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사는 거지다>는 지난 5월에 출판한 나의 선교 에세이집의
제목이다.
제목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강렬했다. 아주 단순 명료하며 강렬하고 인상적이며
충격적이라는 평들도 있었지만 선교사를 싸잡아서 폄하하고 모독한다는 질타도 받았다.
어느 장로님은 책을 구입하시면서 내 면전에서 “선교사가 부자지 왜 거지야. 우리
교회들이 선교사 후원을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데 그것도 몰라.”하면서 아주 못마땅해 하셨다. 어떤 사모님도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일하는 귀한 종인 자신을 거지라고 말하는 제목을 본 순간 마음이 불편해지고 가슴이
아팠다고 하셨다. 어떤 분들은 전화로 선교사가 거지인 이유를 묻기도 하였다.
선교사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자세

희망 어린이 집 아동들
선교사는 사실로 거지고, 거지이고 거지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고 십 여 년의 선교사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진 것이다.
2004년 유월 중순경에 이중표 목사님을 만나 뵈었다. 목사님께서 나에게 말문을
여셨다.
“선교사가 무엇이냐?”
나는 망설임이 대답하였다.
“거지입니다.”
그리고는 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침묵이 흘렀다. 목사님께서
조용히 한마디 하셨다.
“나도 거지다.”
목사님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괴었다. 그리고 그 분은 세 시간 정도의 긴 시간을
말없이 거지 선교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다. 이 만남으로 이중표 목사님은 ‘비전아시아미션’의 창립자가
되셨다.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선교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일꾼이다.
또한 목회자이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의존된 존재다. 그러나 교회가 선교를 위임받은 기관으로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고, 선교단체들이 선교사를 모집하여 파송하고 있기에 교회는 선교사 후원에 대하여 자유롭다.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믿음 선교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재정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져주지 않는다. 결국 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은 자기 스스로 생활비와 사역비를 책임지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슈퍼스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감과 열정으로 자원하여 선교사가 되었으므로
자기가 자기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선교사의 현실이다.
교단과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들도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거지반 모금을 위해 고투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교단과 교회의 공동 책임과 후원의 길은
개교회주의의 흐름으로 인하여 요원하다.

교회건축 후원 1호인 뽀남 빨리교회
선교사가 거지인 것은 그들의 의식주가 철저하게 모금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우들의 후원과 헌금으로 사는 삶이기에 항상 절제하며 삼간다. 은혜로울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경이롭기
그지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구속감과 부담감과 굴레가 되어 초라함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교우들의 후원은 언제나 신실하며 기도와 애정이 담겨 있지만 자신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싶거나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세워지는 새로운 계획과 방향에 따라 그리고 누가 담임 목회자가 되느냐에 따라 후원을
계속할 수도 있고 중단 할 수도 있다.
노회는 그 존재위 속성상 정치적인 필요성과 명목이 좋으면 후원을 할 수도 있고
그럴만한 가치가 없으면 무관심하다. 대부분의 노회원들은 국내 목회자도 힘겨운 상황에서 외국에 나간 목회자까지
돌보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생활비와 사역비 때문에 가끔 ‘거지’의 기분을 맛본다.
말이 선교사지 ‘선교사 거지’다. 쉼 없이 먹이를 구걸해야 하고 달릿과
달릿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구걸해야 하는 ‘선교사 거지’다.
‘선교사 거지’라고 선교사를 결코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와 만나고 교회를
방문할 때 ‘선교사 거지’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나의 피해의식이 아니고 선교와 선교사를 대하는
교회의 인식, 자세와 태도에서 기인된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전대에 금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므로 성이나 촌에 들어가서 영접하는 자를
찾아서 거기 머무르라고 분부하셨다. 전도여행기간 의식주에 신경 쓰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파송사의
일부분이다.
교회나 선교단체들이 선교사를 보내면서 왕왕 이 말씀으로 선교사를 격려한다. 나
또한 이 말씀으로 격려를 받았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니까 생계 따위에 매이지 말고 사역을 잘 감당하라는
메시지다. 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 그러나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여기서 제자들은 국내에서 단기간 전도여행을 떠난다. 동일 문화권에서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금은동이 없어도 지팡이가 없고 여분의 옷이 없어도 문제가 없다. 배고프고 목마르면 동족에게
호소하면 되고 정 잠자리가 어려우면 풍찬노숙으로 며칠을 버티면 전도여행은 곧 끝이 난다. 제자들은 여행을
위해서 집을 전세로 구하거나 비자를 발급받거나 자녀들의 학교를 옮길 일이 없다. 새 언어를 배우고 문화
적응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다.
국내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단순한 상황을 일가족을 거느리고 외국으로
떠나는 선교사에게 격려사로 주는 것은 너무 구태의연하다. 이 말씀을 선교사에게 주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철저하게 호의를 베푸는 자에게 의존하라는 말인데 그 말은 뒤집으면 철저하게 모금하라는 말과도 통한다.
자칭 타칭 ‘선교사 거지’ 는 하늘의 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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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희 선교사와 현지인들 |
나의 구걸로 나도 살고 타인도 먹인다. 어떻게 구걸을 했든지 간에 구걸할 능력도
의지조차도 없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나의 구걸에 의존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존심 상해하고 슬퍼할 시간이
없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러나 모금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열등감과 수치심이 동반되므로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모금자임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모금하는가?
왜 모금하는가?
질문으로 나를 무장시키면 계획과 노력을 넘어서는 열매들을 거두어도 감사하고
때로는 수확이 전혀 없는 열매 없는 열매를 거두어도 감사하게 된다.
선교사가 거지인 까닭은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보호를 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교우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교회 소속 목회자들로 하여금 사역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보호해 준다.
그러나 선교사에게는 지붕이 되며 울타리가 되어주는 교우공동체가 없다. 선교회가
있지만 그것은 상징에 불과하다. 후원회가 있지만 교회가 주는 안정감이나 위로, 상호 이해와 협력,
상호의존성을 기대할 수 없다. 선교사는 혼자 모든 것들을 스스로 기획하고 시행하며 결과를 거두며 보고 듣고
만들며 부딪히는 중에 참고 기다리며 해결하며 풀어가야 한다.
나는 모금도 어렵지만 혼자 일하는 것이 싫어서 한국교회 목회자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금이 부담스러워서 자비량 선교를 도모하려고 많은 구상을 하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것도 자비량 선교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뒤로 돌아 갈 수도 없고 피할 길도 없는 상황에서 ‘선교사 거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다리를 꽉
붙잡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주인님, 주인이 종을 부릴 때 살 집도 주고, 일도 주고, 일할 도구도 주고,
그리고 나중에 품삯도 계산해 줍니다. 그런데 주인님, 당신의 종인 저는 왜 집과 사업장과 품삯 걱정을 해야
합니까? 제가 주인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왜 제가 걱정해야 합니까? 왜 공급해 주시지 않습니까? 주인님,
제 품삯 주십시오.”
하나님은 어김없이 약속을 지키신다. 철저하게 책임져주시고 철저하게 의존하게
만드신다. 자신의 자비와 경영으로 재정도 공급하시고 일감도 공급하신다.
하나님의 책임을 믿고 또 믿는 나는 겁 없이 일을 추진한다. 떠오르는 대로
진행시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종의 의무요 사명이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한 종이 아니라 창의적인 종으로 일하기 위해서 내 편리나 애호를
배제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일인가? 내 욕심에서 오는 일인가? 의 판단 기준은 생명이다. 생명을 보듬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을 나에게 주신 일로 그대로 받는다.
‘선교사 거지’는 세상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다.

처음에는 무엇을 먹고 살까? 어떻게 살까? 잊혀진 존재가 되면 어떡하나? 후원이
다 끊기면 어떡하나? 염려하면서 과거에 집착하고 여기가 아닌 거기에 매달리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과거의 관계, 과거의 이력, 과거의 경험, 과거의 지식에 매여서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며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몸은 이 공간에 있으면서 마음은 옛 자리에 두는 분리를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인생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오늘을 사는 존재인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선교사로서 분리되는 고통, 혼자서 가야하는 고독, 개척해야 하는 고난을 피하고 싶었다.
용감하게 현장을 떠나든지 아니면 살아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모험에 자신을 철저하게 노출시켜야 한다.
과거의 영광, 명예, 화려한 경력 등등의 훈장은 다 떼어버려야 한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처럼 처음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인도 시골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닌가! 달릿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준 생명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 선교를 위한 파트너로 불러 주실 때는 분명
계획이 있으셨다. 도전하며 깨지자. 모험하며 상처받자. 일하며 배우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적응과 사역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되었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담대해지고 자유로워졌다. 무명과 고독에 대한 두려움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은퇴 후에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주님과 관계를 맺고 그 분 안에 사는 일꾼으로 족하다.
“하나님, 여기 종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 관제로 부음이 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나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나를 던진다.
교회를 방문하다 보면 가끔 목회자들이나 교우들로부터 돈을 모으고 호의호식하는
선교사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선교비를 받아서 자녀들을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명목상으로
일하는 선교사, 동남아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선교사, 한국에 자주 입국하는 선교사 등을 화제로
삼는다.
‘선교사 부자’가 있으므로 그런 말이 나왔겠지만 그런 ‘선교사 부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가능하다면 선교사 중에 극소수에게나 가능한 일을 모두에게
적용시켜서 매도하는 것은 선교사를 일꾼으로 거느리고 있는 하나님의 관리와 경영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목회자가 완전한 인간 아니듯이 선교사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위임을 받고 떠났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과거에 한국 목회에 실패자였던, 무식하고 못났던, 가문이
일천하던, 열광주의자든, 보수주의자이든 간에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시고도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고난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눈길이 멈춘
곳,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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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미러클리(만 9세) |
선교사 거지인 것은 선교지 나라에 철저하게 인카네이션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국에서 누렸던 크고 작고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거지의
자리로 내려가서 하나님과 세상 앞에 엎드려야 한다. 습관과 취미와 기호까지도 내려놓고 엎드려야 한다.
거지는 자기 의견과 주장, 자기 영광과 명예, 자기 가치와 존재 의미 등등을
주장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고통스런 삶을 묵묵히 산다.
사람들이 베풀어 주는 호의로 입에 풀칠을 하면서 자신의 초라함과 무기력과
쓸모없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거지는 작은 자, 낮은 자, 겸손한 자의 상징이 된다.
선교사 거지는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마구간으로 인카네이션 하셨듯이
선교지에서 거지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 자의 자세로 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시도록 드려야
한다. 선교사가 엎드려서 기다리며 쓰임받기를 사모할 때 복음을 프로젝트로 대치하고 선교를 인기사업으로
기획하는 허세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는 제국주의 선교, 돈 선교, 문화 파괴로서의 선교는
선교사가 선교현장에 인카네이션 하지 못해서 오는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노동의 결과물로 살지 않고 사람들의 호의로 살며, 직접 보호해주는
교우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과부나 고아처럼 하나님의 직접 관할과 보호 아래 있으며 선교지에서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거지의 자리로 인카네이션 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선교사는 거지고 거지이며 거지여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거지!
사람의 호의와 자비와 의존된 거지!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자신을 내려놓은 거지!
그러므로 선교사 거지는 땅과 하늘의 호의로 사는 고난과 축복을 동시에 받은
종이다.
선교사가 거지면 하나님은 거지의 주인이요, 거지 대장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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