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2,
 2014

 

 


 



 


 








 





 







 

걱정 말아요 그대...’.

 

지금은 해체된 들국화가 최근까지 공연 맨 마지막에 부르던 곡이다. 관객들도 따라 불렀다. 2004년 곡이라 전성기 같은 폭발력은 없지만 뭔가 뭉클했다.

 

“그대여 아무 걱정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격랑의 시기를 함께 떠나 보내며 삶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관조의 정서다. 힘을 뺀 전인권의 목소리가 지친 이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최근 오디션 프로 ‘슈퍼스타K’(Mnet)의 20대 참가자 곽진언·김필씨가 이 노래를 불러 화제다. 음원 차트를 휩쓸며 경연 초반을 압도했다. 특히 24세의 대학생이자 무명의 싱어송라이터인 곽진언씨는 세상을 오래 산 듯한, 20대 같지 않은 감성과 중저음의 구슬픈 음색으로 눈길을 끌었다. (언)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댄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꺼내어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어떻게 하면 예배를 바르게 드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전( 典)적 예배가 아니라면  삶 전체가 예배다.

 

교회에서 드리는 의전적인 예배라 해도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예배는 시작된다. 만약 부부싸움을 하다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면 은혜스러운 예배를 드리기 어렵다. 어떤 경우 과속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위반 티켓을 받고 나면 이 역시 성공적인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된다.  

 

배당 안에 들어와서도 친절하게 나누는 인사와 환영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사소한 일이라도 다른 교인들과 불편한 일을 겪게 되는 경우 그날의 예배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반적으로 의전적 예배가 시작되기 전 찬양하는 시간이 있다. 이 찬양의 시간이 예배를 준비하는 순서인가 아니면 예배 자체인가? 분명한 가르침이 없으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데 소위 헷갈린다. 신학도 없고 말씀의 바탕도 없고 거저 감성의 힘에 의지한다면 찬양 자체가 예배가 될 수 없다.

 

배순서도 그렇다. 점점 무르익어가는 예배순서라야 한다. 예배의 마지막은 결단과 헌신과 파송(派送)이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를 던져 헌신하게 된다. 그 결단의 기쁨이 벅찬 가운데 교회의 문을 힘차게 열어 제치고 세상을 향해 파송된다. 목사는 그들을 위해 축도한다. 이것이 의전적 예배의 하이라이트다.

 

환영과 위로와 회개와 용서가 소명과 사명으로 이어지면서 헌신과 결단의 단계에  도달하면 환희 자체이다. 예배가 무르익은 모습이다. 자기 생이 핵폭탄처럼 터지는 강력한 힘을 체험하게 된다. 불태운다고도 표현한다. 던진다고도 표현한다. 자기 생을 또 다른 생명을 얻기 위해 던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배의 근저(根底)에는 다윗의 춤이 있어야 한다. 죽은 예배가 되지 않기 위해 형식에 매인 예배가 되지 않기 위해 흔히 감성에 의지 하는 경우가 많다.

손뼉을 친다. 손을 높이 들어 올린다. 할렐루야 아멘을 반복한다. 몸을 흔들어 장단을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할 수 있는 예배의 내용이라고 본다.

그런데 자칫 이것이 감성에 치우치면 자기 만족에 그치고 만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 거리가 멀어진다.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올 때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 그런데 다윗이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춘 것과 우리가 다윗처럼 춤을 추는 것과 과연 연관이 있을까?

 

다윗은 법궤를 매고 여섯걸음을 걸은 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법궤를 옮겨도 된다는 하나님의 사인(sign)으로 받아들여 소와 살진 송아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길은 동물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도륙(屠戮)된 짐승들의 시체와 뜨겁게 타오르는 제단의 불빛 가운데서 다윗은 춤을 춘 것이다. 다윗의 춤은 제의(祭儀)적 피 드림의 거룩한 예배였다. 다윗의 춤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만들어진 예배였다. 다윗의 춤은 전능자 앞에서 드려진 피조물의 예배였다. 다윗의 춤은 높으신 하나님을 향한 겸손의 예배였다.  다윗의 춤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진 구별된 예배였다.

 

다윗의 춤은 형식적이며 억지로 만들어진 경거망동한 춤사위가 아니다. 희생된 동물의 피 위에서 드려진 거룩한 예배였다.

 

그러나 다윗의 춤이 동물의 피 위에 세워진 예배였지만 우리의 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진 예배다.

 

모든 예배의 순서나 예배 드리는 모든 예배 자들이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 위에서 드리는 제의(祭儀)적 예배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내 심령에서도 강단 위에서도 주님 흘리신 보혈이 흘러 넘쳐야 참된 예배가 된다. 찬양도 마찬가지다.(장재언)


 

 

 






 








 

 

김현승 시인이 기도하게 하소서 라고 했던

가을은 바쁘고 무성하게 살던 여름으로

시인이 되게 한다.

돌덩이들도 시(詩)로 열매를 쓴다.

 

문학과지성사는 최근 ‘시인들이 뽑은

아름다운 노랫말 7’을 발표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로 시작하는 김광진의 ‘편지’,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이라는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 등이 뽑혔다.

 

“나는 이미 찾는 이 없고

겨울 오면 태공들도 떠나

해의 고향은 서쪽 바다

너는 나의 하류를 지나네”라는 루시드 폴의

‘나의 하류를 지나’는 이미 한 편의 시다.

 

공동 1위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와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였다.


이소라가 작사한 ‘바람이 분다’는 같은 사랑을 했지만

서로 다른 기억으로 막 내리고 마는 상실감이 잘 담겼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민하 시인은 “서늘한 무채색의 읊조림이 보편적인 공감을

절묘하게 빚어냈다”고 평했다.

그 노랫말에 처연한 멜로디, 깊고 서늘한 보컬이 얹어졌다.

이소라의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분다.

노랫말이 최고의 시어(詩語)가 되는 순간

거기에서 명곡이 탄생한다.(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Insanity :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정신이상 : 똑같은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정신 병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하나님께서는 무더웠던 여름을 떠나 보내고 가을을 성큼 다가오게 하셨습니다. 가을은 여름철 시끄럽던 목소리를 낮추고 속을 들여다 보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을에는 높고 높은 하늘을 쳐다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쁜 일상에 파묻혀 땅만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가을에는 높고 높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고 가슴 시린 푸르름에 감동해 보면 좋겠습니다.

솜털 같은 구름을 바라보고 지구 이 쪽 저 쪽에서 살아가는 생전 보지 못했던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구름 너머 그 위에 계신 우리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보고 그 분이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면 좋겠습니다..

 

가을에는 열매들을 깊이 응시하게 하십니다.

 

이어령 선생은 손바닥 위에 한 톨의 곡식을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근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 톨의 곡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한 개의 과일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지금은 열매들을 깊이 응시하며 내 삶의 열매들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우리에게도 마지막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겸손히 옷깃을 여미고 내 삶의 진지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북한이 내년부터 모든 농장과 공장, 기업소, 상점에서 자율경영제를 도입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YTN이 단독으로 보도했다.  이는 배급제를 감당할 수 없이 파탄에 이른 북한 정부의 어쩔 수 없는 조치이지만 이같은 조치는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협동농장의 경우는 가족단위로 1인당 땅 천 평씩을 나눠주고 생산물은 국가가 40%를, 개인이 60%를 가져가는 방식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히 혁명적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조치에 대해 북한도 중국을 모방해 따라 가는 것이 아닌가 관심이 크게 모아지고 있다.  북한 사람들의 바닥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언) 

 



 

이 같은 사실은 북한이 내년부터 전국에 있는 모든 생산단위에서 자율경영을 실시하기로 했다고 대북소식통이 전했다. 협동농장과 공장, 기업소와 상점 등이 전부 대상에 포함됐다.

 

협동농장 경우를 보면 작업반 내 그동안 20∼30명을 묶어 관리하던 분조단위를 없애고 대신 가족 단위를 도입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 1명당 땅 1,000평씩을 나눠주고 생산물은 국가가 4할을 져가고 나머지 6할은 생산자가 가져가는 방식이라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학생과 어린이 같은 노동자가 아닌 경우도 가족 1명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5인 가족의 경우 무조건 5천 평의 땅을 받아 농사를 짓고 거기서 나온 생산물의 60%를 자신들 가족만의 생계에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런 사실은 북한 내 인민반 회의와 공장•기업소 강연을 통해 주민들에게 고지됐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인민반은 우리나라 반상회와 같은 조직으로 중앙정부의 시책이 전국 곳곳으로 하달되는 통로이다.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일한만큼 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됐다며 생산의욕에 다소 들떠있다고 소식통 은 전해왔다.

 

북한에선 지난 2012년부터 이른바 6•28방침으로 불리는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에 따라 극히 일부 공장과 기업소, 농장 등에서 독자경영이 시범 운영되어 왔다. 결국 그런 독자경영체제가 실험이 끝나고 전국적으로 본격 실시되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에서 가족영농제와 기업자율경영제가 확대된 것은 김정은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화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앞으로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장 경제를 토대로 한 대외경제 협력도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정은은 취임 첫 공개연설에서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자’고 역설했다.

 

북한은 인민생활 향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장경제를 묵인하는 단계에서 적극 활용하는 단계로 중요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YTN은 전망했다.







 



 

 

이처럼 북한내 자율경영제 바람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양무진 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강명도 경민대 교수가 분석한 내용을 정리한다.

일단 북한의 내년부터 농장, 공장 이런 데서 ‘자율경영제를 도입한다라는 의미는 다시 말해서 북한이 가족의 사용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이고 기업소의 자율경영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것은 아마 북한의 전통적인 개혁경제가 축소되고 시장경제가 확대되는 것 아니냐로 보여진다.

 

지금 북한이 어느 정도의 시장주의로 가고 있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서 북한은 이미 계획경제는 파탄됐다는 점에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공장을 운영하려면 자재를 대주고 돈을 대줘야 되는데 자재도 대주지 못하고 돈도 대주지 못하니까 알아서 살라고 독립채산제라는 명목으로 알아서 살라고 한 지 오래 됐기 때문에 더 이상 북한이 경제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하든 안 취하든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농장도 마찬가지다. 농장도 생산성이 나지 않으니까 알곡 생산을 안 하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분조에서 30명이 집단으로 하는데 30명이 똑같으면 모르는데 관리위원회에서 10명이 필요 하다고 빼가는 실정이다. 20명이나 해서 그 사람들의 몫까지 다하고 자기네한테 돌아오는 건 다른 데 차출해 간 사람 몫까지 일을 하게 되니 문제였다.





 

그런데 그나마도 국가에서 기름도 안 대주고 트랙터도 안 대주고 농기계가 안 대주니까 관리위원회에서 알아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미 똑똑한 관리위원장들하고 당비서는 다 이만큼 땅을 5000평 줄 테니까 여기서 생산한 것을 우리 관리위원회가 60% 바치고 너 40% 가져, 이런 식으로 경영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이번 시장경제 확대조치가 사실이면 변혁, 개혁, 혁명이라고 봐야 될 것 같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자율경영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북한은 “시장”이라는 말을 쓰기 싫어서 자율경영체제라는 말을 쓴 건데 농민들한테 땅을 나눠주는 것이다.

 

나눠줘 가지고 국가에다 60% 내놓은 게 아니고 국가에 40%를 내라고 하면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식량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을 것이다. 장마당에 나가면 쌀, 콩, 팥까지 없는 게 없다고 하는데 이런 것이 다 가족단위로 농장을 하는 데서부터 이루어진 성과라고 봐야 될 것 같다.

 

그러면 이번 조치가 자본주의의 시작이라고 보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이다.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예를 들어서 기계공업이라든가 화학공업도 대규모 연합소 이런 게 다 개혁경영하에 하는 것이다. 재미나는 현상은 북한에서는 텃밭이 있다.

 

 

 ‘텃밭’에서 싹튼 시장경제

 

김정은 정권 들어와서 처음에는 텃밭 이래가지고 영농조합 하면서 25평에서 30평 정도의 텃밭에서 자율적으로 생산을 했다. 그런데 조금 발전돼서 200평 내지 300평을 줬다.

 

그런데 이번에 가족 1인당 약 1000평을 준 것은 아주 획기적인 조치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일 겨우 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는 혁명적인 것보다도 이미 김정은 체제 들어와서 변화되고 있지만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측면에서 변화는 예상되어 있지만 그러나 과연 1000평까지 분양한다는 것은 지켜봐야 할 사항이라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토지를 주더라도 토지 소유권은 국가에 있다. 다만 사용권이 농민들에게 있다는 것 이다. 그런데 이것도 1000평까지 줬다는 것은 지금 200평에서 1000평을 준다면 5배가 되기 때문에 상당한 변화다.

 

그러면 굳이 1000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 북한에서 이런 식으로 인민들에게 가족단위로 땅을 주고 몇 대 몇으로 나눠서 너희가 몇을 가져가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획기적인 생각이다. 현재 국가가 4를 가지고 농민들이 6을 가진 형태다. 과거에 보면 7:3이 제일 컸다고 했다.

 

왜냐하면 2012년도에 포전전답제 이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식량이 매년 100만톤 정도 부족했는데 2012년, 2013년에 약 50만톤씩 증산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경제성장, 자율경제권을 확대해서 경제도 약 0.8% 증대됐다고 알려졌다.

 

이런 차원에서 봤을 때 아마 김정은 시대 들어와서 이 두 부분에 대해서는 성과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 장마당은 이미 합법적으로 해서 국가가 우리 재래시장처럼 장마당을 다 지어놔서 여기에 들어와서는 국가가 시면 시 군이면 군 행정위원회에서 임대를 해 주는 실정이다.

 

말하자면 자기가 하루면 하루 임대료를 내고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국가가 통제했던 것은 이렇게 국가가 지정해 준 장소에서 하지 않고 도로 바닥 에서 무질서하게 아무데서나 놓고 하는 그것을 메뚜기 장사라고 했다. 여기 뛰고 저기 뛰고, 단속을 너무 하지만, 그것조차도 단속이 어려워져가고 너무 많이 생겨나가지고. 지금 북한의 소식에 의하면 장마당이 없으면 먹고 살기가 안 된다는 것이다.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이미 시장경제라는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이미 시장경제가 된 지 오래 됐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장마당을 활성화해서 장마당에서 자기 물건을 팔고 물건을 사고 이런 것을 통해서 북한이 일반 서민들이 생활하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뿐만 아니라 모든 고위층들도 다 같이 필요한 것은 장마당에서 구입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국영상점이나 국영백화점에는 거치대, 진열해 놓고 외국인들이 나오면 상품 진열해 놓고 외국인이 달라면 주는 것뿐이지 지금 백화점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경우는 드물다. 기본적인 약 한 7, 80%는 장마당을 통해서 구입한다는 것이다.


 

재미나는 현상은 누군가는 장마당을 통해서 자기생산량의 60%는 내가 갖고, 이걸 시작으로 하지만, 조금 더 갖고 조금 더 갖고 하다 보면 그 지역에서 부유층이 생기기 시작하고 지금의 권력과 연계된 그런 어떤 부유층이 아니라 내가 시장에서 돈을 벌고 개성상인처럼 돈을 통해서 부자가 되는 이런 계층도 나올 수 있지 않느냐는 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마당이 활성화되다 보면 자연히 자본주의의 돈 주들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북한의 돈 주들은 그 후견인인 관료들과 결탁하고 있다고 봐야 된다. 그 결탁이라는 것은 초기단계 이기 때문에 아마 그래도 돈 주들보다도 관료들이 좀 더 힘이 세다고 볼 수 있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처럼 서서히 영혼을 잠식시키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다.”

                              (사데크 헤다야트_ 눈먼 부엉이 중)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산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내면 깊숙이 남아 있는 그런 상처 말이다. 개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화목해 보여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누구나 말 못할 고민이 있다.

내겐 ‘종교’가 고민거리다. 그것은 헤다야트 소설 첫 문장처럼 “영혼을 서서히 잠식시키는 상처, 그리고 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는 고통”이 되어버렸다.

 

신자들은 주일이라고 말하는 일요일. 여지없이 문자가 온다. “교회 다녀왔냐”고 묻는 아버지의 연락이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다녀왔다”고 답한다. 대답을 하자마자 ‘어느 교회, 어떤 말씀, 몇 부 예배’ 식의 질문이 연달아 쏟아진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거짓말을 한 지 몇 년째인가. 매번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늘은 교회 안 갔어. 가서 무의미하게 앉아 있을 바엔 안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라고 답했다. 평생을 목회자의 삶으로 살아온 아버지와 그 시간만큼을 ‘목사 딸’로 살아온 나. 우리는 수화기를 마주하고 처음으로 종교에 대해 대화를 시작했다.

 

- ‘목사 딸’로 살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걸 포기했어요. 뭐든지 기독교 중심이었어요. 이제 넓은 세상으로 갈래요

 

아버지 - 세속에 빠져 성을 탐닉하는 게 / 네가 말하는 넓은 세상이니? 요즘 이상한 사람들 만나니?  당장 기도원에라도 다녀와라

 

“안 믿는 사람 만나지 말랬더니…”

 

딸 - 아빠, 이제 그런 문자 보내지 마요. 제가 교회를 다녀 왔다고 하면 그걸로 안심이 되나요? 몸만 예배당에 있으면 뭐해요? 설교 시간에 졸고 있을 바엔 차라리 집에서 잠을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의미 없이 오가는 것, 남들에게 보이는 형식, 이젠 거짓말 못하겠어요. 그리고 저, 교회 안 간 지 몇 년 되었어요.

 

아버지 - 교회는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지켜야 할 도리야. 네가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주일에는 예배당에 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아빠는 네가 단 한번도 형식적으로 교회를 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몇 년 동안 교회를 가지 않았다고? 사실이니? 거짓말이지?

 

-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종교가 있냐는 질문을 받아요. 지금까진 당연히 기독교라고 답했죠. 그러면 반사적으로 “교회 나가요?”라는 말이 나와요. 무슨 의미 같아요? 그만큼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많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생각을 달리한 후엔 무신론자라고 답해요.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졌거든요.

 

아버지 -  무신론자라니, 자유로워졌다 라니…. 종교가 네 삶을 구속하기라도 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다니.

 

- 아빠, 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사 딸’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어요. 어렸을 때는 신을 믿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삶은 언제나 신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모든 관계에 있어 신(종교)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가 없었거든요.

무언가 하려 해도 ‘나는 그러면 안 되니까’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어요. 이런 생각들이 힘들었어요. 학교를 다닐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요. 모든 것들이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면 안 된다 가 강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생각 때문에 포기하게 된 것이 너무 많아요. 이제까지 좁은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는 넓은 세상을 향해 가고 싶어요.

 

아버지 - 넌 지금까지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왔어. 무엇보다 지금의 네가 있었던 건 네 스스로의 힘이 아니야.

그건 주님의 축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마, 그걸 모르는 건 아니잖니. 좀더 넓은 세상? 그건 타락하고 세속적인 쾌락일 뿐이야. 그건 성경에도 나와 있잖니.

 

- 아빠, 학창시절 내내 아빠가 제게 한 말이 ‘교회 안 다니는 애들과 친구 하지 말라’였어요. 전 우스갯소리로 넘겼죠. 왠 줄 알아요? 그 말대로라면 왕따로 살 수밖에 없거든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았어요.

오히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그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그 기독교인들은 그 반대예요. 편협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건 물론이고 멀쩡한 사람들을 헐뜯고 비난하죠.

한국의 기독교는 부패했어요. 비단 한국의 문제는 아니겠죠. 기독교는, 신을 믿는다는 그 믿음은 생각의 자유를 통제하고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지 못해요.

 

아버지 - 아빠도 인정하는 부분이 있어. 그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마음 아픈 일이지. 그럴수록 굳건한 믿음으로 기도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지금까지 부모 말 잘 듣고 거스른 적 없는 네가 왜 이제야 이런 말을 하는지 아빠는 당황스럽구나. 왜 이렇게 변한 거니?

 

- 맞아요. 한번도 부모님 말을 거스른 적 없었어요. 물론 목사 딸로 살아가면서 남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건 인정해요. ‘목사 딸’이라는 이미지가 적어도 ‘나쁜 아이’라는 이미지로 비치진 않잖아요. 연기하며 사는 것도 지긋지긋해요.

목사 딸로 산다는 건 <주홍글씨>의 에이(A) 자처럼 제 삶을 지배했어요. 이제 저도 서른이에요. 이십대 내내 누굴 만나든 아빠가 목사 딸이라는 것이 걸렸어요. 목사 딸이어서 헤어진 적도 있었다고요. 전 아빠가 목사라는 게 부끄럽다고요.

 

아버지 -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아빠가 부끄럽다니. 주님의 종인 목회자에게 부끄럽다니. 넌 다른 아이들보다 축복받은 가정에서 태어났어. 그건 네 삶의 축복이고. 네가 이렇게 된 데에 아빠의 기도가 부족한 탓일까…(아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도대체 안 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믿지 않는 사람 만나지 말랬더니 이상한 사람들만 만나고 다닌 거 아니야?

 

“종교 강요는 폭력이라고요”

 

- 지금까지 부모님 말에 순종하며 살아왔잖아요. 하지만 이젠 제 삶을 살아야죠. 착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냈고 아빠가 원하는 대학도 갔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부모님께 손 벌린 적도 없었고요.

제가 종교를 버렸다고 해서 아빠와의 관계가, 가족 관계가 깨진 건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지고 그 취향을 존중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아버지 - 세속에 빠져 성을 탐닉하고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네가 알게 된 신세계니?

네가 기도하지 않은 동안 세상에 물들어버린 것 같다. (버럭 화를 내면서)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기도원에 며칠 다녀와서 회개해.

 

- 성을 탐닉했다고요? 왜 교회를 가지 않으면, 당연하듯 쾌락에 빠져 산다고 생각하죠? 유희라고요? 그게 바로 기독교인들이 가진 편협적이고 좁은 시야 아닌가요?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회개라고 하셨죠? 회개하면요? 또 연기를 하면서 살아야 하나요? 그렇게 하면 뭐가 남나요?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행동만 하라니. 원하신다면 아빠 앞에서는 그렇게 해주죠.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아요. 성인이 된 자식에게 종교를 강요할 의무는 없어요. 부모의 종교를 자식에게 강요하다니, 이건 폭력이에요.

 

아버지 - 인문학 들먹거리면서 궤변을 늘어놓더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지금 당장 정신차리지 못해? 종교는 강요가 아니야. 더욱이 믿음은 강요가 아닌 자신의 체험이란 건 그 누구보다 네가 알잖아! 네가 성장하면서 겪었을 내적 갈등은 모든 사람이 겪는 거야. 모든 기독교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 이해를 바라지도 않아요! 아빠는 그러기 힘들 테니까.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런 딸을, 그 자체로 인정해주세요. 아니, 바라봐주세요. 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아버지는 한동안 침묵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더니 “여지는 없겠지만 생각해볼 문제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띠띠띠.

 

나는 끊겨버린 전화를 든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적 속에 몇 분이 지났을까. 문자 한 통이 왔다.

“이번 주부터 ○○교회에 나가”라는 아빠의 메시지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던데, 과연 종교 앞에서도 가능할까. 내겐 너무 먼 얘기다.  



 

 

 


 


 



 





 

 

 



 










 

최근 IT기술과 관련해서 단연 최고의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이다. IBM의 왓슨이 실제로 다양한 영역에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멀지 않은 시점에 다양한 종류의 일을 실제로 대신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전성기를 맞게 되는 근미래의 의료환경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이미 IBM왓슨이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 암센터와 휴스턴의 MD앤더슨 암센터, 그리고 최근 세계 최고의 병원으로 꼽히기도 한 메이요클리닉 등에 채용되어 다양한 테스트와 일을 맡아서 하면서, 인공지능과 의료진들의 공존모델을 다양하게 타진하고 있다.

 

IBM의 왓슨은 수퍼컴퓨터라고 부를 수 있는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지만, 네트워크에 연결되면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에 간단히 올려서 사용할 수 있기에 생각보다 쉽게 보급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최근 왓슨과 같은 인공지능이 실제 비즈니스영역에 투입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테스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의료서비스영역이다. 의사들이 진단을 내리는 것을 도울 수 있고, 복잡한 조건을 모두 검토한 뒤에 바람직한 치료방침을 결정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복잡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케이스는 정교한 판단의 나무를 그린 뒤에 이를 의사에게 제시하여 같이 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협업을 하여 과거보다 더 나은 치료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모든 진료를 이런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런 진료가 가장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암환자에 대한 수술, 방사선치료, 항암제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분야에 집중적으로 테스트가 이루어졌고, 현재까지의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컴퓨터가 하루에 학습하는 데이터의 양은 인간이 평생 동안 학습하는 양보다 많다. 인공지능은 의학과 관련한 전세계의 저널을 의사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모두 읽을 수 있다.

환자들의 의무기록도 순식간에 파악하고, 현재까지의 최신 신약테스트결과도 모두 파악한다. 최신 의치료방침은 항상 업데이트하고 있으며, 휴식도 취할 필요가 없고, 피곤에 찌들어서 황당한 실수를 하는 일도 없다. 또한, 지속적으로 학습을 한다.

 

또 한가지 인공지능이 의료 부분에 적용되는 사례는 심사평가업무다. 이미 인디애나주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거대민간보험사 중의 하나인 웰포인트에서는 IBM의 왓슨을 이용해서 의사들이 수행한 각종 시술에 대해 그 정당성을 판단하고 청구된 항목에 보험료를 허가해 주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이 경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적절히 진료한 의사들은 특별한 삭감을 당할 이유가 없겠지만, 다른 의사들의 경우에는 과거에는 적당히 넘어갔던 사안들도 이제는 전부 근거가 없거나 과잉진료라면서 이의가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보험자의 인공지능과 병원의 인공지능이 소통하면 어떨까? 병원의 인공지능이 진료나 치료를 하기 전에, 이것이 문제가 없는지 보험자의 인공지능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고, 삭감이 없는 계획을 세워서 진료를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아마도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진료계획이나 치료방침을 의사들이 거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처음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인터넷의 파급효과가 이렇게나 전방위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기술의 보급과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스며들듯이 이루어진다. 인공지능이 현재와 같이 보급되고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능력이 증명되고, 효용이 발생하며, 비용도 떨어진다면 언젠가는 의사들이 맡은 역할을 대체하겠다는 사회적 압력이 증가할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가 닥쳤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나 의료시스템 전반을 위해서 옳은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냥 손을 놓고 있기보다는 인공지능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이 변화시키는 세세한 물줄기의 흐름부터 먼저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정지훈 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  



 



 

 



 

 
 

 

 

 

 

 

 

 

 








 

현대는 정보화 시대다. 정보화 시대의 핵심은 속도다. 누가 얼마만큼 빠르게 남을 앞지르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빨리 달린다고 다가 아니다. 아무리 빨라도 남의 뒤만 따라가면 헛수고라는 말이다.

 

언제나 남보다 한 발 앞서가는 속도여야만 속도의 가치를 지닌다. 더구나 경쟁관계에서의 속도는 절대속도보다 상대속도가 중요하다. 속도는 계속 가속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상태에서 월등한 속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선두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속도의 수치보다 누가 더 빠르냐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경기장에서 1등만이 갈채의 환호 속에 파묻힌다. 1등과 간발의 차이로 2등을 했지만 2등에게는 월계관이 없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1등은 역사의 전면에 부상(浮上)하여 그 이름을 길이 남기지만 2등은 1등의 그늘에 가리워 망각의 뒤안으로 사라진다. 결국 1등이냐, 2등이냐의 차이는 속도의 차이다. 골인 지점에서 시간으로는 0.00000000001초, 공간으로는 0.00000000001mm의 차이가 성공과 실패, 환희와 좌절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수치로는 도무지 계량(計量)하기 어려운 속도의 차이로 인해 한 사람은 영광의 자리에 들리우고, 한 사람은 비통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지난 90년대 말 ‘4S’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스피드(속도), 스크린, 스포츠, 섹스가 그것이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생각의 속도는 디지털 신경망이다. 기업내부의 의사전달 체계를 정보기술을 활용해 전환시킨다면 의사결정 속도는 그만큼 빨라질 것이라는 게 빌 게이츠의 진단이다.

그가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속도는 사고(思考)의 속도를 앞당기는 것이다.

최고경영자의 아이디어가 머리에서 떠오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바로 말단 직원이 알 수 있어야 하고, 일반 고객이 제품에 대해 갖는 불만도 고객의 머리 속에서 바로 기업의 최고경영진에게 전달되는 단계다.

 

그래서 빌 게이츠의 생각의 속도는 정보의 흐름이 생명줄이다.

디지털 조직은 인체의 신경망과 같다. 신경망을 통해 전달되는 속도가 성패를 가른다. 쏟아지는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에서 승부가 난다.

 

그 다음은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탄생시킨 인터넷이라는 신경망은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생활방식이 아닌 웹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고, 기업은 웹 워크 스타일로 운영된다.

인터넷으로 인해 인재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아웃소싱이 자연스럽게 일반화한다. 사람보다 우월한 정보분류와 검색능력을 가진 컴퓨터는 지식관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개개인의 능력을 기업IQ로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는 최적, 최선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빠르게 가능하게 한다.

 

정보화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80년대가 질(質)의 시대, 90년대가 리엔지니어링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속도의 시대이다. 우리 시대는 삶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 놓은 웹(Web)이 전반적인 생활화를 주도하게 된다.

 

생각의 속도가 빨라야 산다

속도의 기본은 즉시(卽時)이다. 언제, 어디서나 현상을 환히 꿰뚫어 보면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즉시성이다. 생각의 속도는 1초에 지구를 16바퀴 반이나 도는 광속보다도 더 빠르다.

 

우리는 생각이 느린 사람을 ‘형광등‘이라고 놀린다. 스위치를 올리고 한참 있다가 불이 켜지는 그런 느려터진 감각으로는 빠르게 스쳐지나는 정보를 포착할 수도, 빠르게 몸을 숨기는 지혜를 소유할 수도 없다.

 

속도의 시대를 살기 위해서는 생각의 속도가 정보의 속도를 추월할 수 있는 항속(恒速)을 유지해야 한다. 무한대의 공간에 눈 깜짝할 새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한 정보를 적시에, 적소에서 포획하려면 날샌돌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합바지를 입은 것처럼 남의 뒤를 뒤뚱거리며 따라가거나, 자다 일어난 것처럼 멍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찰나 현재는 과거로, 미래는 허무로 묻혀버리고 만다.

 

결론이다. 생각의 속도가 생각의 성숙과 만날 때 생각은 날개를 달게 된다. 빠르기만 하면 졸속이 되기 쉽다. 빠른 만큼 속도에 비례하는 여물기가 이뤄지면 완벽한 사고(思考)의 틀을 형성하게 된다.

 

생각이 여물기 위해서는 세월 나이테가 필요하다. 나이테는 철두철미하게, 책임감 있게, 진실 되게 살아온 연륜이다.

생각의 속도가 원숙한 연륜의 바퀴를 달 때 인생수레는 거침없는 자기완성의 길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공부나, 사업이나, 목회나, 사회생활 모두가 ‘생각의 속도’에 가속기를 달 때다.

 

50년 목회를 하고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컴퓨터로 글자 하나 제대로 치지 못하는 컴맹이어서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남은 앞날이 캄캄해 답답하다고 했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달리고 있다. 그러니 남의 꽁무니를 뒤쫓아가는 처량한 실패자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가는 행복한 1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꼴등이라고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1등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능력의 시간' 손자가 계승

오랜 갈등 딛고 은혜 전파 사역 재시작 의미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는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이었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의 '능력의 시간(Hour of Power)'을 손자인 바비 슐러(Bobby Schuller) 목사가 이어가게 됐다.

 

33세 바비 슐러 목사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창립한 크리스털처치(Crystal Church)가 파산하고 지난 2013년 가톨릭 교구에 매각된 이후에 기존 성도들을 이끌고 셰퍼즈그로브처치(Shepherd's Grove Church)를 세우고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바비 슐러 목사와 함께 하는 능력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린 프로그램은 첫 방송에 20개국 시청자들을 한 데 모았다고 교회측은 전했다.

 

바비 슐러 목사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방송에 나갈 수 있어서 기뻤다"며, "방송이 나간 후에 받은 열렬한 반응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1970년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능력의 시간'은 1975년에는 미국의 50개 주 모두로 전파를 탔으며, 이어 전 세계로도 방송되면서 1천7백만 명의 시청자들이 애청하는 프로그램이 됐다.

 

세계 최대의 파이프오르간과 사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크리스털처치에서 방송되어 온 '능력의 시간'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은퇴 이후 교회 지도권을 둘러싼 자녀들 간의 불화와 이로 인한 교세 감소, 재정 악화 문제가 지속되면서 교회가 파산되기에 이르자 중단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바비 슐러 목사와 함께 새롭게 시작된 '능력의 시간'은 한 때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교회였던 크리스털처치가 오랜 위기를 딛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파하는 사역에 전념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비 슐러 목사는 2003년 오럴로버츠대학교를 졸업했으며, 2008년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크리스털처치에서 사역에 참여해 왔다.

 

슐러 목사는 '능력의 시간'이 앞으로 "비종교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프로그램이 되길 바란다"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로 촬영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개인이 더욱 깊은 관계성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초점을 둘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고 밝혔다.

 

한편, 크리스털처치는 지난 2013년 6월 30일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린 이후 1955년부터 시작된 역사를 마무리했다. 교회를 매각한 캘리포니아 주 가든 그로브 가톨릭 교구는 최근 교회의 전체적인 인테리어를 바꿀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관절? 어려운 한자어이지요? 고(股)는 ‘넓적다리 고’입니다.

넓적다리는 무릎과 사타구니 사이의 다리를 가리키고요. 넓적다리 관절이라면 연상이 잘 안 되죠?



 

고관절은 보통 차렷 자세를 할 때 손이 닿는 부위로 사진에서 줄자가 덮고 있는 부위죠. 골반과 다리를 이어주는 관절이므로 한때는 고관절을 엉덩관절, 엉덩이관절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우리말이 훨씬 쉽죠?

 

이 고관절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 관절입니다.

이 관절이 발달함으로써 직립보행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자유로워진 손이 불과 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뇌도 급속히 발달했다는 것, 잘 아시지요?

 

고관절은 몸에서 평소 가장 안정적인 관절이고 어깨 관절 다음으로 운동 범위가 넓습니다. 이소룡, 성룡, 황정리 등 발을 잘 차는 배우들은 실로 고관절 운동을 잘 한 사람들이지요.

 

고관절은 외상 퇴행성관절염 골다공증 등으로 상하기도 하지만, 대퇴골두무혈성괴사 때문에 수술할 지경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넓적다리 뼈 가장 윗부분(머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관절 전체가 썩는 병입니다.

대퇴골두무혈성괴사는 50대 이상의 애주가에게서 잘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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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가정집에 들어갈 때

우리나라의 문패처럼 문설주에 부착되어 있는

손바닥 길이 정도의 작은 케이스가 달려 있습니다.

이 작은 케이스가 바로 [메주자/Mezuza]]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어느 작은 가게의 입구에도 붙어 있습니다.   


메주자 안에는 성경의 신명기 6장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