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속(聖俗)의
경계에 선 케냐

긴장감이 감도는 에티오피아에서 저의 방문은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는 주변이
대부분 이슬람 국가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점증하는 이슬람의 도전히 만만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 남쪽 방향으로 내려오면 바로 케냐가 위치해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긴장감과 기대감 그리고 뭔지 모르는 오랜 역사의 기원과 연속성을 느낄
수 있었다면 케냐의 나이로비 상공에서는 에티오피아의 감흥과는 다른 새로운 감흥이 밀려 왔다.
고원지대로 보이는 드넓은 초원 위에 펼쳐지는 녹지대의 향연은 케냐가 비교적 안정된
국가라는 첫인상을 주었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나이로비 공항을 벗어나면서 늦은 저녁 조명을 받으며 점점 드러나는
시가지는 “이곳이 과연 아프리카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국의 고급 주택가를 연상케 하는 중류층 이상만이 살수 있는 주택가는
고즈넉한 담벼락과 함께 Security Gate가 포진하고 경비는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주변 환경은 지나가는
사람 하나도 없이 안전해 보였다. 미국의 중산층 지역에서나 볼 법한 도시를 아프리카에서 보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할
따름이다.
시가지는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고 거의 일제 차량 일색인 운전자나 차량에 탄 사람들
경제적으로도 매우 안정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케냐에 머물면서 이곳에 사는 사람의 경제적 빈곤의 격차, 정치적
요소, 종교적 갈등 그리고 당면한 문제들을 접하게 되면서 깔끔하고 세련된 케냐의 이미지는 시간이 갈수록 퇴락하였다.
우선 케냐를 떠오르면 드넓은 드르팟 사바나에 온갖 동물들이 자유롭게 다니며 사자와 치타
그리고 표범이 가로지르는 사파리를 생각할 것이다. 결코 그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케냐의 국민 총생산 (GDP) 가운데 서비스 업종이 63% 나 차지하고 서비스 업종의
대부분은 관광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일 관광 주 수입원은 독일과 영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이다.

21세기 후기현대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구촌에 초원에 야생동물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케냐는 지구촌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마사이 마라 국립공원(Masai
Mara)이 무려 23개에 이른다. 국립보호구역(National Reserve)도 16개에 이른다. 수중 공원과
보호구역( Marine Parks and Reserve)도 6곳이나 된다.
태고적 생태계의 모습을 지금까지도 보여 줄 수 있는 케냐는 관광을 중심으로 세계에서
놀라우리만치 5%라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국토를 관통하는 모든 지역과 마을 그리고 주택을 보면 수도
나이로비의 잘 정돈된 주택단지는 더이상 찾아 볼 수 도 없고 빈곤과 무질서, 어지럽게 뒹그는 쓰레기 더미에 사바나를
무대로 목축을 해 나가며 매일 생계를 연명해 가는 민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슬림들이 살고 있지만 이제는 내륙도 안전지대가 아닌 것은 가는
지역마다 계속해서 잘 페인트 칠한 모스크들이 결코 줄어들지 않고 계속 내 시야에 새롭게 나타나곤 했다. 나무 줄기를
등뼈삼아 진흙을 발라 만든 흙집들이 연달아 나타나고 그 사이 사이에 초라하고 빈약하게 보이는 교회와 성당들이 어디를
가든지 반겨준다.
어느 나라를 가든 천주교회 성당은 화려하고 고딕 양식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케냐만큼
수도를 제외하고 그저 지나가다 벽돌로 대충 때워 만든 초라한 성당이나 미사를 드리는 처소를 본 나라는 그리 많치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온 기간 동안 케냐에는 참으로 많은 비가 내렸다. 수도권의 잘 닦여진 도로를
제외하곤 그래도 초라한 도로들인데 홍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에 다리 일부가 쓸려 나가고 초라한 흙집에 빗줄기가 긁은
잔해들이 나의 시선을 언제나 사로 잡았다. 국립공원으로 가는 도로들은 관광의 나라답게 잘 꾸며 놓았지만 수도권
200킬로 이상을 벗어나면 비포장도로들이 어디서나 반겨 준다.
빗물에 씻겨 내려간 잔해를 바라보는 민초들의 눈빛은 이러한 일들은 수천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는 일이기에 아무일도 아닌 듯 무심코 바라보는 저들의 시선들을 보노라니 자연과 더불어 산 그들의 삶이
내게는 생경한 체험으로 투영되어 온다. 내가 방문했던 마사이 마을에는 토담집에서 흘러 나오는 연기가 마을 집들의
지붕을 눌러 놓는 듯 키작은 난장이처럼 옹기종기 얼굴을 맛대고 살아 간다.

빙들러 지어진 마사이 흙집들을 들러보면 가운데는 동그란 운동장처럼 마을 공동체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듯 하다. 개미 집들이 작은 둔덕을 보고 가진 나의 의문을 알아챘는지 마사이 마을 족장이 설명해
준다. 개미 둔덕이 이곳 저곳 만들어지게 되면 그들이 지은 흙집이 지하의 개미 터널들의 공간을 만들고 그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사이 마을 전체는 9개월마다 마을 전체 이동을 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정 중앙의 마당은 가축들의 똥으로 가득차 있어서 어느 누구도 똥을 밝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정도였다.
마사이 마을이 이동할 때에도 집을 짓는 것은 여성의 몫이라 한다.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기에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이 문제는 마사이 선교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 마사이 마을의
토담집안에는 송아지와 기타 가축들이 함께 기거하고 손님방이 따로 있으며 아이들 방도 따로 있지만 전체 공간은
손바닥만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집안에서 나뭇가지를 태워 음식을 만드는데 눈이 매워서 견딜 수 없었다. 너무나 어두운
그 집에서 잘 길들여진 사람처럼 어른이나 여자들이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섞여서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나누지만 마사이의 전통이 너무 강해 성경적 공동체로 거듭나기까지 겪어야 할 많은 변화와 성화의 과정에 생각에
잠길 때 나는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는 것조차 망각해 버렸다.

국토를 동서남북으로 확연히 가를 수 있는 지형과 기후 그리고 독특한 부족의 삶의 양식을
갖고 있는 케냐는 아프리카 전체 국가들로 보면 비교적 신사적인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람들은 친절하며
서두르지 않으며 오랜 빈곤과 고통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듯 하다. 이러한 저들의 모습
속에는 인구 전체가운데 80% 이상이나 되는 기독교의 영향이 매우 큰 것을 발견해 본다.
전체 인구 가운데 82.5%가 기독교이다. 개신교회가 27.5%, 천주교회 23.3%
그리고 전통적 기독교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전체 인구에서 모슬렘이11.1 %이다. 물론 기독교는 천주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를 포함하며 이중에서 개신교회가 첫째 그룹으로 나타난다.
시골 뿐 아니라 나이로비 도시 곳곳 중심부에는 대형교회들이 백화점 진열대를 연상시키 듯
화려한 건물과 간판들을 내걸고 있으며 TV 마다 미국 TV에서 부흥사들의 말잔치를 보 듯 케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비통과 비탄, 슬픔과 아픔이 화련한 교회 건물을 만날 때마다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서 Global Mission Health Conference 에 수많은
강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몇개의 중요한 대형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또한 교도소 사역을 전심으로 감당하는
Christian Family Chapel 에서 주일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케냐의 수많은
교회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리 밝지만은 않음을 체득할 수 있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최근의 20여년 사이) 케냐의 개신교회에 수많은 케냐의 국내 언론과
서방 언론들이 앞다투어 부정적이고 낯뜨거워서 얼굴을 들 수 없는 물욕주의적이고 세속주의이며 이적 중심에 선 목사들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타락의 기사를 앞다투어 내어 놓고 있다.
이들 언론 기사들은 케냐 교회의 부패, 물질만능주의, 잘못된 가르침, 은사와 이적만으로
치우진 불균형, 대형교회 목사들의 지나친 부의 소유, 한국과 미국을 자주 왕래하는 목사들의 거짓된 행위와 예언,
번영 복음의 창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과 복음 자체보다는 이 땅의 축복과 치유를 강조하는 메세지들이 케냐
교회 곳곳에 넘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문제가 케냐만의 문제이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이지리아를 필두로 아프리카 전체의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케냐는 아프리칸 복음(아프리카 전통 사상과 종교 형태로 기독교를 변형시킨 것을 빗대어 부르는 말)이 수많은
복음에 대한 왜곡이 있었던 것처럼 동아프리카의 주도적인 기독교 다수 나라인 케냐가 더많은 책임이 있다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케냐에는 분명 개신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있었으나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모습이 아닌
내부적 우상숭배와 복음의 핵심이 빠진 성공주의와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현세적 교회의 양적 성장인 것만 같아 심령 속에
애곡소리가 사무쳐 올라왔다.
교회 성장과 팽창의 홍수 속에 실제로 교회로 나오는 출석률은 너무나 저조했다. 양적
성장은 많았으나 그리스도의 거룩을 닮아 가는 성도들의 성화, 헌신과 희생 그리고 국내 선교(주변 국가에서 밀려온
난민들과 이슬람 선교를 의미함)과 해외선교에 진력하는 진정한 희생은 미미한 편이다. 이처럼 쏟아 나 나온 국내
언론과 서방 언론들의 지나친 편향된 기사만 나오는 것 같아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했다.

케냐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기독교 인구가
무려 84.8%라는 경이적인 수를 차지하는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11.1%인 두번째로 큰 종교 세력으로 이슬람의 역사와 존재를 무시할수도 없는 도전 세력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 의하면 이슬람 인구가 35%에서 45%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슬람 세력들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헌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동원해 샤리아법을 제정해 버린 것이다. 케냐의 무슬림들은 샤필리 의식(Shafili Rite)를 의식을
따르는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이다. 하지만 무슬림 인구 중 시아파도 7% 정도이고 19세기에 인도 펀잡에서 종말론적
계시로 시작된 아마디(Ahmadi) 무슬림도 4%에 달한다. 무슬림은 해안가와 북부에 몰려 있다.
천주교회는 15세기에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서 들어 와서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현재 23.3%를 차지한다. 하지만 기독교 가운데 주류는 개신교회인데 케냐
전체 기독교 인구(케냐 전체 인구가 아님에 주목) 가운데 거의 절반 수준인 47.7%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먼저 제일 큰 교단은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 of
Kenya)이고, 그 다음부터 장로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그리고 오순절교회들이다. 하지만
동방정교회도 결코 적지 않아서 아프리카 전체에서 에티오피아 다음으로 650,000에 달한다. 이외의 나머지가
11.8%를 차지한다.

케냐는 지리적 위치가 말해 주듯 북으로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서쪽으로는 남 수단과
우간다를 그리고 남쪽으로 탄자니아를 접하고 있다. 케냐의 면적은 남한 면적 5.8배이고 한반도 전체와 비교하면
2.6배에 달하며 인도양으로 뻗어 있는 해안선은 536 km에 이른다.
케냐 국토를 달리다 보면 평균 2천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이기에 선선한 기후에 수많은
가축을 키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목축업이 발달했고 경작 가능한 농지는 9.5% 정도이다.
2017년 현재 케냐의 인구는 남한의 인구와 비슷한
4천9백에 이르는데 이는 2.65%라는 경이적(?)인 인구 증가율 때문이다. 참고로 인가 증가율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0.45%이다. 25%의 케냐 인구가 주요 도시에 살고 있다. 수도인 나이로비에 3백5십만이 살고
두번째 큰 도시는 몸바사는 백만의 인구가 산다.
케냐에는 모두 108개의 언어-인종 그룹이 있다. 가장 큰 주류 인종은 반투족이다.
반투족은 모두 38개의 종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
키쿠유(Kikuyu)로 19%이고.
그 다음이 루야(Luhya 또는 Luyha)이며, 11.4%,
캄바(Kamna) 10.6%,
메루(Meru)5.5%,
키시이(Kisii 또는 Gusii라고 부르기도 함) 6%,
기리아마(Giriama) 2.1%,
부쿠수( Bukusu) 1.8%,
엠부(Embu) 0.9% 그리고 더 작은 소수 부족들이 있다.
반투족 외는 루오(Luo)로
13%, 카렐진(Kalenjin) 12%(이는 좀더 광의의 카렐진족이고 세분하면
더 많은 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그리고 나머지 인종들이 모두 16% 를 차지한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앞에서 언급한 마사이 족은 전체 인구에서 1.6%를
차지한다. 대영제국 당시에 영국이 인도사람들을 카리브해와 아프리카 전역에 이주케 했는데 그 결과로 상당수의
구자라트인과 북인도들이 상권을 주도하고 있다.
비문맹률은 73.6%에 달할 정도로 아프리카 전체에서 케냐인의 교육 수준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토 전역에 골고루 주어지는 교육의 기회가 가득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국민들이 자신들의
부족 언어 뿐 아니라 공용어인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비교적 능통하게 구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0%이상의 케냐 인구가 빈곤층에 속하며 실업률은 무려 40%에 달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75% 의 인구가 농사로 최저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먹을만한 채소를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지만 농사가 실패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근 가운데. 예측불가능한 기후가 최근 케냐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건기 중 반복되는 가뭄과 대부분의 농가를 절대
빈곤으로 만드는 홍수가 우기 가운데 발생하는 자연 대재해를 불러 일으킨다.
1888년부터 1962년까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뒤 1963년 독립한 신생 케냐는
농업과 경공업 그리고 관광을 중심으로 1976년까지는 비교적 안정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외채
의존과 채무의 잘못 사용으로 인해 불경기를 겪는다. 매관매직을 일삼는 부패한 엘리트들은 국가기금들을 변용해서
사사로히 취함으로 케냐의 명성은 가장 부패한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기간산업의 발전은 매우 첨예한 일이며, 가뭄과 홍수 그리고 기근이
몰고 온 여파는 여러 지역과 농작지와 목축지에 미치며 복구는 염두도 내지를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어느 조건을 보아도
못 살 여건이 없는 이나라에 수도인 나이로비와 일부만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도시와 주택가 그리고 쇼핑몰들이 즐비하고
전체 국민들은 국민소득 1,606 불 정도로 세계 경제 72위 정도 빈국에 머물고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부러워 할 만큼 많은 지하자원과 관광객을 불러오는
국립공원과 보호구역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냐가 아직도 빈곤 가운데 있는 것의 주 원인은 역시 앞서 말한 지도력의
부재와 부정 부패에 있다. 부정부패는 엘리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음은 거리 곳곳에 정직하지 못한
부패의 일상들이 여과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기에 대통령으로부터 대주교에 이르기까지 아래로는 교통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물질과 돈이 눈이 멀어 대형화와 쇼맨쉽 그리고 개인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는 목사들의 행태에
이르까지 교회들의 부정부패도 결코 케냐 엘리트들 못지 않다.
이러한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는 자연스럽게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다. 케냐 전체에 퍼진 부정부패만큼 부도덕도 만만치 않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백5십만의 인구가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같은해에 8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하였다. 성적 방종과 음행의 끝은 에이즈 감염 뿐 아니라 결혼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케냐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래전 정치적 부패 가운데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됬다. 인종간의 충돌은 천여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6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재배치 되어야 했다. 이로인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라고 하는 케냐를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주춤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영국과 비슷한 의회제도를 물려
받았다. 영국이라는 식민 통치가 없어진 자리에는 종족간의 중재를 하거나 또는 모든 이들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지도력이 나오지 않으면서 이것이 종족간의 분쟁으로 나타났다.
종족간 그리고 계층간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치뤄진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갈등을 부추겨서 유혈 충돌이 되게 하였다. 종족간의 분규를 유일하게 치유할 수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합의와 화해를
이끌어가는데 실패하였다. 최근에 치루진 이러한 대통령 선거 이전 즉 독립 직후의 케냐의 상황이 지금 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1963년 2002년까지 모이 통치(Moi Era) 동안 즉 모이의 킵시기스(Kipsigis)
정부가 야당을 탄압하고 선거 자체를 취소하고 키큐유족과 루오족 그리고 루야족을 외면시키면서 이는 국론분열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대부분 지역에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모이 정부 이후 2000년대 부터 다수당 제도 도입되었고 정치적 야당을 허용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교육과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선언들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07년
대통령 선거는 2개월 동안 충돌과 폭력 그리고 인종간 갈등이 증폭되면서 연정 정부가 드러서게 된다.
최근에 다시 치뤄진 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꼬
2007년보다는 심하진 않아도 2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낼 정도로 부정부패와 갈등의 불씨가 여전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할 문제는 이제는 더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까지 민초부터 대통령
측근에 이르기까지 헌법과 정치지도자들 그리고 중동의 지원을 받은 모스크 건립과 이슬람 정치세력화에 대한 최근의
변화들이다. 또한 동부 해안선의 이슬람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몸바사에는 테러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고 또한
주변 해안 도시들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몸바사의 130만에 이르면 천주교회11%에 이르고 개신교회도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소수의 기독교인들와 무슬림들과
갈등은 매우 첨예하다. 얼마전 극단적 테러주의자들이 평범한 민가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졌다.
“당신 기독교인지?” 이와 같은 질문에 기독교이라고 대답함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무려
60명이나 되었다.
종교적 갈등은 2011년 케냐의 군대가 소말리아 사태에 개입하면서 보안의 환경을 크게
변화시켜고 이 뿐 아니라 이 이전에도 수십년동안 지속적인 긴장이 있어왔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사이의 종교적 권리에
대한 방안들을 포함했던 케냐의 헌법 그리고 소말리안들과 케냐의 모슬렘들에 대한 방안에 대한 오래된 분쟁은 케냐 정보
당국과 케냐에 종교적 투쟁을 일으킴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그 한 예가
극단적 폭력 그룹 알 샤바아바레(at-Shabaabare, 단체 이름만은 알 샤아바압)이다. 기독교 진영은 이들 알
샤아바압과 공존을 공공연히 증가시켜왔다. 알 샤아바압은 자생적이고 또한 외부에서 온 극단주의적 요소들을 현재 케냐에
가져 왔다.
2007년도 2008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이후 대부분의 소요와
폭동은 그 이후 2013년 9 월의 웨스트 게이트 몰(Westgate Mall) 점거와 같은 경우에서 보듯 알
샤아바압과 그와 같은 광의 단체에 동원된 사람과 동조자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알 샤아밥은 지금의 케냐인이
어떻게 무슬림을 바라보는지를 힘있게 형성하게 하였다.
웨스트케이드 몰 침략 사건도 한 용인이 되었고 침입자들이 무슬림과
비무슬림으로 구분하여 샤하다(이슬람 신앙고백)을 암송하도록 강요한 점이다. 그제서야 당연히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할
세력으로서의 이슬람이 아니라 이슬람 무장 세력 즉 극단적 폭력단체가 보여준 것이 또 다른 이슬람의 얼굴임을 이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극단주의자들은 만데라(Mandera)와 라무(Lamu)지역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추적하여
살해하고 그리고 현정부를 옹호하는 무슬림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최근 유럽에 일고 있는 IS 폭력
사건에서 보 듯 지금의 케냐도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공항에서부터 파도처럼 밀려오는 무슬림 무리들을 보면 겁이 덜컹 날 정도이다. 중동과
소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까지 기독교 진영을 전멸하여 기독교 안방에 이슬람의 견고한 진을 구축한
이슬람의 확장을 보면서 이러한 글조차도 이슬람 포비아(이슬람 세력을 혐오함)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자의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이슬람의 확장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기독교 진영이 갱신되고 회개하고 정화되어
생명력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 뿐 아니라 자녀와 손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쇠락을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케냐는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영역을 주도했었다. 그러나
이슬람에 적극적인 무슬림들이 증가하면서 더 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고 그동안 케냐에 존재했던 오랜 종교적
화합을 유지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능력이 시험대고 있다.
역사에서 씨를 뿌리는 자가 있고, 개척자가 있고, 새로운 길을 여는 자들이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아프리카의 부흥을 보면 분명 이러한 날들이 올 것이 예견하고 씨를 뿌리고, 개척하고 길을 낸 자들이
있다.
케냐에 처음 길을 닦고 학교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멬케이(Alexander
McKay) 선교사가 그러하다.

Alexander McKay 선교사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하고 아프리카 신대륙의 존재를 탐험하고 다가오도록 만든 데이빗
리빙스턴이 그러하다.
또한 이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바라고 꿈꾸는 부귀와 영예와 명성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재산도 포기하고, 명예와 명성도 내려놓고 허드슨 테일러가 세운 중국 내지 선교회에서 사역한 찰스
스터드( Charles Studd)가 그러하다.
그러한 그가 중국 선교를 마치고 귀국길에 있을 때이다. 그는 인도에 들려 인도 선교에
헌신하고 그리고 그는 병약한 몸으로 영국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선교를 바라보며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신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WEC 이다.
찰스 스터드가 쓴 “오직 한번의 삶, 속히 지나가기 전”이라는 시구
가운데 이러한 시구가 나온다.
내 귀에 들리는 두 소절
부산한 여정
속에
심령에 들리는 확신처럼
내 마음에 떠나지 않는
단 하나의 생명도 속히 가며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 영원하리
단 한번의 생애, 그렇죠 오직 한 번
항해의 시간 마치면
그날에 주를 뵈오 리
그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단 한번의 생애도 속히 가며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 영원하리
단 한번의 생애, 아직도 작은 목소리일지라도
부드럽게 더 낳은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나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뜻만이 헤쳐 나가도록
단 한번의 생애도 속히 가며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 영원하리
-나머지 중략-
단 한번의 생애도 속히 지나갈 것이나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받을 수 있는 것은
정직과 깨끗한 마음과 거룩한 삶으로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했던 일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케냐의 나이로비를 떠나며,
주 앞에 선 작은 전도자 김종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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