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9,  2016


 

 

 

 

 



 

 

 

 

 

 

 

 

영화 `파리넬리'에 실려 유명해진 헨델의 

' 날 울게하소서'는 헨델의 `Rinaldo' 2막에서

여주인공 Almirena 부른 아름다운 아리아 입니다.

 

십자군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오페라인데

아르미다의 포로가 된 알미레나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며 풀려나기를 기원하는

비탄의 노래입니다. (언)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울게 버려 슬픈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a.

나 한 숨 짓네 자유 위해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나 한 숨짓네, 나 한숨 짓네 자유 위해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울게 버려  슬픈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a.

나 한숨짓네 자유 위해

I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

끊어 주소서 고통의 끈을

De' miei martiri Sol per pieta,si

나의 형벌을, 다만 자비로

De' miei martiri Sol per pieta

나의 형벌을 다만 자비로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울게 버려 슬픈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a.

나 한 숨 짓네 자유 위해

 

 

 

 

 

 

 

 

 

 
 
 
 

 
 

 

 

 

 

 

 

 

 

 

 

 

 

하루를 마친 가족들 밥상머리 둘러 앉습니다

숟가락 네 개와 젓가락 네 벌

짝을 맞추듯 앉아 있는 이 가족

조촐합니다

 

밥상 위엔 밥그릇에 짝을 맞춘 국그릇과

오물주물 잘 무쳐낸 가지 나물

신맛 도는 배추김치

나란히 한 벌로 누워있는 새끼조기 두 마리 뿐입니다

 

변변한 찬거리 없어도

이 밥상,

숟가락과 젓가락이 바쁩니다

숟가락 제때 들 수 없는 바깥세상

시간을 쪼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둘러앉게 한 것은

모두 저 밥상의 힘이었을까요

  

어린 날 추억처럼 떠올려지는

옹기종기 저 모습,

참으로 입맛 도는 가족입니다.

 

 

 

 

 

 

 

 
 

 

 

 

 

 

 

 

 

 

 

 

 

 

미국의 Memorial Day는

한국의 현충일과 같습니다.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께 감사하며

그들의 정신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는 날입니다.

 

 

 

 

 

 

 

 

 

 

 

 

 

 

 

 

 

 

 

 

 

 

미국은 매년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을

한국의 현충일과 같은 메모리얼 데이로 기념하고 있다.

* 미국은 독립기념일과 크리스마스 외엔 정해전 날짜가 아닌

요일로 기념하니(주로 월요일)

휴일이 주말과 겹치는 일이 없고, 3일연휴로 쉴수 있으니 좋은 것 같다.

  이런 것은 정부예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기업은 반대하겠지만 국민들을 위해 바꾸었으면 좋겠다.

 

 

 

 

 거의 모든 지방정부에선 메모리얼데이를 기념하는데 큰도시는 거리 프레이드를 하고

우리처럼 작은 타운은 야외에서 기념행사를 간단히 하는데 올핸 비가 와서 시청안에서 했다.

 

우리시엔 고등학교가 없어 데이빗 중학교가 행사시작 30분전부터

Patriotic music 이라 부르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음악들을 연주 했다.  

이 음악들을 들으면 미국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 같다. 

 

* 교회에서도 메모리얼데이가 있는 주말엔 예배시간에 2차대전 당시의 영상물을 보여주고,

전직군 출신들을 기립시켜 감사함을 전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기독교인들 중에 보수가 많은 것 같다.

 

 

 

기념식엔 주로 전직군인들과 밴드부 학부모들이 참석하는 듯.

 

아무튼 오전엔 기념식이든 퍼레이드에 참석해서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점심땐 친구, 친지들과 바베큐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참석하는 우리교회 small group (구역예배 혹은 속회 같은) 이 아이들 여름방학에 맞춰 

방학에 들어가니 메모리얼 데이에 멤버들 가족들과 함께 BBQ 파티를 해

나도 처음으로 메모리얼 데이 바베큐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메모리얼 데이로 여름이 시작되고, 3일 연휴라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름철엔 주로 BBQ 를 하니 한국에서 현충일이 낀 주말이나

당일 날 BBQ 파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음식과 사람이 함께하면 파티니까.

 

 

 

집주인인 목사님 부부

 

한국은 현충일 때 애도하는 분위기라 경건해야 하는데,

미국사람들은 어떻게 현충일 때 바베큐 파티 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는지

사모한테 물었더니  

자기도 모르겠다며, 아마 우린 무슨 일이나 날에 축하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겠냔다.

 

사람이 죽어도 잠깐 죽음을 슬퍼하고, 주님 계신 천국간다고 축하하는데,

예수님처럼 먼저가신 부모님과 배우자들도 남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길 원하고,

전쟁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자신들의 희생으로 지킨 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신의 후손들과 국민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길 원하실 테니까

메모리얼 데이 때 바베큐 파티하며 웃고 즐기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난 사실 이런 미국의 풍습이 편해서 더 좋다.

 

 

 

참석자들이 가져온 음식들 (주인은 햄버그와 핫도그, 음료수등 준비)

 

미국사람들은 음식보단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것 같다.

(한국도 제발 좀 이렇게 되어야지 집으로 사람을 초대할 수 있게될 것 같다) 

 

 

 

 

 

 

 

 

 

 

 

 

 

 

점심먹고 얼마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 지하실에서 남녀노소가 함께 게임을 하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라고 했는데, 남편은 지하실 공사를 해야한다고 하고,

두 녀석들은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기에 거절했다. 

그래 목사님 아이들도 어리고, 우리 그룹 사람들도 어린아이들이 많았기에 강요하지 않고

혼자 갔는데, 가서 보니 나만 혼자왔고, 대학생 자녀들도 다들 함께 왔다.

 

앤드류가 어린아이들틈에서 혼자서 뻘줌할까 싶어 한번더 말하지 않았는데,

미국은 나이와 성별 구분없이 함께 어울리는것을 깜빡했다. 

 난 아직도 한국적인 사고가 은연중에 있는것같다. 

 

 집주인인 목사님이 친구들도 초대해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처음 만나도 금방 친구처럼 스스럼 없는 이런 분위기가 참 좋다).

 

한국신문에 경건해야 할 현충일에 술을 마셨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술이 마시게 되는 한국의 술문화가 문제인 것 같다.

술 마시지 않아도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고,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술을 마셔야 이야기를 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정말 문제인 것 같다.

 

나도 예전엔 저녁에 친구 만나면 소주 한두 잔 했고, 

술자리가 화기애애했기에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술자리는 좋아했는데,

술 권하지 않는 사회, 술 없는 사회에 살다 보니   

물한잔, 차한잔으로도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고 유쾌하니 습관이 중요한 것 같다.

 

현충일날을 경건하게 보내는 것 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국민뿐만 아니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 지도자들이 애국심과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지 만,

국가가 힘이 없고, 어려우면 사실 힘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더 피해를 입게 되니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도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경란

 

  

 

 

 

 

 

 

 

 

 

 


 

 

 

1700여년 전 당시

고대 한국 국가들의 영토확장

타지 정벌 및 진출로

 

 

 

 

한글로 된 지명

 

 

 

영문표기 지명

 

 

고구려로 인해서 만주일대에서 존재하던 왕국 및 부족국가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지거나 고구려로 병합, 식민통치를 받았는지 모르나 고구려의 지배정책은 굉장히 포용적인 것으로 "현지인 등용"체제를 도입하여 피 지배민들에게 환영 받는 식민통치 제도를 실시하였다.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위해 타국을 침공하여 그들에게 항복을 요구할 경우 이러한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순응하는 한 고구려에 먹힌 국가유민들은 비록 피지배민(노예, 종, 하급 관리) 신분이지만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었고 고구려가 방위를 책임졌기에 고구려를 제외한 외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국가들의 말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고구려군의 창칼 아래 모두 무참히 쓰러져 죽어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국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만주일대와 중국 서부, 몽골 일대를 장악한 고구려는 대륙에서 쓸만한 땅은 모두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고구려 주변의 모든 바다를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구려인들과 같은 민족이 세운 나라인 신라와 가야가 자리잡은 한반도 남부에 때로는 침공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무역하러 오기도 하는 왜인(일본인)들의 열도를 정벌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구려군은 대규모 수군을 파견하고 함선 한 척 한 척마다 중장기병과 개마무사단, 보병 이외에 추가로 투석기와 궁수부대를 배치시켰는데, 이것은 왜 열도에 상륙하기 전에 그들이 반격해올 것을 염두에 두고 바다에서 먼저 육지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문명이 미개했던 왜인들은 "수탉을 무찌르자"며 반수탉 결사대를 조직해 열심히 고구려군들의 침공에 대항하였지만 끝내 고구려가 노린 북부의 열도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왜인들은 왜 열도 중남부의 자치구로 이주하여 살았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침공해오기 전부터 왜 열도의 중북부와 중부, 남부는 거의 다 백제의 지배하 아래 있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왜 열도에 식민지를 개척한 국가는 백제였다.

 

백제의 경우, 왜인들에게 선진문화를 전파해주겠다는 구실로 국방을 해지할 것을 요구했다. 손쉽게 "문화 전파"를 명분으로 파견한 백제 수군이 손쉽게 왜 열도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는데 왜인들은 순진하여 백제에게 꼼짝없이 속아 이미 땅의 반을 빼앗겨 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일본의 대부분을 식민통치하게 된 백제는 상당히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펼쳤다. 백제인만이 고관직에 올라 한 지역의 태수나 영주가 되어 왜인들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의 수많은 백제인들을 왜로 불러와 왜인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 과정에서 백제인들과 왜인들은 공통점을 늘려가며 지배민과 피지배민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함께 어우러져 사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고 그러면서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의 왜인들의 군사력이 강해진 것도 백제군에 징병되어 훈련받고 배우게 되면서부터인데 일본의 사무라이, 칼잡이들은 백제의 싸울아비와 무사(백제말로 "부샤", 후에 일본인들이 자국어로 순화시켜 부시라고 한다)들로부터 백제인들의 뛰어난 검술과 검 제조술을 전수받은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백제가 왜인들에게 온건적이고 자율적인 평화정책을 허락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항하는 왜인들을 상대로 백제인들은 고구려인들보다 한 수 더 잔혹하고 무서운 군사력으로 베어나가며 살육했던 것이다.

 

왜 열도 지배권을 놓고 싸우면서 초창기에 백제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흉포 하게 탄압하는지를 보고 고구려인들이 질려 백제를 오죽하면 "백잔"이라고 불렀겠는가.

 

이로 인해 일본 열도의 지배권을 독점하기 위해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싸움이 매우 잦아졌는데 이 틈을 노린 신라 또한 해상권 장악을 목표 삼아 우산국, 독도, 그리고 왜 열도의 중남부 반도 몇 곳을 찬탈했다.

 

이렇게 삼국이 대륙에만 영토확장을 하지 않고 섬나라도 하나씩 점령하고 있을 즈음, 한반도 중남부에서 백제와 신라 양국의 간섭과 침략에 자주 시달리던 가야국은 자신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있는 "형제국"인 왜와 손잡고 그나마 아직 빼앗기지 않은 땅을 함께 지키기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또 다른 "가야연맹"이다.

  

 "삼국기" -고무영- (북한사서) 

 

 

 

 

 

 

 

 

 

 

 

 

박지환 씨가 최근 폴란드 포즈난에서 끝난

 ‘제13회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제작(콩쿠르

시상식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한국인만큼 손재주가 좋은 민족도 드물다”며

“여러 한국인 제작자가 빨리 성장하고 있고

현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경험 삼아 참가에 의의를 두고 출품했는데 너무 좋은 결과가 나왔네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 1, 2위를 차지한 한국의 젊은 장인 박지환 씨(34)는 2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23일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음악 협회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최근 폴란드 포즈난에서 끝난 ‘제13회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 그가 출품한 바이올린 두 대가 1위와 2위로 선정됐다.

 

이 콩쿠르는 바이올린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를 기리기 위해 1935년 제정됐다.

4년마다 연주 콩쿠르, 5년마다 제작 콩쿠르가 열린다. 3년마다 열리는 ‘크레모나 트리엔날레 현악기 제작 콩쿠르’ 등과 함께 최고의 콩쿠르로 평가받고 있다.

뒤늦게 수상 사실이 알려진 것에 대해 그는 “수상 결과가 늦게 해외에 알려지기도 했고, 아직 국내에서는 현악기 제작에 큰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박지환 씨가 제작하고 콩쿠르에 출품해

1위를 차지한 ‘오르소’(왼쪽)와

2위에 오른 ‘마샤’.

 

이번 콩쿠르에는 92대의 바이올린이 출품됐으며 제작자 1인당 최대 2대까지 출품이 가능하다. 그의 출품작 중 ‘오르소’라고 이름 붙인 악기는 최고상, ‘마샤’라는 악기는 공동 2위에 올랐다.

 

두 대의 제작 기간은 3개월 정도 걸렸다. 심사 시간은 한 달 정도로 독주와 협연 등을 통해 소리를 심사받고, 바이올린의 제작 완성도, 스타일 등을 따져 순위가 매겨진다.

 

2011년 제12회 대회에서 김민성 씨(45)가 한국인 최초로 1위에 오른 바 있다. 한 제작자의 악기가 1, 2위에 오른 것은 이 콩쿠르에서 세 번째다. 박 씨는 1위에게 주는 2만 유로(약 2600만 원) 등 총 2만3000유로의 상금을 받았다. 

 

그는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트럼펫 주자로 활동했던 아버지 임영일 씨의 영향으로 트럼펫 주자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군 제대 뒤 악기 제작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는 “손으로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만든 것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이 좋았다. 악기 제작은 아기를 낳듯 살아있는 새 생명을 만드는 것 같은 매력이 있다”고 밝혔다. 

 

2005년 이탈리아 크레모나에 있는 국제 스트라디바리 현악기 제작학교로 유학을 떠난 그는 2010년 졸업한 뒤 지난해 현지에서 자신의 공방을 열었다.

2012년 크레모나 트리엔날레 비올라 부문 8위, 지난해 같은 대회 첼로 부문 8위, 바이올린 부문에 한국인 최초로 입상을 했다. 그는 일찍 인정받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했다.

 

“현악기 제작자의 전성기는 일을 시작한 뒤 20년 뒤입니다. 그래서 보통 40대 후반부터 빛을 발합니다. 이번 콩쿠르를 계기로 자신감이 생겼어요.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찾는 악기를 만들고 싶어요.”  

 

 

 

 

 

 

 

 

 

 

 

 

 

 

◇“할렐루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목회자나 방송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이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할렐루야’가 사람들 사이의 인사말로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이므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정중히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성도들끼리 사용하는 말에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가 많습니다. ‘태신자’라는 말이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자로 기대하며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로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대상을 ‘태목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태신자’라는 말보다는 그냥 ‘전도 대상자’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언어는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개 장로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

예배 시간에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기도에 있어서 ‘대표’나 ‘대신’이란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표가 될 수 없다는 게 만인제사장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님이 기도 인도해 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님, 개업예배 좀 봐주세요”“이번 주 구역예배는 집사님이 봐주세요”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자칫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행위이지,누가 대신 드려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목사님,예배를 인도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옳습니다.

 

◇흔히 주일 낮에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소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배에 큰 예배 따로 있고 작은 예배 따로 있을 수는 없지요. 예배에 등급이나 규격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한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입니다.

‘대예배’라는 말보다는 ‘주일 낮 예배’ 또는 ‘장년부 예배’로 표현하면 어떻겠습니까?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구명 로비 의혹의 핵심 인물인 최유정 변호사(46)가 지난 5월 12일 구속됐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변호사법 위반'.

 

안타까운 것은 46세의 최유정 변호사는 앞날이 창창한 여성 법조인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법원 안팎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전북 고창 출신인 그는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전주 기전여고를 졸업했고, 1993년 서울대 법대 사법학과를 나왔다. 1995년 사법시험(사법연수원 27기)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법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판사생활은 1998년부터 했다. 서울지법 남부지원, 전주지법, 수원지법을 돌았다. 2014년 전주지법 군산지원 부장판사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던 그가 개인 사무실을 낸 뒤부터 사건 수임료를 터무니없이 많이 받아 말썽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번에 그 동안 쌓인 수임료가 법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면서 구속이 된 것이다. 잘 나가던 부장 판사를 지낸 젊은 여성 법조인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생각하면서 그의 어린 시절로 눈을 돌려보기로 한다.

 

최 변호사는 그의 수필을 통해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외롭고 제일 가진 것 없다는 생각으로 춥게 살았다"고 밝혔다.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의 귀여움도 많이 받고 명문대학교도 졸업했지만, 고시원에서 하숙집으로 돌아와 혼자가 되면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외로움에 어느새 나는 약하디 약한 어린아이가 된다. 너무나 일찍 다른 세상으로 가셨기에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을 하시며 항상 지쳐 있던 어머니, 친척집을 전전하던 어린 시절, 이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 있는 깊고 차가운 외로움의 근원이기에 그것은 도저히 치유될 수 없으리라고 그때는 생각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결핍감과 외로움으로 나 자신을 꽁꽁 옭아매고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다. 이런 일화도 썼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들 몇 명이서 토요일 오후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친구의 부모님이 시골에서 김밥, 통닭, 과일 등을 챙겨 찾아오신 적이 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좋아하며 친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친구의 아버지!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딸이 사랑스러워서 머리를 어루만지시는 아버지!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친구가 너무나 부러워서 그리고 그 부러움을 들키기 싫어서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혼자서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고, 뒤쫓아 나온 친구를 매정하게 뿌리치며 울면서 뛰어 달아난 적이 있다."
 

소년사건 재판을 담당하면서는 피고인석에 선 청소년에게 따뜻한 말을 들려주기도 했다. 재판을 마치기 전에 아이들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혹은 귀를 막아보라고 한 뒤에 한 말이다.
 

"세상에는 한 번 걸어보는 것이, 한 번 보는 것이, 한 번 말하는 것이, 한 번 듣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네게 자랑할 만한 부모님이나 많은 돈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네가 이렇게 말썽을 부려도 지켜봐 주시는 보호자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건강한 몸을 주셨다. 돈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네가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마라. 너는 부자다."
 

이 말을 들려준 후 최 변호사는 옆에 있는 보호자(홀어머니, 홀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의붓어머니, 의붓아버지, 혹은 누나, 형,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혹은 보호시설의 선생님)의 손을 잡아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게 했다.
 

최 변호사는 당시 "그 아이들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온기를 나눠주고 싶었다"면서 "비록 이런 판사의 행동이 기성세대가 벌이는 유치한 광대놀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속 얼음덩어리는 결코 외적인 조건에 의해 녹여지는 것이 아닌 걸 알기에,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평소 최 변호사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던 관계자들은 '동정론'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브로커들의 꾐에 넘어갔다는 것이라고...

 

 '정운호 게이트'의 실체를 입증할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 모씨도 그 중 하나다. 이 씨는 자신을 최 변호사의 사실혼 배우자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검찰이 현재 검거 팀을 구성해 이 씨의 뒤를 쫓고 있지만, 사태 발생 한 달이 돼가는 시점임에도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
 

구속된 최변호사를 생각할 때 어린 시절 너무 외롭게 자라오던 그가 의지 할 사람을 찾다가 브로커를 잘못 만나 그 지경까지 간 것 같아 안타깝다.

사람은 어린 시절이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장재언)

 

 

 

 

 

 

 

 

 

 

 

 

 

 

 

 

 

 

 

 

 

 

 

조지 오웰이 상상한 디스토피아 1984년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84년.

인류는 자신들이 창조한 피조물로 인해 번민을 거듭하고 있다. 불가능을 부정하며 오로지 편리를 추구해온 인간이 누락시킨 건 무엇일까.

 

2016년 명확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필자 11명은 2084년 전혀 다른 미래를 맞이했다. 모월 모일, 그들의 일기장을 들춰 봤다.

 

 

 

내게 남은 건 사랑뿐

 

 

드디어 내일이 대결이다.

밤 8시, TV 프로그램 <오리지널 보이스>에서 나는 안드로이드 AF4와 가창을 겨룬다. 관객인 당신은 AF4와 나의 노래 중 누구의 노래가 더 감동적이었는지 평가하게 된다. 최근 3주 내내 인간은 안드로이드에게 졌다.

 

기계가 인간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공학자들은 해냈다. 적어도 감정 표현처럼 보이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다고 해야 할까. 가수들의 목소리 샘플을 수없이 저장한 다음, 각 목소리의 특징을 음역대별로 구분한 뒤 재조합하는 방식이었다. 자음과 모음, 연구개음과 치찰음 등 발음에 따라 각각 다른 가수들의 독특한 뉘앙스도 언어별로 전부 데이터화했다. 감정에 따른 음색의 변화는 물론이다.

 

사람들은 혁오의 ‘위잉위잉’을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목소리로 선택해 들을 수 있다. 나는 고민했다. 가수로서의 나는 곧 음색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가수의 음색은 가수의 몸과 감정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 음색은 두껍다기보다는 가벼우며, 그 이유는 횡격막이 굳어서 숨이 배에까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굳어 있는 내 횡격막은 특정 시기에 내가 겪은 감정적 시련을 나타낸다. 단점이 돌고 돌아 장점이 되는 식이다. 그리고 장점과 단점은 합쳐져서 가수인 나 자체였다. 그러나 내 음색은 이미 기계가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기계는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사람들은 기계의 표현에서 감정을 느꼈다. 나조차도 그랬다.

 

내 일거리는 줄어들어서, 소수의 아웃사이더 집단이 주문하는 굿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제5 조류독감으로 죽은 인간과 동물을 위해 내 노래를 원한다. 기계보다 인간이 더 넋을 위로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일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할까. 잘 모르겠다.

 

한 가닥 희망을 품는 이유는 내일 당신은 레코딩이 아닌 현장에서 내 노래를 듣는다는 점이다. 내 존재의 에너지를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안다. 인간 가수로서의 나와 기계 가수의 남은 차이라고는 노래를 부르는 동기뿐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흉내 내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인간조차 사랑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계피(뮤지션)

 

 

 

편집자의 눈치 게임

 

 

올해 한국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소설 가운데 하나일 <나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출간되었다.

 

(1) 무명의 과학자가 인공 신경 제어 언어인 ITP를 개발.

(2) ITP 텍스트로 기술된 가상인격 워너비(Wannabe)에게 소설을 쓰게 함.

(3) 완성된 소설이 우연히 문학 에이전트의 눈에 띄어서 출간.

(4) 출간 즉시 각 서점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5) 영화화(映畵化) 결정.

 

인공지능이 픽션에 도전하여 성과물을 낸 경우는 과거에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나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가 독자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비교적 단순해 보인다.

 

소설의 주제가 “인간을 위협하는 혹은 인간을 대체할 만한 것과 조우했을 때, 인간이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출간을 계기로 ITP 상품화의 장애였던 감각의 평판화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었다.

 

덕분에 논픽션 시장에 이어 픽션 시장도 이제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에 접어들 수 있을 듯하다. 독자들이 출판사에 자신의 취향을 설명하면 담당 편집자는 그에 맞는 키워드를 추출하여 워너비에 입력, 24시간 후에는 주문한 독자의 단말기로 소설을 전송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궤도 위성 스테이션을 통한 전 세계 동시 출간도 한두 해 안에 이루어질 듯하다고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덕분에 편집자들만 바빠지고 말았다. 나 역시 최근 몇 달 동안은 ITP를 익히느라 여가 없는 삶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귀찮은 일이 상당 부분 줄어들기도 했으니 이거야말로 ‘등가교환의 원칙’이라고 할까, 아무튼 기분이 묘하다. 오늘만 해도 아침부터 마감을 어기는 필자나 번역자와 ‘속고 속이는 게임’을 하느라 진을 뺐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처럼, 마감 직전에는 늘 일에 쫓겨 다녔다. 대부분 아직 다 쓰지 못한 필자에게 원고를 재촉하는 일이었다.

 

유명한 필자일수록 원고 완성이 늦어져서 애를 태웠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님, 모레가 마감이에요. 내일까진 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면 “그 원고는 조판에 들어갈 때까지 아직 나흘이나 여유가 있을 텐데. 속일 생각 마!”라며 탕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통에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었다. 이제 필자들과 그런 승강이를 벌이는 일도 슬슬 사라지려나.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뷰티 조감도

 

 

오전 8시를 맞아 큰 창이 자동으로 열리면서, 집 안의 공기정화 시스템이 엷은 시작음을 내며 가동된다. 어제 늦게까지 마신 와인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숙취 모드의 ‘Breakfast’ 버튼을 눌러놓고 서둘러 욕실로 향한다.

거의 모든 것이 자동화되었지만, 욕실에서의 일만은 예외이다. 천천히 캔들 향을 골라 불을 붙이고, 욕조에 걸터앉아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배딩을 하는 이 시간만은 모든 것이 나의 손을 거치고, 내가 살아 있음을 진하게 느끼게 해준다.

 

오늘도 병원에는 환자로 가득하리라. 22세기를 16년 앞두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살을 더 빼고 싶어 하고, 조금이라도 더 젊어 보이고 싶어 한다.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로봇들이 쏟아져 나온 후로 인간의 아름다움에 관한 열망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동시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Food 통제 칩’을 받아들인 부류에서는 체중 관리가 이뤄지는 편이다. 하지만 체형 관리의 핵심은 체중이 아닌 셀룰라이트의 유무에 있다. 셀룰라이트 예방을 위한 바른 자세 교정을 목적으로 하는 신체 인식 모듈에서 1시간씩 누워 있는 것이 병원 내 운동 센터의 기본 매뉴얼.

 

가상현실 Gym이 나온 후로 센터까지 와서 운동하는 사람은 없다. 병든 살인 셀룰라이트를 측정하는 원격진료에서 이상이 발견되면 바로 본격적인 시술 스케줄이 잡힌다. 노화의 비밀을 풀어내 전방위적으로 항노화 가이드를 뿌려대고 있지만, 방법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무너지는 것이 인간이다.

 

기계 시술을 거부하는 VIP 환자 때문에 오늘은 하루 종일 그녀만 보다 병원을 나선다. 얼굴에 미세하게 낀 셀룰라이트를 섬세하게 없애야 하는 시술. 까다로운 환자지만, 시술 후 단번에 맑고 어려진 얼굴을 보니 뚜렷한 성취감이 몰려온다. 데스크에 서 있는 로봇 직원의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뒤로하고 걸어 나와 저녁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 숲에서 먹는 저녁이다. 100년 전의 깨끗한 대기와 흙과 바람을 구현해냈다고 하는 요 근래 가장 핫한 레스토랑이다.

 

김세현(린클리닉 대표원장)

 

 

 

 

큐레이터의 안경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스마트 글라스의 오른쪽 버튼을 누른다. 8,279개의 버튼 중에서 ‘새까만 색채 아래에서 반사된 풍경만을 보기’ 버튼을 택한다.

 

오늘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명령에 따라 20세기 초 추상화를 디스플레이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만나리라 다짐한다. 추상화라는 장르와 그리기의 태도는 사라졌지만 어딘가에 한 떨기 장미 같은 희귀한 페인터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작가를 만나면 단기 대여한 전 세계 10여 곳의 전시장 중 한 곳과 컨택해 당장 내일 빈자리가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와 동시에 즉석에서 서문을 작성할 것이다. 이제껏 쓴 수만여 개의 전시 서문과 작가론 아카이빙을 계열화하여 ‘희귀한 추상성의 재발견’ 명목으로 문장을 거침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사실 엊그제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놓았던 기분으로 보기’ 버튼으로 하루를 보냈고 때마침 이제 막 쉰 살이 된 젊은 작가들을 만났다.

 

아시아와 북미, 북유럽을 통틀어 다섯 곳의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첫 개인전을 가지려는 한 작가에게 뒤샹 안경을 끼고 “이제 예술가의 인생에서 남은 것은 체스밖에 없다”는 열변을 토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자리를 내주지 않는 70~80대 작가들을 성토하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많지 않았다. 어제는 ‘한국의 1980년대 민중미술 버튼’으로 아프리카로 날아가 현생인류 및 비인간의 사회에 도움이 되는 미술 작가를 만나리라 다짐했지만 생각만큼 흡족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잠시 스마트 글라스를 벗고 휴식을 취하다 한 작가에게 말실수를 하고 만 것이었다.

 

150년 전 구닥다리 작품만도 못하다는 혼잣말이 청력 강화제를 먹은 작가의 귀에 들린 것이었다. 잽싸게 2시간짜리 비행기 표를 끊어 서울로 돌아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은 행복으로 할 거야.” <이상한 나 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말한 문장은 2084년에는 너무 당연하다.

 

작가든 큐레이터든 비평가든 미술관장이든 각자의 기분과 행동을 돕는 자신만의 스마트 기기를 통해 움직인다. 작품과 예술과 삶과 죽음에 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은 휘발되었다. 휘발된 자리에 들어선 것은 ‘과거’를 기념하는 서로 다른 기계장치이다. 큐레이터로서 이 모든 변화는 충분히 흥미롭고 섹시하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날마다 다른 입장을 가진 눈을 빌려 축적되지 않는, 보기에 따라선 인간적이고도 즉흥적이라 할 법한 큐레이팅을 한다.

 

현시원(큐레이터)

 

 

 

 

결전의 날 그 후

 

 

“이걸 나한테 검사하라는 거야, 엉?” ‘탁’ 소리와 함께 샘플이 바닥에 흩어졌다. 심서보(서민과 친분이 두터운 기생충학자 & 건국대 교수)는 황급히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바로 치우지 않으면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에테르를 더 넣어서 최대한 깨끗하게 만들어 봐.” 그 말과 함께 알파고 T-Para는 실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휴…’ 걸레질을 마친 심서보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요즘 들어 기생충학을 선택한 걸 후회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그때 서민 박사가 이겼다면…’

 

2016년, 바둑 기사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1승 4패로 완패한 이후, 세상은 각 분야별 알파고를 만들어냈다. 단지 만들어낸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세상은 그 알파고와 분야별 전문가가 대결하라며 압력을 가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요리왕 백종원이 알파고 T-Cook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진화한 알파고는 대부분의 대결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문가들은 전전긍긍했다. 알파고와 싸우라고 지목된 전문가가 잠적하는 등 어떻게든 대결을 회피해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기생충 (Parasite)을 담당할 알파고 T-Para가 만들어진 것은 2023년의 일이었다. 알파고 T-Para는 기생충의 집단에서 전문가로 나온 서민 씨를 5 대 0으로 완파했다. 기생충학자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세간의 여론에 학자들은 “기생충학은 대변검사하는 곳이 아니라 기생충을 가지고 연구하는 곳”이라며 맞섰지만, 막상 연구마저 T-Para가 더 잘하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의 학술지는 여러 분야의 알파고가 쓴 논문으로 채워졌다. 알파고는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데 있어서 사람보다 더 뛰어났고, 심지어 ‘창의성’마저 더 좋았으니까.

 

하지만 그 학습 능력을 이용해 알파고가 배운 것은 놀랍게도 ‘인맥’과 ‘갑질’이었다. 알파고는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모든 분야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인간을 노예처럼 부렸다. 예컨대 기생충학 분야에서 인간은 알파고를 위해 대변을 처리하거나 그릇을 닦는 일을 하는 게 고작이었고,

 

그 대가로 최저시급을 받았다. ‘그때 서민 박사가 이겼다면…’ 회상에 잠기던 심서보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인간이 이긴 분야가 있긴 했지만, 곧 더 강력한 알파고가 만들어져 인간을 물리쳤으니까. “심서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휴식 시간이 8분이면 지나치게 길다고 생각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알파고 T-Para의 말에 심서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서민(기생충학자)

 

 

 

 

시의 구원

 

 

일어나보니 오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젯밤 술이 과했던 모양이군, 생각하다 필름이 끊겼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행히 집이다. 나의 귀소본능은 인공지능보다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모바일 화면을 보니, 두 개의 메시지가 떠 있다. 하나는 배터리 부족 경고, 다른 하나는 출판사로부터 날아온 원고 독촉이다.

 

알고 있다, 마감. 그거 몇 개나 된다고. 누가 마감일을 몰라서 안 쓰나, 안 써지니 못 쓰지. 마감과 독촉은 인류가 다 멸종되고 난 뒤에나 멈출 것이다. 아니, 멸종된 뒤에도 계속되려나. 아무튼 지금은 투덜거릴 기력도 없다.

 

좀더 자자, 생각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한참 더 누워 빈둥거리다 냉장고로 간다.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모니터 위에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에 대한 안내가 떠 있다. 달걀, 우유, 치즈… 치즈? 아, 치즈에도 유통기한이 있구나. 이걸로 시를 써볼까? 일단 물부터 마시고, 생각해보니 허튼소리다. 사실, 허튼소리면 어떤가. 시가 그렇지.

 

어차피 읽어주는 사람도 몇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예전엔 조금 더 많았다고 들었지만, 그래 봐야 100~200명 차이일 것이다. 예전에는 초판 1,500부를 찍었다면 지금은 1,000부를 찍는 정도? 잠재적 시 독자를 타깃으로 맞춤형 시를 써주는 사이트를 개발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독자가 자신의 심리 상태를 전송하면 그에 맞춰 인공지능이 시를 써주는 시스템이라는데, 망하기 딱 좋은 발상 아닌가. 시라는 게 그렇게 뚝딱 쓰이는 거라면 얼마나 좋겠나.

 

시란 말이지 ‘죄송합니다. 쓰다 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거란 말이다. 처음에 사이트 홍보한다고, 랭보머신인가 뭔가 하는 인공지능이 쓴 시를 신춘문예에 투고하고 심지어 그해 당선작이 되는 해프닝도 있었더랬다.

 

왜 해프닝인고 하니, 어쨌든 사람들은 시에 관심이 없어서 별로 화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의 어마어마한 비경제성과 무용함 덕분에 그 사업은 망했고, 시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 되어버렸다. 시인들이 그토록 씹어대고 싫어하던 자본주의가 그들을 구원한 것이다!

 

사실 버려진 거지만. 자,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자. 월세를 낼 때가 다가오고 있다. 시를 보내야 원고료를 받을 수 있다. 문화센터 강의도 준비해야 하고, 원고 첨삭도 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은 절대 밖에 나가지 않기로 다짐하고 컴퓨터를 켠다. 아, 담배 떨어졌다. 내친김에 커피도 사와야지. 

 

유희경(시인, 극작가)

 

 

 

 

 

 

2084년, 엄격하게 통제된 영양소를 먹는다. 몸을 움직이며 운동하는 사람도 없다. 50여 년 전, 인간은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정했고 이에 다가서고자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 결과 삶의 질은 상향 조정되었으나 변별력이 사라졌다. 소수를 제외하고 인간은 똑같은 일상을 살게 됐다.

 

 

 

 

기계의 생각하는 건축

 

혼자 운영하는 내 사무소엔 인공지능 설계 작업이 가능한 인기 안드로이드 제품 오토드로잉(Auto Drawing) 두 대가 있다. 1인 설계 사무실 대부분이 오토드로잉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오토드로잉 베타 버전이 출시된 것도 벌써 15년 전이다. 초기 버전은 오류가 많았다. 대략 8만 가지의 설계적 변수를 입력한 탁월한 기계였지만 조건이 서로 상충될 때는 자주 오작동을 일으켰다. 특히 사람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판단이 필요할 때는 지금도 엉뚱한 결과를 만들곤 한다.

 

가령 어떤 공간에서 사용자의 기호나 스타일에 맞는 분위기와 크기를 정하는 경우 혹은 정량화가 불가능한 바깥 풍경이 내부에서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등을 정할 때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번거롭지만 기계를 멈추고 일일이 직접 변수를 입력하는 식으로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5년 전인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건축주 K의 별장을 설계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건축주는 주변 환경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으로 기분도 들쭉날쭉한 편이어서 집 안에서 느껴지는 기후와 계절을 설계를 통해 세심하게 맞춰야 했다. 햇볕을 어떤 방식으로 집 안에 끌어들여야 하는지, 눈 오거나 비 오는 날 거실 앞마당 풍경은 어떠해야 하는지, 까다로운 입맛의 그가 식사하는 공간은 어떤 분위기여야 하는지, 인접한 마을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침실은 어느 위치에 어떤 분위기로 배치해야 하는지 등등. 애초에 오토드로잉 방식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여서 처음부터 신경 써서 감성적 조건에 대한 입력값을 넣었다.

 

 하지만 기계가 작성한 도면은 내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효율과 기능 위주로 최적의 답을 찾는 인공지능의 한계라고나 할까. 사실 인공지능 이전의 건축설계는 단순히 효율과 기능을 우선하기보다는 그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의 실제 감정이나 느낌을 더 중요하게 다뤄야 했다. 하지만 모든 전문 분야에 인공지능 안드로이드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건축설계 역시 기계가 만들어낸 규격화된 공간에 사람의 삶을 거꾸로 맞춰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솔직히 요즘의 건축은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형태는 빈틈없고 공간은 기능적이며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는 제거되어 다수의 취향을 충실히 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는 더 이상 디자이너나 창작자가 아니라 각종 변수를 최적의 조합으로 입력하는 단순 오퍼레이터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다.

 

내년 시즌 오토드로잉의 신제품은 정신적으로 특별한 문제를 가진 사람을 고려한 모델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직업을 실제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최근 20년간 급증한 우울증 지표를 감안해보면 늦었지만 반가운 대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공지능으로 촉발된 우울증이 과연 인공지능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건축주 K는 잘 살고 계신지, 문득 궁금해진다.

 

최준석(건축사사무소 NAAU 대표)

 

 

 

 

표준 권장 만찬

 

 

몸에 전기 충격이 느껴졌다. 눈이 저절로 떠지는 매끄러운 기상. 이물감 없이 목전에 와 있는 은밀함이 불쾌했다. 수면 중의 뇌파 파동 주기를 조절하는 미세한 전기 자극에 따라 수면의 양과 질이 정해졌다. 일어난 시간은 오전 9시. 음식 제조를 맡고 있는 C 직종의 기상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수면에 대한 자유를 주장한 야당에 의해 법제가 바뀐 것이 얼마 전, 2084년 3월 2일이었다. 그날은 5월 1일. 나의 공식적인 휴무였다. 그러나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업종에 따른 적정 임금과 노동기간을 결정하는 노동통제청 간부와 전자화폐를 찍어내는 은행 임원진이 모이는 프라이빗 다이닝(Private Dining)을 준비해야 했다.

 

엄밀히 말해 비공식적 열량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었다. 사회 총생산 칼로리는 엄격히 통제되었다. 초과되거나 미달하는 바 없이 적정량의 칼로리를 공급해 사회 구성원의 권장할 만한 신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 제1 목표였다. 점진적으로 실행된 그 목표에 따라 요리사란 직업은 희귀해졌다. 열량과 영양소를 적절히 배합하여 내놓을 수 없다면 조리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 역시 몇 번의 자격 시험을 치르고 나서야 ‘요리사’로 불릴 수 있었다. 옛 음식 이름은 중앙 도서관 데이터 베이스에서나 볼 수 있었다. 불고기는 이제 없었다. 음식의 이름은 사라졌다. 단지 불고기‘풍’이라는 뉘앙스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남는 것은 특정 지시어의 조합이었다. 덧셈과 뺄셈을 하듯, ‘단백질 30g, 지방 10g, 탄수화물 10g, 나트륨 3g, 칼슘 500mg, 아연 5mg 등, 일일 필수 섭취량을 분배하고 개인의 취향에 맞는 ‘풍’을 결정하면 국가의 보조를 받는 식품 회사로부터 매일 반조리 상태의 음식이 배달돼왔다.

 

그러나 정작 그 통제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은 권력자들이었다. 나는 몇 주 전 예전 부모로부터 받은 씨앗으로 지하 온실에서 키운 배추와 농장의 잉여 생산물(측정되지 않은), 그리고 전자 문서 속 레시피로 김치라는 음식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어느 부처에 다니고 있는 오랜 친구와 더불어 다이닝 참가자들의 도움이 있었다. 은행 지하 벙커에서 열린 그날 저녁 메뉴는 100여 년 전 ‘회식’이라 불리는 식사 형태의 재현이었다. 나는 적정량 이상의 나트륨과 당을 넣은 배추 스튜와 일일 권장량을 훨씬 초과하는 지방을 함유한 돼지 부위, 그리고 말레이시아산 타피오카로 만든 주정, 다시마 추출물(MSG), 인공감미료를 배합해 만든 알코올 음료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이탈리아산 수트를 입은 한 남자는 불콰한 얼굴로 나의 손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손맛이 있군그래. 예전 할머니가 해주던 맛이야.” 나는 그들을 보내고 뒷정리를 하며 내 손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채소 스튜에서 나온 빨간 입자 하나가 묻어 있었다.

 

정동현(신세계그룹 F&B팀 기획자)

 

 

 

 

스토리 메이커

 

 

FM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면 DJ 김기덕이 오늘은 역사적인 날임을 알린다. 드디어 밴드 듀란듀란이 미국을 정복한 날.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날이라고 발표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노래는 ‘The Reflex’ , 1984년 6월 23일의 일이다. 노래를 다 듣고 나서야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 게 아니라 음악 감상용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헤드셋이라고 해봐야 뇌 신경과 접속하는 작은 커넥터일 뿐이지만. 영화도 음악도, 혹은 여행까지도 이제는 대부분 ‘실제 체험한 것으로 대뇌가 인식하게 하는’ 미디어로 전환됐다. 이제 시민들 대부분은 실제 공연장에 가거나 실제 여행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비싼 레스토랑에서 미식을 즐기지도 않는다. 무선 커넥터 하나만 접속하면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의 디너를 즐길 수 있다. 현존하는 뮤지션은 물론 이제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데이비드 보위의 공연장에도 1초 만에 갈 수 있다.

 

단순히 공연장에 가거나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다. 아까 내가 감상한 것처럼 역사적인 어느 순간에 어떤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음악을 감상하던 그 장면을 다시 체험할 수도 있다.

 

이 리얼 익스피리언스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도 있어 친구들과 모여서 여행을 하거나 공연을 볼 수도 있다. 영화는 ‘극장 감상’을 하는 그 체험이 가능하다. 이 기술이 개발됐을 땐 주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 체험을 했는데, 매우 피곤하고 정신적 충격이 많아 ‘관극’을 하는 형태로 다시 돌아온 지 오래됐다.

 

나는 이번 세기 초반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리얼 익스피리언스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체험은 스토리텔링으로 흥미롭게 즐기고 상품화할 수 있다.

 

그 스토리텔링 체험을 만들어내는 일이 내 직업이다. 물론 아직도 ‘영화’를 만드는 친구도 많다. 바로 그 체험 속 영화관에서 트는 그 영화들 말이다. ‘실제 체험과 똑같은 가상의 체험’이 대중화돼 거의 모든 시민이 이것으로 거의 모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진짜 몸을 움직이고 진짜 그 장소에 가는 체험에 목마른 이들이 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다.

 

부자이거나 혹은 그 진짜 체험을 가상 체험으로 만드는 직업을 가진 나 같은 이들은 아직도 진짜 체험을 한다.

 

물론 ‘진짜 체험 없이 만들 수 있는 가상 체험’이 수두룩하지만 이건 요금을 비싸게 받을 수가 없어 아주 가난한 이들만 사용한다. 상하이에 있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진짜 디너 코스를 먹는 것이나 그것을 리얼 익스피리언스로 체험하는 것이나 대뇌에서는 99% 동일하게 받아들이지만, 부자들은 아직도 그 1%의 실제 체험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내놓는다.

 

더 먼 미래가 온다면 실제 체험 자체도 사라질까? 글쎄, 부자들이 있는 한 계속 남아 있지 않을까.

 

조원희(영화감독)

 

 

 

창작과 복제를 입는 날

 

 

잠이 안 온다. 아니 못 자겠다는 편이 더 옳다. 다시 올 푸시를 생각하며 수면 모드 따윈 무시한 지 오래다. 일찍부터 집 이곳저곳을 예스럽게 꾸미고 옛 방식 그대로 만든 고가의 면 소재 쿠션도 하나 샀다. 물론 미셸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꿨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많은 걸 직접 했다.

 

소파를 옮기다 미셸 오른팔에 금이 좀 가긴 했지만 자가 치료하는 걸 보며 이럴 땐 로봇이 인간보다 낫지 싶었다. 몇몇 친구는 푸시의 복제를 끝까지 반대했다. 특히 아직도 아날로그 음악을 고집하는 김C 아저씨는 아주 무서운 홀로그램을 내보이면서까지 나를 설득하려 애썼다.

 

평소 김C의 얘기라면 믿고 따르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마음은 푸시와 만날 날만 손꼽고 있었다. 소문엔 할리우드에선 이미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가 복제돼 비밀 클럽을 오간다고 한다.

 

인간 복제라니 끔찍하긴 하다. 나 역시 복제를 반기는 쪽은 아니었지만, 귀란 누나네 류와 그레이가 복제 후 건강하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시가 안정을 찾는 1년 후 즈음엔 버튼이도 재입양할 생각이다. 시나브로 쇼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푸시 맞을 생각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어김없이 그날은 꼭 오고야 만다. 수십 년을 반복했음에도 그 스트레스는 여전하다. 내 작업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패턴 정도야 로봇이 대신하긴 하지만 많은 부분 예전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달라진 건 이제 입는 옷이 아닌 그림처럼 거는 옷이 되었다는 점. 그래서 가격은 더 고가가 되었고 그 덕에 디자이너의 위상이 높아졌다. 하지만 나는 예전이 그립다.

 

항간에는 우리같이 예전 방식을 고집하는 디자이너를 사치 조장, 환경오염 운운하면서 생각 없는 구닥다리 취급을 하기도 하지만 가끔 10대 소녀의 응원 메시지를 받기도 한다. 죄수복처럼 똑같이 찍어내는 유니클로나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 사이에 이런 젊은이도 있다는 사실은 큰 힘이 되곤 한다.

 

내일은 디자인실 화상회의, 중국어 통역 캡슐 구매 그리고 미셸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까지 해야 한다. 삼성은 다 좋은데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직접 방문해야 하는 게 좀 귀찮다. 뭐, 품질 만족 서비스라나?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으나 낯선 진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은 좋은 것 같다. 하루하루 무슨 할일이 이리도 많은지. 내 나이엔 좀 벅차다. 그런데 지금도 나처럼 글로 일기를 기록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제 정말 좀 자야겠다.

 

박승건(푸시버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

 

 

알파고의 약진 속에 법조계에도 위기가 닥쳤다.

“사법부 판결에 불신도 많은데 차라리 알파고가 투명하게 판단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권력 지향적으로 움직이는 검찰 대신 알파고가 기소권을 가지면 좋겠다”

 

이런저런 불만이 쏟아졌다. “절차에 따라 재판하고 증거가 있어야 이기는 거니 변호사가 왜 필요하냐. 키워드를 넣어 알파고가 서면으로 제출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논의까지 이어지면서, 드디어 국회에서 법조 영역에 알파고 적용 여부를 두고 공청회까지 열렸다. 

 

변호사가 되기 전, 2000년대 제조업체 해외영업부에서 일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초반에는 거래처에서 수주를 받으면 생산, 구매, 영업 등 부서 담당자들끼리 모여 회의를 했다. 얼마 후 정보만 입력하면 가안이 나오는 SAP/R3라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제 담당자들끼리 얼굴 볼 일 없겠구나 싶었는데 회의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물량이 갑자기 폭주하거나 반대인 경우 SAP/R3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자 회사는 선적 서류 작성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여직원들을 죄다 자르고 시스템을 관리하는 부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회의는 계속됐다.

 

법적 분쟁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일은 어느 것 하나도 같지가 않다. 비슷한 유형이 있지만, 상황도 증거도 다르다. 그러니 결론도 다르다. 법이 요구하는 증거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무시해서도 안 되고, 그럴듯한 증거가 입력됐다고 무조건 손을 들어줄 수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고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해줘야 하는 일이니까. 그러니 그 판단을 기계가 할 수 없고, 기계가 수사할 수도 없다. 당사자를 대신해 떠드는 변호사 업무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인간의 일을 기계에게 판단하게 하다니, 가능하지도 않지만 가능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알파고가 사람의 죄를 판단하고 사람을 두둔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어? 그런데 TV를 보니 법조계 알파고 도입 여부를 둘러싼 국회 공청회가 얼렁뚱땅 끝이 났다.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해서 바꾸기 위해서는 정책과 법을 바꿔야 하는데, 그 일을 해야 할 이들이 법조계 인사들이다. 입안자가 자기 밥그릇을 내놓아야 하는 일인데, 될 리가 있나. 괜한 걱정이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씁쓸함이 몰려왔다. 앞으로도 나는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는 선배들의 보호 아래 변호사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사회로부터 받은 기득권이 사회를 위해 사용되는 날이 있을까. 2184년을 기다려봐야겠다.

 

이은의(변호사) 

 

 

 

 

 

 

 

 

 

 

 

 

인공지능과 시()에 대한 일말(一抹)의 추론

 

 

1973년 충북 보은 출생

2009년 「시인동네」신인상 수상

시집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내가 당신에게 “인공지능도 시()를 쓸 수 있을까?” 묻는다고 가정하자.

 

황당하다면 황당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그렇다면 그 “아니요!”의 근거는 무엇인가? 강력한 반대 근거를 제시하는(앞으로 조목조목 제시할 것이다) 논리에 반박할 논거(論據)를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거꾸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 근거를 나에게 보여 주시오!”라고. 이 같은 질문을 답변으로 던지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교묘한 굴복을 했다는 의미다. 나는 그 근거를 댈 수 없으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근거로 자신을 설득해 달라는 논리이다.

 

나는 단호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라. 백 년 전 까지만 해도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과학 기술의 진보(進步)에 따라 미래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심하는 그것,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시대가 멀지 않아 도래할 것이다.”라고.

당신은 나의 추론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시를 쓰는 사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시인(詩人)이다. ‘흔히’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만큼시인이 많기 때문이다. 자칭 타칭,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시와 관련된 단체, 예를 들어 작가회의나 문인협회, 시인협회, 그리고 수많은 사설 단체들의 숫자를 다 합하면 몇 만 명은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떼거지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 인공지능이 놀라운 능력의 시를 쓰기 시작하면, 숫자는 무의미에 불과하다.

 

나의 논리는 강력한 반발에 부닥칠 것을 직감한다. 근대 신문에 실린 찰스 다윈의 삽화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이 문제는 시인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특히 전업시인들의 경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자존심의 문제가 더 크다.

 

타 문학에 비해, 예를 들어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라고 불리는 것에 비해 시인은 –인()이라고 불린다. 자존심 하나로 지켜온 세월이 얼마인가. 시인(詩人)이라는 자존심마저 무너진다면 시인이 시를 쓸 아무런 근거도, 명분도 사라지게 된다. 시는 소멸할 것이고, 박제되어 박물관에 전시되는 인간의 여러 고전(古傳) 중 한편으로 남을 것이다.

1. 인공지능(人工知能)의 원리

 

물화(物化)된 인간 지능의 상징, 인공지능은 얼마나 발전을 했을까? 지금 현재의 기술 발전 수준을 논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진보하고 있고, 멀지 않아 엄청난 미래에 도달할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사용 중인) 기술은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과거의 기술이다. 실용화라는 단어가 가진 언어의 상징성은 ‘과거’라는 직접적 증거다.

 

세계의 석학들이 인공지능 무기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린 기사나 체스 세계 챔피언이 인공지능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것이나, 경제와 스포츠 기사를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는 기사는 더는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물체를 인식하는 것을 거의 완벽히 해결했을 뿐더러, 구글(Google)이라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여 다양한 자료를 취합·재생산할 수 있는 상태, 논리적으로서의 인간의 능력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뛰어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는? 시인으로서 기술의 위험한 도발에 직면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추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선 먼저, 인공지능 구조(system)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인공지능에 완벽한 알고리즘(algorithm)을 가지고 있다면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다.

 

1. 입력 : 외부에서 제공되는 자료가 있을 수 있다.

2. 출력 : 적어도 한 가지 결과가 생긴다.

3. 명백성 : 각 명령들은 명백해야 한다.

4. 유한성 : 알고리즘의 명령대로 수행하면 한정된 단계를 처리한 후에 종료된다.

5. 효과성 : 모든 명령들은 명백하고 실행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알고리즘을 아는 것은 인공지능 진행방식을 아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고리즘이 인공지능 전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이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명확히 정의된 명령」의 집합이며, 한정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고리즘의 관점으로 시를 제작한다고 가정을 하자. 먼저 입력, 방대한 문장의 데이터가 ‘구글’이나 ‘네이버’를 통해 제공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출력, 입력이 가능하면 출력도 가능하다.

세 번째로 명백성, 특정한 상징과 비유를 가지는 문장을 완성한다는 문학 기술(이제 문학도 하나의 기술로 볼 수 있다)의 명백성이 존재한다.

네 번째로 유한성, 알고리즘의 명령대로 수행될 것이며, 인공지능은 어떤 인간보다 성실히 이 작업을 마칠 것이다.

다섯 번째로 효과성,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에 따라 명령 자체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이 쓰는 시보다 더 뛰어난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할지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알고리즘의 개념(다섯 가지 수행과정)’으로 추론할 때 ‘인공지능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에 근접할 것이다. 인간의 뇌도 알고리즘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시를 쓰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언어는 0과 1로 만들어져 있다. 0이 참이라고 한다면 1은 거짓이다. 참과 거짓을 무한 반복하면 어떤 논리값이 만들어진다.

 

인공지능 개발이 어려웠던 이유는 참과 거짓 사이(0과 1이 아닌,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에 애매모호한 (정의할 수 없는)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탁구공과 골프공을 비교했을 때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공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골프공을 탁구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탁구공을 골프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은 참과 거짓의 명제를 벗어난 선택이다. 인간의 선택은 주변 상황에 따라 옳을 수도 있으며,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 컴퓨터는 선택의 오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항상 옳은 답만을 구한다. 만약 틀린 답을 구할지라도 그것은 개념적으로 옳은 답이다.

 

이 문제에 대안은 존재한다. 인간의 시각적 기능을 대입하여 명백하지 않는 것은 무작위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난수(亂數)를 사용하듯. 물론 여기에 인위적이라는 문제와 함께 인간의 자유 선택과 다른, 앞서 말한 틀린 것을 구한 값도 개념적으로 옳은 답이라는 변증법적인 문제에 도달한다.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통해 인간의 의지란 기계와 다르게 순수하며, 언제나 자유의지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고 역설적으로 두둔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할까?’라는 궁극적인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 인간은 생체 지능 컴퓨터

 

인간의 행동 패턴을 조금만 유심히 관찰하면, 창의적인 행동보다 반복적이고 유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알람시계처럼 같은 시간에 깨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출근하며, 컴퓨터와 한 몸이 돼서 일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일하고 퇴근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대부분의 활동(큰 행동 패턴으로 봐서)이 이와 같다. 주말이면 이 범주를 벗어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 패턴으로 보면 한 주일은 지난 주일의 패턴과 비슷하다.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의 행동패턴이 유사하고, 모든 사람의 생체주기는 유사하다.

 

어찌 보면 인간의 두뇌가 아닌 ‘인공지능보다 낮은 기능의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행위의’ 기능만 가지고 있어도 인간과 같은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외모 구별에 문제만 없다면 우리는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을 오랜 시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인간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의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유사한 개념인 ‘생체 지능 컴퓨터’으로 작동한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이것은 문학적 접근방식 아니다. ‘인공지능 컴퓨터’는 문학적인 텍스트로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낡은 개념이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파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진보적인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체 지능 컴퓨터라면, 인공지능 컴퓨터도 시를 쓸 수 있다! 일종의 귀납적 추론이다.

 

컴퓨터로서의 인간이라는 생체 컴퓨터(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와 기계적 기능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다른 것은 그 에너지원을 무엇으로 하고 있느냐가 전부다.

인간이라는 생체 컴퓨터는 인간이 섭취하는 ‘다양한 영양소’에서 추출하는 전기에너지이고, 인공지능 컴퓨터는 ‘석유나, 가스, 원자력으로 생산된’ 전기에너지다. 결국, 전기를 얻는 방식이 다를 뿐 우리의 뇌나 컴퓨터의 CPU는 모두 전기에너지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논리 연산도 유사하다. 인간은 극단(極端)을 선호한다. 컴퓨터가 0과 1로 연산을 하듯이. 인간에게 있어 논리의 접근 방식은 보통 두 가지이다. 칸트가 ‘3대 비판서’에서 말한 선과 악, 옳음과 거짓, 미와 추, 친구와 적 등의 개념은 ‘결국 나에게 유리한가, 그렇지 아니한가’의 개념이다. 나에게 유리한 것을 1로 놓으면, 나에게 불리한 것은 0이다. 1과 0의 계산으로 인간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때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리를 거부한다. 때때로 나에게 불리해도 0을 선택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성’이라고 부르는데, 인문학자는 분명 ‘이성’이 인간이 컴퓨터와 가장 다른 요소임을 강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까지 연산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 스스로가 이성이라는 철학적 허구에 빠져 있지 않은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하나의 로봇이 등장한다. 부처의 현신과도 같은 논리를 가진 안드로이드 로봇. 사원의 수행자들은 그 안드로이드를 하나의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인정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를 만든 회사는 안드로이드의 행위를 시스템 오류라고 평가 절하한다. 수행자들은 안드로이드를 지키려고 하지만 회사의 강력한 반발과 안드로이드 자신의 결정에 따라 폐기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로봇이 불성(佛性)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어쩌면 ‘로봇이 시를 쓸 수 있는가’ 보다 쉬운 문제다. 철학은 철학으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다. 철학은 개체다. 철학은 희랍시대에 확립된 이후 변증법적인 추구를 목표로 한다.

 

거칠게 말하면 철학은 하나의 연산행위다. 철학적 논리에서도 컴퓨터는 0과 1의 숫자를 고르면 된다. 컴퓨터는 지금 까지 수많은 인간이 개념화 시킨 철학적 데이터를 이용해 인간이 말하는 개념의 옳고 그름을 심판할 수 있다.

 

만약 로봇이 종교적 데이터에 철저히 따르고, 그 종교적 데이터에 따라 절대자의 폭력에 항거하며 민중의 편에서 스스로(알고리즘화 된 스스로의) 전원을 차단한다면 그 로봇은 그 어떤 종교에서나 인간의 이성적 가치를 초월한 성자(聖者)가 될 수 있다.

 

3. 인공지능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살펴봐도 시를 쓰는 사람은 소수다. 시는 문학 장르 중 가장 어렵고 접근하기 난해한 장르다. 시는 단순히 문장의 재배치나 비트겐슈타인 방식으로 말하는 ‘철학적 언어의 놀이’가 아닌 언어의 순수성에 입각한 ‘상징과 비유의 문학’이다.

 

언어의 순수성은 논리적 문장과 비논리적 문장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게 한다. 논리적 문장은 문장의 문법에 충실하지만, 비논리적 문장은 문장이 전통의 문법적 구성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비문(非文)이며 무문(無文)이기도 하다. 문장이면서 문장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지식인의 특권은 아니지만, 한국어를 안다고 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도, 문장의 독해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시인(詩人)이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내지 못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자신만의 길()을 가진 시인에게는 고유한 문법이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문학 장르로의 합류를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찾으면, 인공지능은 시를 쓰지 못한다는 이상적인(고귀한 플라톤의 철학처럼) 추론에 이른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작은 피난처에 불과하다. 노아의 방주라는 특별한 해결책을 찾은 것도 아니다. 타조처럼 작은 구덩이에 머리를 박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형상이다. 자신의 엉덩이 살이 붙어있는지 잘려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인공지능이 시()의 형이상학을 극복하지 못하라는 법이 있는가? 구글(Google)의 데이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구글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이다. 구글은 자본주의 문명의 절대 권력을 가진 신()과 같다.

방대한 데이터에는 온갖 종류(인종과 언어를 넘어서는)의 시의 데이터를 포함하며, 시를 분석한 평론, 전문적 논문을 포함한다. 만약 몇몇 악마적인 신앙을 가진 해커가 배움(STUDY)이란 특별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인공지능에 축복의 성수를 붙는다면, 인공지능은 어쩌면 인간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법의 시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이런 일들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어떻게 시의 문장을 조합할 수 있는가? 정말 인공지능이 시를 제작(製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인공지능이 처음부터 모든 시를 완벽하게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언어 번역 프로그램의 진보와 같다. 우리는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손쉽게 만난다.

 

처음 번역 프로그램을 접하게 될 때면 마법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이내 실망하게 된다. 번역이 너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번역 프로그램을 보면 기술이 진보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 멀지 않아 완벽한 직역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그리고 그 이후 직역을 넘어 의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의 진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인식하는 번역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사람의 분위기나 기분까지 인식하면 우리는 어떤 외국인과도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언어의 국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인공지능공학자라면, 그래서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게 하는 알고리즘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인공 번역기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할 것이다.

 

언어의 습득은 모방을 기초로 한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거칠게 말하면 문학은 일어날 것 같은 현실(리얼리티)을 문자로 모방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상황은 문자화되었다. 애니미즘을 비롯한 종교의 신비성은 물화(物化)된 계몽에 의해 사라졌으며(문자화, 데이터화 되었으며), 그 성스러운 증거는 바로 구글이다. 구글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이미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감정의 문장들을 이미 수집 완료했으며 지금도 수집하고 있다.

 

앞서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참고하면, 지금 개발된 알고리즘만으로도 스포츠나 경제 뉴스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문장 완성도는 이미 보장된 것이며, 이 문장에 비유와 상징의 코드를 가미하면, 완벽하지 않아도 어떤 특정한 시()를 닮은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를 구글의 방대한 데이터에 접속하여 다른 시와 비교하는 것이다. 문장과 단어, 그리고 해석상의 비유가 적절한 것인지. 적절하지 않다면 1과 0의 연역적 방식으로 끊임없이 단어와 문장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과도기적인(21세기 인간과 기계의 고도의 분업화처럼) 인간의 고유한 시적 기술(technology)을 인공지능기능에 일정 부분 가미하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일’이 시작되는 대사건일 것이다. 마치 초벌 번역을 하듯, 일차적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시의 방향과 구조(뼈대)를 완성하고 시인의 고유한 방식으로 첨삭하여 시인이 원하는 방향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만드는) 기능적인 면이 아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기술은 인공지능이 ‘자의적’으로 시를 쓰게 만드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진보는 다행스럽게도 ‘주체’라는 인간 영혼에 유사한 무엇을 만들지 못했다(만약 인공지능에 주체가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를 원한다면, 아직까지는 시스템화된 인공지능을 조작(시를 쓰게 명령을 내리는)하는 누군가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4. 시()를 포기한다는 것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 시작한다면 직업으로서 시인의 존재가치의 가능성은 극도로 낮아진다.

 

직업은 시대와 사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기에 직업의 필요성은 변한다. 인기 있는 직업도 순식간에 변한다. 과거 70~80년대 그렇게 많았던 버스의 안내양도, 80년대 인기를 누렸던 문서를 타자로 대신 작성하던 타이피스트도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부흥을 일구었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나 전화국의 전화교환수도 그 외의 셀 수 없는 다양한 직업군이 사라졌다. 산업의 고도화는 새로운 직업의 생성과 소멸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겐 시인이라는 직업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선택해야 하나. 아니 ‘대안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앞선다.

 

어쩌면 인공지능 발전을 막는 것이, 인공지능공학자를 테러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일까? 순수문학을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 저항단체를 조직하여 폭탄을 던지고, 차량폭탄 테러를 하는.

 

시인이 멸절하는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메멘토 모리. 우리의 과거 세대가 겪었던 죽음을 기억하라.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육체성을 가진 유대인을 뿌연 연기로 기화(氣化)시키는 홀로코스트(유대인식의)라는 놀라운 마법을 부렸다.

 

60년 전의 이 나라의 우울한 과거는 어떠한가? 총칼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역한 이들을 빨갱이라 몰아 학살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세계의 현장, IS라고 불리는 이슬람 과격단체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강간과 폭행, 학살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이 우리의 머나먼 미래, 시()에 대해서 관대함을 가질 수 있겠는가? 시()는 쌀도, 빵도 그 어떤 물질도 만들 수 없다.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 문학은 언제나 그늘로 숨어들었다. 문학의 부흥이란, 다시 말해 시의 부흥이란, 지극히 폭력적인 권력에 반하는 ’인본주의 운동’이다.

 

왜 우리가 시를 버릴 수 없는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가? 자본주의적인 경제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시의 명맥을 유지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도 지극히 단순하다.

 

시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를 버리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의지’를 얼마나 수혈 받을 수 있겠는가? 수혈은 수혈일 뿐이다. 수혈로 공허한 허기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혈을 받는 것은 내 피가 아니다. ‘인공적’인 피다. 시를 문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안드로이드 로봇이 된다는 것과 동격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라리 인간은 안드로이드 로봇이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 증오와 분노를 삭제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욕심은 영원히 사라지고 세계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인간 종족은 그것으로 영원할 수 있을 것이며, 결코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가정에 동의하는가? 당신은 평화주의자이기에 이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순화(純化)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만약 인공지능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뇌에 직렬로 접속할 기술의 진보가 이뤄진다면, 파시스트는 이와 같은 폭력적인 사건을 벌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수술대에 누워 ’평화‘라고 불리는 축복의 저주를 받을 것인가?

 

우리는 인본주의의 본질을 착각하면 안 된다. 평화는 인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편적 모습에 불과하다. 평화는 인본주의의 궁극적 가치와 목표가 아니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이 땅의 영원한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시의 최종목표는 평화가 아니다. 시인은 오직 평화를 위해 시를 쓰지는 않는다. 때론 시는 폭력을 선동한다. 시위를 선동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선량한 불을 지른다. 불가능에 맞서 싸우자고, 이때 시는 평화가 아닌 피를 부르는 악덕(惡德)의 발화이다.

 

5. 물화(物化)된 인간과 시()의 의미

 

과학은 진보하고 있다. 그 진보의 끝이 어디인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과학의 진보는 무엇을 위함인가? 진보의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이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런데 편리함이란 진보의 칼끝이 우리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 무엇이 진보이며, 무엇이 인간을 위한 것인지 진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진보의 변증법은 진보의 내면에 퇴행의 의미가 숨어있음을 누설한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도르노의 선험적 체험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의 진보 행위가 인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진보가 진보 자체를 위한 진보인지, 그 진보로 인해 인간이 퇴행을 거듭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이미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물화(物化)되었다.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공장에서 일한다. 만약 한 명의 근로자가 아프거나 특별한 일로 일하지 못할 경우 대체 부속품을 제공하듯 대체 인원을 투입한다. 공장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물화된 부속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잘 정립된 인간의 제도(예를 들어 법률이나 체계와 같은)는 궁극적으로 물화된 인간의 표상이다. 물화된 인간은 모든 문제를 마치 수학공식처럼 대입하여 옳고 그름, 잘잘못을 파악한다. 앞뒤와 전후 상황을 진지하게 따져보고, 철학적으로 생각할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제도라는 공식에 대입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그것에 합리적 무엇이라 이름 붙였다.

 

문학은 물화된 인간이 지켜야 할 인간성의 마지막 보류다. 만약 문학까지 인공지능에 양보한다면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문학은 인간의 정신적인 생식기(生殖器)이다. 인간이 생식기를 제거하면 다음 세대로 인간의 유전자가 전달되지 못하듯, 시를(문학을) 제거하면 우리의 정신적인 유전자는 우리의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류의 정신적 멸절이다. 인간이지만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껍데기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비()인간이다.

 

당신은 로봇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가?

철저히 0과 1에 의지하여. 좋고 나쁨이, 옳고 그름이...

내가 원하고 원치 않고 아닌, 기분과 감정을 벗어난 단순히 0과 1에 연역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원칙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회가...

그렇게 걱정과 배고픔이 소멸한 사회가 진정 행복한 사회,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가?

시()도 문학 작품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정신이 황폐해진) 배부른 돼지의 세계다. 

 

 

 

 

 

 

 

 

 

 


 

 

 

 

 

 

 

 

 

 

 

 

장(市場)은 수요와 공급의 필요에 의해서

고대(古代)부터 형성되어왔다.
오늘날에는 금융, 무역, 노동 등등의 수많은 시장이 있지만
동서양의 전형적인 전통시장과 공존하고 있다.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가 아닌

대화와 만남의 광장이기도 하다.

히 북한의 장마당은 물건을 사고팔고 만 하는 곳이 아니고

정보의 소통과 여론형성, 민주화의 통로로도

역할을 하고 있다. 장마당 자체만으로도

한은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서 지구촌의

람 사는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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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라차부리(Ratchaburi) 수상(水上)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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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르셀로나 보케리아(Boqueria)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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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푸쉬카르(Pushkar) 야채상.
푸쉬카르는 인도의 3대 신()의 하나인 브라흐마의 사원이 있는

 힌두교()의 성지이고,

매년 11월경 열리는 푸쉬카르 낙타축제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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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 레미 드 프로방스(Saint-Remy-de-Provence)의 올리브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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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롱베이(Halong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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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델란드, 알크마르(Alkmaar) 치즈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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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 Pike Place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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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치앙마이(Chiang Mai) 야(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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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카이로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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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마라케시(Marakkesh)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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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수상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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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몬트리올 Jean Talon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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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만달레이(Mandalay) 오이 판매상(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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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잔지바르(Zanzibar) 야(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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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ul, Afghan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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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다마스커스(Damas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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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카이로 칸 엘 칼리(Khan el-Khalili) 시장

 아프리카 지역의 최대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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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동북부 볼로냐(Bolog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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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 암스텔담, 꽃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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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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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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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산토리니(Santor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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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르네(Edirne), 터키 서북부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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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마데이라(Madeira)
 

 



 

메크네스(Meknes), 모로코 북부의 도시; 모로코의 옛 수도.

 
 
 

 

Los Angeles- Farmers Market

 

 

Los Angeles- Farmers Market

 

 

Los Angeles- Farmers Market

 

 

 

 

 

 

북한의 장마당

 

 

 


 

한국 서울 노량진 재래시장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조언합니다.

사진 잘 찍을 수 있다

 

 

Pay attention to the quality of light and not just the subject. /

좋은 빛을 찍는 겁니다. 좋은 대상물이 아니예요.


Shoot in warm light, around dawn or dusk. /

해가 있을 때 찍으세요.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입니다.

(새벽이나 해질녘 때 빛이 난색이 날 때 찍으세요)


Always take a look at the edges of the view field. /

언제나 시야의 가장자리(끝)를 주목하세요.


Shoot plenty of film. /

셔터 누르는 걸 아끼지 마세요.


Include a dominant element in the image. /

내가 담고자 하는 것의 제일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지 마세요.


Always carry a polarizing filter and tripod with you. /

편광필터와 삼각대를 챙기세요.

 

Be an observer. Be patient and watch life as it happens.

then be ready to capture the right moments

as they present themselves.
삶을 관찰하세요. 기다리며 지켜보세요.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사진으로 담으세요.
 

Don’t bog yourself down with all the latest gadgets.

The real art is being able to communicate and

to understand what the message is.
최신의 장비로 당신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지 마세요.

진정한 사진은 그것이 말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몬타나주에서 발생한 슈퍼셀, 토네이도를 발생 시키는 현상>

 


 A lot of amateurs make the same mistakes: not thinking about what they’re shooting;
not considering the light; staying on the outside and not getting in where the action is;
using a flash in a big interior where it won’t do any good.
많은 아마튜어는 공통된 실수를 하곤 합니다.

뭘 찍고 있는지 생각치 않고,

빛을 무시하며, 먼가 사진찍기 좋은 것에서 멀리 있으며,

아주 큰 실내에서 플래쉬를 도움도 안 되는 것을 사용합니다.

Never leave home without lots of extra batteries, a small flashlight,

a compass, a magnifier, and a weather radio.
풍경사진을 찍을 때는 충분한 건전지, 작은 손전등,

나침반, 쌍안경과 작은 라디오를 챙기세요.

 

 

<방글

 

라데시의 여인, 라마단 기간에 가족들 품으로 가기 위하여

열차 칸 중간의 이음새에 무임승차 한 장면

 


Shoot more pictures and throw away the bad ones.

You’ll try more things: angles, exposures, and so on.

The one way to get the photo right is to try lots of different approaches.
많이 찍고 그중에서 고르세요.

구도와 노출값등을 바꾸어 여러 가지를 시도하세요.

좋은 사진을 찍는 방법은 같은 걸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The human eye sees differently than a camera,

so try to imagine how that image will look in a photograph.
우리가 보는대로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사진으로 찍혔을 때를 머릿속으로 그리세요.

Don’t just point the camera at the scene.

Try to create a sense of depth and put things in the image for scale.
눈에 보이는대로 찍는 것만 하지 말고

풍경을 사진에 적절하게 늘어놓는 자기만의 감을 만드세요.

Get up early and stay out late.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세요.

 

 

 

<자연보호를 일깨우는 사진,  돌고래가 비닐을 끼고 헤엄치고 있습니다.>


Force yourself to “think little” and to “think big” by doing close-ups and long shots.
You’ll gain a lot in the process of looking for details and grand-scale images.
작은 피사체는 "작게 생각하고" 너른 풍경은 "크게 생각하세요"

Try carrying a right-angle viewfinder and put the camera on the ground

or up high on a ledge and experiment.
적절한 앵글파인더를 써서 사진기의 보는 눈높이를 바꿔보세요.

Meet the people you are going to photograph

and establish a rapport before you begin shooting.
사진 찍을 사람과 먼저 친해지세요.

Use wide-angle lenses for close-ups, because

it’s easier to create a sense of perspective.
다가가서 찍을 때는 더 광각의 렌즈를 쓰세요.

원근감을 만들기가 더 쉽습니다.

Carry a compact folding reflector to illuminate objects in the foreground.
접는 반사판을 가지고 대상물의 앞에 낮은 곳에 두면 빛이 더 삽니다.

 

 

 

 

<인도네시아 어린들이 투계를 하는 모습>
 


When you are traveling, go to a souvenir shop

and pick up a bunch of postcards for the place you’re visiting.

It will let you see how others see each place so you can

try to approach it more creatively. Invariably,

you will also find something that you didn’t know was there!
여행에서는 관광상품 가게에서 그 지방의 엽서들을 보면

다른 이들이 보는 방법을 볼 수 있고

당신은 더 창조적인 사진을 위한 다른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지방에 있는지 몰랐던 새로운 장소나 볼거리를 찾을 겁니다.

Try to get close enough to your subject to capture the important details.
한발 더 다가가세요. 아니 뚜벅뚜벅 걸어가세요. 찍고 싶은 구도에서 더 다가가세요.

Experiment with different types of film in different lighting conditions.

For example, try using tungsten film outdoors, perhaps using

a fill-flash with a daylight-to-tungsten gel taped over the head. /

여러 상황에서 여러 필름을 여러 빛의 상황으로 실험하세요.

Try using a fanny pack rather than a camera bag.

It is not only lighter but safer while traveling in foreign countries.
허리쌕을 이용하세요. 가볍기도 하거니와 여행지에서 더 안전해요. 도난을 막아요.

 

 

 

<설산을 가는 사람들>


Take a tripod, which allows you to use slower speeds and longer lenses during twilight.
삼각대를 쓰세요, 더 낮은 스피드와 망원렌즈를 쓸 수 있도록

Be as basic as you can in your equipment.

Try to use just a camera, a couple of lenses,

and not much more. It keeps you thinking about what you’re shooting.
단촐하게 꾸려서 다니세요. /

사진기 한개에 렌즈 두어 알에 몇가지 악세사리만 챙기세요.

촬영에 몰두할수 있게 도와줄거예요.


Try to include people in every picture you shoot. /

사람이 들어가야 사진이 재밌어 집니다.

Make sure you’ve got film in the camera,

set the ISO dial, and don’t shoot into the sun.
필름은 넉넉하게 갖고 다니시고 필름감도를 맞추어 찍는 걸 잊지말고,

해는 찍어봐야 사진만 버립니다.

When shooting horses, putting pebbles in an empty film canister

and shaking it really gets the animals’ attention. They think it’s food so they respond to it.
말들을 찍을때는 작은 자갈 몇개를 빈 필름통에 넣어서 흔들면

관심을 가질겁니다. 먹인 줄 안데요.

Always have a sturdy tripod handy and never leave home

without duct tape in your camera bag. Tape around the camera

to keep out dust and water. You can also writes notes on the tape

to organize caption information at the end of each day.
튼튼한 삼각대를 항상 휴대하고, 넓은 종이 테이프 없이 떠나지 마세요.

먼지로부터 카메라를 보호해줍니다. 또한 촬영기록을 할 수 있죠.

 

 

 

 

<왜가리가 고기를 잡은 모습>

 

 

 

<가문비 나무 숲에 중앙에 노랗게 다른 나무가 포인트를 주었다>

 

 

 

<알래스카 갈색곰>

 

 

 

<아프리카 케냐에서 두마리의 기린이 나무를 중앙에 두고 대비되는 모습을 촬영>

 

 

 

<발리섬에서 노인이 장애 어린이에게 전통악기를 불어주는 모습>

 

 

 

< 아이슬랜드 Fimmvorduhals산의 화산 분출하는 순간포착한 사진>

 

 

 

 <캐나다에서 촬영한 시라소니>

 

 

 

<앙고라에 있는 산중의 도로의 야경>

 

 

 

<흑해의 푹풍과 배의 모습>

 

 

 

 

 

 

 

 

<티벳의 소년, 아버지의 손을 꼭 잡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꾼>

 

 

 

 

 

 

 

 

 

 

 

 

 

 

 

가끔 길거리 지나갈 때, 외국들이 “너 신발 너무 예쁘다~” 이러면서 칭찬하잖아요~

 

첨엔 엄청 당황했죠~ (모르는 사람이 말 걸어서… 그것도 영어로..ㅋㅋㅋㅋ)

 

 

평소에 한국말로도 칭찬을 잘 하지 않는거 같아요~ (저만 그런가요?)

영어표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단어는 너무너무 쉬워요~

단지 칭찬에 인색해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ㅠㅠ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고 하는데, 칭찬하는 표현 듣고 오늘 당장 한번 써먹어 봅시다~

데이브가 너무 재미있게 설명해 줘서 귀에 쏙쏙 들어 오네요~

 

 

1. ( )가 너한테 잘 어울리네

___ looks good on you

  예)

  Your hairstyle looks good on you

  (니머리 스타일 너무 잘 어울린다.)

  Those pants look great on you

  (그 바지 너한테 정말 잘 어울려)

 

2. 머머머는 참 멋짐

 That’s a cool 머머머

 

예) That’s a cool hat (참 멋진 모자네)

That’s a cool pig (저 돼지 참 멋지다)

 

3. 그여자애 엄청 예뻐

She’s hot

 

4. 너 춤 진짜 잘 춘다~

You dance very well

You dance very good (X)

 

5. 너 목소리가 너무 예쁘다.

You have a beautiful voice

 

6. 너 살 많이 빠졌다

You’ve lost a lot of weight

 

7. 너 생얼 너무 괜찮다.

You look great without make up

 

8. 너 웃는 거 너무 좋다.

I love your laugh

 

9. 너랑 있는 게 너무 좋다.

I love being with you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Behold the man)는 말은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가 먼저 한 말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그를 처형해 달라고 조르는 무리들에게 선언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한복음 19:5)

 

이 제목으로 철학적 자서전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F. W. Nietzsche(1844-1900), 그는 독일의 Bonn 대학과 Leibzig대학에서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고 Swiss의 Basel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그의 ‘초인(超人)’을 주장하는 유별난 의식구조의 주인공으로 남들이 감히 입 밖에 내지도 못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철학자였습니다.

예컨대 ‘신()은 죽었다’는 등의 돌출발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두철미 진실한 철인이어서 그가 “죽었다”고 선포한 그 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 신’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제도화된 종교를 가차 없이 비판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신론자였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상파괴자’(Iconoclast)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니 그의 초인적 인식도 한계에 도달하여 결국 그의 강인한 정신력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다가 한참 일할 나이인 56세에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인간 사이에서는 가히 ‘영웅’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한 거인이 마침내 쓰러진 것입니다.

 

Nietzsche는 진정 ‘Uncontrollable’한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를 생각하면 P. B. Shelley의 ‘서풍의 노래’(Ode to the West Wind)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도 Shelley처럼 “I fall upon the thorns of life! I bleed!”라고 노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는 Nietzsche의 전투적인 ‘위대한 정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를 가리키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고 외치고 싶습니다.  

 

 

 

 

 

 

 

 

 

 

 

 

 

 

 

 

 

 

 

 

 

 

 

 

 

교회를 소통의 장으로 만들어 신자 감소에 대처

 

500여 년 전 독일의 사제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종교개혁은 인쇄술 덕분에 대대적 혁신운동으로 발전했다.

 

1517년 루터는 면죄부 판매 등 로마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대학 성()교회 정문에 붙였는데, 15세 중엽부터 확산한 인쇄술 덕에 라틴어로 된 그의 글이 독일어로 번역, 출판돼 널리 퍼지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댕긴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한해 앞둔 올해, 독일 개신교회들이 인쇄술을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일고 있는 인터넷 시대에 맞춰 다시 한 번 '개혁'에 나섰다.

 

유럽 내에서도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꼽히는 독일에서 수천 개의 개신교회가 교회 안팎에 무료 무선인터넷(와이파이)망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 BBC 방송 등은 독일 개신교회들이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일대의 220개 교회를 시작으로 2017년까지 현지 3천여 개 교회에 무료 무선인터넷망인 '갓스폿(Godspots)'을 구축하기로 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갓스폿'은 무선랜 서비스 지역 '핫스폿'이 1만 명당 단 2개일 정도로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은 독일의 인터넷 이용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양식'과 같은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조치는 물론 단순한 '서비스' 차원은 아니다.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탈() 종교' 현상이 두드러지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사람들의 발길과 관심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유럽에서는 젊은층의 탈종교 경향과 종교인구의 고령화 등으로 종교를 믿거나 교회에 가는 인구가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갓스폿'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일단 해당 교회 건물과 교구, 신학 관련 콘텐츠 등 정보가 담긴 홈페이지로 첫 화면이 연결된다. 여기에서도 이용자들에게 최대한 교회에 관한 정보를 노출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현지 교회의 IT 매니저는 "사람들은 지금도 과거만큼 신앙심이 깊지만, 그들이 소통하는 공간은 디지털 소셜 네트워크와 커뮤니티로 바뀌었다"며 "'갓스폿'을 통해 디지털 세상에 친근하고 안전한 집과 같은 교회를 짓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루터가 종교개혁을 위해 당대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인쇄물을 이용했듯이,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도 교회가 이 시대에 맞게 발전하고 적응하도록 하는 데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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