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5,  2016


 

 

 

 

 



 

 

 

 

 

 

 

 

 

 

 
 
 
 

 
 

 

 

 

 

 

 

 

 

 

 

 

 

작년(2015년 5월25일) 이만 때 동성애 퀴어 축제(6월9일) 무산을 위해 60여명의 기도의 용사들이 한국의 벧엘 금식기도원에 모여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얻어 낸 통곡(痛哭)의 기도 시입니다.

문학적 비판을 넘어 이 기도문에 담긴 영적인 간구에 함께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한탄스럽도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백성이

아! 심히 개탄스럽도다

이 땅에 큰 종들이 성경을 버리고

그 마음에서 십자가를 버린 것이...

그 죄에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가.

 

영계(靈界)의 강이 핏물로 바뀌고

그 십자가에 매달려서 구원을 외쳤던 종과 백성들이

그 핏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아우성치는 이 사건을.

그 다리 밑에 버려버리고 닫아버린 성경이

벌려지며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니

아이들이 삼 백여 명이 바다에 빠져서 살려달라 소리쳐도

그 누구 하나 손을 쓸 수 없고 건져 낼 수 없었으니

하늘이 내리는 무서운 벌을 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그 분이 창조하신 이 나라

어찌하여 그 십자가를 버리고

어찌하여 그 분 자체이신 성경을 닫아 버렸단 말이요

 

무엇을 위해서 닫으셨나요

돈을 위해서 인가요

자식을 위해서 인가요

병이 나 병원 가느라 닫으셨나요

맛있는 것 사먹고 외국여행 다니며 회의하느라고 그러셨나요

 

성지순례 가시느라고 그러셨나요

심방 다니시느라고 그러셨나요

돈이 너무 많아 쓸 곳 연구하지 않고

쌓아놓는 방법 연구하느라고 그러셨나요

 

너희가 살아있을 때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돌아보지 아니 하시겠다 하시는 내 아버지!

그 인자하신 분이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사신 우리를 버리실 때는

얼마나 아프시고 얼마나 괴로우시면

우리를 외면하실까요

분명히 만드신 분은 들으시고 보시고 계실 텐데

왜 묵묵부답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병이 들어 다리가 썩고

눈이 보이지 않고 몸에 힘이 빠지고

암이 걸려 암 덩이가 퍼져가니

아버지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을지어다

 

왜 성경은 되었는데 나는 안 통해요

울부짖고 부르짖고 몸부림을 쳐도

 

장례식장에 붙은 영정 사진...

왜 이리 젊노 저 아이의 엄마란 말인가

초등생 같아 보이는 두 아이의 엄마

맙소사 아버지 해도 너무 하셔요

말하면 뭐할까 대답이 없으신 이유가 뭐예요

 

다윗왕은 밧세바의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취한 뒤

금식하며 회개하니

살려는 주겠으나 보응이 따르리라 하시더니

그의 아들 압살롬이 그를 대적하여

건물 꼭대기에 텐트 쳐놓고

백주 대낮에 그 아버지의 첩들을 강간하였는데

얼마나 처참한 보응이었는가

 

우리의 마음에서 십자가를 빼내고

세상 것 생각하고 세상 방법대로하고

성경을 버리고

신학에서 배운 대로 선배에게 배운 대로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그 할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미치고 환장하고 죽겠고 지랄하고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고도 산 세월이 얼마인가

백주 대낮에 동성애자들이 거리에서

못할 일을 하고 안 해야 할 일을 한다니

압살롬은 텐트나 쳐놓고 했다는데

이들은 그냥 드러내 놓고 한다니

아! 하늘이시여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저희들을 용서해주세요

저희 조상들의 죄와

후손들의 죄까지도 용서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시 그 십자가 제 마음에 넣고

밥 먹으러 다니고

목욕탕 다니고

축구 족구 골프 치러 다니고

외국으로 회의 하러 다니고

성지 순례 다녔던 것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

유덕하게 형제를 사랑하며

내 입에서 악한 말을 그치며

오른뺨 때리면 왼뺨열대 때렸던 것

이제는 왼뺨 내놓고

속옷 달라하면 그 사람 겉옷까지 빼었던 것

이제는 겉옷까지 주고

오리 가자 하면 10리를 거꾸로 갔던 것

십 리를 함께 가고 더 가자고 하면 이 십 리 라도 가주고

구하는 자에게 거절치 말라고 했는데

저는 구할까 봐 미리 죽는 소리했는데

이제는 있는 만큼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했는데

꾸어줄 것조차 준비하지 못했던 죄를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겠나이다

 

다시 십자가를 내 가슴에 품겠나이다

 

아버지여!

용서하시고

저희와 이 나라를 돌아보시고 하감하사

병원에 우글거리는 환자들

모두 와서 금식하여 건강하게 살게 해주시고

자식 두고 남편 아내 두고 먼저 가는 저주를

거두어 주셔서 행복한 가정들을 꾸리게 해 주시고

자식들이 정신 잃어

우울증에 정신병에 피부병에 암에

컴퓨터에 마약에 IS까지 가니

그 부모 금식하여

저주의 구덩이에서 자식 건져내게 해주시고

나라가 위기에 있고 아픔이 있을 때는

정치인들에게 손가락질 욕, 별의별 험담하지 않게 하시고

내가 먼저 금식하고 회개하고 용서하여

하늘에 복 내가 받아 나라의 공로자 되게 하시고

 

저희 벧엘 가족처럼 마음과 뜻을 합쳐 금식하고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벧엘의 사랑하는 종들을 보시고

노여움을 거두시고 돌아봐 주셔서

나라에 악법은 통과 되지 않게 하시고

성경의 법으로 모든 법이 통일되게 하시고

청와대부터 모든 유치원 초중고 대 대학원까지

성경을 가르쳐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 되게 하셔서

날마다 이 나라와 저희 때문에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께서 춤추시고 기뻐하셔서

복 비와 복 바람 복 눈만 오게 하시고

자연이 함께 춤춰

복된 나라 성경의 나라

우리 하나님만 섬기는 구원의 나라 대한민국 되게 해주소서

사랑합니다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痛哭

 

통곡하라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내 죄를 속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의 눈물과 내가 그분을 죽였다는 통곡의 눈물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영혼의 건강이 회복된다.  무덤덤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셨다.

 

게다가 제자에게 배신당하시고, 식사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에게 부대끼셨다. 결국에는 갈보리 언덕 위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보배 피를 흘려 주신 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죄 때문이라는 깊은 깨달음으로 눈물을 회복할 때, 우리는 참된 믿음의 회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어떤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과 연결된 눈물은 마음과 육신의 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크다고 빌 프레이 박사는 말한다.

눈물은 만성위염과 심근경색과 동맥경화의 원인이 되는 카테콜라민이라는 나쁜 스트레스 호르몬을 몸 밖으로 배출해낸다고 한다. 많이 울면 뇌와 근육에 산소의 공급이 증가하여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이 만드신 눈물의 기능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어떤 일로 인하여 눈물이 마르도록 장시간 실컷 울고 나면 마음도 후련해지고 평안해진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눈물로 기도하면 영육에 도움이 된다.

 

한 여인이 신앙 상담을 하기 위해 스위팅 박사를 찾아왔다.

“저는 전도 훈련도 열심히 받았고, 성경 암송도 익숙할 정도로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저는 단 한 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이웃집의 한 자매를 전도하려고 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박사님.”

 

스위팅 박사는 부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신의 눈에 사랑의 눈물이 메말라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편 126편 6절을 보면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라고 시편기자는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인은 박사의 대답을 듣고 즉시 집에 돌아가 주님께 사랑이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구했다. 그리고 그 날이 다 저물기 전에 그녀는 이웃의 자매를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3)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창27:34)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같으니이다.(시39:1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56:8)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왕하20: 5-6)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화 있을 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 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힘이 없는 것은 그 눈에 사랑의 눈물이 메말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시편 126편 6절)는 말씀으로 믿음을 재무장해야 하겠다.(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시편 120편 1-7절

1.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 하셨도다

2.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1. 성전에 올라 가는 자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5편(120-134편) 중 첫째 시편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순례자(巡禮者)들이 절기 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가며 부른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세 번, 즉 유월절과 오순절과 새해 첫날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그때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예배하는 마음의 준비를 위해 이 시편들을 노래하며 올라갔습니다.

들은 이 노래를 부를 때 큰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당시 성도들이 얼마나 용감하고 당당한지 모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큰 힘은 분명한 정체성 인식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순례자(巡禮者)란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 습니다. 그러니 겁날 것도 없었고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순례자 의식(意識)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면 영향력 있는 당당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 행 순례자의 삶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낸 것이 바로 성전으로 올라가는 삶입니다. 그처럼 천국을 사모하고 교회를 사모하는 삶은 세상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과 영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2. 기도하는 자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이 시인의 고백은 모든 신실한 성도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성도에게도 환난은 있지만 환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환난으로 인해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사람 붙들고 얘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형편과 사실을 아뢰십시오.

사람마다 환경과 처지와 성품과 태도가 다르듯이 기도제목도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 기도제목이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가, 어떤 사람은 사업이, 어떤 사람은 자녀가 기도제목입니다.

그런 각자의 기도제목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과 교회를 사모하게 되고 겸손해지고 사람답게 되고 성도답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의 역사를 체험하며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3. 정직한 자

 

세상에는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합니다. 그런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2절).

특히 영혼에 치명상을 입히는 이단의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업할 때 거짓말에 속으면 돈만 잃지만 이단의 거짓말에 속으면 영혼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세상살이를 하면서 더러 거짓말을 합니다. 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속이고 사기치는 일에 연유(緣由)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불법적으로 비자금을 만들어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한 것처럼 속입니다. 아니 으스댑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결국 화를 당합니다.

본문 3절에 나오는 속이는 혀에 날카로운 화살이 주어진다는 말은 속이는 말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상대를 향해 나가다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이 그 화살에 맞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속이는 혀에 로뎀나무 숯불이 더해진다는 말은 속이는 혀를 가지면 무서운 불 심판에 처한다는 뜻입니다. 로뎀나무의 뿌리는 불을 붙이면 오랜 열기가 유지되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로뎀나무 숯불은 엄중한 심판이 지속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속지도 말아야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말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남을 속이려고 하면 안 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입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회의에 빠지거나 낙심함으로 정직한 삶에서 후퇴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정직이 세상을 이기는 최상의 무기입니다. 정직은 힘이 있습니다.

 

4. 화평을 도모하는 자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메섹은 노아의 셋째 아들인 야벳의 아들로서(창 10:2) 그 메섹의 후손이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북방지역입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 게달(창 25:13)의 후손이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남방지역입니다.

시인은 환난을 피해 잠깐 두 족속 중에 머물렀었는데 그것이 결코 유익이 아니고 화였다고 말합니다.

 

왜 시인은 두 민족 중에 거하면서 화를 당했습니까? 그들이 화평을 미워하는 호전적인 민족들로서 시인이 화평을 원하는 말을 해도 그들이 자꾸만 싸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6-7절). 체질화된 싸움은 교만과 욕심의 산물입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인 자신도 화평을 도모할 때 힘이 생깁니다.(언) 

 

 

 

 

 

 

 

 

 

 

 

 

 

 

 

 

 

 

 

 

 

 

 

 

 

 

 

 

안대회 교수가 10여 년 공력으로 빚어낸 결정판 아동 한시 선집

 

― 옛 선비 140인의 어린 날의 시 약 200편

아동 한시, 그 넓은 세계로 초대한다

 

일반 독자들과도 활발히 소통해온 고전문학자 안대회 교수는 특히 정갈하고 유려한 한시 번역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옛 문헌을 읽으면서 눈에 뜨이는 동시들을 모아 두곤 했는데, 그 양이 수백여 편에 이른다.

 

이 책은 그 가운데 우수한 작품들을 골라 옮기고 지은이와 작품에 대한 소개 글을 더한 것이다.

 

김시습, 이이, 이산해, 정약용 등 유명한 선비들부터 조갑동, 윤기 등 천재 시인에 이르기까지, 140인의 어린 날의 시 약 200편 모음은 문학적 가치는 물론 당시 아동들의 세계와 문화를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귀한 역사의 보고(寶庫)이다.

 

성인 작가들과 견줄 만한 작품의 수준과 더불어 소재나 주제의 넓이와 깊이는 ‘동심’이라는 이름에 갇힌 어린이와 어린이 세계에 대한 좁은 인식에 가하는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다.

 

 

동몽시, 아동 한시의 재발견

 

 

천성은 본디 맷돌 사이에서 왔으나

둥글고 빛나서 동산에 뜬 달과 똑같네.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운 진미보다는 못해도

머리 벗겨지고 이 빠진 노인에게는 제일 좋구나.

 

- <두부>, 김시습 5세 (이 책, 268면)

 

노인에게는 천하진미보다 부드러운 두부가 더 좋은 것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 이 시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다섯 살 때 지은 시다.

길을 가는 김시습에게 한 노파가 두부를 주자 그 감사의 표시로 지은 시로, 이 시 등이 널리 퍼져 이후 김시습은 오세(五歲) 신동(神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물론 한자로 쓴 한시(漢詩)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아이들이 쓴 시는 동몽시(童蒙詩)라 하여 어른이 쓰는 일반적인 시와 구별하였다. 아동을 지식이 별로 많지 않다 하여, 동몽(童蒙)이라 불렀으니 동몽시는 요즘의 동시에 해당하는 말이다.

 

조선 시대에는 어릴 때부터 시를 쓰는 것이 교양의 하나였으나 아이들에게는 엄격한 격식을 강요하지 않아 비교적 생각대로 자유롭게 표현하였던바, 김시습의 시처럼 성장한 후의 시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발상을 볼 수 있다.

 

김시습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 백사 이항복, 다산 정약용 등 저명한 학자와 정치가들이 어린 시절에 쓴 한시는 비교적 알려진 편이나, 그 외에도 옛 아동들이 쓴 시는 상당히 많다. 수십 편이 넘는 한시를 써서 아동 시인이라 불릴 만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작품이 남아 있지 않고, 시인의 이름도 잊혀졌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죽은 후에 문집을 남겼지만 어린 시절의 작품은 거의 수록하지 않았다. 성인의 기준으로 유치하다고 평가절하하고, 습작이나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버린 것이다. 이제 안대회 교수의 감식안과 애정 어린 손길로 옮겨져 빛을 보게 된 대부분의 시들은 한 편 한 편이 경탄을 자아내는 빼어난 작품들이자 소중한 유산이다.

 

 

아동 한시가 도달한 깊이와 넓이

 

 

밤도 아닌데

봉우리마다 달이 떴고

봄도 아닌데

나무마다 꽃이 피었네.

 

천지 사이에는

오로지 검은 점 하나!

날 저물어 돌아가는

성 위의 까마귀 한 마리

- <눈>, 정창주 7세 (이 책, 114면)

 

정창주(鄭昌)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그가 일곱 살에 지은 이 시는 아동 한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빼어난 작품으로 모방작이 나올 만큼 유명하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설경 묘사는 어린 시인의 솜씨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첫째 개가 짖고

둘째 개가 짖고

셋째 개가 따라 짖는다.

 

"인기척인가?

범이 나타났을까?

바람 소리인가?"

 

아이가 대답하였다.

"산 달이 촛불 켠 듯 환해요.

뜰에는 오동잎 스치는 소리뿐인걸요. "

- <개가 짖는다>, 이경전 7세 (이 책, 126면)

 

이경전(李慶全)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아들로 천재로 알려졌다. 반복구를 적절히 활용하여 시적 효과를 더해 주는 이 시 또한 아동 한시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참신한 발상과 표현뿐 아니라 성숙한 주제의식을 보이는 작품도 적지 않다.

 

조물주는 용광로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똑같은 금전화

잘도 찍어 냈구나.

 

반푼짜리 동전은

제 잘난 것만 뻐기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줄도 모르네.

- <금전화>, 허봉 9세 (이 책, 178면)

 

허봉()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친형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특히 시에 천재적 재능을 보여 성인 작가들과 견줄 수 있을 작품 수준을 보였다. 이 시도 뛰어난 시 중 하나로 동전 모양으로 생긴 금전화를 보며 가난한 사람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니 이름값도 하지 못한다며 꼬집고 있다. 꽃말에서 빈민구제라는 사회적 의미를 끌어낸 발상이 참신하고 의미가 깊다.

 

생애 첫 번째 시, 의미 있는 발언

 

빠르게는 3세부터 늦게는 13세 나이에 쓴 동시는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뱉은 의미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성장에의 욕구,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 혹은 미래에의 암시가 은연중 들어 있다.

 

전해오는 동시에는 훗날 위인이 될 징조를 보여주었다든가, 장수하거나 요절하거나 하는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사연이 함께 들어 있기도 하다. 아이가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동시를 지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른들이 그런 시를 짓도록 은근히 강요하기도 했다.

 

뭇별들이 다들 진을 치고

밝은 달 혼자만 장군이로군. (이 책 31면)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는 모습을 보고서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을 연상하였고, 별들 사이에 환하게 떠 있는 달을 보고 장군을 떠올린 시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남구만(南九萬)이 다섯 살 때 지은 이 시구를 두고 어른들은 어린 남구만이 별들 사이의 달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무엇보다 이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동의 시에는 거짓이 없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아동의 시에 바라는 것도 우선은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쓰는 것이고, 그런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정조 때의 저명한 학자이자 시인인 이덕무(李德懋)는 진실한 기쁨과 진실한 슬픔만이 진실한 시를 만들어낸다면서 아동이야말로 거짓되지 않은 시를 쓸 수 있다고도 하였다.

 

시 짓기, 영재의 조건?

 

그렇다면 아동이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었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자기 생각과 마음을 편하게 쓴다고는 하지만 일정한 격식을 갖춘 정형시인 데다 한자를 써야 하므로 시를 짓는 데는 당연히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이 아동에게는 자신의 표현력을 뽐내는 수단이자, 어른에게는 아이의 영재성을 가늠해 보는 잣대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훌륭한 동시를 쓴 신동은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꽃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이규보나 김시습, 이이, 허봉, 이산해, 이경전, 남구만, 이헌경, 목만중, 정약용 등 역사상 뛰어난 영재로 인정받은 인물들은 영재다운 능력을 어린 시절 지은 동시를 통해 세상에 널리 보여주었다.

조숙한 영재들의 동시는 독특한 시각과 사유를 담고 있어 대가로 성장할 잠재력을 미리 드러낸 것이다. 그중에는 청년기나 성인기의 작품과 차별화된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것이 많다.

 

한 집안에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가운뎃놈은 양 볼이 납작하네

 

바람이 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지니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일까.

-<세 톨 밤>, 이산해 7세 (이 책, 162면)

 

 

밤 한 송이에 들어 있는 세 톨의 밤알을 한 뱃속에서 난 삼형제로 보고 바람에 순서도 헛갈리게 떨어지는 모습을 출생에 비유한 시다. 바람에 밤알이 툭툭 떨어지는 광경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산해(李山海)가 일곱 살에 쓴 이 작품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작품이란 평을 들을 만하다. 매우 세련된 작품이나 그 내용이나 표현이 성인이 쓸 수 없는 아동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기도 하다.

 

작은 산은 어떻게 큰 산을 가렸을까?

멀고 가까운 거리가 달라서라네. (이 책, 314면)

 

두 구만 남은 이 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일곱 살 때 지은 것이다.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원근법적 인지능력을 보여준다. 일곱 살부터 시를 짓기 시작한 영재로 알려진 정약용은 10살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란 시집까지 만들었다. 신광하(申光河)란 저명한 시인은 정약용이 지은 시를 보고 쓴 “후생가외, 참으로 후생이 두렵구나, 이 늙은이는 더 이상 시를 짓고 싶지 않네.”라는 글을 남겼다.

 

어린이 세계의 무한성

 

뛰어난 작품을 영재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예를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쩌면 오늘 어른들의 기준으로 보면 이 책에 수록된 아동 한시의 지은이는 대부분 영재일 수 있다.

그 근저에는 어른들이 잊어버린 ‘왜 그럴까?’라는 왕성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자리한다. 자연현상과 인간세상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며 시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 어른들이 아동에게 요구하거나 학습시킨 주제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체로 아동 한시에 나타난 정서는 적극적이고 활기차다. 한 주체로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다부진 의지를 드러낸다. 때로는 어른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당돌하고 불손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른들과 경험이 다를 뿐 그들이 접하는 세계에 대해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옛 동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바, ‘동심’이라는 이름에 가두기에는 어린이와 어린이 세계는 무한하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준다.  

 

 

 

 

 

 

 

 

 

 

 

 

 

 

                                    

 

- 편저자 김영언 -

 

 

 

가을 하늘

 

구름낀 하늘이 좋다. 위를 한번 쳐다보라고 신이 건네는 인사. 이불을 추스리고 아내를 가까이 안게 만드는 가을새벽의 냉기가 좋다. 수많은 사람 중에 내 옆에 누울 짝을 주심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사랑하라 마음껏. 가을 하늘 위로 지평선 저편까지 구름이 손짓한다.

 

 

마가의 벗은 몸

 

사랑하는 친구 마가가 예수의 생애를 집대성한 책의 초안을 검토해 달라고 보내왔다. 그리스어로 적힌 다소 투박한 글과 달리 예루살렘의 부잣집 아들 마가는 부드러운 음성에 타고난 성품이 유약하다.

 

그의 어머니집 다락방에서 예수 사후 50일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이 터지고 이적을 행할 때에도 그는 조용히 관찰하는 편이었다. 수완 좋았던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바울의 첫 번째 선교여행을 수행한 마가는 그러나 선교지에서 위협을 느껴 중간에 무단이탈하였고, 바울의 심한 반대로 결국 두번째 선교여행에는 삼촌 바나바를 따라 별도로 움직이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은인 바나바와 크게 다툰 이때 일을 후회하는 말을 내게도 종종 하였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마가의 연약한 심정에는 오죽했으랴. 마가 역시 이 일을 두고 두고 마음에 담아 지내던 중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와 큰 도움을 주었고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되었다.

 

훗날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마가를 데려와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마가를 사랑하였다. 마가는 바울만이 아니라 베드로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베드로의 비서이자 통역자로 노년의 베드로를 동행하면서 수제자가 기억하는 예수의 행적을 가장 잘 알게 되었다.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넘어가면서 예수에 대한 기억들에 혼선이 생겨나고 있다. 직계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오류를 바로 잡을 길이 없어져 간다. 심지어 예수의 고향 가버나움 쪽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파피루스에는 예수가 어린 시절 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살았다는 예수가 살아 생전 한번도 언급하지 않은 이상한 이야기까지 적혀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더 이상 구전에만 의지하지 말고 글로 남겨달라는 요청이 점점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일에 적격인 친구 마가가 책임을 맡았다.

 

예수의 공생애가 이렇게 책으로 엮이는구나 감명깊게 읽던 중 예수가 체포되던 날을 적은 내용에 마가가 남긴 뜻밖의 구절에 잠깐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박장대소를 했다.

 (저자주 - 마가복음 14장 50~52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이 짧은 에피소드 속 벗은 몸으로 도망간 청년이 누구였겠나. 마가 본인이었겠지.

 

이 친구 봐라. 그러니까 자기는 베드로도 도망가는 판에 그래도 끝까지 예수 옆을 지키다 잡힐뻔 했었다는 자랑을 굳이 넣고 싶었구나. 베드로와 바울의 그늘속에 평생을 살았으나 예수의 마지막에 함께 했다는 마가의 자부심과 그 와중에 벗은 몸으로 도망간 그의 유약함이 교차하며 떠올라 자꾸만 미소가 지어진다.

 

야고보의 일갈

 

시리아 남쪽, 이집트 북쪽, 지중해 동쪽 끝에 사는 유별난 민족을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이네들의 유별난 자존심과 똥고집은 로마제국 전체에 꽤나 알려져 있다. 로마 이전 그리스가 또 그 이전엔 메소포타미아가 세상의 중심이던 시절부터 이들은 빛나는 역사를 자부하며 신앙을 지독히 고집하여 왔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저들의 조상은 이집트의 노예 출신이며 이후로도 내내 바빌론국가들의 속국이었고, 이들 역사의 전성기라 할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역시 신의 영광을 크게 빛나게 하였다고 자평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을 신의 선택된 민족이며 그들 외의 모든 민족을 이방인이라 하며 내려다보곤 한다.

 

저들의 기준에 의해 이방인이 되버린 내게 이 유별남은 기독교인이 된 지금에도 종종 거슬린다.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살고간 예수의 때로 독기서린 가르침도 그러하고, 로마인이지만 유대 베냐민지파인 바울에게서도 가끔 이러한 끝모를 자부심을 느끼곤 하였다.

 

바울의 편지들은 이방인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되는 유대인의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곤 하였다. 물론 기독교가 이스라엘밖의 유대인 이민자들 사이에 먼저 크게 번진 탓에 읽는 이가 대체로 유대계여서인걸 모르진 않지만. 할례도 그 중 하나이다. 태어난지 8일이 되면 성기 일부를 잘라내었던 유대의 율법을 적지않은 유대계 기독교인이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에게 요구하였다.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그동안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많은 유대인에게는 문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되었겠지만, 애초에 지킬 율법이라는 게 없었던 이방인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로마인인 내가 기독교에 마음을 두게 된 이유는, 죄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비유로 말한 천국, 그 하나님 나라가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 지도자 야고보가 보여주는 유대인스럽지 않게 융통성있는 처신은 내게 꽤나 신선하게 느껴진다. 할례를 포함한 유대의 율법을 이방인에게도 요구해야 하는가를 두고 사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때, 그가 내린 합리적인 중재로 인해 이방인 선교의 길을 크게 연 것이 아니던가.

 (저자주- 사도행전 15장, 야고보는 예루살렘회의에서 바울과 점점 마음이 열리던 베드로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고집센 유대계의 체면을 살려 중재하면서 지켜야 할 율법의 예로 우상숭배, 음행, 목매어 죽는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만 언급하였다.)

 

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문제는 유대인에게는 매우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 30여년 기독교가 이스라엘 본토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주로 로마제국에 퍼진 유대이민자들 사이에 크게 번지게 된 배경은, 이들이 같은 유대인이더라도 외국에 살면서 열린 시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보니 구원이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교인들과 심지어 교회지도자들 사이에도 종종 방종으로 이어지곤 하였다. 아 이 어쩔수 없는 인간의 죄성이여. 각교회마다 이 자유를 남용하여 권위와 선행을 부지불식간에 부인하며, 거룩함을 요구하던 율법에서는 자유로우면서 쉽게 구원을 기대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사도 야고보가 이를 또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를 열게 한 장본인이라고도 할 그가 노구를 이끌고 교회들을 다니며 반대로 각성을 요구한 것이다. 그가 순교하기 전 남기며 회람을 지시한 편지속에서도 그러하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며 (저자주 – 야고보서 2장15절) 거룩함에서 멀어지는 일부 신자들의 태도를 준엄하게 경고하는 야고보의 일갈. 노사도의 지적에 많은 공감이 있던 차에, 마가를 이어 예수의 생애를 글로 남기는 작업을 하는 동지들 사이에서도 행함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주목하자는 목소리가 많이 들려오고 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이토록 중용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인지. 자유와 율법을 오가며 헤매고 있다.

 

해방노예

 

어찌 잊으랴. 조부로부터 내려오던 내 노예신분이 해방된 그 날을. 그리고 그 일을 생각하면 나는 바울의 선한 배려를 또한 감사하지 않을수 없다.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자신을 돕던 나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건넨 편지가 나를 그리 만든 것이니.

 

(저자주 – 바울이 오네시모 인편에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신약성경 빌레몬서이다. 빌레몬서 1장16~18.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빌레몬은 나의 절도를 묵인하기까지한 예외적으로 선한 주인이었지만, 나는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로마에서의 삶이 좋았다. 골로새와 달리 제국의 수도 로마는 노예들의 지위가 매우 높고 그 숫자도 매우 많다.

수도 로마의 문화적인 역량은 상당부분 그리스출신 노예들의 예술, 의술, 행정능력에 기대어 있다. 재정관리나 자녀교육도 노예들이 주로 담당한다. 특히 로마시내 부자집 노예는 평범한 자유인보다 생활이 나을 정도이니.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예수가 이 세상에 오기 전 70여 년 전 로마제국 전역을 누비며 해방전쟁으로 나라를 쑥대밭을 만든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지라, 당국은 노예의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대도시에서는 특히 겉모습으로는 노예라는 신분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원로원에서 노예들에게 별도의 복장을 입히는 것에 대해 법안이 올라갔다가 부결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오히려 얼마나 노예의 숫자가 많은지를 깨닫게 해서 세력화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노예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누구보다 노예들에게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IN DUBIO PRO REO

 

인 두비오 프로 레오. 예수를 못박아달라는 바리새인들의 고소에 빌라도는 그렇게 답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저들이 대는 증거는 일관되지 않았으니. 범죄여부가 입증되지 않는 피고인 예수를 풀어주라는 로마법의 대명령을 따른 것이니 예수를 죽인 것은 로마법정이 아니다. 빌라도가 필요이상으로 비난받고 있다.

 

빌레몬은 그의 귀한 물건을 훔친 이가 나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심복들이 나를 기소한 법정에서 빌레몬은 증인을 내세워 나를 소아시아의 악명 높은 감옥에 갇히게 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인 두비오 프로 레오. 천부장이 말했고 나는 풀려나 로마로 갔다.

 

바울의 복음전도가 아시아에서 신상을 만들어 팔던 이들의 사업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를 갈던 그들은 예수를 죽였던 똑같은 방식으로 바울을 죽이려 하였다. 바울은 로마시민이었다. 인 두비오 프로 레오. 변호사 더둘로의 고소에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항변했다.

 

가이사에게 상소재판을 받기 위해 바울이 로마에 왔으니, 내 운명을 연결한 이 법률 용어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계속)

 

 

 

 

 

 

 

 

 

 

 

 

 

 

 

 

 

 

 

 

 

 

 

기독교 심리학자인 크레익 엘리슨(Craig W. Ellison)은 외로움에는

정서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실존적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서적인 외로움은 우리의 감정상태에서 오는 것이고,

사회적인 외로움은 이웃과의 교제가 사라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실존적인 외로움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원천적인 것으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순간부터 생겨났는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가장 근원적인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인간은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숙명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다.”  

 

 

 

 

 

 

 

 

 

 

 

 

 

 

 

 

스코필드박사내한100주년기념사업회(의장 정운찬, 이하 기념사업회)가 오는 6월 1일(월)부터 Los Angeles의 윤스페이스(2330 S. Broadway, LA, CA9007)와 우정의 종 각(3601 S Gaffey St., San Pedro, CA 90731)에서 12일간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를 가진다.

 

전시회 외에도 남가주주님의교회(한의준 목사)를 비롯하여 LA새생명비전교회(강준민 목사), 토렌스좋은교회(김바울 목사)에서 토크&콘 서트를 가질 예정이며, 6월 6일에는 기자간담회가 있다.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박사는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1919년 서울의 3.1만세운동 현장과 제암리의 피해현장을 사진으로 담아 전 세계에 알리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하였기에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3.1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다 일제에 의해 암살 위협을 받고 1920년 강제 추방을 당하였으나, 해방 후 1958년 한국을 다시 방문하여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외래교수 로 재직하며 한국에 정착, 1970년 별세하는 순간까지 12년간 고아와 어려운 학생을 돌보고 후학을 양성하는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1970년 별세 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에 안치되었으며,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된 유일한 외국인 독립지사로, 대한민 국 건국에 크게 공헌한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국가적 상징성이 매우 크다.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는 세계적인 수의학자요, 다음세대를 기른 교육자요, 고통당 한 한민족의 벗이요, 불의와 부패에 대항한 호랑이 같은 선각자요, 가난한 자들과 고아 들을 돌본 따뜻한 비둘기 같은 분이었다.

 

LA 특별전시회 특별히 2016년은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에 발을 디딘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스코 필드 박사는 국가보훈처에 의해 2016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는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을 기리고 헌신을 되새기기 위해 스 코필드박사내한100주년기념사업회를 만들어 2월 22일 출범식을 가졌으며 국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특별전시회를 앞두고 기념사업회 정운찬 회장과 에릭 월시 주한 캐나다 대사는 “국내 외 사람들과 함께 한국의 역사와 유산을 생각하고 한국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선교사 들과 외국인들의 헌신을 기리고 미국-캐나다와 한국사이의 우정을 더하기 위해 LA 지 역에서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간 기념사업회는 스코필드 박사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지난 2015년에는 박사의 숨결이 담긴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동상을 제막하고 기념행사를 개최했으며, 4월에는 국립현충원과 서울대학교에서 추모기념식을 가졌으며, 10월에는 수의계 인사 초청 만찬을 진행했다.

 

지난 12월에는 캐나다대사관 에서 기념사업회의 성공적 출범을 기원하기 위한 송년의 밤을 가졌다. 2016년에는 기 념사업회 출범식을 비롯하여,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기념하는 전국 독후감 대회를 가졌고, 세종시와 서울대학교에서 토크콘서트를 진행하였다.

 

2016년 6월 1일 LA 특별전시회를 시작으로 한국에서 3월에 진행한 전국 독후감대 회를 6월부터 9월까지 미주지역의 청소년 및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가질 예정이며, 스 코필드 정신을 이어나갈 다음 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제1기 스코필드장학생(국내 청소 년 대상) 모집이 진행되고 있다.

 

 

 

 

 

 

 

 

 

 

 

 


 

 

 

 


 

 

 

 

 

 

 

 

 

 

 

 

 

 

문득 살펴보니 우리 주변에서 호통치는 사람이 사라졌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호통치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호통치는 일이 많았다. 선배가 후배에게 호통치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가 잘 되라는 훈계요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이 호통치는 소리가 언제인가부터 사라졌다. 비꼬고 빈정대는 말 소리는 들리는데 호통다운 호통소리가 사라졌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호통치지 않는다. 선생님이 제자들을 호통치지 않는다. 모두 잘 하기 때문일가?

 

한걸음 나가서 교회에서도 호통치는 소리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교회에는 그 어느 세상법보다 더 엄한 법이 있다. 그런데 그 법으로 권징(勸懲)하는 호통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호통을 쳤다가는 교인들이 다 나가버린다고 어느 교역자가 말한다. 거저 잘한다 잘한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창시절의 그리운 추억이 있다. 그 때는 학교에 호통치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기준 점수 아래인 학생들을 교단 앞에 엎드리게 한 후 빳다(매질 할 때 사용하는 막대)로 때렸다. 점수가 모자란 만큼 맞았다.

그런데 하루는 내 점수가 기준 점수 아래가 아닌데 나를 불러 엎드려 뻣쳐를 시키며 빳다를 치신다. 억울하고 분했다. 선생님은 빳다를 치면서 중얼거리셨다. 너는 더 좋은 점수를 낼 수있는데 이 점수 밖에 못낸것은 더 나쁘다며 호통을 치셨다. 그 호통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너는 더 잘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으니 더 나쁘다는 호통소리.....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호통 한 번 제대로 친 적도 없고 그저 몸 상할까 마음 상할까 애지중지, 노심초사하면서 키운다. 주변을 둘러보면 가정이든 학교든, 호통, 야단, 불호령을 내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호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호통의 국어사전 정의는 ‘몹시 화가 나서 큰소리로 꾸짖음’이다. 얼핏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지만 사실 호통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호통은 누가 치는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호통칠 수 없다. 가깝고 애끼고 사랑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호통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자식에게 호통을 칠 수 있어야 한다. 호통을 안 듣고 자란 자식은 가지만 무성한 나무처럼 겉만 무성할 뿐 열매를 맺지 못한다. 심리적 맷집이 너무 약한 채로 어른이 되고 만다.

 

상처를 주는 ‘비난’의 언어는 공격형 언어이다.  그러나 호통은 어떤 잘못이나 부족을 ‘깨닫게’하는 데 목적이 있다.

비난하긴 쉬워도 호통 치기가 어려운 이유는 호통을 치려면 상대를 잘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호통을 듣는 대상이 얼마만큼의 심리적 맷집을 가졌는지도 알아야한다.

심리적 맷집이 좋은데 잘못된 길을 가고 있거나 게으름에 빠진 사람에게 호통은 주마가편(走馬加鞭-달리는 말을 채직질하다)의 원리가 해당된다.

 

옛날로 돌아간다.

“만점도 받을 수 있는 놈이 이 따위 점수를 받아?” 호된 매질을 하실 때의 호통소리.

아마 그 때 선생님의 매는 아까워서, 아쉬워서, 안타까워서, 가능성을 게으름 때문에 묻어둔 제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호통을 치신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 나기보다 그저 송구하고 부끄울 뿐이었다. 지금도.

 

문득 문득 ‘정말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인생일까?’ 라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할 상황인데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 아니면 꼭 해야 할 일인데도 게으름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 ‘빳다’를 들고 나타나셔서 호되게 호통을 쳐 줄 그 선생님이 그립다.

 

한편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회개라는 빳다가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장재언) 

 

 

 

 

 

 

 

 

 

 

 

 

 

 

 

 

 

 

 

 

 

 

 

 

 

 

 

전기자동차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이자 억만장자인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어머니인 현역 모델 메이 머스크(maye Musk)가 아들이 선물해준 테슬라 자동차 앞에 서 있다.(아래)

 

 

그는 “테슬라를 타고 있으면 우주선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싱글맘이자 워킹맘인 그의 50세 생일 때 당시 20대였던 일론과 두 동생은 “나중에 진짜 집과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다짐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메트 갈라(Met Gala)’는 해마다 5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기금 마련을 위해 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드카펫 행사다.

 

유명 패션잡지 보그가 주관한다. ‘서부에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다면 동부엔 메트 갈라가 있다’는 말이 있다.

‘패션계의 오스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는 유명인들이 최고 디자이너들의 의상을 선보인다. 레드카펫 행사 뒤 보그는 팬 투표를 실시해 최고의 의상을 선정한다.

 

올해 메트 갈라의 주제는 ‘패션과 기술의 만남’이었다. 이번엔 뜻밖의 인물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전기자동차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이자 민간우주선 개발업체 ‘스페이스 X’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일론 머스크(45)의 어머니로 현역 모델인 메이 머스크(68)가 주인공이다. 뉴욕타임스(NYT)는 ‘68세의 일론 엄마, 새롭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다’란 제목으로 패션 섹션 톱기사로 소개했다.

 

 

 

 

 

일론은 히트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의 실제 모델이고 개인 간 온라인 결제시스템 페이팔(Paypal)의 공동창업자로도 유명하다.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익혀 12세 때 비디오게임용 컴퓨터 코드를 개발한 천재. ‘미래에 투자하는 CEO’로 불리는 일론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과 애정은 뜨겁다.

 

메이는 “‘일론을 소개해 달라’는 전화를 한 달이면 100통 이상 받지만 ‘그건 내 영역이 아니다’고 분명히 거절한다”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의 순자산은 142억 달러(약 16조6000억 원)에 이른다. 아들은 억만장자이지만 어머니 메이는 무대 위에선 화려해 보이지만 무대 뒤에선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 모델 직업을 계속하고 있다. 손자손녀도 10명이나 되는 할머니 메이는 왜 힘든 모델 생활을 50년 넘게 하는 것일까.

 

이달 1일 오전 뉴욕 맨해튼 57번가의 ‘포시즌스호텔’ 로비 커피숍에서 브런치(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그의 인생과 철학에 대해 1시간 반 동안 물어봤다. 예상과 다른 대답, 예측 못한 상황이 이어졌다.

 

 

 

 

 

―15세 때 시작한 모델 일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인데요.

 

 

 

 

메이 머스크는 모델 장수 비결 가운데 하나로 ‘도전과 탐험 정신’을 꼽았다. 20대 때 ‘미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선발대회 최종 본선에 올랐고(왼쪽 사진 왼쪽), 2011년 63세의 나이에 뉴욕매거진 표지를 누드 사진(가운데)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여배우 데미 무어의 임신누드 화보(1991년) 20주년을 기념해 컴퓨터그래픽으로 임신한 것처럼 꾸민 기획 작품이다.

오른쪽 사진은 이달 2일 열린 세계적 레드카펫 행사인 ‘메트 갈라’에서 선보인 한인 디자이너 양유나 ‘유나양 컬렉션’ 대표의 작품을 입은 모습.

 

“나도 내 자신이 놀라워요. 일을 시작할 때 ‘너의 모델 수명은 18세쯤 되면 끝날 거야’라는 얘기를 듣곤 했거든요. 20대 중반에 세 아이를 낳고 28세에 다시 본격적으로 일을 하니까 이미 ‘최고령 모델’이더군요.

 

돌이켜보면 모델을 하면서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어요. ‘예쁘기만 한 모델’이란 얘기를 듣기 싫었어요. 몸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영양학과 식이요법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게 만들었고요.”

 

최근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모델 261명의 평균 연령은 26세에 불과했다. 그만큼 빨리 떴다가 빨리 저문다. 뉴욕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디자이너는 60세, 70세가 많지만 고령 모델은 극히 드물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없으면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메이의 부모, 즉 일론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캐나다 사람인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살았다.

 

메이는 “그 이유가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부모에게서)들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내 핏속에도 흐르고 일론에게도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미모가 남달랐던 메이는 1969년 미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선발대회 최종 결선까지 올랐고 이듬해인 1970년 엔지니어인 에롤 머스크 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10년 만에 파경에 이르고 그 후 메이는 ‘세 아이의 싱글맘이자 워킹맘’이란 힘든 인생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미국 언론들과의 예전 인터뷰를 보면 ‘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I just worked hard to survive)’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 정도로 힘들었나요.

 

“1989년 일론의 공부 때문에 캐나다로 이주했어요. 빈곤층이 사는 임대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아이들은 요즘도 ‘엄마, 우리는 자라면서 가난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짜로 가난했어요. 전 아이 세 명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문제를 늘 고민해야 했죠.”

 

메이는 그 와중에도 모델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영양학 관련 석사 학위를 2개나 받았다. 세 아이도 장학금과 학자금대출로 대학을 마쳤다.

메이는 “캐나다에 살 때 제 직업이 5개였다. 대학 내 리서치센터에 일하면서 모델 일을 하고 모델 양성 강사로도 뛰었다.

영양학 강사도 하면서 식이요법 관련 개인상담사로도 돈을 벌었다”고 회고했다. 스스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스트러글링(struggling·발버둥치는)’과 ‘저글링(juggling·곡예하는)’의 연속이었다고 표현했다.

 

메이는 다른 인터뷰에서 “‘쏟아진 우유 때문에 울지 말라(Don’t cry over spilled milk·‘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의미)’는 격언은 나에겐 맞지 않았다. 아이들이 우유를 쏟으면 눈물이 났다. 그때 다시 우유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내 앞에 앉아 있는 당신은 우아하고 고급스럽습니다. 쏟아진 우유 앞에서 울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데요.

 

 

“….”

대답 대신 “흐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메이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자의 눈시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아, 미안해요. 이런 공식 인터뷰를 하면서 울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가장 힘든 시절이었어요. 아이들과 살아가려면 ‘내가 절대 아파서도 안 된다’고 다짐해야 했던 때였죠.”

 

메이는 스스로 분위기를 밝게 바꿨다. 그는 “집세를 내고 아이들과 세끼 밥을 먹기 위해,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일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린 지금 (최고급) 포시즌스호텔에 앉아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생존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기 위해 일한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기자도 질문의 분위기를 바꿨다.

 

 

―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살 빼고 좋은 몸매 갖기’를 새해 다짐 중 하나로 결심하지만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모델이자 영양학 전문가로서 조언해 주세요.

 

“나도 아이들을 거의 연년생으로 출산하면서 체중이 계속 불어난 적이 있어요. 그리고 초콜릿 같은 당분 많은 음식도 좋아해요. 내가 가장 권하는 방법은 ‘먹은 것과 먹을 것을 기록하는 습관’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어느 정도 먹어야 내 건강에 좋다’는 걸 잘 압니다.

식단 기록은 나 혼자만의 일기 같은 것이고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지만 나를 압박하고 설득하죠. ‘날씬해지겠다는 내가 이런 고열량의 음식을 먹었다니…’하고 반성하게 되고, 다시는 그런 반성이 필요 없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메이는 자신처럼 모델의 길을 오래 걷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건강한 체중을 유지하고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새롭게 가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Be nice to everyone)”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보다 친절하고 착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도 했다.

 

 

― 일론뿐만 아니라 자녀 3명을 모두 훌륭하게 키웠는데 자녀교육 철학이나 원칙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 한 명인 제 아내도 “‘좋은 엄마 되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같다”고 하소연할 때가 있습니다.

 

 

 

 

메이 머스크는 가난과 싸우며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왼쪽부터 테슬라 CEO 일론(장남), 메이, 요식업 CEO이자 벤처캐피털리스트인 킴벌(차남), 영화감독인 토스카(막내딸). 세 자녀는 어머니를 “놀랍고 역동적이고 멋지다”라고 평가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엄마 되기’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지요.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예의 없는 말투나 행동’에 ‘불관용 정책’을 폈습니다. 엄마나 다른 어른에게 인사를 잘 안 하거나, 식사 시간에 바르게 앉지 않거나, 다 먹은 음식 접시를 싱크대에 갖다놓지 않거나 하면 분명하게 지적과 꾸중을 했습니다. 이건 10명의 손자손녀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는 나만의 방침입니다.”

 

일론의 한 살 아래 남동생 킴벌(44)은 식당을 8개나 소유한 요식업 최고경영자(CEO)이자 벤처캐피털리스트다. 형과 함께 소프트웨어 업체 ‘Zip2’를 공동창업하기도 했다. 이 둘의 여동생 토스카(42)는 촉망받는 영화감독이다.

 

메이는 “우리 아이들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은 성취를 했고, 얼마나 훌륭한지 엄마인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세 아이 모두 착한 성품을 지닌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착하고 친절하라’는 정책을 잘 따라줬다는 설명이다.

 

또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특별히 뭘 잘해주기보다는, 그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라고 했다. 한창 모델 일을 할 때는 아이들이 모델쇼 현장에 가서 숙제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엄마에 대해 세 자녀의 한결같은 평가는 “놀랍고 역동적이고 멋지다”는 것이었다고 NYT는 보도했다.

 

“제 50세 생일 파티를 세 아이가 지내던 실리콘밸리에서 했는데 그때 아이들은 나에게 ‘목제 장난감 같은 자동차와 집’을 선물로 주면서 ‘엄마, 나중에 진짜 차와 집을 꼭 사드릴게요’라고 말했죠. 셋 모두 30세도 안 된 20대였어요.”

 

메이는 지금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각각 집이 있고, 일론의 테슬라 전기자동차를 승용차로 몰고 다닌다.

 

그는 “전기자동차를 처음 탔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조용하고 부드럽고, 마치 우주선 안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테슬라를 너무 사랑하게 됐다. 아들이 그 회사 CEO가 아니었더라도 (한번 타 보면)테슬라를 계속 애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계획이나 꿈은 무엇인가요.

 

“모델로서, 영양학 전문가로 계속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입니다. 특히 모델로서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도 진출하고 싶어요. 세계를 여행하며 새로운 도시와 문화를 탐험하고 경험하는 걸 너무 좋아합니다. 아들(일론)이 유명인사지, 내가 유명한 모델은 아직 아니잖아요.”

 

경영전문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최근 “엄마 메이에 대해 조금만 제대로 알면, 그의 아들 일론에 대해 많은 걸 이해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메이가 자신의 홈페이지나 소셜미디어에 올려놓은 자기소개서는 보통 이렇게 마무리된다.

 

“제 여권과 여행가방은 항상 떠날 준비가 돼 있습니다. 68세지만 저는 지금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동아일보 부형권 특파원 

 

 

 

 

 

 
 

 

 

 

 

 

 

 

 

 

 

 

 

 

 

 


 




 

 

 

 

 

 

최소의 시간과 노력으로 최대의 운동효과를 보려면 어떻게 운동하는 것이 좋을까. 1분 동안 고강도 운동을 하면 45분 동안 적당히 운동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맥마스터 대학 연구팀은 높은 강도의 운동 사이에 잠깐의 휴식을 넣어 신체 훈련을 반복하는 인터벌트레이닝을 추천하며 이 같이 밝혔다.

 

그동안 전력질주 후 가벼운 조깅이나 휴식, 그 후 다시 같은 코스로 운동하는 고강도의 인터벌트레이닝은 잠재적인 운동 효과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얼마간의 운동이 최고의 운동효과를 내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연구팀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25명의 건강이 좋지 않은 성인 남성을 상대로 해당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팀은 대상자들의 운동량과 인슐린 저항성, 세포단위에서 근육이 얼마나 잘 활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근육을 일부 떼어 내어 조직검사를 했다.

 

그 다음, 연구팀은 대상자를 세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은 운동을 하지 않고 기존 생활대로 지내도록 했다.

두 번째 그룹은 지구력 운동 스케줄에 따라 2분간 준비운동 후 45분간 자전거 운동을 시행했고 그 후 3분간 마무리 운동을 시켰다.

세 번째 그룹은 인터벌트레이닝을 시행했는데 2분간의 준비운동 후 20초간 전력으로 자전거운동을 시켰다.

연구팀은 세 번째 그룹에게 이러한 운동 사이클을 계속 하게 했다. 전체 총 운동은 10분 정도 소요됐고, 격렬한 운동은 단 1분만 시행됐다.

 

모든 그룹은 12주간 주당 3회로 각자의 스케줄대로 운동했다. 12주가 지난 후, 연구팀은 대상자들의 운동량과 근육량, 인슐린을 다시 측정했다.

 

그 결과, 첫 번째 그룹에 비해 두 번째, 세 번째 그룹의 지구력이 20%이상 향상됐으며, 인슐린 저항성은 현저히 개선됐다. 또한 두 그룹의 근육양도 비슷한 비율로 증가했다. 즉, 격렬한 운동을 한 시간은 두 번째 그룹의 경우 27시간, 세 번째 그룹은 36분이었으나 비슷한 수준의 운동결과를 도출해낸 것이다.

 

이번 연구를 이끈 신체운동학과 마틴 기발라 교수는 “바쁜 일상때문에 운동할 시간이 적은 현대인은 45분~1시간을 굳이 투자할 필요 없이 잠깐의 고강도운동이 추천된다”며 “시간은 적게 걸리면서 운동 효과는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최근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Plos One)'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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