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  2017

 

 

 

 

 

 

 

 

 

 

 

 

 

 

 

 

 

 

 

 

 

 

 

 

 

 

 

 

My life goes on in endless song

나의 인생은 찬양과 함께 끝없이 계속되며
above earth's lamentations,

이 땅의 탄식 너머 아득히 들리는
I hear the real, though far-off hymn

찬미의 소리를 들어요.
that hails a new creation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소리예요.

Through all the tumult and the strife

모든 투쟁의 소란스러운 소리들 가운데
I hear it's music ringing,

내게 들리는 노래 소리 있으니
It sounds on echo in my soul

내 영혼에 메아리 치는 소리라
how can I keep from singing?

나 어찌 찬양 안 할까

While though the tempest loudly roars,

사나운 비바람 치는 큰소리 들려도
I hear the truth it liveth.

나의 찬양을 멈추지 못해요.
And though the darkness "round me close,

비록 둘러 싼 암흑 속에 내가 갇혔다 해도
Songs in the night it giveth.

나는 그 어두운 밤에도 찬양해요.

No storm can shake my in-most calm

어떤 폭풍도 내가 그 바위에
While to that I'm clinging.

단단히 서있는 동안 나의 고요함을 흔들 수 없어요
Since Love is Lord of heaven and earth,

하늘과 지구의 주인이신 주님은 사랑이신데,
How can I keep from singing?

나 어찌 찬양 안 할까.


When tyrants trembles in their fear

언제나 폭군의 두려움에 떨며
and hear their death knell ringing,

죽음의 종소리가 들리는 중에도
When friends rejoice both far and near

가까이 멀리서 기뻐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How can I keep from singing?

나 어찌 찬양 안 할까. 

 



 

 

 

엔야(Enya: Eithne Ni Bhraonain)는 아일랜드 북서쪽 끝에 있는 귀도(Gweedore)에서 자라났다. 귀도는 매우 아름답고 조용한 해변도시이며 아일랜드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으로 이러한 환경은 그녀의 단단한 음악적 뿌리가 되고 있다.
 

즉 아일랜드의 전통음악에 그녀가 대학에서 공부한 클래식이 합하여진 것이 엔야의 음악이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다분히 선천적인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지방에서 유명한 가수이자 색소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독학으로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할 정도의 음악광이었다.
 

엔야는 이미 10대에 그녀의 언니 한 명과 오빠 2명 그리고 쌍둥이 숙부로 결성된 패밀리 그룹 "클리나드"의 일원으로 키보드를 연주할 만큼 성숙했다.  대학에서 고전음악과 피아노를 공부한 엔야는 82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아일랜드 토박인이지만 서양과 동양의 이미지를 함께 지니고 있는 Enya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성가대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평론가들은 종교적 성향이 강한 여가수로 지목하는지도 모른다.
 

Enya의 음악은 아일랜드의 정서와 성가적인 접근방식, 자신의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처럼 자유롭고 신비롭게 구사하는 스캣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래 세계인들의 사랑을 조용히 끌어 모으고 있는 엔야의 음악은 차분하고 신선하며 때로는 그레고리 성가처럼 엄숙한 느낌마저도 갖게 한다. 

 

 

 

 

 

오늘 들려 드린 엔야의 노래 [어찌 찬양 안 할까](How  Can  I  Keep  From  Singing)는  찬송가 403장을 떠 올리게 하는 노래입니다.

 

찬송가 403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1.

나 위(爲)하여 십자가(十字架)의 중(重)한 고통(苦痛) 받으사

대신(代身) 죽은 주(主)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恩惠)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永永) 죽을 죄(罪)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

2.

예수 안에 있는 우리 한량(限量)없이 즐겁고

주(主) 성령(聖靈)의 위로(慰勞)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天國) 음악(音樂) 소리 같은 은혜(恩惠)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

3.

이 세상(世上)의 모진 풍파(風波) 쉬지 않고 불어도

주(主)님 안에 보호(保護)받는 우리 마음 편(便)하다

늘 깨어서 기도(祈禱)하고 저 천국(天國)을 바라며

주(主)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

 

 

 

이 찬송의 가사를 지은  로우리( R. Lowry) 목사님은 미국 남북전쟁이 임박하여 술렁이던 1860년에 두렵기만 한 주변상황을 바라보기보다는 변치 않는 주님의 가호와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가사를 썼습니다.
 

역경 속에서 로우리 목사가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시편기자의 말씀 묵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그렇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도 찬양, 둘도 하나님 찬양입니다. 그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찬송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삼중적(三重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밝히듯이 첫 번 째는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입니다.

2절은 말씀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3절은 천국에의 소망(3절)입니다.
 

첫 번 째는 역사적으로 2천여 년 전에 일어난, 이미 체험한 과거적 사건이요,

두 번 째는 바로 여기서 말씀으로 양육 받는 현재적 사건이요,

세 번 째는 역사의 정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미래적 사건입니다.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기대 속에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주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속사역이 이 노래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루이스(C.S.Lewis)는 그의 저서 [시편 명상]란 책에 기록하기를 “가장 겸손하고 동시에 가장 균형 있는 사람은 많이 찬송하는 반면, 괴짜나 부적합한 불평분자들은 가장 적게 찬송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불평분자들은 아예 찬송을 안하지요. 할줄도 모르고...

 

찬송은 반드시 노래를 부르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말이나 행위(악기, , 몸짓 등)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주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했으니 찬송은 의무입니다.

 

시편을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04:1)고 노래하였지 “여호와여 내 영혼을 송축하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하고 찬미하고 영광을 돌리도록 초청되었습니다.  이 말은 명령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찬송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쳐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 연합군이 탈환한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습니다.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 중 한 명이 한쪽 벽 후미진 곳에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니???  그 연합군 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하나의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메마른 광야에서도, 넘실거리는 파도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장재언) 

 

 

 

 

 

 

 

 

 

 

 

 

 

 

 

 

 

 

 

 

 

 

 

 

 

 

 

 

 

 

 

 

 

 

 

 

 

 

찬거리로 사다 도마 위에 올려놓은 조개 한 마리
죽은 듯 입을 앙다물고 있다

세월의 무늬가 짙게 새겨진 노인처럼
칼끝으로 위협해도 꿈쩍 않는다

흔히 입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죽은 조개라고 하지만
실은 입을 열면 혼자 삭여온 말들 거침없이 쏟아질까 봐
늙은 몸 방치하고 소식조차 두절한 자식들
그 삶에 폐 끼치고 그 가슴에 비수되어 꽂힐까 봐
생의 마지막 여력으로 이를 꽉 깨물고 있는 것이다

입안에 오랫동안 가둬두어 굳어진 혀끝이
입술을 열고 나와 자식, 손자 핥고 싶은 맘 왜 없었을까 만
가슴에 끝없이 고여 오는 서러운 말들
물꼬 터진 듯 쏟아내고 싶은 맘 왜 없었을까 만
입안에 고이는 침 삼키며
세월이 푹푹 삶아도 끝내 입 열지 않는 늙은 조개

저 앙다문 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왜 침묵하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은 이미 죽은 조개니 쓸모 없는 조개니 해온 것이다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 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9] Be stunned and amazed, blind yourselves and be sightless; be drunk, but not from wine, stagger, but not from beer.

[10] The LORD has brought over you a deep sleep: He has sealed your eyes (the prophets); he has covered your heads (the seers).

 

[11] For you this whole vision is nothing but words sealed in a scroll. And if you give the scroll to someone who can read, and say to him, "Read this, please," he will answer, "I can't; it is sealed."

[12] Or if you give the scroll to someone who cannot read, and say, "Read this, please," he will answer, "I don't know how to read."

 

[13] The Lord says: "These people come near to me with their mouth and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of me is made up only of rules taught by men.

[14] Therefore once more I will astound these people with wonder upon wonder; the wisdom of the wise will perish,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will vanish."

 

 

 

 

 

심판이 임박한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술 취한 자의 특징은,

갈지자로 걷고 있으면서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바로 본다고 말하지만, 분별하지 못하고, 때려도 감각없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백성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으시고 덮으셔서 눈을 감기셨기 때문' 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계명을 중히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뜻을 정하시고 심판하시고자 눈을 감겨버리신 것이다.

 

그 결과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많이 배운 자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11~12절)

 

이 시대의 영적 어둠과 분별력 상실은 ..

단순히 자유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보수신학교도 무너지고 있고, 영적 은사 자들의 마음도 시대를 분별할 수 없는 어둠으로 덮여 가고 있다.

 

잠들게 하는 영으로 덮여 버린...

이 시대의 신학교와 목회자들이 깨어 나려면, 하나님이 이 엄중한 심판을 거두시도록..  도의 역군들이 일어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수밖에는 없다.

 

책과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분별하는 자들이 아닌, 성경과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가지고 세상을 분별하는 종들이 일어나고, 회복되도록 기도할 때이다.

 

 

 

 

 

 

 

 

 

 

 

 

 

 

 

 

 

서 오늘이 10월1일. 한 해가 저무는 시간이다.

을이 문턱에 찾아 드는 것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현재의 시간을 영어로 Present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는 [선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시간은 선물입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오늘까지 살면서 제일 후회스러운 점이 있다면 역시 시간관리를 잘 못한 부분입니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시간을 탓하지만 결국 금싸라기와 같은 시간을 내가 잘못 활용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을 뿐입니다.

 

똑같은 24시간을 어떤 사람은 30시간처럼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15시간도 못쓰고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가계부를 쓰듯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기록해보면 어떨까?
 

몇 시 취침, 몇 시 기상, 밥 먹는 데 걸리는 시간 몇 분, 화장실에 들어간 시간 몇 분, 그리고 옷 갈아입는 데 몇 분, 차 타고 직장에 가는 데 몇 분, 사무실에서 어떤 어떤 일을 하고 점심 먹으로 가는 시간까지 등 취침할 때까지의 하루의 일과를 한 번 적어 보았으면.....  아마 보나마나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자투리 시간으로,  쓸데없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시간은 금이라고 하는 데 시간은 너무너무 소중하고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시간을 무심히 보내면서 낭비하고 있습니다. 돈을 낭비하는 것을 질책하는 부모는 많아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자녀를 훈계하는 부모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세월을 돌이 켜보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 억지로라도 독서하는 시간을 갖자.

 

어떤 분은 새벽에..  아니면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혹은 점심 시간에. 아니면 오후에... 이렇게 자기의 약간의 여유 있는 시간을 책 읽기에 쓰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독서를 통해 자투리 시간을 값지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2. 누구와 외식할 것인가?

 

많은 직장인들은 동료들과 혹은 혼자서 점심을 들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도 아무하고 아무데서나 밥 먹지 말고 가급적 만나야 할 사람을 정해 놓고 그 분과 만나서 유익한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좋은 시간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3. 스마트 폰으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자.

 

예를 들자면 저는 스마트 폰에 손자병법(孫子兵法)이란 책을 다운받아 잠깐 혼자 있는 시간에 읽어 봅니다.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스마트 폰에 있는 성경 앱을 통해 잠깐 묵상합니다. 무의미하게 자투리 시간을 보내지 말고 내 손 안에 있는 기기(器機)를 활용하여 자기 발전을 꾀하는 것입니다. 
 

4. 주말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주말이 제일 바쁜 시간이어서 어렵습니다만 주말에 일주일을 뒤돌아 보고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메이크업 시키고 다음 주의 스케줄을 점검하는 효율적인 시간으로 반드시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스마트폰에는 칼렌더가 있습니다. 일정표를 만들어 놓고 수시로 점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태어난 날부터 오늘까지 살아 온 인생을 잠깐 살펴 보니 시간이 가장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회가 가장 큰 부분도 그 부분이었습니다.

 

시간은 절대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시간을 잘게 쪼개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답게 잘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장재언)

 

 

 

 

 

 

 

 

 

 

 

 

 

 

 

왜 쉐마교육이  한국교회의  대안인가? ①

  

쉐마 열풍이 뜨겁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 교육의 대안으로 떠오른

쉐마교육이 화제로 떠올라 세미나 때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로 북적거린다.

과천약수교회 설동주 목사가 주창한 쉐마교육의 현주소다.

  설동주 목사에게 <왜 쉐마교육이 한국교회의 대안인가>를 들어봤다.

 

 

 

I. 쉐마교육 열풍

 

 

 

과천약수교회의 쉐마학당연구원은 일년에 두차례 글로벌 쉐마학당 세미나를 개최한다. 지난 2월에 11기 쉐마학당 세미나를 마쳤고 올 해 11월에 12기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다. 

 

지난 11기까지 진행된 쉐마학당 세미나 수료자는 연인원이 3000명을 넘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이 목회자들이며 교육부서 평신도 지도자들도 더러 있다. 세미나를 수료한 교회 중에서 현재 600여 교회에서 쉐마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쉐마학당 세미나를 찾는 이유는 다음세대 문제에 관해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쉐마교육이 성경적 자녀교육방법으로서 청소년문제와 한국교회 다음세대 문제에 있어서 성경적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쉐마학당 세미나가 꾸준히 각광을 받고 있는 또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그리고 교회학교 학생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자료를 보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쉐마학당연구원이 발간한 단행본 책, 소책자, 주일쉐마교재, 토요쉐마교재 등을 포함한 책자의 총 수가 189종류에 달한다. 

 

과천약수교회 쉐마교육은 주일 교회학교를 말씀 중심으로 새롭게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2010년부터 시작되었다. 

 

 

왜 쉐마교육이  한국교회의  대안인가? ①

 

과천약수교회 예배 전경​

 

 

II. 과천약수교회가

쉐마교육을 하게 된 계기

 

과천약수교회 설동주목사는 1984년에 과천약수교회를 개척한 이래로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가지고 열심히 장년 성도들을 제자훈련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담임목사로서 장년 목회에 신경을 쓰느라 교회학교 교육부서는 담당교역자에게 위임을 하고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으나 우연히 연말에 주일학교 부서 재정결산보고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재정 집행의 흐름을 보니 재정의 60% 이상을 먹고 시상하고 흥미 위주의 프로그램 운영에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갑자기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교육부서에서 과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장년이나 청소년들이나 변화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도록 훈련해야 할 터인데 우리 교회 교육부서에서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지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 교육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앙교육을 하지 않으면 교회학교가 존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교육을 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에 관해 연구하면서 쉐마교육을 발견하게 되었다. 

 

때마침 주5일 근무제와 2주에 한 번 토요일에 학교에 가지 않는 놀토가 시행되었다. 당시 많은 교회가 놀토의 대안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터라 우리 교회에서는 놀토 때 아이들에게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목회자는 놀토의 대안으로 교회가 마치 세상의 학원처럼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쳐주고 피아노 바이올린 등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천약수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 총회 심포지엄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을 듣고 나는 세상이 할 수 없고 교회만 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심포지움의 강사로서 교회가 언제까지 생명력 없는 것들에 매달려 있을 것인지를 물었고 마침 우리 교회에서 실시하려고 하는 하나님 말씀 중심의 쉐마교육에 대해서 소개했다.   

 

왜 쉐마교육이  한국교회의  대안인가? ①

  

 

  

III. 쉐마교육이란?

 

 

 

잘 아시다시피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뜻이다. 신명기 6장 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에서 ‘들으라’에 해당되는 단어가 바로 ‘쉐마’다. 쉐마교육은 신명기 6장 4-9절에 제시된 교육 방법 및 목표대로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씀 중심의 신앙교육을 일컫는 말이다.

 

특별히 ‘쉐마’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신앙을 전수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직접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부모가 먼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경외하며 전심전력으로 사랑하여야 한다. 그러한 생명력 있는 인격적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부모가 자신의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해야 한다.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부모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에게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달되도록 부모는 가르칠 뿐 아니라 실물 교훈해야 하고 자녀의 삶에서 체험되도록 해야 한다. 

 

쉐마교육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쉐마교육은 단순히 교회학교 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장년교육을 포함하는 목회철학이며 목회방법이다.     

 

 

 

이스라엘의 쉐마교육 현장

 

 

 

쉐마의 원리 & 쉐마교육

 

 

왜(Why) 쉐마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What) 가르칩니까? 

성경을 가르칩니다. 

 

어떻게(How) 가르칩니까? 

‘헤브루타와 디베이트’ 방식으로 가르칩니다. 질문과 토론식 방법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쓰셨던 방법입니다. 

 

언제(When) 가르칩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는 토요일 쉐마학당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는 주일 교회학교에서 가르칩니다. 

 

누가(Who) 가르칩니까? 

토요쉐마학당에서는 부모가 가르치고 주일쉐마교육에서는 교사가 가르칩니다.

 

어디서(Where) 가르칩니까? 

쉐마학당은 참여하는 모든 가정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넓은 곳에서 가정별로 테이블을 셋팅하여 가르치고 주일쉐마교육 때는 각 부서별로 소그룹실에서 담당 교사가 가르칩니다. 

 

 

 

IV. 왜 쉐마교육이 한국교회의 대안인가?

 

 

 

과거 한국교회의 연령별 구조는 피라미드형이었으나 지금은 역피라미드형이 되었다. 교회에서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과천약수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지난 99회 총회에서 합동 측 산하 교회 중에서 65%가 주일학교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참으로 충격적인 현실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걱정만 하고 있겠는가?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태까지 대책은 한국교회가 해보았던 대책이었고, 오늘의 현실이 말해주듯이 그 모든 대책은 실패한 대책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녀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구약성경 신명기 6:4-9절에서 말씀해주셨는데 우리 부모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고 자녀들을 교회에 맡기고 나몰라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대로 교사들이 점점 줄어들어서 아이들을 돌볼 교사가 부족한 현실이다. 이제부터라도 부모가 나서야 한다. 인간적 방법을 쓰자는 것이 아니고 성경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시 성경대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쉐마교육이 대안이다. 

 

 

왜 쉐마교육이 한국교회의 대안인가?②

  

 

  

V. 쉐마교육의 방법: 하브루타와 디베이트

 

 

 

세계인구 0.2%의 유대인이 세계를 움직인다. 노벨상의 32%, 하버드 대학의 30%, 세계 최고 부호 중 30%는 바로 유대인이다. 한국인의 평균지능지수는 106으로 세계 2위. 우리나라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을 공부에 투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학업성취도비교평가(PISA) 결과, 우리나라의 학업성취도는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반면 유대인들은 평균지능지수는 94로 세계 45위에 그친다. 이런 유대인이 전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뛰어난 토론 능력을 무기로 대통령에 당선된 존 F.캐네디의 뒤에는 어머니 로즈 여사가 있었다. 로즈 여사의 지론은 “세계의 운명은 좋든 싫든 간에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녀들이 네다섯 살 때부터 책 읽기와 토론 훈련을 시작했다. 매일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 책을 읽게 했다. 청소년기에는 사회의 변화와 흐름을 읽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해서 신문을 토론 자료로 적극 활용했다. 그녀는 매일 아침식사 전에 반드시 조간신문을 읽고 식탁에서 그 날의 중요 이슈에 대해 토론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토론 훈련이 케네디가 텔레비전 토론에서 닉슨을 압도, 열세였던 대선판도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유대인 자녀교육의 핵심은 헤브루타와 디베이트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무척 시끄럽고 말이 많다. 우리나라 관점으로 보자면 어른 말에 토달고 말대꾸하는 버릇없는 아이들이다. 유대인들은 아이를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서 어른과 똑같이 토론하고 그 결론을 이끌어내는 대화식 교육법으로 자녀들을 양육한다. 

 

이런 교육법은 부모에게 상당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장난감 가게에서 인형을 사달라고 떼를 쓰면 유대인 엄마는 몇 시간이 걸리든 간에 왜 사줄 수 없는지 아이에게 설명하고 또 아이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유대인 엄마와 아이가 논쟁하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학교수업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설명하고 아이들은 조용히 듣는 일반적인 학교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질문하고 또 대화한다. 이런 하브루타식 교육은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바탕을 키워주고, 나아가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길러준다.

 

과천약수교회에서 쉐마교육을 실시할 때 유대인들의 하브루타와 디베이트를 교재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이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VI. 쉐마학당연구원의 쉐마교육 교재

 

 

 

과천약수교회의 쉐마학당연구원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쉐마교육을 확산시키고 뿌리내리기 위해 세워졌다. 쉐마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교회들이 쉐마교육을 원활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쉐마학당연구원은 쉐마교육 자료를 제작 보급하고 있다. 

 

주일 교회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주일쉐마교육 교재와 부모가 자녀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는 토요쉐마학당 교재 및 각종 쉐마 교재를 제작하고 있으며, 쉐마교육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각종 영상 자료도 제작하고 있다. 

 

1. 주일쉐마교육 교재

 

주일쉐마교육 교재는 일종의 ‘성경 교과서’다. 일반 학교에서도 학년별로 교과서가 있듯이 교회학교에도 교과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제작한 ‘성경 교과서’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서 뽑은 150개 주제를 체계적으로 배열하여 3년 과정의 커리큘럼을 작성했다. 150개 주제 속에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기독교적 가치와 성경 사상이 총 망라돼 있다. 

 

150개 주제를 한 주에 한 개씩 다루면 3년 과정이 되는데 유치부 3년, 유년부 3년, 초등부 3년, 중등부 3년, 고등부 3년 과정 동안 ‘150개 주제 커리큘럼’을 따라 제작된 주일쉐마교재를 가지고 각 부서에서 매주 공부한다. 그리고 3년이 지나면 동일한 주제를 반복하되 상급 부서에서 같은 주제라도 성경본문과 수준을 달리하여 반복 심화교육을 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역자가 바뀔 때마다 교재가 달라지고 교역자의 선호에 따라 설교의 내용과 공과 주제가 바뀌는 한국교회 현실을 생각해볼 때 주일쉐마교육 교재는 성경교과서로서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2. 토요쉐마학당 교재  

 

토요쉐마학당 교재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부모의 삶의 지혜를 자녀에게 전수하도록 구성된 교재다. 부모가 교사가 되어 자녀에게 가르치며 부모 자녀 간 소통을 돕도록 만들어진 교재다.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과천약수교회에서 진행하는 토요쉐마학당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주일쉐마교육과 다른 점은 토요쉐마학당에서는 단순히 성경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경험과 지혜를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녀에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먼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읽고 묻고 대답한다. 교재에서 제시하는 질문을 부모 자녀가 함께 주고 받음으로써 성경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이때에도 단순히 주입식 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토론을 통해 귀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배우는 것이다. 

 

이어서 성경 토론(Biblical Debate)을 한다. 유대인 부모가 자녀에게 탈무드를 가르칠 때 탈무드 토론(Talmudic Debate) 방식으로 자녀와 대화하고 토론하며 가르치듯이 우리도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때 주제는 성경 본문에서 추출된 실용적인 것들이다. 이때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녀의 생각을 들을 수 있고 자녀와 대화하면서 부모의 경험과 삶의 지혜가 자녀에게 전수되는 것이다.   

 

3. 기타 교재 및 자료

 

이 외에도 믿음이 부족한 새가족을 위해 기독교 교리를 알기 쉽게 가르치도록 구성된 ‘쉐마 새가족 교재’와 부모 자녀 간 갈등을 치유하고 관계 회복을 위한 교재인 ‘새로운 시작’도 있다. 또한 부부끼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부부쉐마 교재와 각종 각종 영상 CD 및 소책자, 그리고 여러 권의 단행본 책 등이 출간되었다.   

위의 책과 교재, 그리고 영상 자료 등을 이미 제작했으며 앞으로도 쉐마교육에 필요한 자료들을 계속 만들어 보급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아르메니아 다음 두번째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국가이며 이 나라의 역사 하나 하나가 역경과 투쟁 그리고 가난 속에서도 복음의 꽃을 피운 나라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놀라운 관계를 갖고 있었던 유구한 문명을 창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바로 ‘에티오피아’이다

 

구약 뿐 아니라 신약 교회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모습을 유지한 국가이다. 1700년 유지된 강력한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모하메트가 두번이나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받은 환대와 보호를 코란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지구촌 기독교 가운데 가장 독립적이고 독특한 교회이다.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과의 관계와 정교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장구한 성경적 배경을 갖고 있는 나라가 바로 에티오피아이다.

 

에덴동산으로부터, 함과 구스와 악숨에 이르기까지, 모세와 솔로몬 그리고 역대 왕들과 선지자들에 이르기까지 에티오피아에 대한 언급은 끝이 없다. 모하메트가 시작한 이슬람이 모든 기독교 지역을 집어 삼킬 때에도 그 모든 도전을 극복하고 아직까지 생존하는 몇 안되는 기독교 공동체를 갖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끝없이 도전하는 이슬람 세력은 에리트리아, 소말리아, 지부티에 이르기까지 야금 야금 에티오피아 제국을 줄어들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안가와 북부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이슬람은 더이상 간과해서는 안되는 견고한 세력이 되었다.

 

주변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들과 이웃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계속 팽창 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한 대처가 앞으로 에티오피아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또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괄목할 만 수의 개신교회 중에서도 복음주의 교회들의 성장이다. 이는 에티오피아가 새로운 선교 주자로 마지막 시대를 마무리 할 수 있는 선교 강국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30년 전부터 에티오피아는 나의 삶 가운데 가장 관심 가운데 있던 나라였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에 같은 숙소에 기거하는 에티오피아 형제들과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교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방문하고픈 궁굼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지난번 사하라 방문시 꼭 방문하고자 했으나 2017년 마닐라 국제선교대회로 인해 갈 수 없었다. 코 앞에 다가온 인도차이나 선교대회 및 태국 포럼 그리고 중남미 일정과 중앙아시아 집회들이 있지만 이번에 용기를 내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번 마닐라 국제 선교대회에서 로렌 커닝햄은 자신의 삶 가운데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국가를 방문한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가족들과 함께 수많은 나라를 방문하였기에 그에게는 언제나 글로벌 마인드와 지구촌 전체 기독교를 바라보는 혜안이 있음을 대화가운데 늘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믿음으로 움직였다고 나를 독려했다. 이제 내게도 용기와 기도 그리고 결단이 필요했다. 재정적으로 전혀 준비되지 않았으나 오직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나아가기로 작정하였다.

 

마닐라 국제 선교대회 이후의 일정 가운데 여독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체 나는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8월이 저무는 날 보스톤에서 워싱턴 디시를 거쳐 거의 하루만에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였다. 미국 출발은 8월 30일인데 아디스 아바바에 도착하니 날짜가 이틀이 지난 9월 1일이었다.

 

아디스 아바바는 고원지대이면서 고산증세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시원하였다. 간간히 내리는 보슬비는 금방 그칠 분위가 아니라 장차 계속 부어줄 폭풍우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가는 곳곳마다 도로가 막히고 산길이 무너지는 폭풍우를 계속 만났다.

 

이번 에티오피아의 방문을 기도하면서 박종국 선교사님이 떠올랐고 또한 선교사님에게 방문 소식을 알렸다. 아디스 아바바 공항에서 반가운 해후를 한 뒤 박 선교사님의 인도로 첫날은 아디스 아바바를 들러 볼 수 있었다.

 

한국전에 참전해서 122명(한국에는 121명으로 나와 있으나 부상당한 군인 중 한명이 죽음으로 모두 122명이 됨)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한국 전쟁 참전 기념비를 먼저 들러 보았다. 에티오피아는 3개 대대, 6,037명의 군인을 보내어 한국전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참전한 곳은 양구, 철원, 화천 지역이었기에 에디오피아 참전 기념관도 춘천시에 건립되어 지금도 에티오피아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념하고 있다. 춘천시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와 자매 결연을 맺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춘천시가 앞장서서 아디스 아바바에도 기념탑과 공원을 건립하였다. 나는 에디오피아 참전 기념 공원 방문을 마치고 인류 최초 커피가 발견되어 전세계로 뻗어 나간 곳인 에티오피아의 아주 오래된 커피샵을 들렸다.

 

역시나 할 정도 네 가지 맛이 다 나오는 에티오피아 커피는 코끝 향기보다 진한 혀끝의 여운으로 저녁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즐거운 기분을 고양시켜 주었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본산지 커피의 명성을 보여 주었고 마을마다 집집마다 심지어 심산유곡에서도 퍼지는 커피 향은 에티오피아 만의 향기를 풍기는 듯 했다.

 

커피의 향기를 머금은 채 이어서 아프리카 유니온 본부를 방문하였다. 유독 아디스 아바바에는 UN을 비롯한 국제 기구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기구 중 하나가 아프리카 유니온 본부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각 나라 수반이 참여하는 이 기구는 명실 상부한 아프리카의 유엔(UN)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건물을 지어 헌사한 나라가 중국이다.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 기업과 간판들을 손쉽게 볼 수 있지만 철도부터 경전철 그리고 유명한 대부분의 빌딩들을 짓는 기업들이 중국이라는 것을 보면 한국 기업들의 입지가 갈수록 협소해 지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내가 아디스 아바바를 방문한 날은 마침 금요일이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국경일이어서 박물관등을 방문은 할 수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 최대의 선교 단체 중 하나인 SIM(수단 내지 선교회, Sudan Interior Missions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Serving in Missions으로 이름을 개명함)게스트 하우스에서 여장을 푼 뒤 박종국 선교사님과 함께 루터교회 선교회 시설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를 들러 보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박종국 선교사님 부부와의 아름다운 교제와 대화는 참으로 많은 것을 듣고 알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국 물자를 가져 오는 것조차 여의치 않음을 알고 있는데, 멀고 먼 에티오피아에서 소중한 한국 음식들을 주저 없이 꺼내어 대접하는 사모님의 모습에 절로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홀로 국내선을 타고 내 생애에 그토록 원했던 랄리벨라(Lalibela)를 방문하였다.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랄리벨라 왕의 명령을 따라 산과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11개의 교회가 있는 지역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장비와 기구로 그 어마어마한 산들을 깎아 교회를 만든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교회사를 가르칠 때 늘 보여주던 사진들이 내 눈 앞에 펼쳐질 때의 감흥은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듯 했다.

 

내가 방문한 11교회의 건물들 주위에는 한 사람이 기어들어가기도 어려운 토굴처럼 만든 기도 굴들이 둘러 쌓여 있었고 지금도 기도하는 무리들 인해 기도 굴 안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교회당을 24시간 지키는 정교회 신부들은 아직도 천 6-7백년 전에 입던 성직자 의상들을 입고 있었다. 한 교회마다 그 교회의 존재가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또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교회당 지하에서 또 다른 교회를 연결하는 비밀 지하 통로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하 도시에서 익히 보았던 그런 프레스코 그림으로 채운 천장화는 천 년의 무게를 잘 견디어 온 것 같으며 온갖 성경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 내고 있었다.

 

로마와 헬라의 건축술을 집약하여 통째로 깎아 만든 교회당 내부에 품고 있었으며 바위를 깎아내어 만든 기둥과 천장과 창문에는 유럽과 아시아(심지어 인도대륙까지)와 아프리카 3대륙의 문화적 건축 양식과 디자인이 고스란히 사용되었다.

 

랄리벨라 왕이 혼수 상태에서 보게 된 환상대로 그는 설계도를 그렸고 그가 그린 설계도는 900년 이상을 원형 그대로 지탱해 왔다. 간단한 망치와 끌로만 산과 같은 바위를 깎아 만든 교회를 보노라면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암석 교회 내부는 유대인의 회당을 본 따 만든 모습이었으며 아직도 울려 퍼지는 예배는 지구상에 가장 오래된 기즈(Geez) 언어로 기도와 송영으로 구성되어 멀리서도 산과 계곡을 타고 올려 퍼지고 있었다. 정교회 신부들이 밤 세우면 기도하는 소리가 아디스 아바바에서도 들렸건만 그 무게와 역사의 깊이는 첩첩 산중 랄리벨라 계곡에서는 사 다르게 들려왔다.

 

동녘이 트기도 전에 아침에 마치 장엄한 행렬처럼 수많은 무리들이 암석 교회에서 열리는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나는 새벽 4시에 교회를 갔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줄을 지어 몰려왔다. 암석 교회의 낭송(chanting)은 도리어 유대교의 찬양에 가까웠다. 영국에서 유대교를 공부할 때 방문했던 많은 회당 가운데 들어 왔던 운율과 가락이 내 귀에 오버랩되었다.

에티오피아는 최근의 뉴스 가운데서 이집트와 시리아 난민 사태 그리고 이란과 같이 자주 언급되는 나라는 아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쿠테타로 인해 수천년 있어왔던 솔로몬 왕위를 이어왔던 유다의 왕실이 끊어지고 공산화가 되었다.

 

이어서 일어난 1985년 대기근으로 엄청난 사람이 죽어 갔고 이때부터 에티오피아 그저 못사는 최 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생각 한 것 이상으로 에티오피아의 과거 역사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부분까지도 예언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라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이집트와 더불어서 다니엘서에서 “남방의 왕”으로 언급되었고 그리고 장차 에티오피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말한다. 이는 지금 현재에서도 에티오피아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에티오피아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보면 결과 과거의 역사도 초라하지 않고 매우 중요한 국제적 역할을 감당해 왔음을 볼 수 있다. 에티오피아의 영토는 남한 영토의 11배인 1,104,330 평방 킬로 미터에 이르고, 인구는 2017년 통계에는 1억 2백만 넘는 인구 대국으로 아프리카에서만 두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서구 열강들이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에서 아프리카를 분할 통치를 결정하여 식민지화를 꾀할 때에도 오직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스스로 유지한 유일한 두 개의 국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하에 있을 때 1920년, 바로 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승국 주도로 결성된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에서도 아프리카에서 라이베리아와 더불어 그리고 인도, 이집트 그리고 이라크와 더불어 독립국으로 가맹할 정도로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도 막강하였음을 볼 수 있다.

 

지금 에리트리아를 포함한 북부 지역을 이탈리아가 점령했을 때에도 이탈리아를 몰아 내고 독립을 지켜냈을 정도로 자부심과 국가 단결이 대단한 국가였음을 주지해야 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할 때에도 에티오피아 국기를 토대로 그들의 국기를 만들었다. 현재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는 여러개의 국제 기구들이 포진해 있다.

 

중에 가장 주목할 국제기구는 역시 아프리카 유니온(African Union)의 본부 건물이다. 이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원산지로 잘 알려져 있고 여전히 커피가 주요 생산품이자 또한 수출 품목이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전체에서 가장 가축을 많이 키우는 국가이기도 하다. 나일강의 85%의 수자원이 에티오피아에서 나올 정도이며 이로서 아프리카에서 두번째 수력발전을 생산하는 나라이다. 에티오피아는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경제 강국이며 세계에서 가장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이다.

 

주지한 바와 같이 에티오피아는 3천년이 넘는 문명국가라는 점이다. 또한 아프리카의 가장 오래된 독립국가이다. 솔로몬의 왕위를 잇는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황제였던 하일레 쎌라씨(Haile Selassie) 통치 시기(1896-1974)에는 아마라(Amhara) 종족을 중심으로 지배하였으며 1936년부터 41년까지 이어진 이탈리아의 점령이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국민들이 단결하여 이탈리아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74년에 쿠테타로 황제를 몰아 내고 공산주의 통치를 실현하기에 이른다. 이후 각 지역별로 반란이 일어나고 심각한 가뭄과 기근이 에티오피아 전체를 강타하였다. 이는 1991년 멩기추(Mengistu)의 마르크스 통치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아마라 종족이 아닌 티그라이(Tigrary) 종족 주도의 연방제 형태의 민주 정부가 출현하게 된다. 1998년부터 2000년에는 에리트리아(Eritrea)와의 전쟁으로 에티오피아 내부적 결속이 강화되었다. 2005년에 성공적인 선거가 치루어졌고 멜레스(Meles) 수상 정부가 많은 논란 가운데 출현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현재에 이른다.

 

에티오피아라는 단어를 보면 먼저 ‘흑인’ 또는 ‘검다’ 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우리가 쓰는 에티오피아의 히브리아인 “구스(Cush)”라는 단어에서 유래하는데 로 이 뜻은 “검다”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에티오피아를 언급한다. 에덴 동안에서는 네 개의 강의 흐는데 두번째 강인 기혼 강이 구스(에티오피아) 땅 전체를 흐른다(창 2:11,13)고 언급한다. 이 강을 청 나일(Blue Nile)이라고 부른다. “에티오피아”라는 단어는 검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로 나일 강 남부에 살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의 수단과 에티오피아 지역을 말한다.

 

에티오피아(구스)는 히브리어로는 기혼 강이 흐르는 하빌라 지역이다(창 2:11). 소말리아와 다른 지역들은 지금 “구스인들(Cushites)”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모든 에티오피아인들은 모두 구스로부터 기원하는데 구스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함의 장남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창 9:18-19, 10:6-7) 구스의 계보에서 니므롯이 나왔고 시바 여왕의 근거지인 악숨이 태어났으며 이는 악숨 제국의 이름이 되었다.

 

구스의 다른 아들들은 스바(Seba), 하윌라(Havilah), 삽다(Sabtah), 라아마(Raamah)와 삽드가(Sabtechah)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스는 함의 아들(창10:6)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스는 니므롯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창 10:8-12) 구스는 창세기 10:7에 나오는 스바(Sheba)의 할아버지이다. 참고로 스바의 아버지는 라아마(Raamah)이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이 민수기 12장 1절에 나온다. 모세는 아내가 죽은 후 새로운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가 바로 에티오피아 여인(구스 여인)이다. 이 일로 인해 미리암과 아론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민수기 12:1) 이는 장차 한 민족을 이룰 이스라엘 가운데 에티오피아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시사하고 있다.

 

사별한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여인라고 나온다. 3세기에 쓰여진 “Ezekiel Tragedian” 이라는 책은 출애굽 가운데 모세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다. 이는 일부가 유세비우스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부분중 “Exagoge 60-65” 에 보면 사별한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나오는데 십보라가 사실은 에티오피아들이 거하는 리비아에서 왔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실 십보라는 미디안 땅에서도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구스인들이 에티오피아로 불리된 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70인역인 헬라역으로 번역할 때에 “아이오피아(Αἰθιοπία "Aithiopia.")”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주전 10세기에 시바 여왕은 마케다(Makeda)여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는 악숨 제국의 통치자였다. 솔로몬왕과 시바 여왕으로 시작된 에티오피아의 왕가는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씨(Haile Selassi, 1892-1975)까지 이어진다. 하일레 쎌라씨의 칭호도 “유다의 왕(King of Judah)”이다. 아직도 3명의 왕자와 세명의 공주가 살고 있다.

 

솔로몬 왕가의 전설은 전설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지구상 가장 놀라운 비석 중 하나인 케브레 네가스트(Kebre Negast)에 기록되어 있다. 마케다 여왕(시바)은 솔로몬에게 큰 감명을 받고 유대교로 개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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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케다 여왕(Queen Makeda)은 73척에 이르는 선단을 이끌었고, 520마리의 낙타가 이끄는 대상 행렬을 갖고 있었으며 그녀의 무역은 팔레스타인에 인도에 이르렀다. 마케다 여왕은 에티오피아와 예맨 지역을 포함해서 악숨의 가까운 지역에 31년 동안 통치했으며 그녀의 왕국은 사비아(Sabea) 즉 우리에게 알려진 시바이다. (대하 8:18) 사비아 여왕 통치 초기에 그녀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을 방문하였다.

 

그녀는 금과 아이보리와 향료를 선물하였으며 그 댓가로 그녀는 솔로몬의 왕궁에 거하였다. 이로써 두개의 왕조 가운데 우정이 맺어졌으며 마케다 여왕은 유대교로 개종하였으며 솔로몬 사이에서 이븐 알 말맄(마넬맄, Manelik)을 임신한 상태로 귀향하였다. (왕상 10:1-13)

 

솔로몬과 시바 여왕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에티오피아 유대 왕조의 기원이 되는 메넬릭1세 이다. 메넬릭은 22세가 되던 해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그는 유다 통치를 제안 받았지만 거부하고 에티오피아로 돌아 온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솔로몬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천명씩 뽑아 모두 12,00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넬릭과 함께 에티오피아로 보내게 된다. 이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베타 이스라엘(Beta Israel)이다.

 

그러나 언제나 에티오피아와 이스라엘이 관계가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집트의 왕이 에티오피아의 도움으로 솔로몬의 아들이 지배하는 유다를 침략하게 되는 이유는 유다가 크게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 대하 12:1-3은 말한다. 결과적으로 에티오피아의 제라(Zerah)와 그의 군대가 아사왕 통치시기의 유다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아사왕은 의로운 왕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도우셨음을 대하 14:8-13과 대하 16:8은 말한다.

 

후에 이사야 선지자는 앗시리아의 사라곤왕을 통해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패배를 예언한다. (사 20:1-6)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는 왕상 10:1-13과 역대하 9:1-12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태 12:42과 눅 11:31에 언급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욥기서는 광범위하게 에티오피아 지역을 언급한다. 특히 욥기 28장 19절에 “구스(에티오피아)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하며 시편 68편 31절에 “구스(에티오피아)인은 하나님을 향아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라고 말할 정도로 구스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또한 깊은 관계가 있다.

 

 예레미아가 지하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에티오피나 내시인 에벳 멜렉(Ebed- Melech)이 예레미아을 구출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보상하셨다. (렘 38:6-13, 39:15-18) 이후에 에스더와 결혼한 페르시아 왕이 크세르크세스 1세(에스더서에서는 아하수에로 왕으로 나옴)는 에티오피라까지 통치하였다. (에스더 1:1, 8:9)

 

나훔 3:9에 보면 에티오피아는 이집트와 리비아 함께 장차 멸망하게 될 니느웨를 위해 현대의 니느웨를 돕는 국가로 나온다. 이들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대적할 것이며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에티오피아는 전쟁에서 “강력한 자”로 묘사된다. (예레미아 46:9-10와 비교하라) 하지만 성경은 이들이 갖고 있는 동맹이 바뀔 것인데 이는 바벨론의 왕이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겔 30:1-9, 29:10, 사 18:1-6)

 

이러한 연유로 스바냐 2:12에 “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스바냐 선지는 아버지가 에티오피아인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 에티오피아인과 관련된 사람들은 야곱의 런너(삼하 18:21-32), 서기관 에후디의 증손자 (렘 36:14) 와 스바냐 선지자(습 1:1)등 모두 세사람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다니엘 11:42-43에 보면 바벨론의 앗시리아왕이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지배할 것을 말한다. 이사야 11:11에 그리스도의 재림시기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후손들 가운데들 남은 자들이 돌아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10: 10_11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

 

에스겔 38장 5절에 보면 하나님게서 초자연적으로 악한 군대를 치실 대에 에티오피아의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을 말한다. 이사야 2장 1-4과 45장 14에 에티오피아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고 에티오피아인들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유로 시편 68편 31-32에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에티오피아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하지어다 (셀라)

 

한편 신약 시대 이후에는 에티오피아는 “아비시니아(Abyssinia)”로 불려졌다.헬라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에티오피아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가장 큰 키에 잘 생긴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집트 산악 진역에 거하며 모든 흑인(Negro) 들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에티오피아가 언급될 때마다 언제나 이집트가 나온다. 지금 에티오피아라는 나라를 말할 때에는 인종적으로 조금 더 큰 다양성을 보인다. 아프리카 인종들의 뿔(Horn of African peoples)이기도 한 에티오피안들은 크게 셈족 계통의 에티오피아인(41.5%)과 구스계 에티오피아인(41.6%)로 나누며 나머지는 오모틱( Omotic)인들로 구성된다.

 

에티오피아가 복음을 받은 시기는 사도행전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빌립 집사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Candice)에게 전도한 것이 기원이다. 간다게라는 이름은 내시라기 보다는 여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현지 역사가들의 견해이다.

 

교회 사가(史家) 니케포로스(Nicephorus)에 따르면 마태가 유다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지금의 에티오피아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한다.

 

레바논에 있는 두로(Tyre)의 교회 사가 루피누스(Rufinus)는 소크라테스(Socrates)와 소제미우스(Sozemius)는 초대 교회 시기의 에티오피아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4복음서보다 먼저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가리마 복음서(Garima Gospels)들이 이 시기였다고 믿어진다.

 

그 이후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에티오피아는 악숭 제국 시기인 AD 330년 경에자나(Ezana) 왕 통치 시기에 푸르멘티우스(Frumentius)와 에데시우스(Eddesius)를 통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인 국가이다.

 

아직도 기독교가 주류이지만 여전히 무슬림들도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1270년부터 1974년 공산 혁명까지는 국가 교회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고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 교회들을 심하게 핍박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교회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전역으로 흩어졌다. 1991년부터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최근에 점증하는 이슬람 세력들은 종교적 균형을 흔들며 기독교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체적인 기독교는 60%(6천만 이상)가 넘고 있으며 놀랍게 성장하는 이슬람은 34%가 넘는다. 이슬람 세력에서는 자신들이 이보다 훨씬 많은 수를 점유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세력을 전체에서 세분해 보면 정교회는 40%(4천만에서 많게는 4천 6백만까지), 개신교회는 17.5%(천7백만 이상) 정도로 본다. 전체 교회 가운데 복음주의 교회는 거의 20%에 육박한다.

 

에티오피아는 서구 팽창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에도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 서구 식민주의 지배를 몰아내기도 한 유일한 나라이다. 구약에서 행해진 성경읽기와 예배의 형태도 유지하였다.

 

3천 년동안 유대의 히브리어로 된 성경, 율법과 예배 그리고 절기를 지킨 그들은 이스라엘이 한 국가로 서게 되면서 그들 또한 고토로 돌아 오게 된다. 이들 에티오피아 유대인이 알려 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영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이다. 이를 전해 유대인 학자 조셉 힐러리는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였고 이 소식을 이스라엘에 전하게 된다.

 

DNA 테스트와 역사적 고증을 거쳐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귀환케 하는 작전이 실행된다.

첫번째 공수는 1984년 11월 에티오피아에 대기근이 들자 이스라엘 정부는 “모세 작전( Moses Operation, 기억하라! 모세의 아내가 바로 에티오피아 여인임을!)으로 에티오피아 유대인 8천명을 데려 오게 된다. 이어서 1985년 수단 내전이 격화되었을 때 위험에 빠진 유대인 촌락에 거하는 유대인 494명을 항공편을 통해 데려 온다.

 

1991년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그 이유는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은 전국적으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모음으로 대사관은 거대한 난민촌이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는 에티오피아 정부와 협상을 통해 3,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협약을 맺어 이스라엘 본국 귀환을 추진한다.

 

이때의 작은 솔로몬과 시바 여왕으로 맺어진 양국 관계처럼 “솔로몬 작전( Solomon Operation)”이다. 이스라엘은 정예 병력 200명을 대사관 근처 난민촌부터 공항까지의 거리인 6.4 킬로 미터를 안전하게 확보한다. 솔로몬 작전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C-130 수송기와 B-747 점보 제트키 35대를 동원해 이스라엘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많은 때에는 수송기와 항공기 28대가 동시에 하늘에 떠 있을 정도로나르기 시작했다. 솔로몬 작전은 36시간이라는 기록적인 시간 안에 모두 만4천325명을 실어 날랐다.

 

기네스 북에도 이런 기록을 나올 수 없을 정도이다. 기네스 북에 가장 많은 인원을 나른 기록이 El Al(이스라엘 국영 항공사)가 1991년 5월 24일에 나른 1,088명이 최고이다. 이렇게 해서 돌아온 에티오피아 유대인만 13만 5천명에 이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바 여왕이 거했던 악숨 제국의 수도 악숨을 방문하여 왕궁터와 시바 여왕이 건설했다고 알려진 수영장과 오벨리스크와 케브레 네가스트 비석등을 둘러 보았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에 주장하는 법궤가 안치된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본산을 방문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보다도 악숨시 전체에 개신교회가 3개 밖에 없는 그 중 하나를 방문해서 말씀을 증거하였다. 악숨에서도, 랄리벨라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아디스 아바바에서 본 정교회 신자들의 새벽 기도회 모습은 장관이었다.

 

악숨은 온 도시 전체를 점유할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대 인파가 새벽 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다.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외경을 사용하고 있고, 미신적인 요소도 혼합되어 있고, 예전이 의식화되어 있는 가운데 에티오피아 정교회 안에 진정한 복음의 부흥이 일어난다면 에티오피아는 소망이 있다고 본다.

 

서방의 선교사들 가운데 이 점을 보고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갱신하는 개혁 운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 오고 있다. 이슬람이 노도처럼 밀려오는 상황에서도 진정한 부흥, 진정한 제자훈련을 통해 에티오피아가 선교하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한다.

 

에티오피아를 떠나면서,

김종필 올림

 

 

PS.

1. 아디스 아바바에서 항공기 취소되어 거의 하루 동안 기다리면서 무리가 되었나 봅니다. 오늘 새벽엔 온 몸에 오한이 나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2. 제가 암석 교회와 악숨의 정교회 기도하는 모습의 동영상을 찍었습니다. 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이메일이나 카카오 톡elijahjfkim 아이디로 저에게 친구 신청하셔서 말씀하시면 동영상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 미국에 계신 사모님이 지난번 마닐라 국제 선교대회에 관한 글을 보내 주셨는데 허락해 주시면 다음에 첨부 파일로 보내 드리고자 합니다.

 

4. 제가 있는 곳들은 인터넷 연결이 거의 불가능한 곳들입니다. 인터넷이 연결되어도 포탈 사이트조차 열리지 않을 정도로 열악합니다.

 

5. 지금 보내 드리는 저의 글도 정말 어려운 상황 속에서 보내 드립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크리스천에게는

이 질문처럼 중요한 질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믿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조직신학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을

체계화한 것입니다.

 

좀 긴 내용이지만 한번에 다 읽을 수 없을 때는

부분부분, 두고두고 익히면서

신앙을 반석 위에 세워놓으시기 바랍니다.(장재언)

 


 

 

01 인간에 대하여

02 하나님에 대하여

0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04 성령에 대하여

05 성경에 대하여

06 믿음에 대하여

07 구원에 대하여

08 교회에 대하여

09 성례에 대하여

10 종말에 대하여

11 예배생활에 대하여

12 기도생활에 대하여

13 헌금생활에 대하여    

 

 

1. 인간에 대하여

 

1.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2.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3.인간은 왜 죄인입니까?

4.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5.인간은 영원히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까?

 

 

1.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이 질문은 수 세월 동안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에 의해서 던져졌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명확하게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자체는 그 어느 부분에서도 완전치 못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유인원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럴싸한 자료들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들은 오로지 한 분이신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도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은 피조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한 창세기 2:7의 증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로 말미암은 것이며 어떤 선행적 생물체로부터 진화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2.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피조물들 사이에서 보면 인간은 모든 다른 피조물들과 뚜렷이 구별되며 모든 피조물들 위에 세워졌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고 말씀하셨으며,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주셨습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은 인간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얼굴 모습이나 신체모양을 갖고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와의 교제 속에서 더불어 사는 특별한 관계 속에 두시고자 창조하셨으며 그러한 관계에 합당한 성품을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돌이나 막대기나 인형이나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피조물로 인간이 선택 받음을 받은 것입니다.

 

 

3. 인간은 왜 죄인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처음 인간은 아담과 하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사랑 받는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는 流涌“?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그 동산의 모든 식물과 동물들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귀중한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오용함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초래하였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이 행동은 불가피한 것이나 강제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그저 한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의 유일하신 입법자요, 기준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한 교만이 불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고 그에게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 이 교만이 또 하나의 죄의 본질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부패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첫 사람의 범죄는 온 인류에게 영과 육, 이성과 의지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의 부패를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부패한 본성을 따라 실제로 어떤 죄적 행위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 앞에 죄인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4.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죄인이란 것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먼저, 질병입니다. 인류 문화가 발달하고 의학이 고도로 발전을 했지만 인류에게 따르는 고질적인 질병을 근절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질병들이 하루가 다르게 생성, 발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릅니다. 아담이 죄의 유혹을 받을 때는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워 질 것을 꿈꿨지만, 죄를 지은 후에 꿈은 사라지고 종신토록 땀흘려 수고하며 가시밭길을 헤쳐가야 했습니다. 그리하여서 남자는 종일토록 일해야 하며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갖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노동과 종족번식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었지만 인간의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노동의 수고와 해산의 아픔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모든 고통들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셋째, 필경은 사망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결국 맨 마지막으로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죄의 값으로 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에는 3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영의 죽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육적인 죽음입니다. 인생의 근본은 생로병사라고 하여 죽음을 자연의 현상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육체가 늙어 죽는 것도 죄값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영원한 형벌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비참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 앞에 있는 영원한 형벌의 죽음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등한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종국에 가서 영원히 면할 수 없는 가장 엄청나고 무서운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5. 인간은 영원히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까?

 

인간은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죄 가운데 있으며 죽음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서 그 죄의 결과를 받고 있음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은 영원히 이 죄의 멍에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죽을 수 밖에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피조물보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그 인간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인간들을 다시 원래대로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게 하는 축복의 손길을 내미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보증으로 갖고 있으면 그를 통해 인간의 죄사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으로 복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영원히 죄인으로 고통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스스로 누릴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믿기만 하면 다시 하나님의 축복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2.하나님에 대하여

 

1.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2.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은 무엇입니까?

4.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5.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1.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은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는 의문입니다.

푸르고 높은 창공을 바라보면서 또 천체의 크고 놀라울 정도의 정교한 법칙을 볼 때면 우주의 신비를 알아보았으면 하는 갈망심을 갖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정서일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관심은 오랜 고대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며, 그래서 인간을 가리켜 종교적인 동물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포괄적으로 신에 대한 생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거룩한 산타 크로스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로 이해하는 소박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다 가져다 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철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궁극적인 실재"라고 보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하나님을 서술하며, 온갖 철학적인 술어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신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묻기도 하고 의견도 교환하지만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호기심이 채워지고 나면 무감각해지는 사람들로서 우리 나라에서 비교적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신의 존재나 신에 대한 이해마저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힘든 만큼 신의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에 봉착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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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상에서처럼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가지각색이며 아주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제한된 인간의 두뇌와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완전한 설명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본인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어떠한 형체에도 제한을 받지 않고 또한 일정한 모양도 갖고 있지 않으신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태양이나 달 등의 어떤 자연에 비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조각품이나 부어서 만든 어떤 신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인간들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늙고 상하고 변하고 또 결국은 언젠가는 없어져 버리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으시며 오직 홀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셋째,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영혼의 아버지이시며,지상의 모든 생명체의 창조자이시며 또한 주인이십니다.

넷째,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보다 훨씬 높은 인격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속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다섯째, 인간은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동물이지만,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어디서나, 언제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절대자이십니다.

여섯째, 가장 놀라웁고 축복스러운 말씀은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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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더욱더 구체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여러가지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예배드리는 자들은,그 를 대함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어떤 일정한 형태를 가진 분을 대하는 것 같이 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활동적이고 살아 계시며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신 후에 어머니가 그 자녀를 염려하는 것보다 더 힘있고 진지하게 우리들 하나하나를 염려해 주시고 항상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처음과 나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언제나 변치 않으십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의 모든 물체는 끊임없이 변하고 삼라만상은 시시로 달라지나 하나님만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무미건조한 성품이나 부동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점과 완전하고 절대적인 성품을 지니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그의 능력에 의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간들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아시며,

또한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감찰하고 계십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말이 있을 수 없고 또 원하시는 것을 성취 못하심이 결코 없으십니다.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영원 가운데서 어느 일정한 장소에 뿐만 아니라 모든 장소에 모두 계십니다.

여덟째,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완전무결하심을 나타내 주십니다.

아홉째,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며 모든 판단에 있어서 공평하시고 편벽됨이 없으십니다.

열 번째, 하나님은 모든 환경에 있어서 믿음직하며 우리가 마음 전체를 바쳐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직 그만이 변절함이 없는 성실성을 소유하고 계시며 언제나 인간들에게 새 힘과 소망을 주십니다.

열한번째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동정하고 계십니다.

열두번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의 사랑은 한이 없으신 관계로 기독교를 가리켜 사랑의 종교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열세번째,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세 를 가지신 유일하신 신이신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三位를 가리켜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삼위는 하나이며 일체 가운데서 삼위이십니다.

이 삼위에 대한 설명은 후에 성령에 관하여 설명할 때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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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러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가운데는 천사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으며, 사람과 짐승과 여러가지 생물들처럼 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며 관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이와 같은 질서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 인간을 가장 사랑하셔서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은 인간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과 행해서는 안될 것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으로서 십계명 가운데 명시되어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죄의 권세 속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이 그의 죄 값으로 마땅히 당하여야 할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 대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을 속죄하시는 업무가 완성되었으며 인간을 위한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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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상에서 살펴본 하나님은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집 나간 방탕한 아들을 날마다 애타게 문밖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그 부친의 아들을 향한 父情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도록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애타게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인간들이 구원받도록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원하십니다.

셋째,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3.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1.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떠하였습니까?

2.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3.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4.예수 그리스도는 왜 수난을 당하셨습니까?

5.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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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떠하였습니까?

 

예수그리스도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지중해 동편 해변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 -오늘의 팔레스타인 혹은 이스라엘 -나라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방 약13km, 해발 775km 지점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중앙 산맥지대에 속하는 산간 거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이것은 의학상으로는 불합리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초자연적인 방법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으므로 로마 군대의 갖은 행패를 다 받았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식민지 정책 밑에서 사는 나라와 국민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유대인들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대나라의 작은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이란 동리에서 자라나셨습니다.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 33세가 되시기까지 유대 나라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기는 하셨지만 다른 나라를 방문하거나 먼 여행을 하신 일은 없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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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서 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말은 '구조자' 또는 '구원자'란 뜻으로 어떤 국가나 개인이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거기서 구하여 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아'란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제사장과 왕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신적인 본성과 인격적인 본성을 둘다 갖추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은 신이신 분이 인간의 고난을 대신 지시고 죽으신 참 신이시자 참 인간이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의 선지자들의 역할이었던 설교와 예언을 하셨으며,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던 하나님과의 중재 역할을 하셨으며,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한 왕의 직책도 가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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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된 자리를 떠나 친히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시어 여려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받으였습니다. 심한 오해와 질투와 시기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고 심지어는 가장 혹독한 형벌인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육신 적 , 정신적 피로등 모든 어려움을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후 장사 지내 졌고 그 후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은 실패가 아니라 완전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사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 분은 오직 인간이 죄악 가운데 헤매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모든 업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셋째,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향한 통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이후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인간들의 죄악 됨을 손수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구원의 열쇠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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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예수 그리스도는 왜 수난을 당하셨습니까?

 

참 신이시지 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왜 수난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분이 그 수난을 물리치고 이겨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인간에게 있는 병의 뿌리를 알아내야 합니다. 병의 근본적인 치료를 위하여서는 그 병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의 병은 죽음의 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인간이 지고 있는 죽음을 담당할 수 있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라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병에 걸린 인간을 대신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분만이 인간의 참다운 구주인 것입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기 위하여는 물로 뛰어들어야 하고, 또한 그를 구하지도 못하고 같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죽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사 인간의 근원적인 병인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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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정리를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십니다. 그분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우주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으로 탄생하셔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루 체험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참 인간으로서의 모델을 제시하여 주신 분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로 인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구원으로 이끄신 분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간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물리칠 수는 없지만 오직 죽음보다 강한 그 분만이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영광속에 계시며, 장차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심판하시러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4. 성령에 대하여

 

1.삼위일체란 무엇입니까?

2.성령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3.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4.성령 충만한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5.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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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위일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란 용어에는 아직 익숙치 않습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그 개념이 명확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이란 무슨 개념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이신 하나님과 또한 성자인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3가지 위격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제 일 위는 아버지 하나님이며, 제 이 위는 아들이신 하나님이며, 제 삼위는 성령이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위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하나님이 3분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성령은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지만 항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입니다. 여기에서 나오신다는 뜻은 서열, 우열, 순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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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령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성령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게 닿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무엇인가를 성경에 소개된 성령께서 가진 특성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은 전지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영원하신 영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둘째, 성령은 전재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에나 계십니다.

셋째, 성령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동격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십니다.

넷째,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아십니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의 잘못을 근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여섯째, 성령은 복음을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일곱째, 성령은 우리 속에 오시기로 약속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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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성령은 부르십니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인을 부르십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귀에 들리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고집스럽고 교만하던 중심이 무너져 내리며 회개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루게 합니다.

 

둘째, 성령은 가르치십니다. 제한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노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에게 영적인 빛을 비추시며 영원한 진리를 배우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일고, 성경의 가르치심으로 설교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은 거룩하게 하십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께 죄로 부패하여진 인간이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한 심령에 성령님이 오셔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일을 하십니다.

 

넷째,성령은 인도하십니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인생은 만경창파에 항해하면서 수많은 외적인 문제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은혜와 진리와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섯째, 성령은 기도를 도와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대화하는 일이므로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더욱 간절하게 도와주십니다.

 

여섯째,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요 본분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성도는 행실을 보아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이 우리에게 가능하게 하여 주십니다.

 

일곱째, 성령은 보증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믿는 자의 보증인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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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령 충만한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이상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성령충만이란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12 1-2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구원으로 택함 받은 성도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로 향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모든 생활과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 성령 충만한 생활이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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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성령충만한 생활이란 구분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지껏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예수를 몰랐을때 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고 내가 매일 몸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먹듯이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신 약속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알고 모르고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내가 짊어지고 있어야 할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어주시기 때문에 나는 그 분께 고백하여야 합니다.

넷째,성령 충만한 생활은 한순간의 변화가 아닙니다. 늘 꾸준히 날마다 충만함을 얻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생활이기에 중단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5.성경에 대하여

 

1.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진 책입니까?

2.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3.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4.성경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5.성경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6.성경이 씌어진 목적은 무엇입니까?

7.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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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진 책입니까?

 

성경은 매우 오래된 책이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록했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존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습니다. 맨처음에는 돌판위에 씌어졌으며, 다음에는 두루마리 같은 것 위에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말씀하심에 따라서 그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영감으로 사람들의 심중에 말씀하셨으며, 이것을 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뜻을 기록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된 것입니다.

성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속해 있었으며, 구약성서 부분은 지금도 히브리 민족의 성서로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만 사용하게 된 유대인들이 그 히브리어 성서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70명의 학자들에 의하여 히브리어에서 희랍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번역된 구약성서는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셉투아진트는 "70"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인간으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어 팔레스타인에 사실 때 그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도들은 새로 세워진 교회들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문서들이 "신약성서"부분이 된 것입니다.

주후 400년경에는 신구약 성서가 하나로 합해져 "성경전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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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성경 자체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란 말이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받아 기록한 저자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총 66권을 40여명의 저자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한번도 한자리에 모여서 내용을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천 육백년에 걸쳐서 기록된 것입니다. 또한 저자들의 지적 수준도 매우 다양합니다.

그들중에는 왕도 있었고 제사장, 목자, 어부, 의사, 군인 등 여러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책 전체가 하나의 오류도 없이 놀라운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접했던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성서가 가르치는 숭고하고 고차적인 윤리성은 행동의 결과보다 오히려 그 동기를 중시합니다.

모든 윤리의 최선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과연 선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현대과학이나 법률이나 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를 성경은 다루고 있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고, 방탕하던 사람이 성자가 되었으며, 과학자들이 지혜를 얻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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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인류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읽혀지고 있는 고전이며, 가장 많이 팔려서 읽혀지고 있는 베스트셀러가 성경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성경이 어떤 책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첫째, 성경과 다른 책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뜻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의 책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구원하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둘째, 성경은 완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므로 부족하거나 틀린데가 없으며, 믿음의 기준으로 완전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중에서 어떤 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하여 버리거나, 어떤 부분은 수정하여 내용을 보충하여서는 안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저자가 40여명에 이르며 그들은 여러 층의 사람들로서 1,600여년에 걸쳐 기록한 66권으로 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방대하면서도 그 내용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예수)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고, 신약은 그 예언이 성취되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메시야(예수)가 이미 오신 것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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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경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성경은 주전 1,500년경부터 주후 100년경까지 약 1,600년 동안에 결쳐 여러 사람들( 40)에 의해 쓰여졌다고 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는데, 구약은 히브리 말로 신약은 희랍 말로 쓰여졌습니다.

구약은 옛 약속(혹은 계약)이란 뜻이며, 신약은 새 약속이란 뜻입니다.

 

1.구약성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39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서(5):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역사서(12):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열왕기상., 역대상.,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시가서(5):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예언서(17)-대예언서(5) :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소예언서(12):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2.신약성서

 

:예수님 오신 후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27권으로 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복음서(4):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역사서(1):사도행전

서신(21):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요한1,2,3, 유다서

예언서(1):요한 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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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경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은 그 전체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그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과 심령의 정체를 밝히 볼 수 있는 거울과 같고 인간의 영혼의 병을 위한 약의 역할을 하며 인간에게 빛이 됩니다. 성서는 내용상으로 보아 다음의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역사"는 성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의 역사,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히 선택되어 사용된 히브리 민족의 역사, 교회의 시작과 복음전파의 역사 등이 성경에 수록되어 있으며, 더 의미 깊게 본다면 인간 구원의 역사가 구약과 신약에 걸쳐서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가 성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 있습니다. 우주와 인간의 창조로부터 죄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사업, 영원한 생명 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 그의 뜻과 그가 하시는 일의 목적을 인간에게 알게 하시는 기록이 성서의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셋째, 성경은 예언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며,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에 관한 기록인데 곧 그리스도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을 예언한 것이며, 신약은 구약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것과 그의 탄생의 방법, 생애, 행적, 그의 사업의 목적 등에 관한 사실이 구약 성서 가운데 미리 언급되어 있습니다.

넷째, 교리적인 면으로 보아 성서는 율법과 복음의 기록이며, 예언과 예언의 성취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들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복음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해야할 것, 해서는 안될 것을 명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명하심을 지키지 않는 자나 회개치 않는 자를 벌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행하신 일 즉 인간의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시라는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다섯째,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특별한 기록이므로 그리스도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길이시며 참된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책의 유일한 주인공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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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경이 씌어진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첫째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크리스천"이 되게 하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안내도와 게시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함 이니라"( 20:31)

둘째,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회피할 수 없는 죄를 깨달아 알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잘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법은 인간이 넘어서는 안될 한계선을 명시하여주며, 범법에 따르는 무서운 결과를 동시에 명시하여 줍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자녀들인 인간들에게 생활 지침이 될 윤리와 도덕 및 규율을 성서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준하여 합당한 길을 걷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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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성경을 참으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경을 읽는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서에는 시도 있고 산문도 있어서 문학서로 알고자 연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소위 고대의 여러가지 종교에 관하여 쓰여있다고 하여 종교 학자들 중에는 비교 종교의 입장에서 성서를 연구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만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것만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본래의 목적은 문학도 아니요 인생철학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영생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책이 곧 성서입니다.

책 중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다른 책들과는 전혀 판이하게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서" ""가 대등하게 서서 성서를 이해하려고 한다든지 또는 "" "성서"보다 높은 데서 서서 성서를 알아보려고 한다면 완전히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을 때에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성서 가운데는 어떤 말할 수 없이 강한 권위 있는 분이 계셔서 그가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며 읽고, 읽어가며 기도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점차로 깨닫게 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두움이 걷히고 밝아오는 듯한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서를 읽으실 때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태도가 중요한 것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6.믿음에 대하여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종교의 믿음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어떻게 하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믿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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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어떤 사실을 참으로 인정하고도 그것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이로운 것까지도 믿습니다만 이 역시 그것 자체만으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이라고 성경말씀에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는 한 사람이 믿음을 갖는데 다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이 사실들을 믿어야 하고 그것들이 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셋째, 그는 이 사실들을 그 자신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들이 말하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하시며, 우리를 향하신 약속이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자기를 의뢰하는 자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점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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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교의 믿음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 마다 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종교성이 다 있습니다. 천태만상으로 갖가지의 종교가 많이 있는데 이들을 종합하여 분석해 볼때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으니 곧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복을 달라며 우상에게 절하고 혹자는 믿음으로 인생의 수레바퀴를 돌리고자 고행의 길을 걸어 갑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에는 아무 종교나 다 믿으면 천당 가는 것이니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다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런 것이라고 해서 다 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짜일수록 더 빛이 나고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입니다.

 

한 개의 못이 하늘로 못 올라 가지만 큰 자석이 오면 그 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자석이 위에서 끌어 올리려 해도 은이나 놋으로 그리고 나무나 금으로 만든 못은 못 올라갑니다.

 

오직 끌어당기는 자석에게 접착될 수 있는 성분의 못이라야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종교마다 믿음이 있지만 참으로 위에서 부르실 때 올라갈 수 있는 그 성분에 맞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절대로 기독교의 믿음과 다른 종교의 믿음과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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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약을 복용할 때, 우리는 그 약이 우리를 도와줄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버스를 타는 경우에도 우리는 버스 운전사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를 가고자 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게 되기 위해 필요한 믿음의 유형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10:17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은 단지 우리의 귀로 말씀을 듣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나 다른 책이나 소책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듣는 것로만 생긴다고 하면 청각장애자는 구원받을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올바른 믿음은 전적인 신뢰를 동반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 가운데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기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다른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커다란 축복의 선물일 뿐입니다. 오직 믿기만 하는 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놀랍습니다.

첫째,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믿음을 가질 때 기뻐하십니다.

그는 그의 말씀을 단순히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오는 것을 매우 즐겨 하십니다.

셋째,거룩하게 하심을 받습니다.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의 자녀들도 그로 인해서 거룩하게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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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는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나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되는 현상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하는데  이 회심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마음을 돌이킨다"고 하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회심에는 죄를 슬퍼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일의 두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주신 "구원의 사실"을 믿을 때에만 우리의 죄가 어떻게 하나님을 근심시켰는가를 알 수 있게 되고 마음으로 민망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은 단지 하나님의 노하심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접함으로 되는 것인데 이러한 슬픔이  구원에 이르는 참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죄를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대할 때에 일어나는 인간의 당연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참 회개는 성서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 가운데 끓어오르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곧 회심인 것입니다.

 

 

 

 

 

 

7.구원에 대하여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구원은 왜 하나님께로부터 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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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란영어로는 "Salvation" 으로서 의미 그대로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극심한 괴로움이나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제삼자가 건져내 주는 일을 말합니다.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 둘이서 하루는 강가에 목욕을 갔습니다. 그들은 얼마동안 재미있게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그만 실수하여 깊은 곳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친구를 불렀습니다. "사람 살려! "라고, 깜짝 놀란 친구가 그를 구하려고 물 속에 뛰어 들었습니다만 결국은 두 사람이 다 물 속에 빠져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본 지나가던 사공이 손을 내밀어 그들을 구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만 이 이야기 가운데서 심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물에 빠진 사람의 손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이 죄 가운데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할 수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구원의 손"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 11:36) 고 하신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손은 사람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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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주변에 아직 하루의 생존에 어려움을 느끼며 사는 이웃들이 있지만, 경제성장을 거듭하여 오는 동안에 "보릿고개"라는 말은 이제 먼 옛날 전설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매사에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자만심에 마취되어 감각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는 내노라 하며 뽐내고 좁은 물속을 비집고 다니지만 어항을 주관하는 주인처럼, 인생의 전체를 관망하시는 주님의 눈에 비친 어떤 부자도 가련한 부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고 외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하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죄와 그로 인하여 받아야 할 형벌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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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왜 하나님께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만든 다음 그것을 내버려두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생활의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악의 함정에 빠져서 자신을 구할 수 없게 된 것을 보시고 인간의 불의를 벌하시면서도 역시 죄인인 우리 인간을 구하여 내는 길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부터 오는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은혜로써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여 주시는 겁니다.

영화가 아직 지금과 같이 유행하지 않던 수십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뉴스 영화에 찍히게 되었습니다. "내 모습은 대체 어떠할까? "하는 흥미를 가지고 시사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떠하였겠습니까?

 

아마도 자기의 모습은 훌륭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신을 보고는 그만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여지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죄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실망 정도가 아니라 처참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그 벌을 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고쳐주시는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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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외부적인 변화가 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어떤 물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았으며 자신이 그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셨으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자신들이 그들의 구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4)라고 사도 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만일 이 복음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들이 구원받음을 확신케 됨을 알았습니다. "

확신"(assurance)이란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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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이 구원의 확신은 자칫하면 자신의 느낌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느낌은 자신이 영생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이 구원받은 것같이 착각할 때 본인이 느끼는 행복한 기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가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 (요일 5:9) 이 말씀이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다면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증거가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 8:16)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성령께서 또한 그렇게 말씀하심을 압니다.

우리 안에 임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서 우리가 구원받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 안에 하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요일 5:10)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가 영원함을 그들에게 말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8.교회에 대하여

 

1.교회란 무엇입니까?

2.교회는 언제 시작하였습니까?

3.교회가 다른 단체들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4.여러 교파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5.참 교회와 거짓교회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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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란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를 못합니다.

교회라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도시나 농촌에 여기 저기 우뚝 우뚝 서 있는 벽돌 건물이나 시멘트 집 등 높이 세워져 있는 큰 건물을 연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십자가를 세운 건물 자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당(예배당 또는 성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헬라어로"교회"란 말은 '에클레시아'(ecclesia)인데 그 말의 뜻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세상에서 불려내진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을 말합니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지상에 있는 모든 믿는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모신 한 개의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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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언제 시작하였습니까?

 

교회는 과연 언제 시작하였을까요? 분명히 구약시대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이후에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시고 이 땅에서 40일 동안 머무르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생긴 모임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부활이후 보내시겠다는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 성령은 불의 혀같이 임하셨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된 것입니다. 그날을 가리켜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날이 교회가 처음 생기게 된 창립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체가 되어서 그 후로 수많은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믿고 증거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성도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교회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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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다른 단체들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다른 일반 모임이나 단체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우선,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어떤 인간의 창안이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졌거나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인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둘째,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일반 단체들이 회장이나 설립자가 주인인 반면에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세워졌습니다. , 오직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신 점이 다릅니다.

 

셋째, 교회는 복음의 선교를 위한 기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으로 이룩된 교회는 예수님을 전하는  대변자로서 세상에서 할 일을 부여 받았습니다. 다른 단체들처럼 물질적인 이익이나 지위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넷째, 교회는 신앙의 사귐으로 이루어집니다. 두 세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주님께서 계시는 곳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같이 계시는 곳, 그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 드리며,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명상하며, 주님의 성례를 시행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다섯째, 교회는 성만찬을 중심한 공동체입니다. 성만찬의 예식을 통하여 주 안에서 형제 자매로서 사랑의 경험을 나누며, 하나로 결속하는 공동체입니다.

 

여섯째, 교회는 세계적이며 거룩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어떠한 단체나 모임들도 이처럼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또한 오랜 역사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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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교파들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도 한 분이시며 또한 그를 믿는 믿음도 하나입니다.

그러나 신경, 의식, 정치제도에 있어서 지도하는 강조점이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강조점은 이렇습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하나님 절대주의로서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민주적 정치로서 웨스트 민스터 헌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감독이 교회를 주관하는 교회입니다.

침례교회는 신자가 입교할 때 침수에 의한 침례를 받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성결교회는 교리 중에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가지를 특히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오순절교회는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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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교회와 거짓교회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보통 새 신자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집에서 가까운 교회나 아니면 건물이 크고 성도수가 많은 교회를 쉽게 찾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십자가를 걸고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모두다 참 교회는 아닙니다.

그 중에는 일반교회들과 겉은 똑같이 해서 모르고 찾아오는 성도들을 이단이나 거짓으로 이끄는 교회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우선, 말씀이 올바로 전파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며 말씀 전파가 근본적으로  진실되어야 하며, 신앙과 행위에 지배적인 감화를 주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수정하거나 첨가한다면 그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성례라고 불리는 세례와 성만찬이 정당하게 집행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례는 말씀의 합법적인 사역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에 따라, 신자들과 그의 자녀들에게만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 성례에는 규칙이 있고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는데 만약, 교회의 자의대로, 또는 목사의 임의대로 함부로 바꾼다면 그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권징이라고 하면 교회를 순수하게 유지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권고하고 징계하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에 주신 법도이므로 권징을 등한히 하는  교회는 곧 진리의 빛을 상실하게 되고 거룩한 것을 남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위의 세가지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달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교회를 선택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9.성례에 대하여

 

1.성례란 무엇입니까?

2.세례식이란 무엇입니까?

3.세례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4.성찬식이란 무엇입니까?

5.학습세례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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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는 두 가지 대 예전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성례"(Ordinances)라고 합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을 말합니다. 이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귀중한 방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와 생명의 구원을 인간들에게 주시고 확증하시려는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율법적 규례들을 주셨는데 그 중에서 이 두가지 규례를 성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오직 우리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의식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통해 그의 백성을 하나로 묶기를 의도하셨습니다.

그런 만큼 이 성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소중하면서도 거룩한 의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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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식이란 무엇입니까?

 

세례는 기독교 성례전의 하나로서, 입교하려는 사람들에게 물을 사용하여 베풀어 씻는 예식입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친히 세례를 베푸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도 세례가 베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기독교 초기부터 중요한 교회의식의 하나로서 존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적인 세례가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를 줄 수 잇지만, 질서와 공중의 덕을 위하여 교직자(목사)가 없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사나 그 밖의 교직자가 세례를 베푸는 것이 보통입니다.

세례에 사용하는 물은 보통 물이기는 하나, 다른 한편 단순한 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포함된 물 곧 그의 말씀과 연결된 물이므로 특별한 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의 성례인 세례를 받아야만 교인의 자격이 주어지며, 세례는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그의 인생을 시작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어나 제2의 생을 출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는 아주 귀중한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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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세례라는 원래 말 뜻은 "씻는다"는 말 가운데 내포되어 있습니다. 죄를 씻어 거듭난다는 뜻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의 힘은 결코 물을 적용하는 어떤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내용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지하면서 세례의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의 형식은 대개 침례와 산수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을 뿌림으로 행하는 세례를 산수례라고 하며 몸을 물에 잠금으로 행하는 세례를 침례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물을 붓거나 물로 씻는 세례가 있으나 오늘날 그렇게 행해지지는 않습니다. 보통 일반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는 산수례이며, 침례교에서 행하여지는 세례는 침례입니다.

그러나, 세례에는 어떤 형식이나 사용할 수 있으며 반드시 어느 일정한 형식만이 참된 세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면 모두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의 중요성이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죄의 용서를 받게 되고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된 그 능력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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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이란 무엇입니까?

 

성찬의 성례는 세례의 성례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26:26-28)

 

성찬식은 성단의 성례, 주의 만찬, 주님의 식탁, 성례,떡을 뗌, 성만찬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집니다.

성찬에서 사용되는 것은 가루로 만든 떡과 포도 열매로 만든 발효시킨 포도주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것자체가 지닌 의미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서 하늘의 선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 ""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 성찬에 참가하여 포도주와 떡을 들 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공급받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갖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하나님나라에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나라의 양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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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세례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학습과 세례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학습교인은 13세 이상되는 원입교인으로 학습 문답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지망하고 배우는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학습교인은 준교인이기 때문에 교인의 생활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 학습교인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고 연구하며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며 교회의 사업과 선교사업을 위하여서 헌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세속주의의 생활을 버리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학습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잘 한 다음에는 세례문답을 하고 완전한 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학습교인이 된 사람은 세례교인, 즉 입교인이 되어서 일생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세례교인은 학습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잘 한 다음 당회에서 문답을 받습니다.

 

당회에서 그를 입교인으로서 가합(可合)하게 여기면 교회에서 신앙고백과 서약을 한 다음 당회장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완전한 입교인이 됩니다. 입교인이 되면 성찬에 참석하게 됩니다.

입교인은 완전한 교인으로서 교회의 전체회인 공동의회 회원이 되어서 교회의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교인은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철저히 해야 합니다.

세례교인은 일생 동안 교인으로서 교회의 모든 일을 잘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인은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의 일에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에 잘 참석할 것은 물론 교회의 사업과 선교사업을 위하여 헌신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10.종말에 대하여

 

1.재림은 성경의 어느 곳에 나옵니까?

2.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십니까?

4.종말 때에 어떤 자들이 상을 받게 됩니까?

5.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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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은 성경의 어느 곳에 나옵니까?

 

예수를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공통적으로 사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기에 죽음이라는 주제는 늘 조심스러우면서도 예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후의 부분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종말의 날에 임하실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재림(Second Coming)이란 말은 이 시대의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처소를 준비하러 갔다가 그들을 그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재림에 관해 전파한 최초의 사람은 아담의 7대손이 에녹이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14)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말씀은 그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약 27권의 거의 모든 저자들은 재림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신약의 216장 중 318개의 절에 걸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 25절마다 한 번씩 나오는 셈으로 성경의 5분의 1이 예언이고 그중 3분의 1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며 신약성경의 20분의 1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성경구절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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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곳곳에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였는데,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주장이 사실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26:64)

 

예수께서는 이처럼 그가 지상에 다시 오실 것을 여러 번 하신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들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자란 구약의 성도를 포함한 오늘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무덤에 누운 이미 죽은 자들도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사악한 통치자들을 멸하시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때 지상의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모든 자들은 사단과 함께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되며, 자신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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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십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떠한 모양일까요? 예수께서는 처음 베들레헴의 허름한 말구유에 누우신 연약한 모습의 인간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처럼 영으로 임하실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성경구절이 답변을 해 줍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1:9-11)

 

성경은 또한, 하늘 구름이 그의 마차가 될 것이며, 천사들이 그의 호위자가 되고, 천사장은 그의 전령이 되며,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의 영광스러운 수행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로 오셔서,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원수들을 그의 발 아래에 두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심에는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의 형태는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유대나라 말구유에 오셨던 예수입니다. 둘째는 영으로 오심이요, 셋째는 영과 육이 합쳐진 완전한 인격으로 오심입니다.

처음에 육체로 오셨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영으로 와 계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로 오신 것도 불완전한 것이요. 영으로 오신 것도 불완전한 것이기에 영과 육이 합쳐진 완전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인격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가지시게 될 인격체로서 그것만이 완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완전한 인격체로 다시 오시는 것, 그것이 재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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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때에 어떤 자들이 상을 받게 됩니까?

 

예수께서는 성경말씀 곳곳에 다음과 같이 할 때에 상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극히 적은 일이라도 선을 베풂으로 의를 뿌렸을 때입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11:18)

 

둘째, 우리가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자를 도와 주었을 때입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4:14)

 

셋째, 우리가 열심으로 은밀하게 기도하였을 때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데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6)

넷째, 우리가 어떤 한 그리스도인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었을 때입니다. "누구던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9:14)

 

다섯째,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6:22-23)

 

여섯째,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을 때입니다.

"모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2:11-12)

 

일곱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잘 돌보았을 때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로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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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3:13)

 

우리는 주님께서 불현듯 오실 것을 늘 명심하고 지내야 합니다. 그러한 의식은 우리를 순수하고 거룩한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날은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빈집에 도둑이 들어올 때 미리 '내가 오늘 너희 집을 털겠다'고 예고를 하고 오지 않습니다. 불쑥 아무 때든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임하시는 재림의 날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날에 불현듯 임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 우리는 열심으로 예수를 믿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날이 임할 때 주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11.예배 생활

 

1.예배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2.예배의 순서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3.예배시작하기 전에 준비는 어떻게 합니까?

4.복장이나 외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5.교회 주보는 어떻게 활용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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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신앙을 키우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매주마다 빠지지 말고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대화하고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시며,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마음에 헌신과 충성을 새롭게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예배에 참석한 우리들은 예배를 통하여 믿음, 소망, 사랑, 이해, 용서, 온유, 겸손 등이 함양되어 우리의 변화된 생활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에 3끼 밥을 먹듯이, 영의 건강을 위해서 매주 예배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어제 밥을 먹었기 때문에 오늘 밥을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번 주에 예배를 드렸는데 이번 주에도 왜 꼭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는 옳지 못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공식예배인 주일예배, 찬양예배, 삼일(수요일)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형편에 따라 예배시간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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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순서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처음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가장 당혹한 순간이 예배의 순서를 제대로 모르거나, 앉고 일어서는 부분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의 순서는 각 교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아래와 같은 공통의 순서를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묵도를 하는 것으로 예배가 시작하며, 이때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예배에 임하는 경건한 자세를 갖도록 합니다.

 

이어서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다같이 드립니다. 다음으로는 찬양(찬송)을 다같이 부르는데 대개 일어서서 찬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장로님이나 기도를 맡은 자가 회중을 대표하여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를 같이 드립니다. 그리고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서 성경봉독을 하는데, 성경을 찾아서 그 구절을 사회자가 봉독하거나, 같이 교독을 합니다.

 

그리고는 성가대의 찬양이 있는데, 이때는 모든 성도를 대신하여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의 찬양을 조용히 듣습니다. 이후 말씀을 목사님이 전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분명하게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주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마무리 기도가 끝나면, 찬양을 부르면서 헌금을 하는 순서인데, 이때는 미리 준비한 헌금을 정성스럽게 드립니다.

 

그리고는 성도의 교제를 위한 광고의 시간이 있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인 축도를 목사님이 하시면 공식적인 예배가 끝납니다. 그리고 축도송을 성가대가 부르는 동안 오늘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1주일 생활에 대한 간구를 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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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시작하기 전에 준비는 어떻게 합니까?

 

예배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가 중요합니다. 일주일 동안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모든 죄들을 모아서 기도로써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또한 일주일 동안 굶주렸던 영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는 적어도 10분 전에는 도착하여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의 예배순서지를 보면서 미리 찬송과 성경봉독 할 부분을 찾아서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자신과 설교자와 모든 순서 맡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예배당 안에서는 불필요한 언행을 삼가해야 합니다. 반가운 사람을 본다고 해서 큰소리로 인사를 나누거나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행동은 모두 다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교회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드릴 헌금은 미리 깨끗하게 준비하여서 성경책이나 찬송가에 끼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헌금시간에 꼬깃꼬깃한 돈을 주머니나 지갑을 뒤져서 찾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렇듯 예배를 준비하는 모든 마음자세가 경건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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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이나 외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귀한 손님들을 대접할 때나 어려운 어른들을 만나 뵙는 자리에 참석할 때, 양복이나 정장을 입음으로써 예를 표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이나 축하할 자리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멋있는 옷으로 입고 갑니다.

 

하물며 인간들을 만나는 데도 이처럼 예의를 갖추고 복장에 한껏 멋을 부리는 데, 우리를 만드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데에 입고 갈 옷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일주일 동안 자기가 평소에는 아껴두었던 옷을 정성스럽게 다리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화려하거나 비싼 옷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차림이 아닙니다. 비록 누추하고  볼품이 없는 것이지만 깨끗하게 손질해서 입고 하나님의 잔치자리에 참석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뜻 합니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들에 맞는 색깔과 피해야 할 색깔의 옷들이 있으니 그것은  절기를 참고해서 입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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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주보는 어떻게 활용합니까?

 

교회 문 앞에서 안내하는 분들이 주보를 나누어 주는데, 이 주보는 그 날의 예배를 안내하는 순서지입니다.

여기에 예배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예배시작하기 전에 미리 펴서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오늘의 성경말씀을 찾아서 갈피를 꽂아서 표시를 해두고, 찬송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광고나 교회소식들을 읽도록 합니다. 그 난에는 한주간에 교회 안에서 있었던 행사나 경소사들이나 또 자치회 모임들이 안내되어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빨리 익숙해지고 교인들과 친교를 나누고자 한다면 이 광고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주의 말씀이나 성경공부의 난은 집에서 매일 매일 성경을 직접 찾아가면서 묵상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하루라도 말씀을 거르지 않고 읽어가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렇듯 주보를 잘 활용하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주보를 그냥 버리고 오거나, 낙서나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12.기도 생활

 

1.기도는 무엇입니까?

2.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3.기도는 언제 합니까?

4.기도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습니까?

5.기도 할에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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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그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감사하고 또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서 특별히 나와 나의 가정, 그리고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옹알이를 하는 귀여운 자식이 물을 달라는 것인지,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것인지를 알고 사랑으로 그 원하는 것을 해주는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물며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간절히 원하는 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아버지께서 어찌 못 들으시겠습니까?

 

악인도 제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할 때 돌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언제나 기도로써 그들의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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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 기도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들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추어서 기도의 시작에서 끝마무리로 이어집니다.

우선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말씀과 생활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존중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사례하되 영적인 은혜와 육적인 것, 개인적인  것이나 단체적인 일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복(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에 걸리는 죄악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간구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자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며, 하루 동안의 필요한 것까지도 구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 곧, 온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일꾼들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높이고, 나의 죄를 자백하였다 하더라도 기도의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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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언제 합니까?

 

기도란 독수리가 올라가지 못하는 곳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간디는 런던에 있을 때 회의를 하다가 기도드릴 시간이 되었으므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바닥에 꿇어 앉아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미국 하원의 한 위원회 석상에서도 회의를 하다 말고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아침과 저녁 때 해가 질 무렵 하루에 두 번씩 기도를 하였습니다.

"네가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것 같이 기도 없이는 기독신자 됨을 볼 수 없느니라"고 헬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때, 모든 경우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라고 성경말씀에 씌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인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식사전과 잠자리에 들기 전과 아침에 깨었을 때, 또한 어려움이 닥치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도와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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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습니까?

 

기도에는 그 모이는 인원수에 따라서 개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공중 기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개인기도는 자신의 생활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모든 일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속상하고 어려운 일들에 부딪혔을 때 집안에서나 조용한 곳에서 홀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기도입니다. 주로 신앙생활을 성숙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도로서, 소리 내서 할 수도 있고, 조용하게 속으로  바라는 바를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적인 기도는 공중 기도라고도 하는데, 예배 중에서와 어떤 모임에서 전체를 대표하여 하는 것으로서 그 예배와 모임과 형편에 따라 기도합니다. 대표자가 기도하는 경우 그 내용을 같이 맘속으로 아멘으로 경청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자가 그 모임의 모든 회중들의 기도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는 삼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기도 중에서 통성기도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가 한 맘으로 소리 내어서 한 주제를 놓고서 같이 합심으로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이때는 자신의 맘속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간구와 소원들을 소리 높여서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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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자신이 범죄하고도 그것을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있다면 그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기를 거절할 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조그만 잘못도  용서해 주지 못한 입으로 어떻게 자신의 커다란 죄를 하나님께는 모두다 용서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기도를 그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인 사욕을 위한 소원과 옳지 못한 것을 바라는  기도는 하지 않음만도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자세가 옳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성경말씀에 씌어 있습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에 확신이 없이 의심을 하면서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때 그 기도는 진정으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6,7)

 

 

 

 

 

 

 

13.헌금 생활

 

1.헌금은 무엇입니까?

2.헌금은 왜 드립니까?

3.헌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4.헌금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5.헌금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6.헌금은 어디에 사용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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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이 당혹스러운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이 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헌금함이 돌려지는 것을 보고서 과연 내가 내는 헌금이 어디에 쓰여지고 또 왜 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렇다면 헌금의 정의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 달이면 한달 동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돌봐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또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으로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가진 건강, 지혜, 재능 등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전부 그의 것이며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위탁 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 일부 혹은 전부를 다시 그에게 돌려 보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한 헌금의 중요한 의미로는 신앙조직의 집단이며 공동체인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의 의무입니다. 헌금이 쓰여지는  선교활동이나 구제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헌금생활은 개인생활의 기도와 성경공부 및 믿음에 힘쓰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만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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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왜 드립니까?

 

헌금을 드리는 가장 기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과 ,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2)고 하셨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3:10)고 하셨으므로 순종의 의미에서 드리며, 교회의 기능 중에 하나인 구제와 봉사를 실천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교회의 행사와 운영을 위하여서도 헌금은 필요한 것이며 특히 복음전파를 위해서 헌금의 뒷받침은 매우 긴요합니다. 금전은 인격시험의 시금석입니다. 금전에 대한 자세로 그의 인격과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감사하고 헌금할 줄 아는데 따라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는 교인의 올바른 마음자세는 모든 주어진 선물은 자기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위한 선물인고로 당연히 가난한 형제에게도 분배되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과 성령으로 건설하는 것을 권하고 있는 한 교회 내에 말씀의 사역자를 위시하여 개개인에게 직분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면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헌금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또는 국내외 전도를 위하여, 또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규칙 있게 계획적으로 헌금하는 행위는 성경에서 분명히 명하고 있는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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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각 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모든 신자가 매주일 예배 때마다 공통적으로 드리는 헌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하나님의 구별하신 것으로서,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헌금입니다.

그리고 일반헌금으로는 매주일 낮 예배시간에 모든 신자가 드리는 주일헌금을 들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받은 여러 가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헌금인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생일이나 입학, 취직, 승진 등의 감사한 일에 대한 헌금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절기헌금, 특별헌금, 구역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등의 기타헌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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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헌금이란 잘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잘못 드리면 하나님께 욕되고 사람에게는  징계가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우선헌금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세무서에 납부하는 것처럼 헌금의 정당한 수납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바치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사회사업이나 정치자금 같은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정성껏 준비하는 것입니다. 결코 인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액면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득(이익)을 얻은대로 그에 비례해서 합당한 헌금을 내야 합니다.

헌금을 통하여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각자의 형편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손수 수고한 것으로 드려지는 것이 더욱 값지며, 주님 일에 풍족하도록 하는데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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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헌금은 교회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의무적인 면에서도 꼭 시행해야 하지만 바치는 자에게도 크게 축복이 되므로 이를 시행함이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큰 축복이 됩니다.

고린도후서8:4-6에서는 "이 은혜와 서로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쫓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하는 것이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신자가 주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드릴 때 기쁨을 체험케 되며, 또 마음에 있는 악의 뿌리를 제거시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십일조 헌금을 하면 적극적으로는 넘치게 축복을 받게 되고( 3: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며( 3:11),

열방이 인정한 만큼 복을 받게 됨을( 3:7) 성경에서 증언하십니다.

진실한마음으로 바치는 자는 그들의 자원을 더욱더 넉넉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 이 말씀이 경제 원칙에는 위배될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명시해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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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어디에 사용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여러 가지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헌금은 우선 복음사역과 선교사역에 필요한 자금으로 적극 활용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 각 부서 활동비 및 교육비로 조달됩니다.

또한 교역자 및 유급 직원들의 생활비(보수)로 충당됩니다. 말씀의 교역자가 그의 가정의 생활비로 인하여 그 직에 전념할 수 없다면 이것은 결코 교회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비 명목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돕는 부조금으로 사용됩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부의 각종 관리비, 수리비 및 시설 확충비, 교육관 운영비 등으로도 쓰여집니다.

 

이것 이외에도 교회의 사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역자 양성기관, 전도사업, 교육사업 등 이것이 활발히 실행되어지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란 돈이 안 드는 교회가 아니라 본래의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합니다.(장재언)

 

 

 

 

 
 

 

 

 

 

 

 

 

 

 

 

 

 

 

 

 

 

 

 

배우 엄지원 씨가 지난 21일 목소리 재능기부를 통해 국제어린이양육기구 한국컴패션이 제작한 가상현실(VR) 영상 ‘컴패션 아이(Compassion Eye)’ 내레이션에 참여했다.

 

 

 

지난 2008년 5월 방글라데시 구호 방문한 배우 엄지원

 

컴패션 수혜국인 필리핀 팔라완 수상가옥 마을을 배경으로 한 ‘컴패션 아이’는 ‘보물찾기’ 콘셉트의 체험자 참여형 VR 영상이다.

 

관람자는 VR 기기를 쓰고 수상가옥 마을에 사는 11살 소년 레이버의 집을 돌아다니며 레이버와 그의 가족이 처한 가난의 현장을 생생히 체험해볼 수 있다. 

특히 아이콘에 시선을 고정하면 자동 클릭되는 기능을 추가해 관람자가 직접 이동 방향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영상은 오는 11월 초 공식 론칭한다.

 

엄지원 씨는 지난 2008년부터 약 10년 동안 한국컴패션을 통해 6명의 해외 어린이를 후원해 왔다. 배우 차인표 씨, 가수 황보 씨 등과 함께 컴패션 문화예술분야 자원봉사 모임인 ‘컴패션밴드’ 멤버로 활동하며 어린이 후원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컴패션 관계자는 "배우 엄지원 씨가 이번 영상의 취지에 깊이 공감하며 기쁜 마음으로 재능기부에 동참해주셨다"며 "어린이들을 위한 사랑에 깊이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컴패션은 전 세계 25개국의 가난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1대 1로 결연해 자립 가능한 성인이 될 때까지 전인적(지적, 사회 정서적, 신체적, 영적)으로 양육하는 국제어린이양육기구다.

1952년 미국의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한국의 전쟁 고아를 돕기 위해 시작했으며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대돼 현재 18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양육 받고 있다.

 

한국컴패션은 가난했던 시절 한국이 전 세계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되갚고자 2003년 설립됐다. 현재 약 12만 명의 전 세계 어린이들이 한국 후원자들을 통해 양육 받고 있다.

 

한편 엄지원 씨는 지난 12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조작'에서 인천지검 강력1부 검사 권소라 역을 맡아 매회 인상적인 연기로 시청자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최근 기독교 라디오 방송 '브레이크포인트'(breakpoint.org)에서는 칼럼니스트 존 스톤스트리트(John Stonestreet)의 '박해받는 무슬림 소수파가 왜 기독교인에게 중요한가'라는 제목의 칼럼이 업로드됐다.

 

우리가 종교적 박해를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중동을 생각한다. 그러나 동남 아시아에서도 박해가 심해지고 있다. 

 

'국가범죄에 관한 국제연구소'(International State Crime Initiative )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얀마의 로힝야 종족은 '대량 학살의 마지막 단계'에 직면해 있다.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대량 학살의 정확한 정의를 충족시키는지 아닌지 여부와 관계 없이 인권에 대한 끔찍한 폭력임에 틀림 없다. 그것은 남부 및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종교에 기반한 박해 중 일부다.

 

몇 달 전까지 만해도 우리 대부분은 로힝야족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배경이 있다. 미얀마를 마치 네덜란드처럼 단일 민족 국가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미얀마에는 실제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8개의 주요 민족이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4개의 주요 언어 군에 속한 언어를 사용한다. 압도적 다수의 미얀마 시민들은 적어도 명목상으로 불교도이지만, 이러한 '민족적 종족' 중 일부는 주로 기독교인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로힝야 족을 보자. 로힝야 족은은 이슬람교도들로서 인정된 '주요 인종들' 중 하나가 아니다. 1982년 이래 그들은 미얀마 시민이 아니었다.

 

미얀마 정부가 종교 소수자들을 최악으로 다루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로힝야족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픈도어 USA는 미얀마의 종교적 박해가 '매우 높음'이라고 지적한다. 

 

미얀마의 종교 소수파 정책에 주목한 것은 오픈 도어스만이 아니었다.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얀마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실배스타 스탤론이 2008년 주연한 영화 '람보'의 주제였다. 

 

람보는 영화에서 가상의 미얀마 기독교인 그룹을 구할 수 있었지만 현실 세계에서 '미국 종교 자유 회의'(United States Conference on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는 미얀마의 기독교 소수 민족에 대한 숨겨진 핍박을 언급한 바 있다.

 

그 핍박에는 차별, 강제 개종, 폭력 및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의 신성 모독이 포함된다. 미얀마의 박해받는 기독교 소수 민족은 적어도 서류상에는 국적을 갖고 있다. 로힝야 족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미얀마 정부는 그들을 떠날 수 있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소수의 로힝야족 무장 세력을 장악해왔다. 버마 정부의 최근 단속에 앞서, 로힝야족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탈출했었다 .

 

그리고 인간의 부패가 가라 앉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처럼, 태국 등지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성매매에 팔려가거나 심지어 살해되었다 .

 

토마스 리즈(Thomas Reese) 국제 종교 자유위원회 위원장은 기독교인들이 염려하고 행동으로 옮겨야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를 분명히 했다. 그는 "로힝야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의 곤경은 지속적으로 미얀마 정부가 종교적 폭력을 영속시키고 지지했던 결과다. 미얀마의 종교 자유를 수호할 때가 되었다"고 밝혔다.

 

더욱이,이 집단의 박해는 이 지역의 종교 민족주의에 문제가 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정부의 가장 지지하는 그룹은 무장 불교 승려들이다.

 

그것은 미얀마만이 아니다. 스리랑카, 베트남, 라오스, 부탄 ,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불교와 힌두교가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억압되어야하는 외부 종교로 점점 더 주목 받고 있다.

 

피해자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세력에 대항하여 확고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최샘찬 기자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는 탈북민을 돕는 카페가 새로 생겨 소문이 자자하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친절한 바리스타...

주위의 카페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카페 곳곳에는 통일과 북한 관련 책자들이 쉽게 눈에 띈다. 주문하려고 다가간 포스에는 "카페 길동무의 수익금은 전액 탈북민 자립지원을 위해 사용됩니다"라는 문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들이 탈북민이라는 것.

탈북민을 돕는 카페 길동무를 운영하고 있는 사단법인 길동무는 과거 직접 북한 주민을 지원했다. 지난 2010년 '남북한장애인사업협력단'이란 이름으로 통일부의 인가를 받고 북한 장애인들에게 휠체어와 보청기, 의족과 의수 등을 지원했지만 지금은 남북 관계의 변화로 지원이 어려워진 상황이다.

 

북한 장애인을 직접 돕지 못해 고민하던 이들의 눈에는 서서히 탈북민이 보였다. 한국에 거주하는 3만 명 이상의 탈북민들이 남한에서 정착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돕기 위해 카페 길동무를 열었다.

 

카페 길동무는 탈북민 2명을 고용해 바리스타로 교육시키고, 이들에게 4대보험과 주휴 수당 등을 제공했다. 이들이 남한 사회에서 정당한 권리를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와 같이 탈북민에게 남한 사회에서의 적응을 돕는다는 의미로 카페 길동무의 간판에는 'Campus(캠퍼스) 1'이라 적혀 있다.

 

캠퍼스란 이름에 걸맞게 카페 길동무는 커피를 전혀 모르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기초부터 교육했다. 지금은 커피를 내리는 이들의 기술이 수준급이다. 카페 길동무는 이렇게 성장한 탈북민 바리스타를 2호점에서 매니저로 고용해 다른 탈북민을 훈련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카페를 통해 길동무는 원대한 비전을 품고 꿈을 꾼다. 카페 길동무가 꿈꾸는 비전은 통일 혹은 통일 이전에 북한의 문호가 개방됐을 때 탈북민 바리스타들이 본인의 고향에서 카페 길동무를 여는 것이다. 카페 길동무는 탈북민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차원을 넘어 이들을 훈련시켜 통일을 준비하고 있다.

 

 

 

카페 길동무를 운영하며 통일을 준비하는 사단법인 길동무의 최태순 이사장은 "탈북민들에겐 카페 길동무가 단순한 아르바이트일 수 있지만, 길동무에겐 이들이 정말 소중한 훈련생들"이라며, "이들이 지금은 신앙이 없을지라도 나중에 복음을 영접한다면, 카페 길동무는 평범한 바리스타가 아닌 '복음의 바리스타'를 북한에 파송하게 된다"며, 통일과 선교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소개했다.

 

카페 길동무에서 교육을 받고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K씨는 "이전 6개월 동안 일했던 음식점에선 제약이 많았다"며 길동무에서 받는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이들을 바리스타로 교육한 최광선 목사는 "아무 것도 몰랐던 이들이 이제는 다양한 메뉴를 만들고 손님들을 능숙하게 응대하며 다른 카페에 비해 맛이나 서비스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며 "이들을 통해 카페 길동무는 맛도 좋고 뜻도 좋은 카페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탈북민 바리스타를 칭찬했다. 최 목사는 "탈북민이 바리스타로 일하는 카페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자신에게 탈북민이냐고 묻는 고객도 있다"며 카페 길동무의 좋은 소문을 반기기도 했다.

 

요즘처럼 남북 관계가 한층 악화되고 있는 현실을 말없이 지켜보는 길동무는 카페를 찾는 손님들과 이곳에서 비전을 갖고 일하는 탈북민 바리스타를 바라보며 남북 통일에 대한 꿈과 비전을 다시 한 번 다잡아본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합니다"

사단법인 길동무 최태순 이사장

 

"탈북민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북한엔 이런 거 없지? 처음 먹어보지?'라는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탈북민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동일하게 사랑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동일한 인격체로 대하고 통일을 기도로 준비합시다."

사단법인 길동무의 최태순 이사장은 북한 주민과 우리는 한 민족이며 서로 동등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우리가 북한을 당연히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거나 이익의 대상으로 봐선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잘 살고 너희는 못 살아 남한에 왔으니 도와준다는 생각을 갖고 그들을 대하면 그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론 그대로 느낀다"고 말한 최태순 이사장은 절대로 그러지 말자고 당부했다. "오히려 그들은 생과 사의 고비를 넘어 정신력도 강하고 자존감도 높은만큼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우리가 북한의 지하자원을 따지는 등 이익을 계산하거나 그들을 선교의 도구로만 이용하려 하면 안 된다"며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탈북민들을 향한 사랑의 나눔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많이 가져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피조물이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며 잘못된 시각을 바라잡아주기도 했다.

 

탈북민을 '미리 온 통일'이라는 강조하는 최태순 이사장. 그는 "이들과 잘 지내지 못하면, 통일이 와도 북한과 잘 지내지 못할 것"이라며 "탈북민을 존중함으로써 통일 시대를 함께 준비해나가자"며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변화를 요청했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하였도다" (사 51:17)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분노의 잔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모든 자들이 마셔야 할 심판과 형벌을 의미합니다.

 

먼저 선민 이스라엘이 마셔야 했습니다. 비틀걸음 치게 하는 분노의 큰 잔을 한 모금 마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애타는 마음으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그들이 만일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 (렘 25:17,28)

 

그 다음 분노의 잔을 마셔야 할 대상은 열방의 모든 이방 나라들입니다. 이 잔을 원치 않아 거절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마셔야 할 잔이라고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무시무시한 절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시 75:8)

 

하나님의 쏟아지는 분노의 큰 잔, 술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 무시무시한 심판의 잔을 바닥의 찌끼까지도 남김없이 다 기울여 마셔야 하는 이 기가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낼 것인가!! 망연자실하여 사지가 녹고 절망 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일찍이 다윗에게

이 분노의 잔을 거두리라는

구원의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5-6)

 

다윗과 단둘이 식사하시면서 친밀하게 얼굴을 맞대고 너무나 황송하고 감사한 약속을 해주십니다. 선한 목자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악한 무리들과 원수의 목전에서 구원의 잔치 상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성령의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주시고 구원의 잔, 축배의 잔을 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여호와의 집(천국)에 영원토록 거하게 인도하여 들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7-28)

 

이제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이 구원의 약속을 친히 이행하십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예비하신 또 하나의 잔은 구원의 잔인데... 그 잔에는 창조주가 인간의 죄로 인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의 잔을 거두시기 위해 아들의 피로 채운 구원과 사랑과 긍휼의 잔입니다.

 

이 잔은 인류를 위해 흘리시는 사랑과 희생과 언약의 피... 즉, 십자가의 보혈이 담긴 구원의 잔입니다. 유월절 만찬 석에서 열 두 제자들에게 이 잔을 마시라고 한 명한 명에게 개인적으로 따라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마 26:42)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구원의 잔을 주시고, 우리 때문에 부어진 분노의 잔은 예수님께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분노의 잔을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께 남김없이 다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죄가 지도 모르고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린 양처럼 온유하신 아들에게... 내 죄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분노의 큰 잔을 바닥의 찌끼까지 남김없이 다 퍼부으셨습니다. 아들도 사람이기에... 이 분노의 잔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 잔이 그냥 지나가기를 구하시는 장면이 더더욱 마음이 아프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한 사람 살려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값으로 더러운 죄인 된 내 몸값을 대신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뭐길래... 훅 불어버리면 먼지 날리듯 사라져버릴 인생인데... 나 한 사람 없어져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실 텐데...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나 봅니다. 아들의 생명 값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구원해야만 하는... 그런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나 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116:12~14)

 

다윗의 시편의 고백이 유난히도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열방의 모든 백성들 앞에서 서원하며 구원의 주님을 선포하며 춤을 추며 찬양하는 다윗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 14:10-11)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진노의 잔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잔은 (시 75:8)의 진노의 잔과 다릅니다. 계시록의 잔은 섞인 것이 없어 술거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시편의 잔은 섞인 것이 가득하여 술거품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섞인 것'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의미합니다. 분노와 긍휼이 만나서 영적인 화학반응을 일으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판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은혜입니다. 분노 중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두렵고 무서운 것은... 긍휼없는 심판입니다.

 

아무것도 섞인 것이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공의만이 존재하는 계시록의 분노의 잔... 이것은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오래 참고 기다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쏟아지는 그야말로 최후의 마지막 잔입니다. 이 잔은 교회가 들림을 받고 7년 환란 마지막 끝자락에 한꺼번에 퍼부어질 그 잔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 2:13)

 

야고보가 말한 긍휼없는 심판이 임하기 전에...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분노의 큰 잔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잔을 얼른 마셔야 합니다.

 

이미 구원의 잔을 마시고 거듭난 자들은 부지런히 서둘러 이 잔을 열방으로 퍼 날라야 합니다. 나 혼자 마시고 그걸로 끝나고 입 딱 씻는다면... 그건 직무유기입니다. 오래오래 숙성된 맛 좋은 포도주를 꺼내어 내 옆의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지금!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가 마셔야 할 분노의 큰 잔을 주님이 다 마셔주신 은혜... 무엇으로 보답하리요! 그리고 자격 없는 저에게 주님의 보혈이 담긴 구원의 잔을 들게 하신 은혜... 어떠한 말로써 감사하리요..

 

만입이 있다 하여도 다 감사 못할 은혜에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가슴을 두드릴 뿐입니다. 이토록 못나고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죄 없으신 어린 양께서 자신의 몸을 영원한 속죄제물로 드리셨나이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 사랑에 흠뻑 젖어 살게 하소서.  살을 꾹 누르면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국물만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구원의 잔을 마시며 성령에 취하여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에어푸르트 대학과 루터

 

독일 튀링엔(Thuringen) 주의 주도인 에어푸르트(Erfurt) 구 시가지에는 지금 옛 시대에 뽐내던 위용을 여전히 자랑하는 성 마리아 대성당(St.Marien Dom)과 이에 마주해 서 있는 세베르교회(Severikirche)가 많은 방문객들을 불러 모으며 에어푸르트를 대표하는 기념물이며 첨탑의 도시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건물들이다.

 

에어푸르트에서는 1970년 이후 매년 11월 11일(내년에는 11월 10일에 마틴루터 탄생기념예배가 예정됨)이 되면 두 명의 마틴(Martin)를 위한 축제가 에어푸르트의 성 마리아 대성당 광장에서 열린다. 소위 에큐메니칼 마틴 축제(okumenische Martinsfeier)가 그것이다. 여기서 두 마틴은 가톨릭교회의 성 마틴(Martin von Tours)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말한다.

 

11월 11일은 성 마틴을 기념하여 등불을 밝히며 다니는 축제일이기도 하지만 그 날은 또한 태어난 지 하루 만에 마틴 루터가 성 마틴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날이기도 하다.

 

에어푸르트는 젊은 루터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마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에어푸르트 대성당에서 루터는 1507년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그러나 에어푸르트에서 마틴 루터는 단지 수도사로서만 기억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그는 학문적 방법과 기초를 닦는 대학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어푸르트는 종교개혁자 이전의 루터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현재 에어푸르트 시는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 안내하는 2시간짜리 관광 프로그램을 준비해 놓고 있다.

 

루터 시대에 인구 2만명(현재 20만명)이 살던 에어푸르트는 90개 이상의 교회와 36개의 수도원들이 즐비했다. 뿐만 아니라 상업도시로서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중요한 제국도시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14세기와 15세기 유럽에 급격하게 불고 있던 교육혁명의 한 장소로서, 독일어권에서는 체코의 프라하(1347/8)와 오스트리아 비엔나(1363) 다음으로 대학(1379)이 세워졌던 도시이다. 이는 하이델베르크(1385)나 쾰른(1388)보다 앞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에어푸르트는 독일에서 가장 먼저 대학(Hochschule)이 세워진 곳이다. 루터 당시 에어푸르트 대학은 윌리암 옥캄에 기인하는 '유명론'이 수정된 형태로 가르쳐진 '새로운 길'(via moderna)의 아성(牙城)이었으며, 인문주의의 중심지였다. 이 에어푸르트 대학은 루터에게 다른 곳이 작아 보일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마틴 루터는 신앙과 교육에 열심이었던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에어푸르트에서 공부하게 된다. 1501년 루터는 17살의 나이에 에어푸르트 대학에 입학한다. 지금도 에어푸르트 시문서기록물에 보관중인 1501년 대학 학생 명부에는 'Martinus Ludher ex Mansfeld (만스펠트 출신 마틴 루더)'라고 기입되어 있는데. 이것은 루터의 삶에서 아마도 가장 이른 친필 기록일 것이다.

 

마틴은 열심있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는데, 3학기 후인 1502년에 루터는 57명 중 30등으로 학사과정(Baccalaureus)을 마치고, 이어서 1505년 1월에 17명중 두 번째 좋은 성적으로 석사학위(Magister)를 취득한다. 하지만 그의 공부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21살이 되던 1505년 루터는 여름학기에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본인에게는 낯선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2. "성 안나여, 도와 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에어푸르트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30여 분 가량 달리면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 인생의 전환점이 이루어진 장소인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을 찾아갈 수 있다.

 

이 날은 1505년 7월 2일로 전해진다.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마도 부모님과 법학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있었던 것같다. 많은 루터 관련 연구서들은 이 싸움으로 루터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신 속에서 에어푸르트 입구에 있는 마을 스토테른하임을 지나는 중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속에서 루터는 일종의 자신의 미래를 향한 계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성 안나여, 도와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Hilf du, heilige Anna, ich will ein Monch werden!)." 이 고백은 수십 년 후에 루터 자신이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탁상담화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비록 중세의 미신적 신앙에 의해 광부들의 수호신인 성 안나에게 단발마의 비명처럼 내지른 말이었지만, 단지 이것이 천둥번개가 무서워 엉겁결에 튀오나온 말이었을까? 교회법에 따르면 위급한 상황에서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었다.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루터는 이것을 지켜야 할 의무를 느꼈다. 갑작스런 맹세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큼 무시무시한 낙뢰의 경험이 수도사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고민해 오던 구원의 문제와 이를 위해 수도사로의 삶을 강행하게 했던 것이다

 

스토테른하임에 세워진 기념비엔 "성스러운 땅.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로부터 온 섬광 가운데 젊은 루터에게 이곳에서 길이 지시되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3.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다:

"세상을 등짐(Der Welt abgestorben)"

 

에어푸르트 중앙역에서 걸어서 약 20분 가량 거닐면 개신교 어거스틴수도원을 찾아 갈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여느 수도원처럼 매번 기도시간들이 있지만 이곳은 이제 객실을 준비한 호텔 수도원이다. 루터의 향기가 가득한 채로 이곳에서 친절한 직원이 루터의 흔적을 찾는 방문객들과 손님을 맞이한다.

 

1505년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피해서 도망치듯 루터는 에어푸르트의 어거스틴 은수자수도원(Augustinereremiten Kloster)에 입회한다. 번개를 만난 지 14일이 지난 시간이었다. 이후 1521년까지 루터는 수도복을 입고 전형적인 어거스틴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처럼 머리 중앙부분을 삭발한 한 채 살았다. 5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지냈던 에어푸르트 수도원은 청년 루터에서 종교개혁자로의 전환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루터는 왜 다른 수도원이 아닌 어거스틴수도회의 수도원을 선택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에어푸르트에는 시토수도회나 도미니칸 수도회 그리고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있었다. 루터는 아이제나흐에 있을 때 이미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은 수도원'(Schwarzes Kloster)이라고 불리는 어거스틴 은수자수도원을 선택했다.

 

아마도 그 수도원이 당시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배웠던 학문적, 철학적 방법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동일한 노선에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루터에게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하나로 어거스틴수도회가 당시 개혁수도원으로서 어느 수도회보다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루터는 누구보다 수도적 삶에 열심이었다. 그는 스스로 한 번도 수도원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15년 넘게 엄격한 규율에 따른 금욕적 수도생활을 지키면서 해왔던 수도원 생활은 루터의 건강을 해쳤을지 모른다. 루터는 오랫동안 담석증으로 고생하고, 협심증으로 죽었다. 루터는 의식적으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행을 하는 삶을 선택했다.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었으리라. '인간의 행위들이 영혼 구원을 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온갖 수고 가운데 있던 한 젊은 수도사는 그가 파멸을 모면하게 될 것을 어떻게 확신해야 할까?' 이런 고뇌에 찬 영혼이 극단적 고행을 통해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구원문제 출구를 발견하게 된 것은 루터의 영적인 스승이자 당시 어거스틴수도회 종단 부총장으로 있던 요한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와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고해성사 신부였고, 루터로 하여금 신학 박사 루터가 되도록 인도해주었다. 무엇보다 요한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참 구원자를 만나게 해주고,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몰두하게 만든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Solus Christus)라는 종교개혁적 모토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루터는 슈타우피츠를 만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은 이런 예비된 만남을 통해 종교개혁자 루터를 준비시키신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지금도 개신교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루터의 수도원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전시실을 꾸며놓았다. 그가 입었던 수도복, 그가 살았던 작은 방, 그가 거닐었던 복도와 길들을 상상해 보면서 수도원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어느덧 젊은 루터의 절제된 삶과 영적 고뇌가 느껴지는 듯하다.

 

2017년에도 이곳은 각 계의 전문가들을 통해 매 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들이 즐비하게 계획되어 있다. 하루 정도 머물며 수준 높은 강연도 듣고, 고뇌하는 영혼 젊은 루터의 발자취도 느껴 본다면 어떨까? 혹시 나를 위해 준비된 슈타우피츠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 아닌가!

안재중 선교사  

 

 

 

 

 

 

 

 

 

 

 

 

 

 

 

 

 

 

 

 

 

 

 

 

 

 

 

 

 

 

 

 

 

 

 

주기도문(마 6:9~13)에는 7가지 청원이 나오는데 

하나님과 관련된 청원사람에게 필요에 관한 청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약 40%가 하나님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그마저도 우리의 필요를 요청하는 것에 할당한다.

 

십계명에서도 하나님의 권위와 존중의 비율도 40%로 제시되었다.

 

인간의 타락, 또는 그리스도인의 타락은 사람의 필요에 대한 청원이 넘치는 탓에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유추하기도 한다.

 

아담의 타락, 노아시대의 타락도 그들의 마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의와 비전을 성취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과 관련된 청원 세 가지>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 나라가 임하시오며

3.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람의 필요에 관련된 청원 네 가지>

 

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5.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옵고,

7.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어렸을 때에는 자신의 필요를 요구하는 일이 많지만 장성해서도 그렇다면 부모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청원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반응한 사람의 거룩함이며 그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것이고 우리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필요는 단지 일용할 양식 한 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일용할 양식 이상을 구하는데 할당한다.

 

기도내용의 40%는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먼저 구하라.

하나님의 비전, 영광, 얼굴, 거룩함, 경외함, 지식, 사랑, 찬양, 예배,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40%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100%를 

우리의 몫으로 할당하고 끝없이 주십시오, 주십시 한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잠 30:15)

 

나의 비전, 나의 의, 사역, 재물, 성공, 부흥, 은사...

내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혼합된 기도들이다.

 

주기도문 7가지 청원에 대한 우선순위와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40% 이상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보다 하나님의 일보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선물을 기대 사는 사람은 미성숙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언) 

 

 

 

 

 

 

 

 

 

당은 우리 몸에 꼭 필요, 넘쳐도 부족해도 건강 해쳐

 

 

 

 

# 직장생활 7년차인 김모 씨. 점심식사 후 커피믹스 한 잔을 타, 회사 옥상에서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상이다. 최근 그는 탕비실에 항상 구비돼 있어 즐겨 마시던 커피믹스 대신 서랍 속 숨겨둔 인스턴트 원두커피를 타서 마시기 시작했다. 설탕이 든 커피를 마시면 살이 찔 것 같기 때문이다.

 

 

 

국내 1일 평균 당 섭취량은

기준 이내

 

 

최근 당류의 과잉 섭취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다. 영국은 ‘설탕세(Sugar tax)’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이고 미국에서는 ‘탄산음료세’와 같은 소비세를 부과하는 주가 늘고 있다. 설탕이 비만, 고혈압 등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정부가 나서 강제적으로라도 설탕 섭취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설탕 함유 제품에 세금을 붙이면 가격이 오르고,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의 당류 섭취가 줄어들 것이라는 계산이다.

 

국내에서도 설탕 과다 섭취에 대한 지적이 일고 있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현재의 국내 당류 섭취 실태에 비해 과잉 대응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의 1일 평균 당류 섭취량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외국의 사례를 국내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1일 평균 당류 섭취량은 72.1g(2013년)으로 총 섭취열량 대비 14.7%를 기록, 적정 섭취기준 이내이다.

 

1일 당류 적정 섭취기준(2015년)은 총 섭취열량 대비 10~20%이다. 이에 비해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14년 기준 미국인들의 1일 평균 당류 섭취량은 126.4g, 독일은 102.9g, 그리고 영국은 93.2g이다. 국내에서도 당류 섭취량은 증가 추세이지만 외국에 비해서는 아직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 당류에 대한 오해

 

 

국내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번지고 있는 설탕 과다 사용과 당류 과잉 섭취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류 섭취를 무조건 중단하거나 오랫동안 대폭 줄이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당은 체내 에너지의 주요 공급원으로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성분이기 때문이다. 당의 섭취가 부족할 경우 뇌에 심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뇌는 에너지원으로 포도당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임신 중 포도당은 태아의 세포 형성과 모유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

 

포도당을 식품을 통해 가장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설탕 등과 같은 단순당을 섭취하는 것이다. 노동이나 운동 등으로 힘들고 지칠 때 설탕이 든 식품을 먹으면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이유다. 당을 과다 섭취하면 체내에서 남은 당은 간과 근육에 글로코겐 형태로 일부 저장되고 나머지는 지방으로 전환되어 지방조직에 저장된다. 따라서 당의 섭취가 지나칠 경우 비만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당은 넘쳐도 문제가 되지만 부족해도 건강을 해칠 수 있다. 특히 두뇌 활동이 많은 수험생들은 당이 부족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공급해줘야 한다.

 

그렇다면 현명하게 당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밥, 고구마, 감자 등 대표적인 다당분 식단에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나, 음료, 과자, 커피 등에 함유돼 있는 첨가당(대표적으로 설탕)은 ‘나쁜 당’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으로 착한 당과 나쁜 당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많은 사람들이 쌀과 감자, 과일 등에 함유된 천연당과 설탕으로 대표되는 첨가당은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체내에서 똑같이 취급되는 성분이다. 게다가 사과와 오렌지에는 각각 각설탕 7개 분량의 당분이 함유돼 있는데, 이는 탄산음료 내 함유된 당분(각설탕 8개)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치이다. 

 

 

 

최근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은 1인당 하루 평균 당류 섭취량의 33%를 과일을 통해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우유(14.5%), 탄산음료(8.3%), 쿠키•크래커•케이크(8%), 캔디•젤리•꿀•엿•초콜릿(7.7%), 채소(3.7%), 식빵•토스트(2.9%), 과일주스(2.5%), 아이스크림(2.4%), 김치(2.2%) 순이었다.

 

세대별로 보면 청소년을 제외하곤 나머지 세대는 주로 과일을 통해 당류를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직장인들이 식후 마시는 커피믹스 1~2잔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점심식사 후의 ‘달달한’ 믹스커피의 맛을 잊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기 보다는 하루 총 당류 섭취량을 줄이는 게 낫다는 것이다.

 

식사 후에 편안하게 마시는 커피는 클로로겐산의 영향으로 소화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 ‘당류 섭취 주의’ 취지는

좋으나 균형 있는 시각 필요

 

설탕 등 당류의 지나친 섭취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같은 공식은 어떤 영양소에 대입해도 맞는 말이며, 비만과 당뇨병 등 질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한국식품의료연구소 김 용 소장(이학박사)은 “당이 몸에 좋지 않다는 단순한 생각에 지나치게, 장기간 적게 섭취하면 뇌, 신경, 백혈구 등에 영구적인 손상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당류는 몸의 기본 에너지를 만들기 때문에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과잉섭취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다른 음식들처럼 당류 역시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질병 및 비만은 음식의 과잉 섭취가 근본적 원인이며, 당류도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요즘 급증하고 있는 당뇨병은 당이 남아돌아서 나타나는 질환이 아니라 우리 몸이 혈액 속의 당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따라서 당뇨 환자는 당을 적절하게 섭취하면서 혈액 속에 든 당의 이용률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운동을 하면 근육 세포들이 혈액 속의 당을 활발하게 이용해 혈당을 낮추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과도한 당류 섭취는 건강에 해롭지만 식후 커피믹스 1~2잔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달달한’ 커피믹스를 굳이 끊지 못하겠다면 당분이 많이 함유된 다른 음식을 줄이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또한 비만 등 건강악화의 원인을 당류에만 뒤집어 씌워 타 영양소의 과잉섭취에 대해 안일한 태도를 갖는 것도 좋지 않다. 당류 섭취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과 함께 운동 등 신체 활동을 통해 몸 속의 당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영어로 된 주님의 기도를

가능하면 하루에 한 번 이상 소리 내어

외워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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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한 모델이 돌체 &amp; 가바나의 2018/19 SS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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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건강해야 나이가 들어서도 머리가 또렷하게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의과 대학 연구팀은 1000여 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6년에 걸쳐 추적 연구를 했다. 연구 참가자 평균 연령은 72세였다.

 

연구팀은 이들이 미국심장협회의 건강 지침 7가지 가운데 몇 가지를 지키는지를 측정했다.

 

7가지 지침은...

△혈압 관리

△콜레스테롤 수준 관리

△혈당 수치 줄이기

△운동 등 활발한 활동

△설탕과 소금을 덜 먹는 등 건강한 식습관

△적정 체중 유지

△금연 등이다.

조사 참가자 가운데 7가지를 모두 지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6가지를 지킨 사람은 1%, 5가지 4%, 4가지 14%, 3가지 30%, 2가지 33%, 1가지 15%, 하나도 지키지 않은 사람은 3%였다.

 

연구팀은 조사 시점에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기억력과 사고력, 두뇌 처리 속도 등을 테스트했다.

 

6년 후 다시 테스트를 한 결과, 7가지 지침을 더 많이 지킨 사람일수록 처음보다 생각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고 기억력과 사고력 감퇴가 덜 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헬스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심장 건강에 좋은 요인들은 심혈관 건강뿐만 아니라 두뇌 건강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심장 건강 요인들을 잘 점검하고 이상적인 수준으로 이끄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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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Chang/ H. Kim/G Kim/김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