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유타주로 이어지는 15번
프리웨이를 타고 북상하다가 Baker라는 작은 도시에서 갈라져
들어간다.
Baker에 미국에서 흔히 만나 볼 수 있는 데니스(denny's
restaurant)라는 식당이 있다. 입구에 오늘의 스페셜
메뉴를 소개하는 포스터가 눈에 띈다.
그런데 그날따라
디저트(후식)란 단어를 Desert(데저트)라고 적었다. 사막이란
말이다. 후식은 Dessert(디저트)가 맞다. s자가 하나
빠지는 바람에 엄청나게 다른 의미가 되고 말았다. 잠깐 실수였을
것이다.
영어에 비슷하지만 뜻이 전혀 다른
단어가 많이 있다. Massage(마사지)와
Message(메시지)가 그렇다. 설명을 안 해도 잘 아는
말이다,
그런데 대한성서공회 총무인 민영진
목사가 "말씀(메시지)으로 죄악을 마사지하는 설교자들"이
많다는 충격적인 말을 한바 있다.
예레미야와
바스훌을 비교해 볼 때 바스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악을 질타하지
않고 도리어 그 시대의 죄악을 마사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설교자라는 것을 떠올리는 말이다.
바스훌이 마사지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거짓 설교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쓰레기 같은
인물이 되었을까. 바스훌은
생각보다 그에 대한 자료가 성경에도 주석에도 그리 많지 않다.
바스훌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는 예레미야 20장
1절에서 임멜의 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임멜은 역대상 14장에 보면
24개 제사장단 중 제16 제사장단의 리더격 제사장이었으니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런 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세습했으니
바스훌은 성전
총감독으로서 인적, 물적 자산을 관리하는 권세자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성전에 오게 하고, 성전 세(헌금)를 잘 걷는 설교에
치중하며 왕과 귀족들 앞에서 설교하는 궁정 채플린으로서의
영예까지 누렸다.
기득권 실세로서의 특혜를 톡톡히 누리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가 재물과 종교권력을
휘두르며 '지상나라'가 오래 존속되기를 바랬지만, 그 시기는
고대 근동 전체가 격변기에 들어선 때였다. 근 200년 동안
주변 국가를 장악해오던 앗시리아 제국이 몰락해 가고 바벨론
제국이 부상하던 시기였고, 급기야 유다도 망해가는 혼란한
시기였다.
요시야 종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성전신학'은 다윗 왕조의
계약신학과 결탁하여 무사태평의 안일한 낙관주의만을 조장하였다 .
이에 편승한 바스훌의 설교는 오로지 '평안하다' '평안하다' '다
잘 될 것이다' '안녕과 축복'을 빌어주며, '안전과 무사' 만을
바라는 인간심리를 잘 마사지 해 주었다.
그는 어느 성경본문을
인용하던지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회중에게 평안과 축복을 빌어주고,
자신의 관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데 천착(穿鑿)한(아전인수격인) 해석에
탁월했다.
이런 바스훌을 가리켜 유진 피터슨은 '국가적 자산'
이었다고 비꼬았다.
바스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골라 해석하는
능력은 기독교 초기에 등장한 마르시온과 비슷한 점이 있다.
마르시온은 서로 다른 두 신이 있다고 가르쳤다. 신약성의 하나님은
자비와 구원을 베푸는 자비로운 신인 반면,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율법과 정의를 강조하는 냉혹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시온은
구약은 기독교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세기에 마르시온 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바스훌의 대척점(對蹠點)에 예레미야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신탁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려고 한 예언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중심이고 하나님이 주어(主語)가 된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려고 애썼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고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배척과 조롱을
당했다.
예레미야 19장에 보면, 토기장이 집에 간 예레미야는
오지병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오지병을 깨트렸다.
그것은 상징적인 행위로서 유다의 멸망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예언했다.
"하나님께서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라 (렘19:15)"
이 소리가 바스훌의 귀에 들어갔다.
바스훌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입지와 영달을 유지하려고 예레미야를
성전으로 잡아다가 착고(着錮)를 채워 가두었다. 자신의 마사지
영업(?)을 방해하는 예레미야의 입을 틀어 막으려는 심사였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의 입에 재갈을 물려 '가만히 있으라' 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스훌을 향해.....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 아니라 '마골밋사빕'이라
하셨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다분히 언어유희처럼 들리지만 바스훌의 뜻이 '평화'인데
반해, '마골밋사빕'은 '사방이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설교자로서 예레미야의 심중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 "여호와께서... " 하나님이
중심이었고, 주어였다.
그는 설교자가 명심해야 할 심오한 말을
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9)."
설교자의
중심과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여지는 설교, 하나님만을 전하기
위해 가슴이 뜨거웠던 예레미야..
요하네스 예레미아스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파토스(열정, pathos)로 들어갔다" 고
했다.
목사의 사명과 목회사역의 대부분은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가 목사의 전유물은 아니라 할지라도 설교는
위임 받은 목사의 특권이다.
목사가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서 있는 자리는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자리다.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전한다고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설교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인간의 말이다... ...
설교자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따라 말해야 하고 성서에 흐르는 고유한
사고의 흐름을 따라 가려고 해야 하며, 그것을 벗어난 임의의
목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고 했다.
설교자는 어떻게
전해야 하나 라는 '전달기법'보다 어떤 내용을 전해야 하나 라는
설교내용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때론 성도들이 듣기 좋은 말로 마사지를 해 주면서
그들이 웃었으니까... 그들이 위로 받았으니까... 그들이 힘을
얻었으니까... 됐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자족할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어이 없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 와,"
"사람들이 듣지를 않아," 라는 말로 변명하기도 한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다. 설교의 역동성은 설교자보다
성경자체의 역할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그렇다. 고전적 설교방법인 삼대지 설교냐? 강해설교냐?
주해설교냐? 1인칭 설교냐? 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대언'하려고 하나님께 주목했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적 음성을 뜨거운 가슴으로 쏟아냈고, 백성들의
아픔을 하나님께 긍휼의 마음에 담아 대신 호소했다.
그에 반해 바스훌은 듣는 이의 마음에 감동을 주려는 인위적인 매카니즘에 몰입하다 보니 감정 마사지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대로 듣기를 좋아 하는데 그의 설교는 '싸구려 골라
잡아'가 되어 버린 채 감정을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므로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게 했다.
'대언'과 '해석'....
어디까지 분별력 있게 둘 사이를 오가며 '말씀'을 전해야 하나.
설교자로서 고민은 깊어진다.
이민자의 삶이 워낙 치열하고 팍팍하다 보니 설교자로서 위로하고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연민이 믿음의 힘보다 긍정의 힘을 주고,
물욕과 탐심으로 찌든 자들을 정당화시켜 주고, 허망한 고지론 이나
허탄한 성공에 집착하도록 자극한다.
안타깝다. 번영신학 수준의 설교로 마사지해 주는 마사지사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 실수를 너무도 자주 범한다. 이럴 때 자신도 모르게 바스훌과 같은 설교자가 되어 버린다.
이런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
성도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양심을 버리고 죄악의
면죄부를 받아 들고 편안히 죄에 익숙해져 가고 죄 짓는 일에
담대해 질 것이다.
갈수록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삶,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변화된 삶은 찾아 보기 힘들어진다.
뭐든지 신기하고
신비하며 축복과 은혜만 받으면 된다는 몰지각하고 무속적인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 넘쳐난다.
이런 타락한 교회, 미성숙한
성도를 만드는 데 나의 설교가 일조하지 않나 심각하게 되돌아 볼 일이다. (예레미야
20:4-6) (장재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