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8, 2015






 



 









 




 

 

타메쪼 나리타가 작곡한 해변의 노래미샤 마이스키가 체로로 연주합니다.

나리타는 1893년에 태어나 1945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매우 서정적입니다. 특히 1918년에 작곡한 이 해변의 노래는  세계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던 작곡자가 추억속에 새겨진 지난 시절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합니다.

애수적인 멜로디와 첼로의 개성이 잘 어울리는 곡이라할 수 있겠습니다.





 

 

미샤 마이스키는 1948년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났고, 유년기 때부터 첼로 연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라트비아에서 공부하다가 러시아에 가서 1966년에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모스크바에서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지속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1972년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1973년에 카네기홀 데뷔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언) 


 










 



 


 
 



 








 








 




 
 
 

 
 

 



 

 




 


 






노래 시.....







Will you walk with me through the darkest night
When my world goes wrong will you make it right
Will you guide my lips in all I say
Will you walk with me everyday.

When I'm tired and weak will you make me strong
When my minds confused and all hope is gone
Will you take my hand would you lead the way
Dear Lord will you walk with me today.

Will you walk with me dear Lord ease my pain
Will you walk with me dear Lord once again
When my eyes grow dim will you let me see
Dear Lord will you walk with me.

If my friends should go when there's no one there
If I call your name in my darkest prayers
Will you come to me will you ease my pain
Dear Lord will you walk with me again.

Help me find the strength just to carry on
Teach me how to pray for it's been so long
Since I fell on my knees and asked you

to forgive all my sins
Dear Lord please forgive.

Dear Lord will you walk with me.
 







캄캄한 밤중에 저와 함께 걸으시겠어요?
제 모든 세계가 잘못되었을 때 바로 잡아 주시겠어요?
제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제 입을 인도 해 주시겠어요?
매일 저와 함께 동행 해 주시겠어요?



제가 지쳐 힘없을 때 저를 힘차게 해 주시겠어요?
제 마음이 혼란스럽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제 손을 잡아 제가 가야할 길로 인도 해 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저와 함께 동행 해 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주님 저와 동행하시어 제 아픔을 덜어 주세요
사랑하는 주님 다시 한번 저와 함께 하시겠어요?
제 두 눈이 침침할 때 제가 바로 보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주님, 저와 함께 동행 해 주시겠어요?



제 친구들이 떠나가서 아무도 없을 때
제가 가장 우울한 기도 속에서 당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
제게 오셔서 제 아픔을 덜어 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주님, 다시 저와 함께 동행 해 주시겠어요?



어려움을 견디어 낼 힘을 찾도록 도와주세요.
제 두 무릎을 꿇고 당신께 제 모든 죄 용서를 빌은지
너무나 오래 되었으니 제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사랑하는 주님, 용서 해 주세요.



사랑하는 주님, 저와 동행 해 주시겠어요?
 



 



 




 



 


 

 









 




 






















사순절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의 절기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사순절 기간에는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그리고 부활을 생각하며

근신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순절 말씀묵상을 통해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시간 되시길 기대합니다.



제 1일 (수) 마 4:1-11 예수의 시험받으심

[성회 수요일]
제 2일 (목) 시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
제 3일 (금) 마 4:12-25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제 4일 (토) 시 46편 함께 계시는 예수님

사순절 첫째 주일 마 5:1-12 복있는 사람

제 5일 (월) 마 5:38-48 사랑의 가르침
제 6일 (화) 마 6:5-15 기도의 가르침
제 7일 (수) 마 8: 1-17 병 고치는 예수님
제 8일 (목) 마 10:1-15 열두 제자의 파송
제 9일 (금) 마 12:1-8 안식일에 대한 질문
제 10일 (토) 시 63편 하나님에 대한 열망

사순절 둘째 주일 마 13:1-9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제11일 (월) 마 13:10-23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제12일 (화) 마 13:23-34 다른 비유들
제13일 (수) 마 13:44-56 비유들
제14일 (목) 마 14:13-21 오천명을 먹이심
제15일 (금) 마 16:13-20 베드로의 고백
제16일 (토) 시 51편 구원의 기도

사순절 셋째 주일 마 16:21-28 수난의 예고

제17일 (월) 마 18:1-4 천국에서 가장 큰사람
제18일 (화) 마 18:10-14 잃은 양 비유
제19일 (수) 마 18:21-35 무자비한 종의 비유
제20일 (목) 마 19:16-30 부자 청년
제21일 (금) 마 20:1-16 포도원 일꾼의 비유
제22일 (토) 시 95편 기쁨의 노래

사순절 넷째 주일 마 21:1-11 예루살렘 입성

제 23일 (월) 마 21:12-17 성전에 가신 예수님
제 24일 (화) 마 21:23-27 예수의 권위에 대하여
제 25일 (수) 마 21:33-45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제 26일 (목) 마 22: 1- 4 혼인 잔치의 비유
제 27일 (금) 마 22:34-40 가장 큰 계명
제 28일 (토) 마 23: 1-28 예수님의 책망

사순절 다섯째 주일 시 103편 하나님의 사랑

제 29일 (월) 마 24: 1-14 마지막 때
제 30일 (화) 마 25: 1-13 열 처녀의 비유
제 31일 (수) 마 25:14-30 달란트 비유
제 32일 (목) 마 25:31-46 최후의 심판
제 33일 (금) 마 26: 1-16 영원한 기념
제 34일 (토) 시 139편 하나님의 보호와 심판
종려주일 마 26:17-35 최후의 만찬

고난 주간

제 35일 (월) 마26:36-46 겟세마네의 기도
제 36일 (화) 마26:47-68 예수님의 체포
제 37일 (수) 마26:69-75 베드로의 부인
제 38일 (목) 마27:1-26 빌라도의 심문 [세족목요일]
제 39일 (금) 마27:27-56 십자가에 못박힘 [성금요일]
제 40일 (토) 마27:57-66 예수님의 무덤

부활주일 마 28:1-20 부활

사순절은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1.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읍시다.
2. 매일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집시다,
3. 특별금식과 절제훈련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훈련을 합시다. (언)








 

사순절

첫 째 주일

2월 22일

창세기

9:8-17

시편

 25:1-10

베드로전서

3:18-22

마가

1:9-15

사순절

둘째 주일

3월 1일

창세기

 17:1-7, 15-16

시편

22:23-31

로마서

 4:13-25

마가

8:31-38
혹은
마가 9:2-9

사순절

셋째 주일
3월 8일

출애굽기

20:1-17

시편 19

고린도전서

1:18-25

요한 2:13-22

사순절

넷째 주일

3월 15일

민수기

21:4-9

시편

107:1-3, 17-22

에베소서

2:1-10

요한3:14-21

사순절

다섯째 주일

3월 22일 

예레미야

31:31-34

시편

 51:1-12
혹은
시편119:9-16 

히브리서

5:5-10

 

요한12:20-33

 

사순절

여섯째 주일

종려주일
3월 29일

이사야

 50:4-9a

시편 31:9-16

빌립보서

2:5-11

마가

14:1-15:47
혹은
마가

 15:1-39, (40-47)







 



 







 



 








 

 



 






 







 

 



 

 



 

 



 

 



 

 



 

 



 

 



 

 



 

 



 

 



 

 



 

 



 

 



 

 



 

 



 

 



 

 



 

 



 

 



 

 



 

 



 

 



 

 



 

 



 

 



 

 



 

 



 

 



 

 



 

 



 

 



 

 



 

 



 

 

 



 



 

 



 

 



 

 



 

 



 

 



 

 



 

 



 

 



 

 



 

 



 

 



 

 



 

 



 

 




 









 



 


 



 



 





 









 

이스라엘의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기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블레셋 진영으로 옮겨진 이 법궤로 인해 블레셋은 7개월 동안 독종이라는 재앙에 시달려야 했고, 법궤에 손을 대는 사람마다 죽임을 당하는 혹독한 곤욕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아 온 것은 블레셋 입장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쾌거였으나 그 기쁨도 잠시였고 너무나도 큰 재앙으로 인해 온갖 질병으로 백성들이 고생하게 되자 블레셋은 이 법궤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세 차례씩이나 법궤를 보관하는 도시를 옮기는 법석을 부리다가 결국 이 골치 아픈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드디어 블레셋 사람들은 수레에다 법궤를 싣고,  젖이 나는 암소 두 마리가 그 수레를 끌게하여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끌고 갈 소를 선택할 때

왜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을까?


 

힘으로 따지자면 수소 즉 황소를 택했어야 했습니다. 무거운 수레를 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이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황소가 제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를 끌기 위해 선택된 것은 황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면 법궤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깨끗함과 순결함이 필요했다면 아마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송아지를 선택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송아지도 배제되었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픔입니다.

 

이제 막 새끼를 낳아 길러야 할 어미 소가 그 분신과도 같은 새끼와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궤, 즉 말씀을 품고, 말씀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살이는 큰 슬픔과 아픔이 동반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배제하고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 앞으로 그 아픔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 아픔이 젖 먹는 새끼와 생이별하는 아픔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갖고 사는 것은 아픔이랍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픔 그 자체입니다.

 

이 고통이 싫다면 말씀을 버려야 합니다. 이 아픔을 거부하고 싶으면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119:105)라고 고백하며 말씀을 사모한다면,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함께 사모하여야합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도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아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평생의 밥줄이었던 그물을 버렸습니다. 우리도 다 생업을 접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만큼 괴로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딤전1:8)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산 사람들의 결과는 어떠한 것일까?

 

이 젖소 사건을 보면   법궤를 끌고 목적지인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에 도달한 그 암소들의 최후는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번제물로 드려졌다고합니다. 즉 말씀을 따라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산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의외로 영광이 아닌 비참한 최후라는 교훈입니다.

 

말씀을 굳게 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젖먹이 아이와  헤어지는 것 같은 아픔까지도 참으며 주를 위해 일 하는 것은 영광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말씀을 따르는데서 오는 모든 고통과 희생을 알면서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을 영광을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며 일을 한 후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기쁨의 영광이 아닌 바로 번제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로 죽임을 당하고 몸은 조각조각 각이 떠지고 불에 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은 결국 영광이 아닌 죽는 순간까지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은 애초부터 영광과는 상관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더 썩어지고 더 희생하고 그리하여 결국은 번제의 제물이 되는 순간까지 봉사하는 것 이것이 말씀을 품고 사는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1840년 9월 4일 영국 웨일즈 리야드란 곳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는 1863년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습니다.

 

중국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젊은 목사는 24세 청년으로 신혼의 신부를 데리고 중국 선교사로 갔다가 본격적인 선교사업도 하기 전에 아내가 그만 죽고 맙니다.

큰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기도로 극복하고 있다가 마침 조선 땅 황해도 장연에서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 최선일이란 사람들을 만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으로 한문 성경을 공급받아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서해 도서지방에 성경을 나눠줍니다. 1865년 9월의 일입니다.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 를 타고 조선으로 오게 되었는데 강화를 돌아 한강으로 올라가야 할 배가 그만 뱃길을 잘못 알아 북상하며 대동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배가 정박한 곳은 평양의 만경대 일대로 물이 빠지자 그 배는 그만 대동강 모래사장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다 잡아 죽이게 되는데 이 젊은 목사도 체포되어 백사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다고 전해졌고 결국 그 곳에서 참수형(斬首刑)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7세 1866년 9월 2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젊은 목사의 이름은 토마스 선교사 (Robert J Tomas 1840-1866). 한국에 온 선교사로 첫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때 그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사람 중 홍신길이란 사람은 후에 강서교회를 세우게 되고, 최치량이란 사람은 평양교회를 개척하고,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랐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후에 신실한 신자가 되어 그 집이 널다리교회가 되었고, 토마스의 목을 자른 장본인인 박춘권이란 사람은 평양교회 장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의 기대대가영광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입니다... 복음 말고 다른 것으로 성도들을 꼬드기지 마십시오. 복음 말고 다른 영광을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오늘의 한국 교인들의 모습을 볼 때 말씀의 삶과 너무도 거리가 먼 듯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명예, 자랑, 물질축복, 지상영광 등 이런 잘못된 신앙관이 너무 깊게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벧세메스로 가는 소와 같이 멍에를 다시 메야하겠습니다.(장재언)  






 

 



 



 




 


 


 


 


 

 

 



 


 



 




 




 









 





 











 

















19세기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이런 말을 남겼지요.


- 눈물은 천만 단어의 말보다
더 힘이 있는 웅변이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눈물은 가장 고상한 언어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하나님마저도 울릴 수 있는
가장 숙연한 언어이자 가장 호소력이 있는 웅변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세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생애의 기록인 ‘4복음서’에는
두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서’의 기록까지 포함하면 세 차례입니다.


물론 그 세 차례의 상황이나 대상이 각각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눈물’ 자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천만 단어의 말씀보다’ 더 강조하는 행위 언어입니다.


말씀 중의 말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적 모범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진솔한 내용이자 강조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눈물’의 의미를 좀 묵상해봅시다.


-예수께서 (마리아)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나사로)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11:33-35)


먼저,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는’,
초상집에서 우신 ‘그리스도의 눈물’을 살펴봅시다.


죽어서 썩은 냄새까지 풍기고 있는 사람은 ‘나사로’입니다.
부모님을 일찍이 여의고,
마르다와 마리아 두 누이와 함께 살고 있던 고아입니다.
그런 나사로는 평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자’(요한복음11:3)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인
고아였기에 되레 각별히 사랑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불행이 불행을 낳은 것일까요. 부모도 없이 살다 보니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당연히 많이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병까지 듭니다. 그러자 의지할 데도 없는 두 누이들은
서둘러 예수 그리스도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이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병든 가족이나 이웃을 위한
오늘 우리의 응급 기도일 수 있습니다.

 

평소부터 각별히 ‘사랑하시던 자’가 병들었으면

기별을 받은 대로 당장 달려와서 고쳐주시든지

문병을 하는 것이 ‘상식’이자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상식이나 사랑은 우리의

그런 상식이나 사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당장 와보지도 않습니다. 죽도록 내버려둡니다.

‘죽은 지 나흘’이 넘도록 그래서 아예

‘썩은 냄새까지 나도록’ 내버려둡니다.

 

인간적으로 대단히 섭섭하고 불만스러운 행태입니다.
평소의 각별한 관심이나 사랑은 거짓이었던 것일까요?


물론 전혀 거짓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agape)이나 그 섭리는

인간 우리의 생각보다 늘 더 깊고 높고 오묘합니다.

그래서 때론 비정하리만큼 무관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차라리 ‘주무시는 하나님’이나

‘죽은 하나님’ 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되레 우리의 ‘자기(自己)’라는

인간적 내지 세상적 내지 이성적(理性的) 상식이나

가치관이 차라리 썩어버리도록 내버려두는

침묵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인내를 가르치는 것이,

하늘나라의 초월을 가르치는 것이, 보다 큰 진실이자

영원한 구원이자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그리스도의 때’ 곧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찾아오십니다. 기도 응답이 온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11:25-26)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신 후,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한복음11:44)

그렇게 나사로는 현재적으로 부활을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체험보다 되레 앞선 신비한 부활의 체험!
각별한 아니 대단한 긍휼이자 은혜이자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 ‘그리스도의 눈물’은,
한 마디로 인간의 개인구원, 작은 이웃의 구원을 위한
보다 심오한 눈물인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눈물’은,

상대적으로 사회구원 곧 조국의 구원
내지 인류의 구원과 참 평화를 위한 눈물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도정에서 흘리신 눈물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9:41-44)


저 예루살렘 멸망 내지 심판에 관한 예언은
사십여 년 후인 A.D. 70년에, 로마황제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군의 만행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예언은

요한계시록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 예언의 성격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회나

조국이나 지구촌이라는 인류를 향한 종말론적

심판의 선포이자 그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것이 저 로마제국 황제인 디도 장군이

당대의 ‘적그리스도’일 수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예언 그대로 ‘사탄이나 적그리스도나

거짓선지자’들이 오늘도 여전히 막강한

세상 세력으로 행세하고 있으니까요.


 

천재지변이나 기근 같은 ‘종말의 징조’가 가까워 올수록,

우리 역시 사회구원 곧 조국이나 인류의 구원과 참 평화를 위해서

저 주님의 모범처럼 울며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 구원과 참 평화에 관한 일은

오직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 곧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한 구원의 보살핌을 받는 날’의 비밀이자

‘하늘나라의 비밀’이자 ‘복음의 비밀’을 아는

그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의 눈물’은
‘십자가’라는 ‘죽음의 잔’을 목전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게 고뇌하며 흘리신 눈물입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며 흘리신 눈물입니다.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5:7-10)



‘하나님의 아들’ 곧 ‘참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육체을 입으신’ 인간 곧 ‘참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극한의 고통 앞에서 번민도

신음도 앓았고 통곡도 했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영지주의(靈知主義)자들의 주장처럼 도깨비(?) 같은

‘가현설(假現說)’의 존재도 아니고,

삶과 죽음을 손쉽게 오가는 저승사자 같은

판타지형 인물도 아닌, ‘참 인간’이었다는 것이 되레 반증됩니다.

판타지형 인간이나 로버트형 인간처럼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음을 이길 수 있었다면,

저부터도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자는 인간의 참 구원을 위한

 ‘대제사장’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피와 땀’이라는 인간의 눈물이나 고난 내지

고통의 막장을 모르는 자가 머리에 든 지식이나

이론만으로 남을 구원하고자 하는 ‘제사장’으로

 나서면 피차 불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것이 문호 괴테가 그랬지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고,
근심에 찬 밤을 울면서 지새워 보지 않고는,
인생의 참 맛을 모른다.-

‘인생의 참 맛’만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 구원의 맛’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자
극한의 고통의 현장은 골고다 십자가 그 현장이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원함과 아버지의 원함’이 충돌하는
겟세마네 동산 저 현장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원함’은 ‘죽음의 잔’, ‘고난의 잔’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26:39)



‘나의 원’ 곧 ‘내 뜻’, ‘내 소원’을 하나님께 기도 및

간구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믿음이 작은 일도 아니고, 죄가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기도와 간구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물론이고, 사도 바울처럼

 ‘육체의 가시’의 문제도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전적 맡김입니다. 전적 위탁입니다.

진실로 그것이 최고의 기도이자 최고의 겸손입니다.
몸을 낮추는 것이나 ‘나귀새끼’를 타는 검소한 삶도 겸손이지만,
최고의 겸손은 삶 내지 죽음 자체를 통째로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그것입니다.

최고의 자유이자 절대 자유도 오직 거기서 나옵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기도는,
이기적인 아집이나 야심이나 기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겸손하게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세상의 세속사(世俗史) 중심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구속사(救贖史) 중심으로

인생 내지 천지를 운행 및 역사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여느 말씀보다 더 위대한 ‘말씀 중의 말씀’이자

웅변이자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저 ‘통곡’이나 ‘눈물’은

자기 설움이나 한을 위한 그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 뜻’을 부인하고 구속사를 위한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위한,

기도를 통한 치열한 자기 부정이자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3월이 시작되는 무렵

이영찬 목사(오픈도어 교회/ 미국 캘리포니아 오랜지 카운티 Fullerton 소재

714-904-0691) 사무실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 왔다.

 

25년 동안 선교지에서 뼈가 굵어진 황광인 선교사(54)가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미 선교지에서 풍부한 경험을 한 이목사는 황선교사를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들였다.

선교보고를 겸한 미국방문의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쪼개서 만나는 자리였다.

 

황선교사는 89년 28세의 나이로 탄자니아에 단기선교를 떠났다.

갔다 오자마자 부인 황영숙(52) 과 함께

탄자니아를 영구적인 선교지로 결정했다.

 

단기선교가 곧 신혼여행이었는데

신혼여행이 평생을 선교사로 살게 하는 동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아직 평신도였었기에 2002년도에 미국에 와서

아주사 신학교와 풀러 신학교에서

신학(M_DV/MA)을 공부하고  선교에 역점을 두는

C&MA교단(미국 한인 베델교회가 소속한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8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탄자니아에 돌아가 지금껏

The Mission Aid Society of Tanzania와 손을 잡고

사역하고 있다.  




 





 





 




맨발로 살던 탄자니아 어린이들이 미국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치료를 기다리는 탄자니아 사람들


 








베델 단기선교 팀이 탄자니아 오지로 선교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베델 단기선교 팀은  이곳 단기선교를 통해 찬양을 얻게 되었다.

참가자 전원이 한 줄 씩 가사를 써 낸 것이 찬양이 되었다.

 

베델 단기선교 팀은 미국 본 교회로 돌아와서

이번 단기선교를 찬양을 탄생한 단기선교였다고 교회에 보고했다. 



여기서 베델 단기선교팀의 보고 내용을 소개한다...

 



 


 

올 해는 좀 이른 4월 초(2014년)에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도도마 지역에 있는 선교센터까지 비행기로 20시간,

자동차로 10시간이 걸렸고

선교센터에서 다시 사역지인 키도카 지역과 자질루와 지역까지는

5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이동만도 쉽지 않은 사역이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검은 피부가 아닌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

태어나서 한 번도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

태어나서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 거칠지만 빛나는 곳에서 4일 동안 텐트를 치고 지냈습니다.

전기도 없고, 마실 물 조차 부족한 곳이라서

당연히 기본적인 의식주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불편함을 잊게 할 만큼 복음의 역사가 가득했습니다.

 

 

새벽과 밤에는 함께 동행했던 현지 목사님들께서

집회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오전과 오후에는 16명의 팀원들과 몇몇 현지 의료진들이

치유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올 해는 어떤 메시지를 주셔서 그 안에 곡을 담아오게 하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더위와 먼지 가득했던 사역의 중간중간

하나님께 집중하곤 했습니다. 

 

 

미리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아프리카 현지 스타일의 찬양'은 뚜렷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 인도자의 선창과 화음 가득한 후창 (남자는 초저음, 여성은 멜로디와 알토)

/ 거의 대부분 곡의 코드는 1개에서 3개로도 연주가 가능함

/ 한 곡을 적어도 10분 이상은 반복해서 부름

/ '기쁨'과 '자유'가 가득한 찬양중의 몸동작, 그리고 수 많은 추임새들...

 

 

특별히 칠 흙 같은 이른 새벽에

현지 목사님, 사모님들과 함께 사역지로 이동을 할 때

어두운 버스 안에서 드리던 현지 사역자들의 찬양은,

창 밖으로 보이던 새벽 하늘의 밝은 별들 만큼이나

진한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사역내내 현지 사역자들의 찬양을 배우고, 함께 하면서

멜로디와 리듬의 틀은 사역 중반쯤에 이미 잡아 놓았고

이제 그 틀 안에 담을 메시지만 정리하면 되었었는데, 

번뜩...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공동작사를 해보자..."

 

 

그래서 전체 팀원들께 각자의 간증과 은혜를

3.3.3.2조의 11글자로 맞춰서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 밤에

서로의 간증을 나누는 시간을 잠깐 가졌었는데

'아무래도 다들 너무 피곤하셔서 일일이 적어주기 힘드실 것 같으니

차라리 한 분 한 분 간증을 들으면서 내가 가사로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팀원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가사로 다듬어 담았습니다.

 

 

현지에 계시는 황광인 선교사님 내외분까지 총 18명의 간증이 담긴

원곡의 악보는 이렇습니다.

 

 

 

이미 리듬, 멜로디, 스와힐리어 후렴구는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전체 간증을 들으면서 가사를 적고 바로 간증이 끝나고 초벌 발표를 했습니다.

첫 반응들은 '여기와서 듣던, 아프리카 찬양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됐다...' 싶었습니다.

 

 

다시 얼바인(Irvine, CA)으로 돌아와서는

이 가사들 중에서 선교팀들만 이해할 수 있는 가사는 줄이거나 바꿔서

회중들도 함께 부를 만한 5절짜리로 악보를 새로 그렸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예배찬양시간에

이 곡을 처음으로 회중들과 함께 불러볼까... 준비 중입니다.

(혹, 음원이나 영상이 잘 나오면 올려보려고 합니다)

 

 

"열방과 민족들 나라들 모두"



 

열방과 민족들 나라들 모두

(할렐루야 툼시푸 뭉구 뭉구)

영광의 하나님 찬양할찌라

(음무에마 예수 음무에마 예수 예수)

 

창대한 중에도 세밀한 주님 

(할렐루야 툼시푸 뭉구 뭉구)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네

(음무에마 예수 음무에마 예수 예수)

 

불러도 불러도 내 사랑 예수 

(할렐루야 툼시푸 뭉구 뭉구)

매 순간 매 순간 은혜로 사네

(음무에마 예수 음무에마 예수 예수)

 

 

가난도 궁핍도 막을 수 없네

(할렐루야 툼시푸 뭉구 뭉구)

한 사람 위해서 내 삶 드리리

(음무에마 예수 음무에마 예수 예수)

 

온 땅에 가득찬 생명의 주님

(할렐루야 툼시푸 뭉구 뭉구)

하늘에 가득찬 영광의 주님

(음무에마 예수 음무에마 예수 예수)  



 















 






 



탄자니아 이람바 지역에 기독교가 50년 만에 들어왔다며 지역 유지들이 환영하고 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 성도가 마귀의 굴레에서 벗어 났다고 간증하고 있다.



 



 




현지인 목사의 전도집회

 



설교를 경청하는 마을 주민들.

 



찬양과 함께 춤을 추는 마을 주민들. 100명 가까이 결신했다고 한다.

50년 만에 들어 간 교회가 기적을 이루었다고 선교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찬양 팀이 찬양을 부르고 있다.

 



마을 유지들이 베델 단기 선교 팀을 환영하고 있다.



황선교사가 일일이 통역하고 있다.

 



 





 





 





 

 









드디어 그 땅에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될 교회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완성되어 가는 교회 건물 .... 예배는 물론

 현지 교회지도자 양성 / 주변에 흩어져 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노회역할을 하게 된다 .
 







보냄을 받은 황선교사는 자기를 보내는 선교사들과 교회를 찾아가

선교보고하는 집회를 갖는다. 기쁨의교회에서 선교보고를 하는 모습.



그리고 황선교사 부부는 현지에서 수시로

선교보고의 글을 보낸다. 아래와 같이.....


 




 

2014/02/05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한 해가 벌써 저물어 갑니다.

이 해에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의 뜻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구했던 해였습니다.

 

감사를 해야 함에도 감사보다는 사역에 매여 지쳐 감사를 잊어 버린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그러한 부끄러움들도 이제 뒤 전에 두고 지나가는 한 해에 묻혀 버리겠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에 회개와 용서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핚 해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함께 동역하싞 교회, 가정, 형제 그리고 자매님들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 함은, 음바바라, 멤베지역 전도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100여명이 넘는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멤베는 6명의 교인들이었으나 이제는 76명이 넘는 분들이 함께 예배 드리고 있으며 음바바라도 30여명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이미 더러는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으로서의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감사함은, 도도마에서 30Km 떨어진 응코메 지역에 교회 건축이 시작되어, 본당과 화장실 등 기초공사가 끝이 나고 벽들이 올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응코메 목사님의 사택과 음바바라 교회의 목사님들의 사택이 지어졌습니다. 두 다리 조차 제대로 뻗고 잘 수도 없는 좁은 방에서 이제는 방 두 개에 응접실, 부엌이 있는 집에서 목사님들이 거하게 되었으며, 어느 권사님의 사랑으로 은다치 교회와 멤베교회 지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함은, 선교센터에 있는 기독교 학교가 새해에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 단계별로 열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 주위에 있는 재정이 되지 않아 공부하기 힘든 아이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본으로 학과 과정들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크리스천 선생님들, 깨끗한 교실과 화장실, 꽃들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선교센터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경험하며 아이들이 교육받고 성장할 것입니다.

 

감사함은, 시골교회들을 그렇게 방문하고 싶어도 차량형편이 잘 되지 않아 갈 수가 없었던 것을 아버지께서 보시고 좋은 차를 주셨습니다. 탄자니아 어디를 다 갈 수 있는 좋은 차를 주셨음에 더 더욱 감사 드립니다.

 

감사함은, 선교센터의 큰 식당 홀과 사무실 들이 지어져 가고 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아이들의 식당, 발표회장으로 목사님들은 컨퍼런스 홀 등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 감사함은, 저희들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내장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눈, 여러분의 기도로 수술을 받고 이제는 잘 보입니다. 저와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감사함은, 이 해도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며, 이곳 사역들을 위해서 저희들과 한 마음으로 동역해 주신 여러 동역자분들의 사랑과 저희들을 파송하시고 어버이와 같은 심정으로 도우시는 미주 은성교회와 황명길 목사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곳은 이제 막 우기 시즌에 접어 들어 9개월 만에 비가 내렸습니다. 나무의 먼지들이 씻겨 내려가고 쌓였던 먼지들이 가라 앉고 말라 버렸던 풀들과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장마에 내리는 비와 같이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가운데 충만이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올 한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기도해 주시고 기억하시며 함께 동역 해 주신 여러 분들께 다시 감사 드리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이 여러 동역자분들의 삶에 기쁨, 평화, 위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도도마에서

황광인 영숙 선교사 드립니다. 샬롬  




 

황광인/영숙 선교사

949-527-8625

mast92@gmail.com
 

The Mission Aid Society of Tanzania

PO Box 1639

Dodoma, Tanzania

 





 



 








 

 

 


 

 




 




 











 


 


 



 


 



 
















 




 

지금은 사순절(四旬節) 기간입니다. 금년 부활절은 4월 5일....

한국의 설날이 음력을 기준으로 하기에 매년 다른 것처럼, 부활절도 매년 다릅니다.

로마 가톨릭을 일컫는 ‘서방교회’는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하고,

그리스 정교회나 동유럽권 등을 일컫는 ‘동방교회’는

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에 교회 내지 교파 사이에서도 서로 차이가 납니다.

 

보편적으로 ,

‘춘분 이후 첫 보름달이 뜬 날의 바로 다음 주일’이 부활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죄인인 저나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해 친히 속죄양이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비밀에 보다 경건하고 보다 진지하게 동참하고자 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성과 삶을 본받고자 하는.
진솔한 참회와 용서와 사랑과 나눔 등을 위한
신앙고백의 절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어 명언이 있지요?

-No Cross, No Crown.-

 

그렇습니다.

범사에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희생이 없으면 가치 있는 삶도 없습니다.

‘자기 부인(否認)’이 없으면 하늘의 성취도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 내지 죽음이 없으면

승리이자 영광인 ‘면류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해나 사순절은 수요일 곧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시작됩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재’를 몸에 뿌리는 등의

종교의식을 시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사적으로

저 ‘거룩한 재(聖灰)’가 의미하는 게 뭡니까?


 

한 마디로, ‘재’ 같은 인간 우리 육신의 허무한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자 아울러 그것에서의 구원 곧 영혼의 구원을

위한 참회 내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영성(靈性)’을 잃고

다만 ‘육체(肉體)가 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이렇게 인간의 한계와 운명을 정의하고 선언하십니다.

 

- 너는 (dust)이니 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창세기3:19)
 

저 ‘흙’ 곧 히브리어 ‘아파르’는 ‘마른 흙, 먼지’를 의미합니다.

그렇듯 인간의 육신이란 ‘허무한 존재’이자

그것으로 돌아가야만 할 ‘죽을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런

인간 우리의 허무한 정체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돔성’이라는 극도로 타락한 세상 내지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멸망이 아닌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먼저 이렇게 고백합니다.

 

-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dust and ashes)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창세기18:27)


 

이른바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인간들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여전히 ‘흙’일 뿐입니다.

‘티끌과 재’일 뿐입니다.

‘개나 돼지’ 등 여느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강조하신 바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 먼저 회개를 통한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신 최고의 목적이자 부여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죄악에 찌든 인생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이나 죄악에 찌든 이웃을 그래도 ‘빛과 소금’이 되어 사랑(agape)해야만 할 이유나 의무가 거기 있습니다. 그 모범을 먼저 보여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복음3:16)

 

저 ‘영생(Eternal Life)’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자 ‘하나님의 영성(靈性)’입니다. 그러니까 참 영성은 한 마디로 ‘독생자’ 곧 ‘예수 그리스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의 신학자’이자 ‘영성신학의 대가’인 유지 피터슨 박사는 진정한 영성의 개념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진정한 영성,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리고,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 곧 예수 그리스도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진정한 성령은,

특정 목회자 내지 인간 자기의 ‘번영신학’도 ‘성공신학’도 아닙니다.

만사 형통, 운수 대통의 ‘기복신앙’도 아닙니다.

‘값싼 은혜’로 점철된 ‘부흥신학’이나 은사 체험도 아니고 또한 지적 유희나 변증을 일삼는 현학적인 특정 학자의 고등학문이나 ‘자유주의신학’도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진정한 성령이 인도하는 목표이자 푯대는,

늘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본받고 닮아가는 성숙한 삶 그 자체입니다.

 

물론 돈도 재물도 지식도 학문도 신분도

그것에의 성공이나 번영도

세상살이를 위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성공하고 정당하게 돈도 벌어야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선한 일도 많이 해야 합니다. ‘사심이나 탐심이 없는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은 다르니까요.

 

그러나 저 모든 것의 가치나 이른바 성공한 특정 목회자나 신령하다는 영적 지도자나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 및 그리스도보다 더 커지고 더 높아질 때, 저 모든 것의 가치나 저 모든 지도자들의 영향력은 오히려 자기나 자기 가족이나 이웃이나 공동체나 사회를 되레 불행으로 인도하는 교만이나 독선이나 미혹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수많은 역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 모든 것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배설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rubbish)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빌립보서3:8-)

 

저 ‘배설물’ 곧 헬라어 ‘스퀴발론’은 ‘쓰레기, 찌꺼기, 폐물’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각종 성공이나 각종 소유가 실상인즉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나 폐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고 그것으로 교만을 부리거나 그것을 선망하며 그것에 목을 매는 사람은 어리석어도 한참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겠지요.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그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이유는 또한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들어봅시다.

 

-살리는 것은 영(靈)이니 육(肉)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요한복음6:63-64)


 

그렇습니다.

 

‘살리는 것은’ 곧 ‘영원히 살리는 것은 영(靈)’입니다.

세상 최고권력인 대통령을 5년 동안 살리는 것은 국민의 ‘표’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긴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을 보고, 내세를 보고, 영원(永遠)을 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그래서 스스로 “배가 부르다”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별것도 아닌 자기의 정체성 곧 ‘티끌과 재’인 허무한 자기의 분수 내지 한계를 더욱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절대 가치와 그 대속의 피의 심오한 구원의 비밀을 더욱 겸손하게 묵상하며 고민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 (예레미야 애가2:9-10)


 

우리도

저렇듯 ‘티끌’을 덮어쓰고

‘굵은 상복’을 허리에 두르고

이 시대의 ‘애가(哀歌)’를 부르면서라도......,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영혼과 삶,

우리의 공의와 사랑,

우리의 양심과 윤리도덕,

그 수준이나 그 현주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순절이 될 수 있기를.....

 

자기 자신을 복되게 살릴 수 있고

아울러 이웃과 사회를 복되게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자 능력이자 지혜인,

가장 고상한 지식’에 대해

보다 겸손하게 믿어지는 믿음과

보다 성숙하게 알아지는 열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사순절이 될 수 있기를...... 


 

 

 




 



 



 



 

 


 
 



 

 


 

 

 

 

 

 

 



 




 





 








 



 









 

찹쌀과 멥쌀의 차이점

 

 

 

찹쌀과 멥쌀의 찰기가 차이나는 이유는 전분 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분은 아밀로오소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쌀의 찰기는 아밀로오수의 함량에 따라 차이가 나며, 아밀로오수 함량이 낮을 수록 차진 성질이 강해지게 됩니다.

멥쌀은 아밀로오즈의 함량이 16~21%이고, 나머지가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찹쌀은 아밀로펙틴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차진 성질을 가지고 있고 소화가 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찹쌀의 효능

 

찹쌀의 맛은 달고 성질은 따뜻한 편이어서

소화기관이 약하고 몸인 차가운 '소음인(少陰人)'체질과 특히 잘 맞습니다.

 

찹쌀은 비장(지라), 위, 폐의 경락에 작용하여 소화기관을 보호하고,

폐와 비위(지라와 위)의 기운을 이롭게 하며, 오장을 따뜻하게 하여 허약한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줍니다

 

중국의 의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찹쌀은 성질이 따뜻한데 술을 빚으면 뜨거워지고 엿으로 만들면 열이 더 심해진다. 볶아서 먹으면 냉해서 온 설사가 즉시 멎고 떡이나 단자를  밤에 먹으면 노인의 빈뇨(잦은 소변)가 멎는다”고 알려줍니다.

 

1. 위장이 안좋아 소화가 안될때 특효입니다

 

찹쌀은 위벽을 자극하지 않고, 위장을 보호하며, 기를 보충하여 소화가 잘 되게 합니다.

위장이 약하거나 만성 위염, 위궤양에도 찹쌀죽을 드시면 매우 좋습니다.



 

2. 설사를 멎게 합니다



 

소화기관이 차고 약할경우 설사를 하게됩니다 찹쌀은 몸을 따뜻하게 하여, 몸이 차가워서 발생한 설사를 멎게 합니다.

대변을 단단하게 하고, 심한 설사도 멈추게 하며  구토와 설사가 함께 발생하는 토사곽란에도 매우 좋습니다

 

 

 





 

 

3. 소변과 땀을 많이 흘리는 증상에 좋습니다.

 

찹쌀은 지나치게 소변량이 많거나 땀을 많이 흘리는 증상, 소갈(목이 자꾸 말라 물을 자주 마심), 질병을 앓고 난후 허약하여서 흘리는 땀을 치유합니다



4. 체력 회복에 좋습니다



 

병을 앓은 다음 회복기에 찹쌀죽을 드시면 소화가 잘되고, 체력 회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5. 임산부와 산모에게 좋습니다

 

찹쌀은 태아를 튼튼하게 하고, 임산부의 자연유산을 막아줍니다 또한 산모가 모유가 부족할때, 젖이 잘 나오게 도와주는 효능도 있습니다

 

6. 비만에 좋습니다

 

찹쌀은 몸을 따뜻하게 하므로 비만에 도움이 됩니다

몸이 따뜻하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칼로리를 태우는 능력인 기초대사율도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7. 그외 효능들

 

* 감기 몸살에 좋습니다

* 독을 풀어주는 해독작용을 합니다

*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를 예방합니다

 

* 칼슘의 흡수를 돕는 비타민D가 풍부하여 뼈를 튼튼하게 합니다

* 찹쌀에는 니아신과 티아민 등 비타민B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면역체계와 신경계를 강화합니다.
   때문에 면역력이 높아지고, 정신 집중력도 좋아집니다

 

* 항산화 작용을 하는 '토코페롤'이라 불리는 '비타민E'와 '프롤라민'이 많이 들어있어서 신경활동을 강화하고, 노화방지와 성인병 예방에 좋습니다

 

   심장질환,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병, 신장, 간질환, 폐질환, 십이지장 궤양, 대장암 등의 성인병 예방과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8. 주의사항

 

*  평소 습열(濕熱)이나 담(痰)이 많으면서 자주 체하는 경우 찹쌀을 자제해야 합니다
   '습열'이란 '습기와 열'이 결합된 나쁜 기운으로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기와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할 때 '습열'이 생겨납니다  

 

   '담'은 '가래'와 비슷하며, 몸의 분비액이 큰 열을 받아서 생기는 것 입니다... 열로 인해 생기는 '담'이나 '가래'는 열이 나게 하는 찹쌀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열이 나거나 누런 가래와 기침이 함께 있는 경우, 배가 팽창되고 더부룩한 경우에는 찹쌀을 많이 드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 찹쌀은 열이 나게 하는 식품이라 음인(몸이 찬 사람)과는 잘 맞지만, 양인(몸에 열이 많은 사람)과는 맞지 않습니다. 몸에 열이 많은 '양인'이 드시면 오히려 소화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체질에 안 맞는 분이 찹쌀을 지나치게 많이 드시면  기(氣)가 어지럽혀지고, 정신이 맑지 않고, 여러 경락의 흐름이 막히게 되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므로 체질에 안 맞는 분은 찹쌀을 많이 드시거나, 자주 드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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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가정집에 들어갈 때

우리나라의 문패처럼 문설주에 부착되어 있는

손바닥 길이 정도의 작은 케이스가 달려 있습니다.

이 작은 케이스가 바로 [메주자/Mezuza]]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어느 작은 가게의 입구에도 붙어 있습니다.   


메주자 안에는 성경의 신명기 6장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