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0,  2016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 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직원들에 세족 식 해주는 CEO…"직장이 행복해야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구현되는 사랑의 공동체...... 한국교세라(Kyocera Korea) 정공의 홈페이지를 방문했을 때 만나는 회사의 비전이다.

 

교회도 아닌 세상 한 가운데 세워진 한낱 회사의 비전이 교회보다 더 강한 인상을 던진다.

 

CEO는 직원들에게 손수 세족식을 해주고 해외여행을 보내준다. 한국교세라정공 전희인 대표는 IMF때 하나님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십자가 경영'을 선포해 위기를 극복했다.
 
전 대표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18년 전부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직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회사 내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는 든든한 가족이 됐다.
 

 

일찍이 십자가 경영 선포...전 직원 '사랑의 공동체'로 하나 돼
 
'한국 공구시장의 산 증인' 한국교세라 정공이 위치한 인천 남동공단. 찬양 소리가 월요일의 적막한 아침을 깨운다. 직원예배는 한국교세라정공 임직원들이 매주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국교세라 정공은 일본 교세라 그룹과 한록물산의 합작 회사로 산업 전반에 쓰이는 절삭 공구를 생산하고 있다. 220개가 넘는 자회사 중에서 안정된 경영과 지속적인 성장으로 손꼽히는 기업이기도 하다.
 

한국교세라정공 전희인 대표는 IMF 직후, 회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십자가 경영'을 시작했다.

 

직원들의 생계를 책임져달라며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었다. 전 대표는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직원들을 아끼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돌파했다.
 

"회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주셨어요. 그때 주셨던 말씀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마태복음 6장 33절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삶의 현장에서 비전과 십자가 경영을 선포했습니다."
 

전 대표의 경영철학과 기독교적 기업문화는 일본 본사의 주목을 받아 우수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교세라 그룹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의 인정도 받았다.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님은 불교철학을 하신 분이에요. 자회사가 크리스천 경영을 한다고 하면, 반대하실 줄 알았어요. 우리 회사가 매번 목표를 달성하고 매출이 증가하니깐 감사하게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교세라 그룹 내에서 저만큼 나이가 많은 CEO도 없는데,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 감사할 뿐이에요."
 

한국교세라정공은 18년째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구현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전 직원들도 서로를 알고, 믿음 안에서 하나될 수 있도록 공동체 모임을 꾸려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책임지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래서 만든 게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영업, 기술, 생산, 기획 팀이 골고루 섞이게 제비를 뽑습니다. 리더들에게 일터에서 즐거운 공동체가 되라고 주문했어요. 다른 CEO들에게도 주님 말씀대로 일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습니다."
 

직원들 중에는 전 대표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된 이들도 많다. 지금까지 180여 명의 직원들이 공동체의 사랑과 섬김에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만났다.

올해는 전체 410명의 직원 중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40여 명의 직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자나깨나 직원들 생각뿐이라는 한국교세라 정공 전희인 대표. 전 대표는 앞으로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하는 직장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단 한 대의 악기에서 500가지 음을 낼 수 있는 일렉톤 피아노. 주사랑교회 이슬기 집사는 2011년 SBS <스타킹>에 출연해 스타워즈 주제곡을 연주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스타킹 전속 오케스트라로 활발한 활동을 해했던 그가 최근에 찬양사역자로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렉톤 피아노로 전하는 '하나님의 위로'
 

500가지 원음이 내장된 '일렉톤 피아노'. 실력에 따라서는 100인조 오케스트라 연주도 가능하다. 주사랑교회 이슬기 집사는 국내에서 일렉톤 피아노로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연주자 중에 하나다.
 

이 집사는 자신을 음악인으로 키우겠다고 서원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음악을 시작했다. 평생 음악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느 날 보게 된 일렉톤 피아노 연주로 인생이 바뀌게 됐다.
 

"한창 피아노를 공부하던 중에 외국의 일렉톤 연주자를 우연히 보게 됐어요. 한 악기에서 수백 가지 소리가 날 수 있는 게 너무나 멋있었죠.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가르쳐줄 만한 분이 없어서 독학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하면 멋진 사운드를 낼 수 있을지 밤을 새가며 연습했습니다."
 

2011년 SBS 스타킹에 '일당백 피아노'로 출연한 이 집사는 영화 스타워즈의 주제곡을 연주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스타킹 전속 오케스트라로 활동하며 청와대 특별만찬,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광복70주년 기념식 등 국가적 행사에도 초청되는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이어왔다.
 

국내에서 독보적인 일렉톤 연주자로서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지만, 영적으로는 한없이 침체됐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찬양 사역을 하지 않고 그냥 연주를 할 때는 사실 너무 힘이 들었어요. 늘 아프고, 피곤했던 것 같아요. 세상적으로 봤을 때는 가장 성공하고 높았던 때인데, 영적으로는 한없이 아래에 있었죠. 찬양 사역을 시작하면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커서 기쁘고 감사할 뿐이에요."
 

이 집사는 주사랑교회 담임목사인 장상길 목사의 권유가 직접적인 계기가 돼 지난해부터 찬양 사역에 나섰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그 분을 위해 사용하라는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 찬양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방송 출연이나 기업 초청 행사도 나가지 않고 있다. 주님을 위한 일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지금은 전국을 돌며 자신처럼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공연에 주력하고 있다. 다윗이 사울 왕을 괴롭히던 악신을 떠나게 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런 연주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가장 큰 기도제목이다.
 

"지금까지 제 힘으로는 설 수 없었던 무대에 하나님이 많이 세워주셨어요. 그게 다 지금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제 연주를 듣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방송에 정기적으로 출연할 때보다 하나님을 위해 찬양하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이슬기 집사. 이 집사의 연주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가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기대해본다. 
 

 

 

 

 

 

 

 

 

 

 

 

 

 

 

 

 

 

 

 

 

Minnesota churches wish Muslim neighbors a ‘blessed Ramadan’

 

미국 미네소타 주 교회연합이 '무슬림 환영' 캠페인을 한달 넘게 지속하고 있어 미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오고 있다. 
 

교회연합은 무슬림 이웃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성도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라마단에 축복을'이란 팻말을 집 앞마당에 설치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캠페인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미네소타 주가 IS를 포함한 다수의 이슬람 테러단체 모집의 근거지가 돼왔기 때문이다. 
 

활발한 모집 활동으로 4명의 남성이 1년 전 IS에 가담하기 위해 시리아로 가던 중 체포된 일도 있었다. 이 중 한 명인 하나드 무세(19)는 현재 테러단체 지지 혐의로 복역 중에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내 가장 큰 소말리아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미네소타 주에서는 소말리아에 근거한 테러단체 알-샤바브 모집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역 변호사 앤드류 루거에 따르면, 2006년 알-샤바브가 미네소타 주 청년을 모집하기 시작한 이래 미네소타 주는 해외 테러단체 모집의 중심이 됐다.

그는 "미네소타 주는 테러범을 모집하는 테러단체와 전쟁 중"이라고 말했다.
 

미네소타 상원의원 알 프랭켄의 지지 하에 진행된 이번 캠페인 기간에 미국 정부는 IS에 가담하려던 3명의 남성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캄보디아는 필자에게 <킬링필드(Killing Field)>라는 영화로 다가온 나라였다. 1994년경 공 베드로 선교사 가정을 그곳으로 보내려던 중, 필자가 먼저 방문한 캄보디아는 수도 프놈펜이 조그만 도시의 모습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정도로 도시는 단순했는데, 필자가 최근에 그곳을 다시 들렀을 때는 놀라운 경제 성장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한인 선교사들이 그 땅을 'Living Field'로 바꾸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일곱 번 방문한 바 있는 필자는, 그 역사와 선교 현장을 복기해가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캄보디아 선교 이렇게 했어야 했다”라는 다음의 글을 적어보았다.

 

캄보디아인의 역사의식

 

그 땅에서 정령숭배, 힌두교, 불교는 약 2,000년의 역사가 있다. 우리는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캄보디아인은 앙코르 제국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하다. 서구의 기독교, 즉 가톨릭은 90년 프랑스 식민통치로 인해 이미지가 아주 이국적이고 적대적이다. 그러한 피상적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1994년부터 한인 선교사들이 몰려왔으니,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아류로 보이거나 유럽 기독교의 새로운 대리자로 느꼈을 것이다.

 

필자는 캄보디아 선교 역사에서 좋은 기회가 5번이나 찾아온 것을 확인하고,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 역사적 카이로스(하나님의 선교적 시간)를 놓친 것이 아쉬웠다.

 

캄보디아 선교의 카이로스를 놓친 5개 사례

 

1953년: 프랑스 90년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해였다.

 

미국의 선교단체인 C&MA가 개신교의 이미지에 대해 기존 가톨릭교회와 작별하고 그들에게 저항(Protest)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한 부분으로서 불교권과 함께 독립을 위한 연대적 행위도 하고 자금도 지원했었다면, 개신교 이미지를 새롭게 긍정적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1970년 론놀(Lon Nol) 정권 때: 

 

전국 주요 도시의 땅을 분양 받거나 민간과 정부로부터 구입(문서 만들어 놓음)해, Clinic, 교회(토착화된), 학교를 복합단지 식으로 건설하고 운영했다면, 지금의 좋은 기초가 됐을 것이다.

 

△1979년 폴포트 정권 멸망 전: 

 

그 어두운 시대에 민족지도자들이 임시정부를 태국에 세울 때, 개신교도 그 거사에 참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한국의 이승만/김구 임시정부 참조). 그리하여 폴포트 후 다시 귀국해 학교, 병원 그리고 교회와 삼각 사역을 했다면 지금의 개신교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993년 신정부 출범 때: 

 

한국 교회의 Holy Triangle 전략 구사처럼 부동산 확보와 함께 학교(한국형 국제학교) 그리고 상황화된 토착적 교회당과 클리닉(양방, 한방, 캄방)을 병행 운영하여 불교의 삼각 역할과 건전한 대비 관계 및 사회 변혁을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캄보디아의 불교 사원은 종교 행사 외에 학교와 단순 병원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13년 선거: 

 

이 선거 때 새로운 기회가 있었다. 시하누크 왕의 아들이 이끄는 왕당파(훈신뻣)가 몰락하고, 민중이 시하누크에 대해 실망할 때, 그 대안으로 진정한 캄보디아의 구세주로서 예수를 소개하고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했다면 개신교는 새 시대의 아주 좋은 대안이자 해법이 됐을 것이다.

 

결어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과거 역사를 복기하면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에 대비한다면 이보다 현명함이 어디 있겠는가?

 

캄보디아 선교는 현재진행형이며, 지금의 그곳 선교는 다소 소강상태에 와 있다. 필자는 지난 한국 캄보디아 선교 22년을 검토하고, 지나온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내일의 한국 선교는 그 땅에서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으리라. 

 

 

 

 

 

 

 

 

 

 

 

 

 

 

 

 


 

 

 

 

 

 

 

 

 

 

 

알프스 이북 아이스레벤(Eisleben, Saxony)에 살던 청년 수도사 루터는 꿈꾸어 오던 로마에 도착했다. 교황이 사는 로마 순례는 루터에게 경외와 거룩함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큰 기대감을 품게 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안겨 준 것은 기대한 것과 달랐다. 종교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은 세련되고 화려한 르네상스식 볼거리 문화가 덮고 있었다. 교황의 친족 등용과 성직 매매가 로마에서는 일상이었다.

 

루터가 머물던 로마의 수도원 수도사들은 교황청에 뇌물을 주고 성직을 얻은 사제들이었는데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 했다.

“당신은 밥줄입니다. 언제까지 나의 밥줄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더욱 놀란 것이 있었다. 이렇게 부패한 종교가 로마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부패가  일상 그 자체였고, 문화였다. 알프스 이북에서 온 청년 루터에게는 이 문화 자체가 충격이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이미 이탈리아에서 로마 교황청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고발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보면, 지옥에서 단테가 로마 교황 니콜라우스 3세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단테를 만난 니콜라우스 3세는 한숨을 내뱉은 후 고성죄로 자신이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고백한다. 고성죄는 성물이나 성직을 팔아먹은 대가로 돈이나 물건을 챙긴 죄이다.

그러면서 자기 뒤의 보니파키우스 8세와 클레멘스 5세 두 교황도 고성죄 때문에 곧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저주한다. 니콜라우스 3세의 말을 듣자 단테는 분노에 차서 고성죄를 범한 교황들을 신랄히 비난하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우리 하나님께서 성 베드로의 손에 열쇠를 넘겨 줄 때 많은 보물을 요구하셨는가, ‘나를 따르라’ 이외에는 요구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신곡’ 지옥편 19곡)
 

단테가 신곡을 쓰던 시기는 로마 교황의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였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의 탐욕이 오죽했으면 단테가 ‘신곡’에서 교황들을 고성죄로 신랄하게 비난한 후 줄줄이 지옥으로 보내버렸을까.

 

결국 단테는 교황 권력에 의해 추방되어 사랑하는 고국인 피렌체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라벤나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단테가 탐욕과 고성죄 때문에 교황을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묘사했다면, 조토 (Giotto di Bondone)는 고성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고위성직자를 그려 놓았다. 그가 그린 스크로베니 성당 내 최후의 심판에는, 지옥에 떨어진 고위성직자가 등장한다. 쓰고 있는 모자를 보니, 대주교인 것 같다. 대주교는 지옥에 떨어진 줄도 모르고, 지옥에서도 돈주머니를 받고 열심히 성직을 매매하고 있다. 단테나 조토 모두 다 종교개혁 이전의 인물들이다. 단테와 조토의 작품은 종교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한 당시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런데도 왜 이탈리아에서는 진작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쓴 야콥 부크하르트는 이렇게 풀이한다. 그에 의하면, 알프스 이남 지역, 다시 말해 로마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이탈리아의 종교문화가 세속화될 대로 세속화되어 더 이상 개혁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서울 남산에 처음으로 연극공연장이 생겼을 때 연극 관람의 기회를 가졌다. 제목은 [수치]라는 연극이었다. 연극의 수준이야 지금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일생일대에 큰 교훈을 얻었다. [수치가 실존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사라지면 실존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끄러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만 실존이란 주제였다.

 

제아무리 개혁을 논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교회는 공중에 주먹질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요즘 교회는 너무 뻔뻔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더 뻔뻔하다. 교인들 역시 뻔뻔하다.

 

로마교회가 세속화될 대로 세속화되다 보니 개혁은커녕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알프스 이북에 살던 루터의 눈에는 부끄러움도 없고 뻔뻔한 로마교회의 부패상이 눈에 보였다. 그래서 개혁을 시작했다.

 

500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이 지금 재현(再現)되려면 [부끄러움]이 먼저다. 부끄러워하면 회개하고 회개하면 부끄러워할 줄 안다. 수치(羞恥)를 느끼라. 그리하면 개혁을 이루리라. 하나님 앞에서.(장재언)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루터의 종교개혁 현장인 독일, 칼뱅의 활동 무대였던 제네바 등 종교개혁의 역사와 그 곳에서 벌어졌던 사건, 종교개혁자들의 활동 등을 살펴본다.

종교개혁 현장을 취재한 내용을 재구성해서 글을 쓴다.

 

 

 베드로 대성당

 

로마교회의 중심 베드로 대성당


 

로마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있던 곳에 세워진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 처음 세워졌으며 1506년 율리우스 2세 교황에 의해 지금의 대성당이 새롭게 건축되었다.

 

멀리서 보면 대성당과 부속 회랑이 하나의 열쇠 구멍처럼 생겼다고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하신 말씀에 따른 내용이다.

 

테러 위협으로 강화된 검색대를 통과한 후 대성당에 들어섰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미켈란젤로가 25세에 만들었다는 ‘피에타’(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였다. 누군가가 훼손을 시도한 후 유리에 갇혀 버린 피에타 상은 마치 오늘 교회가 마주하고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성당 정면을 향해 가면서 성화와 교황들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 그들의 안식처(무덤과 관), 베드로의 청동상 등을 둘러본 후 강단 정면에 자리한 발타키노와 베드로가 사용했다는 나무 의자에 청동을 덧입힌 성좌 등을 둘러봤다.

대성당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본 많은 성당을 압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 대성당의 모습을 본 후 로마를 죽은 자들의 도시, 거대한 기념물과 상징물에 갇힌 도시라고 일컫기도 했다. 거대한 석상과 건물, 화려함과 역동적인 회화를 전제로 한 로마 문화를 모르는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이국적이었다.

 

하지만 고대 중세 유럽의  평민들은 성서를 구경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글을 몰라 성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에게 성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다양한 성화와 성인상, 그들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으로 교회를 장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고 성상과 성화를 통한 경건의 주입이 지나쳐 우상숭배로까지 나아갔다. 결국에는 종교의 타락은 계속 심화되어 중세교회가 면죄부까지 판매하게 됐고 이것은 종교개혁의 촉매제가 되었다.

 

면죄부 판매의 목적이 교황권을 상징하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 확보에 있었다는 점에서 베드로 대성당 건축은 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라테라노대성당

 

중세 교황권의 상징 라테라노 대성당

 

베드로 대성당을 나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 성당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당이며 베드로 대성당이 건축되기 전까지 1000여년 이상 교황 좌가 있던 곳이다. 중세교회의 상징이며, 종교개혁의 핵심 대상인 로마교회의 상징과 같은 건물이었다.

 

성당 좌우 통로에는 12제자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들의 생동감있는 모습은 오늘 살아서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는 듯했다. 성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자들의 성격과 특성을 고려한 조각 작품중 열쇠를 쥔 베드로와 검지 손가락을 치켜든 도마의 모습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산스타 산스토룸

루터가 올랐던 계단 ‘산스타 산스토룸’

라테라노 대성당 앞 광장 옆에는 자그마한 건물에 산스타산스토룸(Sancta Sanctorum, 성스러운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 받을 때 오르내린 28개의 돌계단이다.

 

원래 예루살렘에 있었던 이 계단은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후 가져왔다고 한다. 나무로 덮힌 이 돌계단은 중세 시대 신부들이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무릎으로 올랐다고 한다.

 

이미 많은 순례객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죄 고백과 함께 용서의 기도를 하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한 계단에 한 가지 기도문을 외우는 그들의 무릎고행은 10여분 넘게 계속됐다.

계단 아래에 한참을 서서 고민하다 무릎을 꿇고 짧은 기도와 함께 계단을 오른다.

 

옆 쪽 다른 계단으로 걸어갈 수 있음에도 무릎기도를 선택한 것은 500여 년 전 수도사로서 이 계단을 오른 루터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했음이다.

 

루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루터'에서 그는 계단을 오른 후 받아든 면죄부를 과감히 구겨버린다. 아마도 고행이나 하나님을 향한 육체적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상징하는 장면일 것이다.

 

곧이어 초대교회 순교자와 성도들의 지하무덤이 있는 카타콤(카타콤베산 칼리스투스)으로 향했다. 카타콤은 로마 시내를 벗어나 아피아 도로 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이다. 카타콤은 지하 7층 규모지만 안전 문제로 현재 2~3층까지만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다. 지하 무덤의 복잡한 미로를 혼자 걷는 것은 불가능하고 가이드의 안내가 꼭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지하무덤 카타콤베

 

무덤 입구에서 카타콤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지하 무덤 입구에 들어섰다. 거대한 지하 공간의 통로를 따라 양쪽 벽에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간신히 한 몸 누일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은 4~5층으로 겹겹이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묻힌 초기 로마 주교, 즉 교황들의 무덤이 있는 방에 잠깐 멈춰 섰다. 다른 무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큰 대리석관 뿐이었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곳의 주인들은 무덤 발견 후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졌고 그들의 명패가 남아 로마 제국의 눈길을 피해 이곳에 묻혔던 그들을 추억하고 있었다.

 

 

쿼바디스 도미네교회

‘쿠오바디스 도미네?’를 다시 물으며

근처에 세워진 쿼바디스 도미네교회에 들렸다.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인을 향한 탄압이 거세지자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피신을 권고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로마를 떠났다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가는 예수를 만난 후 다시 로마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순교의 길을 갔다.

 

그가 예수를 만났던 곳, 그리고 예수께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가십니까?)'라고 질문했던 곳, “나는 네가 떠난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달리려 한다”는 예수의 말씀에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았던 곳, 바로 그것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입구 쪽 벽에는 이탈리아어로 교회의 유래에 관한 글이 새겨져 있다. 강단 오른쪽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그림이, 왼편에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린 베드로의 그림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중앙통로 뒤편에는 베드로가 서서 예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겼다는 발자국 대리석이 놓여 있었지만 쉽게 믿기 어려운 흔적이다.

 

‘쿼바디스 도미노 교회', 사도 베드로의 주검 위에 세워진 화려한 베드로 대성당과 로마를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작은 교회 중 예수님께 더 의미있는 교회는 어딜까?

 

중세 교회의 문제는 부패와 타락과 함께 개혁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낮고 깊은 지하 무덤을 마다하지 않았던 순수한 신앙과 ‘쿼바디스 도미네'를 일상 속에서 묻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되돌렸던 그 기억을 잊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낮고 천한 신분에서 고귀한 존재로 대우받으면서 스스로 그 권위에 갇혀버린 교회, 그 교회는 갱신의 거대한 파도를 결코 거스를 수 없음이다. 

 

 

 

 

 

 

 

 

 

 

 

 

 

 

 

 

 

 

종교개혁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교황이나 황제, 공의회 그리고 제국의회의 그 어떤 권력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의 개혁 수단은 설교와 펜이 전부였다. 그는 이 둘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복음무기와 방패로 삼았다.

 

종교개혁이 확산되어가는 과정에서 주된 원인은 루터가 번역했던 독일어 신약성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구텐베르크에 의한 활판 인쇄술의 출현이었다.

 

이로 인해 루터의 번역 성경은 수백만 부 인쇄되었다. 이 책들이 비텐베르크,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 독일의 50개 이상의 도시들에 배포되었다. 작고 귀한 성경책은 제후들과 사제들, 시민들, 농민들, 농부들, 기술자들과 교수들에게 보급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루터의 자국어 성경이 가장 크게 쓰임 받게 되었다. 특히 자국어 성경이 교황의 권위를 압도하면서 빛과 자유와 평안을 갈망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또한 은혜의 교리들로 가득 찬 루터의 독일어 찬송들과 여러 저서들도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루터는 문서를 통해 개혁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가 쓴 종교개혁의 3대 작품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교회의 바벨론 감금, 기독자의 자유등이다. 특히 이 루터의 작품들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루터의 95개 조항 반박문과 경건서적, 교부 문서, 각종 고전 등 종교, 신학관계 서적들 그리고 독일어와 라틴어로 된 루터의 소책자가 매일 쏟아져 나왔다. 루터가 쓴 책들은 인쇄기에서 나오자마자 무섭게 팔렸고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종교개혁이 독일 동부와 북부, 남부로 확산

 

종교개혁 운동의 진원지(震源地)는 비텐베르크이다. 이곳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멜란히톤과 요나스, 부게하겐의 도움을 받아 개혁 운동이 퍼져 나갔다. 루터의 설교와 함께 개신교 운동은 확산되어 갔다. 1520년부터 1530년대 까지 종교개혁은 독일 동부와 북부 그리고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베를린에는 돔교회(Berlin Dom)가 있다. 돔 교회는 성당이 아닌 루터 신교이다. 즉 지금은 개신교회이다. 1538, 16세기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인해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루터교회가 됐다.

 

특히 교회 밖의 벽면에는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한 공적을 기념하는 조각상이 있다.

 

여기에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멜란히튼, 얀 후스, 비텐베르크의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교수요 언어학자인 마태우스 아우로갈루스, 비텐베르크의 히브리어 교수 요한 포스터, 비텐베르크 신학교수 카스파 크로이쳐가 들어있다. 또 다른 벽면에는 보름스 제국의회 조각상이 있다.

 

여기에는 루터와 법학자로서 보름스에 동행한 히어로니모스 슈어프와 루터에게 질문 공세를 한 가톨릭 학자 존 에크와 독일 황제 칼 5세가 새겨져 있다.

  

 

 

 

 

작센은 요한 공작이 복음주의 교회 구조의 주축 돌을 놓았고, 1526년 농노들에 대한 압정으로 유명했던 필립 백작(Landgraf Phillip)이 자기 영토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라이프치히(Leipzig)는 성 토마스 교회 (Thomaskirche)가 있다.

이 교회는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요한 세반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27년간 교회 지휘자로서 봉사했던 교회다.

또한 그 시기에 바흐는 약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 마태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 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하였다.

 

교회 안에 바흐의 무덤이 있으며, 교회 창문에서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바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고 교회에서 지휘자로 27년간 봉사한 바흐의 신앙이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개혁신학사상연구소가 주관하는 종교개혁 500주년 해외석학 특별강좌에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역사신학 담당인 칼 투루만(Carl R. Trueman) 교수 강의를 요약한 내용이다.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

 

 

트루만 교수는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루터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전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투루만 교수의 강의를 독자들을 위해 조금 쉽게 풀어 이야기 하면 다음과 같다.

 

영광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종교지도자들, 군병들 그리고 왼편 강도들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소리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왕으로 인정하겠다고 하는 그들의 사상이 바로 영광의 신학이다.

 

반면에 십자가 신학은 오른편 강도가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며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고백했던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그 십자가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영원한 소망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영광의 신학:

십가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 신학:

나를 기억하소서!

 

다시 말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군사들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거부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세상적 왕권을 가진 메시아 사상이 바로 영광의 신학의 핵심이다.

 

반면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신학이다. 즉 십자가 신학에서 왕권은 인간이 쟁취하는 세상의 왕권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이 주시는 왕권이다.

 

따라서 영광의 신학자들은 십자가를 실패로 여긴다. 십자가의 연약함을 싫어한다. 십자가는 악이 성공하고 선이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에 십자가의 신학자들은 십자가가 승리의 근원이라고 믿는다. 십자가의 연약함 즉 그리스도의 연약함이 강함이 됨을 믿고, 죽음에서 생명을 보며, 패배에서 승리를 본다.

 

영광의 신학과 공로주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적 범주의 사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각이다. 반면,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적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대접을 받기 위해서 친절, 선물, 돈, 아부 등등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에게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축소시켜서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영광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선한 행위를 강조하며 공로주의로 빠진다.

 

십자가 신학과 하나님의 은혜

 

사람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사랑스러운 것에 의해서 규정된다. 다시 말해, 그 여인이 아름답기 때문에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논리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랑 받을 만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눈에 사랑받을 만한 무엇이 우리에게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을 찾아내어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사랑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발견의 사랑”이 아니라 “창조의 사랑”이다. 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이다. 반응적 사랑이 아니라 근원적 사랑이다.

 

십자가는 인간적 생각과 논리 그리고 인간적 사랑을 파괴한다. 하나님은 사랑스럽지 않은 십자가를 사랑의 절정으로 만드신다. 십자가를 통해 사랑스럽지 않은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받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탄생한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아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교회의 연약함이 오히려 능력이 될 수 있다. 십자가의 논리로 보면 우리가 갖고자 추구하는 힘과 성공이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다.

 

십자가와 칭의

 

중세교회에서 칭의는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여겨졌다. 점점 의로워져서 마지막에 칭의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 공로주의 사상과 영광의 신학이 둥지를 틀게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있어 칭의는 과정이 아니다.

 

칭의하나님의 선언이다. 심지어 의롭지 않은 자 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기에 십자가의 능력이 역사한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심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스럽게 창조하시고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를 위해 노력의 과정을 밟으며 공로를 쌓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결혼식과 유사하다. 루터는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고 가르친다. 즉 믿음은 칭의의 수단이다.

 

믿음은 우리의 의가 아니다. 믿음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사랑스럽지 않은 우리를 사랑스럽게 만드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칭의가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람을 드러내는 영광의 신학, 하나님이 주인공 되는 십자가 신학

 

결론적으로, 영광의 신학자들에게 하나님은 부차적인 존재가 되고 인간의 능력이 영광을 받게 된다.

 

영광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이다. 반면에 십자가의 신학에서 인간의 공로는 사라진다.

 

십자가 신학에서 사람은 주인공이 아니다. 십자가 신학에서 인간은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어릿광대와 같은 존재이다. 십자가 신학에서 사람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하나님만 드러난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무너트리고 하나님 그분의 계시만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연약함은 강함으로, 사랑스럽지 못함은 사랑스러움으로, 불의함은 의로움으로 새롭게 창조된다.

 

투루만 교수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이 오늘날 교회를 새롭게 하는 소망이라고 결론을 맺었다.(언)

 

 

 

 

 

 

 

 

 

 

 

 

 

 

 

 

 

 

 

 

 

 

 

 

 

 

 

The Fox News host claimed the images were taken at the wedding of Obama's half-brother in Maryland in the early 90s, and said they prove that the President has 'deep emotional ties to Islam'.

 

O'Reilly added that this attachment 'has hurt the USA' and means Obama has failed to deal with the threat posed by ISIS.

 

Obama spent his early life in Hawaii but moved to Indonesia aged six after his mother married a Muslim man, and attended both Catholic and Islamic schools while living there until age ten, when he moved back to America

 

오바마 대통령이 젋은 시절 메릴랜드에서 거행 되었던 이복 형제의 결혼식에 무슬림 복장으로 참석한 사진...

이슬람과 오바마 대통령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가 ISIS와의 협상에 그렇게 소극적이라고 폭스 뉴스가 사진을 게재하면서 맹렬히 비난 하였습니다

 

 

 

 

 

 

 

 

 


 

 
 

 

 

 

 

 

 

 

손가락 몇 개와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이는

장유진씨가 출간된 자신의 동시집

‘좋아요 좋아요 나는’을 품에 안고 기뻐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포공원로 한 요양병원 재활치료실. 환자복을 입은 장유진(21·안산제일교회)씨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가는 다리에 전기치료기를 부착하고 있다. 어머니 이성미(52)씨는 앉아 있기조차 힘들어하는 딸 옆에 안쓰러운 듯 바라보며 서 있다.
 

장씨는 뇌병변 장애 2급 장애인이다. 오른쪽 상체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 부분은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한 달 전만 해도 의식이 없었다. 음식도 목에 연결된 관을 통해 유동식을 먹다 의식을 회복하면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장씨는 지난해 11월 21일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8개월째 투병 중이다.
 

장씨는 ‘시 쓰는 장애인 소녀’로 유명하다. 그동안 의식이 없었던 장씨는 지난달 자신의 동시집 ‘좋아요 좋아요 나는’의 발간을 계기로 기적같이 의식이 돌아왔다.
 

시집은 김용한 밀알학교 교감과 교회 장로, 출판사 창조문예사가 의기투합해 결실을 보게 됐다. 어머니는 시집이 유진이를 깨운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시집이 출간된 것을 보고 정말 좋아했어요. 시집을 보곤 말을 못하니 숨소리가 거칠어졌어요.”
 

장씨는 7세 때 병원에서 뇌동정맥 기형이란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뇌혈관이 실타래처럼 뭉쳐 있는 선천성 희귀병이다. 지금까지 14차례 뇌출혈로 쓰러져 일곱 번 대수술을 받았다.
 

장씨는 2002년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뇌출혈로 입원했다. 어머니는 “당시 입원했던 병원의 14층 병동 창가에서 자동차 전조등을 보고 ‘땅에 별들이 내려앉았다’고 표현한 첫 시를 썼다”고 전했다.

 

이때부터 써 온 시가 종합장으로 58권 1만여편에 달한다. 지난해 12월부터 준비한 시집에는 1∼20권의 시 137편이 수록됐다.
 

2013년 문예 글짓기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2014년 한국장애인문학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2015년에는 성균관대, 숙명여대, 중앙대에 합격했다. 그러나 “나보다 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입학을 포기했다.
 

장씨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아나운서에 도전, 지난해 롯데홈쇼핑에서 선발하는 작가·아나운서에 합격했다. 안산제일교회에서는 성가대로도 열심히 활동했다. 자신의 꿈인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작품 활동도 쉬지 않았다.
 

건강할 때 장씨는 늘 어머니께 당부했다.

“다음에 또 쓰러지면 병원에 데려가지 말아요. 하나님을 알고 나니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그러나 딸이 다시 쓰러지자 부모는 앞뒤 가릴 새 없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재활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딸에게 어머니는 “유진이 밥 잘 먹고 자꾸 움직여서 다시 일어나야 해. 할 수 있겠어?”라고 울먹였다.

장씨는 대답 대신 어머니 손을 꼭 잡았다.(언) 

 


 

 

 

 

 

 

 

 

 

 

 

 

 

 

 

 

 

 

 

이병길

 

글 순서

▶시진핑 시대의 지도자상 「중국의 꿈」

▶중국의 꿈 「중화부흥」

▶중화부흥의 백년 한 리유야쯔의 경축시 의미

▶중화부흥 마르크스주의 신앙 「의식형태」

▶의식형태공작에 의한 「중국기독교의 중국화」

▶시진핑 시대의 중국기독교의 현재

▶마무리 글

 

 

중화인민공화국 제9대 국가주석,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총서기,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시진핑(习近平, 1953)은 2013년 3월14일부로 임기 10년의 중국공산당 최고 통수권 직무를 시작했다.

 

1974년 1월, 21세 때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시진핑은 약40년 만에 중국공산당의 최고 실권을 잡은 것이다. 그의 애칭은 ‘시따따’(习大大), ‘시 아저씨’(叔叔, Uncle Xi)라는 뜻, 겉으로 보기엔 이웃집 아저씨 같다. 산시 성(陕西省) 출신이다.

 

百度》(Baidu) 백과사전 인물관계 ‘신앙’ 난에는 ‘공산주의’(产主义)라고 적고 있다. 시진핑은 열렬한 공산주의 ‘신앙인’이다.

 

제8대 주석 후진타오(胡錦濤, 1942) 전임자는 마오쩌뚱(毛澤東, 1893-1976),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쟝쩌민(江澤民, 1926) 등 삼대 영도의 핵심은 투명한 종교이론 관점에 기초한 종교정책을 폈다.

 

후진타오에게「종교문제」는 「무산계급 혁명」확산의 수단인「통일전선」(약칭 ‘統戰’, 혹은 ‘연합전선’)을 관장하는 해당부서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겨졌다.

통일전선은 중국공산당의 중국혁명에 필수적, 이른바「삼대법보」(三大法寶)인「통일전선」,「무장투쟁」,「당 건설」 중 하나다. 후진타오의 뒤를 이은 시진핑(习近平)의 중국종교정책은 개혁개방 후 중공이 실시해온 종교정책이 한층 강화되어가는 조짐이다.

 

시진핑이「의식형태 공작은 당()의 지극히 중요한 하나의 업무」(意識形態工作是黨的一項極端重要的工作)라고 한 말이 바로 시진핑 시대의 종교정책에 대한 핵심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종교정책, 특히 중국기독교정책을 집중 조명하려고 한다.

 

 

 

 

시진핑 시대의 지도사상 「중국의 꿈」

 

시진핑 시대 지도사상은「중국의 꿈」(国的梦, The Chinese Dream) 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비현실적인 ‘환상’이라는 평가도 있다. 2012년 11월29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시진핑은 취임 열나흘 째만에 그의 시대의 ‘지도사상’과 ‘집정이념’인「중국의 꿈」을 공식 선포했다.

 

시진핑은「중국의 꿈」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the great rejuvenation of the Chinese nation)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중화민족의 근대이래 가장 위대한 꿈」(实现中华民族伟大复兴就是中华民族近代以来最伟大梦想)이라고 그 배경을 언급하면서, 이 꿈은 ‘반드시 실현될 것’(一定能实现)이라고 힘주어 말했다.「중국 꿈」은 ‘양 백년’(兩個一百年, Two 100s)의 목표를 갖는 것으로 개괄된다.

 

즉「중국 꿈」은 “2021년은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2049년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때까지 한 걸음씩 순리적으로 중화민족의 대부흥이 실현될 것이라는 염원이 담겨진「꿈」인 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중국의 꿈」은 국가부강, 민족진흥, 인민행복이다.

 

이를 정리하면「중국의 꿈」은 중국의 “국가 민족의 부흥의 길”(国家民族复兴之路梦想之路)로서, ‘중국의 길 지향’(走中國道路, 중국특색사회주의 노선), ‘중국정신 함양’(弘揚中國精神), ‘중국의 힘 응집’(凝聚中國力量) 이 세 가지로 집약된다(OCN)

 

 

 

중국의 꿈 「중화부흥」

 

「중국의 꿈」은 170여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1840년 중국은 아편전쟁에 의하여 영국을 비롯한 당대 열강들에게 반식민적 굴욕 역사를 경험하면서「중국의 꿈」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 후「중국의 꿈」은 20세기 초 쑨원(孫文, 1866-1925)의 ‘쩐싱쫑화’(兴中华), 즉「중화부흥」사상의 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 쑨원의「중국의 꿈」은 그 출구를 찾지 못했다. 이에 앞서 1894년 11월24일, 쑨원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호놀루루(檀香山, Honolulu)에서「中興會」제1차 회의(중국국민당 창당기원)를 가짐으로써「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의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고, 쑨원의「中興」꿈은 20세기 초 그의 「중화부흥」(兴中华)과 맥락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중화부흥」은 마오쩌뚱(泽东), 덩샤오핑(邓小平), 쟝쩌민(泽民), 후진타오(锦涛)에 이르기까지 중국 영도자들의 ‘신성한 사명’(圣使命)으로 계승되었으며, 특히 개혁개방 후「중화부흥」은 중국 대륙을 비롯한 화교들에게 이르기까지 적극적 공감대를 형성, 결국 중국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정신적 응집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중국공산당 성립 후 인민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 꿈을 실현’(人民, 2013.4.23)하기 위한 지도력과 노력이 인정된다는 견해도 있다.

 

「중국의 꿈」은 중국에 있어서 하나의 정치적 이상일 뿐 아니라 모든 중국인의 꿈과 목표인 동시에 현실이며, 특히 중국인의 개인적 삶 깊숙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중국 꿈」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 바로 ‘공산당’이 추구해 온 투쟁의 목표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중국의 꿈」,「중화부흥」이 어떻게 중국인을 응집시킬 수 있었으며, 중국민족을 결집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이 바로「정신적 동력」(精神动力), 즉「중국의 꿈」을 반드시 실현하고자 한「애국주의」적「정신력」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력이 한 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으로 승화되어 거대한 몸부림으로 발전해 왔고, 현재도 부흥하고 있으며, 미래를 향한 거대한 응집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공산당이 받아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신앙의 응집력은 그 어떤 정치력, 이념과 어떤 물리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중국의 현실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중화부흥의 백년 한 리유야쯔의 경축시 의미

 

“긴 밤에는 빛을 보기 어렵다”라는 뜻의「창얘난밍」(长夜难明, a deep night without a lamp.)은 중국 근·현대사를 꿰뚫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자성어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의 일이다. 1950년 10월1일, 중국공산당(1921)의 대륙 점거 1주년이 되는 때, 공산당은 대륙에서 시짱(西藏, 티베트)과 국민당의 타이완성(臺灣省)을 제외한 전 중국을 ‘해방’, 소수민족 역시 경축 분위기에 고조되어 있었다.

 

그해 10월3일, 중앙인민정부는 베이징에 있는 쫑난하이(中南海) 내의 화이르언탕(怀仁堂)에서 전국 158명의 소수민족 대표를 초치한 가운데 장엄한 경축행사를 가졌다. 행사에 참석한 마오쩌뚱과 당대 걸출한 시인 리유야쯔(柳亞子, 1887-1958)는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축하 공연을 함께 관람하고 있었다. 시인 리유야쯔는 축하 공연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나머지, 경축의 뜻을 담은《환시싸오》(浣溪沙)라는 제목의 시구(詩句)를 마오쩌뚱에게 전했다.

 

이 시구에 나오는 말이 바로「长夜难明」,「긴 밤 등불 없는 적현(, 중국의 다른 이름 ‘华夏’를 지칭) 하늘에, 백년간 요귀 (이방인)가 춤추며 나풀거리더니, 5억 인구가 어찌 다시 모이지 않으랴」(长夜难明赤县天百年魔怪舞翩人民五亿不团圆). 정말 간담이 써늘해지는 느낌이다.

 

이 시구에서「긴 밤」(长夜)은 아편전쟁 해인 1840년-1949년까지, 100여 년간 외세에 의한 중국의 암울했던 역사를 가리키며,「투안위앤」(团圆)은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모인다’는 뜻, 즉 100년 간 외세의 지배아래서 전 중국민족이 공산당을 중심으로 함께 힘을 모았다는 뜻이다. 그 어두운 역사를 마오쩌뚱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일거에 ‘광명’한 중국이 되게 했다는 뜻일 텐데, 중국국민당 내 좌파로 분류된 리유야쯔 시인의 권력 앞에서 부린 객기(客氣) 처신이었는지는 역사가들이 판단할 문제로 남겨둔다.

 

유물주의 사관에서 볼 때 중국이 과연 경제발전에 의하여 어두웠던 역사의 ‘긴 밤’이 걷혔는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건전한 인간존엄의 시각으로 볼 때 중국은 아직도 ‘긴 밤’에 묻혀있다는 평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다.

 

권력지향적인 시인의 눈에 비친 영국과 미국, 당시 열강들은 다 ‘요귀’(妖鬼)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 섬뜩한 것은 그 열강들의 줄을 타고 중국에 건너간 기독교 선교사들 역시 ‘요귀’였다는 점이다.

 

2013년 7월1일 중국공산당 창당 92주년을 맞은 해 중국공산당원은 8,500만 여명(2012년 말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BBC). 시진핑 주석 취임 당시 공산당원은 8,260만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소폭으로 증가한 셈이다.「중국의 꿈」의 ‘밝은 현실’이 과연 이들 당원들에 의하여 실현될 것인가? 「창얘난밍」(长夜难明)은 아직도 진행 중인지 모른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펄벅(Pearl S. Buck, 1892-1973, 중국 명 ‘사이쩐쭈’ 賽珍珠) 여사는 생후 4개월 만에 미국 남장로교(PS) 의 저명한 중국 선교사 부친 시든스트라이커(Abalom Sydensticker, 1852-1931, 賽兆祥)를 따라 중국 항저우(杭州, 1883)와 수저우(蘇州), 쟝수성(江蘇省) 쩐쟝(鎭江) 등지에서 전후 40년 간 중국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의 노벨수상작『북경에서 온 편지』(Letter from Peking, 1657)는 ‘사랑과 문화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작가의 어린 시절 중국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 자랐던 문화적 충격이 언급되어 있다. 19세기 중국인들에게 외국인은 ‘요귀’로 보였음을 반추케 하는 대목이다.

 

 

 

 

 

 

 

중화부흥 마르크스주의 신앙 「의식형태」

 

시진핑 시대 정치지도 사상은「중국의 꿈」이다. 중국은 지난 30여 년간 ‘황허’(黃河)의 찬란한 문명을 ‘창쟝’(长江)의 기적으로 꽃 피웠다. ‘한강의 기적’에 비교할 수 있을까? 경제적 수치로 보면 중국의 경제발전 잠재력을 가늠할 만하다.

 

중국사회과학원이 발표한 ‘1978이래 세계 20개 주요국가 GDP정황’ 비교표에 의하면, 1978년 중국은 세계 10위(한국27위), 그로부터 22년 후인 2000년 6위(한국 12위),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인 2010년에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한국14위)를 차지했다. 경제성장률로는 단연 세계 1위(1980-2010)에 올랐다. 개혁개방 후 중국은 불과 32년 만에「중화부흥」으로 전 세계를 긴장시킬 만큼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시점에서, 2013년 19일~20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선전사상공작회의는 시진핑 시대의 정치지도 핵심 축()이 무엇인가를 가늠케 하는 회의였다. 회의는 중공중앙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 실무진들이 대거 참석한 매우 중요한 회의, 이 회의에 참석한 시진핑은 국가주석 취임 후 처음으로「의식형태공작」(意識形態工作)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시진핑은 ‘경제 건설은 당()의 중심 업무’이고「의식형태 공작」은 ‘당의 극단적 중요한 업무’임을 강조했다.

 

시진핑은 기회 있을 때마다「의식형태공작」을 강조 해 왔는데, 2016년 2월19일에 있었던 당()의 신문여론 업무 좌담회에서도 다시 반복했다(中國共産黨新聞罔, 2016.3.30)「의식형태 공작」은 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의 ‘기본노선이며, 당대 중국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中國共産黨新聞罔, 2016.3.30)이기도 하다. 시진핑에게 「의식형태」는「마르크스주의 신앙」이며, ‘공산당인’의「영혼」(靈魂)으로 표현된다.

 

그러면 시진핑이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한 ‘지극히 중요한 의식형태’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이념’ (理念 Ideology, Gr. δεολογία), 즉 마르크스 사상체계 확립을 뜻한다.

 

시진핑은 경제적 발전과 번영 혜택으로 인한 사회적 사상 기강이 다소 느슨해졌다고 느꼈음이었던지, 유독「의식형태」를 강조했다. 이런 시진핑의「의식형태」진작(振作)은 단순한 사상적 이념을 다잡는 차원을 넘어서 경제발전과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중국특색사회주의’와 공산당체제 존립의 위험이 감지되었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공산당과 중국의 명운을 한 손에 잡고 있는 시진핑으로서는 그 절박한 심정으로「의식형태」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의식형태」는 마르크스 사상체계에 있어서 계급투쟁은 역사발전의 동력임으로, 인민을 계급 분화시켜 투쟁 제조에 힘을 쏟게 함으로써, 사회 진보를 촉진시킬 수 있다는 공산주의 원론에 충실을 다잡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은 사회죄악의 원천이며, 공산당인의 모든 노력은 다 사유재 소멸과 폭력혁명을 통하여 사유재산 제도를 뒤엎고,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재산평등을 통해서 사회평등을 기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의식형태」는 관념적 논리에 의한 사상 체계인, 일종의 ‘관념과학’(觀念科學)이라 말할 수 있다.

 

 

 

 

 

 

 

의식형태공작에 의한 중국 「기독교의 중국화」

 

 

시진핑의 중국종교 정책 방향은「기독교의 중국화」이다. 이 말은 중국특색사회주의 종교이론에 근거한 종교사업 실천을 지도한다는 포괄적 의미가 담겨있다. 2016 4월22일~23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종교공작회의는 국무원총리 리커창(李克强) 주제 하에 중공중앙총서기 시진핑의 연설, 이어서 전국정협(政協) 주석 유쩡썽(俞正聲)의 마무리 연설로 진행되었다.

 

동시에 중공중앙정치국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전국종교공작회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이 회의는 2001년 12월에 열린 쟝쩌민(江澤民) 시대 이후 15년 만에 열린 것이다. 중국은 공산당이 국가를 다스리는(以黨治國) ‘당국체제’(黨國體制)이다.

 

종교업무가 비록 각급정부의 일상적 업무의 하나이지만, 실제로는 통일전선 업무 범위에 속하며, 당정치 노선의 지도를 받는다. 종교업무 유관기관은 자율 및 독립적 영역이 아닌, 통일전선부의 방침에 종속된 업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런 구조적 이유 때문에 종교업무 회기(會期)는 반드시 공산당의 통전공작에서 먼저 방침과 원칙이 결정된 후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2012년 제18차 회의부터는 사실상 시진핑 시대에 속한다. 2015년 5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래 제21차 전국통전공작회의가 소집되었다.

 

시진핑은 종교공작에 관한 네 개 필수임무를 강조했다. 종교가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하도록 적극지도, 반드시 종교의 중국화 방향유지, 종교공작 법치화 수준 제고(提高), 종교의 사회역할 취급에 대한 논증, 종교계인사의 역할발휘를 중시하여 종교가 경제발전 촉진에 노력하도록 하고, 사회와의 조화, 문화번영, 민족단결, 조국통일 업무에 매진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진핑 시대의「중국의 꿈」이 추진하고 있는「중국기독교의 중국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중국기독교의 「사회주의」 순응

 

중국대륙, 타이완, 마카오의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번띠화」(本地化, Localization)라는 말은 지금까지 중국대륙 기독교 내부에서 사용해 온「번투화」(本土化),「번써화」(本色化, indigenous church),「추징화」(處境化, 상황화)라는 용어와는 차별을 갖는다.

 

「번써화」(本色化)는 서방기독교에서 사용해 온「토착화」(土着化, Inculturation, 1988)라는 용어보다 훨씬 문화적 상황을 강조하는「추징화」에 가까운 뜻으로 이해된다.「번써화」는 역사적으로 중국이 아편전쟁 후 당대 열강들과 맺은 각종「불평등조약」에 연유한다. 열강들은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에서 자유무역, 관세혜택, 선교와 조계(租界), 영사재판권, 중국영토점유권 등을 가지면서, 사실상 중국의 국권을 침탈했다.

 

이런 배경에 의하여 중국기독교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번써화」의「쯔반」교회(办敎會, 1873) 운동이다.「쯔반」교회운동의 본질은「싼쯔」(三自; 自治, three-self principle, 1954)운동이다(중국기독교대회, 1922, 上海)。「번써화」가 자립원칙이라면「추징화」(處境化)는 ‘상황화’(狀況化), 즉 기독교 선교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현지 문화융합과 문화순응을 강조하는 용어다.「추징화」의 대조적 용어는 국제화(國際化)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시진핑시대에서 「기독교의 쫑꿔화」(中國化)라는 새로운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 용어는 기독교 밖에서, 특히 공산주의자가 기독교 관리정책 방향을 설정하면서 구사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쫑꿔화」는 기독교가 중국 전통문화와 민족 및 중국사회에 융화되어야 할 것을 전제하는 ‘정치적 용어’ 수사이다.

 

이 말에는 기독교는 현행 중국 정치체제와 의식형태에서 출발해하며,「양교신분」(洋敎身分)의 기독교가 ‘중국종교’로 신분 세탁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덩샤오핑은 마르크스, 마오쩌뚱의 사상을 견지하면서 중국 현대화, 세계화, 미래화 방향을 지향한 반면, 시진핑은 「의식형태」에서 공산주의 이념 강조, 중국전통 중시, 미국주도의 서방세계와는 차별화를 두고 있다.

 

이런 시진핑 시대에 처한 중국 기독교가 택할 수 있는 방향은 ‘박해의 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중국화 개념은 쉽게 말해서 기독교의 중국사회주의 이념체계화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매체는 시진핑 시대를 마오쩌뚱 시대로의 회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중국기독교의 「중국 전통문화」 동화

 

2015년 11월20일,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연구소에서, 중국종교학회, 베이징기독교 양회(两会, TSPM, 중국삼자애국운동윈원회, 1950.9.23; CCC, 중국기독교협회, 1980; 1988, WCC가입), 중국사회과학원 기독교연구중심이 주관한 《기독교 중국화의 길》(基督教中国化之路)이라는 주제 하에 국제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에는 중앙통전부, 국가종교국, 중국사회과학원, 베이징 시 종교국, 쓰촨성 루저우(泸州)시 종교국, 베이징대학, 베이징사범대학, 싼뚱대학, 란저우(兰州)대학, 시베이사범대학, 베이징 시 기독교양회, 옌징신학원, 샹깡(香港), 타이완, 미국, 펀란드(, Finland) 등지에서 온 약50명의 전문가, 학자, 목사들이 참석했다.

 

 이 세미나는〈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중국기독교협회〉(이하는 ‘양회兩會’) 주관, 2014년 8월5일~6일까지 상하이(上海)에서 열렸던「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설립60주년기념」에 맞춰진 행사였다.

 

「삼자설립60주년기념 세미나」주제는《기독교 중국화의 길》이었다(時代論壇, 2014.8.13).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거행된 세미나는 기념 세미나 후 첫 번째로 열린 대규모 학술대회였다는 점에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삼자회60주년기념」세미나를 기하여 1년 동안 같은 주제로 수 십차 례의 세미나를 가졌고, 이어서 국제규모의 세미나를 가진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 다이앤 오번체인 박사(Dr. Diane B. Obenchain), 타이완의 중화기독교 양안교류협회 이사장 웨이티샹(魏悌香) 목사, 샹깡중문대학 문화종교연구과 라이핀차오(赖品超) 교수, 샹깡문화갱신중심 량옌청(梁燕城), 중국기독교협회부회장 단웨이샹(單渭祥) 목사, 중국애덕예술원장 왕롱()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예술원장 왕롱은 ‘기독교의 중국화’를 상징하는 여섯 폭짜리 그림을 가지고 와서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림에는 중국인을 소재로 한 일단의 무리들이 예수와 함께하고 있었으며, 배경은 ‘중국어를 손에 든 예수’ 초상이었다고 한다(福音時報, 2015.11.23).「삼자회60주년기념」세미나에서 당시 국가종교사무국 국장 왕쭤안(王作安)은 연설을 통하여 ‘중국특색신학사상정립’을 강조하면서 ‘합리적 성경 해석과 중국국정에 적응하도록 중국문화에 융합’해야 할 것을 역설, ‘이로써 기독교 교의와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 서로 융통하는 컨텐츠를 찾아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왕쭤안의 연설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왕쭤안의 연설의 요지는 기독교 신앙의 표현과 생활이 중국전통 문화와 풍속에 부합해야 하며, 찬송가, 예배당 건축, 예배의식 등이 중국품격이 구현되어야 하며, 아울러서 조선숭배, 관혼상제 등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기독교의 중국화」는 바로 기독교의 중국문화「동화」(同化, Assimilation)를 뜻한다. 중국 상황에서 기독교는 ‘양교’(洋敎) 이거나 외래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 원래의 본질을 벗고 중국 문화 토양에 흡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중국 56개 민족 중 한족(漢族) 이외 55개 소수 민족은 사실상 생존을 위해 한족문화에「동화」된 것이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기독교는 현재「동화」정책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기독교의 「시진핑 시대」 진로

 

원저우(溫州)는 중국 상하이(上海)에 인접한 저쟝 성(折江城) 동남해안에 있는, 예로부터 풍광이 빼어낸 곳이다. 1840년 아편전쟁(淸道光二十年) 발발과 함께 영국군이 띵하이(定海), 원저우(溫州)를 점령하면서 중국 근대사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예루살렘: 원저우는 중국 기독교 발전과정에서 ‘중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주어질 만큼 중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저우는 중국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그래서 ‘중국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cf.행1:8). 원저우가 기독교 선교에 접한 것은 1867년(清同治六年) 11월, 중국내지회(CIM, 1865. 6. 27 창립) 스코틀랜드 국적의 선교사 조지 스토트(曹雅直, George Stott, 1835-1889) 목사가 닝보(寧波)와 원저우에서 선교하면서 부터다.

 

이는 영국런던선교회(LMS)가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을 중국 광저우(廣州)에 파송(1807)한지 60년 후의 일이다.

 

조지 스토트는 스티븐슨(约翰, J. W. Stevenson)과 혼인 후 3개월, 내지회 창립자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의 안배로 닝보(1866.2.10)에 파송, 22여년(1866-1888)간 원저우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예루살렘’ 기초를 다졌다.

 

스토트는 어릴 때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한 장애 탓에 중국인들에게 ‘쪽다리 외국인’(腳番人, 당시는 외국인을 ‘판르언’이라고 함)이라는 비칭(卑稱)의 조롱과 ‘서양 귀신’(洋鬼), ‘서양놈’(红毛番, 붉은 털을 가진 외국인)이라는 모욕을 감내했다.

 

선교사 면접 때 허드슨 테일러는 어떻게 ‘한 쪽 다리’로 선교지에 가려고 하느냐고 묻자 스토트는 ‘두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가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쪽다리를 가진) 내가 가야합니다.’(有着两条腿的人不去所以我必须去)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때는 외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정서가 불안했을 뿐 아니라 원저우는 토속종교에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에, 멀쩡한 몸을 가진 선교사들은 쉽게 지망하지 않았던 선교지 였던 것 같다.

 

스토트는 3년 간 현지인들의 서양인 배척과 기독교를 반대하는 강열한 ‘초우양판지아오’(仇洋反) 정서와 1870년「천진교안」(天津敎案)으로 인한 박해가 가중될 때는 핑양(平陽) 현()으로 옮겨 원저우 선교 기지를 확보하고, 후속 선교사들과 함께 중화기독교 내지회 교회를 설립했으니, 이 교회가 바로 현재 ‘핑양시먼지아오탕’(平陽西門教堂, 1874)이다.

 

 

원저우의 기독교인구: 원저우는 중국 개혁개방 후 미국과 유럽,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 일대에 거주하던 화교와 화상(華商)들이 대거 귀향해 거대 타운이 조성되면서, 기독교 인구가 신속하게 증가되었다.

 

홍콩의《基督敎週報》(2412)에 의하면 원저우 인구의 약2%가 기독교인일 것이라고 한다. 전 베이징 영국 외교관 토니 램버트(Tony Lambert)의 자료를 인용한 한 매체에 의하면, 2004년 원저우 지역 기독교 인구는 75,000명, 등록 교회당 2,000개, 집회소 2,000개, 현재 기독교 인구는 100만 명을 초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베이징의《豆瓣》에 의하면, 1949년 이전 원저우 기독교 인구는 전 중국의 1/10인 7만 명, 원저우 상주인구는 915만 명(2010.11), 그 중 15%가 기독교 인구(신교 1,372,500명)이며, 교회당은 400개로 각각 짐작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나온 통계는 확인이 쉽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원저우는 중국에서 기독교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기독교의 현재

 

중국기독교역사는 ‘피눈물의 역사’(一部血泪史)인 동시에, ‘신속하게 발전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一部迅速发展的神迹历史)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지속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지하교회)의 발전은 이미 중국 사회 전반에 건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시진핑 시대 중국기독교의 운신의 폭은 녹녹치 않은 것 같다.

 

 

 

 

중국기독교 박해 실태

 

미국의《RFA》가 한 특약 기자의 기사를 인용한 보도에 의하면,「2014년 10대중국기독교박해 사건」이 시진핑 취임 이후 그의「기독교의 중국화」발언과 동시에, 공산당의「의식형태」로써 기독교를 개조하겠다는 시진핑의 정치적 의지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보도는 2014년 10대중국기독교박해사건을 그 실예로 들었다. 저쟝성 원저우의 산쟝따지아오탕(三江大教堂, 2,000여명 신도수) 교안(教案, 2014.3), 저쟝성의 핑양지우언탕(阳救恩堂, 약1,000여명) 교안(2014.7.21), 원저우(温州), 닝보(宁波), 항저우(杭州) 교안 등을 적시했다.

 

교안을 주도한 저쟝성(浙江省) 정부는 이른바 ‘산까이이차이’(三改一拆) 공작을 실시, 2013년~2015년까지 관내 무허가 건물, 낡은 주택 등을 철거한다는 목적으로 교회당 옥외 십자가 및 유사한 무허가 시설물을 강제철거를 단행한 것이다.

 

‘산까이이차이’의 ‘목표와 원칙’은 ‘일부 지역교회의 신속한 발전과 집회장소 확장 및 활발한 활동을 시정, 종교의 건강과 질서 및 규범, 합리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이를 실시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허난성(河南省) 푸난쓰(阳市)의 난예(), 광시성(广西省) 장족(壮族) 자치구의 류저우(柳州), 광뚱성(廣東省) 광저우(廣州)의 푸산(佛山) 가정교회, 베이징(北京)의 통저우(通州), 산뚱성(山東省) 자오셴(), 신쟝(新疆) 위그루자치구 가정교회 교안 역시 일련의 사건에 포함된다.

 

보도는 시진핑 시대 중국기독교가 처하고 있는 박해의 현장과 그 실상을 여과없이 밝혔다. 교안 과정에서 당국은 목회자의 구금은 물론, 신도들에게 폭행을 가하면서 집행했다.

이들 10대 박해사건은 2013년 보다 더 엄중한 것으로 비교된다. 그래서 매체들은 시진핑의「기독교의 중국화」정책은 바로 중국기독교에 대한 박해 선포적 의미라고 평했다.

 

시진핑이 두려워하는 중국기독교 발전

 

화치아오(華僑) 매체인《民報》(2015.9.10)는 ‘시진핑은 왜 기독교를 두려워하는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시진핑의 중국기독교 정책은 ‘비실제적인 환상’(不切實際之幻想)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저쟝 성 내에서 강제 집행된 대규모의 박해 사건은 시진핑의 종교정책이 마오쩌뚱 시대의 종교정책으로의 회귀와 문화대혁명 시대의 기독교 박해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주목했다.

 

중국기독교 박해사건은 결국 시진핑의「의식형태」발언과 맞물려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하는 것이다. 박해 사건현장 대부분이 저쟝 성인 이유는 저쟝 성에서 중국 기독교가 가장 신속하게 발전·부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매체는 홍콩의 안더리에(安德烈) 학자의 말을 인용, ‘저쟝 성은 기독교 역사가 오랜 성()이며, 원저우는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한다’라고 보도했다. 특히 저쟝 성은 시진핑의 정치적 효용가치가 높은 그의 심복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진핑의 정책을 솔선수범하는 시진핑 지지파의 정치적 동지가 요직을 차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 시진핑 막료 11명 중 과반이 저쟝 성에 포진하고 있다고 한다. 매체는 이들이 결국 저쟝 성의 교회당 십자가 강제 철거에 앞장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보도는 정치적으로 ‘이미 사면초가’(四面樹敵)와 ‘백방으로 정적’(八方開戰)에 둘러싸인 시진핑으로서는 중국기독교를 표적으로 그의 정치적 출구를 모색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중국 기독교 인구는 이미 중국공산당원 수를 초과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에게 더할 수 없는 위협이라는 평가가 대체적인 추세다. 그래서 시진핑이 그의 시대에 이런 위협적 단체인 기독교를 표적삼아 강수를 둔다는 해석이 가능해 진다. 그런가 하면 1966년판《紅旗》(第十二期)를 인용한 매체는 마오쩌뚱이 생전에 가장 좋아한 칭호(尊號)를 ‘위대한 지도자’偉大的導師,‘위대한 영수’(偉大的領袖),‘위대한 통수권자’(偉大的統帥),‘위대한 영도자’(偉大的舵手)라고 전제하고, 이들 존칭을 ‘네 개의 모자’(四頂帽子)에 비유하여, 시진핑 역시 이런 역사의 위치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주를 달았다.

 

프린스톤대학교 역사학 교수 유잉쓰(余英時) 박사는 시진핑을 ‘제2의 마오쩌뚱이 되고싶어한다’(習近平要做毛澤東第二)고 했다(BBC). 평론 매체들은 시진핑 시대가 개막될 당시 중국공산당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이 거의 탈진상태였다고 지적하고, 이런 상황을 간파한 시진핑이 기독교 탄압에 칼을 뽑아들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중공왕조의 시황제’ 마오쩌뚱 정치 노선을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견제할 것인가의 딜렘마에 빠진 조짐을 보인다고 하면서, 공산당 내 보수파의 반기를 잠재우기 위해한 정치적 융통성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보였다.

그렇다면 시진핑 시대가 마오쩌뚱 시대를 상기시키는 정책시행이 정치적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게다.

 

중국기독교의 중국화는 비기독교화

 

시진핑 시대의「중국의 꿈」은「의식형태」를 진작시켜, 개혁개방 이후 경제발전과 현대화 과정을 지나면서 이완된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결집과 함께「기독교의 중국화」라는 명분을 걸고 벌이는「비기독교화」(非基督教化) 정책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중국 근·현대사에서「비기독교화」는 탈서방화(脫西方化)를 뜻한다.「비기독교화」는 19세기 말 산뚱성(东省)에서 시작된 ‘의화단사건’(义和团事件, 1899-1901; 义和拳, 庚子事拳匪, , 庚子拳)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사건의 목적은 ‘청 제국을 도와 서양을 멸한다’(清灭洋)는 이른바 중국의 민족주의적 ‘반제국운동’(反帝爱国运动)과 함께 중국 전역으로 확대된 ‘반교’(反敎) 운동, 무신(無神) 사상 조류(潮流) 등을 포괄하여「비기독교운동」(1922-1927)이라고 한다. 중국공산당은 반교운동이 뜨겁게 진행되는 과정인 1921년에 창설되었다.

 

이 운동은「비기독교학생동맹」(非基督教学生同盟, 1922.3.9) 결성과「교육회수권운동」(收回教育权运动)으로 구체화되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비기독교화는 19세기 말부터 진행되어 왔으며, 1920년대를 전후하여 운동의 성격과 방법이 좀 더 구체화되었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 시대의 기독교의 중국화는 중국 땅에서 서방의 색채를 완전히 제거하는 정책이다.

 

이런 역사와 사상적 배경에서 중국공산당은 기독교가 서방의 색채 농도가 가장 짙다고 보고, 중국 땅에서 이를 제거하는 것이 바로 시진핑이 선포한 「중국의 꿈」을 이루는 의식형태, 기독교의 중국화라고 보는 것이다.

 

마무리 글

 

시진핑 시대의 중국공산당 종교정책은「종교생태의 균형」(教生态平衡) 정책이다.「종교생태의 균형」관점에서 기독교의 중국 선교는 엄연히 중국문화 주권 침해에 해당하는 ‘문화침략’이다.

 

중국공산당과 보수층은「종교생태의 불균형」(教生态失衡)을 바로 잡기 위해「중국기독교의 중국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 깐쑤성(肃省) 통전부 부부장 마후청(马虎成)의「기독교가 현재 중국대륙에서 신속하게 발전하는 원인분석」(基督教在当今中国大陆快速发展的原因辨析)이라는 주제의 ‘종교생태 불균형’에서 ‘기독교의 발전을 제한해야 한다’라고 한 주장(時代論壇)과 관련, 중국 내외 학자들이 이례적으로 예의 주시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마후청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전「종교생태」가 ‘균형’을 유지한 것으로 보았다. 즉 마오쩌뚱의 종교정책을 지지하는 발언이다. 현재 중국기독교의 신속한 발전은 마후청을 비롯한 지식인들 세계에서 ‘중화민족의 문화 다원성과 주체성 및 국가 안전성’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견해가 점진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조짐이다.

 

 이들이 언급한「생태」는 ‘생물계통과 자연환경의 상호관계’에서 유지 발전된다는 점에서, 종교가 처한 그 역사와 사회적 환경과의 조화로운 관계에 적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종교생태」연구가 중에는 중국사회과학원세계종교연구소소장, 기독교연구가 쭈오신핑(卓新平, 1955, 湖南人)을 비롯하여 중국사회과학원세계종교연구소의 뚜안치(段琦, 1944, 上海人), 중앙민족대학교 철학·종교학 교수 무쭝지앤(钟鉴, 1939, 山東人)과 같은 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중국기독교가 최근 유일하게 발전한 ‘이지아오뚜따’(教独大) 현상은 중국「종교생태의 불균형」위협이라 보고, 중국전통종교를 가지고 기독교의 발전을 억제해야 할 것을 정부에 건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진핑의「중국기독교의 중국화」정책은 바로 기독교 소멸을 위한 전문가들의 학문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1950년 대 중국삼자애국운동 발기 때 중국 자유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신학적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에 안착할 수 있게 뒷받침한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종교생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교의 수정, 기독교의 개조, 중국 전통문화와 공산당 정권에 위협이 안 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博訊). 말하자면 기독교가 중국의 사회주의 생태, 마르크스주의 생태, 전통종교 및 문화의 생태를 파괴하거나 교란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시진핑은「중국기독교의 중국화」정책을 강하게 시행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현재 중국 학술계에서는「종교생태론」(教生态论)이 이슈가 되고있다(中國民族新聞罔, 2010.7.27) 홍콩의 차이싸오치(蔡少琪, 建道神學院) 박사는 중국기독교가 전반적으로 안정된 발전을 갖게 된 것은 ‘천안문사태’로 알려진「六四事件」(八九民運, 1989년에 있었던 민주화운동) 이후로 보았다.

 

차이 박사는 당시 중국 북부 일부 농촌지역은 기독교인이 사회주류를 이루었고, 도시 교회가 급성장세를 보였으며, 많은 대학생과 전문직 인사들이 매일 그리스도인으로 증가했으며, 이런 현상은 서방과 일부 해외 기독교인들이「중국의 기독교화」의 꿈과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 학계와 정가에서 나온 말이 바로「종교생태」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논증들을 종합해 볼 때 시진핑 시대의「중국기독교의 중국화」정책은 곧「중국의 기독교화」에 대한 억제 정책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런 박해와 시련속에서도 중국기독교는 성경대로「거침없이」발전을 거듭하며 부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기독교(특히 지하교회)는 마오쩌뚱과 문화대혁명 시대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견지하기 위해 선택했던 길이 바로 ‘박해’였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기독교 역시 이 길을 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28:31)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자료(2016.3.31.)에 의하면, 총 체류 외국인 수 1,943,576명에 달한다고 한다.

 

정부 통계에 잡히지 않은 외국인을 합치면 체류외국인이 200만 명 시대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200만 외국인들 중에 한국계를 포함한 중국인을 제외하고는 베트남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체류외국인 총 숫자에서 베트남인은 137,654명으로 3위를 차지한다.

필리핀 54,014명 (5위),

우즈베키스탄 49,671명 (6위),

캄보디아 43,119명 (8위),

네팔 29,460명 (12위),

파키스탄 12,257명 (19위) 등이 그 뒤를 따른다.

 

국내 취업자격(전문+단순기능)을 갖춘 총 외국인 수는 610,080명인데 베트남인이 47,247명을 차지해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캄보디아 35,232명 (4위), 우즈베키스탄 31,104명 (5위), 필리핀 28,635명 (6위)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배우자로서 외국인 총인원은 152,025명이다.

 

이중 베트남이 41,074명으로 역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 11,495명 (4위), 캄보디아 4,608명 (5위), 태국 2,890명 (6위)이 뒤를 따르고 있다.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 유학생 총인원은 106,138명인데, 그 중에 베트남인이 9,278명을 차지해 역시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우즈베키스탄 1,658명 (5위), 파키스탄 1,236명 (8위), 방글라데시 799명 (14위), 필리핀 727명 (16위), 네팔 724명 (17위)등이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현재 국내베트남 이주민체류현황은 2위 혹은 3위에 있고, 특히 한국계 중국인을 빼고나면 결혼이주민 현황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 수를 기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국내 체류 베트남 이주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채oo 선교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소수의 베트남 사역자들만으로는 이렇게 많은 국내체류 베트남 분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역부족이라고 밝힌다.

 

채 선교사는 특히 한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베트남 이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국어와 베트남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성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동시에 베트남어를 모르는 한국 성도님들도 관심을 가지고 주변의 베트남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평신도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베·한대조성경이 필요했다고 전한다.

 

채 선교사는 이런 간절한 염원 속에 수년간 기도하며 준비했는데, 이번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베·한대조성경이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되었다고 했다.

 

 

채 선교사에 의하면, 작년 초에 Y 장로가 후원함으로 베·한대조성경 출판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작년 봄 노회에서 예장고신 동서울노회(노회장 장태영 목사)에서 후원했다고 한다.

 

그 후 분당 우리들교회 광염교회, 그외 30여개의 베트남 교회들과 몇 몇 한국교회에서 책값을 선지급해 주셔서 베·한대조성경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지난 4월 26일 서울영동교회(정현구 목사) 교육관에서 베·한대조성경 출판을 감사하는 예배를 (사)국제민간교류협회(희년선교회) 주관으로 드리기도 했다.

 

채 선교사(한국베트남선교연합회/VMFK 회장)의 인도로 드려진 감사예배에서 신수철 목사(서울동산교회/ 동서울노회 임원)가 기도하고 이만열 장로(국제민간교류협회 대표)가 사도행전 6:7; 12:24; 19:20을 본문으로 “하나님 말씀의 흥왕”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채 선교사는 “국내 체류 중인 베트남 다문화가정, 근로자, 유학생들을 위한 베·한대조성경을 발간하는데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베트남어-한국어 대조성경의 가격은 권당 1,8000원이고 희년선교회(02-858-7829)로 연락하면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 선교사 신분 보호를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교회 예배당에서 “목회와 교리”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복음주의 실천신학회 제31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박성환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는 “설교 작성에 있어 비유 활용의 중요성과 방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박성환 교수는 먼저 예화 사용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설교 시간의 단축 문제

▶예화 출처와 표절 문제, 그리고

▶ 예화 사용 때에 나타나는 본문 일탈 현상 문제 등으로 예화를 많이 사용하는 설교에 문제가 있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박 교수는 “예화는 분명히 ‘말씀의 창문’으로써 빛을 조명하여 집안을 환하게 밝히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설교에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또한 “예화는 설교를 경청하는 청중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청중을 집중시켜 자신의 마음속에 설교 주제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각인시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밝힌다. 따라서 이러한 예화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기 위한 대안으로 박 교수는 비유 사용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비유 사용에 대한 연구 역사를 면밀히 검토한 후 구체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비유사용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박 교수는 비유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시각화 혹은 이미지화 그리고 상상력의 자극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설교 전달의 효과적인 도구임을 증명한다.

 

그는 비유는 통상적으로 짧은 이야기를 의미하며 “관습적, 일상적, 그리고 시각적 장면을 청중에게 제공함으로 상상력을 자극하여 공감을 일으킨다.”고 정의하면서, 종교 개혁자들을 탁월한 비유 사용자들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종교 개혁 이후, 설교자들은 탁월한 비유 사용자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미사어구가 아닌, 평범한 말로 하나님을 말씀을 해석하고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효과적인 전달을 위하여 일상의 예증들과(직접 경험상으로 얻는 것들) 예화들은(듣거나 보는 것을 통해 얻은 것들) 자제하고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화들이 설교를 조명하는 창문과 같은 것은 인정하지만, 지나친 예화(증) 사용은 “[로마 카톨릭 교회]나 영국 국교회의 건물에 있는 수많은 채색 유리들처럼,” 자칫 청중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John Calvin의 설교는 설교 내용의 생동감과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적절한 언어 표현, 특히 비유[이미지]를 사용하려는 그의 노력을 살필 수 있다.

 

박 교수는 일부 “탁월한 설교자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비유를 적절히 사용하고 전달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아마도 설교 작성 시의 비유 사용을 분명히 묵묵히 연습하고 노력하여 터득해 나가야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비유 사용의 훈련을 위해서 박 교수는 설교학자 버트릭(Buttrick)의 세 가지 질문을 적합하게 변형시키고 박 교수 자신의 의견을 종합하여 설교에 있어서 비유사용의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유사성 또는 인접성: 성경 본문 내용과 비유 사이에 분명한 유사성과 인접성이 있는가?

(2) 일치성: 성경 본문 내용과 비유 사이에 얼마큼 일치하는가?

(3) 문화 관습성: 혹시 성경 본문 내용과 어울릴 수 있는 속담(격언)은 없을까?

(4) 행동성: 사용한 비유를 표현할만한 상징적인 환유(제유) 행동이 있는가?

(5) 적합성: 사용한 비유가 과연 설교 내용에 적합한가?

 

박 교수는 예화 위주 설교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비유 사용을 제안함으로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달걀은 비타민 B군과 영양소, 그리고 단백질이 풍부한 맛있는 음식이다.

아침에 달걀을 먹으면 시리얼을 먹거나 아예 안 먹는 것에 비해 하루 종일 달고 지방이 많은 음식에 대한 식탐이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미국의 건강 정보 사이트 ‘셰이프닷컴’이 알려지지 않았던 달걀에 대한 5가지 사실을 소개했다.

 

◆노른자는 머리를 좋게 한다=

 

달걀의 노른자위는 비타민 B군 복합체의 한가지인 콜린의 저장소다. 콜린은 신경 기능을 향상키고 염증을 줄이는 효능이 있다.

임신부가 노른자위를 통해 콜린을 흡수했을 때 태아의 두뇌 발달을 돕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또한 콜린 성분은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 도파민을 생산하는 데에도 관여해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완벽한 단백질 음식이다=

 

단백질의 질에 관한한 달걀은 금메달감이다. 그 이유는 달걀 안에 있는 단백질 모두가 몸속에서 완전히 흡수돼 사용되기 때문이다.

◆노른자 색깔이 의미하는 것=

 

미국달걀협회에 따르면 노른자가 짙은 노란색이든 엷은 노란색이든 건강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지 이는 암탉이 뭘 먹었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카로티노이드(동식물에 들어 있는 색소)가 많이 든 곡물이나 풀을 먹은 닭은 좀 더 노른자 색깔이 짙은 달걀을 낳지만 더 양양분이 많은 건 아니다.

 

◆흰자가 투명할 때와 탁할 때 차이=

 

영양분 등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달걀이 오래된 것일수록 흰자가 더 투명하다. 반면 갓 나온 달걀일수록 흰자가 흐릿하게 보인다.

◆달걀껍질 색깔에 따른 차이=

 

달걀껍질이 갈색이냐 흰색이냐는 닭의 품종과 관련이 있다. 그 외에 닭이나 달걀의 건강 상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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