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간다 황톳길에서
황톳길을 걸으니
발이 질질 끌립니다
날렵한 발걸음도
마들가리 바지 자락
가을 장마 마기질에
흙탕물 튀는 줄 모릅니다
땅은 깍이고
강둑도 깍이고
살갗숨 날숨따라
미련둑도 깍이니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한번 말 붙이면
친구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한번 미소 지으면
손 내미는데
자그락 노닥거리듯
차깔한 방안에서
홀로 기다립니까
외인의 장막을 헐고
안주의 자리를 뜨니
드넓은 하늘이 안겨주고
가로막을 산이 없으니
마을마다
산골마다
나다니는 이 발길
내일도
토막여행 떠나 보렵니다

이디 아민의 철권 통치로 나라의 이름이 알려진 곳, 길고 긴 독재 정치의 철권 앞에
자유라는 존엄성을 박탈당한채 살아온 1970년대 자유의 물결이 일것으로 기대했던 나라. 그러나 곧이어 수립된 정권이
지금까지 정당이 허용되지 않는 철권 정치의 세월을 견디고 서 있는 나라가 있다.
콩고 민주공화국에도 자유 바람이 불고, 민주의 촛불은 케냐에서 터지고, 인종청소 뒤에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르완다는 기지개를 펴며, 브룬디는 새로운 국가 재건에 나서고, 심지어 사회주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민주 정부를 세운 탄자니아가 주변에 있건만 우간다의 봄은 어느때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긴 터널 뒤에 세계가 주목하는 영적 중흥기를
맞이하고 나라가 우간다임은 분명하다. 우간다에 일고 있는 놀라운 부흥을 말하기 전 우간다라는 나라는 어떤 곳이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한 배경이 이해되면 지금의 놀라운 부흥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파악될 것이라 믿는다.
사하라 지역을 다니다 보면 지중해서 기후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도시는 사막의
생존지역인 오아시스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오아시스가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수자원이 풍성한 나라가 바로
우간다이다. 전국토에 넘쳐나는 호수와 늪지대 그리고 풍요하고 비옥한 땅을 가로지르는 강들은 분명 우간다를 “녹색
진주”라는 별칭을 얻기에 충분해 보인다.
남서쪽으로는 탄자니와 르완다를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콩고민주공화국을 접경하며, 북으로는
수단 그리고 동쪽 그리고 남동쪽으로는 세계에 잘 알려진 빅토리아 호수가 자리잡고 있고 이는 동쪽으로는 케냐는
동남쪽으로 탄자니아를 맞대고 있다.
케냐처럼 전국토가 아프리카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놀랍게도 해발고도가 1800미터
이상이 많아 매우 신선할 뿐 아니라 산과 계곡이 많다. 서쪽으로 국경에는 화산지대인 비룽가 산맥, 루웬조리 산맥이
있다. 우간다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에서 갈라져 나온 서부지구대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엘버트 호수와 엘버트 나일 강이 바로 서부지구대에 나온 것이다. 비룽가
산맥에서는 무하부라 산이 무려 4,126미터를 넘으며 루웬조리 산맥에서는 마게리타 산이 최고봉인 5,109미처
만년설을 뽑내고 있다. 동부 쪽에는 엘곤산으로 4,321미터의 고도를 자랑한다.
지도에서 보아도 온통 호수 투성이인 우간다는 가장 큰 빅토리아 호수를 필두로 앨버트
호수, 키오가 호수, 조지아 호수, 비시나 호수와 에드워드 호수 등 너무나 많은 수량을 품은 풍성한 수자원을
자랑한다.
케냐와 탄자니아와 우간다 3개국을 접경하고 있는 빅토리아 호수는 북미의 5대호의
수페리어 호수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한 빅토리아 나일 강이 키오가 호수를
지나서 또 다시 앨버트 호수를 통과하여 다시 앨버트 나일강으로 흐르며 이는 백나일(White Nile River)
이 되어 지중해로 흘러 나간다.
비옥한 토양을 자랑하는 우간다는 풍부한 지하자원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국립 박물관에서
보여 주듯 석유자원도 생산한다. 철, 알루미늄이 풍성하다. 구리도 풍성하나 여러이유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고원지대에 수많은 호수는 우간다의 기후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이는 온화한 아열대 기후를
가져온다. 수도 캄팔라를 중심으로 1월 최고 기온 28도, 7월 25도로 매우 신선한 날씨를 보인다. 우간다는
중부와 북부 지역에는 사바나로, 남부는 농경지대로, 나머지는 드문드문 숲과 목초지를 갖고 있다.
케냐처럼 다양한 형태의 국립공원을 갖고 있는데 비용은 절반이나 3분의1도 안될 정도로
경비가 저렴하다. 면적이 3,885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최대의 카바레 국립공원이 있는데 이를 머치슨 폭초
국립공원이라고도 부른다. 이외에도 사냥이 금지된 지역과 크고 작은 국립공원들이 여러개 있다. 이 국립공원에는
케냐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야생의 상태로 살아간다.

우간다에는 케냐처럼 수십개의 종족이 존재하며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케냐처럼 반투족이
전국민의 70%를 차지할 정도 다수이다. 그 다음을 따르는 종족으로 간다 족이 있고, 소가족, 은콜레족, 키카족,
기수족, 르완다족 그리고 니오로족등이 있다. 나일 함족계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은 주로 북쪽에 몰려 있고 그들 부족은
아촐리족, 랑고족, 테소족 그리고 카라모족등이다. 하지만 케냐처럼 영국 식민지의 영향으로 영어와 스와힐리어 그리고
부족언어가 섞여서 사용된다.
우간다는 평균연령이 세계에서 가장 낮고 젊은 국가 1위이다. 이와 더불어 전기사용량이
세계에서 제일 적은 나라일 뿐 아니라 전국민 가운데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인구가 10%에 불과하다. 이는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를 공급하는 전선주 건설이 요원하기에 늘 정전을 달고 산다.
캄팔라 수도인데도 나는 계속 정전을 수도없이 경험해야 했다.
또한 에이즈 감염률이 세계 1위일정도도 질병 감염에 빈약하다. 이러한 지표는 농업을
근거한 국민경제가 세계에서도 가장 낮은 빈국 중에 빈국으로 케냐의 절반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642불(2017년
통계)이다. 정치적 내전과 부정부패와 불안정으로 1970년대부터 1980년 중반까지 이미 있었던 농업과 공업
생산마저 급감하였다.
1990년 중반 이후 부터 우간다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수출에 주력하였으며
국제통화기금 (IMF)와 같은 국제 통화기구들과 관계를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디 아민(1971-790의 통치기에
몰수를 당했거나 추방당했던 인도인들과 사람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돌려 주었다.

자 이제부터 우간다의 부흥을 말해보자!
우간다에 일고있는 부흥의 불길은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지표까지 바꾸어 놓았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는 주일이 아닌 평일에도 찬양소리와 생방송 예배 현장을 생중계하는 라디오 방송으로 부산하다. 세워진지
불과 2년 밖에 안된 가나안 기도의 집(Canaan House of Prayer)은 평일에도 수천명의 인파가 매일
드리는 오전, 오후, 저녁 집회로 임시로 친 텐트 안은 붐빈다. 탁트인 주차장에도 수많은 차량들이 가득하다.
가나안 기도의 집교회는 85,000 명의 교세를 가지고 있다. 빅토리 교회(
Victory Christian Center)의 기도 담당 목사였던 그가 라디오 설교를 통해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면서 우간다 전체에서 제일 큰 교회로 무섭게 성장하였다. 두번째로 큰 교회로 알려진 미라클 센터(Miracle
Center)는 25,000명의 교세로 수천명이 들어 가는 성전도 모자라 바로 옆에 대형 텐트를 치고 매일 여러번의
예배와 기도회를 열고 있다.
오메가 힐링 센터(Omega Healing Center) 교회는 들어 갈 수 있는
만명이 가능한 새로운 성전을 짓고 있는 중이다. 그 규모도 엄청나지만 지금 드리고 있는 교회가 우간다 전통의 나무로
천정 구조를 만든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 교회이다. 하지만 매주 화요일은 셀그룹 모임으로, 매우 월요일은 전도와
제자훈련으로 그리고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는 교회로부터, TV
방송을 중계하는 교회에 이르기까지 방문해 본 10여 개 교회 모두 매일 이른 아침, 오전, 정오 기도회, 저녁
기도회를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 드리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들 중 인상에 남는 교회가 만민회당교회(Synagogue Church of
All Nations(15,000명))와 크리스챤 라이프(Christian Life)교회이다. 특히 정오
기도회(또는 정오 예배)는 12시부터 3시까지 생방송으로 중계되며, 예배를 드리는데 참석인원도 천여명이 넘어
보인다.
생업을 하기도 어려운 이 가난한 나라에서, 이른 아침부터, 정오, 그리고 저녁에
이르기까지 만약 예배를 다 참석한다며 아이들의 교육은 어떠하며, 생계는 어떻게 벌 것이며, 가정 생활은 어찌
유지할지에 대한 궁굼증이 더해졌다. 장대비가 땅을 때리듯 내리는 와중에도 옹기종기 모여서 예배한 참석한 이들은 연발
“아멘”으로 화답한다.
기도하는 시간에 모두 각자가 몸을 흔들거나 움직이며 선포하듯 기도한다. 심지어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이조차 이 기도의 모습이 익숙한 듯 새근새근 조용하기만 하다. 많은 언론들이 우간다의 부흥을
말하는데 이 부흥이 진정한 부흥인가? 아니면 잠시 지나가는 종교적 열정의 현상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천막치고, 학교 운동장에서 또한 마을 광장에서 열리는
부흥회를 따라다니며 은혜 받았던 어린 시절이 떠 올랐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한국 교회는 그야말로 부흥의
중흥기였다.
어느 목회자든 개척 교회의 말뚝만 박아 놓으면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다. 지금
보면 밋밋할 수 있는 찬송가를 수십번 반복하면 부르고, 손바닥이 뚤리도록 박수를 쳐도 지루한 줄 몰랐다. 8세부터
매일 밤 철야기도를 해도 그토록 할 기도가 많았던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우간다의 부흥을 좀 더 찾아보고
분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복음주의 교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우간다에서 매년 수백만명의 회심자들을 배출할
정도로 번성하고 있다. 이는 우간다에 거의 2백년 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발을 내딛은 이후 지구상 어떤
나라보다도 가장 빠른 속도로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다.
이미 나의 저서 “남반구 기독교 부흥(The Rise of the Global
South)” 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70년대만 해도 사하라 남단 아프리카 대륙에 1억1천7백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어지만 지금은 3억 9천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고, OMSC를 인도하고 예일대 교수를
역임했던 조나탄 봉크 교수도 “지금의 아프리카 많은 환경들이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실제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이다. 아프리카에서 특히 우간다에서의 기독교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의 종교이다.
지금의 우간다 상황은 불과 5년전과 비교하여도 케냐의 기독교가 급변하였듯이 거의 빛의
속도로 변화하며 성장하고 있다. 남북한 전체 면적의 10% 정도 더 되는 땅이 24만 평방 킬로미터의 국토는 여타
아프리카 나라들을 본다면 영토가 그리 큰 나라는 아니다. 가장 빠른 속도의 인구증가율을 보이는 나라답게 어느새
인구는 3천7백 8십만명을 넘어섰다. 우간다 인구의 적어도 다섯명당 한명은 ‘중생한 그리스도인(Born Again
Christian)”이다.
이들중에는 정부 고위관료, 젊은 목회자, 연예인들과 중고등 및 대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을 포괄하고 있다. 우간다 대통령의 영부인인 자넷 무세베니(Janet Museveni)도 중생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으며 그녀는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전 무세베니 대통령이 다니던 교회는 동성애에 관한 문제로 교회는 급감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우간다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형태의 복음주의 교회, 아프리카 독립교회, 순복음 교회(Full Gospel,
여기에서 순복음은 오순절 교단인 한국의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같은 하나님의 성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초교파적 교회를
총칭함), 오순절 교회, 은사주의 교회와 기도의 집 교회등이다.
이러한 교회들은 나름대로 해외에 연관성을 갖고 있다. 미국 전통의 흑인 부흥사들을 롤
모델로 하는 교회들이 많아 심지어는 교회 이름부터 설교의 내용과 제스처까지도 그대로 모방하는 교회들도 많다. 미국
주류 백인 부흥사들을 롤 모델로 하거나 번영복음의 메세지와 형태 그리고 목사의 설교 모습까지도 모방하고 따라가는
교회들이 많다. 우간다 최대 교회의 목사조차 신학교육을 받아 본적도 없지만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본인은 이렇게 큰 교회를 할 줄 예상도 못했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기에
대부분 목회자들의 메세지는 축복과 신유, 기적과 능력, 번영과 변화를 줄 수 있다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조차도 어려운 설교를 소화하기 어렵기에 쉽고도 매우 반복적인
설교를 듣는 경향이 농후하다. 지난 20십년 동안 지속되었던 내전의 여파로 우간다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북부
지역은 그 폐해가 대단하였다.

그럼으로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의 오랜 선교의 배경와 사역을 보아 온 우간다 교회들도
인도주의적인 역할을 자청하고 있고, 학교를 세우며, 진료소와 고아원등 세워 수도인 캄팔라로부터 북부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구조활동이나 구호 활동을 하는 단체들조차도 교회가 들어서서 그 지역 공동체를
섬기고 도와 주기를 바랄 정도로 교회들의 영향력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아직도 미국 선교부를 통해 재정적
지원을 많이 받고 있기에 에이즈 퇴치 교육 사역이나 의료 진료소 설립, 간호 대학, 의과대학, 그리고 공동체 개발
사업등이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유럽과 한국 선교사들의 사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교회를 복사하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보이는 우간다 교회는 정치적 영향력도 대단하다. 마치 케냐의 교회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경향을 볼 때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이 우간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나타난다.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미국 지원의 반에이즈 전략에 대해서 콘돔을 사용에 대한 금욕주의적
경향을 우간다 복음주의자들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부시 대통령 당시 2년 동안 금욕 프로그램을 위한 보조
비용은 2년간 받은 돈이 무려 2억3천9백만 달러였다.
이 액수는 가장 큰 액수였으며 금욕 프로그램은 ‘반에이즈 구출
프로그램(AIDS-relief program)’이란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우간다 교회가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것은 복음전도나 개교회 성장에 연관이 있기만 크게 이러한 운동이 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반에이즈 캠페인은 교회 성장에 큰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우간다는 에이즈 HIV(AIDS HIV) 감염률이 전국민의 15%에 이를 정도로 세계에서 최고였던
나라이다.
우간다 정부의 지원하에 교회들이 우간다 국민들에게 질병(에이즈)에 대하여 교육하고
새로운 갱신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2002년에 이르러서 에이즈 감염율은 7퍼센트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에이즈
최대 감염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200년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간다의 이슬람 인구는 12%에 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만으로는 무슬림들의 존재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기에 자연적 무슬림 인구 증가가 급격하며
사우디와 리비아(이전에는 가다피가 아주 적극적이었음) 그리고 중동과 터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지역에 이슬람을 심어
샤리아를 법제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간다 모든 마을이 있는 곳에
매4킬로마다 모스크를 세우고 있고 시내 중심가 뿐 아니라 어디를 가도 모스크의 위용은 진실로 대단하다.
캄팔라 수도 중심을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가다피 모스크(리비아 독재자 가다피가
후원했기에 그의 이름 따라 지음)와 이슬람 대학 및 이슬람 지원을 받는 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의 급격한 성장은
더 이상 나몰라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동아프리카 최대 난민 유입의 창구인 우간다는 수단과 소말리아를 비롯해 주변
각국의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급격한 이슬람 난민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슬람 세력은
개신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우간다 사회 속에서 특히 우간다를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는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슬람을 비방하는 개신교회 지도자들은 두개의 TV 방송국과 7개 이상의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슬람권에서는 개신교 주도의 방송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불평을 과대해서 이슬람에 대한 근거없는 거짓말들을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터뜨리고 있기도 한다. 이슬람의 급격한 세력화에 대해서 황당하고 근거없는 거짓말을 교회 지도자들이나 또는 부흥사들이
퍼뜨리는 행위는 궁국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지향해야 할 우간다 기독교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대영제국 당시에 들어 온 인도인들을 비롯해 무서운 속도로 아프리카 거의 모든
나라의 건설 현장을 누비는 중국 노동자들과 남아공 사람들과 외국인까지 배척으로 운동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증가하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경향은 아프리카 전통 종교를 기독교와 혼합하거나 기독교가 종족
종교화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현존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간다의 부흥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디 아민과 그 이후에도 지속으로 진행된 독재의 긴 통치 속에는 신음하는 민초의 억울함과 고통, 비탄과
탄식이 섞여 있었다. 1970년대 무슬림이었던 독제자 이디 아민(Idi Amin)하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기독교에 편향적인 정부로 인해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에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서로 어색한
입장이 되었다. 이슬람의 매우 중요한 이맘은 첫번째 부인과의 합의하에 두번째 부인을 갖게 하는 것을 금지한 법안을
법제화할 때 지하드를 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으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과 기독교인들간의
반목은 가장 악화되고 있다.
우간다의 놀라운 부흥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다. 우간다는 “아프리카의 진주((Pearl
of Africa)라는 칭호를 얻은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찬사를 바라보면서 이러한 부흥이 자생적이 부흥인지 아니면
미국 주도하에 일어난 미국적 부흥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생적 부흥이라면 우간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빛을 비출 등대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로저 롤스 윌리암스(Roger Rolls Williams)의 다큐멘터리 영화 “하나님이 우간다를 사랑하신다( God
loves Uganda)”와 우익 기독교에 분위기와 동성애 혐오 가운데 동성애에 대한 갈등(오바마 대통령과도 크게
쟁점이 되었던 부분)을 그린 영화 “쿠추라고 불러 주세요(Call Me Kuchu)”와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이 두영화는 우간다에서 스스로 게이임을 밝힌 데이비 카토(David Kato)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는 동성애 행위로 감옥에 가고 반복적 동성애 공격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법령에 대한
새로운 법개정을 제안하였다. 이 두편 다큐 영화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와 반서방주의 감정이 백인들에 의해서 들어오고
자양분이 되어진 종교적 도그마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만들어진 공존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러한 동성애 논쟁은 우간다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보수적
성향과 오랜 아프리카 전통과 관습 즉 우간다의 전통적 문화도 매우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우간다 교회의 배후에는 제도적 식민주의는 떠났으나 후기 식민주의의 많은 영역을 타파하고 전략적이고 신학적 식민주의
새롭게 건설하는 서구 선교사들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의 우간다 교회를 들여다 보면 젊은이들의 새로운 사고와 기성세대와 다른 모습의
신앙형태는 현미국 대중적인 교회에서 파도처럼 파송한 젊은 미국 선교사들과 교회의 영향이 많음을 보여준다. 미국
교회의 영향 아래 로버트 카얀자(Robert Kayanja), 마틴 쎔파(Martin Ssempa)와 미국에서
자라났거나 또는 교육을 받고 돌아 온 젊은 목회자들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좀 더 고찰하면 1936년
동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부흥이 일어난 연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1936년 르완다를 중심으로 부룬디, 우간다 일부, 자이레, 탄자니와 케냐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었다. 이 부흥은 기독교 학교와 마을마다 번졌고 깊은 회개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오늘의 부흥이 일시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동부 아프리카의 부흥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가나
출신의 임마누엘 형제가 있었다. 그가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지금의 동부 지역의 선교 역사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우간다의 선교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오랜 기간 동안 서방 세계에 문을 닫고 우간다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우선 17세기말에 나일-햄족어 그룹들이 우간다 북부로 이주했을 때이다. 백년 뒤인 18세기
말에 남부까지 이들이 이주한다. 특히 아랍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 온 주 목적은 상아 무역과 노예 무역을 하기
이해서이다.
우간다 최초의 유럽 탐험가는 존 해닝 스피크와 제임스 오거스터스 크랜트인데 이때가
1862년으로 그들은 부간다 왕국을 횡단하였다. 무테사 1세는 1877년 영국선교회 선교회의 선교사들이 들어 올 수
있도록 허락한다.이때에 이르러서야 유럽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들오 올 수 계기가 되었다. 스피크보다 우리에게 더
알려진 탐험가는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그는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하고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 대륙의 꿈을 지펴주었다.
1875년 4월 데이빗 리빙스턴을 만나러 온 영국 기자인 헨리 스텐리(Henry Stanley)는 우간다의
옛이름이며 지금 중앙 우간다에 있었던 부간다 왕 무테사(Mutesa)를 만난다.
스텐리를 통한 매우 간략하게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무테사 왕은 매우 정열적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스텐리에게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서신을 보내 선교사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스텐리는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는 1875년 11월
15일에 이러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어떠한 경건하고도 실제적인 선교사들이 오게 하시오! 문명의 낫을 위한 무르익은 추수가
보이지 않나요? … 백성들을 가르치고, 질병을 치료하고, 우물을 개발함으로 기독교인이 되게 할 수 있는 실제적인
교사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선교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기사가 게재된 이후 첫번째 8명의 선교사가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가 1977년에 도착하였다. 이들에 의해 부간다 왕국의 무테사 카바카(왕)의
궁전의 신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었다. 무테사를 이은 므왕가(Mwanga) 왕은 궁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이전에는 왕에게 충성을 다하더니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모습에 매우 분노하였다. 므왕가왕은 기독교 선교회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지하였고 이들에게 죽음의 고통을 안겨 주겠다고 선언한지 1885년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순교자 가운데는 제임스 헤닝톤( James Hannington)이라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데 그는 동부적도교구의 첫번째 주교였다. 헤닝톤 주교는 부간다 왕국으로 동부쪽에서부터 선교 사역을 진행하였다.
불행하게도 우간다
왕국에는 적들이 왕국의 동부 루트를 통해 공격해 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헤닝톤 주교는 이 사실을 알리 없었다.
므왕가 왕은 용사들을 보내어 헤닝톤 주교들을 접촉하였고, 헤닝톤 주교는 “왕에게 말하시오! 나는 우간다를 위해
죽겠소”라고 말하였고 1885년 10월 29일에 죽임을 당한다. (Namirembe Cathedral)에 있는
묘비에 새겨져 있다.
1886년 6월 3일에 13명의 성공회교인과 12명의 천주교인를
포함하여 모두 26명을 죽일 것을 명령한다. 이날을 기념하여 우간다는 6월3일을 우간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지키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부 우간다로 죽음까지 감내한 그들의 용기, 희생과 복음증거를 기억하는 순례행렬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이 순교당한 지역은 나무공오(Namugongo)인데 순교자의 배출은 므왕가 왕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들 순교자들의 모습은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찬송가를 부르며,
적들을 위해 기도하며 아직도 남아 있는 기독교인들과 지켜보는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극소수에 불과했던 궁전과
전왕국에 놀라운 속도로 복음이 증거되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 순교자들은 기독교가 백인들의 종교가 아니라 진정으로 아프리카의
종교라는 지울 수 없는 감흥을 남겨 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아프리카 기독교 전파가 백인들에 의해 전해지기 보다는
아프리카 사람들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로 우간다는 아프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기독교
인구를 갖게되는 국가가 되었다.
어째튼 기독교를 핍박하던 므왕가 왕은 기독교를 다수로 믿는 간다족으로 도움으로 왕국을
유지하려 했으나 노도처럼 밀려오는 유럽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 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1889년 독일인 카를
페터스는 므왕가 왕과 보호조약을 맺게 되지만 1890년 영국은 이 보호조약을 무효화 시킨다. 1894년에 이르러
부간다(지금의 우간다)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1890년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우간다 전역에 해당하는 곳이 보호령이
된다.
1차 2차 세계 대전이후 1945년 아프리카 최초로 아프리카인에 의한 입법위원에
우간다는 참여하게 된다. 1955년에 영국식 각료체재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간다 왕국의 간다족 통치자는
이러한 정부 조직 구성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어서 전세계에 신생국들이 들어 서면서 부간다 왕국은 우간다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1962녕에 이르러서 우간다 전체 자치가 부여 되면서 간다족 출신의 베네딕토 키와누카가
초대 수상이 되었고 그해 4월에 선거를 통해 랑고족의 밀톤 오보테가 통치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해(1962)
10월에 우간다는 공식 독립국가가 된다. 1년 뒤에 부간다 왕국의 통치자인 무테사 2세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수상과 대통령간의 알력 다툼이 일어나고 또한 종족 분쟁들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1966년에 이르러 오보테는 무테사2세를 몰아내고 1년 후에 새헌법을 공포해 스스로
대통령에 오르면서 아직도 잔존해 있던 왕국을 폐쇄하였다. 1971년에 이디 아민 장군은 쿠테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오르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디 아민의 공포독재철권정치이다. 1972년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디 아민은 아시아인들을 강제 추방 재산을 몰수하였고 전임 정권의 호의적인 주요 부족들을 박해하였으며 또한
기독교인들을 한없이 핍박하였다.
1978년이 이르자 우간다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른다. 궁여지책으로 이디
아민은 1978년 이웃나라 탄자니아를 침공하는데 도리어 1년 뒤에 추방당한 무리들과 탄자니아 정부군에 의해
우간다에서 그는 쫒겨 나간다.
이후 추방당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연립 정부가 세워지고 1980년 12월에 신임 대통령에
오보테가 집권한다. 이디 아민을 몰아내는데 1등 공신이었던 요웨리 무세베니는 오보테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고 반정부
무장 투쟁에 들어간다. 그런 사이에 오보테는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아 경제재건에 힘썼으나 아촐리족과 랑고족의 갈등으로
추방되고 만다. 1985녀에 쿠테테가 일어나고 아촐리족 출신의티토 오켈로 장군을 정권을 접수한다.
그리고 해외에 머물던 요웨리 무세베니가 1986년 1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그는 친 서방 정책을 통해 경제 재건과 부흥에 주력하였다. 무세베니 역시 이디 아민처럼 독재정치를 행하는
데 그것이 1995년 정당설립 금지하는 헌법을 공포한 것이다. 1996년에는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그 뒤 의회가 구성되고 대통령 내각을 구성한다. 그러나 지금의 오랜 독재 정치는 케냐처럼 민주주의를 구가하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부흥의 배경에는 오랜 혼돈과 핍박 그리고 많은 역사적 질곡과 어려움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의 나타나는 형태는 아름답지도 않고 더 더욱 많은 혼동스런 모습과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그러기에 같은 부흥을 놓고도 조나단 에드워드는 감히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을 받았다. 찰스 피니가
받은 수모와 모멸은 열거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이다. 문제는 이 부흥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쇼맨쉽과 사람들의 갈망이 만들어 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간다에 시작된 기도원 (Prayer Mountain) 소식을 듣고
그곳을 방문하였다. 산꼭대기에 세워진 기도원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별로, 개인별로 기도하는 무리들이 꽤 있어
보였다.
중앙에 있는 개방형 예배당에서 수십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산 전체에는 여성용
숙소와 남성용 숙소 그리고 텐트 사이 사이에 수풀에서, 벤치에서 그리고 바닥에 무릎꿇거나 서서 기도하는 무리들을
종종 만나곤 했다.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저들의 기도하는 모습, 예배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때론 울부짖으면 기도하는
저들의 모습은 1970년대 한국 교회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긴 긴 철권 통치 가운데 우간다는 영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이제는 세계 선교를 위해
깨어나고 있음을 기도원 동산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캄팔라에 만연하고 있는 싸구려 상업주의 기독교의 모습,
말씀이 바탕되지 않는 번영복음, 은사와 축복 그리고 신유만을 강조하는 도구적 기독교, 그리고 신학교육의 부재와
교회사적 가이드 라인이 존재하지 않는 양적 부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 정상에 드려지는 기도는 우간다에
진정한 부흥을 주소서!라는 기도였다.
주여! 속히 부흥을 주소서!
우간다 캄팔라를 떠나며,
김종필 올림
PS.
1. 우선 저에게 이메일 답변을 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저에게
답변을 주시는 분들의 글을 읽노라면 이토록 자세하게 나의 글을 읽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힘을 얻습니다. 주변머리 없는 긴 글도 읽어주실 뿐 아니라 깊은 생각의 여울을 저에게 나누어 주실 때면 글을 더
진중하게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으며 잠자는 시간도 부족하고 인터넷 연결은
참으로 쉽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여 저의 글 가운데 부족한 면이 보여도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또한 수정할 사항이 있거나 의견이 있으면 가감없이 개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2.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제가 방문하는 나라마다 그 나라에 계시거나 또는 그 나라를
방문했거나 또는 방문하고 있는 많은 분들로부터 이메일 답변을 받습니다. 참으로 반갑고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마치
저와 함께 선교 여행을 다니는 마음 같아 홀로 있지 않다는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3. 저는 비자 신청의 문제, 재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그리고 다음 일정에 대한
준비의 문제 그리고 계속되는 국제회의 원고와 강의에 대한 부담을 안도 이번 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 부탁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