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는
영국 북쪽 오스터필드에서 태어났다. 오스터필드는 200명 정도의 주민이 사는 작은 농촌이었다. 남쪽으로는 유명한 서우드
숲이 펼쳐져 있었다.
브래드포드는 부유한 농장주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첫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네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자랐다. 2년
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다시 그를 키웠다.
그러나 1년 후에 어머니마저 죽자 일곱 살의 나이에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었다. 남은 혈육인 삼촌들이 그를 맡아 키웠다. 삼촌들은 그가 농사일을 돕기를 바랐다.
그러나 병약한 그는 농사일을 도울 수가 없었다. 잦은 병치레로 투병 생활을 오래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약한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훗날 그는 오랜 투병 생활 덕분에 자만해지지 않고, 나중에 겪을 고난도 감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병약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독서였다. 주로 성서와 고전들을 읽었다. 독서를 통해 어렸을 적부터 상실 그
자체였던 삶에 위로를 받았고 새로운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그는 이미 열두 살 무렵부터 영국 국교회의 예배 방법에 대해 반대했다. 그가 청교도 신앙을
처음 접한 것도 그때였다. 친구의 초청으로 청교도 목사 클리프톤의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듣고 청교도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삼촌들은 예배 참석을 금지시켰지만 그는 계속해서 설교를 들으러 다녔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그는 오스트필드에서 4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 스크루비에 살던 윌리엄
브루스터를 만났다. 그는 우체국장으로 브래드포드보다 24세나 많았다. 브루스터는 젊은 시절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무대신
월리엄 데이비슨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데이비슨이 실각해 큰 뜻을 펴기도 전에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우체국장 일을 하고 있었다.
브래드포드는 브루스터를 통해 스쿠루비의 청교도 분리주의자 모임에도 참석했다. 브루스터는 그에게
많은 책을 빌려 주었고 영국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에 대해 들려주었다. 스크루비 분리주의자들은 영적 유대감뿐만 아니라,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동지 의식이 대단했다. 브래드포드는 브루스터에게서 동지 의식을 넘어 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월리엄 1세가 왕위에 오르고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탈출했다. 1609년에 브래드포드는 스크루비 교인들을 따라 네덜란드 라이덴에 정착했다. 그는 브루스터 가족과
함께 살았다.
1611년에 스물한 살이 되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자, 상속 재산을 팔아 네덜란드에
작은 집을 샀다. 1612년에 라이덴 시민권을 획득하고 회중 내에서 높은 지위도 얻었다. 1613년에는 도로시 메이와
결혼하여 4년 후 아들 존을 낳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의 안락한 생활이 그가 이주해온 목적은 아니었다. 점차 이주해온 목적을
잃어버리고 네덜란드화되어 가는 후세들을 보면서, 그는 스크루비의 교인들과 함께 또 다시 새로운 결단을 해야 했다. 그것은
신세계로의 이주였다.
그는 1619년 봄에 상속 받은 집 재산을 팔아 이주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세계에로의
이주는 그에게도 커다란 고통이었다. 이제 겨우 세 살 된 아들 존은 항해하기에 너무 어려 네덜란드에 남겨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아메리카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항해를 떠났다가 참사를 당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아들 존을 돌보기 위해 결국 장인 장모도 남아야 했다. 이번에 떠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신세계로의 이주 과정은 결심만큼 쉽지 않았다. 힘겨운 협상 끝에 영국 정부로부터 식민지
공유지 불하 증서를 얻어냈지만 이주에 드는 비용은 엄청났다.
브래드포드를 비롯한 스크루비 교인들이 전 재산을 처분해 돈을 마련했지만 아직 턱없이 모자랐다.
이때 70명의 런던 상인들로 구성된 '모험조합'이 그들에게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겉으로는 '선교사업'에 동조한다고 했지만,
모험조합은 아메리카에 이주한 그들을 통해 어류, 모피 무역을 통해 높은 수익을 얻길 내심 기대했다.

스크루비의 교인들은 두 척의 배를 마련했다. 스피드웰과 메이플라워호였다. 라이덴의 교인들은
스피드웰호를 타고 영국 사우샘프턴으로 가서 메이플라워호와 합류해 아메리카로 떠날 예정이었다.
스크루비 교인들 중 3분의 1인 125명이 떠나기로 했다. 남은 사람들은 곧 뒤따라오기로
했다. 스피드웰호에 탄 교인들은 기도를 올린 후 영국을 향해 출발했다. 메이플라워호는 런던에서 스크루비 교인들의 가족
친지들을 태우고 약속 장소인 사우샘프턴으로 향했다. 드디어 두 배는 사우샘프턴에서 만났고 스크루비의 교인들과 가족 친지들은
감격의 재회를 나누었다.
두 배는 사우샘프턴을 떠나 일단 서쪽으로 120㎞ 떨어진 다트머스 항구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스피드웰호가 고장난 것이었다. 돛에 바람이 새서 속도가 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배에 물까지 새어 들어왔다.
수리를 하고 나니, 바람 방향이 바뀌어 몇 달을 지체해야 했다. 떠나지도 못한 채 준비한
식량만 축이 났다. 그 사이에 벌써 지친 사람들이 나타나 항해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탈자는 늘어만 갔다. 항해를 해보기도
전에 이주는 실패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순풍이 다시 불기 시작하자 남은 사람들은 다트머스 항구를 출발할 수 있었다. 300㎞
넘게 갔을 때였다. 또 다시 스피드웰호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일단 되돌아 와 가까운 플리머스 항구에 입항했다. 이미 9월초였다. 또 다시 항해를 늦추면
바람 때문에 아메리카로 그 해에는 넘어갈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배와 이주에 들인 거액의 자금은 모두 사라져 버리게
된다. 성공적인 아메리카 이주도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피드웰호를 포기해야 했다. 스피드웰호를 포기하고 모두 메이플라워호에 올라탔다.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스피드웰호는 고장난 것이 아니었다. 스피드웰호의 선장 레이놀즈가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그는 배에 물이 스며들도록 돛대를 높이고 높은 돛대에다 돛을 많이 달아 놓았다. 너무 높은
돛대에 돛이 많으면 판자들에 지나친 장력이 가해지면서 틈이 벌어져 물이 새어 들어온다는 사실을 노린 것이었다.
메이플라워호가 대서양을 향해 떠나면 선장은 돛을 고쳐 그 배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스크루비의 교인들은
떠나기 전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스피드웰호의 수리로 한 달을 지체하면서 식량도 썩어가기 시작했다. 아메리카로 출항하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기적적인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1620년 9월 20일, 드디어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할 수 있었다. 메이플라워호에 탄 사람은 모두 102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온 두 마리의 개도 함께 했다.
이제 어둡고 축축한 비좁은 선실에서 5000㎞에 가까운 항해가 시작되었다. 곧바로 배 멀미가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 멀미는 폭풍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만나게 된 폭풍우는
그들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 기세 등등 했다.
폭풍 치는 커다란 바다에 메이플라워호는 마치 나뭇잎처럼 그냥 둥둥 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뭇잎이 물에 젖으면 가라앉을 운명이듯, 메이플라워호도 같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험한 바다에서
그들이 기댈 데는 없었다.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외에는...
메이플라워호는 다섯 달만인 12월 11일에 신대륙에 당도했는데, 폭풍우와 조류에 휩쓸려 당초
목적지였던 버지니아보다는 훨씬 북쪽인 메사추세스의 프리머스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변의 인디언들의 위협에 대응하면서, 말 그대로 맨손으로 시작해서 교회를 짓고, 밭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학교를 지으면서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갔다. 이 작은 밀알 하나가 이후
미국이라는 풍성한 장래의 열매를 맺기 위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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