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3, 2014

 







 




 

 


 







 




 




 

지고이네르 바이젠 이란 독일어로 집시의 노래라는 뜻인데

정처없이 유랑하며 떠도는 집시의 삶의 애환

그리고 기쁨을 묘사하고 있.

 

전형적인 집시 음악인 차르다시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강렬한 카덴차 풍의 도입부에 이은 느리고 애수에 찬 라산과,

끝나기가 무섭게 정신없이 몰아치는 프리스카가 연속해서 연주된다.

 

인류가 남긴 수 많은 바이올린 명곡 중의 명곡인 것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 (언)


 



 


 
 




 

 
 
 

 

 


 
 
 

 
 

 





 



전북 부안 변산 출신.

한국시인협회 회원. 수원 영복여중 국어교사.

시집 『국어 시간에 북어국을 끓인다』(2000),

『숲에 들면 나오지 못하는 새』(2003),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2014) 외 공저 다수.


 

지 애비 기일이라고

여편네와 새끼들을 끼고 아들이 왔다

해질녘 노을이 바람처럼 펄럭이는 굽이진 산길을 넘어

먼 길을 달려 와 상을 차린다

아들은 아직도 그 옛날 허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빈 들판을 가지고 있다

못난 애비 에미 탓에

어린 날 보리밥 입으로 우겨 넣으면서 울던 그 울음

감꽃처럼 하얗게 돋아나는 부스럼덩이 슬픔을

애비의 술안주로 차려놓고 싶어 먼 길을 달려왔다

산길을 흔들흔들 넘어오는 지 애비의 술잔에

술 한 잔 따르고 싶어

휑한 바다를 안고 출렁이며 왔을 게다

애썼다, 얘야. 색시 얻고 새끼들 맹글면

지 울타리 키우기도 불보듯 뻔헌 것인디

뼈만 남은 지 애비 무덤도 짐 되는 일이 되는 것인디

잊지 않고 달려와 줘 고맙다

마음 밖에 둘 일은 아니다만

나 죽거들랑 기일 땐 오지 말거라

기일이 되거들랑

아버지 어머니만 조용히 조용히 불러다오

살다 떠나는 일

너를 떠나지 못해 애달픈 일일 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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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어머니의 독백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이를 통해 아들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시 속 대상이 시인 자신이라고 읽히는 것일까.

 

‘어린 날 보리밥 입으로 우겨 넣으면서 울던’, ‘부스럼덩이 슬픔을’ 가진, ‘지 애비의 술 잔에/ 술 한 잔 따르고 싶어/ 휑한 바다를 안고’ 온 아들의 모습을 나는 자꾸 시인과 겹쳐 읽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의 ‘나 죽거들랑 기일 땐 오지 말거라 /기일이 되거들랑 /아버지 어머니만 조용히 조용히 불러다오’라는 목소리를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어떤 장면을 연상해 읽고 있다.

 

어쩌면 나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시를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상과 시인, 어머니와 내 기억을 겹쳐 읽음으로써 작품 속 어머니와 아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덕에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시가 있다. 그의 시가 대개 그러하다. 시 속 풍경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고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아들은 이 시대 중년의 피로와 고단함이며, 그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또한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 그 자체 아닌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머니의 기일, 그래서인지 더욱 가슴 저릿하게 다가오는 시다. (김순아 시인)


 

 

 

 







 














 

로마가톨릭교회의 ‘다름’은 과연 용인할 만한 수준인가?

 

기독교회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성격과 생김새가 다르듯, 교회와 기독인의 신앙·표현·실천·관심은 조금씩 다르다. 자신과 다른 견해와 고백을 가진 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의 넓이와 깊이가 필요하다. 삶의 형태 차이를 가진 교회들의 에큐메니칼 활동은 언제나 절실하다.

 

기독인의 결함 가운데 하나는 같음보다 다름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인간의 죄성(罪性)은 동질성보다 차별성을 부각시켜 타인이나 타 집단과 대립각을 세우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본질과 기본에 충실하다 보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기 위해 애씀이 마땅하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경우에는, 같음보다 다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름에 이르게 된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가진 독특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가동되었고, 사실상 이들에 의해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좌 밑으로 ‘귀정(歸正)’하는 형태의 교회일치운동이 추구돼 왔다. 개신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의 가시적인 조직체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고속 행진을 해온 것이다.

 

최근 한국의 로마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회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교회들이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조직했다. 신앙고백 또는 교리, 곧 신앙과 가시적 조직체 곧 직제 통일시키려는 목적으로 알려졌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일치시키려는 움직임은, 신자들이 서로의 교회를 교파나 교단을 바꾸는 정도로 여기는 현상을 낳고 말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하고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m Sanctam)’를 추구하자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렇듯 서로가 모두 같은 ‘기독교’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결국 같은 교회인가? 두 교회는 형제관계인가? 교파가 다른 정도인가? 개신교회 신자가 천주교회로 옮기는 것은 장로교회에서 침례교회나 감리교회로 옮겨가는 정도의 이동에 불과한가?

 

지난해에 모인 WCC 제10차 부산총회는 종교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선교-전도 선언서’를 선포했다.

한국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를 핵심으로 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에 지극 정성을 다했다. 대한민국 정부로 하여금 거액의 국비를 보조하게 했다.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던 세계교회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해운대에서 자본주의의 특권을 누렸다.

 

WCC 부산총회 뒤, 한국사회에는 대형사고가 거듭 발생해 왔다. 세월호 침몰로 꽃 같은 어린 학생들 수백 명이 죽었다. 지하철 사고, 비행기 추락사고, 건물 화재 사고, 자살사고, 열차 사고, 소방헬기 추락사고, 악성 언론으로 말미암은 국무총리 후보자 자진사퇴 사고 등,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재난들이 발생하고 있다.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땅에 거꾸러진 상태는 그 어떤 사고보다 더 심대하다. 대한민국은 ‘패닉(panic)’ 상태다. WCC 부산총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개신교회와 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가시적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 없지 않다. 입헌군주제처럼 교황은 상징적 인물로만 존재하고, 그 조직 안에서 개신교회의 교리, 제도, 예배, 실천을 그대로 살리면 존재할 수 있다. 이 구도는 계시된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기본 진리-교리에 일치할 때만 실현 가능하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여러 비성경적 미신적 교리들을 폐기처분하면 이루어질 수도 있다.

 

현재의 교황은 종종 유별난 행동으로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성경적·역사적·이론적 근거가 없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제도교리들을 폐기처분한다고 선언할 용기가 있는가?

로마가톨릭교회가 역사적 기독교, 사도들의 복음에서 너무 멀리 가버렸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겠는가?

화체설, 연옥설, ‘기록되지 않은 성경’, 사제의 면죄권, 사도직 계승교리, 교황수위권, 교황무류교리, 만인보편구원주의, 종교다원주의, 계급주의 교회론, 미신적 마리아 교리 등을 폐기한다고 선언하지 않겠는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후, 개신교 진보계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를 교회로 인정했다고 좋아했다. ‘갈라져 나간 우리의 형제들’이라고 일컬으면서 개신교회를 형제로 여긴다고 기뻐했다. 김삼환 목사는 평화방송 텔레비전 문답에서 천주교회를 ‘형님’ 또는 ‘큰집’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7년에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종래의 교회론을 바꿀 의도가 없었고, 바꾸지도 않았다고 천명했다.

“유효한 성례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황과 교제하며 그에게 복속하는 주교만이 유효한 성찬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했다. 개신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라는 말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형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무류성 교리에 따르면, 위 성명은 교리·신앙·도덕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변개·취소될 수 없다.

 

로마가톨릭교회는 WCC의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지 않는다. ‘교회가 아닌 집단’과 ‘교회인 로마가톨릭교회’가 동등한 자격으로 가담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WCC 하부조직에는 회원으로 가담하여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을 이 단체에 계속해서 강화시켜 왔다. WCC의 몬트리올 보고서(1963)의 ‘전통론’ 또는 ‘대문자 T 이론’은 로마가톨릭교회를 형제 교회로 인정하고, 개신교회가 교황좌 아래로 ‘귀정’하는 길을 만들어 준 대표적 신학문서이다.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은 바티칸이라는, 지구상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제국의 황제이다. 교황 방한에 얼굴을 내밀고 싶어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NCCK 회원교회들, 특히 예장통합, 기하성, 그리고 WCC를 적극 지지했던 기독교 언론, 신학교, 대학교, 그리고 자칭 복음주의자들이 앞장서서 환영하고 싶어할 것이다.

 

기억하는가? 한경직 목사가 바오로 2세를 환영한 뒤 한국교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꾸준히 부흥하던 교회들의 성장이 멈췄다. 저성장 시대로 돌입했다. 반면 한국 천주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후 개신교회 신자가 큰 폭으로 줄어들 것으로 본다.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 천주교회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과 더불어 다가올 한국 개신교 교인 수 감소보다 더 걱정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회의 키를 잡고 밀 까부르듯 까불고 계신 듯하다. 쭉정이는 떨어져 나가고, 알곡만 남게 되리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복음 진리로 무장한 신앙고백 공동체는 교황의 방한으로 더욱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최근 일본 동부지역에 몰려온 쓰나미는 핵시설을 강타하여 일본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다수의 일본인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한다. 세슘(Cesium)이라는 방사능 원소의 오염이 가져올 죽음의 그림자 때문이다. 세슘의 맹독성이 너무 강하여 열도를 무인도로 만들 수 있다.

 

로마가톨릭교회개신교회 사이에는 같음과 다름, 곧 동일성 구별성이 공존한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독특성이 심각한 이유는 세슘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균과 같이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기독교 또는 성경적 신앙을 추구해온 개신교회의 멸절(滅絶)을 초래하게 할 수 있다. 교회를 진리의 보루가 아니라 여러 미신과 인간적인 것들의 요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이어진, 유럽·북미·대양주 주류 교회들의 갑작스런 퇴락과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 신앙과 직제 일치를 핵심으로 하는 WCC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들은 사실상 주검으로 변했다. 
 

-최덕성 목사(브니엘신학교 총장,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 전 고신대 교수-



 

 

 







 




 

 

 




 




 




 





 





 





 




 

 




 




 




 




 




 




 




 




 




 





 




 




 




 




 




 




 




 




 

 



 












 

방학이 겹친 여름 철은 길을 떠나는 철입니다.

일상의 공간을 떠나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떠나는 일은
자연과 세상뿐 아니라
자기와의 새로운 만남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는
일상의 시끄러움을 벗어나
침묵의 길에 들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깊은 침묵이란 일상 속에 겪는 스트레스와
시끄러움과 혼돈과 피로를 벗는 최상의 길이 됩니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불안조급함, 자기 (義)와 우쭐댐
자기 억지욕망의 시끄러움이 증발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침묵이란 마침내 고요하고 깊은 밤에  
휘영청 둥근 달이 떠오른 것과 같은
고요환함이 동트는 마음의 풍광(風光)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은 항상
고요와 환함, 환희와 영감의 충만함을 줍니다.
침묵의 길...... 여행의 길을 떠나 보시기를...
 







 

 

 

 





 








 

지난 주일에 내가 한 설교제목을 기억하십니까?

생각이 안 나는데요..

그럼 성경 본문은 기억나시나요?

안 나는데요.

그럼 지난 주일 설교 중에 어떤 것이 기억나십니까?

이렇게 설교자가 교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교인이 하는 말이 예화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의 예화를 인용했는데 어떤 예화가 기억에 남았느냐고 설교자가 물었다. 

교인의 답이다.

 

남한 사람들이 말하는 전등(電燈)을 북한 사람들은 [불알]이라고 말한다는 말이 기억 난다는 것이다.

이 때 설교자는 설교시간에 그 내용을 말할 때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이 기억났다.

 

결국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남성의 성기(性器)를 기억시키는 역할을 한 셈이다. 예수님이 아니고....

이것은 설교의 음란(淫亂)화가 아닐까.

 

어떤 설교자는 자기는 교인들과 공중 목욕탕에는 함께 가지 않는다고 설교시간에 말했다. 왜냐하면 목욕탕에 같이 갔다 오면 설교시간에 설교자의 은밀한 곳을 연상(聯想) 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말은 설교시간에 하지 않아도 되는 말임과 동시에 하지 말라면서 하라는 소리나 같은 뜻이다.

 

s망교회를 은퇴한 k 목사가 미주한인목사들 앞에서 설교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기가 막히게 감동적인 명화라면서....  푸에르토 리코의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노인과 여인]이란 그림이었다.  감옥에서 죽어가는 독립투사 노인에게 젊은 여인이 웃옷을 다 벗고 젖을 먹이는 장면이다. 딸이었다.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젖을 먹이는 딸의 이런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며 사온 사진을 목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설교시간이 끝난 후 목사들은 감동은커녕 k목사가 이상한 취향을 가진 것 같다고 입을 삐죽 였다.

이것도 설교의 음란화다. 청중이 좋아할 것 같으니까. 청중들이 오래 기억할 것 같으니까. 청중들이 재미있어하라고...  

 

오늘 날 교회는 설교의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로 영적인 힘을 잃고 있다. 설교의 세속화는 교회의 세속화로 직결된다.

 

요즘 세상은 사람을 개인의 가치보다 이력서라는 종이에 얼마나 많은 세상 것들로 채웠느냐에 따라 판단한다. 이러한 흐름이 교회로 흘러 들어와 목사님들도 믿음보다 이력의 채워지는 것들로 판단되고 있다. 또한 교인들도 성경 말씀을 전해주는 목사보다 세상의 지식을 전해주는 목사를 더 위대하게(?) 생각하고 더 좋아하는 경향이다. 그리고 설교가 성도의 욕구에 따라 언제든 변하는 기호식품 같이 되었다.



첫째, 설교자는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自覺, self-consciousness)해야 한다.

설교자는 대언자(代言者)이며 대사(大使)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이 누구의 말을 대신(代身)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각되지 않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 대신 자신의 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만들게 된다.

 

둘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설교자 자신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설교자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고 해서 설교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전달로서 끝난다면 그것 또한 올바르지 않다.

대언자와 대사는 말을 전달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의지 또한 같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의지는 대통령의 의지이다. 한 나라의 수장의 의지 또한 같이 전달해야 할 의무를 가진 것이다. 대통령이 없는 자리에선 대언자나 대사가 바로 대통령이 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설교본문을 정하고 설교를 준비 한다. 그러나 가게를 비유해 말한다면 설교의 모티브(動機, motive)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간판에 불과하고 설교의 내용은 간판과는 다른 장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간판은 멋있게 걸었지만 정작 가게는 간판과 다른 물건을 팔고있는 경우와 같다.

현 시대의 설교자들은 학력의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성경을 간판처럼 위장하여 내걸어 놓고 가게 안에선 자신이 팔고 싶고, 자신이 하고 싶고, 자신의 자랑을 늘어 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마칠 때 쯤 되면 간판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냥 가게 문을 닫는다.

 

설교자의 지나친 학력으로 폼 내려 하고, 자신이 그 만큼 배운 사람임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위험한 인본주의적 생각이며 포퓰리즘5(populism)이다. 자신의 학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구할 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설교자는 설교내용에 대한 구체적 증거제시와 함께 또 그 증거자료를 근거하여 설교하여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할 때 정확한 증거 자료에 근거하여 설교하여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구를 들어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애매모호한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힐 때 성도들은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설교 중에 예화를 들어 설명할 때도 예화가 주는 비유적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출처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화는 건전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예화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설교의 세속화는 설교자 자신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장재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여기에서 ‘찬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테힐라’인데, ‘자랑하다’ 혹은 ‘확신하다’는 뜻이다. 찬송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베푸신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양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맘껏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계시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사브’는 ‘자리에 앉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주어가 누구이냐에 따라 뜻을 달리할 수 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앉으시는 자리는 곧 왕좌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찬송은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왕좌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enthroned on the praises of Israel’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들과 구별되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온 우주의 창조자, 곧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시다. 찬송의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된 말씀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의 보좌를 이루기에 최고의 것이 되어야 한다. 최고의 찬양이란 우리의 최선을 다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더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최선이란 가식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진솔함과 순수함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찬송’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자랑이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는 절망감이 이스라엘의 실제 상황이었다(시 2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 조상들이 경험하였던 구원을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구원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음으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22:4-5)

 

찬양은 멀리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곳으로 모셔오는 통로가 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잠잠히 계시지 않고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살아계신 전능 자이시다.  


 

 


 





 

 








 

“‘무고한 피 흘리지 않고는 이슬람 국가 세울 수 없다’고 가르쳐”

 

하마스 설립자의 아들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하마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삽 하산 유세프(Mosab Hassan Yousef)는 개종한 기독교인이자 ‘하마스의 아들’(Son of Hamas)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하마스 군부가 중동 지역을 접수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의 삶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스라엘인들이나 미국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의 삶도 돌보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이념적인 의식을 위해 죽어갈 뿐”이라고 말했다.

어린 나이 때부터 하마스 대원으로 훈련받은 유세프는, 단체가 하는 일에 환멸을 느끼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기도 했다.

 

그는 “하마스는 모스크에서 내게 ‘이념을 위해서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고는 이슬람 국가를 세울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들은 5살 때부터 우리를 준비시켰다. 이것이 바로 하마스가 우리에게 주입시키는 사상이다. 정직히 말하자면, 이러한 사상을 깨고 하마스의 진실과 진정한 얼굴을 보는 것과 어느 순간에 이를 떠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털어놓았다.

 

유세프는 “나의 경우에도, 하마스에 ‘아니다’라고 말하기만 해도 모든 것을 잃게 됐다. 그리고 오늘날 가자지구의 아이들을 볼 때, 그들이 어떤 사상을 배우는지 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교전이 계속되면서 가자 지구 내의 민간인 피해도 늘고 있다.

 

이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슬람 세력과 좌파 세력들이 ‘반유대주의 시위’를 하며, ‘유대인 인종청소’까지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하마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최근 하마스가 ‘땅굴’을 건설할 때 북한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2012년 미국에서 나온 기고문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기고문은 ‘니콜라스 펠함(Nicholas Pelham)’이 이코노미스트와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했던 ‘가자 터널현상’이라는 글로 하마스가 만든 땅굴에 대한 이야기다.

 

니콜라스 펠함에 따르면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땅굴을 건설할 때 이집트나 이스라엘 경비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린이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펠함의 기고문이 사실이라면, 하마스는 이렇게 만든 땅굴을 불법무기밀매와 불법출입국,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납치하기 위한 ‘범죄행위’에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스라엘 방위군에 따르면, 2007년 이후 하마스가 건설한 땅굴은 약 1,370개로,  여기에 소요된 비용은 12억 5,0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이 돈이면 이스라엘에서 2개의 종합병원, 20개의 학교를 건설할 수 있다”며, “하마스가 땅굴 만들 돈을 가자 지구 주민들을 위해 사용했다면 지금과 같은 고통이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 팔레스타인 주변 지역 지도자인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가 1941년 나치 지도자 히틀러를 만났을 때의 모습.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 세력은 나치 독일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나치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최근 <더디플로맷> 섀넌 기자는 중국이 중동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중국에 우호적인 북한 중동 문제에 이미 깊이 관여한 상태다.

 

최근 영국 <텔레그래프> 군사전문 기자인 코글린은 하마스(테러조직) 북한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에게 미사일 무기를 제공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면서 아래와 같이 폭로했다.

 

안보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마스와 북한 사이의 (deal) 수십만 달러 규모로 레바논에 본사를 상사(商社) 문제를 다루고 있다. 회사는 ()베이루트에 있는 무장 팔레스타인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코글린 기자는 익명을 요구한 서방관리의 증언을 인용, 문제의 무기 거래는 미사일 수백여기, 통신장비 등이라고 전했다. 관리는 하마스가 이미 북한에 선급금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북한과 하마스의 무기거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 북한 수송기가 방콕에 비상착륙 했는데, 즉각적인 조사결과, 문제의 항공기는 테헤란을 거쳐 가자(Gaza) 지구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으로 35 가량의 무기를 적재하고 있었다. 항공기 내부에는 RPG(대전차 무기), 미사일, 로켓런처, 미사일 튜브, 지대공 미사일, 예비 부품, 그리고 중화기가 실려 있었다.

조사에 나섰던 이스라엘의 고위 관리는 북한이 수송기로 헤즈볼라와 하마스에 무기를 제공하려 했다고 결론 내렸다. 사건과 관련, 아비그도르 리버만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2010 일본을 방문해 “(북한이) 수십 여종의 무기를 하마스와 헤즈볼라에 밀반출하려 했다”고 밝혔다.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미국은 2009년에만 다섯 척의 북한 선박이 이란, 하마스, 헤즈볼라 등에 전해질 무기를 싣고 가다 제지 당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현재 중동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되고 있는 가자 지구 터널(땅굴) 대해서 당연히 책임이 있다.

북한은 또한 한국에 암살 혹은 전투 요원을 은밀히 침투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터널 (tunnel network)' 구축해 놓았다.


 

 




 

 



 




 





 



 

김현배 목사

 

영국 교회의 부흥을 가능케 했던 부흥의 원인은 ....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회심,

지속적인 기도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

복음 설교와 능력있는 설교자들,

성경적인 교리의 강조,

구속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전도와 영혼 구원에 대한 불타는 열정,

피 묻은 십자가 자랑,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하심에 대한 갈증,

거룩한 삶과 경건 추구,

성령의 부어주심 을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노팅엄에 있는 영국교회가 팔려 현재 술집으로 사용

 

하지만 오늘날의 영국 교회는 각 교회마다 영적인 생명이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배를 등한시 하며 젊은 세대들은 거의 교회에 관심이 없고 예배 참석자 대부분 노인들이 많다. 다음 세대 준비에 속수무책이다. 더 이상 잘 모이지 않는다. 교회는 쇠퇴하여 형식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일뿐 많은 수가 교회 출석을 하지 않고 있다.

 

영국 교회의 출석 교인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주일학교에 나오는 수도 떨어져 나가고 있다. 또한 교회 수와 목회자 수, 선교사 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모든 것이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신학교들이 문을 계속 닫고 있다.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다. 교회 건물은 점점 팔려 나가 상가로, 술집으로, 공연장으로, 절로 변해버렸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독교는 쇠퇴하고 이슬람이 급속도로 성장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영적 침체기 때 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영국 교회는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급격한 퇴락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영국의 영적 상황이다. 왜 그렇게 쇠퇴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영국 교회의 쇠퇴의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노팅엄에 있는 영국교회가 술집으로 변한 내부 모습

 

1. 성경 권위의 상실

 

과거에 그리스도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했다. 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성경을 보통 책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성경이 비평을 당하고 분석을 받기도 한 것이다. 성경의 권위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성경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 운동이 일어나면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천명된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는 부인되었다. 일부 설교자들은 이미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였고 강단에서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킨 나머지 인간으로 그 권위를 대신하게 하였다.
 


 

즉 인간의 이성이 최고 권위의 자리에 올라서게 함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이런 흐름을 예감한 나머지 찰스 스펄젼은 우리에게 축자영감을 믿는 것이 미친 일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어리석은 자로 남기를 결심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인간의 이성의 산물인 과학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앞질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침체는 자가 당착적인 것이고 그 침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성경 권위의 상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2. 개혁 신학의 퇴조

 

1840년대에 시작된 모든 현대주의 운동은 1860년대에 놀랄만한 속도로 번져 나갔다. 그 당시 비국교도들의 신학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이 급격한 쇠퇴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영국교회는 신 신학에 대한 논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 의심을 비롯하여 동정녀 탄생 부인, 이적이나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였다. 또한 속죄의 교리 기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과 십자가의 보혈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들은 나사렛 예수를 사회 개혁자, 정치적인 선동자, 자유주의자, 윤리 선생, 위대한 선생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3. 복음주의 추락

 

19세기의 영국 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을 타락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걸맞은 신학을 해 나간다는 미명하에서 옛 복음의 신령한 것들을 없앴던 것이다.

 

저들은 진리를 조금씩 포기하고, 대신 그 자리에 인간적인 추리, 상상, 철학, 인간의 지혜로 채웠다. 그 결과 교리적 순수성은 전반적으로 쇠퇴했고, 많은 설교자들은 더 이상 복음을 설교하지 않고 사회, 정치, 문제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한 결과 어느덧 그들은 “사람의 계명”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전파에 있어서도 강조점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과 교회의 성경적 주요 교리에 대한 해이해진 믿음이라는 변화가 교회 속에 유입되게 된 것이다.

스펄전은 영국교회가 1887년부터 급격하게 언덕 아래로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교회의 정통성의 추락이 일어났던 것이다.

 



 

 런던에 있는 한 교회가 불교에 팔린 상태

 

4. 인간의 철학 우위 사상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들의 이성에 대한 과신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의존적인 신앙을 교회로부터 몰아내게 하였고,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에 인간 이성의 소산인 철학을 놓게 한 것이다. 사람들은 속죄와 화해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지혜와 철학과 학식으로 돌아섰다.

철학이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본질적으로 철학은 인간의 사상들이요,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말한다. 저들의 철학의 우위 사상은 성경으로부터 초자연과 기적을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합리주의와 철학에 의해 더럽혀 졌다.

 

5. 설교 권위의 하락

 

영국교회는 점점 전도설교, 복음설교는 없어지고 도덕적인 강화만이 되풀이 되어질 뿐이었다. 이성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현대사조를 귀하게 여긴다.

 

이른바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자들은 낡아빠지고 케케묵은 복음과 진부한 청교도의 교리를 설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새로운 이론을 찾기에 광분한다. 설교자들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 최후 심판, 지옥과 악한 자들의 ‘영원한 파멸’에 관한 말씀은 인기가 없고, 또 현대사조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야 하고 시대와 상황에 맞게 재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머지, 절대적인 진리를 바람에 밀리는 구름처럼 변덕스럽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설교시에도 진리의 선포란 의미를 살리기 보다는 예화와 예증이 너무 많고 정치, 사회, 도덕에 대한 강화가 너무 많은 것이다. 이런 경향은 설교가 하나의 예술이란 인상을 주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설교 권위의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6. 지나친 지적 관심

 

설교자들은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보다도 더 많은 학식을 갖는데 관심을 두었다. 신학교는 영성보다는 학문적으로 진보를 추구했다.

 

설교자들이 기독교를 지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면서 결국 성령을 잊게 되며 성령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설교자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는가보다는 그의 학위나 졸업장에 의해 평가되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학문적인 배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과 기름부으심을 무시할 때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된다고 했다.

 



 

 런던에 있는 교회를 불교가 구입하여

현재 사찰 (절)로 사용하고 있는 내부 모습

 

7. 영성의 상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18세기 초엽의 합리주의 (Rationalism)과 자연신론(Deism), 19세기 현대주의 (Modernism)와 찰스 다윈의 진화론, 아리안주의 (Aryanism), 유니테리안 (Unitarian) 등과 맞써 싸우는 동안에 변증학은 발전되었는지 모르지만, 영성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영성의 상실은 교회로 하여금 현대적 도전에 대해 방어한다는 소극적 자세를 갖게 하여 성경의 적극적인 메시지의 선포와 실천을 막게 한 것이다.

 

8. 성령의 거역

 

이성주의는 더 이상 성령을 사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을 슬프시게 하고 사람의 영적인 생명력을 앗아간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더욱 희귀해져서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피폐해진 것이다. 더 이상 이성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그분을 닮아감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성령을 거역했던 것이다.

 

9. 찰스 피니의 영향

 

찰스 피니가 부흥운동에 현대적이고 인위적인 방도들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니의 “신앙 부흥”이란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피니의 모든 사고 방식과 가르침이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교회가 침체하면 하나님께 돌아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대신, 회의를 소집하여 복음전도 집회를 조직하고 광고 프로그램을 계획한다. 전체적인 시각과 사고 구조가 바뀐 것이다. 이것이 찰스 피니가 끼친 영향의 열매이다.

 

부흥을 갈망하면서

 

이처럼 영국교회의 쇠퇴의 원인들을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들은 기독교 입장에서 진수가 되는 가장 중대한 진리를 부인했거나, 감추었거나 아니면 소홀히 여겼던 것이다.

 

구원의 생명수가 감취어 졌다. 과거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복음으로 충만했던 영국의 구원선이 지금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다. 조국교회 역시 녹녹치 않다.

 

하지만 영국교회 부흥의 역사는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죽어 있고 생명 없는 시기 뒤에 왔다. 교회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잃어버렸던 교리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잃어버린 칭의의 교리를 다시 찾았던 것처럼 오늘날 조국교회나 유럽교회는 다시 성경의 주요 교리와 개혁주의 신학을 찾아야 한다.

 

즉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능력과 십자가, 설교의 권위, 강단의 영광, 복음주의 영성, 언약신학의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은혜를 다시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조국교회와 유럽에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다. 부흥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 

 

*김현배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국 부흥운동사를 공부했다. 현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을 맡아 유럽 재복음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

 



 

소설가 이대환은 영일만 갯마을에서 1958년 태어나 10세 때 포항제철이 들어서며 고향을 잃었다.

 

1980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주관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당선돼 소설가로 등단하고, 다시 1989년《현대문학》지령400호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었다. 장편소설 『겨울의 집』『슬로우 불릿』『붉은 고래』『큰돈과 콘돔』등을 발표했다.

 

25년간 포스코를 이끌었던 박태준 선생과는 1997년 5월 포항에서 처음 만나 그날부터 그분이 타계한 2011년 12월까지 15년 동안 거의 매주 한두 번씩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자발적으로『박태준』평전을 써서 2004년 초판(현재 21쇄)을 펴냈다.

 

박태준에게 박정희는 필생의 정신적 동반자였다’는 것을 알고 두 인물이 보여준 ‘완전한 신뢰’의 아름다운 가치를 주목하게 되었다.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 온천마을에서 들었다.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 1학년에 다니다가 도쿄를 아비규환의 불바다로 만드는 미군 대공습을 피해 산골로 와서 방공호 따위나 파며 견뎌내는 중이었다. ‘조센진 청년’이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북받치는 감격이었다.

 

1945년 가을에 박태준 가족은 가장(家長)의 솔가를 따라 ‘되찾은 빛’이 비치는 광복의 땅, 고향(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으로 돌아왔다. 그때 박태준은 만18세. 신체도 정신도 청년의 기골을 완성하고 있었다. 세밑에 그는 상경했다. 서울 거리는 시위인파가 휩쓸고 있었다. 1945년 12월 27일 보도된 모스크바협정(모스크바 3상회의)에 5년 동안 조선을 신탁통치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었다.

 

서울에서 학업의 길도 취업의 길도 찾지 못한 박태준은 스스로 현해탄을 건너갔다.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실력을 갖춘 인재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동량이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1946년 봄, 그는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 역시 서울에 못잖은 아수라장이었다. 도쿄에서도 학구열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을 작파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947년 가을과 겨울을 집에서 칩거했다.

 



 

1948년 새봄, 어느덧 박태준은 스무 살을 넘어섰다. 해방을 맞았을 때보다 세상을 읽어내는 눈이 한층 더 밝아졌다. 이제 그의 시선은 분단 확정의 초읽기에 몰린 신생독립 조국의 초췌한 몰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부산의 국방경비대를 택했다. 병사들 중에 사관학교 후보생을 발탁한다는 것이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아버지. 군인이 되겠습니다. 건국(建國)에는 반드시 건군(建軍)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뜻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박태준의 새로운 삶을 맞아준 부산 국방경비대. 그러나 박정희는 그곳에 없었다. 천 리나 떨어진 서울 태릉의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에서 속성 장교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박태준보다 정확히 열 살 많은 박정희.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단 한 번 옷깃이 스친 적도 없는 두 사내의 첫 만남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인생이 인연의 자계(磁界) 안에서 이뤄지거늘, 박정희의 인생을 위해서든 박태준의 인생을 위해서든, 장차 두 사내가 가슴에 품게 되는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위해서든, 불가사의한 운명이라는 것이 개입한다면 미상불 두 사내는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될 것이었다.

 

박태준이 부산 국방경비대를 떠나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277명)으로 입교한 때는 1948년 5월 6일이었다. 5기까지는 학병으로 일본군대를 체험했거나 일본군 장교 경력을 지닌 ‘군인 출신’이 대다수였으나, 6기는 국방경비대의 하사관이나 사병 중에서 선발했다. 해방 조국에서 처음 군복을 입은 청년들, 그래서 그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라 부르며 자부심을 뽐내기도 했다.

 



 



 

최초의 메이드 인 코리아 장교. 그러나 장교가 되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청년들을 메이드 인 코리아 장교들로 길러내는 교사 역할은 일본군 출신의 한국인(조선인) 장교들이 맡아야 했다. 그들 중에 박정희가 있었다.





 

박태준이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간 1948년 5월, 박정희는 1중대장이었다. 박태준은 강창선의 2중대 소속이었다. 드디어 박정희와 박태준이 처음 마주칠 시간이 다가왔다. 그 장면은 어떠했을까?
 

이대환의 『박태준』 평전은 이렇게 묘사한다.

<탄도학 첫 시간. 강의실에 들어서는 박정희 교관을 쳐다본 순간, 박태준은 싸늘한 새벽 공기가 앞문으로 불어 닥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신선한 긴장감으로 돋아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빳빳이 고쳐 앉았다. 깐깐하게 생긴 교관의 작은 체구는 온통 강한 의지로 똘똘 뭉쳐진 것 같았다. 강의실 공기가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탄도학은 대다수 생도들에게 버거운 과목이었다. 탄도궤적 계산법에는 해석기하학, 미분, 삼각함수 등 각종 수학 원리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강의 중간에 박정희가 어려운 문제를 칠판에 적었다.

 

“어느 생도가 나와서 풀어보겠나?”

아무도 선뜻 손을 들지 않았다.

“자원이 없으면 지명해야지.”

 

강의실을 탐조등처럼 훑어나가던 교관의 시선이 박태준 생도의 동공에 딱 머물렀다.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박태준에겐 벅찬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를 술술 풀어내자 교관의 차가운 얼굴에 살짝 미소가 피었다. 무언의 칭찬 같았다.

 

그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박태준은 복도에서 박정희와 스치듯 지나쳤다. 생도가 거수경례를 붙였다.

 

“탄도학 문제를 푼 생도로군.”

 

교관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눈웃음도 곁들였다.

중대장 박정희는 생도 박태준의 영혼을 건드렸다. 그는 박정희가 비범해 보였다. 무언가 속이 꽉 차고 굉장히 무거운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다. 그것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박정희가 내무반을 사열하러 실내에 들어서면 갑자기 어떤 기운이 꿈틀대는 것을, 그는 번번이 느낄 수 있었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키가 작았다. 164센티미터와 165센티미터. 체격은 박정희가 마른 편이고 박태준은 다부진 편이었다. 얼굴 생김새도 체격처럼 달랐다. 그런데 사내와 사내,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상관과 부하의 인간관계에서, 그것을 초월하는 동지적 인간관계에서 신체와 생김새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들의 시대는 술잔을 얼마나 함께 기울일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했다. 술자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신념과 정신, 당대를 감당해 나가는 비전과 이상에 대한 확인과 공감의 자리였다. 
 





 




 

 

 








 

조직신학자 정성욱 교수(덴버신학)는

기복주의·

율법주의·

방종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를 한국교회 5대 ‘다른 복음’으로 지적하고, ‘복음의 본질 회복’을 역설했다.

안식년 차 귀국한 정 교수에게 ‘다른 복음’에 대한 해결책과 함께, 한국교회의 현안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실천적인 면들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다른 복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셨는데,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헬라어로는 ‘두나미스’라고 하는데,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기도 하지요. 복음은 죄와 사망, 마귀와 지옥의 권세를 깨트릴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저와 성도들이 함께 회복해야 제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며 이를 통해 사회가 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 내에 복음이 없었다고 말할 순 없지요. 하지만 ‘온전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다른 복음’들이 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순도 100%’의 완전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목회 현장에서 ‘연약한 자나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장애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등록된 장애인만 1백만명이고, 등록하지 않은 이들도 1백만명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직계가족만 해도 1천만명은 될 것입니다.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복음으로 품고 그들을 위해 교회가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곧 온 국민들을 향한 교회의 섬김과 낮아짐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코이노니아’의 회복입니다. 이것도 교회의 본질 중 하나이지만, 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코이노니아가 상대적으로 쉽지 않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력과 자원이 많은 교회들이 그렇지 못한 교회들에게 인력과 자원을 보내는 코이노니아, ‘나눔의 목회’를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목회자들의 자질 향상’입니다. 공인되고 이름이 알려진 신학교를 나온 이들보다, 공신력도 없고 인가도 없는 신학교를 나온 목회자들이 더 많아진 게 현실입니다. 공인된 신학교 출신도 자질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상의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만나며 그 뜻을 실천해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에만 모여 예배드리고, 흩어져서는 세속적으로 살아선 안 됩니다. 24시간 365일 일상의 현장과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삶을 펼쳐가야 하겠습니다.

 

다섯 가지 ‘다른 복음’에 대해 연재했는데, 이를 확대하고 여기에 한국교회의 현안들까지 담아 책을 내볼까 합니다. 우리가 과연 세상에 복음을 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130여년간 피와 땀으로 지켜 온 복음인데, 언제부터인가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다른 복음’이 언젠가부터 한국교회 안방을 차지해 정체성을 흐리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질병에 걸려 있는지 진단이 안 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교황 방한을 앞두고, 한국교회의 반응이 논란입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은 고전적 이미지와 좌파 이데올로기 수용 등으로 ‘마케팅’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문제도 한국교회에서 ‘온전한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와 ‘성당’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평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개신교가 믿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고, 가톨릭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개신교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가톨릭을 포함한 다른 종교들과 다양한 이단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있는데, 저는 이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교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부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리를 모르기에, 너무 많은 공격을 받고 있는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리 교육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전통적인 ‘요리문답’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을 비롯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이 있습니다. 20세기 문서로는 ‘로잔 언약’이 있는데, 이것도 선교적 관점에서 교리를 해설한 문서입니다. 교리 교육이 재미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느냐에 따라 충분히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교리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잘 풀어내고,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게 이런 뜻이다’고만 하는 게 아니라, 해설과 적용의 실례들을 자꾸 제시해야 합니다.”

 

-미국에 계시니 여쭙겠습니다. 한국에서 보기에 미국교회는 이미 친동성애 성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큐메니칼 주류 교단들에서는 이미 대부분 동성애자 성직 안수까지 허용한 상태입니다. 에큐메니칼이 가진 자유주의 신학의 결론이 동성애자 옹호로 드러난 점은 안타깝습니다. 이로 인해 에큐메니칼 교단에 침체와 수적 감소가 이뤄졌습니다. PCUSA 같은 경우 150만여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우리나라 합동이나 통합보다 적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갱신적인 흐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에 반해, 에반젤리칼(복음주의) 교단들은 여전히 건재한 편이지만, 점진적인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 교회의 당면과제는 ‘젊은이들의 감소’입니다. 10-20대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 복음주의권의 고민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 보자는 흐름들이 있지만, 조직신학자로서 볼 때 미국 복음주의권이 회복해야 할 것은 정통 교리성경적 진리에 대한 교육과 이해입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느끼는 점은, 미국교회가 가진 약점들을 우리가 더 강도 높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교회가 그 약점들도 배태된 가운데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국적 풍토에서 확대재생산된 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문화에서 비롯되기도 했습니다. 유교적 권위주의나 여성 차별, 장애인들을 포함한 소외된 자들의 권익을 무시하는 일들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인간의 생명과 인격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도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이 교회 내에서조차 복음으로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감소 문제는 미국 뿐 아니라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10-20대가 복음에 반응할까요.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과 존재가 가진 깊이(depth)를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표면적 차원에 머물지 말고, 교회는 깊이를 보여줘야 합니다. 깊은 복음, 깊은 교회, 깊은 인격, 깊은 공동체, 깊은 사랑 등 ‘깊이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교회로 돌아오기 힘들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 문화가 가진 빠르고 바쁘고 산만하고 복잡한 것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느리고 천천히 가면서 여유 있고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말씀을 갖고 서야 합니다. 깊은 말씀묵상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씀묵상, 깊은 기도의 세계 등 결국은 영성입니다. 일상에서 영성이 회복되고, 깊음의 차원을 담아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라도 너무 바쁘지 않게,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예전(liturgy)의 회복도 좋은 방법입니다. 특히 성찬식이 중요합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름답고 의미 있는 예식으로 격상시켜야 합니다. 가능하면 매 주일마다 성찬식을 함으로써 교회가 가진 ‘독특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전이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매주 성찬식을 하면서 그 신학적 의미를 풍성하게 이해하고 체험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음악조차 기계음이 아닌, 깊은 차원에서 주님을 만나게 할 수 있는 탁월하고 정교한 음악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돕는 예배 음악들이 사용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갱신과 회복에 대해 정리해 주신다면.

 

“기독교 안에 혁신과 갱신의 자원이 없는 게 아닙니다. 2000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허락하셨던 좋은 전통과 자산·자원들이 많습니다. 이를 어떻게 현대적 맥락에서 창조적으로 잘 회복하고 원용하며 누려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입니다.

 

성경 묵상과 성례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가톨릭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매주 떡을 떼었습니다.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었지요.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큐티를 많이 하지만,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게 하진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깊은 묵상의 훈련을 입체적이고 다각도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교육이 끝났다고 만족해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배우려 해야 합니다. 사회에서 ‘혁신’이 많이 회자되는데, 목회자들도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의 연구와 묵상과 성찰을 통해 교회가 혁신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믿음의 선배들이 후배 목회자들을 멘토링하는 시스템부터 해 보면 어떨까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그녀(Her)`는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무기력한 일상을 살던 사람이 여성 정체성을 가진 컴퓨터 OS를 이성(異性)으로 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최근 사람의 감정 인식하고 스스로 학습한다는 로봇 `페퍼`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로봇은 적외선 센서 등을 활용해 사람의 감정을 측정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눈은 그대로인데, 입만 웃는 모양을 하면 진짜 웃지 않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페퍼의 감정 인식 능력은 아직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학습기능이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감정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하는 로봇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아톰처럼 사람과 친구가 되는 로봇 말입니다.

 

인공지능 로봇의 출현을 불편한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나오는 인공지능 컴퓨터 `(Hall)`은 인간이 자신의 기능을 정지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항해 인간을 공격합니다.

 

이 밖에도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인간의 적이 돼 버린 로봇을 다룬 이야기는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 바탕에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로봇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인간보다 월등하게 일을 잘하는 로봇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출발은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증기기관 발명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1970년대 들어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로봇은 또다시 인간의 일자리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컴퓨터 정보기술은 사람이 수행하던 일의 전부 혹은 일부를 기계가 대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영주들은 군소리 없이 척척 일 잘하는 기계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 탓에 사람 일자리는 많이 줄었습니다. 이렇게 기계로 인해 고용이 줄어 발생하는 실업을 기술적 실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계의 자동화ㆍ지능화가 가속화하면서 기술적 실업이 전반적인 노동 수요 감소로 발생하는 구조적 실업으로 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에릭 브린욜프슨 교수와 앤드루 매카피 교수는 `제2의 기계 시대(The Second Machine Age)`라는 책에서 "지능형 소프트웨어가 자동적으로 업무를 인지해 수행하는 제2의 기계 시대가 오고 있다"며 "구글의 무인차, IBM의 왓슨 등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옥스퍼드대 베네닉 프라이 교수와 마이클 오즈번 교수도 최근 발표한 논문을 통해 컴퓨터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500년 동안 기술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 컴퓨터 자동화로 노동자들이 일자리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50%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논문을 인용해 미국의 직업 중 47% 정도가 기계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실제로 단순 반복 업무가 주된 일자리는 이미 컴퓨터나 기계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라는 인터넷매체는 `20년 후 사라질 직업`으로

△텔레마케터

△회계사

△소매점 판매 사원

△과학기술 전문 작가

△부동산중개인

△타자수

△기계 기술자

△비행기 조종사

△경제 전문가

△건강 관련 기술자 등을 꼽았습니다.

 

이런 우울한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봇에 의해 사라지는 일자리도 있겠지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직업도 많을 거라는 전망도 있지요.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기술 진보로 도입되는 기계를 생산하기 위한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지고, 동시에 과거에는 없는 추가 산업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라며 로봇이 사람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견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어떤 미래가 오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하고 창의적인 일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 일자리가 생기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준비만 있다면 미래는 그렇게 걱정되는 세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로봇의 위협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언)


 

 

 


 






 



 







 

 


 


 

스마트폰을 앞에 놓고 그걸 어떤 것으로 바꿀지고민한다. 그것은 혁신이 아니다.

스마트 폰을 앞에 놓고는 새로운 생각하지 못한다. 눈앞에 주어진 정보에서부터 생각이 시작되고, 결국 생각은 그 주변에 머물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현상을 [닻 내리기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한다.


 

눈앞의 물건을 없애고, (심리적으로) 멀리 떠나야 한다. 휴가도 좋고, 회의를 산 꼭대기에서 해도 좋고, 전혀 모르는 외부 전문가를 초청해도 좋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왜 열광했나를 생각하고, 아직도 우리가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독일에서 중역회의를 했던 일을 계기로 삼성이 혁신을 이루었다.

 

새로운 혁신 제품을 꿈꾼다면 시장점유율을 0%에서부터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시장의 점유율을 지배하는 제품 절대 혁신적일 수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닻 내리기 효과오류에 빠져있다. 그 자리에서 빙빙 도는 인생을 살면서 그리고 그런 사업을 하면서 말로만 혁신이라고 한다.

 

광야에서 시작하라. 성경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광야에서 혁신적인 삶을 시작했다. 우물 안에서 개미 채 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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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플 때는 먹어야 한다. 하지만 먹고 나니 먹기 전보다 더 배를 고프게 하는 음식들이 있다.

 

내과 전문의이자 체중 조절 전문가인 수 디코티스 박사는 “배고픔은 위와 창자, 뇌, 췌장, 혈액 순환에서 일어나는 많은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라며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하이재킹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건강·의료 정보 사이트 ‘헬스닷컴(Health.com)’이 먹으면 되레 배를 더 고프게 하는 음식 6가지를 소개했다.

 

짠 스낵

짠 감자 칩을 먹고 난 뒤 바로 단 것이 먹고 싶어지는 이유가 있다. 칩이나 프레첼 등 짠 스낵은 빨리 소화되는 단순 탄수화물로서 인슐린을 급하게 올렸다가 곧바로 떨어지게 만든다. 이때 혀의 미뢰와 뇌는 빨리 반응하는 에너지를 단 음식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짠 음식을 먹은 후에는 단 것이 먹고 싶어진다.

 

‘알코올과 알코올중독(Alcohol &Alcoholism)’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술을 3잔만 마셔도 신체의 렙틴 양을 30%나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렙틴은 지방 세포에서 분비되는 식욕 억제 단백질이다. 디코티스 박사는 “알코올은 또한 몸속의 글리코겐을 대폭 감소시킴으로써 이를 보충하기 위해 탄수화물을 먹고 싶게 만든다”고 말했다.

 

MSG

요리할 때 쓰이는 화학조미료의 원료인 MSG(글루탐산나트륨)는 동물실험 결과, 식욕을 40%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비만(Obesity)’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MSG를 섭취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과체중이 될 가능성이 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디코티스 박사는 “MSG가 시상하부에 해로운 영향을 줌으로써 식욕 억제 단백질인 렙틴 효과가 약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시 롤

영양학자인 수산 클레이너 박사는 “스시 롤은 건강에 좋은 생선을 먹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쌀밥을 훨씬 많이 먹게 된다”고 말한다. 캘리포니아 롤 한 개는 30g이 넘는 탄수화물로 구성돼 있다. 클레이너 박사는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 수시 롤만 먹었을 때 섬유질이나 단백질 같은 포만감을 크게 느끼게 하는 성분이 없이 빨리 소화가 되기 때문에 위장은 곧 텅텅 비게 된다”고 말한다.
 

인공 감미료

디코티스 박사는 “탄산음료나 커피 등에 들어있는 인공 감미료는 뇌세포를 자극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곧바로 자극이 사라진다”며 “그 결과 하루 종일 단 것을 찾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배고픔을 통제하는 뇌 센터에 영향을 주게 된다.

 

피자

아무리 큰 피자라도 한 조각만 먹고 그칠 수 없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디코티스 박사는 “많이 판매되는 피자는 보통 흰 밀가루 반죽과 경화유, 가공 치즈, 보존료 등이 혼합된 것으로 혈당 수치와 포만 호르몬의 생산, 그리고 배고픔을 조절하는 뇌 부위에 혼동을 일으킨다”며 “대신에 통곡물 반죽과 살코기와 채소 등을 얹어 집에서 만든 피자는 섬유질과 단백질이 풍부해 먹고 난 뒤 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을 덜 들게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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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가정집에 들어갈 때

우리나라의 문패처럼 문설주에 부착되어 있는

손바닥 길이 정도의 작은 케이스가 달려 있습니다.

이 작은 케이스가 바로 [메주자/Mezuza]]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어느 작은 가게의 입구에도 붙어 있습니다.   


메주자 안에는 성경의 신명기 6장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