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 2015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는 소리새가 불렀다.

노래를 힙합가수 팝핀 현준(남현준, Poppin HyunJoon)과

국악인 박애리 부부가
2014년 9월13일 불후의 명곡 프로에서 함께 불렀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 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걸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






 




 




 




 







 



 




힙합가수 국악인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직업의 두 사람.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취향과 성격과는 절대 무관하다는 걸 일깨운다.

 

 

 

 

 

사람들의 선입견을 보란 듯이 깨고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그들의 인터뷰에 귀 기우려 본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지,

내가 가지지 못한 걸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에게 충분한 사람과 결혼했다. 그걸로 만족스럽다"  

팝핀현준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있을 수 있다.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우리가 힘을 합하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었다." 

박애리

 

 

그들은 공연을 통해 대중문화 전통문화를 절묘하게 결합한다.

서로 다른 것,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떻게 융화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결혼과 삶

그 자체를 통해 보여주는 두 사람.



 

 








 



 


 
 



 









 




 






 




기도의 전형적인 자세는 두 손을 다소곳이 아래로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이것은 죄수의 모습이다. 포승 줄로 양손을 꽁꽁 묶여

끌려가는 죄인을 연상하면 된다.

기도 시간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본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는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 지

잘 아는 사람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무릎을 꿇어야 함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자는

다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그가 누구일지라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십계명의 처음 계명은 ...

“나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말라”로 번역된다.

“나는 너를 직립 인간으로 창조했고,

 너는 나의 아들이고 딸이다.”


무릎 꿇지 말고 당당 하라.

바로 그것이 우리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까닭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릎 꿇는 것이고,

세상을 향해 곧추 서서 사는 힘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 꿇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아닌 것에

무릎 꿇고 살기 십상이다.

 

하나님께만 엎드려라.

하나님이 아닌 일체의 것에 고개를 쳐들라.

그리고 하나님 아닌 것이 무릎 꿇게 하려거든

멱살을 잡아 하나님께 무릎 꿇려라.

 

당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라.(언)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 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간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 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 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 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홍대욱 선교사(83)는 사고로 인해 왼쪽 다리를 잃었다.

의족을 끼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사역하는 그는

장애인을 위한 의수족을 제작한다.



 

한쪽 다리 없지만 더 좋은 것 달라 기도

의족 만드는 선교사 된 건 기도 응답

이제는 '예수' 보여줄 수 있는 선교 해야

 

올해 여든 세 살인 홍대욱 선교사는 왼쪽 다리가 없다.

19살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했으니, 무려 60여 년을 외발로 살아온 셈이다.

 

그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지역에서 새소망재활재단을 세워 20년째 현지 장애인을 위한 의수족을 만들고 있다.

지금은 잠시 사역의 쉼표를 찍고 LA에 머물고 있다. 아내(홍순하·76)가 유방암과 난소암 판정을 받아서다.

아내를 간호중인 홍 선교사를 만났다. 그 역시 몸이 성치 않다. 풍토병으로 매일 주사를 맞아야만 하는 홍 선교사는 인터뷰 내내 가려운 몸을 계속 긁어야 했다.

 

다리 절단할 때 찬송가 불러

 

홍대욱 선교사는 아내를 돌보다 인터뷰를 위해 잠시 짬을 냈다. 병간호중임에도 그의 주름진 얼굴은 계속 미소를 담아냈다. 홍 선교사는 "인생은 많이 살았지만 하나님 이야기 빼곤 별로 말할 게 없는데…"라며 겸연쩍어 했다.

 

-지금 상황 때문에 솔직히 신이 야속하진 않나.

 

"아마 사람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할거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라는 기대가 있다. 사고가 나서 다리를 절단했을 때도 찬송가를 불렀다."

 

그는 고향(제주도)에서 교회 일로 버스를 타고 시내를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1951년의 일이다.

 

-세월이 한참 흘렀기에 웃을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니다. 오히려 사고 당시 살아남아서 기적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다리 하나가 남았기에 더 감사했다. 그때 기도했다. 비록 한쪽 다리는 없지만, 더 좋은 걸 달라고…그 기도가 지금 '선교'를 통해 응답받고 있지 않나."

 

-그땐 편견도 심했을 텐데.

 

"말도 마라. '병신'이란 소리 정말 많이 들었다. 심지어 다리를 절단하고 나니까 얼마후 아버지가 약간의 돈을 손에 쥐여주더니 이젠 '너 살길 네가 살아야 한다'며 집을 나가라 하셨다."

 

서울역서 구걸할 자리 알아봐

 

그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와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홍 선교사는 "그땐 목발을 짚은 채 서울역에 구걸하기 좋은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는데…"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잠시 상념에 잠긴 듯했다.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인생은 원래 순탄치 않은 건가' 싶다.

 

"나에게 사고는 오히려 남을 돕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내 다리가 없으니 남의 다리 없는 게 보였다. 장애인에게는 내 다리 같이 딱 맞는 의족이 생긴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내게 그 기쁨은 누군가를 위해 의족을 만들어야겠다는 이유가 됐다. 게다가 한쪽 다리가 없으니 되레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더라."

 

수십 년간 익힌 기술이 도구로

 

그는 미국인 선교사가 우연히 전해준 나무 의족을 제공받고 그때부터 장애인 보조기구 제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 세브란스병원(10년)과 성모병원(7년)에서 근무하며 학업(대신신학교 목회학)도 병행했다. 직장 동료였던 아내도 그때 만났다. 17년간 일한 경험은 그가 선교사로 쓰임 받는 바탕이 됐다.

 

-미국은 어떻게 오게 됐나.

 

"1969년이다. 디트로이트에 의족 만드는 회사에 취직이 됐다. 사실 꽤 살 만했다. 거기서 20년 정도 일하다 캘리포니아로 왔는데 내 고향이 제주도라 그런지 바닷가에 좋은 집도 하나 샀었다. 지금은 다 팔았다. 우린 은퇴자금까지 선교에 다 써버렸다. (웃음)"

 

-노후를 즐길 수 있는데 왜 선교사가 됐나.

 

"난 원래 목사 아닌가. 의족을 만들며 삶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내겐 목회였지만 항상 선교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그때 출석하던 교회에서 어떤 방글라데시 선교사가 간증을 하다가 다리 없는 아이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때 '저거다' 싶었다. 내가 가진 기술을 갖고 도움이 필요한 지역에 직접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난 목사이자 기술자"

 

홍 선교사는 지난 1994년 가족과 함께 이슬람 지역인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다. 그는 여든이 넘었지만 아직 현역으로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슬람권에서 선교는 제약이 많지 않나.

 

"물론 쉽지 않다. 그래서 난 우즈벡 정부에 솔직히 말했다. 신분은 분명 '목사'지만 난 의족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라고…그랬더니 그 솔직함 때문인지 오히려 이제는 우즈벡 정부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다."

 

-의족 한 개를 만드는데 얼마나 걸리나.

 

"보통 각 사람에게 딱 맞게 제작하려면 1주일은 걸린다. 그래서 오랜 사전 상담이 필요하다. 그건 단순히 의족 제작을 위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상처까지 보듬는 시간이다."

 

-문득 '상처입은 치유자'란 책 제목이 떠오르는데.

"얼마 전 사고 때문에 다리를 잃은 한 청년에게 의족을 제작해줬는데 그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 하더라. 근데 오히려 내가 고마워서 울었다. 난 우리 센터를 찾는 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다리가 없으니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라고 꼭 감사의 말을 해준다."

 

아내는 정말 예쁜 사람

 

잠시 화제를 바꿨다. 투병중인 홍순하 사모의 상태가 궁금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수술 후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정말 예쁘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해서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존엄성을 깨우치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엄함을 아는 사람이다. 아내는 보육원에서 장애 아이들을 돌보는데 대소변까지 웃으며 다 치운다. 나는 솔직히 그 일은 잘 못하겠다. (웃음) 근데 아내는 '예수님도 죄인인 우리를 위해 직접 왔는데, 하물며 우리가 그분이 지은 귀한 피조물을 냄새 나고 더럽다고 어떻게 돌보지 않을 수 있느냐'고 늘 말한다."

 

그들은 '나'아닌 '예수'를 본다

 

홍 선교사는 "아내가 빨리 나아서 선교지에 꼭 함께 돌아갔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아직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선교 열정은 대화 내내 묻어났다.

 

-선교는 무엇인가.

 

"우리는 짓밟혀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는 게 선교다. 그건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은 '말'이 아니다."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내면이 깨끗해야 한다. 그게 안되면 아무리 좋은 것으로 치장하고 감싸도 중병을 앓는 거다. 우리가 성도란 신분으로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우리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 안의 '예수'를 보는 것 아니겠나."

 

홍 선교사는 선교지의 상황을 언급하며 "큰 교회들이 '못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일침은 날카로웠다.

 

-못된 짓이 궁금하다.

 

"한국교회가 외형만큼 정말 크다고 보나. 돈과 도덕성 타락 때문에 다 무너지고 있다. 선교가 어느새 자랑과 성과로 변질됐다. 선교는 돈이나 전략으로 되는 게 아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성과로 변질됐다는 것은.

 

"선교지에 오면 선교 보고를 해야 한다며 온통 사진만 찍어간다. 지금은 사역을 어떻게 포장하는가가 중요해졌다. 통탄할 일이다. 이게 무슨 꼴인가. 모두가 통곡해야 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제는 성도로서 좀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장열 기자) 


 

 

 


 

 



 

☞새소망재활재단은 ...

홍대욱 선교사 부부를 비롯한 10여 명의 현지인 직원이 함께 사역한다. 지금까지 6000여 명에게 의족을 제공했고 재활훈련을 시켰다.

 

이 재단은 미국으로부터 결함이 있거나 중고품인 의료보조기구를 받아서 다시 쓸 수 있게 재생한 뒤 장애인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또 의족 외에도 옷, 이불, 신발 등을 지원받아 제공하고 있다. 장애인 직업학교, 보육원 사역도 재단의 주요 사역 중 하나다.

홍 선교사는 "현지에서 함께 동역 할 젊은 선교사들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전했다.

▶ 도움문의:(949) 533-8544




 



 

 



 


 













 




 



 


 










이창옥 선교사, 아프리카에 우물 2만개 계획
물 없이 죽는 아이들에게 새 생명을…


 




 

“물은 사람이 살기 위한 기본적이 요소라는 거지요, 문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땅속에 있는 물을 꺼내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이 안타까운 현실에 정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물 파주기에 나서는 것 아니겠어요! 그야말로 아이들이 먹지 못해 굶더라도 물만큼은 먹어야 공부든 뭐든 할 게 아닙니까”

 

아이러브아프리카(이창옥 이사장)는 아프리카 대륙을 돕는 전문단체로 2004년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되어 전 세계에 TV방송 등 멀티미디어를 통해 아프리카에 사랑 나눔을 실천하고 아프리카 우물 2만개 파기를 목표로 하는 ‘식수개발사업, 공중화장실 100개 건립목표를 하는 ‘환경개발 개선사업’을 하고 있다.

 

아이러브아프리카 대표인 이창옥 이사장은 1977년 남편을 따라 식인종이 존재하는 곳, 도마뱀을 친구로 여기며 사는 서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서 꽃다운 20대를 보냈다.

타국 생활에 적응 할 무렵 갑자기 찾아온 풍토병과 말라리아로 생명이 위험했던 그녀는 무릎 꿇고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대로 다하겠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새 생명을 얻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거듭남을 선물한 은혜의 땅, 아프리카에 무엇으로 빚을 갚을까 기도했지만 알 수 없었다. 하나님은 또 다시 그녀에게 고통받는 아프리카의 실상을 보게 하셨고, 세계영상선교센터를 세워 선교하게 하셨다.

 

60세의 나이에 편안한 노후를 버리고 아프리카전문구호단체NGO ‘사단법인 아이러브아프리카’를 설립하고 아프리카에 생명의 우물 2만개 파주기, 공중화장실 100개 건립하기 등의 사업을 통해 물이 없어 죽는 아이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오염된 물은 마시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평소에 별 제한 없이 물을 사용하고 마시는 우리가 볼 때 어떻게 저런 물을 마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들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깨끗한 물을 풍족하게 마시고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더러운 물을 마심으로 인한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매년 1800만 명의 어린이가 더러운 물로부터 전염된 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그나마도 이 오염된 물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아프리카에서 물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5시간이나 된다.

 

이곳 아프리카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 웅덩이에 와서 작은 플라스틱 통에 물을 담아 간다. 학교에 우물이 없으니까 이물을 떠서 쉬는 시간에 아껴 먹는다. 하지만 학교에 우물이 있다면 아이들이 힘들여 웅덩이를 찾아갈 필요가 없어진다. 깨끗한 물을 학교에서 먹고, 방과 후 물통에 물을 담아 집에가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다.

 

건강한 물을 먹는다는 것은, 건강을 지키는 것 뿐 아니라 아프지 않게 되면서 학습능력도 자연스럽게 올라가 아프리카의 미래를 밝게 해 준다.

 

이에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사역과 아프리카와의 인연을 글로 옮겨 얼마 전 책 ‘약속의 땅, 아이러브아프리카’을 출간했다. 그녀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땅인 아프리카의 놀라운 생명력과 자연을 소개하고 그 뒤에 숨은 아프리카의 고통과 아픔을 생생히 표현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얼마나 부족하면 30년이나 준비를 시키겠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생명을 다해 아프리카의 희망나무인 어린이들에게 우물을 하나라도 더 파주고 싶어요. 제 생명이 다 할 때까지요” 아프리카라는 말만 떠올려도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그녀는 오늘도 아프리카를 종횡무진 누빈다. 

 

 

 




 



 



 



 



 



 



 



 

 








 






 



 







 





 


 



 


 



 




 



 









 

1월 한 달이 지나가는데도 아직도 새해기분이다. 새해기분이란 무언가 바라는 기분을 말할 것이다. 또 어린아이일 수록 바라는 것이 많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철없는 어린아이인가 보다.....

 

바라는 사람은 흔히 높고 크고 많은 것을 바란다.

그러나 큰 것을 바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작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나에게 작은 것인가? 나에게는 차라리 큰 것을 꿈꾸다가 작은 것을 발견하게 된 깨달음이 1월의 달력을 넘기게 한다.

 

우리의 기도가 작다. 아니 나의 기도가 너무 작다.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에게는 프레드릭 마이코니우스라는 좋은 친구이자 조수가 있었다.

1540년, 마이코니우스는 병들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루터에게 편지를 보내 다정한 작별 인사를 전했다.
루터는 그 글을 읽자마자 회신을 보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대가 살 것을 명령한다. 왜냐하면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아직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주님은 절대로 그대가 죽었다는 말을 내가 듣지 않게 하실 것이며,
그대가 나보다 더 오래 살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내 소원이니, 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 되게 하기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내용은 대담하기 짝이 없고 막무가내 같은 기도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루터의 답장이 도착했을 때

말할 기운조차 없었던 마이코니우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6년을 더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루터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일까?

큰 교회? 많은 교인?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건물? 커 보이는 직분?

 

다 필요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진실하고 강한 큰 믿음의 기도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의 기도라는 문을 열 때 들어오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함께 가지고 오신다. 그러기 때문에 위대하신 하나님께 위대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정초에 한국 가정에서는 세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

위 어른들은 세배를 위해 두 가지를 준비 한다.

첫째는 세배 돈이고 둘째는 덕담(德談)이다. 후손들에게 선포할 축복의 말을 준비한다.

 

건강하게 잘 살거라....

몸이 약한 자식들에게 건강을 선언하면 자식들은 그렇게 될 줄로 알고 믿는다.

 

옥동자를 낳거라...

세배 드리고 돌아가는 자식들은 옥동자가 잉태할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할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 축복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한다. 온 세상을 향해서도...

 

달라고.. 달라고.. 졸라대는 기도를 어찌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는가 마는 그런 작은 기도보다는 주님의 위대하신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하는 당당하고 큰 기도의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는 세상을 향해 꼿꼿이 서서 당당하게 사는 자들이다.

 

어찌 보면 교회는 병들어 다 죽어가는 환자만 보살 피는 병원이 아니라 더욱 건강하게 당당하게 살게 하는 짐(Gymnastic)이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교회마다 한 주간 내내 마귀에게 이리저리 얻어 터져서 상처 뿐입니다 라는 다 죽어가는 병신들의 신음소리 대신 지난 주일에 주신 말씀대로 살며 마귀를 혼내주고 승리하였습니다 라는 승전가(勝戰歌)로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좀 당당한 교회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난 김에 작은 기도로  큰 기도를 드리는 기도문을 소개할 까 한다.



 

 

작은 기도

나의 사랑이
큰 홍수가 되게 하소서

나의 미움(증오)은
바싹 가뭄이 들게 하소서.


눈물의 기도

살아가는 일이 힘든 날에
눈물 흘리게 하소서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너머
희망의 무지개를 보게 하소서


슬플 때의 기도

슬픔을 겪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하소서

슬픔의 터널 끝에
기쁨이 손 흔들고 있음을 믿게 하소서


한숨이 나올 때의 기도

살아가다가 때로
땅이 꺼지는 한숨 쉴 때 있습니다

내쉬는 한숨 속에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실어 보내게 하소서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의 기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소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면
더 밝은 희망의 문이 열림을 믿게 하소서


의기소침해질 때의 기도

삶의 의욕을 잃고 기가 꺾이는 것은
누구라도 이따금 겪는 일입니다

시들해졌다가도 생기를 되찾는
나뭇잎의 모습에서 용기 얻게 하소서


기쁠 때의 기도

때로 넘쳐흐르는 삶의 기쁨
다스릴 줄 알게 하소서

나의 기쁨이
남의 슬픔 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삶이 순조로울 때의 기도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린다고
행여 교만한 맘 갖지 않게 하소서

순탄한 길의 끝에
험난한 길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교만한 마음이 들 때의 기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듯한
착각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잘 익은 벼일수록
고개 숙인다는 걸 잊지 않게 하소서


화장할 때의 기도

너무 짙은 화장보다는
수수한 화장을 즐겨 하게 하소서

사람의 참된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알게 하소서


안경알을 닦을 때의 기도

눈이 침침해 안경알을 닦으니
한결 사물이 잘 보입니다

하루에 한두 번은
마음의 눈도 말끔히 닦게 하소서


신발을 신으며 드리는 기도

오늘 하루 나의 발걸음과 동행할
신발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운 곳에
제 신발을 데려가지 않게 하소서


짜장면을 먹을 때의 기도

어릴 적에 최고로 맛있던 짜장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맛 변함없습니다

저도 짜장면처럼
한결 같은 모습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쓰레기를 버릴 때의 기도

쓰레기도 분리수거를 하면
제 나름대로 용도가 있습니다

때로 하찮아 보이는 제 삶이지만
주님 뜻에 합당하게 쓰이게 하소서


낙엽 길을 걸으며 드리는 기도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며
인생의 의미를 묵상하게 하소서

세상에 한번 왔다 가는 인생
더없이 큰 축복이요 선물임을 느끼게 하소서


꽃 길을 걸으며 드리는 기도

오늘처럼 꽃 길 따라 걷는 것
분에 넘치도록 황홀한 은총입니다

꽃같이 순하고 맑고도 굳센 정신으로
인생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어둔 밤길을 걸으며 드리는 기도

불빛 없는 밤길을 걸을 때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

제 맘속 살아 계신 주님이
제 앞길 밝히는 등불임을 고백합니다.(장재언) 

 





 



 



 




 



 













 

 



 







 




 



 








작가 김성일 장로가 쓴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가 책으로 나왔다.

책의 첫 부분을 여기 소개한다
 


 

꾸준한 성경연구를 통해 성서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작품을 저술해 오고 있는 작가 김성일 장로의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가 오늘부터 연재됩니다.

 

김 장로는 최초 복음서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행적이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 것에 착안, 이번 연재를 통해 마가와 그 주변 인물들의 행방을 추적해 나갈 것입니다.

 

아울러 이번 연재의 관련 사진은 이강근 목사가 맡습니다. 이 목사는 장신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스라엘 히브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예루살렘 유대교회 담임목사 및 유대학연구소 소장으로 있습니다.

 

예수님 따르다 달아난 부잣집 아들 잃어버린 16년 행적은?

 

필자는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의 생애를 추적하여 장편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전3권)’를 써낸 바 있다. ‘마르코스 요안네스’는 ‘마가라 하는 요한(행 12:12)’의 헬라어 표기이다. 마가는 신약 시대의 초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 필자의 작가적 흥미와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찾아내고 긁어모으면서 나름대로는 큰 감동을 얻게 되었다. 필자는 이제 그 경위와 감동을 독자 여러분과 한번 나누고 싶어졌다. 손에 들어온 자료들을 가지고 작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더 필요한 것들을 추리력으로 캐내고 상상력으로 그것들을 짜 맞춰 재구성하는가에 대해 독자들도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또 그런 과정을 함께 손잡고 다니다 보면 뜻밖에도 성경의 행간에 숨어 있는 놀라운 비밀들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가, 그는 과연 누구였던가.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전 1:19)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해 놓은 네 개의 문서를 우리는 복음서라고 한다. 신약 성경의 첫 부분에 배치된 이 복음서의 순서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으로 되어 있다. 이들 중 어떤 복음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이 마태복음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가 마가복음이 먼저라는 데 일치하고 있다.

마가는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마가에 관한 기사가 조금씩 단편적으로만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성경에 마가의 이름이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사도행전 12장에서다. 헤롯 아그립바의 명령으로 체포된 베드로가 천사가 열어 준 옥문을 나와 마가의 집에 이른 장면이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

 

이 내용을 근거로 예수의 승천 후 성령이 강림하실 때까지 열흘 동안 120명이 모여 기도했던 그 다락방이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행 1:12∼13)

 

그리고 다시 43일 전으로 돌아가면 이 다락방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가지셨던 그 장소이기도 했다.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막 14:15∼16)

 

예수께서 잡혀 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분이 어찌 되는가를 지켜본 가룟 유다는 물러가 목을 매어 죽었다. 가야바의 집까지 갔다가 세 번이나 그분을 부인하고 통곡하며 그곳을 떠난 베드로와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갔다가 그분의 모친을 부탁받은 요한 역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숨어 있었다.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도 역시 마가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0∼11)

 

그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곳도 그곳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이상의 기록들로 볼 때 마가의 집은 신약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지만 그 사역의 절정은 역시 그분의 고난과 희생과 부활이고 그에 이어지는 성령 강림의 사건이다. 그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유월절 만찬과 그분이 무덤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이 숨어 있던 것과 부활하신 그분이 나타나신 것과 성령 강림 사건이 모두 마가의 집에서 일어났다면 마가의 집은 보통 장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예수의 사역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그의 모습을 스스로 적어 놓은 대목이 그것을 설명해 준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2)

 

주석가들은 이 청년이 곧 마가 자신이었을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기사를 삽입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는 그의 차림새에 대해 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의 베 홑이불이란 것은 그들이 흔히 속옷 위에 걸치고 다니는 겉옷을 의미한다.

그것은 몸에 두르고 다니다가 때로는 벗어서 몸을 덮는 데도 쓰인다. 그런데 이 청년은 벗은 몸 위에 그냥 겉옷만을 걸쳤다. 날씨가 더웠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예수 같은 훌륭한 선생님을 따라 나서는데 그런 차림새로 갔다는 것은 그분에 관하여 별로 관심도 없고, 또 따라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따라갔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밤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따라 겟세마네, 즉 감람원으로 갔던 것일까? 그는 도대체 어떤 젊은이였던 것일까?

 

지금도 남아 있는 마가의 집 다락방은 120명이 함께 기도할 수 있을 정도여서 그 집이 꽤 큰 규모의 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과부였으나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외삼촌 바나바는 레위 지파 출신이었고(행 4:36) 부친 역시 레위 지파 출신이었다. 유대를 지배하는 이방 민족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많은 레위 지파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았다.

구브로에서 태어난 바나바 역시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가의 부친은 아들의 본명이 요한이었으나 헬라어 이름인 마르코스로 부를 정도로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마도 장사를 하여 큰 재산을 모아 남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부잣집의 외동아들인 마가는 예수라는 인물에 관해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외삼촌 바나바는 토지를 팔아 사도들에게 헌납할 정도로 열심이었고, 그의 모친 마리아 역시 예수와 그 제자들을 다 뒷바라지 할 정도로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가라고 마가를 강권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막 14:26)

 

그날 밤 예수의 제자들 역시 뭔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혹시 큰 능력을 지니신 예수께서 그날 밤 거사를 일으켜 늘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낙관적인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가의 외삼촌 바나바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주님께서 오늘 밤에 뭔가 큰 결심을 하신 것 같으니 너도 따라가 그분의 사역에 참여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수도 있다.

그의 모친 마리아도 역시 외삼촌과 같은 의견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할 수 없이 벗은 몸에 겉옷만 두른 채 그들을 따라나섰으나 외삼촌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잠들어 있을 때 예수 그분이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도망치던 마가는 대제사장의 하속들에게 잡혔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2)

 

그것은 AD 30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성경에 다시 그가 나타나는 것은 16년이나 지난 AD 46년이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행 12:25)

 

안디옥에서 일하던 바나바와 사울이 큰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형제들을 돕기 위해 부조금을 마련해 방문한 것은 AD 46년경이었다.

예수께서 체포되던 밤에 겟세마네에서 벗은 몸으로 도망쳤던 마가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16년 후에 다시 성경에 등장한 것일까?

사도행전에는 그 사이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 강림 그리고 사도들의 활동과 기적, 스데반과 야고보의 순교 등 많은 사건들이 적혀 있다.

그 동안 마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마가복음 7:24-37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Q1] 혈루증 여인(5)과 수로보니게 여인(7)의 믿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부정한 죄인 또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으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앞에 한없이 겸손했음.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임;

 

첫째로,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그 지병이 나을 수 있다고 감히 확신하고 있었음(5:28).

둘째로, 수리아 사람과 페니키아 사람의 혼혈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선민이 먹고 난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 얻어 먹어도 이방인인 자신의 딸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임(7:28)

 

일찍이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새 언약의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열렸다는 복음을 전하신 바 있는 예수님이(4:23-26) 그들에게도 죄 사함과 병 나음의 은총을 베풀고 계심.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의 성전도 아니고 유대의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믿는 자.

그리고 성령님을 모시고 영적인 삶을 살고자 결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임.

그것이 여기서 다시 한번 증명되고 있는 것임.


 

 [Q2] 믿음은 결국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음;

믿음이란

하나님

누구신가를 알고(Creator/Author)

권위(Authority)

능력(Power)

인정하는 것임.

 

혈루병 여인의 경우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음;

믿음은 병을 낫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 영생을 얻는 방법임(17:3).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일을 위해서 독생자를 이 땅에 구주로 보내셨으며 그 사실을 알고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임.

 

 

 [Q3] 두 여인의 신분상의 차이와 구원받은 정도의 차이 그리고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혈루증 여인의 경우와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드러나고 있음;

 

첫째로, 혈루증 여인은 선민인 유대인이지만 피를 흘리는 몹쓸 병에 걸려서 그만 부정한 죄인으로 치부되고 있었음. 그렇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완전한 이방인으로서 율법 바깥에 살고 있었던 여인임.

 

둘째로,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과 우상만을 섬기는 자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음.

그래서 유대인인 혈루병 여인은 영육간의 구원을 얻었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은 귀신만이 쫓겨나고 있음.

 

다음으로 혈루증 여인은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 옷자락을 만지고 있음. 그것은 가장 치유의 효과가 큰 직접 믿음인 것임.

 

반면에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딸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나아와서 호소하고 있음. 그러므로 귀신이 떠나가고 그녀의 딸이 낫게 되는 것은 간접 믿음의 결과이며 그것은 병이 낫게 되는데 그치고 있음. ,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선포된 것이 아님.  

 

 

[Q4] 데가볼리 지역(중심도시 거라사)

정치적, 종교적 특색은 무엇인가?

 

열 개의 이방도시(Deca-Polis)가 있다는 의미에서 데가볼리지역임. 그곳 중심도시 거라사에서 예수님이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고자 귀신 떼를 양돈업자의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허용한 사건이 있었음(5:13).

 

그때 그곳의 주민들은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낫게 되는 기적을 베푸시는 메시아의 은혜와 구원의 기회를 선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한 바 있음. 그들은 물질주의적 선택을 하고서 예수님이 떠나시도록 요청하였음(5:17). 그와 같이 물질을 숭상하는 이방 지역에 귀신 떼들이 들끓고 있는 것임(5:10).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물질주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세상적인 복만을 주는 우상을 섬기고 있음.

 

예를 들면, 바알 신과 아세라 여신이 그러한 우상들임(왕상14:15, 12:25-33, 16:31-33).

참고로, 가나안 일대의 이방인들은 본래 주신(主神) (El)을 섬기고 있었으나 나중에 그 아내 아세라(쾌락의 신)와 아세라의 70명의 신들 가운데 선택된 풍요의 농사신 바알을 숭배하였던 것임.

 

그 이유는 아세라와 바알이 합방을 하면 다산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는 풍작이 찾아 온다고 믿었기 때문임. 그것이 고대 두로의 여신 아세라(왕상14:15)와 가나안 인들의 바알 신의 결합이 만들어 낸 가장 큰 우상문화였던 것임.

 

그 기본 관념을 도식화 해보면 다음과 같음;

 “풍요 ← 높은 생산성, 많은 소출 ← 다산 ← 혼음 ← 내세나 후세를 경시하고 오로지 현세만을 중시함”.

 

여기서 최초의 문제점은 현세주의인데 [마가]의 작가 김성일 장로는 그것을 자제력을 잃어버린 사회가 방종의 자유를 향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

 

그 결과 사회는 풍요 속의 빈곤이 만연되고 미래가 없는 현실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부어라 마셔라”라는 소비주의가 계속되고 있는 것임.

 

 

그러한 사회는 어린 아기의 생명조차 어른들의 생존 및 번영과 맞교환하고 있는데 그 원시적인 모습을 인신제사에서 엿볼 수가 있음.

, 아기의 피로 땅의 불모를 방지할 수 있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끔찍한 인신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임.

 

 

 [Q5] 데가볼리 농아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야단스런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 세 가지를 느낄 수 있음;

첫째, 예수님의 탄식을 자아낸 데가볼리 사람의 귀 막힘과 어눌한 말(생각).

둘째, 하나님 대신 귀신과 더불어 살아온 오랜 세월.

셋째, 강력한 외침 ‘에바다’로 열어야만 될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 등임.

 

그리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귀머거리도 듣게 하려는 ....

하나님의 계획(50:20, 35:5,6)

예수님의 애쓰심(Passion, 열정과 고난)인 것임.

 

그래서 메시아의 사역은 ....

그 첫 번째가 귀머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똑똑히 듣도록 만들며

눈 뜬 소경이 하나님의 역사를 똑바로 보게 만든다는 것임( 35:5-6, 7:22). 




 


 

 




 


 




 






 


 




 











 


 



 



 


 




 



 








 

어머니 덕분에 교회에 갈 일이 생겼다. 평소에 교회에 가끔 가서 기도를 드리고 오라는 것인데, 그렇게 열렬한 신자가 아니었기에 예배 같은 딱딱한 자리에서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다 해서 청년부에 가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주일 정오 예배에만 참여 했었는데. 이 마저 도 불편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네 편한 시간에 가서 기도라도 드리고 와라.]


  그리해서 아무도 없는 시간대 특히 초저녁의 시간대에 주로 가서 혼자 가볍게 기도하고 오곤 했다.

교회는 전부 지하에 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건 고작 2층의 작은 건물이지만 지하에 들어가면 압도적인 높이의 천장이 있는 거대한 예배당이 있었다.

 

지하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을 때는 어두컴컴하고 혹시나 기도하러 오는 사람을 위해서 조용한 음악을 켜두곤 했다.


  아무도 없는 그런 느낌이 좋아서 나는 종종 찾아가곤 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뭐라고 기도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왼다. 이것도 단조롭다고 생각되면 사도신경을 왼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기도할게 없다. 만족하고 있으니까. 원하는 것은 없다. 내가 하고 싶고 바라고 싶은 그런 시시콜콜한 것을 나의 절대자에게 빌어도 되는 것인가.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날도 무어라 할 지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누군가가 내 기도를 받았다. 메아리.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메아리 일리는 없고. 누군가가 있었다. 내가 기도를 멈추었는데도 계속해서 말이 들려오는 것이 그랬다. 사람이 있다. 눈을 떠 고개를 들어 앞 의자를 바라보았다.

 

맨 앞의 의자에 검은색의 희미하게 들썩이는 사람이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몸에 힘을 주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도대체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나? 자신의 힘으로 이뤄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나.

나는 호기심이 들어서 근처에 갔다. 검고 긴 머리에 하얀 정말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가 고개 숙여 기도 하고 있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았나. 아멘. 이라고 말을 끝낸 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크고 동그란 눈가가 젖어 있었다. 아이는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기도하러 왔다가……그냥 호기심이 생겨서 신경 쓰였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고 다시 손을 모아 처음부터 기도했다. 기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또 가만히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주기도문을 외고 또 외고 도대체 얼마나 여기서 반복 했던 것일까?

예배당 앞에 거대한 나무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렸다. 울먹이는 목소리는 말하다 끊기다 말하다 끊기다 반복했다.

커다란 십자가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는 아이는 숨이 끊어질 듯 간절히 빌었다.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금방 잊혀진 것 같다.

 

그 간절함은 경건함으로. 나는 이 예배당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아지경으로 기도하는 자에게는 자신 외 누구도 없다. 이 소녀 역시 그러했다. 그러한 소녀를 바라보는 나도 같이 무아지경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 했어?]
  […….]


  [어디서 왔어? 무얼 그렇게 열심히 빌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하늘에서 왔어요. 다시 하늘로 가고 싶어서 절실히 빌었어요.]

 

순간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방 비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니까. 그래서, 죽고 싶다는 말 같이 들렸다. 눈물 고인 눈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빨리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내 착각일 수 있으나. 신발도 신지 않고 옷도 이 추운 겨울에 얇은 하얀 천만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하늘로 올라갈 거에요.]

 

아니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이렇게 간절히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고 바라는 죽어라 기도하는 이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 같았다.

 

아이는 계속 기도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상어 처럼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 처럼 기도했다. 왜 인지 그냥 기도하는 걸 바라 보았다. 방해되지 않게 그 뒤의 뒤의 뒷 자리에서 가만히 보았다. '흐윽-' 간혹 짧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울음 소리가 멈춘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았다. 아이가 없었다.

 

예배당 앞의 거대한 십자가에 날개가 돋쳐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십자가 앞에 아이가 거대한 날개를 뻗고 있었다. 숨이 멎었다. 시간도 멎었다.

 

한 섬 빛이 아이의 날개를 빛냈다.
 날개가 한번 움찔거렸다.
 또 희미한 울음 소리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천사가 십자가 위에 있었다. 



 

 

 


 



 



 

 


 
 


 

 





 




 



 

 



 




 











 

수백 년간 생산성은 경제성장을 이해하는 핵심이었다. ‘한 해 얼마나 많은 차와 컴퓨터를 생산했나’ 하는 식이다. 이제는 생산성과 경제성장을 측정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측정해야 할 것은 ‘만족’이지 얼마나 많이 생산했느냐가 아니다. 








 

리바이스 청바지를 예로 들어보자. 과거엔 리바이스사가 특정 스타일과 컬러로 진을 만들어 고객들에게 내놓았다. 잠재고객이 와보고 좋으면 사고, 반응이 나쁘면 안 팔렸다. 오늘날 소비자들은 자기만의 진을 창조할 수 있다.

한 청바지업체는 자기네들이 내놓은 스타일과 컬러와 사이즈를 이리저리 조합하면 6500가지가 넘는 진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인터넷으로 자기만의 옷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입을 바지를 직접 만드니까 더 잘 사고 더 만족하는 건 당연하다.


 




 

네덜란드 하이네켄 맥주는 광고를 인터넷으로 공모한다. 멕시코 판매를 앞두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맥주 광고 콘테스트를 하는 식이다. 소비자들이 만든 광고 덕분에 멕시코에서 하이네켄 맥주 판매가 크게 늘었다.

 

두 기업의 사례에서 핵심은 생산이 아니라 만족이다. 판매는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다.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새로운 트렌드의 하나도 ‘공유소비’다. 모토는 ‘소유하지 마라, 공유하라’다.




 




 

우버(Uber)는 미국 자동차의 92%가 놀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냥 세워둔 자동차를 다른 사람이 타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에어비앤비도 노는 자원을 공유 소비하는 또 다른 사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젊은이 몇몇이 자기 집에 여행자들을 재우는 가외 돈벌이를 하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여분의 침대까진 없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 에어매트리스를 권했고, 이 덕분에 이 신개념 비즈니스 이름이 에어비앤비가 됐다.




 

사람뿐 아니라 강아지 방도 빌릴 수 있다. 반려견을 합리적 가격에 맡길 수 있는 곳을 찾기 어려울 때 웹사이트 ‘도그 스테이(Dog Stay)’는 개를 맡길 수 있는 다른 애견가를 찾아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컴퓨터에 안 쓰는 하드디스크 저장 공간을 방치하고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에 의존하는 대신 그 공간을 공유할 수 없을까? 안 쓰는 공간은 거의 언제나 낭비다. 다른 사람이 돈 내고 쓰면 안 되나?

 

웹사이트 메이드세이프는 여기서 발명됐다. 비트코인과 비슷한 세이프코인을 만들었더니 인터넷으로 기업공개를 한 지 5시간 만에 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세이프코인은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 있는 저장장치를 사는 데 쓴다. 나중에는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를 빌리는 데 쓸 수도 있다. 누가 알겠나. 이 가상화폐를 언젠가 옷이나 아파트를 빌리는 데 쓰게 될지.

 

공유소비의 핵심 추진력은 기술과 도시화다. 인터넷이 없었을 때도 뭔가를 빌려 쓰는 건 가능했지만 그 과정은 비싸고 느리고 번거로웠다. 소셜네트워크는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 상거래의 핵심 요인인 신뢰를 구축해준다.

 

도시화는 공유소비를 폭발적으로 늘린 또 다른 주요 요인이다.

도시에 사는 세계 인구가 50% 가까이 된다. 앞으로 20년 안에 60%가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살면서 일하게 될 것이다.

거대 도시에선 농촌에 사는 것보다 모든 자원이 귀하고 비싸다.

“소유하지 말고 공유하라”가 훨씬 경제적으로 이치에 맞는다.

 

세상 흐름이 공유에 있는데 복음은 과연 전 보다 더 많이 공유되고 있는가? 이를 위해 교회는 어떤 선교정책과 훈련과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가? 점검할 때이다.  



 


 

 



 

 

 

 
 

 

 



 




 





 








 









 

제약회사와 의사들은 수십년 동안 ‘싱겁게 먹으라’고 외쳐댔다. 염화나트륨(NaCl)을 소금이라고 간주하며 고혈압과 신부전증, 심장질환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소금을 맹목적으로 기피하게 됐다. 그러나 고혈압, 신부전증, 심장질환 환자는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

 

소금은 독과 약을 함께 갖고 있다. 어떤 소금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약이 되고 독도 된다. 염화나트륨 천일염은 다르다.

 

합성 염화나트륨과 달리 천일염에는 각종 염화물과 나트륨, 미네랄이 조화롭게 포함돼 있다.

천일염에서 간수를 빼고 나쁜 성분을 태워 만든 좋은 소금은 신비의 약이다. 선조들이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했던 소(牛)와 금(金)에 비유하여 소금이라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국제맨발의사협회는 우리 천일염으로 만든 키토산 소금을 고혈압 약으로 쓴다고 하며, 농림축산식품부도 국산 천일염의 고혈압 예방 효과를 인정했다.

 

소금은 중금속이나 이물질을 빨아들여 소변이나 땀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피가 맑아지고, 산소 공급이 원활해진다. 적혈구 용적률이 높아져, 혈압을 내리게 한다. 배추를 물로 씻으면 농약이 50% 줄지만 소금으로 절여 씻으면 86%가 줄어드는 것과 이치가 같다.

 

체액은 1% 이상, 혈액은 3% 이상 염도를 유지할 때 건강할 수 있다.

민물에 사는 생물은 병이 많지만, 바닷물에 사는 생물엔 병이 적다. 염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심장(염통·鹽桶)은 탄력이 가장 뛰어나며, 암세포도 자라지 못한다. 소금은 소화를 돕고, 장에서 좋은 미생물을 키워주며, 음식을 분해하고, 부패를 막는다. 혈관과 심장의 수축력을 회복시켜 고혈압이나 심장질환을 막아준다.

 

염분이 부족하면 면역체계가 무너진다. 체액의 염분이 10%만 부족해도 죽음에 이른다. 또 위산을 분비하지 못해 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소화불량, 위궤양, 피로, 불면증 등의 원인이 된다.

 

싱겁게 먹으면 물을 마시지 않게 되어 탈수가 되고 염증이 생기고, 체액이 탁해지며, 장의 연동운동이 안 되어 배설이 원활하지 못해 숙변과 요산이 쌓이고 일산화탄소가 정체되어 만병을 부른다.

 

소금제염·제독, 살균, 방부, 조혈, 정혈 작용 등 여러 효능이 뛰어나다. 소금이 아니면 부패를 막을 길이 없고, 발효를 시킬 방법이 없다. 반찬이 싱거우면 쉬 변하듯이 싱겁게 먹으면 몸도 염증 등 각종 질병에 약해진다. 장 내부의 오염도는 장 외부의 오염도보다 1000배가 높다. 장 내부의 독소를 제거하고 염증을 잡는 건 항균 작용이 뛰어난 소금밖에 없다.

 





 

 

볶은소금으로 아침저녁 이만 닦아도 치아질환, 입냄새, 식도염, 갑상선질환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소금의 살균작용으로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다.

소금물로 머리를 감으면 가려움이나 비듬이 줄고, 9% 농도의 죽염수는 눈과 코에 넣으면 눈병과 비염을 예방 치료할 수 있다.

 

화장품 대신 바르면 무좀, 가려움증이나 기미, 잡티를 없애준다. 밥을 짓거나 조청을 만들 때, 혹은 어떤 음식을 만들 때건 소금 1%만 넣으면 부드럽고 차지게 해준다.

 

유럽이나 독일에서 소금의 하루 섭취권장량이 20g에 이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5g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권장치는 1.8g에 불과하다. 제약사나 의료계가 저희들 이윤만 생각한 결과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소금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싱겁게 먹어서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 특히 우리 천일염은 1㎏에 5만원이 넘는 프랑스 게랑드 소금보다 황, 인, 칼륨, 칼슘, 철, 마그네슘, 아연, 요오드 등 미네랄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천일염은 하늘의 선물이다.

 

정제염을 쓰지 말고, 구운 소금으로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를 담고, 음식의 간을 잘 맞추어 발효시켜 먹자.

스트레스와 병에 찌든 시대, 좋은 소금과 발효식품은 우리 건강을 손쉽게 지켜주는 약상(藥床)이다. (장두석 ㈔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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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가정집에 들어갈 때

우리나라의 문패처럼 문설주에 부착되어 있는

손바닥 길이 정도의 작은 케이스가 달려 있습니다.

이 작은 케이스가 바로 [메주자/Mezuza]]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어느 작은 가게의 입구에도 붙어 있습니다.   


메주자 안에는 성경의 신명기 6장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