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6  2015




 

 

 

 

 

 

 

 

 

 

 

 

 

 

 

 

"What The Lord Has Done In Me"
(originally by Reuben Morgan)


Let the weak say, "I am strong"
Let the poor say, "I am rich"
Let the blind say, "I can see"
It's what the Lord has done in me

Let the weak say, "I am strong"
Let the poor say, "I am rich"
Let the blind say, "I can see"
It's what the Lord has done in me

Hosanna, hosanna
To the Lamb that was slain
Hosanna, hosanna
Jesus died and rose again

Hosanna, hosanna
To the Lamb that was slain
Hosanna, hosanna
Jesus died and rose again

Into the river, into the river, I will wade
There my sins are washed away
From the heavens mercy streams
Of the Savior's love for me, yeah, I will rise

I will rise from waters deep
Into the saving arms of God
I will sing salvation songs

Jesus Christ has set me free

Hosanna, hosanna
To the Lamb that was slain
Hosanna, hosanna
Jesus died and rose again

Hosanna, hosanna
To the Lamb that was slain
Hosanna, hosanna
Jesus died and rose again

Hosanna, hosanna
To the Lamb that was slain
Hosanna, hosanna
Jesus died and rose again

Let the weak say, "I am strong"
Let the poor say, "I am rich"
Let the blind say, "I can see"
It's what the Lord has done in me

Hosanna, sing hosanna to the Lord
To the Lamb that was slain
Unto the Lamb, forever, forever and ever
 


 

 



 

 


 

 
 




 




 




 
 
 

 
 

 



 

 

 

 






 

 

 

청춘의 벌판을 지나고

그곳은 타버린 무명옷으로 굽이치지

애인도 나만의 방도 없었지만 시간은 많다고 느꼈지

여린 풀잎이 바위도 들어올릴 듯한 시절

열렬하고 어리석고 심각한 청춘시절은 이제 지워진다

 

언덕을 넘고, 밧줄 같은 길에 묶여 나는 끌려간다

광장의 빈 의자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무엇인가?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

사랑이 없으면 시간은 죽어버리는데

옷장을 열어 외출하려다 갈 곳이 없듯

전화할 사람도 없을 때의 가슴 그 썰렁한 헛간이란,

-헛간 속을 들여다봐 시체가 따로 없다구

사람을 만나면 다칠까봐 달팽이가 되기도 하지

잡지나 영화도 지겹도록 보아 그게 그거 같고

내가 아는 건 고된 노동과 시든 꽃냄새 나는 권태,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란 기대나

애정이나 행복에 대한 갈망만큼 지독한 속박은 없다

 

나라는 연장을 어떻게 닦아야 하나

 

 

 

 

 

신현림 시인

1961년 경기 의왕에서 태어나 1990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1994, 세계사), ‘세기말 부르스’(1996, 창작과 비평사),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 2004), ‘침대를 타고 달렸어’(민음사, 2009) 등이 있다. 

 

 

 

 

 

 


 

 

 



 


 

 

 






 

 

 

 

 

 

 

평상시에는 하얗다. 햇빛 속에서 하얗게 빛난다.

비가 내리 꽃이 변한다.

빗방울을 맞으면 하얀 꽃잎이 투명해진다.

 

Skeleton Flower.

 이 꽃은 정확한 명칭은 ‘스켈레톤 플라워’다.

 

작고 하얀 스켈레톤 플라워는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 애팔랜치아 산맥 등에서 자라는 종류다.

습기가 많은 산비탈에서 자라는 스켈레톤 플라워의 ‘변신’에

많은 이들이 깜짝 놀라고 있다.

비를 맞으면 투명하게 변하는 우산을 보는 것 같다.

 

 

 

 

 

 






 










 

 

 

 

 

 

 

 

경기도 수원 월드컵로에 위치한 원천침례교회는 ‘13개’의 작은 교회들로 구성돼 있다.

 

‘1교회’부터 ‘12교회’까지 교회 앞에 붙여진 숫자가 각 교회의 이름이다. 시니어 사역을 주로 하는 13교회만 ‘안디옥교회’로 불린다.

 

각 교회는 시간대별로 나눠 교회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각각의 교회 목회자들은 가정과 다음세대를 향한 비전을 공유하며 교육·행정·미디어사역을 함께 진행한다.

 

하지만 선교·긍휼·목양·예배 사역 등은 독립적으로 진행한다. 원천침례교회를 개척했고 현재 11교회를 담임하는 김요셉(54) 목사를 최근 원천침례교회에서 만났다. 

 

 

 

 

 

 

 

◇담임 목사의 사역 과부화를 극복한 ‘작은 교회’

 

김 목사의 부친인 김장환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는 1994년 사재를 털어 경기도 수원에 중앙기독학교를 설립했다.

김 목사는 이 학교 교장으로 파송돼 이듬해 학교 내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며 원천침례교회를 개척했다.

 

학교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교회도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2000년 교회가 1000명 규모로 성장했을 즈음 영적 공허감을 느꼈다.

김 목사는 “교인이 100∼150명일 때 느꼈던 끈끈하고 강력했던 영적 공동체성이 깨지는 것을 보았다”며 “사역 과부화로 가정에까지 소홀해지면서 여러 가지로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말했다. 2001년 영육의 회복을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이듬해 5월 한국에 돌아온 김 목사는 깜짝 놀랐다. 교회는 더욱 건강한 공동체로 성숙해 있었고 교인 수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를 비운 사이 부교역자들이 섬세하게 교인들을 섬겼는데 그들에게도 놀라운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며 “이를 보면서 작은 교회로 나누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200명’ 단위로 13개 교회 분립

 

김 목사는 작은 교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했다.

2003년 1월 원천침례교회를 200명 단위인 1∼5교회로 나눴고 교회별로 담임 목회자를 세웠다.

200명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친밀하게 영적 교제를 할 수 있는 단위다. 2006년 원천침례교회는 학교와 교회의 사역을 모두 할 수 있는 구조의 신관 건물을 완공했다.

2007년 김장환 원로목사가 시니어를 위한 안디옥교회를 맡았다. 1∼5교회가 커지자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각 교회에서 6∼12교회를 분립했다. 올해 말에는 7교회에서 다시 14교회를 분립할 예정이다. 

 

 

 

 

 

◇개성있는 작은 교회들, 협력하며 공존

 

원천침례교회에 처음 온 새 신자는 13개 교회를 둘러보고 출석교회를 선택할 수 있다. 각 교회는 목회자와 공동체의 비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갖는다.

목회자들은 중보기도 선교 행정 예배 등 분야별 사역을 담당하며 협력사역도 한다.

 

김장환 원로목사가 섬기는 안디옥교회는 젊은 부부가 많은 원천침례교회에 정착하기 어려운 시니어 그룹들을 위해 생겼다.

 

6교회는 ‘스포츠 선교’를 가장 잘하는 공동체다. 야구팀과 농구팀, 축구팀으로 구성된 ‘요단 아카데미’에서 스포츠 관련 교인들이 재능기부 방식으로 지역사회 아이들에게 스포츠를 가르친다.

 

8교회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예배를 위해 ‘어린이 설교팀’을 만들었다. 캐릭터 인형과 그림책 등 아날로그 콘텐츠로 기획된 예배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11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정예배’ 사역이다. 특히 아버지가 가정의 영적 리더가 되어 믿음으로 가정을 세우는 것에 사역의 초점을 맞췄다. ‘가정예배 서약식’을 비롯해 ‘부모와 자녀 관계’ ‘아버지 역할’ 등을 다룬 아버지를 위한 교육, ‘4∼5세 자녀를 둔 아버지를 위한 다니엘 예배’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9교회와 10교회는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전 세대 통합예배’를 드린다.

 

김 목사는 “원천침례교회에선 목회자들이 목회에 대한 야심을 내려놓고 협력하며 사역하고 있다”며 “특히 관계 중심적인 사모들이 목회자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 함께 하는 사역이어서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동화의 내용 :

 

옛날에 무척 아름답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여름에는 맨발로 다녀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헐거운 나막신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여자아이의 발등은 새빨갛게 부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마을 한복판에 늙은 구두장이 아줌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줌마는 오래된 빨간 라사천으로 신발 한 켤레를 짰습니다. 모양은 예쁘지 않았지만 친절한 마음으로 만든 이 빨간 구두를 귀여운 여자아이에게 꼭 신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카렌이었습니다.

늙은 구두장이 아줌마는 카렌 엄마 장례식 날에 막 짜낸 빨간 구두를 주었습니다. 장례식에 빨간 구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카렌에게는 다른 신발이 없었습니다. 카렌은 맨발에 빨간 구두를 신고 보릿단으로 만든 관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고풍스러운 큰 마차가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마차 안에는 온화해 보이는 노부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노부인은 관을 따라가는 빨간 구두를 신은 작은 소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 아이를 내게 맡겨주세요. 내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노부인은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카렌은 이런 일이 다 빨간 구두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노부인은 보기 싫다며 그 신을 불태워버렸습니다. 노부인과 같이 살게 된 카렌은 예쁜옷을 입고 책을 읽고 재봉도 배웠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카렌을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거울은 "넌 사랑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워!"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여왕이 어린 공주를 데리고 이 나라를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성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카렌도 그 중에 끼어있었습니다. 예쁜 흰옷을 입은 어린 공주는 성의 창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답례를 했습니다.

공주는 아직 어려서 긴 소매를 단 화려한 옷은 입지 않았지만 금관은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 모로코 가죽으로 만든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이 구두는 구두장이 아줌마가 카렌에게 만들어준 구두에 비하면 백 배 천 배 아름다웠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구두도 이 빨간 구두보다 아름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카렌이 세례를 받을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 옷과 새 신을 신어야 했습니다. 노부인은 마을에서 가장 큰 구둣방으로 가서 카렌의 사랑스런 발 크기를 쟀습니다.

구둣방의 진열장에는 아주 예쁜 신과 번쩍거리는 장화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인은 눈이 나빠서 그 신발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진열장에는 공주가 신고 있던 것과 똑같은 빨간 구두가 한 켤레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예쁜 신발이 있을까요!

 

"이건 에나멜 가죽이네요."

노부인이 말했습니다.

 

"네! 그 제일 번쩍거리는 거요?"

"정말로 번쩍거리는 걸요!"

카렌도 거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신은 카렌에게 꼭 맞았습니다. 하지만 눈이 나쁜 노부인은 신발의 색이 빨간색인 줄은 몰랐습니다. 새빨간 구두를 신고 세례식에 참석하는 일은 결코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카렌은 빨간 구두를 신고 세례를 받으러 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카렌의 발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카렌이 교회  안에 들어가 제단 입구까지 가자 묘비에 새겨있는 오래된 조각상과 옛날에 살았던 훌륭하신 목사님과 목사님 부인의 초상화까지 빨간 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목사님 카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신성한 세례를 통해 하나님과 성약을 맺고 앞으로 한 사람의 크리스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고운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카렌은 빨간 구두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례를 마치자 사람들이 노부인에게 카렌이 빨간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그런 예의에 벗어난 일은 하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갈 때는 낡았더라도 반드시 검은 신발을 신고 가라고 일렀습니다.

다음 일요일에는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카렌은 은 신과 빨간 구두를 번갈아 보며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신지 말라고 한 빨간 구두를 신었습니다.

그날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며 날가 좋았습니다. 카렌과 노부인은 보리밭 한가운데 좁은 길로 걸어갔습니다. 먼지가 뿌옇게 피어나 신발이 잔뜩 더러워졌습니다.

 

교회당에 이르자 입구에 지팡이를 든 늙은 병사가 서 있었습니다. 이 병사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염이 빨간색이었습니다. 병사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신발의 먼지를 털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카렌은 작은 발을 병사 앞에 내밀었습니다.

"오오, 참으로 예쁜 무용신발이군요!"

병사가 말했습니다.

 

"춤을 출 때 꼭 신도록 하세요."

그리고 손바닥으로 신을 톡톡 쳤습니다.

병사가 1실링을 주고 노부인과 카렌은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도 모두들 카렌의 빨간 구두를 쳐다보았습니다. 벽에 걸린 초상화까지도 빨간 구두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이 날도 카렌의 머릿속은 온통 빨구두 생각뿐이었습니다.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금잔을 입에 갖다 댈 때도 빨간 구두가 눈앞에 있는 잔 속에 비취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를 부르는 일도,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도 까먹었습니다.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노부인이 마차에 오르고 카렌도 한쪽 발을 올리려고 하는데, 옆에 서있던 아까 그 늙은 병사가 말했습니다.

"우아, 멋진 무용 신이네!"

그러자 이상하게도 카렌은 한 발 두 발 스텝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춤을 추기 시작한 발이 멈추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치 누구의 조정을 받는 것처럼 카렌은 춤을 추면서 교회모퉁이를 돌았습니다. 자신도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마부가 쫓아와 카렌을 붙잡아 마차에 태웠습니다. 그래도 발은 계속해서 춤을 추었습니다. 춤을 추다가 노부인의 발을 몇 번이나 밟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빨간 구두를 벗기자 겨우 발이 잠잠해 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빨간 구두는 신발장에 처박혀버렸습니다. 카렌은 그래도 빨간 구다가 보고 싶어 견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부인이 앓아 누웠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노부인을 간병하는 일은 카렌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을에서 대한 무도회가 열렸습니다. 카렌도 초대받았습니다. 카렌은 빨간 구두를 신발장에서 꺼내 결국 신고 말았습니다 그 신발을 신고 카렌은 무도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카렌이 왼쪽으로 가려고 하면 빨간 구두는 오른쪽으로 움직였고,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면 빨간 구두는 춤을 추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빨간 구두는 무도회장을 빠져나가 급기야 마을에서도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카렌은 어둠 속에서도 쉬지 않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컴컴한 숲 속으로 점점 들어갔습니다. 속으로 들어가니 나뭇가지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카렌은 둥근 달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빨간 수염을 기 그 늙은 병사였습니다. 늙은 병사는 앉아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우아, 멋진 무용 신 아니야!"

 

카렌 깜짝 놀라서 빨간 구두를 벗으려고 했지만 빨간 구두는 더 단단히 달라붙어서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양말을 찢어버렸지만 빨간 구두는 벗겨지지 않았니다. 카렌은 계속해서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밭에서도 초원에서도, 비가오나 맑으나, 밤낮으로. 제일 무서운 것은 밤에 춤을 추는 일이었습니다.

카렌은 텅 빈 묘지로 춤을 추면서 들어갔습니다. 잡초가 텁수룩하게 자란 가난한 사람의 무덤에 앉고 싶었지만 쉴 수도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마교회의 문이 열려있어 카렌이 들어가려고 하는데 흰옷을 입은 천사가 가로막았습니다. 천사의 어깨에는 땅끝까지 끌리는 커다란 날개가 있는데 표정은 근엄했고, 손에는 번쩍이는 칼을 들고 있었습니다.

"넌 언제까지나 춤을 추어야 한다. 네 피의 흐름이 멈춰 창백해지고 차가워질 때까지! 네 몸이 해골처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집집마다 다니면서 춤을 추어야 해. 그리고 잘난 체하는 아이들이 사는 집의 문을 두드려야 해! 그 아이가 네가 온 것을 알고 무서워할 정도로 말이야! 자아, 춤을 추어라! 어서 춤을 추며 가란 말이야!"

"도와주세요!"

 

카렌이 큰 소리로 말했지만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빨간 구두가 카렌을 밖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지요. 카렌은 밭을 넘어 큰 길과 오솔길을 지나면서도 계속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카렌은 잘 알고 있던 어느 집 앞을 춤추면서 지나게 되었습니다.

 

집 안에서는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꽃으로 장식된 관이 밖으로 나오자 카렌은 노부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카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천사로부터는 저주를 받은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카렌은 계속 춤을 추었습니다. 춤을 출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카렌은 깜깜한 밤에도 춤을 추었습니다. 빨간 구두는 카렌을 들판과 초원을 지나 쐐기풀과 가시덤불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팔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렀습니다. 그래도 빨간 구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황야 한 가운데 작은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이 집에는 사형수의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카렌은 손으로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좀 나와주세요! 나와보시라고요! 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춤을 추고 있거든요!"

 

그러자 사형 집행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구나? 난 말이지 나쁜 인간의 목을 치는 살마이다! 지금도 이 도끼가 흔들거리는 게 보이지 않느냐!"

"제발 내 목을 치지 말아요! 그러면 잘못을 뉘우칠 수가 없잖아요! 대신에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내 발을 베어주세요!"

그리고 카렌은 자신의 잘못을 참회했습니다. 머리를 베는 사람은 카렌의 발을 빨간 구두와 함께 잘랐습니다. 그러자 빨간 구두는 작은 발을 단 채 계속 춤을 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빨간 구두는 그래도 밭을 가로질러 깊은 숲 속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가버렸습니다. 발이 잘린 카렌에게 사형 집행인은 목발과 나무 발을 만어 주고 죄인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카렌은 지신의 발을 자를 사형 집행인의 손에 키스를 하고 황야를 지나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난 빨간 구두 때문에 분히 고통을 당했어. 이제 교회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야지!'

카렌인 이렇게 생각하며 교회 입구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카렌의 눈앞에서 그 빨간 구두가 춤을 추면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카렌은 깜짝 놀라 도망쳤습니다. 일주일 내내 카렌은 슬퍼서 매일 울면서 지냈습니다. 일요일이 되자 카렌은 다시 기운을 차리며 말했습니다.

"난 이 정도면 충분히 고생했고, 내 마음과 싸워왔어! 교회 안에서 예를 드리는 사람들과 똑같이 나도 이제 착한 인간이 되었지 않아?"

 

카렌은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교회로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 묘지 까지 가자 빨간 구두가 여전히 자기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카렌은 정말 무서워졌습니다.

마음속으로 죄를 뉘우친 카렌은 목사님의 집을 방문하여 자신을 하녀로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뭐든지 열심히 하겠어요. 돈은 필요 없어요. 그냥 밤이슬만 피하고, 친절한 분들 옆에만 있게 해 주세요."

목사님의 부인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카렌을 고용하기로 했습니다. 카렌은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반성도 했습니다. 저녁에 목사님이 성경을 읽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카렌을 잘 따랐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고운 옷과 액세서리 이야기를 하며 여왕처럼 뻐지고 싶다고 하면 카렌은 고개를 젓고 했습니다.

어느 일요일 집안 식구들이 함께 교회에 가자고 카렌에게 권했습니다. 하지만 카렌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슬프게 자신의 목발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집안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교회에 갔을 때, 카렌은 혼자 남아 자신의 작은 방에 있었습니다.

침대와 의자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방이었습니다. 카렌은 의자에 앉아 성경을 펼쳤습니다. 슬픈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데, 교회의 풍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카렌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오오, 하나님! 제발 절 도와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더니 카렌의 눈앞에 흰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날밤, 교회입구에서 손에 날카로운 칼을 쥐고 있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장미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나뭇가지를 천장에 대자 천장이 높아지더니 나뭇가지가 닿은 부분에서 금색 별이 반짝이며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천사가 다시 나뭇가지를 벽에 대자 이번에는 방안이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카렌의 눈에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풍금이 보였습니다. 옛날에 살았던 목사님과 부인들의 초상화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장식이 달린 의자에 앉아 찬송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카렌의 작은 방으로 교회가 들어온 것입니다. 어쩌면 카렌을 교회로 데려간 것일지도 모르지요. 카렌은 목사님 가족과 함께 의자에 앉았습니다. 찬송가가 끝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카렌, 잘 왔다!"

"다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카렌이 대답했습니다.

 

그때 풍금이 울리고 찬송가를 합창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들려왔습니다. 눈부신 햇빛이 교회창문으로 들어와 카렌이 앉아있는 의자까지 밟게 비췄습니다. 카렌의 심장은 태양의 빛과 평화와 기쁨으로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카렌의 영혼은 햇살을 타고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거기서는 누구도 빨간 구두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니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가 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인줄 이제 알았.  

 

왜 그 원작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각색되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전달되었는지 궁금해졌을 때, 그 이야기를 누구의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빨간 구두’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 들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 카렌은 교회의 세례식에서 신어서는 안 될 빨간 구두를 신고 강요된 춤을 추다가 결국 발목을 잘리고 나서야 춤추기를 멈춘다.

 

‘검정’ 구두 대신 ‘빨간’ 구두를 선택한 카렌은 무엇을 욕망하였고, 어떤 정체성을 갖기를 원했는가? 그녀에게 빨간 구두는 맨발의 부엌 때기 신세를 면하려는 욕망을 상징했고,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정체성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아, 가련한 카렌... 결국 발목이 잘린 채 목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심장이 터지고 나서야 하늘로 올라가게 됐으니…….

빨간 구두를 선택한 그녀의 천진난만한 자유에 가해진 시련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시련이었다.

 

인간은 왜 발목이 잘리더라도 쟁취해야 할 욕망을 바라는 것일까? 빨간 구두를 선택한 자유는 가혹한 시련이 따른다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빨간 구두를 신은 발목을 자르게 한 검정구두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는 어려운 동화인가?  

 

그래서 로마서 12장 2절을 다시 음미하기로 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주님. 저에게 분별의 영을 부어주소서. (언)  

 

 

 

 


 


 

 


 

 




 

 

 

 

 

 

 

 

 

 

 

 

 

 

 

길바닥에 누운 채 생명이 위독한

주민을 붙들고 기도하는 이옥희 선교사

 

 

 

 

 

 

 

 

 

 

 

 





 

 

 

 

<선교사는 거지다>는 지난 5월에 출판한 나의 선교 에세이집의 제목이다.

제목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강렬했다. 아주 단순 명료하며 강렬하고 인상적이며 충격적이라는 평들도 있었지만 선교사를 싸잡아서 폄하하고 모독한다는 질타도 받았다.

 

어느 장로님은 책을 구입하시면서 내 면전에서 “선교사가 부자지 왜 거지야. 우리 교회들이 선교사 후원을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데 그것도 몰라.”하면서 아주 못마땅해 하셨다. 어떤 사모님도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일하는 귀한 종인 자신을 거지라고 말하는 제목을 본 순간 마음이 불편해지고 가슴이 아팠다고 하셨다. 어떤 분들은 전화로 선교사가 거지인 이유를 묻기도 하였다.


 

선교사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자세

 

 

 

희망 어린이 집 아동들

 

선교사는 사실로 거지고, 거지이고 거지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고  십 여 년의 선교사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진 것이다.

 

2004년 유월 중순경에 이중표 목사님을 만나 뵈었다. 목사님께서 나에게 말문을 여셨다.

“선교사가 무엇이냐?”

나는 망설임이 대답하였다.

“거지입니다.”

그리고는 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침묵이 흘렀다. 목사님께서 조용히 한마디 하셨다.

 

“나도 거지다.”

목사님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괴었다. 그리고 그 분은 세 시간 정도의 긴 시간을 말없이 거지 선교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다. 이 만남으로 이중표 목사님은 ‘비전아시아미션’의 창립자가 되셨다.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선교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일꾼이다. 또한 목회자이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의존된 존재다. 그러나 교회가 선교를 위임받은 기관으로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고, 선교단체들이 선교사를 모집하여 파송하고 있기에 교회는 선교사 후원에 대하여 자유롭다.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믿음 선교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재정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져주지 않는다. 결국 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은 자기 스스로 생활비와 사역비를 책임지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슈퍼스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감과 열정으로 자원하여 선교사가 되었으므로 자기가 자기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선교사의 현실이다.

 

교단과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들도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거지반 모금을 위해 고투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교단과 교회의 공동 책임과 후원의 길은 개교회주의의 흐름으로 인하여 요원하다.

 

 

 

 

 교회건축 후원 1호인 뽀남 빨리교회

 

 

선교사가 거지인 것은 그들의 의식주가 철저하게 모금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우들의 후원과 헌금으로 사는 삶이기에 항상 절제하며 삼간다. 은혜로울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경이롭기 그지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구속감과 부담감과 굴레가 되어 초라함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교우들의 후원은 언제나 신실하며 기도와 애정이 담겨 있지만 자신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싶거나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세워지는 새로운 계획과 방향에 따라 그리고 누가 담임 목회자가 되느냐에 따라 후원을 계속할 수도 있고 중단 할 수도 있다.

 

노회는 그 존재위 속성상 정치적인 필요성과 명목이 좋으면 후원을 할 수도 있고 그럴만한 가치가 없으면 무관심하다. 대부분의 노회원들은 국내 목회자도 힘겨운 상황에서 외국에 나간 목회자까지 돌보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생활비와 사역비 때문에 가끔 ‘거지’의 기분을 맛본다.

말이 선교사지 ‘선교사 거지’다. 쉼 없이 먹이를 구걸해야 하고 달릿과 달릿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구걸해야 하는 ‘선교사 거지’다.

‘선교사 거지’라고 선교사를 결코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와 만나고 교회를 방문할 때 ‘선교사 거지’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나의 피해의식이 아니고 선교와 선교사를 대하는 교회의 인식, 자세와 태도에서 기인된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전대에 금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므로 성이나 촌에 들어가서 영접하는 자를 찾아서 거기 머무르라고 분부하셨다. 전도여행기간 의식주에 신경 쓰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파송사의 일부분이다.

 

교회나 선교단체들이 선교사를 보내면서 왕왕 이 말씀으로 선교사를 격려한다. 나 또한 이 말씀으로 격려를 받았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니까 생계 따위에 매이지 말고 사역을 잘 감당하라는 메시지다. 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 그러나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여기서 제자들은 국내에서 단기간 전도여행을 떠난다. 동일 문화권에서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금은동이 없어도 지팡이가 없고 여분의 옷이 없어도 문제가 없다. 배고프고 목마르면 동족에게 호소하면 되고 정 잠자리가 어려우면 풍찬노숙으로 며칠을 버티면 전도여행은 곧 끝이 난다. 제자들은 여행을 위해서 집을 전세로 구하거나 비자를 발급받거나 자녀들의 학교를 옮길 일이 없다. 새 언어를 배우고 문화 적응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다.

 

국내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단순한 상황을 일가족을 거느리고 외국으로 떠나는 선교사에게 격려사로 주는 것은 너무 구태의연하다. 이 말씀을 선교사에게 주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철저하게 호의를 베푸는 자에게 의존하라는 말인데 그 말은 뒤집으면 철저하게 모금하라는 말과도 통한다.

 

 

자칭 타칭 ‘선교사 거지’ 는 하늘의 거지다.

 

 

 

 

이옥희 선교사와 현지인들

 

 

나의 구걸로 나도 살고 타인도 먹인다. 어떻게 구걸을 했든지 간에 구걸할 능력도 의지조차도 없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나의 구걸에 의존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존심 상해하고 슬퍼할 시간이 없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러나 모금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열등감과 수치심이 동반되므로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모금자임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모금하는가?

왜 모금하는가?

질문으로 나를 무장시키면 계획과 노력을 넘어서는 열매들을 거두어도 감사하고 때로는 수확이 전혀 없는 열매 없는 열매를 거두어도 감사하게 된다.

 

선교사가 거지인 까닭은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보호를 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교우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교회 소속 목회자들로 하여금 사역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보호해 준다.

 

그러나 선교사에게는 지붕이 되며 울타리가 되어주는 교우공동체가 없다. 선교회가 있지만 그것은 상징에 불과하다. 후원회가 있지만 교회가 주는 안정감이나 위로, 상호 이해와 협력, 상호의존성을 기대할 수 없다. 선교사는 혼자 모든 것들을 스스로 기획하고 시행하며 결과를 거두며 보고 듣고 만들며 부딪히는 중에 참고 기다리며 해결하며 풀어가야 한다.

 

나는 모금도 어렵지만 혼자 일하는 것이 싫어서 한국교회 목회자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금이 부담스러워서 자비량 선교를 도모하려고 많은 구상을 하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것도 자비량 선교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뒤로 돌아 갈 수도 없고 피할 길도 없는 상황에서 ‘선교사 거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다리를 꽉 붙잡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주인님, 주인이 종을 부릴 때 살 집도 주고, 일도 주고, 일할 도구도 주고, 그리고 나중에 품삯도 계산해 줍니다. 그런데 주인님, 당신의 종인 저는 왜 집과 사업장과 품삯 걱정을 해야 합니까? 제가 주인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왜 제가 걱정해야 합니까? 왜 공급해 주시지 않습니까? 주인님, 제 품삯 주십시오.”

 

하나님은 어김없이 약속을 지키신다. 철저하게 책임져주시고 철저하게 의존하게 만드신다. 자신의 자비와 경영으로 재정도 공급하시고 일감도 공급하신다.

 

하나님의 책임을 믿고 또 믿는 나는 겁 없이 일을 추진한다. 떠오르는 대로 진행시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종의 의무요 사명이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한 종이 아니라 창의적인 종으로 일하기 위해서 내 편리나 애호를 배제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일인가? 내 욕심에서 오는 일인가? 의 판단 기준은 생명이다. 생명을 보듬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을 나에게 주신 일로 그대로 받는다.

 

 

 

‘선교사 거지’는 세상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다.

 

 

 

자매결연의 수혜자 마니와 가족들

 

처음에는 무엇을 먹고 살까? 어떻게 살까? 잊혀진 존재가 되면 어떡하나? 후원이 다 끊기면 어떡하나? 염려하면서 과거에 집착하고 여기가 아닌 거기에 매달리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과거의 관계, 과거의 이력, 과거의 경험, 과거의 지식에 매여서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며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몸은 이 공간에 있으면서 마음은 옛 자리에 두는 분리를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인생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오늘을 사는 존재인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선교사로서 분리되는 고통, 혼자서 가야하는 고독, 개척해야 하는 고난을 피하고 싶었다.

 

용감하게 현장을 떠나든지 아니면 살아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모험에 자신을 철저하게 노출시켜야 한다.

 

과거의 영광, 명예, 화려한 경력 등등의 훈장은 다 떼어버려야 한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처럼 처음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인도 시골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닌가! 달릿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준 생명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 선교를 위한 파트너로 불러 주실 때는 분명 계획이 있으셨다. 도전하며 깨지자. 모험하며 상처받자. 일하며 배우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적응과 사역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되었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담대해지고 자유로워졌다. 무명과 고독에 대한 두려움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은퇴 후에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주님과 관계를 맺고 그 분 안에 사는 일꾼으로 족하다.

 

“하나님, 여기 종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 관제로 부음이 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나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나를 던진다.

 

교회를 방문하다 보면 가끔 목회자들이나 교우들로부터 돈을 모으고 호의호식하는 선교사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선교비를 받아서 자녀들을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명목상으로 일하는 선교사, 동남아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선교사, 한국에 자주 입국하는 선교사 등을 화제로 삼는다.

 

‘선교사 부자’가 있으므로 그런 말이 나왔겠지만 그런 ‘선교사 부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가능하다면 선교사 중에 극소수에게나 가능한 일을 모두에게 적용시켜서 매도하는 것은 선교사를 일꾼으로 거느리고 있는 하나님의 관리와 경영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목회자가 완전한 인간 아니듯이 선교사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위임을 받고 떠났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과거에 한국 목회에 실패자였던, 무식하고 못났던, 가문이 일천하던, 열광주의자든, 보수주의자이든 간에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시고도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고난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눈길이 멈춘 곳,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손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미러클리(만 9세)

선교사 거지인 것은 선교지 나라에 철저하게 인카네이션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국에서 누렸던 크고 작고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거지의 자리로 내려가서 하나님과 세상 앞에 엎드려야 한다. 습관과 취미와 기호까지도 내려놓고 엎드려야 한다.

 

거지는 자기 의견과 주장, 자기 영광과 명예, 자기 가치와 존재 의미 등등을 주장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고통스런 삶을 묵묵히 산다.

 

사람들이 베풀어 주는 호의로 입에 풀칠을 하면서 자신의 초라함과 무기력과 쓸모없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거지는 작은 자, 낮은 자, 겸손한 자의 상징이 된다.

 

선교사 거지는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마구간으로 인카네이션 하셨듯이 선교지에서 거지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 자의 자세로 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시도록 드려야 한다. 선교사가 엎드려서 기다리며 쓰임받기를 사모할 때 복음을 프로젝트로 대치하고 선교를 인기사업으로 기획하는 허세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는 제국주의 선교, 돈 선교, 문화 파괴로서의 선교는 선교사가 선교현장에 인카네이션 하지 못해서 오는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노동의 결과물로 살지 않고 사람들의 호의로 살며, 직접 보호해주는 교우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과부나 고아처럼 하나님의 직접 관할과 보호 아래 있으며 선교지에서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거지의 자리로 인카네이션 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선교사는 거지고 거지이며 거지여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거지!

사람의 호의와 자비와 의존된 거지!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자신을 내려놓은 거지!

그러므로 선교사 거지는 땅과 하늘의 호의로 사는 고난과 축복을 동시에 받은 종이다.

선교사가 거지면 하나님은 거지의 주인이요, 거지 대장이시다. 

 

 

 

 

 

 

 

 

 

 

 

 

 

목차만 읽어보아도 가슴이 뭉클해 지는 ....

 

이옥희 선교사가 쓴 책 [선교사는 거지다]의 목차를 아래 소개한다.

꼭 구입하여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목차

 

1장 선교는 생명을 살리는 예술
그 이상의 예술은 없다 | 나환자의 친구 매씨 | 내 슬픈 눈물의 아이들 | 도전 그리고 레쉬뜨아카데미 | 와이에스나가르 희망공동체로 가는 길 | 타인을 위한 존재 | 하나님의 신학교 | 희망발전소 창조 여행

2장 사람이 희망이다
데칸 고원의 작은 꽃송이들 | 사람이 희망이다 | 건물 그 이상의 의미 | 내려놓음 | 데칸 고원이 나를 불렀다! | 작은 물길이 트이면 | 키쇼르의 선물

3장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내 몫이다
기도하게 만드신 까닭은 | 하나님의 약속과 응답의 과정들 | 나를 사랑했던 친구와 친구들 | 실맛 언덕의 원무 | 오합지졸 무엇이 문제냐 | 칼만 안 든 강도 | 고아, 아픔으로 자라는 꽃들

4장 믿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나뭇가지 뻗어 나가듯이 | 느헤미야 기도원과 유칼립투스 | 멀고 험한 사랑의 길 | 바가지를 쓰는 뜻 | 사랑의 곳간 | 씨가마니의 꿈과 과일 사기 | 절망을 보았다

5장 믿음의 씨앗
까마귀가 된 헌 옷 | 데이비드의 손목시계 | 믿음대로 될 겁니다 | 떠돌이 개, 버터플라이의 밥값 | 쏘만디빨레 의료 캠프 | 쫓겨날 뻔했던 순간들 | 차가 없는 운전사

6장 고향은 뿌리고 꿈이다
꿈과 조개 잡기 | 시와 선생님 | 아름다운 정말로 아름다운 | 나무 상여와 빽갱이 아버지 | 아버지와 하나님의 과일 | 요셉의 축복 | 훈장과 막걸리 | 보름달이 휘영청 밝고
 



 작가소개
 


 

이옥희 : 이리여고, 한신대학교,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영주중앙교회, 군산한일교회, 베다니집 등에서 시무했다.

 

1997년 전북서노회 파송 인도 선교사로 출발했다.

1999년 기장총회 파송 남인도 교단 선교 동역자로  데칸 고원 라열라씨마 일대에서 달리트 선교에 동참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년 7월 13일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전인도 신학 협회로부터 수여받았다.

비전아시아미션 창립 이사(2005년 11월 30일)이자, 비전아카데미(지도자훈련원) 설립 이사(2006년 6월)이다.

인도선교 10주년 기념시집 [비아 돌로로사]의 저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러시아 브라질을 포함해 36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어려울 때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사회적 연계(Social Connections)를 묻는 질문을 했습니다.

 

'있다'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우리나라가 72%로 가장 낮았다고 합니다. 이는 OECD 평균 88%보다 16% 포인트 낮은 수치입니다.

인정과 소속과 연고를 중요시하는 한국 민족인데 의외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인 크레익 엘리슨(Craig W. Ellison)은 외로움에는

정서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실존적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서적인 외로움은 우리의 감정상태에서 오는 것이고,

사회적인 외로움은 이웃과의 교제가 사라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실존적인 외로움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원천적인 것으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순간부터 생겨났는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가장 근원적인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인간은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숙명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다.”

 

이뿐 아닙니다.

외로움 뿐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에 행복을 놓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시 크레익 엘리슨(Craig W. Ellison)의 글을 참고해 보겠습니다. 그의 저서 스트레스와 안정(From Stress to Well-Being, Waco, TX: Word Books Publishers, 1992)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용납감, 소속감, 자신감, 공평감, 주체감, 안전감, 가치감, 초월감을 가진 사람이 스트레스에 강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용납감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용납감이란 내가 나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또한 하나님께서도 나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느낌을 가리킵니다. 물론 나 자신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내 모습 이대로 용납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에, 소속감이란 내가 누군가와 연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의미합니다. 그 대상은 개인이나 그룹이 될 수 있습니다. 친구, 동료, 단체, 회사, 교회, 지역사회, 민족, 국가 등 다양합니다.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소속감입니다.

 

그 다음에, 자신감이란 나 자신이 바람직한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나 자신에 대한 건전한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삶을 건실하게 이끌어가고 바람직한 결과를 위하여 나 자신을 절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실을 즐기며 미래의 행복을 바라보는 소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공평감이란 나 자신이 남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있으며 남들도 나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연이나 하나님께 대해서 잘못됨이 없이 올바르고 정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오늘날 해 아래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공평한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겠죠.

 

또, 주체감이란 삶의 현장에서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취하며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의미합니다.

주체감은 나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인식하는 독립적인 태도를 뜻합니다. 건강한 주체감을 가질 때 대인관계가 분명하고 책임의 한계를 정확히 지키는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전감이란 불안이나 위협이 없는 평안하고 안전한 상태를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보호를 받는 느낌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젖먹이가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에 안겨 있을 때 느끼는 고요와 평안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가치감은 나 자신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가리킵니다. 나 혼자라도 존재할 이유가 있고,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존재할 가치가 있고, 사회에서 만나는 이웃들과의 관계에서도 존재할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가치감입니다.

 

끝으로 초월감이란 나 자신이 이 세상의 현실을 초월하는 영원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을 뛰어넘어 초자연의 세계를 사모하는 마음, 일시적인 것을 뛰어넘어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믿음, 잠시 있다 지나갈 일시적인 것을 뛰어넘어 불변의 세계를 향하는 소망, 영생을 바라보는 신앙적인 태도를 가리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면 외로움도 스트레스도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장재언)   

 

 

 

 

 


 






 







 


 

 

 

 

 

 

 

 

 

 

 

 

 

이슬람국 한 복판에 아라비아 반도 최초로 독자예배당을 가지는 한인교회가 한창 건축 중에 있다.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 UAE)의 수도 아부다비 무사파 지역에 3천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지는 맑은샘 아부다비한인교회(강희진 목사)다. 이 교회는 아부다비에 위치하고 있지만 소속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 유럽지방이다.

 

오는 12월 성탄절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교회는 6930㎡(2100평) 대지에 3층 건물로 지어지며 1000석 규모의 대예배실을 비롯해 500석 250석 100석 80석 등 소예배실을 갖출 예정이다. 교회 안에는 소그룹실 16개, 카페와 서점, 사무실, 5채의 목회자 주거공간 및 게스트룸 등도 들어선다.

 

맑은샘 아부다비한인교회의 강희진 목사는 “이 교회를 통해 디아스포라 선교에 한 발 다가서게 되리라 확신한다. 하늘을 향한 십자가는 걸 수 없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전체가 십자가 모양을 띠도록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마련된 교회는 맑은샘 아부다비한인교회의 예배당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극장이나 호텔, 식당 등을 빌려 예배를 드리던 타 교파의 한인교회들, 그리고 아부다비에 거주하는 외국 그리스도인을 위한 예배 장소로도 활용된다. 건물없이 드리는 예배를 불법으로 취급하는 UAE에서 이 교회건축은 여늬 교회들에게도 희소식이다.

 

현재 아부다비는 자국민이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182개국에서 온 외국인이 거주하는 특이한 형태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들 외국인 중 10% 정도가 기독교인들로서 각 국의 개신교회 뿐 아니라 가톨릭, 콥트, 정교회 등이 들어와 있다.

 

이렇듯 UAE는 다른 아랍국가에 비해 기독교에 대해 그나마 관대한데 그 이유는 UAE가 연합국이 되기 전에 왕족이 한 기독교인 의사로부터 큰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1971년에 UAE가 연합국이 된 이후에도 현지인에 대한 선교는 금지하고 있으나 7개 토후국마다 종교단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의 기공식 장면. 완공예정은 2015년 성탄절이다

 

 

 

지난해 11월 중앙연회의 최재화 감독과 이정원 감독이

UAE 문화부 장관 쉐이크 나흐얀(가운데)과 성공회 관계자를 만났다.

 

 

이 교회가 들어서는 곳은 당초 영국 성공회가 장기 임대로 받은 교회부지였다. 그러나 개발시한이 다가오는데도 영국성공회가 건축을 하지 못하자 평소 협력관계에 있던 맑은샘 아부다비한인교회에 자신들을 대신해 교회건축을 제안해 왔다고 한다.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면 부지가 국가로 귀속되고 말기에 선교적 손실이 너무 크다고 본 강 목사가 이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이 제안은 60억 원 규모의 건축 비용 중 5억 원을 한 성도가 헌금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건축비의 절반인 30억원은 아부다비의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임대하여 마련할 예정이다. 이미 50여개 교회가 시간차이를 두고 예배를 드리겠다는 신청을 해온 상태라고 한다.

 

한 건물에 여러 교회가 예배드리는 현상은 교회건축이 자유롭지 못한 이 나라만의 풍속이라고 보면 된다. 교회가 건립되면 이슬람국가의 주일격인 금요일 하루에만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50개 교회, 3만여명의 크리스천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15년 7월 현재 건축중인 맑은샘 아부다비한인교회

 

 

성도들이 종려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판매하는 등 건축비 마련에 애를 쓰고 있지만 그래도 교회가 나머지 건축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하기란 쉽지않은 현실이다.

 

강목사가 소속된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중앙연회(최재화 감독)가 중심이 되어 ‘100만원 1000구좌 운동’을 전개하며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오는 8월말에는 이 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해 감리회 10개연회 감독이 아부다비에서 감독회의를 갖는다.

 

강 목사는 “그동안 UAE 한인교회들은 영국과 미국교회 건물을 임대해 예배를 드려왔다. 우리도 그간 호텔이나 학교 체육관을 빌려 예배를 드려왔다”며 “이번에 예배당을 건축하면 독자적인 교회당을 가진 첫 한인교회가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중동지역에 진출하는 최초의 감리교회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그 의미를 밝혔다.

 

교회가 완공되면 예배처소로서의 본래적 기능은 물론, 무슬림지역 한인선교사들이 비자 제약없이 방문하여 쉴 수 있는 선교사들의 휴식처이자 훈련센터, 글로벌 선교단체들의 세미나와 집회공간, 교민들의 문화 예술 친교의 중심지 역할 등 중동선교의 전초기지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위장을 한 콜롬비아 군인들이 20일 독립 205주년을 맞아

수도 보고타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의 하나가 ‘은혜스럽게’일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말이 어떤 일을 적당히, 문제가 되지 않게, 대충대충 처리하는 걸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스러운 게 아니라 적당주의입니다. 매사를 가장 정확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은혜스러운 일입니다. 역시 '기도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도 입장이 곤란할 때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용어는 바르게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다른 나라 교회와 비교할 때라면 몰라도 한국 사람이 자기 나라 교회를 ‘한국교회’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쩐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 말을 하는 자신은 마치 외국인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요. 그보다는 ‘우리나라 교회’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찬송’과 ‘찬양’이라는 말이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찬송(讚頌)은 ‘기릴 찬(讚),기릴 송(頌)’으로 찬양(讚揚)은 ‘기릴 찬(讚),오를 양(揚)’으로 둘 다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는 ‘찬양’으로, 일반 회중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으로 차별해서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일 하는 걸 ‘봉사(奉仕)한다’고 합니다. ‘봉사(奉仕)’란 말 그대로 받들고 섬기며 돕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한다’는 말은 좀 어색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의 행위가 봉사활동일 수는 없겠지요? 

 

◇성경에서는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등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주님의 본명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이’ 즉,‘구세주’라는 직책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입니다.

 

◇‘나귀 새끼’인가,‘새끼 나귀’인가? 말 그대로 나귀 새끼는 나귀의 새끼를 말하고 새끼 나귀는 어린 나귀를 말합니다. 어떤 이는 나귀 새끼라는 표현이 상스럽다고 합니다. 아마 그와 비슷한 욕이 연상돼서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나귀 새끼보다는 새끼 나귀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좋겠습니다.

 

◇간혹 설교에 ‘장본인(張本人)’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장본인’은 ‘어떤 일을 꾀하여 일으킨 바로 그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로 부정적인 일을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미담의 장본인은…’이라는 식으로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긍정적일 때에는 장본인이 아니라 ‘주인공’이나 ‘주역’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여,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성 프란체스코가 쓴 ‘평화의 기도’는 가사와 노래가 워낙 유명해서 교회에서 자주 불립니다. 그러나 가사 중에 “자기를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표현은 선행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식으로 고쳐 불러야 합니다.

 

◇“할렐루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목회자나 방송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이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할렐루야’가 사람들 사이의 인사말로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이므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정중히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성도들끼리 사용하는 말에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가 많습니다. ‘태신자’라는 말이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자로 기대하며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로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대상을 ‘태목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태신자’라는 말보다는 그냥 ‘전도 대상자’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언어는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개 장로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 예배 시간에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기도에 있어서 ‘대표’나 ‘대신’이란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표가 될 수 없다는 게 만인제사장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님이 기도 인도해 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님,개업예배 좀 봐주세요”“이번주 구역예배는 집사님이 봐주세요”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자칫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행위이지,누가 대신 드려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목사님,예배를 인도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옳습니다.

 

◇흔히 주일 낮에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소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배에 큰 예배 따로 있고 작은 예배 따로 있을 수는 없지요. 예배에 등급이나 규격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한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입니다. ‘대예배’라는 말보다는 ‘주일 낮 예배’ 또는 ‘장년부 예배’로 표현하면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어떨까요?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하는 분이 이 말을 간혹 쓰곤 합니다. 이 말은 자칫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배를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예배는 정해진 시각에 시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시각이 되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전폭적으로 감격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분들은 시간이 되었다는 이유를 달지 말고 그냥 예배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어휘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축복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축복(祝福)’은 복을 빈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것이 바로 야곱을 위한 이삭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빕니다. 다시 말해 축복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축복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다른 신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부탁하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복을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입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주님,내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말에는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나’와 ‘저’가 있습니다. 상대방에 따라 잘 골라 써야 합니다.존경하는 상대 앞에서는 자신을 ‘나’라고 하지 않고 ‘저’라고 낮춰 부릅니다. 기도나 찬양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나’라고 하지 말고 ‘저’라고 해야 옳습니다. “제가 주님을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를 낮춰 부를 때에는 ‘저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저희 나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와 대등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저희 하나님’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 ‘저희’라는 표현은 상대와 상황에 맞게 잘 선택돼야 합니다.

 

○…“당회장님께서 설교해 주시겠습니다.” 사람은 그 역할에 따라 호칭이 달라집니다.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이지만 회사에서는 과장님,교회에서는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목사님도 제직회 때는 제직회장,당회 때는 당회장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 때에는 ‘당회장’이 아니라 ‘담임목사’라고 불러야 옳다고 봅니다. 회의가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를 흔히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중보(中保)’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지요. ‘중보’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니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중보기도’라는 말보다는 ‘이웃을 위한 기도’ 또는 ‘도고’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를 보통 ‘부목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말은 ‘조교수’‘부교수’‘정교수’같이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뜻합니다. 안수를 받는 순간 목사가 되는 것이지 ‘副목사’를 거쳐 ‘正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한번 목사가 되면 영원히 목사인 것입니다. ‘부교역자’나 ‘부목회자’라는 말은 몰라도 ‘부목사’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부목사’라고 하지 말고 ‘목사’로 호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면서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또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에는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주님을 위해 일하는 모든 일꾼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간혹 ‘주님의 종’을 높여 부른다며 ‘종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지요. ‘종’은 종이지 ‘종님’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종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 됩니다.

 

○…공중 기도를 하다보면 곤란한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 장로 등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우리 어법에 따르면 더 높은 분 앞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님’자를 붙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를 하면서 담임목사나 장로,성도에게 막상 ‘님’자를 붙이지 않으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높이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성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신도’니 ‘사도’니 하는 말도 ‘무리’를 뜻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란 말은 어법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구태여 ‘성도’를 ‘성도들’로,‘신도’를 ‘신도들’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나 ‘신도’라는 말 자체가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 형제’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형제’라는 말은 ‘자매’‘남매’와 마찬가지로 ‘형과 아우’ 두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를 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오빠가 여동생을 ‘남매’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색합니다.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남자이면 형이든 동생이든 ‘브라더’(Brother)로,여자이면 ‘시스터’(Sister)라고 하는데 이것이 ‘형제’와 ‘자매’로 잘못 번역된 것같습니다.

‘○○○ 형제’라는 말 대신 ‘○○○ 씨’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형’‘누나’‘오빠’라고 하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일일이 간섭해주시고” 원래 ‘간섭(干涉)’이란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간섭’을 ‘참견’이라고도 하는데 두 말 다 남의 영역에 끼여든다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밖에서 우리의 삶을 참견하거나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저희 삶을 주관해주시고”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도전을 주셨습니다” ‘도전(挑戰)’이란 말은 서열이나 지위 등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겨루어 승부나 우위를 가리려 하는 것입니다. 또‘신기록에 도전하다’라는 말처럼 이루기 어려운 일이나 대상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맞닥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도전의 삶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도전하셨다”는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전을 주셨다’는 말보다는 ‘내 마음에 도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해마다 12월31일 밤이 되면 교회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예배의식을 갖습니다. 보통 ‘송구영신예배’라고 하던 것이 요즘에는 ‘자정예배’‘영시예배’ 등으로도 불립니다.그러나 ‘영시예배’나 ‘자정예배’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단순히 예배가 시작되는 시간을 예배의 명칭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에서 ‘송구영신예배’가 좋지 않을지요? 

 

○…“성경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성경 봉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받들어 읽는 매우 중요한 예배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내려주신다는 매우 엄숙한 의미를 갖습니다.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이 순서에는 전 성도를 자리에서 일어나게도 합니다. “봉독해 올린다”는 말은 인도자가 성도에게 말씀을 ‘읽어드린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불신자’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모두 ‘불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아직은 비신자일 뿐이니까요. ‘불신자’라는 말보다는 ‘비신자’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소경’‘장님’‘문둥병자’‘절뚝발이’…. 우리는 아직도 이런 말을 씁니다. 개역성경에 이러한 표현이 가끔 나오다보니,예배 중에도 이런 말이 여전히 사용되곤 합니다. 이런 호칭은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로서 교회 바깥에서도 이미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먼저 장애인을 비하하는 이런 말들을 듣기 좋은 말로 고쳐 써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소경’이나 ‘장님’은 ‘시각장애인’으로,‘문둥병자’는 ‘한센씨병환자’로,‘절뚝발이’는 ‘지체장애인’ 같은 말로 바꿔 써야겠지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통 ‘사회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는 ‘사회자(Presider)’라기보다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Worship Leader)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를 진행하는 이는 ‘사회자’가 아니라 ‘인도자’라고 해야 합니다.

 

○…예배순서 중에 ‘개회’와 ‘폐회’라는 말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아무개 집사님이 기도해 주심으로 예배를 개회하겠습니다”“아무개 장로님 기도로 폐회합니다”라고 합니다. 예배는 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개회’나 ‘폐회’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무개 목사님의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예배가 아니라 회의를 시작하고 마칠 때에는 ‘개회기도’나 ‘폐회기도’를 사용해도 좋겠지요.

 

○…어떤 교회의 주보를 보면 예배 중에 ‘헌금’ 순서가 들어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헌금’이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봉헌’으로 고쳐야 합니다. ‘봉헌’은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예배자들은 돈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도 함께 봉헌해야 합니다. ‘헌금’은 ‘봉헌’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헌금’이라고 하지 말고 ‘봉헌’이라고 했으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목회자에게 매월 제공하는 생활비를 ‘봉급’이나 ‘월급’,‘임금’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용어는 회사같은 데에서 일한 대가를 지급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교회가 성직자나 사역자들에게 제공하는 돈은 단순한 생활비나 대가,보상의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월급’이라는 말은 ‘삯’이라는 의미가 크므로 ‘사례비’(謝禮費)라는 말을 쓰는 것이 낫겠습니다. ‘사례비’란 감사의 예로 드리는 것이니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도 함께 주고받아야 하겠지요.

 

○…우리는 ‘결혼예배’와 ‘결혼예식’,‘임직식’과 ‘임직예배’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예식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돌 추도 입학 결혼 임직 교회창립 등의 행사는 ‘예배’(worship)가 아니라 ‘예식’(ceremony)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모임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에 ‘예배’라는 말을 붙이면 진정한 예배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예배’가 아니라 ‘결혼예식’입니다. 

 

○…“교우 여러분,목사의 아내인 사모(師母)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모’란 스승의 부인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스승을 높여 ‘사부’(師父)라 하였는데 이는 스승은 아버지와도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모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사모’라는 말이 교회 내에서도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성도가 목사 부인을 ‘사모님’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대중 앞에서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하고 목사 부인이 자신을 ‘사모’라 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교우 여러분,제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심코 ‘재수 없다’,‘운이 좋았다’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이런 말은 다른 종교에서 나온 것으로 기독교 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입니다. ‘손이 없는 날’‘사주팔자’‘운명’‘운수’‘명당자리’‘도로아미타불’‘공염불’‘신주를 모신다’는 말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재수 없다’라는 말은 아예 쓰지 말아야 하며 ‘운이 좋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장의문화에는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영결식’(永訣式)은 ‘영원한 이별’이라는 뜻이고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들었다’는 뜻으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명복’(冥福)은 죽은 뒤 명계(冥界)에 가서 받는 복이니 아예 다른 종교의 용어입니다. ‘영구’(靈柩)란 말도 죽은 사람의 혼백을 넣은 관이라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을 관에 가두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영전’(靈前)‘영좌’(靈座)‘영구차’(靈柩車)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가려서 써야 하겠습니다.

 

○…‘성가대’인가,‘찬양대’인가? ‘성가대’라는 말은 이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성가’는 노래 자체를 말하지만 ‘찬양’은 예배하는 행위를 말하니 의미가 다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찬양’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성가’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찬양대라는 말이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성가대’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가대’보다는 ‘찬양대’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복권이 사람들을 크게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매우 낮은 당첨 확률이지만 어떻게든 뽑혀보려고 야단들입니다. 성도는 무슨 일이든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은 그 결과를 우연의 일치로 보고 ‘운이 좋았다’‘운이 나빴다’고 합니다. ‘행운’이니 ‘우연’이니 하는 용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운상 추첨’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안식일’과 ‘주일’이라는 용어가 마구 섞여 쓰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초창기까지는 십계명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는 일을 합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시면서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였습니다. 주일과 안식일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옛날 안식일에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날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보다는 ‘주일’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간혹 직장에 전화를 걸어 “아무개 집사님 좀 바꿔주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집니다. 호칭도 거기에 맞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집사이지만 가정에서는 아버지,직장에서는 과장입니다. 직장에서는 그곳에서의 역할과 상황에 맞게 호칭하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에 전화를 걸었을 때에는 ‘아무개 씨’ 또는 ‘아무개 과장님’으로 부르십시오.

 

○…비신자들은 조상이 돌아가신 전날밤에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祭祀)’는 조상신을 섬기는 전통종교의 용어여서 기독교인들은 보통 ‘추도식(追悼式)’이라고 합니다. 추도(追悼)란 ‘슬퍼한다’는 뜻입니다.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추억하며 슬퍼한다는 것은 좀 어색합니다. 그러니 ‘추도’보다는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 ‘추모’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추모식’입니다. 

 

○…기도는 은밀하게 하기도 하고 여럿이 공개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또 조용히 하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 ‘주여 삼창’이란 걸 외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여!”라는 말을 크게 세 번 외치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 우려를 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자칫 자기 최면이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단체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종류 만큼이나 이름도 여러 가지입니다. 크게 신교와 구교로 나뉘는데 구교는 ‘천주교’로 불립니다. 그러나 신교에는 마땅한 이름이 없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등의 이름이 말해주듯 ‘기독교’라고도 하고 ‘예수교’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란 말은 이미 구교는 물론 그리스정교회를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신교’든 ‘기독교’든 ‘예수교’든 하나의 이름을 속히 정해야 하겠습니다.

 

○…간혹 교회에서 나오는 상패 문안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주는 사람을 ‘아무개 목사’라고 쓴 것을 보게 됩니다. 공중이나 윗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칭할 때 자기 성명 뒤에는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아무개 목사’가 아니라 ‘목사 아무개’라고 해야 합니다. 상을 받는 사람도 ‘집사 아무개’식으로 해야 합니다. 저자의 표시나 공고문의 표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비슷한 위치의 사람에게 자기을 칭할 때에는 ‘아무개 목사’라고 해도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는 상대방 성명 뒤에 직함을 붙여야 합니다.

 

○…“묵도하심으로써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배학자들은 ‘묵도’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묵도’라는 말이 일본 신사참배 순서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성경에도 ‘묵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묵도’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묵도’라는 말보다는‘묵상’이란 용어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믿는다.’ 이런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도 애매한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나는 크리스천이다”“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우리는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많이 폅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을 이웃과 나누는 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거나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들을 ‘불우 이웃’이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누가 진짜 불우 이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존중하는 것이 진정 그를 돕는 일입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issa)의 합성어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번역하면 ‘성탄기념예배’ 정도가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성탄절을 X-mas라고도 하는데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kristovs)의 첫 글자입니다. 그러나 X는 미지수나 부정의 기호로도 쓰이므로 ‘성탄절’‘성탄일’‘주님 오신 날’ 등으로 부르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는 “경주를 경주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경주를 경주한다는 건 표현이 어색합니다. 이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로 고치면 좋겠습니다. 또 찬송가 가사 중에 ‘거칠은 광야’는 ‘거친 광야’로,“버리신 그 사랑 고마와라”에서 ‘고마와라’는 ‘고마워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묵도하심으로써 예배를 시작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예배학자들은 이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묵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묵도’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하는 기도’인데 이왕이면 초신자도 알기 쉽게 “마음으로 기도하심으로써”나“조용히 기도하심으로써”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선 묵도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세 번,개역개정판에는 두 번 나옵니다. 그리고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묵도’를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예수 천당,불신 지옥” 아마도 이런 외침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자주 들어봤을 것입니다. 전도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이 짧은 표어에 대해 신학자들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라는 말보다는 성경에 나오는‘천국’‘하나님의 나라’‘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 무심코 자주 쓰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한다는 건 좀 어색합니다. 어찌 보면 인사는 정확히 자기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우리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경우에만 쓰는 겁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라고 하는 게 적합합니다.

 

○…우리는 예배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자주 욉니다. 그때마다 인도자는 “주기도문 하시겠습니다”“사도신경 하시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인도해주면 어떨까요? 그리고 주기도문은 마침용 기도가 아니므로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도들이 열심히 들고만 다니는 것이 성경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암송만 하는 건 사도신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이란 기도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문입니다. 따라서 눈을 감기보다는 오히려 두 눈을 바로 뜨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사도신경으로 자기의 신앙을 또렷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있습니다. ‘훤화하다’는 ‘떠든다’는 뜻이고 ‘신묘막측하다’는 ‘신기하고 묘함이 측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숙곳에서 발행했다’는 말은 ‘숙곳에서 출발했다’는 뜻이고 ‘영솔하다’는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어려운 말들을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고쳐 써야 복음이 전달됩니다.

 

○…성경에는 ‘구속’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말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구속’(拘束) 즉,사람을 체포해서 신체를 속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속’(救贖)은 사람을 구한다는 뜻과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받는다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몽학선생’(蒙學先生)에 비유합니다. ‘몽학선생’이란 고대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의 가정에서 소년들을 돌보기 위해 고용되었던 노예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몽학선생’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개역개정판에서 수정한 대로 ‘초등교사’로 바꿔 써야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사랑의 흉배’가 나옵니다. 흉배는 관복의 가슴과 배에 붙인 표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에서는 이를 ‘사랑의 호심경’으로 바꿨습니다. ‘호심경’은 갑옷에 호신용으로 붙인 구리조각인데 이 뜻을 아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모두가 아는 쉬운 말을 찾아 써야겠습니다.

 

○…‘성령 축제’‘부활 축제’ 등 언제부터인지 교회 안에서 ‘축제’(祝祭)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에서 유래되었으며 제사의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전야제’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그러므로 ‘성령 축제’는 ‘성령 잔치’로,‘부활절 축제’는 ‘부활절 절기 행사’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포도원교회에서는 찬송잔치로 부름니다 ^^;;)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우리가 기도할 때 자주 사용하지만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도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표현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라면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명확히 표현해야 합니다.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대로 무작정 따라 하지 말고 뜻을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인가,‘하느님’인가? 애국가를 부를 때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고쳐 부릅니다. 초창기 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 표기됐으나 아래아가 없어지면서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하느님’이 맞지만 신교는 유일신을 강조하기 위해 문법을 초월해 수사에 존칭접미사를 붙여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우리말로 주님을 다르게 표기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란 호칭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일학교’인가,‘교회학교’인가? 언제부터인가 ‘주일학교’라는 말 대신 ‘교회학교’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는 영국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학교교육과 성경교육을 시켜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주일학교’는 일반 학교교육을 전제로,‘교회학교’는 교회교육을 전제로 하는 용어입니다.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주일학교’보다는 ‘교회학교’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교사’인가,‘반사’인가? 교회학교에서 ‘반사’와 ‘교사’라는 말이 함께 쓰입니다. ‘반사’는 분반공부 때 반을 맡아서 가르친다는 의미이고 ‘교사’는 교회학교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반사’보다는 ‘교사’가 적합합니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는 일반 학교 ‘교사’와는 그 역할이 달라야 합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어느 초신자가 여집사님을 ‘아주머니’로 호칭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용되는 모든 용어가 낯섭니다. ‘롬’‘살전’처럼 성경을 가리키는 약자는 암호같고 ‘기립’이나 ‘착석’같은 말도 어렵습니다. 교회는 가급적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주일은 쉽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인구에 회자된 일이 있습니다. ‘주일’이라는 표현 때문이죠. 주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요일’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요일은 7일의 첫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도 ‘주일’로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에는 ‘세례 요한’이라는 호칭이 자주 나옵니다. 다른 ‘요한’과 구별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베토벤을 ‘음악 베토벤’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음악가 베토벤’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지금도 시골 교회에 가보면 ‘00예배당’이란 간판이 붙어있습니다. 요즘에는 예배당이란 말 대신 교회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백성들의 모임’‘교인들의 무리’를 가리키고 ‘예배당’이나 ‘교회당’은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말합니다.

‘예배당’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회는 움직인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배당’이나 ‘교회당’은 건물이나 장소의 의미로 ‘교회’는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성전’과 ‘교회’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성전은 지성소를 모신 하나님의 집을 뜻합니다.구약시대에는 성전이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신앙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는 데에는 신학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성전이라기보다는 예배당이나 교회당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양과 목자에 관한 비유가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양은 우리를,목자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를 목자로 오해하고 목사도 교인을 자기 양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목자는 주님뿐이시고 목회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양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양들을 양육하는 심부름을 맡은 목사가 교인들을 두고 내 양이니 네 양이니 한다면 잘못된 일이지요.

 

○…‘바로’는 이집트의 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원래 헬라어로는 ‘파라오’라고 합니다. ‘바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직책 이름입니다. ‘대왕’이나 ‘임금’이란 뜻이지요. 그러니 ‘바로왕’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바로’라고 해야 합니다.

 

○…‘예배하다’인가,‘예배 드리다’인가? ‘예배하다’보다는 ‘예배 드리다’가 겸손한 느낌을 줍니다.그러나 ‘예배 드리다’는 뜻이 중복되므로 어법상으로는 ‘예배하다’가 좋은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축하 드리다’‘찬송 드리다’‘기도 드리다’도 ‘축하하다’‘찬송하다’‘기도하다’로 고쳐 쓰면 좋겠습니다.

 

○…목회자들이 무심코 ‘내가 세운 장로’‘내가 세운 권사’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동안에 세운 직분자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임직시켰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세운 장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장로’입니다.

 

○…주일 예배는 ‘예배에의 부름’이라는 순서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에 초대하심을 뜻합니다. ‘Call to worship’입니다. 그런데 ’예배로의 부름‘이나 ’예배에의 부름‘은 일본식 표현으로 우리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부름‘보다는 ’부르심‘이 더 정중한 표현입니다. ’예배로 부르심‘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우리 제단을 축복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단’은 ‘교회’라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또 ‘우리’는 ‘저희’로 ‘축복’은 ‘복을 내려주소서’로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하나님,저희 교회에 복을 내려주소서.”

 

○…“지금은 예배하는 처음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예배중 공중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들이 습관적으로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보다는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게 적합합니다. 사실 기도 순서는 예배의 처음이 아니라 중간에 진행되니까요.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침례)를 주노라.” 목회자가 세례(침례)를 베풀 때 하는 선언문입니다. 세례(침례)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고”(마 28:19)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세례(침례)는 누가 주는가보다 누구의 이름으로 주는가가 중요합니다. 세례(침례)를 주는 사람이 드러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침례)를 베푸는 사람을 가리키는 ‘내가’라는 말을 지나치게 강조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아무개에게 세례(침례)를 주노라”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우리 제단을 축복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단’은 ‘교회’라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또 ‘우리’는 ‘저희’로 ‘축복’은 ‘복을 내려주소서’로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하나님,저희 교회에 복을 내려주소서.”

 

○…마태복음에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25: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작다’의 반대되는 말은 ‘많다’가 아니라 ‘크다’입니다. 그러니 ‘많은 것’보다는 ‘큰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교회를 치게”(20:25)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양을 친다’라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치게’는 ‘교회를 돌보게’와 같은 말로 고쳐야 합니다.

 

○…아모스에는 “포도원을 심었으나”(5:11)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을 수 있으나 포도원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포도원을 가꾸었으나”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사기에는 “모세의 장인 호밥”(4:11)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의 장인은 이드로이고 호밥은 처남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장인 이드로’나 ‘모세의 처남 호밥’으로 고쳐야 합니다.

 

○…성경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습니다. “번병의 체번”(삿 7:19)은 ‘보초 교대’라는 뜻이고 “설만하게”(느 9:18)는 ‘모독하게’라는 뜻입니다. “준승”(욥 38:5)은 ‘측량줄’을 뜻하며 “자여손”(출 34:7)은 ‘자손의 자손’을 뜻합니다. “전집하지 말지니”(신 24:6)는 “저당잡지 말지니”라는 뜻입니다.

 

○…찬송가 중에는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내게 만족하오니”(409장)는 “내게 만족 주시니”로,“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364장)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으로 다듬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즐기는 제물로는”(167장)에서 ‘이 세상이’는 “이 세상에서”로 바꿔야 하고 “삼위일체 되신 주”(9장)는 “삼위일체이신”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원히 방패요 또 산성이신”(31장)에서 “영원히”도 “영원한”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찬송가 중에는 어휘가 잘못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 전에 모여서 크신 축복 빕니다”(56장)에서 “축복 빕니다”는 “복을 빕니다”로 해야 합니다.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186장)에서 ‘튼튼히’는 ‘든든히’로,“내 마음 귀가 열리면 그 말씀 밝히 들리네”(75장)에서 ‘밝히’는 ‘잘’ 혹은 ‘똑똑히’로 고쳐야 합니다. “주 널 위해 비네 늘 빌으시네”(412장)에서 ‘빌으시네’는 ‘비시네’로 고쳐 써야 합니다.  

 

○…‘사단’인가,‘사탄’인가? 개역성경은 약 100년 전의 우리 말을 토대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어렵고 낯선 표현이 적지 않습니다. ‘사단’은 그 당시 표기법에 따른 것으로 요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사탄’이 맞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등 새로운 성경에서는 ‘사탄’으로 고쳤습니다. ‘사단’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다같이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을 격려해줄 때 우리는 ‘박수를 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박수(拍手)’가 이미 손뼉을 친다는 뜻이므로 ‘박수를 친다’는 말은 ‘손뼉을 친다’로 고쳐써야 하겠습니다. 요즘 ‘파송의 노래’가 교회에서 많이 불립니다. 이 노래 중에 “거칠은 광야 위에 꽃은 피어나고”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거칠은’은 ‘거친’이라고 고쳐 써야 합니다.

 

○…“우리의 바램은 주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바라다’라는 말의 제일명사형을 ‘바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램’은 ‘바람’으로 해야 맞습니다.

 

○…“이 찬양을 누구와 듣고 싶으세요?” 가끔 방송에서 듣는 표현입니다. ‘찬양을 듣는다’는 말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이 노래를 누구와 함께 듣고 싶으세요”라고 하든가 “이 찬양을 누구와 함께 드리고 싶으세요?”로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이 표현은 엄밀히 말해 상대방이 좋은 하루가 되라는 뜻입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도 마찬가지로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좋은 하루 맞이하세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신경 중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란 성구의 앞의 ‘사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 뒤의 ‘사는 것’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 또는 “몸의 부활과 영생”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특송을 해주시겠습니다... 흔히 예배 중에 회중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으로,찬양대가 부르는 노래는 ‘찬양’으로,다른 노래 순서는 ‘특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찬송에 ‘특별송’이 있고 ‘보통송’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예배 순서는 모두 특별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 데나 ‘특’(特)이란 말을 남발하지 말고 누가 부르든 똑같이 ‘찬송’ 또는 ‘찬양’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참 좋은 찬송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향하다’의 목적어는 ‘우리에게’라기보다는 ‘우리를’이 어울립니다.‘우리를 향하신’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찬송가 중에 ‘앞길의 장애를 두려말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라는 말은 ‘두려워’라는 말을 잘못 쓴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말아라’는 ‘두려워하지 말아라’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사도신경 중 “그의 외아들”은 ‘그분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중합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에서 ‘이는’도 ‘그분은’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성령’은 ‘성령님’으로,‘죽으시고’는 ‘돌아가시고’라고 고쳐 써야 합니다.

 

○…사도신경 중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는 누가 누구에 의해 잉태를 하였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고치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사도신경 중 ‘동정녀 마리아에게’와 ‘빌라도에게’는 조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나 ‘동정녀 마리아로부터’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는 ‘본디오 빌라도로부터’나 ‘빌라도에 의해서’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도신경 중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부분은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능동태인 ‘장사한 지’는 수동태인 ‘장사되신 지’로 바뀌어야 합니다. ‘죽은 자’도 ‘죽은 사람’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 중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저리’가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저리로서’는 틀린 번역이므로 ‘거기로부터(from thence)’로 고쳐야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의 끝부분인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는 문맥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공회를 믿고 성도간의 교통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신명기에는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23:1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음식을 베푼다”고는 해도 “변소를 베푼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변소를 마련하고”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민수기에는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25:11)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질투심으로 질투한다’는 표현도 어색하지만 전체 문맥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한 일을 보아서 내가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

 

○…역대상에는 여두둔의 여섯 아들 이름이 나옵니다.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25:3) 그런데 아무리 세어봐도 다섯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370장에는 “낮에는 골몰하나”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골몰하다’는 ‘연구에 골몰하다’처럼 한 가지 일만 깊이 생각하며 거기에 파묻히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 여기에 ‘골몰하나’라는 표현은 ‘부지런히 일하나’처럼 고쳐 써야 합니다.

 

○…사무엘하에는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2:14)는 표현이 나옵니다. ‘소년들로 일어나서’는 ‘소년들을 일어나게 해서’나 ‘소년들이 일어나서’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난하게 하자’는 ‘겨루게 하자’라고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마 25: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작다’의 반대되는 말은 ‘많다’가 아니라 ‘크다’입니다. 그러니 ‘많은 것’보다는 ‘큰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흔히 ‘주님의 성령’이라는 표현을 듣게 됩니다. 성부님 성자님 성령님은 동격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성령’은 해석 여하에 따라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또는 ‘성령님’,또는 ‘주님 성령님’이라고 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방송 설교를 듣다 보면 우리말의 발음을 틀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를 ‘처채’로,‘육이오’를 ‘융니오’로,‘효과’를 ‘효꽈’로 발음하는 수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발음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과 사회의 언어문화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설교문안과 함께 정확한 발음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혈통이 다른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우리는 ‘혼혈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혼혈아’가 아니라 ‘혼혈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혈아’나 ‘혼혈인’이라는 말에는 당사자를 낮잡아보려는 뜻이 숨어 있으므로 가급적 이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에는 박사학위를 받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개 목사님 박사학위 수여’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수여’(授與?)는 학위나 상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개 목사님 박사학위 수여’라는 표현은 ‘아무개 목사가 박사학위를 줬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렵고 헷갈리는 말보다 쉽고 정확한 말을 쓰면 좋겠습니다. ‘아무개 목사,박사학위 받아’라고 하면 됩니다.

 

○…“하나님,우리 제단을 축복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단’은 ‘교회’라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또 ‘우리’는 ‘저희’로 ‘축복’은 ‘복을 내려주소서’로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하나님,저희 교회에 복을 내려주소서.”

 

○…요즘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모르게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탈북자’라는 호칭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 자유이주민’으로 부르기로 했답니다. 이미 ‘탈북자’라는 말이 익숙해졌지만 당사자들이 원하는 대로 ‘북한자유이주민’ 또는 ‘자유이주민’으로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사장님!’하고 부르면 여러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고 합니다. 이젠 사장이란 호칭도 여간 흔해진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선생’이란 호칭이 그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집사’가 아닌 젊은 사람들을 쉽게 ‘김 선생님!’‘이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20대 초반 청년에게조차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쓰는 건 어색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아무개 씨’라는 호칭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사 선생님’이라는 말은 뜻이 중복되니 ‘교사’든 ‘선생님’이든 하나만 써야겠지요. 

 

○…“찬양대의 찬양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인도자가 무심코 하는 말입니다. 찬양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면서도 회중들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찬양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며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찬양대가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보통 장례를 마친 후에 초우(初虞),재우(再虞),삼우(三虞)라고 하여 세 번 제사를 지냅니다.  이 중 장사 지낸지 3일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걸 ‘삼우제’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그걸 따라서 ‘삼우제’라고 하는 건 잘못입니다. ‘삼우제’는 다른 종교의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삼우제(三虞祭)’ 대신 ‘첫 성묘(省墓)’라고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소천(召天)하셨습니다.”

교회 내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입니다. ‘소명(召命)’이란 말의 구조가 이와 비슷합니다. 이 경우 “나는 소명받았다”고 하지,“나는 소명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천했다”는 표현은 “소천을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말보다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를 살펴보면 도무지 어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창검이 겁 없네’는 ‘창검에도 겁 없네’고 해야 합니다. 사람도 아닌 창검이 겁을 먹을 리가 없습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는 ‘나의 귀를 막지 마소서’가 옳습니다. ‘황무지가 꽃 피니’는 ‘황무지에 꽃 피니’가 맞습니다.황무지가 어떻게 꽃을 피우겠습니까? ‘보혈의 피’는 그냥 ‘보혈’이 맞습니다. 보배로운 피가 곧 보혈이니까요. 

 

 

 

 

 

 



 




 



 


 


 




 

 

 

 

 

 

 

 

토마스•알렌•언더우드•아펜젤러보다 앞서 …

세계에 한글 위대성 알린 인물

고대도에서 주기도문 번역 및 감자, 포도주 재배부터

의료활동까지 펼쳐

 

오늘은 귀츨라프 목사가  충청도 고대도 도착(1832년 7월 25일)한 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최초 선교사가 독일 사람인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독일 루터교 목사인 귀츨라프는 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에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보다 53년이나 앞서 1832년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한 인물이다.

 

최초 주기도문 번역 및 감자 파종

 

귀츨라프는 한글로 주기도문 번역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사실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 이는 단편적이지만 한글 성경 번역의 효시라 불릴 만한 일로 여겨진다.

 

또한 귀츨라프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이나 한문 전도 서적을 나누어 주었으며, 순조 대왕에게는 로버트 모리슨과 밀른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진상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조선이 한자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만의 문자인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배워서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을 소개하여 세계에 알렸다. 그의 영문 소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은 영어권은 물론 독일어로 일부 번역되어 독일어권에 소개되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먹을 거리가 제대로 없어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실제로 조선인들의 눈앞에서 보여 주었고, 글로 써 남겨 주었다(1832년 7월 30일). 또한 야생 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1832년 7월 31일).

 

 

 

 

 

귀츨라프는 충청도 기착지인 고대도 도착(1832년 7월 25일) 이후 줄곧 환자들을 위해 약을 처방했다. 한 예로 60명의 노인 감기환자를 위한 충분한 약도 처방(1832년 8월 2일)했는데 이 기록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 의술을 베푼 기록이다.

 

귀츨라프 선교사 일행은 1832년 7월 17일 장산(장산곶)에 도착한 후 22일 녹도(록도) 근처 불모도(불모도)를 거쳐 25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소재한 고대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홍주 목사 이민회 등의 관리들을 만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국왕에게 정식으로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한문 성경을 비롯한 26종의 책자와 망원경을 비롯한 많은 선물을 순조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그리고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고대도에 20일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귀츨라프 전시관을 들러보는 방문객들

 

 

 

체계적인 동북아 선교전략 구상

 

귀츨라프는 이후 제주도 일대를 둘러본 후, 조선, 중국, 만주, 일본을 잇는 선교기지로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선교기지인 제주도를 통해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 여러 나라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첫 번째 시작”을 언급하면서 동북아 선교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처음으로 구상했다.

 

특히 고대도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독일인 칼 귀츨라프가 뱃길을 따라 외연도-녹도-불모도-고대도 순으로 항해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귀츨라프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고대도를 기점으로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활동을 벌인 곳으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이다.

독일인 최초 선교사이기도 한 칼 귀츨라프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자신이 믿는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신념의 선교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이러한 귀츨라프의 선교 역사적, 문화적 업적을 볼 때 궁극적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원년의 역사 기록을 기존의 1884년/1885년 설에서 1832년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란 지적이다.

 

칼 귀츨라프 선교를 기념하기 위해 은광교회에서 창립된 ‘칼 귀츨라프학회’(회장:오현기 교수)는 독일 경건주의 배경 아래 귀츨라프가 한국과 해외에서 행한 선교사역에 대한 심도 있는 선교 역사적 연구를 진행하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문화의 중계자이기도 한 귀츨라프는 서양 문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세계화의 선구자인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세계에 알리는 한류의 전도사였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와 그 뒤를 이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한국을 이해하는데 큰 길잡이가 되었다.

 

동안 아쉽게도 귀츨라프에 대한 명성은 그의 탁월한 업적과 사역에 비해 가려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회는 귀츨라프의 선교 정신과 선교 신학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를 포괄•통섭함에 있어서 귀츨라프의 기독교적 탐구정신을 본받고자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국 저명 교수들과 외국 저명 학술단체들과 함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이미 형성하여 공동연구를 진행키로 했으며, 이들이 편집자로 참여하며 ‘신학과 세계관’이라는 학회지를 발간했다.

 

 

 

 

 

귀츨라프의 생애

 

칼 귀츨라프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Prytz)라는 작은 마을의 마구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국적은 독일이지만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네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살에 스테틴시에 있는 허리띠 제조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개혁파 목사의 아들 하이덴라이히(Heidenreich)를 만나 목사가 되려는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1820년 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 있었다. 프러시아 왕 프리데릭 빌헬름 3세가 스테틴 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귀츨라프와 하이덴라이히는 공동 작성한 장문의 시를 광장 중앙 환영 행사장에서 왕에게 전해 드린 것이다.

 

이 행동은 굉장한 결례이지만, 그 시를 읽은 왕은 그들의 경건함과 애국심에 감격하여 두 청년을 불러 칭찬하고 친히 각의를 열어 청년들의 소청을 들어주도록 결의했다.

 

귀츨라프는 과학을 공부하여 해외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 선교학교의 왕립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 루터교 학교에서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렬로 6개 국어를 습득했다고 한다.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아 말래카를 거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도착한 해는 1927년 1월 6일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이다.

 

그는 조선에 자신의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1851년 8월 9일 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 홍콩공원묘지의 개신교 구역에 안장됐다.

 

 

 

 

 

 

고대도는 귀츨라프가 그 땅을 밟은 지 18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예장 합신총회(총회장:이주형 목사)에서는 고대도교회(담임:박원열 목사)를 귀츨라프 기념교회로 선포하고, 한국 최초 선교 기념교회(고대도) 건립 추진위를 발족, 전국의 교회들이 약 4억을 헌금하여 기념 예배당을 건립하고 헌당예배(2005년)를 드렸다. 현재 기념교회 2층에는 귀츨라프 기념실이 마련되어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귀츨라프는 한국에 짧은 기간밖에 머무르지 못했고 또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지 못했을지라도 최초의 한국 선교사답게 한국 선교의 길을 닦아놓았다.

성과의 유무를 떠나서 귀츨라프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고대도 역시 한국 최초의 선교지로 큰 의의가 있다.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며 구원의 진리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가 알아야 할 네 가지 진리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에 대해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창조(創造)하셨다(창 1:1). 천지를 창조하지 않은 신(神)은 다 헛되고 거짓이다(시 96:5; 렘 10:10-11).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전지(全知) 전능(全能)하시며 또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진실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돌보시며 다스리시는 섭리자(攝理者)이시다.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는 특히 사람들의 선행들과 악행들을 공의롭게 심판하신다(시 93:1; 7:11; 계 20:11-15).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당할 모든 사람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은혜로 택하시고 구원하시기를 뜻하셨고(엡 1:4-5) 또 실제로 구원하신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참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사람에 대해

 

둘째로, 우리는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람은, 진화론이 추측하는 대로, 원숭이가 진화하여 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형상을 따라’ 존귀하게 창조하신 피조물이다(창 1:26-28).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의 핵심은 지식과 도덕성이다(골 3:10; 엡 4:22-24).

 

그런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였고(창 2:16-17; 3장), 이 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 되었다(롬 3:23; 5:15-19). 또한 실제적으로도 모든 사람 속에는 도덕적으로 매우 악하고 부패된 성질들이 많이 있다(렘 17:9).

 

또 중요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악한 생각과 습관과 행위들 때문에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와 지옥 불의 형벌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롬 1:18; 계 21:8). 인간의 죄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영원한 지옥의 심판으로 나타난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본래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창조하셨으나, 범죄한 이후 실로 악하고 추하고 허무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셋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한 유대인 청년이셨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실 뿐만 아니라, 실상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진 참 하나님이시다(믹 5:2; 마 16:16). 그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약 3년 동안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그 기적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하셨다. 이 증거들은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의 책들에 잘 기록되어 있다(요 20:30-31).

 

그는 범죄한 일이 없으셨으나 유대의 지도자들의 미움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무덤에 묻히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동안 자신을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나타내셨다(행 1:1-3). 그는 자신이 죄인들을 대속(代贖)한 구주임을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확증하셨다(마 20:28; 행 2:36).

 

예수님, 그는 과연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시다(행 4:12; 딤전 2:5).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에 대해

 

넷째로, 우리는 구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하신다(행 17:30).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자신이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돌이키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행 13:38-39).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장차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다(빌 3:21; 계 21:1-7).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만 짓고 살다가 죽고 만다면 참으로 허무하고 불쌍하며 또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면 심히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귀하고 큰 복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앞에 이 귀한 소식을 선포하셨다.

 

이 귀하고 놀라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이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 안에 굳게 서야 한다.

또 아직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인천의 송도고등학교 교정에는 군복 차림의 젊은이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의 동상이다.

 

해마다 6월 29일이 되면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이 교정에서 거행된다. 금년 추모식에는 제2연평해전 당시 다섯 살배기였던 고1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윤 소령의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해군 주니어 ROTC'를 창단했다.

 

영국 사람들은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이 나폴레옹의 대군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웰링턴 장군의 모교인 이튼스쿨의 교육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주변 열강들의 위협 속에서도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집어삼킬 수는 있어도 결코 소화시킬 수는 없다'는 유대인의 강인함도 꼽을 수 있겠지만 가정마다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전사자를 가문의 명예로 여기는 나라 사랑 교육을 빼놓고는 온전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고등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3년간 군복무를 한다. 여학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2년간 군복무를 해야 한다.

대학 공부는 군복무를 마친 후 시작한다. 나라가 쇠하면 개인의 출세와 행복도 멀어지기에 국가안보를 지식교육에 선행하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도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의 영토와 영해와 영공이 북한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인데도 우리네 교육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가르치는 일에 너무 소홀하다.

 

국방예산 37조원을 훨씬 넘는 55조원의 교육예산에도 우리네 학교 교육은 학생 개인의 출세를 위한 대학입시와 남보다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취업 준비에 치우쳐 있다.

 

반면 학생들에게 올바른 국가관을 심어주고, 우리가 지켜야 할 국토의 소중함과 나라 사랑을 교육하는 투자에는 너무 인색하다.

 

 "한국은 교육에 모든 걸 바치고도 아무것도 못 건지는 딱한 민족"이란 말은 오래 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서울지국장이 한국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교생 상당수가....

6·25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헷갈려 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젠틀맨'으로,

3·1절을 '삼점일절'로 알고 있으며,

상당수 대학생도 개천절과 현충일의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교육예산 55조를 넘게 쓰는 나라의 실상이다.

안타깝다....  

 

 

 

 

 

 

 

 

 

 

 

 

 


 

정몽준(64)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 21일 국제축구연맹(FIFA) 차기 회장 출마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FIFA 회장 선거 출마를 생각하고 있다"면서 "FIFA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현재 FIFA가 내놓은 개혁안은 모순된다"며 "개혁의 대상인 제프 블래터 회장이 내년 2월말까지 선거관리를 하며 개혁안을 만들겠다는 것은 정신을 아직 못 차린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세계축구의 중심이 유럽이다 보니 아시아 사람이 FIFA 회장을 할 수 있냐는 시각이 있다"면서 "FIFA회장은 유럽이 한다는 생각 때문에 FIFA가 부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FIFA는 전날 스위스 취리히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내년 2월 26일 차기 회장을 뽑는 특별 총회를 열기로 했다.

 

 

한편 FIFA 차기 회장 후보군은 다음과 같다.

 

청렴’ 정몽준 -

‘노련’ 플라티니 -

‘40代’  알리…3파전 양상 이다....

 

정몽준, 깨끗한 이미지 강점

플라티니, 유럽서 전폭적 지지

알리, 지난 선거때 73표 선전

 

阿·亞대륙 표심 얻는게 관건일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세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2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집행위원회를 통해 차기 회장 선거일을 2016년 2월 26일로 확정, 발표하면서 차기 회장 후보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의 ABC와 ESPN, 영국의 BBC 등 해외 언론들은 정몽준 FIFA 명예부회장,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 알리 빈 알후세인 요르단 왕자 등을 유력 후보로 거론하고 있다.

 

플라티니 UEFA 회장은 출마 여부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다만 페드로 핀투 UEFA 미디어담당관은 “(플라티니 회장에게) 차기 회장에 출마하라는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며 “이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라고 여운을 남겼다.

 

40세로 후보군 중 가장 어린 알리 왕자는 지난 5월 30일 회장 선거에서 블라터 회장에 맞서 출마했지만 전체 회원국 209개 중 73표를 획득하며 고배를 마셨다.

 

이밖에도 셰이크 아흐마드 알파하드 알사바(쿠웨이트) FIFA 집행위원, 브라질의 축구스타 코임브라 지쿠, 아르헨티나의 월드스타 디에고 마라도나 등도 ‘자천타천’으로 후보군에 포함됐다.

 

후보군은 당분간은 관망할 전망이다. 블라터 회장이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고, 또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는 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2018 월드컵 예선 조 추첨 행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9개 FIFA 회원국이 모이기에 차기 회장과 관련된 국제축구계의 ‘여론’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영국의 텔레그래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2018 월드컵 예선 조 추첨 행사 이후 (플라티니 회장 등이) 출마를 선언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차기 회장 선거는 209개 회원국의 투표로 이뤄진다.

아프리카연맹이 54표로 가장 많고, 유럽 53표, 아시아 46표, 북중미카리브해 35표, 오세아니아 11표, 남미가 10표를 행사한다.  

 

 

 

 

 

 

 

 

 

 

 



 

 


 


 

 

 

 

 

 


 

 

 

 

 

22일 미국 퀴니피액대학의 여론조사(7월9∼20일) 결과에 따르면...

아이오와(응답자 1천236명),

콜로라도(1천231명),

버지니아(1천209명) 주의 후보별 가상대결에서

클린턴 전 장관은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 등 3명에게 모두 뒤졌다.

 

 

 

 

 




 

 



 

 


 

 

 

 

 

 

 

 

 

 

 

 

 

 

 

 

 

 

 

 

 

 

 

 

 

 

 

 

 

 

 

 

 

 

 

 

 

 

 

 

 



 


 

 

 

 



 




 





 









 

 

 

 

 

 

 

 

 

 

 

"현대의 의료는 '나이'를 아예 무시한다.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기준치에 '나이'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20대이든 80대이든 130이면 누구나 고혈압으로 진단한다.

 

세상에 이런 엉터리 의료가 어디 있는가.

혈압은 극단적으로 낮춘 현재의 기준치보다 옛날의 '나이+90'으로 계산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이는 오랜 세월 환자를 진찰해온 의사의 실질적 판단에 의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또 실제 생활과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혈압이 180이어도 괜찮아' 중에서)

 

 

'고혈압은 병이 아니다'는 현직 의사가 고혈압에 관한 기존의 상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고혈압 치유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책이 나왔다.

40여 년 동안 10만 명을 진찰한 경험과 다양한 연구 자료를 통해 '고혈압은 질병이 아니라 제약회사의 이익 때문에 만들어진 허구의 병'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고혈압증'이란 말에는 '증'이 붙는데도 '증상'이 없다. 즉 아프다거나 괴로운 증상이 없다는 얘기다. 딱 잘라 말하면 고혈압은 병이 아니다. 약간 신경 쓰이는 정도의 혈압이 큰 병을 일으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고혈압이 국민병이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고혈압 환자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일본에서 환자 수는 대략 5500만 명에 달한다.

 

"제약회사와 어용학자가 모두 한통속이 되어 '혈압이 높으면 뇌졸중이나 심장병을 일으키기 쉽다. 방치하면 큰일 난다'는 캠페인을 벌이며 '고혈압 위험론'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고혈압증'이야말로 제약회사의 이익 때문에 만들어진 허구의 병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혈압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가령현상이지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은 혈압 치료를 위해 비싼 치료비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이 스스로 혈압을 높이는 것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다.

혈압이 180이어도 괜찮다.

오히려 약으로 혈압을 떨어뜨리는 것은

목숨을 앗아가는 것과 같은 행위다.

뇌경색은 혈압약을 처방한 의사가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혈압약을 먹으면 암이나 치매에 걸릴 수 있다'며 혈압약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혈압약을 끊으면 몸이 더 좋아진다'는 저자의 고혈압 대처법은 아주 간단하다.

 

"내버려두라. 이게 전부다.

가정용 혈압 측정기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당장 내다 버려라.

그런 측정기는 마음을 어둡게 하고 질병으로 이끌 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의사나 제약회사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고 강조한다.

 

그리고 혈압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혈압은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좋다. 아니, 오히려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혈압에 신경 쓰는 행위 자체가 스트레스이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되레 많은 병을 불러일으킨다."

 

지난해 6월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는 고혈압 치료제 ‘발사르탄’(제품명 디오반) 임상시험 자료를 조작한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전직 직원을 체포했다.

 

피의자는 그럴듯한 직책으로 교토부립의대 임상 연구팀에 섞여 든 뒤 약 효능을 드러내기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조작했다. 의대 교수는 이 자료를 토대로 2009년 ‘디오반이 다른 고혈압 치료약보다 뇌졸중과 협심증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논문 부정 논란이 불거진 2013년 말 사임했다.

 

디오반은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판매되는 ‘블록버스터’ 혈압강하제다. 2012년 일본 내 판매액만 1조800억 원에 이른다. 72세 의사인 저자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디오반을 복용하는 환자가 저렴한 약을 먹는 환자보다 20배 이상 높은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 그리고 까닭을 밝힌 연구 발표 없이도 고혈압 판별 기준치가 8년 새 180mmHg에서 130mmHg로 50mmHg나 낮춰졌다는 것이다.

 

“고혈압은 전혀 걱정할 게 못 된다. 그냥 둬라.”

 

약간 신경 쓰이는 정도의 혈압이 큰 병을 일으킬 위험은 제로에 가까우며, 수축기 혈압이 200을 넘는 심한 경우가 아니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

 

70대 이상 고령자의 혈압은 나이 들어 딱딱해진 혈관에 피를 돌게 하기 위해 자연히 올라간다는 설명이다.

 

“제약회사, 어용학자, 행정기관이 한통속이 돼 ‘고혈압 위험론’을 퍼뜨렸다. 아픈 증상이 없는데도 병에 걸린 것이라며 약을 먹게 한다.

 

고혈압증은 제약회사가 만든 허구의 병이다. 스포츠센터에 놓인 혈압측정기에 재미 삼아서라도 팔을 넣지 마라.”

 

이 책을 소개하는 필자 자신은 너무 단정적인 제언만 이어진다 싶어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지은이는 감기 환자에게 절대 약을 주지 않는다. “약을 많이 처방해 그 중 하나라도 작용할 것을 기대하는 의사가 너무 많다. 감기에는 휴식이 최선이다.”

 

이웃나라 일일 뿐일까.

“항생제는 감기 환자에게 백해무익하다. 혈압에 신경 쓰는 행위 자체가 혈압을 높이는 스트레스”라고 조언하는 의사를 만나본 기억이 있는가. 의사를 찾아가면 팔부터 걷어 제치고 압부터 재는데 말이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리라.

 

마쓰모토 미쓰마사(松本光正) 일본 간토 의료클리닉 원장 지음, 서승철 옮김, 216쪽, 1만2000원, 에디터  

 

 

 

 


 



 


 





 

 

 



 

 


 

++++

황복심 5000명 발송비

F. Chang

C.Kim

++++

 

 

 





 











 

  아침반 9:30 저녁반7:30

목회자반

급반 개강 8월10

초급반

블로그반

Forever반(9년째 계속)

 

급반 개강 8월6일

 

중급반

 

무비메이커반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01

01

 

03

 

04

08

08

05

10

07

11

15

15

12

17

14

18

22

22

19

24

21

25

 

29

26

31

28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05

         

12

         

1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