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cember
4,
2016





La,
da, da, da, da,
La,
da, da, da, da,
La,
da, da, da,
da...

들어보라! 어찌나 저 종소리,
감미로운 실버 벨들
모두가 말하는 것 같던지.
“던져버려요, 근심걱정은..."
이라고.
Hark
how the bells
Sweet silver
bells
All
seem to say
Throw cares away
이제 크리스마스,
힘내라는 인사 가져다 주는데
남녀노소 모두,
선량하고 용감한 자
들에게...
Christmas is
here
Bringing good
cheer
To
young and old
Meek
and the bold

딩, 동, 딩, 동,
그게 그들의 노래.
환희 가득 찬 울림으로,
모두 캐럴 부르며. (오!
오! 아~)
Ding
dong ding dong
That
is their song
With
joyful ring
All
caroling. (Oh!
Oh! Ahh)
들리는 것 같아,
즐거운 기운 돋는 말들,
여기저기서,
대기를 가득 채우며...
One
seems to hear
Words of good
cheer
From
everywhere (From
everywhere)
Filling the air

오!, 어찌나 그 종들이 울려
퍼지는지,
소리 높여가며..
언덕과 계곡 넘어서,
그들 얘기 말해주며...
Oh
how they pound,
(Oh how they
pound)
Raising the
sound
O'er
hill and dale
Telling their
tale. (Telling
their tale)
즐겁게 울리죠,
사람들 노래하고,
기운 내게 하는 노래들을,
크리스마스에요 이제!
Gaily they ring
While people
sing
Songs of good
cheer
Christmas is
here
즐거운, 즐거운, 즐거운,
즐거운, 즐거운 크리스마스!
메리, 메리, 메리,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Merry,
Merry, Merry
Christmas,
Merry, Merry,
Merry, Merry
Christmas.
계속, 계속 종소리 보내죠,
계속, 끝없이.
그들의 즐거움 가득,
모든 가정에...
On
on they send
On
without end
Their joyful
tone
To
every home
Ah!
Ah! Ah!
딩, 동, 딩, 동....
Ding
dong, ding dong,
ding dong, ding
dong
La,
da, da, da, da,
La,
da, da, da, da,
La,
da, da, da,
da...
Hark
how the bells,
(Hark how the
bells)
Sweet silver
bells
All
seem to say,
(All seem to
say)
Throw cares away
(We will throw
cares away)
Christmas is
here (Christmas
is here)
Bringing good
cheer (Bringing
cheer)
To
young and old
(To the young
and old)
Meek
and the bold
Oh
how they pound,
(Oh how they
pound)
Raising the
sound
O'er
hill and dale
Telling their
tale (Telling
their tale)
Gaily they ring
While people
sing
Songs of good
cheer
Christmas is
here
Merry, Merry,
Merry, Merry
Christmas
(Merry, Merry,
Merry Christmas)
Merry, Merry,
Merry, Merry
Christmas
(Merry, Merry,
Merry Christmas)
On
on they send
On
without end
Their joyful
tone
To
every home
Ah!
Ah! Ah!
La,
da, da, da, da,
La,
da, da, da, da,
La,
da, da, da, 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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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사다
주신
노란 그림책에
산타
할아버지 계셔요.
흰구름 같은 산타 할아버지
수염 보니
선물이 받고
싶어졌어요.
쪼르르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엄마에게
외쳤지요.
"엄마, 산타
할아버지 전화번호는
몇 번이야?"
이번엔 꼭 로봇을
달라고 해야지....
어,
근데 엄만 왜 웃고만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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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꺼내 읽어보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앙겔루스
실레시우스(1624-1677)가 쓴
‘네 자신의 마음 안에’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몇 줄
안 되는 짧은 시입니다.
그리스도 베들레헴에 태어나심이
천 수백 번을 헤아리건만
그리스도 네 자신의 마음에 나시지 않으시면
그 영혼은 아직 버림받은 채로니라.
십자가만이 네게 구원을 주리니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네 마음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네 영혼은 영원히 잃어진 것이니라.
올해도 성탄절이 바짝 우리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카드를 보내느라고
사람들은 분주해 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크리스마스는 시인의
말처럼
그저 또 한 번 헤아리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시인 유안진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올 겨울은 몹시 춥습니다.
주님,
지금 제 마음은 황량한 들녘
승냥이 떼 울부짖는 야밤중
홀로 버려진 새끼짐승입니다. 저는
이천여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 마을
이름 없는 여관집 뒤 곁 채 마구간에서
그리스도로 오신 아기 예수님
비오니 이 겨울 저의 가슴을
그 말구유로 꾸며 주옵소서.
굳어진 병든 무릎을 접고
주름진 이마를 마른 풀에 비비며
사모치는 목청으로 부르는 캐럴
새로이 태어나는
거듭나는 외침이게 하옵소서.
다시금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마음에 태어나시도록
자신을 말구유로
꾸며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 눈이 잔뜩
내린데다
매서운 찬 바람까지 불던 그
성탄절 이브,
언 손을 호호 불며 어깨에
자루를 하나씩 매고
교인 가정을 찾아 다니며
캐럴을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캐럴 소리가 들리면 그
분들은 조용히
대문을 열고 나와 서서 함께
캐럴을 불렀었지요.
때로는 우리들의 새벽 송
때문에 옆집 개가
짖어대기도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우린 그 새벽 하얀 밤,
눈을 밟으며 한 집 한 집
찾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달빛에 반짝이던 밤길이
얼마나 아름다웠었는지요.
하늘에서 땅까지 참으로 먼 길을 찾아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내 마음의 구유에 맞아들입니다.
이제 또 오시옵소서.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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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기다림 끝에 포착한 물결치는 '안개 파도' 사진
하늘 위로 일렁이는 파도와 같은 형상이 포착돼 눈길을 사로잡았다.
최근 온라인 미디어 보어드판다는 무려 8년의 기다림 끝에 아름다운 '안개
파도'를 발견한 한 사진작가의 작품 사진을 공개했다.
한 번 보면 한동안 넋을 놓고 보게되는 이 사진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진 작가 니콜라스 스테인버그(Nicholas
Steinberg)에 의해 촬영됐다.
니콜라스는 평소 '안개'의 매력에 빠져있었다. 이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안개 사진을 찍기위해 카메라를 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Marin County, California)
타말파이어스(Tamalpais)산 정상에 올랐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무려 8년을 '안개' 사진 촬영에 올인한 끝에
그는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는
모습의 '안개 파도'를 사진에 담았다.
이에 니콜라스는 "포토샵없이 완벽한 작품 사진을 찍어 왔다"며 "드디어
꿈을 이뤘다"는 기쁜 마음을 전했다.
아래 보는 이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안개 파도 사진들을 함께 감상해보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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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성탄절이 성큼 다가온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이....
한기(寒氣) 느껴지는 찬바람과 함께 시작되는 [성탄절 생각]에는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세월의 질주(疾走), 그리고 그 생각 속에는 남모르는 허탈함도 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간의 끝자락에는 되새김질이 동반되는 것처럼
나는 이런 일을 생각하며 반성해 본다. 부끄럽게 생각한다.
어떤 친구가 여러분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 들고 찾아왔다고
하자.
그때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고맙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어떤가?
남이 어쩌다 한 번 베푼 작은 친절에는 고맙다는 말을 잘하면서도
정작 누구보다 감사해야 할 가족 에게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들에게는 당연시 여기거나 오히려 투덜거릴 때가 더 많다.
가족이란 내가 어떻게 하든 늘 거기에 붙박이처럼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들이 베푼 친절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나중에 감사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언젠가 하겠다'는 생각으로 고맙다는 표현을 미루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가족이라도 언제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헤어지며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당연시 여기는 태도를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가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는 못 만날 사람처럼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 동안 무심코 넘겼던 가족들의 웃음, 잔소리나 부탁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한걸음 나아가 가끔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 얼마나 좋을까. 내 가까이
있는 [나]와 [당신]이 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잊고 지낸 감사함을 찾아보는 것이다.
나의 강의를 듣는 한 남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내 아내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항상 섭섭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가족인데 그걸 꼭 말로 해야 됩니까?"
나는 "그렇게
해야 돼요. 그것이 내 자신의 약점이기도 합니다만 말이 아니면 글로라도
표현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고맙게 느낀다면 표현을 해야 한다.
감사란 혼자 간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입은 먹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마움을 느끼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상대에게 전해야 한다.
당연하게 여기며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비즈니스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가끔 '너 아니라도 먹고 산다'는 투로 고객을 대하는 무례한
사람들을 비즈니스 현장에서 만난다.
그들 역시 자기들이 어떻게 하든 고객들은 늘 거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장사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의사일 수도 있고, 공무원일 수도
있고, 회사원일 수도 있고, 대학교수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사람은 대통령도,
회장도, 총장도 아니다.
급료는 항상 고객으로부터 나온다.
공무원의 급료는 국민들의 세금에서, 회사원의 봉급은 구매자로부터, 교수의
월급은 학생들의 등록금에서 나온다.
자신의 고객이 누군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고객이 누군지도 모르고 고객들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과는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것이다.
그들은 고객이 원하는 것을 찾아보려고 애쓰며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가족이든, 고객이든, 친구든
교인이든 늘 거기 있다고 당연시 여기지 말아야
하겠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아기예수님의 탄생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남이 캐롤을 부르니까 같이 따라 입을 열면 되는 것일까?
나를 살리려 죽으시려고 주님 오신 날인데....
매년 연말이면 자동으로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인가?
좀 다르게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인가? 죽을 내가 살아난 일...
세상에서 가장 감사해야 할 분은? 죽을 나를 살려주신 우리 주님...
우리 주님께 가장 크게 감사하고 우리 주님 탄생을 목청이 터져라
찬양하자. (장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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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
그
분은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히4:15),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으며(요8:29),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빌2:8)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삼위 중 한 분으로서
기도를 해야 될 분이
아니라
기도를 받으셔야 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 만민을
구원할 권세를 가지고 계셨으며,
천군과 천사들을 호령하실
수 있었으며,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고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
그 정도로 기도를 했다면
기도해야
되는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할까요?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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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은퇴시키는 일
Top Ten Ways To Retire
Retirement
영문 웹사이트인 2young2retire.com
사이트에 ‘Top Ten Ways To Retire Retirement(은퇴를 은퇴시키는 가장 확실한 열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이 내용이 이른바
오팔(OPAL)족의 활기찬 노년을 보내는 10계명 아닌가 생각되어 여기에 소개한다.
Top Ten Ways To Retire
Retirement(은퇴를 은퇴시키는 10가지 방법)
1. Retire
the word "retirement" from your vocabulary. Look it up: it means to
"withdraw" or "retreat." Words can shape reality, and it's time for
this one to go. Doesn't "renaissance" or "graduation" better
describe your post-career life?.
‘은퇴’라는 단어를 되도록 사용하지 말라. 사전에 보면, 철수한다 또는
물러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확 바꾸어 보자. 그래서 은퇴시기를 도약의 시기로 만들어 보자. 다시
태어난다는 기분으로 또 변화를 준다면 은퇴후의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2. Realize
that retirement is a relatively new concept in human evolution. A
few generations ago, before social security and full-time leisure
became culturally embedded as the "norm," elders remained productive
members of society, relied upon for their insight, wisdom and
skills.
은퇴는 인간발전의 새로운 '컨셉'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불과 몇 세대 전,
사회보장제도가 없고 여가문화가 삶의 전형적인 방편이 되기 전 만하더라도, 노인은 지혜와 통찰력, 숙련된 기술 등으로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원로들이 아니었는가.
3. Restructure
your priorities around what is most important to you, like deepening
relationships with family and friends, community service, or the
arts. Now is the time to bring your professional life into line with
your deeper values.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정해 우선 순위를 매긴다. 예컨대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단체활동이나 문화활동에 더욱 관심을 쏟는다, 지금의 시기는 보다 고귀한 가치를 자신이 쌓아온
경륜(經綸) 에다 코드를 맞추는 일이다.
4. Renew your
zest for education. The learning cells of your brain are hungry for
new and stimulating challenges, and the welcome mat is out at many
schools and universities.
배움에 대한 열의를 갖고 새롭게 시작하라. 우리 뇌는 새롭고 자극적인 도전에
갈망하고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많은 학교나 대학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5. Revitalize
your energy by finding a community of people who embrace growth and
change. Don't get stuck with the "been there, done that" crowd.
발전과 변화 속에서 활력을 찾아라 무엇인가 이미 이뤘거나 삶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되도록 멀리하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고, 계속 발전하고 있는 사람들과 자주 접촉함으로써 활기를 얻는다.
6. Rekindle
your spirit for risk taking. "Do not fear mistakes," says jazz
immortal, Miles Davis, "There are none." If not you, then who? If
not now, when?
모험과 도전의 불꽃을 지펴라. 재즈의 전설 Miles Davis가 한 말이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지금 안 하면 또 언제 하겠는가?
7. Respond to
new opportunities. Remain open to the infinite possibilities the
world has to offer. Your full potential may lie ahead.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마라. 이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항상 열려 있다.
당신의 잠재력은 아직 다 발휘되지 않았다.
8. Recharge
your system by moving your body regularly. Walk, dance, swim, do
yoga, take up hiking or biking. Find something you really enjoy and
make it a part of your daily wellness program.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여 당신의 생체시스템을 충전하라. 걷기, 춤추기, 수영,
요가, 등산, 자전거 타기 등의 운동을 꾸준히 한다. 당신에 맞는 운동을 찾아 하루 건강프로그램으로 실천하라.
9. Revisit
your childhood dreams. It's never too late to be who you might have
been. Go for it!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한번 찾아보자. 당신은 그 꿈을 이루게 할 수 있다.
너무 늦다고 생각 말라.
해 보는 것이다
10. Remember
that the wisdom to discover and act on your deepest passion is
within you.
현인의 말씀을 기억하라 마음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열정을 끄집어내어 불태울
수 있는 것은 내 마음먹기 나름이다

오팔(OPAL)족은...
‘활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노인들’ 이란 뜻으로
영어로 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준말이다.
일본의 방송 경제캐스터인 니시무라
아키라[西村昇]와 하타 마미코[友田麻美子]가 2002년 공동으로 저술한 책 「여자의 지갑을 열게 하라」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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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를 책임지게 될 매티스 전 사령관,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매티스 전 사령관은 별명이 ‘매드독(Mad Dog)’입니다. ‘미친개’란 뜻인데요. 워낙
강경하고 거침없이 말하기로 유명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올해 66세로 해병대 일반 병사에서 시작해 4성 장군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복무했고,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중부군 사령관을 지냈는데요. 중부군 사령관은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아시아를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매티스는 1969년 해병대 사병으로 자원입대한 뒤 대학 졸업 후 다시 장교로 지원해 모두
44년간 군복무하며 4성 장군까지 오른 미 해병대의 전설로 통한다고 합니다.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활약한 그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對)이란 정책 등을 놓고 충돌해 2013년 중부군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했습니다. 그는 지적인 현장 지휘관으로
매력을 갖추고 있어 민주, 공화 양당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상원 인준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입니다.

매티스는 항상 ‘이기는 군’을 강조하면서 “도발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If you fuck
with me, I will kill you all)”이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세상에는 사냥꾼이 있고 먹잇감(hunters and victims)이 있다. 지금까지 받은
훈련과 민첩함, 충성심, 경계심 등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네가 사냥꾼이 될지, 먹이
감이 될
지가 결정된다”라는 말도
유명합니다.
지적이지만 지휘관으로서의 매티스는 누구보다 저돌적이고 강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선이 굵은 현장형 지휘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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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항상 궁금해왔던 북한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공개돼 누리꾼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난달 30일 영국 일간 더선(The Sun)은 2년간
북한에 체류하며
마을 주민들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온
사진작가 파비앙
뮤어(Fabian Muir)의 작품을 공개했다.
호주와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파비앙은
최근 2년간 북한 평양에 머물며 이곳 주민들의 삶을
지켜봐왔다.
하지만 이를 사진으로 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료 포대 위에 올라가 있는 북한 군인들 / Fabian Muir
북한에서는 군인이나 노동자들의 촬영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어
그는 줄곧 카메라 사용에 제재를 당했다.
파비앙은 "북한 측에서 허락한 모습만 촬영하다 보니
언제나 비슷비슷한 현장만 외부에 공개됐다"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의 삶을 왜곡해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대한 주민들의 삶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가며 몰래 이들을 찍었다"고 밝혔다.
파비앙이 포착한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아래 사진을 통해 만나보자.

수영장 탈의실에서 막 나온 남성

운동장에 모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있는 아이들

남포 근처에 위치한 고아원의 모습

북한 문수 워터 파크의 모습

나무 보트를 운반하는 북한 주민들

청진에 위치한 중앙 극장

청진에 위치한 한 유치원에서 피아노 치는 소녀

가뭄이 들어 황폐해진 땅에서 농사짓는 주민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들

갑작스러운 정전에 배터리 형광등을 밝힌 식당 / Fabian Mu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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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마태복음 18장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시편 27장 4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3장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16장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창세기 28장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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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사회복지
학자
J. Fowler 가
‘영성과
사회복지
실천’
이라는
책에서
‘신앙의
6가지
발달
단계’를
정의했습니다.
나의
신앙이
어느
단계에
올라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직관적이며
투사적인
신앙(intuitive
projective faith)
초보
단계
-
주변사람들의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습니다.
논리적
사고
보다는
직관적인
사고와
상상이
우선합니다.
이
단계의
인상과
느낌은
신앙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2.신화적이며
문헌적인
신앙(mythic-literal
faith) 초보
탈피
단계
-
연역적인
이성이
주도
하는
단계.
신앙에
대해
비판적
사고가
거의
없고
성경
말씀을
무조건
믿는
단계입니다.
3.결합적이며
일상적인
신앙(synthetic-conventional
faith) 성장
단계
-
지도자가
제시한
원칙에
크게
동조하는
단계.
자기
소속한
공동체
정체성에
지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때로는
종교적인
충격을
경험합니다.
신앙에
가끔
한
번씩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4.개인적이며
반성적인
신앙활동(individualities
reflective faith)
성숙
단계
-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앙 관과
내적인
대화를
합니다.
5.변증법적인
신앙(conjunctive
faith) 변화
단계-
이분법적인
사고보다는
상호관계성을
우위를
두는
사고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과
현실의
복잡성과
그것들을
동시에
보고자 하는
인식활동.
어둠은
빛과
함께
있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6.보편적인
신앙(universal
faith) 안정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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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정의와
사랑으로
현실과
믿음의
파라다스를
극복하는
단계입니다.
기독교식
표현으로
하면
‘영화’의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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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성 교협 회장(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이철남
선교사(왼쪽에서 일곱 번째)에게 유류비를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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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스푼선교회(대표 김재억)와 워싱턴지역한인교회협의회(회장
손기성 목사)가 멕시코 선교를 떠나는 이철남 선교사에게 차량과 유류비, 방송장비 등을 기부했다.
이 선교사는 기부받은 98년형 포드 익스플로러를 타고 3일 멕시코 유카탄을 향해 출발할 예정이다.
김재억 굿스푼선교회 대표는 “이 선교사는 3500마일을 달려 일주일 뒤 목적지에 도착할 계획”이라며
“워싱턴 한인들이 기부한 LED 조명과 방송장비를 현지 학교에 설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기독교 중고등학교를 내년 5월에 개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과 워싱턴지역 교회에
감사드린다”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에게 빚을지고 산다. 학교 건축도 슈퍼스타가 아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지어졌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에게 유류비를 지원한 손기성 회장은 “교협이 굿스푼선교회를 통해 스페니쉬 선교를 하게 돼
기쁘다”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소외된 민족을 돕는 사역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달식에서 박문규 원로목사회장은 이 선교사가 멕시코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대표기도를 했다.
한편 굿스푼선교회는 현금이나 물품 후원을 받아 불우이웃 돕기와 히스패닉 전도 사역에 힘쓰고 있다.
▷후원문의: 703-622-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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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미용 선교회는
장재덕 목사를 지도 목사로 하여
조명숙 전도사를
팀장으로 미용사 10명으로 구성된 선교 단체이다
땅끝 미용 선교회가 11년째 이-미용선교를 하고 있어 미담이 되고 있다.
예장합동총회 장재덕 목사가 이끌고 있고 땅끝 미용 선교회는
이-미용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농어촌, 산간지역, 어촌 교회에도 찾아가 전도 목적으로 이-미용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것도 11년째
계속되고 있다.
땅끝 미용 선교회는 장재덕 목사를 지도 목사로 하여 조명숙 전도사를
팀장으로 미용사 10명을 구성된 기능 선교 단체이다.
미용 선교회는 경북지역 오지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 소외계층, 양로원,
요양원 등 매주 화요일 이-미용선교를 통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11년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봉사사역을 계속 감당하고 있다.
이번에는 제주지역에 김선규 총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올레수양관에 여장을
풀고 제주노회장의 추천을 받은 제주 이도교회와 섬다교회에서 이-미용 봉사를 통한 전도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장재덕 목사는 "회원들이 바쁜 생활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미용 기능을
통하여 어려운 이웃을 찾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데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목회자로서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감사했다.
장 목사는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한이웃이 되어 다양한 어려운 형편속에서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많다"고 언급하며, "우리는 이러한 분들에게
나누는 봉사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점촉점을 찾아 전도하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됐다"며 선교회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팀장인 조명숙 전도사는 "교회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미용 기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교회 회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을
밝히는 데 작은 촛불이 되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회원들과 함께 계속 이와 같은 사역을
진행해 가겠다"며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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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한국 교회에서 권사(勸士, exhorter)는 영성과 희생적인 봉사의 대명사로 통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권사에 대한 이미지를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교회 직분자로 인식한다(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권사의 기준이 다르다. 이 글은 여성도 리더십으로서 권사를 다룬다).
한 교회의 성장 이면사에는 권사의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을 한두 줄로 다 담아내기가 어렵다.
그만큼 권사의 책무가 컸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를 달리한다 해도, 한국 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여종들의 몫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종들이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리라 확신한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변화에 따라 여교우들의 지도력에도 옷을 바꿔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질을 수호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자기 변신이다. 외부로부터 강제된 변화는 변질로 이어진다. 스스로 변화는 성숙으로
열매를 맺는다. 모든 지도력이 그러하듯 권사로 대변되는 여성도들의 올바른 리더십의 방향은 무엇인가?
R&D에 투자하라
여성 지도자로서 올바로 서기 위해 R&D(연구 및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남을 이끌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 재교육이나 장로 재교육에 대한 소리는 높지만, 권사 재교육에 대한 소리는 드문
편이다. 일상적인 교회 생활을 통해 공급받는 영적 자양분을 섭취하는 기회는 모든 여성도들에게 열려 있다. 타인을 이끄는
자는 타인의 수준에 머무는 순간, 지도력을 상실하게 된다.
여성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려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자기 발전의 정규적인 기회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이 뻣뻣해지듯, 생각도 뭉쳐 있으면 경직되게 마련이다.
생각을 새롭게 하고 안목을 확대하기
위해 의도된 자기 발전의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자아상을 항상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유지하려면 치열한 자기 발전에
대한 열망이 필요하다.
지성과 영성의 조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땀과 수고의 열매이다.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리더십의 이미지는 같을 수 없다. 유형무형으로 연구와 개발에 대한 청사진을 수립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시기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이나 관록으로 교우들을 이끌지 말고, 삶의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이끌어야 할 시대가 이미 왔다.
칭찬 받는 시어머니가 되자
지도자의 가정은 그 사람의 참모습을 말해 준다. 부분적이겠지만 ‘권사 시어머니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싫다’는 뼈아픈 사연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유는 가정 사역의 적신호 때문이다. 가정에서 지도력은 하루 아침에 행사된
것이 아니기에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가정을 강하게 꾸리는 모습과 맞물린 권사의 모습은 산업화로 인한 가장 부재 시기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고부간에 인터넷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는 지금은 일방적인 영향력 행사보다 쌍방적인 대화에
무게가 실린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대상을 이해하고 열린 마음의 대화가 기본이다.
‘믿습니다’ 스타일이 효험을 발휘할 때도
적지 않지만,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오는 경우도 많다. 권사가 주님과 깊은 대화를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맛보듯, 세대가 다른
사람들을 기도하듯 품는다면 수평적인 교제의 원만함을 이룰 수 있다. 칭찬 받는 시어머니 권사는 지도력의 많은 부분을 보여줄
것이 분명하다.
덕이 있는 여론을 형성하라
권사라는 직분 자체가 여론 형성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사람이 많으니
생각도 많고, 생각이 많으니 말도 많은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말을 말로 다스리는 역할의 선봉에 권사가 서 있다. 실상
교회의 모든 여론 형성의 진원지는 권사의 ‘입’일 때가 많다.
여론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권사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다. 많은 권사의 남편들이 교회의 중요
멤버로 뛰고 있다는 사실과 베갯머리 송사를 이겨내는 남자가 드물다는 고래(古來)의 말을 생각할 때, 교회 여론은 권사의
성향과 호불호(好不好)에 달려 있다. 축복된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든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든지 권사는
입술을 제어하는 지혜자가 돼야 한다. 교회의 여론 형성을 발전적으로 이끈 몫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권사가 많은 교회는 늘
생기가 넘쳐난다.
사도 바울은 어떤 여성들이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사실에 주목하고 마음 아파했다. 이러한 여교우들을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삶으로
인정받는 여성 지도자인 권사의 몫이 아니고 누구의 몫이겠는가! 말 많은 권사가 될 것인가? 덕이 많은 권사가 될 것인가?
선택의 몫 역시 권사들에게 달려 있다.
목회의 후원자로 서라
목회자가 힘들어 할 때 기도의 막강한 후원 부대는 영적인 천군만마를 얻음과 다름이 없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영적 지도자의 든든한 후원자들의 이름 중에 여성도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엘리야의 후원자 사르밧 과부,
엘리사의 후견인 수넴 여인, 사도 바울의 사역에 힘을 돋운 여러 여성도들의 이름이 서신서 뒷부분을 인상 깊게 채우고 있다.
모성애적 마음으로 목회자의 동반자로서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는 권사의 모습은 목회자는 물론이고 교우들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주님께서 여성 지도자의 섬세하고 끈질긴 성품을 사용하셔서 흔들리는 목회자를 세우시고, 낙심한
목회자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신다. 권사들의 다른 별명이 ‘기도의 어머니’란 사실이 목회자의 동역자란 사실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다. 권사들의 팀워크를 통해 강력한 영적 진지가 구축되면 교회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한국 교회의 권사 제도는 목회자와
교회에 힘을 실어주는 하나님의 사려 깊은 선물임에 분명하다.
말씀의 분별력을 소유하라
이단 사상이 난무하는 한국 교회의 형편이다. 기독 언론을 표방하는 신문이나 방송조차 못 믿을
세상이 되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그럴 듯하게 꾸미고 나오는 것은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여교우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이단들의 시도를 최일선에서 분별하고 막아야 하는 위치가 권사들이다.
어떤 일이든지 목회자에게까지 보고돼 상황을 타개하기까지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제법 시간이 걸린다.
이때 분별력 있는 권사가 초동 진압 작전의 선봉에 서서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하면 교회는 이단
사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심지어 권사 자신이 포섭의 대상이 된 상황이라면,
예삿일이 아니다.
온 교회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영적으로나 인간 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는다. 꼭 이단의 문제뿐
아니라, 교우들의 삶에는 복병처럼 숨어 있는 일들이 많다. 축복된 일에는 교역자와 협력해 축하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사전 예방 사역이다. 일이 터진 후 치료는 예방 사역보다 몇 배의
인적 물적 요소가 투자돼야 한다. 어떤 일은 거의 회복 불능인 경우도 있다.
시대를 앞서 읽어냈던 에스더처럼 통찰력을 소유한 권사들은 교회의 영적 지킴이다. 얼마나 많은
위태로운 일들이 권사들의 분별력에 의해서 사전에 정리되었는지 모른다. 특수 부대 군인들이 탐지기로 묻혀 있는 지뢰를
찾아내듯, 권사들의 영적 레이더가 교회의 영적 풍향을 주도한다.
기독교 역사 2000년의 지혜를 담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가정 중심,
목회자 중심’의 검증된 생활 원리는 건강한 교회에 직·간접으로 축복이 되었다.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따뜻한 마음과 예리한
분별력으로 자신의 성숙함을 도모하고, 교회에 축복을 가져다 주는 권사라는 직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존중받아
마땅하다.

장로의 역할
열차를 타고 달리다가 차창 밖으로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보게 된다. 마을 가운데 있는
아담한 교회와 솟아오른 십자가는 보는 이에게 정겨움과 평화로움을 전해 준다. 그런 교회 모습의 이면에는 성도들, 특히 이름
모를 영적 지도자들의 치열한 주님 사랑이 배어 있다. 그렇다.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는 아름다운 희생과 성숙한 인격의
대명사였다. 적어도 한 세대 전에는 이에 대해 교회 안팎으로 이의를 다는 이는 없었다.
오늘의 장로상(長老像)은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누가 뭐래도 한국 교회의 큰
이미지는 목회자와 장로의 합작품임에 틀림없다. 장로의 인격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
성 싶다. 장로의 직분 자체는 성경에서 증거하는 대로 존귀하다. 누가 장로의 직분에 대해 폄하한다면 덕스럽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장로 직분을 수행하는 당사자 역시 인격이나 사역에서 ‘공사 중, 수리 중’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장로는 섬김의 시작인가, 끝인가
장로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더럽히는 것은 장로의 속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함백산 계곡이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인 것처럼, 장로 영혼의 지성소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섬김의
출발과 종착을 결정한다. 이상하게도 한국 교회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 없어져야 하지만,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것이 “그
사람 장로 되더니 사람 버렸다”는 식의 말들이다.
장로직의 생명은 순전성(integrity)에 있다. 주님과 교회에 한 몸 드려 섬기겠다는
의지는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성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반해 장로직을 통해 얻는 유·무형의 보너스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면, 개인과 장로 직분의 추락은 시간 문제다. 장로됨이 섬김과 희생의 출발이라고 인식할 때와 존경받고 다스리는
직분이라고 인식할 때 나타나는 양상이 같을 수 있겠는가?
주님께 인정의 도장을 받아라
교회 시무 장로는 당회원으로서 각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에서 목사와 같은 권한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권한을 가진다. 직분 수행을 하다보면 자연히 많은 서류를 접하게 되고, 도장 찍는 재미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체질화되면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것으로 중심 이동이 이뤄질 수 있다.
나중에 도장 찍고 일 처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무릇 장로의 직분을 받은 이는 주님께
인정과 신뢰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저 장로님처럼 교회 생활하고 싶다.” “저 장로님 가정처럼 살고
싶다”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역할 모범의 본래적 사명을 이룬 것이다. 장로 직분은 서류에 도장 찍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풍겨 나오는 주님의 향기로 일하는 것이다.
담임 목사의 목회를 꽃피우게 하라
만약 장로가 반석 같은 목회 철학이 있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쉽게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로에게는 섬김과 충성의 철학만 있을 뿐이다. 담임 목회자의 목회 철학에 동역해 건강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지가 불탈 뿐이다. 장로의 참다운 동역은 자신의 철학을 버리고 담임 목사의 목회 방향에 온전히 적용할 때 조화를 이룬다.
왜 수많은 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를 청빙해 잔칫집처럼 출발했다가 초상집처럼 갈라서는가? 이유는
철학과 철학, 이론과 이론, 권위와 권위가 맞부딪쳤기 때문이다. 마치 갈라디아교회의 교우들이 성경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형국과 비슷하다. 목회자를 철저히 검증 절차를 거쳐 청빙하든지, 아니면 아예 청빙하지 말든지 해야 한다. 청빙해
놓고 소신껏 목회를 감당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흔들고 어지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장로가 철옹성 같은 목회 철학을 소유하는 한 목회 현장에 은혜의 봄바람이 불기는 어렵다. 여러
장로들의 모임에 참석 빈도가 높을 수록 목회에 대한 규제도 심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목회자들만의 느낌인지 자문해 볼 일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함께 동역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해 감동을 받아 후세에
전한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이런 목회자와 동역자 간의 가슴 뭉클한 순애보는 과거의 일로만 기억될 것인가. 우리 시대의
장로와 목회자의 결단이 필요하리라.
돈을 좋아하지 말고, 도를 좋아하라
왜 일반 시민들이 장로와 돈을 오버랩 시킬까. 개발 논리에 따라 ‘잘 살아 보세’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을 때 교회만이라도 ‘올바로 살아 보세’의 원리를 붙잡았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깨끗한 이미지로 자리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장로는 돈을 좋아하지 말고 도(道, 말씀)를 좋아해야 한다. 교회 건축 과정에서 이권에
개입하다 망신당한 장로가 어디 한두 사람인가.
온몸을 통째로 드려 헌신하는 품격 있는 장로가 있는가 하면, 온몸으로 뛰어 돈 되는 일에
몰두하는 장로도 있다. 건축 중인 어느 목회자가 이미 건축이 끝난 이웃 목회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던 중에 제일 먼저 들은
말이 “목사님, 절대로 장로를 믿지 마십시오”이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장로는 경건의 능력으로 돈을 다스리는 모습을 실제로 교우들에게 보여주는 역할 모범의 선두
주자이며, 향도적 사명을 가진 자이다. 세상 사람이 돈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장로만은 돈에 대해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리기를 교우들은 기대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에 장로들의 삶에서 희망의 불씨를 보기
원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돈 냄새나는 장로가 아니라, 예수 냄새나는 장로에 목말라 한다.
간증 많은 장로로 서라
장로는 선견자가 돼야 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보고(先見), 바로
보는(正見) 지도자가 필요하다. 먼저 보고, 바로 본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과 고상한
인격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자칫 장로직을 오래하다 보면 자신의 주장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이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매사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이끌어 주신 간증이 많다는 증거이다. 자기 주장은 교우들에게
부담을 준다. 교우들을 억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증은 교우들에게 기쁨을 준다. 교우들의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느 2:8, 18)에 대한 다양한 체험이
있었다. 은혜 받은 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
간증이 많은 장로가 여러 명 있을 때 교회는 예외 없이 정면으로 장애물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태산이 평지가 되는 은혜로운 역사도 체험한다. 이에 반해 자기 주장이 많은 장로가 있는 교회는 될
일도 되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는 커녕 현상 유지도 힘들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들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반드시 간증이 충만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포진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력 지수나 경제 지수도 좋지만 은혜 지수가 장로의 대명사가 돼야 당사자도 살고 교회도
산다. 교우들을 인도하려고 소매를 걷어올리기 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무릎을 꿇는 장로는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교제를
통해 많은 간증을 추수하게 된다. 교회의 보물 같은 장로는 은혜 지수가 높아 성도의 신앙 지수를 상향 조정한다.
예배 기도는 짧게, 개인 기도는 길게
초신자에 대한 배려는 교회 내에서 다양하게 이뤄진다. 대표적인 것이 목회자의 메시지와 장로의
예배 기도이다. 목사의 메시지가 교우들에 대한 따뜻함이 배어 있지 않으면, 교우들은 영적 영양 실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일하게 장로의 예배 기도가 교우들을 민감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교우들은 기도 생활에 대한 참신한 맛을 보기도 전에 기도에
식상해 한다.
회중의 눈을 뜨게 해놓고 주제 없는 메시지를 펼치는 것과 회중의 눈을 강제로 감게 해 놓고
중심 없는 기도를 강요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설교자에 대한 배려로서 예배실 뒷면에는 반드시 큰 회중 시계나 디지털
시계가 자리잡고 있다. 설교 시간과 예배 시간에 대한 무언의 또 다른 메시지인 셈이다.
그런데 장로가 담당하는 공적 예배의 기도는 모두 눈을 감고 하니 개인적 제어 장치가 사라진다.
주관적 감각의 시계만 기도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주관적이라고 다 나쁠 수는 없다.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회중은 눈을
감은 채 미로를 헤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경우도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목회자의 설교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동일선상에서 장로의 기도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는 것도 축복이다.
장로들의 기도 시간이 마치 고문당하는 시간처럼 지레 겁을 먹는 교우들도 많이 있다. 진정으로 주님과 회중을 사랑한다면 개인
기도를 깊고 오래하고, 예배 기도는 생수 터지듯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예배 기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이다.
장례식에서 목사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라
목사가 가장 영광스러울 때가 바로 장로 장례식의 집례이다. 충성된 장로, 온 교회의 사랑을
받던 장로의 죽음은 말이 장례식이지 교회의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또 다른 잔치라 할 만하다.
조객들과 집례자의 눈에 맺히는
눈물은 고인에 대한 감사와 그의 믿음의 행적이 보여주는 감동에 대한 거룩한 답례이다. 이런 장례식은 교회에 힘을 준다.
비록 이별의 아픔이 있지만 만남의 소망도 크기에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선다.
그런데 장례식이 집례자에게 가장 곤혹스럽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집례자와 조객, 성경 본문과
찬송, 심지어 순서도 동일하지만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바로 고인이 된 장로의 생전의 믿음 생활 때문이다. 명목상의
장로였는지, 실제로 장로처럼 살았는지 주님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대놓고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교회 회중이 다
알고 있다. 인생의 결론이 예수 닮은 장로인가? 세상 닮은 장로인가? 자신을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교회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어떤 태도로 살아온 장로인가가 인생의 결론이다. 우리는 인생 최후 순간에 집례 목사의 눈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장로가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집사의 역할
‘집사’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디아코니오(diakoneo)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섬기는
사람’ 또는 ‘안내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집사는 자신의 목사를 도와주고 모임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는 일꾼이다.
전통적으로 집사는 성직자라기보다 봉사 사역자로서 인식되어 왔다. ‘집사회’란 말도
단순히 교회에서 집사들의 모임을 뜻한다. 많은 수의 집사들로 구성된 집사회에는 목사가 ‘수석 집사’를 임명해 세운다.
집사의 역할이 봉사자로 머무는 게 아니라, 중요한 리더로서 역할을 갖도록 한다.
집사의 기능은 서번트십
집사회에 속한 집사는 목사, 지역 교회, 교회의 기관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들을 지원해야 한다. 집사회의 목적은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말씀을 행하기 위함이다. 집사는 목사, 장로, 지도자들이
기도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역에 헌신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런 일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법에 따라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집사와 집사회의 기능이다.
집사의 자질에 대해 디모데전서 3장 8∼13절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다. 또 집사의 기능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인격이 요구되는 집사는 교회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사무와 그 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성경에는 집사 자격으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9),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딤전 3:10)라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집사의 임무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직분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구이언을 하는 자’(8절)는 집사 직분에 적합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집사가 맡은 일이 일상에서 성도들과 가깝게 지내며 병자를 위문하거나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역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성도들 간에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자질구레한 여러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따라서 이를 여러 사람에게 말을 전해서 소문낼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진다. 따라서 집사들은 자신이 접한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집사에게 탐심을 떨쳐버리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가 주업무
집사회 조직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집사회를 대표하는 집사장은 목사가 지목한다. 신약 시대
집사의 역할이 사무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집사는 청지기로서 교회 내 사무와 회계 일을 담당한다(딤전
3:8∼10). 집사장은 교회 내 안내, 경조사, 청소 담당과 같은 여러 일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각각 팀을
구성한다. 집사장과 각 팀원들은 자주 만나 일에 대해 의논한다.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8절까지는 집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집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집사는 지역 교회에서 맡은 각각의
역할들을 감당해야 하고 교회에서 잔 손길이 가는 많은 일들에 일일이 신경 써야 한다. 오늘날 집사들이 해야 할 전형적인
임무는 다음과 같다.
예배를 위한 전 과정에서 안내자로서 일반 회중들 돕기, 예배 전후 주차 관리, 헌금을 회수하고
계수해 은행에 입금하는 일, 교회 내 예배와 만남들이 안전하게 이뤄지도록 지원하기, 새신자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교통 수단 제공하기, 순번을 정해 전도하러 나가기, 교회 건물은 물론이고 앞마당이나 주차장의 보수 및
관리하기, 교회 건물이 예배와 모임에 적절하도록 준비하기 등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양들을 먹이는 의무는 목사에게 있다는 것이다. 집사들은 양들의 필요에
집중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은 양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직접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집사들이 자신들의 직분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것에 달려 있다. 집사들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직분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글 |오정호 대전새로남교회 담임 목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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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en Gruman | InfoWorld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여전히 최고의 모바일 기기고, iOS는 최고의 모바일 운영체제다.
정교하고 풍부한 기술로 무장하고 현재 시장에서 가장 응집력이 높은 생태계를 제공한다. 맥은 여전히 빼어난 디자인과 높은
품질을 자랑하며 애플 모바일 장비를 훌륭하게 보완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애플에 대해 시큰둥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아는 모든 애플 팬은 애플의 신제품에 대해 불만과 걱정, 곤혹감을 표한다. 오래 전부터
익숙한 애플 팬들의 환호와 흥분을 요즘은 거의 들을 수 없다. 사람들은 포트와 동글에 대해 불평하고, 햅틱 버튼과 터치
바를 누가, 도대체 왜 만들었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신제품이 나와도 과거 모델로 눈을 돌린다. 애플 기기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멋진 일들에 대해 떠들어 대지도 않는다.
몇 년 동안 애플의 모바일 혁신 속도가 둔화되면서 새로 출시하는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모델의
업그레이드를 부추기는 매력도 점차 떨어졌다.
예를 들어 아이폰 6s의 3D 터치는 어느 모로 보나 그렇게 열광할 만한
기능은 아니다. 맥의 경우도 2014년 OS X 요세미티부터 맥 OS에 흥미로운 기능이 도입됐지만 그 외에는 몇 년 동안
주목할 만한 혁신은 없었다.
게다가 올해 아이폰 7은 오디오 포트를 제거한 탓에 어댑터를 따로 구입해야 하고, 음악을
듣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경우에 따라 전화를 하는 동안에는 아이폰을 충전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애플이 오디오 잭 시대를 끝낼 것이라고 약속했던 무선 이어버드는 기약없이 지연되고 있다. 이는 설계나 제조에 뭔가 큰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아이폰7이 표방한 "혁신"은 경쟁 관계의 고급 안드로이드 모델들이 오래 전부터 제공해온 방수
기능,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더 얇은 두께와 빠른 처리 성능, 높은 품질의 디스플레이였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더 이상
팬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아이패드는 더 암울하다. 아이패드 프로는 아티스트와 건축가 외에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올해에는 신제품 없이 아이패드 프로의 소형 버전만 나왔다. 그나마 마이크로소프트가 서피스 프로를 내놓자 그냥 반사적으로
출시한 모델이 아닐까 싶다. 아이패드에 착탈식 키보드를 추가한 것을 혁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애플 워치는 지금 구입 가능한 최고의 스마트워치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기기다.
최신 워치OS 업데이트를 통해 사용 편의성이 높아졌지만 필자가 아는 대부분의 애플 워치 사용자들에겐 딱히 애플 워치를
사용하는 이유는 없다.
iOS에는 주차 위치 기억하기와 같은 여러 가지 소소한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이상한 UI
변경으로 인해 일부 작업은 오히려 더 불편해지기도 했다. 신형 맥북 프로와 그 해괴한 터치 바는 애플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확신만 더해 줄 뿐이다.
특히 여전히 라이트닝 커넥터와 USB-A 케이블을 사용하는 아이폰 7이 출시되고, 한달
후에 나온 신형 맥북 프로가 USB-C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보면 그 느낌은 더 강해진다. 이제 애플의 모바일 그룹과 컴퓨터
그룹이 서로 단절된 채로 일하는 걸까?
결국 사용자들에게 남는 인상은 최고의 제품을 보유한 애플이 아니라
비틀거리는 애플이다. 애플
특유의 과장법은 여전히 온갖 사소한 것들을 놀랍고 혁신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지금
이러한 극단적인 과장은 애처롭게 들릴 뿐이고, 적어도 자신이 한 말은 지켰던 스티브 잡스를 연상시키는 역할도 더 이상
못한다. 애플 사용자 역시 극단적인 과장에는 염증을 느낀다.
그 사이 안드로이드 경쟁 제품들은 더 좋아졌다. 역설적이게도 애플 수준으로 하드웨어 품질을
높이고 안드로이드 OS의 기능을 대폭 다변화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한 덕분이다. 여전히 애플이 앞서지만 그 간격은 좁아지는
중이다.
이제 애플의 가장 큰 장점은 생태계, 즉 애플 제품을 서로 손쉽게 연계할 수 있는 기능이다.
최근 생태계 개선의 대부분은 핸드오프(Handoff) 기술을 활용한다. 핸드오프 기술을 통해 아이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맥에서 받고, 아이패드에서 아이폰의 SMS를 통해 문자를 보내고, 맥과 iOS 기기 사이에서 텍스트를 복사하고, 근처의
사용자와 파일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서비스를 모르거나 알아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전체를
애플 하드웨어 환경으로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능을 알고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핸드오프 기능은 사소한,
즉 놀라울 것 없는 기능일 뿐이다.
게다가 이 생태계마저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iOS 기기와
아이튠즈의 관계는 대부분의
사용자에게 혼란스럽다. 여러 차례의 아이튠즈 업데이트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는 변함이 없다. 애플이 기기의 더 많은 부분에
아이클라우드를 융합하고 있는 마당에 아이튠즈와 아이클라우드의 각자 노선 백업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북마크, 메일 규칙, 와이파이 연결 등의 아이클라우드 동기화는 유용하지만 문제가 자주 발생해서
사용 중인 기기에 따라 예전 설정이 다시 나타나거나 기존 설정이 사라지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클라우드와 스트리밍에
관한 애플의 행보(아이튠즈와 아이워크, 아이클라우드 드라이브와 홈킷, 애플 TV와 뉴스 등)는 이해할 수 없고 그 방향도
불확실하다.
또 다른 현상은 하드웨어 생태계에서의 철수다. 애플은 디스플레이와 와이파이 라우터를
단종시켰다. 애플은 한때 첨단을 내세웠던 이 제품들을 그대로 방치했지만, 썬더볼트 디스플레이의 내장형 멀티포트 도크,
에어포트 익스트림의 손쉬운 네트워크 연결과 관리 등은 지금까지도 딱히 대적할 제품이 없다. 키보드, 트랙패드, 마우스는
아직 만들지만 올해 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애플이 계속 고수하는 한 가지 확실한 하드웨어 분야는 바로
동글이다. 애플은
동글을, 그것도 아주 많이 만든다.
애플은 진화해야 하지만 과연 진화를 위한 좋은 계획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애플
팬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큰 걱정거리다. 지금은 혼란스럽고 임기응변식의 소소한 변경들, 속도 개선과 같은 뻔한 변화만 있을
뿐이고 하드웨어와 서비스 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달리 말하자면 애플의 광채는 군데군데
흐려지는 중이고 애플의 핵심 제품들은 탄성과 방향을 잃은
듯하며 경영진은 판타지 세계에 빠진 듯하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 체제지만, 그 외의 다른 모든 정치 체제보다는 낫다"라는 말을
아는가? 필자 생각에는 애플 사용자들이 애플 제품을 이런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다. '애플 제품은 최악의 컴퓨팅
기기지만, 그 외의 다른 모든 기기보다는 낫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쩐지 애플이
죽어가던 1990년대 후반과
같은 기분이 든다.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갔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해도, 최고이면서 열정은 느낄 수 없는
회사가 될 위험에 처한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아이폰 7, 아이패드 프로 또는 애플 워치를 구매해도
별다른 흥을 느끼지 못한다. 전에 사용했던 것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애플은 사라진 재미를 되찾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의 모바일 기기는 PC와 같은
상황, 즉 사양을 개선하고 외관을 단장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근본적으로 더 이상 할 게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일 수도
있다. 완벽을 기한다 한들 즐거움은 없다. 필자는 아직 더 많은 재미가 남아 있기를 기대하지만 희망은 점차 사그라지고
있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물론 필자 혼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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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중요한 영어
통근하다
Commute
1.
My workplace is in LA, So I
commute everyday between
Orange county and Los
Angeles.
직장이 엘에이에 있어서
매일 OC와 LA를 출퇴근하고 있어요
2.
I Commute from Fullerton
everyday
매일 풀러톤에서
출퇴근하고 있어요.
I
commute between Los Angeles
and Fullerton
(동사로 사용)
풀러톤과 LA
사이를 통근하고 있어요
I
enjoy life in Fullerton, But
I can’t stand the commute.
(명사로 사용)
풀러톤
생활은 좋지만 출퇴근은
못참겠네요.
3.
How can you stand that
commute?
어떻게 그걸 견뎌요?
There has been a decrease in
commuters on the freeway
following the expansion of
train service
4.
What a hellish commute! How
can you stand it?
It’s actually not that bad.
I Listen to audio books and
that helps the time pass
5.
How do you commute?
어떻게 통근해요?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
We
have a lot in common.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 / We have a lot
in common.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서 헤어졌어.
We
have nothing in common. So
we broke up.
저 둘은 공통점이 많아
Those two have a lot in
common.
난 내 여자친구랑
공통점이 많아~
I have a lot in common with
my girlfriend.
언제 밥 한번 먹자
영어로는 어떻게
말할까?
(이
말은 밥 먹자는 말이 아니고 다시 한번 만나자는
뜻)
Hang out (어울려서
놀다)을
사용한다.
Let’s hang out something
(sometimes).
언제 한번 만나서
놀자. (언제 밥 한번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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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1월19일자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 실린 한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social media란 말이 여덟번이나 나옵니다.
social media는 사람들 사이의 친선과 정보교환 등을 목적으로 만든 인터넷 싸이트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Facebook, Twitter, YouTube, Pinterest 등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느 신문사가
SNS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니까 그게 미국이나 그
밖의 다른
영어권에서 모두 쓰는 말인 줄 알고 국내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모두
social media(쏘셜 미디어)라고 씁니다. 위 사진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외국에서는 SNS란 용어를 전혀 쓰지 않는데
왜 한국에서만 그걸 고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쏘셜 미디어"란 용어 쓰기 싫으면 그냥 특정 쏘셜 미디어의 고유명을 쓰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가수 아무개씨가 SNS에 올린 글에서..."라고 하지 말고 "가수 아무개씨가 Facebook에 올린
글에서...."와 같이 쓰면 더 좋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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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으면서 살 빼는 방법
'저항 전분(resistant starch)'
요즘 다이어트 하시는 분들 참 많습니다.
저도 사실, 방송을 통해서 여러 번 공개를 했지만, 예전에 제 몸무게가 무려 95Kg까지 나갔었습니다. 지금은
20Kg 정도 감량한 상태입니다.
다이어트를 평상시에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몸무게와의 전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연구 자료들을 살펴보고 어떤 것이 건강하게 살을 뺄 수 있는 것인지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중에
재미있는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에 많은 분들이 탄수화물을 줄이는 다이어트를 합니다.
그 이유는 아시다시피 밀가루, 흰쌀밥, 빵, 케이크 등 단 음식을 먹으면 혈당이 빨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혈당이 올라가면 몸에서는 혈당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인슐린이 분비되고, 이 인슐린은 당을 세포질 속으로 집어넣는데,
그 과정에서 살이 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게 하는 것이 다이어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인슐린이 안 나오게 하기 위해서 흰쌀밥 대신에 현미밥을 많이 권장합니다. 사실 칼로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흰쌀밥 한 공기와 현미밥 한 공기와의 칼로리는 거의 똑같거나 오히려 현미밥이 조금 더 높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미밥을 권하는 이유는 현미밥이 혈당을 빨리 올리지 않기 때문에
인슐린이 나오지 않고 그래서 살이
찌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영양학 저널들을 보면 이런 논문들이 나옵니다.
'살이 안 찌게 하는 탄수화물이 있다. 그것의 이름이 바로
'저항 전분(resistant starch)'이다.'
이 성분은 먹자마자 소장에서 흡수가 안 되고 대장으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흡수가 조금밖에 안 되기 때문에 칼로리도 줄고 혈당도 올리지 않지만 배는 불러서 다이어트에 아주 도움이 되는
성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성분을 이용한 다이어트 식품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나온 연구들을 보면 이 저항 전분이 우리가
먹는 음식 속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죠. 그래서 안 먹을 수 없는데, 이 쌀밥을 먹으면 혈당이 올라 살이 찔까 봐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쌀밥을 해놓고 바로 드시지 말고 식히게 되면 이 쌀밥이
저항 전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내용은 매체를 통해서 몇 번
소개가 됐었습니다.
밥을 하자마자 바로 드시지 말고 1℃~4℃ 정도, 그러니까 냉장고에 밥을 넣고 6시간 정도 지나면 많은 저항 전분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 식은 밥을 드시면 살도 덜 찌고, 포만감을 느끼지만 칼로리는 적게 흡수되고 혈당도 많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의아해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냉동 밥은 어떨 것인가?'
저항 전분이 잘 생기게 하려면, 냉동보다는 냉장이 맞습니다.
그것도 6시간 이상 냉장을 한 이후부터 저항 전분이
생깁니다. 그래서 12시간까지 냉장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살을 빼기 위해서 매일 찬 밥을 먹어야 하냐고 말씀을 하시는데,
찬 밥을 살짝 데워서 드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밥을 다시 끓이면 저항 전분이 파괴되지만,
간단히 데워서 드시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드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밥을 먹으면서도 혈당을 덜 올리고 훨씬 더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저도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제부터는 냉장 밥을 먹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찬 밥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다른 분들에게 말씀드렸더니, 어르신들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찬 밥은 살로 안 간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말씀하셨을 텐데, 정말 사실인 거 같습니다.
"찬 밥을 먹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살이 안 찌더라."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건강하게 살을 빼기 위해서 굶지 말고
냉장고에 넣어둔
찬 밥을 데워드시면 다이어트에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한 다이어트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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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심 5000명
발송비
/F. Chang/
H. Kim/김성현/최옥연/최승갑/Sung
W. Lee/Sung S.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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