 생각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 십자가 안에 담겨있는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는 영적 지식이 부족하면 마귀만 좋아할 것이다.

사탄은 이렇게 획책한다.

'모르는 것이 좋다. 교회만 다녀라. 그 정도면 됐어.' 라고....

 

크리스천이 십자가 앞으로 나아 가려는 문을 모두 닫아 버리고 다른 것은 다 누려도 십자가의 비밀만은 모르게 하는 것이 사탄의 술수(術數)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십자가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장재언)

 

 

 

 

 

 

 

 

 

 

 

 

 

 

 

 

 

카친족 - 미얀마에 약 15만 명으로 가장 많이 살지만, 그밖에도 중국에 약 9만 3,000명, 인도에 수천 명이 살고 있다.

 

전체인구는 약 24만 5,000명이다. 티베트미얀마어군에 속하는 다양한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징포족[景頗族]·아시족[阿系族]·마루족[馬魯族:랑어족(朗峨族)]·나시족[拉善族]·눙족[農族]·리쑤족 등 여러 집단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의 공식 소수민족 언어인 징포어[景頗語]를 사용한다. 1885~1947년 영국의 통치하에서는 이들의 영토 대부분이 변경지방으로 특별히 관리되었으나, 미얀마가 독립한 뒤에는 준자치지역이 되었다.

 

전통적인 카친족 사회는 주로 벼의 이동농경을 통해 유지되었으나, 약탈과 전투에서 얻는 수익에도 의존했다.

추장은 대부분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부계 친족과 인척의 도움을 받아 부족을 다스렸다.

 

현재 카친족은 인구밀도가 낮은 산악지대에서 살지만, 카친족의 영토에는 다른 부족들이 사는 좁고 비옥한 계곡도 포함된다. 그런 계곡 사람들은 불교를 믿는 반면 카친족의 전통종교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애니미즘적인 조상숭배의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이들의 약 10%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2013년 카친족 교회 풍성한 추수감사예물 광경

 

 

카친족 복장을 하고 예배후 성도들과 함께 사진

 

 

미얀마 카친족 성도가 처음으로 카친어 성경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

 

 

중국쪽 카친족(징포족) 개척교회 교인들과 사진

 

 

중국 카친족(징포족) 교회개척기념 푸짐한 식사

 

 

추수감사예배 후 카친족 교인들과 식사하는 모습

 

 

 

미얀마 카친족을 전도하고 이들에게 침례를 주는 광경

 

 

50년된 대나무교회를 허물고 새 성전을 건축하고 기념사진

 

 

카친어로 축하인사 후 건축 지원에 감사 선물을 받는 모습

 

 

3년간 사역자 훈련과 양육받고 첫번째 졸업식 기념사진

 

 

3 년간 사역자 훈련과 양육 받고 첫 번 째 졸업식 기념사진

 

 

깊은 산속에서 훈련받는 군인들에게 전도 후 기도하는 모습

 

 

 

 

선교후원 연락처

 

Asia Bridge Mission (담당 이수잔 선교사)
1727 N. Gilbert Street
Fullerton, CA 92833  USA

 

714)773-4787(H)

714)309-1267(Cell)

 

 

 

 

 

 

 

 

 

 

 

 

 

 

 

손바닥만한 한반도 그나마 그 반쪽 남한이라는 땅 한 모퉁이에서 자생(自生)한 삼성이라는 기업.

그 기업이 20여년 만에 세계 일류기업으로 우뚝 섰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삼성을 모르는 자가 있으랴.

 

우리는 삼성이라는 이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삼성을 알려고 하지 않는가? 삼성을 오늘의 삼성으로 이끈 견인차 역할을 한 이건희회장을 배우려 하지 않는가?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이어받고 난 직후 미국시장 진열대에 놓인 삼성제품의 뚜껑이 깨지고 열리지도 않은 채 구석에 쳐 박힌 것을 발견했다.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 후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시작으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슬로건을 통해 [관리의 삼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을 주창했다.

 

그는 ‘제트기가 초음속 제트기로 넘어가려면 일반 비행기 부품으로는 불가능하다. 선진 기업을 앞서려면 마하 1이 아닌 마하 2, 3이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책상 위에 삼성전자 제품을 일렬로 진열한 뒤 망치로 이를 하나하나 부수면서 “모든 것을 다시 만들라”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를 발견하고 나를 파괴하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이렇듯 솔직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아니면 한 끼 점심 가격이 경매에서 10억원이 넘는다는 워런 버핏을 만나는 일이 어려울까? 이들보다 몇 배 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바로 [] 자신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나]를 만나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장은 1993년 2월 미국 LA 지역에 있는 베스트바이(Best Buy) 매장 구석에서 뽀얀 먼지가 쌓인 채 방치돼 있던 삼성 가전제품을 목격한다. 그곳에서 자신과 만났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업을 하는가?' '과연 어떻게 사업을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안고 돌아와 1993년 6월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했다.

 

 

어디서 나를 난 날 수 있을까?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과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초라함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신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말하는 '아레테(Arete·탁월함)'의 삶이나, 로마의 비르투스(Virtus)의 삶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일까?

현실의 삶뿐 아니라 위대한 문학작품 속 주인공과 그의 삶을 통해, 역사적 사건과 인물, 혹은 철학적 예화를 통해, 또 예술가들과 기업인들의 광기와 몰입의 삶을 통해 우리는 나약하고, 방황하는 를 만나고 인간을 이해한다.

 

생존하시는 제 아버님의 말씀이다. 본인은 기억하실는지 모르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으라고 하시면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이야기 [플루타크 영웅전](플루타르코스 영웅전)를 사 주셨다.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  내가 나를 만날 때,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 특별한 에너지인 창의력이 생성되는 것이다. 르네상스는 '나'와 만나고 '인간'을 만났을 때 이루어진다.

 

14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문학가 페트라르카(1307~1375)'와 보카치오는 그리스 출신의 인문학자 레온티우스 필라투스를 피렌체로 초청해 1360년경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아레테를 추구하던 그리스정신을 이탈리아에서 부활시켰다.

또 로마의 지성 키케로가 쓴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그 인문학적 사유에 감동한다. 그리고 '신의 학문' 뿐 아니라 '인간 학문'도 쓸 수 있게 된다.

삼성을 알기만 하지 말고 이건희를 인문학적으로 배워야 한다.(장재언)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갈 때

그 사다리를 붙들어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

 

엔리코 카루소

(이탈리아 테너가수:1873~1921년)

 

 

 

 

카루소

Enrico Caruso (1873-1921)

 

지금부터 19년 전인 1995년 12월 31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천년 동안의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과 인물을 설정 발표했다.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꼽았다.

 

그럼 가장 뛰어난 성악가로는 누가 뽑혔을까? 이태리 벨칸토 창법의 규범이라 불리는 사람,
그를 빼고는 아리아를 논하지 말라는 가수,
자신의 음성을 음반으로 남긴 최초의 음악가,
바로 엔리코 카루소였다. 

 

'금세기 최고의 테너, 황금의 목소리' 라 불렸던
나폴리의 기계공 출신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

 

그는 1900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토스카니가 지휘한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열창하면서 인기가도를 달리기 시작, 1902년 부터 1920년까지 미국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607회나 공연함으로써 카루소의 신화를 탄생시켰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3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그의 목소리는 벨칸토의 규범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리리코 스핀토로서의 극적인힘과 풍성한 표현력,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정확한 기교, 뛰어난 연기력은 그를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추앙 받고 있으며 후배 성악가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위대한 성악가로서 영원히 기억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뿐 아니라 그는 독실한 신앙생활로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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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다운타운 '꽃 시장'

 

LA다운타운의 꽃도매시장의 하루는 이른아침부터 시작된다. 남가주 곳곳에서 최고 품질의 꽃을 사러 몰려든 도매, 소매상으로 1년 내내 늘 분주하다. 이른 아침 LA 플라워마켓(Flower Market)을 고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LA다운타운 지역 '월스트리트(Wall Street)' 길. 동이 트기도 전에 이 거리에는 '꽃'이 먼저 핀다.

 

새벽 6시.

LA꽃도매시장'(Flower District)은 벌써부터 소매상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각양각색의 꽃은 박스를 나르고, 꽃가격을 흥정하는 상인들의 땀으로 이슬을 맺는다.

 

이곳은 미국 최대의 꽃 도매시장이다. 면적만 총 10만 스퀘어피트 규모에 달하는 LA꽃도매시장은 플라워 마켓 내 도매상가(75개)를 포함, 150여 개 이상의 업소가 활발하게 영업 중이다.

 

그 중 5만 스퀘어피트를 차지하고 있는 LA 플라워마켓(Flower Market)은 두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으며 75개 대형점포가 입주해 있다.

 

한인이 운영하는 점포는 11개로 한인 업소 점유율은 15%에 이른다. 이들은 LA한인타운을 비롯한 남가주 지역 한인 업소에 날마다 최상의 품질의 꽃을 제공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곳은 새벽마다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꽃으로 화려한 '꽃 길'을 이룬다.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등 중남미에서는 주로 장미, 글라디올스 등이 공수된다. 터키, 이탈리아, 에콰도르 등에서는 카네이션 등이 도착한다. 총 500여 품목 이상의 다양한 꽃들이 매일 직거래되고 있다.

 

LA플라워마켓은 현재 이탈리아계 회사 멜라노사가 소유하고 있다. 키무라, 벌룬스 어웨이, 초이스 플라워, C&K도매, 테드스 에버그린 등 한인이 운영하는 도매상가도 이곳에 있다.

 

8년간 키무라를 운영하고 있는 캘리 옥 사장은 "새벽 2시부터 거래가 이뤄진다. LA 한인타운은 물론 OC, 밸리 등에 소재한 남가주 전역의 한인 꽃집들은 꽃도매상가에서 하루에 팔 꽃들을 꼭두새벽부터 쇼핑에 나선다"며 "작년보다 경기는 안 좋지만 꽃을 구입하는 소매는 꾸준한 편이다"고 밝혔다.

 

이곳 플라워 마켓은 남가주 각지에서 오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도·소매는 물론 필드트립부터 꽃을 공부하는 예비 플로리스트들로 북적거린다.

 

최근에는 소매업자는 물론 플라워 디자이너도 비중이 높은 고객이다. 웨딩시즌을 앞두고 플라워 디자이너들의 방문도 증가하는 추세다. 또 할리우드와 근접한 지역 특성상 셀러브리티들의 전용 하우스 플라워 디자이너도 자주 찾는 편이다. 주말에는 일요일을 앞두고 교회 장식을 위해 모여드는 교인 고객들로 붐비고 있다.

 

서양 난 도매업체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경기가 안좋다 보니 교회 같은 곳은 꽃값 부담 때문에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난 구입이 늘고 있다”며 “저렴한 값 때문에 도매상에서 싱싱한 꽃을 직접 구입하는 스마트 쇼퍼들도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한인 플라워리스트 이희송씨는 “교회에서 꽃 봉사를 하면서 이곳 플라워 마켓을 자주 찾는 편”이라며 “꽃 관련 부자재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이곳에서 꽃병은 물론, 화분 등 부자재까지 구입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밝혔다.

 

LA 플라워마켓은…

 

멜라노사가 운영하는 도매상가. 이탈리아 출신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운영하고 있다. 연평균 25만 명이 찾는다. 오전 2시부터 경매가 이뤄지고 오전 8시부터 일반 소매에 공개된다.

 

매주 월·수·금요일 오전 2시~오전 11시,

화·목·토요일 오전 5시~오전 11시 영업하며

일반 고객들은 월·수·금 오전 8시, 화·목·토 오전6시부터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는 1인당 2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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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 나의 앨범 (5년 전) 몇 장

 

 

5년 전 일이다.(2009년)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중이다.

한 젊은 여신도가 눈물로 기도 드리고 있다.

볼 때 마다 감동이 되어 내 앨범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5년 전 일이다.(2009년)

서울 마포구 한미교육위원회에서 실시하는

토플시험 원서를 접수시키기 위해 수험생이 장사진을 이뤘다.

당시 토플 시험은 CBT(Computer-based Testing) 방식에서

인터넷을 통한 iBT(Internet-based Testing) 방식으로

바뀔 예정인 가운데 실시되었다.

 

 

 

지금부터 5년 전 일이다.(2009년)

광주 북구 동림동에 사는 김주만(당시 74)씨의

7년생 진돗개 흰둥이

전남 담양에 있는 김씨의 사돈댁에 보내진 지 40여 일만에

20여㎞ 떨어진 김씨의 집으로 돌아왔다.

40일 동안 무엇을 먹고 어느 경로를 통해

주인 집으로 돌아 왔는지 궁금하기 그지 없다.

돌아가자. 아버지의 집으로. 

 

 

 

 

 

 

 

 

 

 

 

 

 

 

 

 

난...

작고 볼품이 없었다. 어렸을 때 부터 그랬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열성인자(劣性因子-recessive factor )만 물려 받았는지

난 항상 뒤처졌다.

 

이제 내 나이 20.

남들은 다들 좋은 나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인생 중 가장 최악의 순간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지 몰라도 난 여자친구가 없다.

여자친구 없는 것이 뭐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세...

하긴 볼품없는 나에게 다가올 여인이 어디 있을까...

나 역시 용기가 없어 애만 태우다가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모임에서의 단체활동에서 봉사활동을 나가게 되었다.

그곳은 조그마한 교외에 있는 요양원.

 

주로 이제는 더 이상 차도가 없는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

식물인간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2층의 206호실.

내가 맡은 담당환자가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할아버지 할머니 겠지.

난 206호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실내. 환한 병실...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조용했다. 그 흔한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란것은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닌 작은 체구의 소녀...

긴 머리를 땋아 한쪽으로 늘어뜨린 소녀가 누워있었다.

내가 잘못 들어온 것인가...

난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 다시 확인했다. 맞는 병실이었다.

순간 밖에서 들어오는 한 사람.

"어서오세요. 앞으로 일주일간 우리 아이를 보살펴줄 사람이군요."

"아... 전..."

"잘부탁해요. 저 아이의 애미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엉겹결에 나도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침대 앞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어었다.

저 아이는 식물인간이었다.

10여년전. 저 아이가 10살때 교통사고가 났다고 한다.

몸의 상처는 다치료되었지만 그때 이후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10년전 10살이라면.... 20살...

하지만 아직도 중학생 정도로만 보일뿐이었다.

아마 활동을 하지 않는 탓으로 성장이 느린것이리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매우 지쳐보였다.

10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그러며 잠시 눈주위를 훔쳤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악수를 청했다.

 

다음날.

난 병실로 찾아갔다.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난 !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빛이 너무밝다. 난 창가로 다가가서 블라인드를 조금 내렸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관을 통해서 들어가고 관을 통해서 나왔다.

내가 할일은 없었다.

"그래... 나같은 사람은 그냥 조용히 앉아 있으라... 이거였군... 후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계속 잠을 잘 뿐이었다.

어머니가 말하길...    

가끔 눈을 뜰뿐이며 대다수의 시간을 잠으로 보낸다고 했다.

결국 내가 할일은 이 병실의 물건이 도둑맞지 않게 지키는 것.

그 역활밖에는 없었다.

 

다음날.

난 책한권을 들고 갔다.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다가 문득 그녀를 보았을때

그녀는 눈을뜨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눈을 뜬것을 본 것은...

비로서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불안한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어머니가 들어왔고 그녀는 다시 안심했다는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난 들고간 책 한권을 모두 읽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난 다른책 한권을 가지고 병실로 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일찍 나와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정답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 또래가 흥미 있어할만한 연예인 이야기 였다.

인사를 건네자 어머니도 간단하게 인사를 받으시구

그녀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야기를 알아들어요?"

난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알아들을 것이라고 믿어요."

"..."

그녀의 어머니는 바쁜 일로 곧 나갔고 또 병실에는

그녀와 나 밖에 남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책을 폈을때 문득 이불 밖으로 나와있는

 그녀의 하얀손이 보였다.

난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아 이불 안으로 넣어주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깨어있었다.

순간 놀라 어쩔줄 모르다가 그냥 웃어보였다.

그녀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책을 다시 펴들었을 때...

난 내 심장이 무척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쁜짓을 한것도 아닌데도 내 심장은 계속 두근 거렸다.

결국에는 휴게실로 나가 커피한잔을 마시고 겨우 진정이 됐다.

 

다음날.

병실에 들어가자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난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바보같은 짓인줄 알았지만...

얼마전부터 그녀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순간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가 날 보더니 웃었다.

식물인간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들어와 무슨일인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난 사실대로 말했다.

"당신도 느꼈군요. 저 아이가 웃는 것을..."

"느끼다니요? 그럼 정말로 웃은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순간이지만 다시 어머니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저도 몇번이나 보아서 의사선생님에게 말했지만... 제 착각이랍니다.

저 아이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수 있는 부분은 없어요.

하지만 잘 되었네요. 당신도 저 아이가 웃은 것을 느낄수 있다니...

저 아이와 잘 통했는것 같군요" 하며 웃어보였다.

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난 그녀가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음날.

이제는 병실을 찾는 것이 내 일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나 혼자 책을 읽는 대신에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동화부터 시작해서 전쟁소설까지 난 닥치는 대로 읽어주었다.

그녀는 그날따라 자지 않고 내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오늘은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깜빡 가져올 책을 놓고 와 버렸다.

병실에 들어가자 이미 그녀는 깨어있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30분 전부터 깨어있었다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웃어보였다.

난 그녀에게 책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책을 가지고 오지 않은 대신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읽었던 책이야기, 친구이야기, 시골이야기... 해주었다.

그녀도 잠들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난 그녀가 무척 편하게 느껴져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동생의 이야기. 열등감을 느끼는 나.

여자친구가 없는 나... 이런 내 얘기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용기가 없어 그냥 보내버린 사람들.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누가 알게될까봐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내 스스로 하고있었다. 왜일까... 그녀는 식물인간이니까...

그래서 내가 마음 놓고 하는 것인가?

난 밤새도록 그녀에게 넋두리를 하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때. 내 뺨에 따뜻한 것이 놓여있었다. 그녀의 손이었다.

그녀는 계속 깨어있었다.

"다.. 당신이 올려놓은 거에요?"

난 놀라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대답할리 없었다.

"제.. 제가 밤중에 실례를 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난 병실을 뛰쳐나왔다. 꼴좋구나 이녀석아...

어제는 밤새도록 넋두리를 해 대 더니..

그리고 난 집으로 뛰쳐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난 늦게서야 병실을 찾았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의 병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의 그녀.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이하였다.

"어제는... 일찍 들어가셨더군요..."

"네... 사정이 있어서..."

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을 이었다.

"오늘 마지막 날이네요..."

"네에. 저 아이가 무척... 좋아하는듯 했는데. 아쉽네요."

나는 다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며 애써 어머니의 시선을 피했다.

"당신이 오고 난 후로부터 저 아이가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지금까지는 저런일이 없었는데...

의사선생님은 좋은일이라고 하시더군요."

"네에..."

난 언제나 처럼 침대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저 오늘 마지막날이에요. 지금까지 고마웠구요 ..

어제의 일은 죄송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말이 없었지만 난 또한번 그녀의 웃음을 느낄수 있었다.

용서해준다는 뜻인가... 그리고 나도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다음날.

난 하루종일 안절부절해 있었다. 뭔가를 빼먹는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덜렁거리는 녀석. 또 뭔가를 빼먹고 헤메는군...

바보... 바보... 바보...

그러기를 일주일.

난 원인을 찾아내었다. 그 요양원 그곳에 뭔가를 놓고 온것이 틀림없었다.

책을 놓고온건가... 아니면 내 물건이라도...

 

다음날.

아침일찍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척 놀라는듯 했지만 난 인사를 하고 그녀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두손으로 꼭 잡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등에서는 땀이 배어나왔다.

하지만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점심시간도 저녁시간도 잊은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배고프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 시간이 내겐 둘도없이 중요한 시간이었기에...

나는 그 후로! 계속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의 어머니도 고맙게 여기고 있었고

나 역시 어머니가 고마웠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남으면 무슨책이든지 닥치는 대로 읽어 이야기할 주제를 찾았다.

그러던중 어느날... 난 그날 밤도 언제나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마나 이야기 하고 있을까...

문득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 해줄때면 언제나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겨우 입을 열었다.

"후후...그래요... 난... 그러니까..."

난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더듬거렸다. 오늘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꼭 해야만 했다. 입에 침이 마르고 입술이 바짝 말라 버렸다.

하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당신을 좋아해요." ..

해 버렸다.

 

20년만에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좋아한다는 말.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던 건가...

하지만 난 그녀에게 말했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지금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야기 뿐이었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순간. 그녀의 손이 히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우... 움직였어!! 난 급히 간호원을 불렀다.

곧 의사가 들어왔고 진찰을 조금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노'였다.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그렇게 일 주일 후...

그녀의 병실을 찾아갔을때 그녀의 침대는 비어있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간호원...

난 간호원에게 목소리를 높여 물어보았다.

그녀는 매우 놀라 더듬거리며 대답해주었다.

"어제저녁... 손가락을 움직였어요. 닥터도 확실하게 보았구요.

그래서 큰 병원으로 옮겨갔습니다."

난 병원의 이름과 위치를 알아내고 단숨에 달려갔다.

요양원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

그 사이에서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냈다.

어머니는 날 보자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 아이가 차도가 있는 것은

모두 당신의 덕입니다.

근육이 되살아 나고 있데요. 이제 움직일수 있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겨우 겨우 그녀의 어머니를 진정시킨후 그녀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

언제나 같은 그녀.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이야기 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움직일수 있데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울고 있었다. 정말...

기뻐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난 시간이 남는대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다.

그러기를 6개월 그녀는 정말 큰 차도를 보여주었다.

신문과 방송사에서는 10년만의 기적이라며 몇번이고 찾아왔었다.

정말이지 이것은 기적이었다. 그녀가 움직일수 있다니...

그러자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왔다.

이제는 곧 그녀를 만날수 없게 되겠구나...

그녀도 다른 정상인과 같이 되면... 나를 만날 일은 없게될꺼야...

나같은 사람은 거들떠 보지 않겠지...

6개월전 그녀를 좋아했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그 때 말을 할 수 있었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뻔하겠지...

나같은 사람. 관심없는 것은 당연해...

 

그 후로 난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전과 같은 허탈감. 이번에는 더 힘들었다.

몇달간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끔 신문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때면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그녀가... 지금도 날 기억하고 있을까...?

후후... 잊어버리자. 이젠 끝난일이야...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문앞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가 먼저 친절하게 말을 건네오며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그간 사정이 있으셨겠죠... 저와 아이가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끔씩이라도 들려주세요 어찌되었건 아이의 은인이니까요..."

우연일지도 모르는 이 일을... 그녀의 어머지는 내덕으로 알고 감사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녀의 말.

그녀는 ! 지금 굉장한 차도를 보여 재활치료도 받고 있다고 한다.

"저... 혹시 저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네. 당신이 처음 올때부터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면 그날밤 내가 했던 모든말.

내가 했던 고백들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말...예상하던 바였다.

"그럼. 꼭 한번 들려주세요."

그녀의 어머니는 인사를 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난 텅빈 골목에서 혼자 서서 어머니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볼뿐이었다.

 

리고 다음날.

난 커다란 용기를 내어 그녀를 찾아갔다. 얼마만인가... 그녀를 보는건.

병실에 찾아가자 그녀의 어머니가 홀로 앉아 있었다. 침대는 비어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언제나와 같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인사를 건넨후 그녀를 찾자 재활치료중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찾아간 재활치료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많은 환자들이 보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여전히 긴 머리를 땋고 금속으로된 지지대에 몸을 싣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보였다.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옷은 땀으로 흥건했지만 그녀는 걸음을

옮기는 것을 쉬지 않았다. 마치 갓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그녀는 위태위태했다.

어느덧 그런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서 있었다.

난 그대로 돌아가려 했다. 이제 건강한 모습을 봤으니...

내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툰발음이었다.

외국사람이 부르듯 서툴게 부르고 있는 소리였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였다.

그녀가 날 보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몇번이나 반복해서 부르고는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툰걸음.

그런 걸음으로 몇번이나 넘어질뻔 하면서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난 움직일수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정든 아버지를 만난듯...

그녀는 결국 내 이름을 부르다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원망하며

그녀는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의 환자들과 간호원은 그녀를 위해

길을 내주었고 ! 모두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점차 내게로 옮겨왔다.

여전히 울먹이며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

이제...

이제 얼마남지 않았어요. 힘을내요.... 난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힘들게 다가온 그녀는 쓰러지듯 내게 안겼다.

곧이어 주변에서 들리는 박수소리와 함성소리...

난 그녀를 안고 천천히 앉았다.

그녀는 계속 울먹이면서 익숙하지 않은 발음으로 계속 말을 했다.

"에... 에... 차자오지... 아.. 안았.. 써요..."

원망하듯 말하는 그녀. 난 대답할수 없었다.

 

'당신이 날 싫어할까봐...

난 당신이 떠나버릴것이 두려워 찾아오지 못했어요.' .....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릴뿐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할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녀는 계속 울먹이며 말했다.

"...말... 지.. .지금까지... 다..단신을 차자가려고 열심히 했어요."

난 순간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 그때 말... 기... 기이억 하고... 있...있써요..."

그녀는 계속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 말을 이었다.

내 귀에는 그녀의 말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 나도.. 좋아... 좋아해요. 이... 이말하고 .. 시.싶었.. 어요.."

그리고 그녀는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녀의 젖은 등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내가... 내가 왜 쓸데없이 걱정을 했을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난 울먹이는 그녀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리고... 정말 좋아해요."

사랑한다는 말... 할 자신이 없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입안에서만 맴돌다가 난 '좋아한다'라는 말이 나와 버렸다.

그녀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

더 이상은 놓쳐버리고 싶지 않기에...

떨어지고 싶지 않기에...

"그.. 그럴 때는..사라...사랑이라느..는

말을 써도 조..좋을.. 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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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레놀 등 아세트아미노펜 위장에 부담적지만,

과음 후 복용하면 간에 부담

애드빌 등 이부프로펜, 위벽 보호 층 얇아져

위 점막 손상 위험

 

가벼운 두통은 물론 감기, 급성 통증에 이르기까지 진통제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약도 드물다.

하지만 흔히 복용하는 진통제라고 해서 다 같은 약은 아니다. 성분과 제형을 비교해 자신에게 꼭 맞는 것을 찾아 복용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진통제로는 타이레놀과 애드빌이 있다.

전문가들은 진통제를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구입할 때 성분을 제대로 확인하고 증상 및 건강상태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해열진통제’와 ‘소염진통제’

증상에 따라 구별하여 복용

 

 

진통제는 크게 해열진통제와 소염진통제로 나뉜다.

‘타이레놀’은 대표적인 해열진통제이다.

소염진통제로는 이부프로펜과 덱스부프로펜이 많이 사용되는데 애드빌, 이지엔 6 프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해열진통제는 말 그대로 해열과 진통 작용을 하고, 소염진통제는 여기에 염증을 가라앉히는 작용도 갖는다.

두통, 근육통 등 단순 통증이 있거나 열이 난다면 해열진통제를...

근육염, 치은염처럼 염증이 동반되면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는 것이 좋다.

 

해열진통제는 통증과 발열의 원인이 되는 물질인 프로스타글란딘의 합성을 중추신경계 내에서 억제해 통증을 가라앉히고, 소염진통제는 말초 조직에서 차단해 해열진통 작용 외에 소염작용도 한다.

프로스타글란딘은 통증과 발열 외에 위산분비를 억제하고, 강력한 혈관확장 작용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말초에서 억제하면 장기간 사용시 위장관 출혈 위험과, 콩팥으로의 혈액공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해열진통제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은 위 점막의 손상을 일으키지 않아 위장관계 안전성이 크고 부작용은 비교적 적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두통, 치통 등 급성통증은 물론 만성통증의 1차 치료제로도 널리 쓰인다.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임산부에도 투여할 수 있는 안전 분류 B 등급으로, 호주식약청(TGA)에서는 임산부가 가장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A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단 아세트아미노펜은 간에서 대사돼 소변으로 배출되는데 평소에는 바로 대사돼 문제가 없지만 과량 복용했거나 음주 후 복용하게 되면 간 세포가 손상 될 여지가 있어 간이 약한 사람은 의사, 약사와 상담해야 한다.

 

 

애드빌 등 이부프로펜 같은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는 위벽 보호 층이 얇아지며 위 점막이 손상될 위험성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공복에 복용이냐 식후 복용이냐, 복용법 차이

 

단일성분의 해열진통제와 소염진통제는 복용법도 다르다.

아세트아미노펜 단일성분은 공복에 복용 가능하지만 소염진통제는 공복 시 투여는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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