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4,  2017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 할 때에

예수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

천사들을 세계 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받는 성도들을 모으리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 하겠네

 

내 이름 부를 때

나팔 소리 크게 들릴 그 때에

모든 성도 일어나 주의 영광보리라

공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주의 사랑 찬양하라 주의 은혜 찬양해

밝고 환한 천국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다 함께 다 함께 천국 갈 때

우리 기쁨의 노래 부르리

주의 얼굴 뵐 때 승리의 노래 부르리

 

주의 약속의 땅에 가리라

주가 예비하신 그 곳

누가 나와 함께 가려오

주가 예비하신 그 곳 주가 예비하신 그 곳

 

내 이름 부를 때

나팔 소리 크게 들릴 그 때에

모든 성도 일어나 주의 영광보리라

공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

부를 때 잔치에 참여하겠네 

 

 

 

 

 

 

 

 

 

 

 

 

 

 

 

 

 

 

 

 

 

 

 

 

 

 

 

 

 

 

 
 

 

 

 

 

 

 

 

 

 

 

 

 

눈보라 휘몰아치던

어느 추운 겨울밤

나는 외로워 울고 있었네

 

길은 많아도 갈길 몰라

방황하던 길 잃은 겨울 나그네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내 마음 말 구유에 찾아 오셨네

 

캄캄한 바다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엽편주 인생길에 천국길을

환히 밝히는 등댓불이어라

 

2000여년 전 베들레햄 떡집에

생명의 떡으로 찾아오신 주님

영생의 소망으로 어두운 세상

밝히는 셋별이어라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님께 바친 동방 박사들

 

저도 주님께

사랑과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오신 주님

그 주님 내 마음에 계시니

나도 왕같은 제사장

 

기뻐 춤추며 송축하리라

성탄을 축하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세. 

 

 

Joy of Christmas

 

 

At an icy, chilly, dreary

Winter night of blizzard,

I was sobbing in solitude

 

When I was a stranger going astray

In the wilderness,  

 

Jesus Christ who is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Came upon the manger of my heart

As a good Samaritan

 

During the pilgrimage of my life

Like a tiny boat drifting at the mercy of the wind

Upon the boundless ocean in pitch-black darkness,

 

My Lord, You are the lighthouse

Beaming on me to show hope of eternity

About 2000 years ago,

 

Your incarnation in Bethlehem on earth as bread of life

Was fulfilled according to the prophecies of the Bible.

You are the Morning Star shining light

Upon the people in despair, chaos and void

 

To give Your good news

Magus from the east came to Bethlehem to worship you

Bringing gold, frankincense and myrrh

 

And I worship you as well, singing praises:

You are the king, the prophet, and the high priest

 

My Lord, my Savior!

You dwell in my heart, Rain or shine.

Now I am a royal priesthood,

 

I am exalting You on high, dancing and rejoicing

To celebrate Your wonderful birthday!

                                               

                      Translated by Soo Y. Kim

 

 

 

 

 

 

 

 

 

 

 

 

 

 

 

 

 

 

 

 

 

 

 

 

 

 

 

박영선 목사가 지은 [구원 그 이후]라는 책이 신앙생활에 신선한 도전을 주었듯이 [크리스마스]도 중요 하지만 [크리스마스 그 이후]는 더욱 중요합니다..

 

사실 성탄의 모습을 전해주는 복음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분위기는 실제로 초라했었습니다.

 

성탄은 이 세상에서의 구원 사역의 시작입니다. 이 성탄을 시작으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인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 천국을 전파하시면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자신의 생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저들을 부르셨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사람을 낚는 일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우리를 통해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탄 그 이후, 각자 삶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인류 구원 역사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동참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성탄 그 이후의 시간은 구입했던 물건을 반품하는 북새통을 이루며 바쁩니다.

 

미국 전국소매협회(NRF)에 따르면 올해 성탄절을 맞아 판매된 상품 가운데 반품이나 교환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이 38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8%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NRF는 성탄절을 계기로 받은 선물 중 1개 이상을 반품하려는 미국인이 전체의 40%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성탄절은 12월 25일 성탄일(Christmas Day) 하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Advent)로부터 시작해서 크리스마스 그 이후 12일 동안 계속되는 절기(Season of Christmas)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매우 소중한 절기입니다. 대강절 절기의 소중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심을 믿고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하신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요 약속이 이루어진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대강절과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기다림”과 약속이 “이루어짐”을 기리는 소중한 두 가지의 다른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한 가정에 오랫동안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려 오다가 마침내 아기가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려온 설레임의 시간도 소중하지만 그냥 그런 기다림의 시간만 연속된 것이 아니라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아기가 태어나면 그 기쁨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려온 설레임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가정의 식구들은 물론이려니와 그 가정이 오랫동안 아기를 기다려 온 것을 아는 친구들이나 이웃들도 함께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이를 축하하고 축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한 이웃들이나 친구들 대부분은 아기가 태어난 것을 그렇게 축하하고 축복하는 것까지만 하고 다시 자기들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가족은 친구나 이웃들과는 다릅니다. 가족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기가 태어난 것 기뻐고 즐거워하는 것은 친구들이나 이웃들과 같지만 가족들은 친구와 이웃이 떠난 후에도 새로 태어난 아기와 함께 합니다.

 

아니 태어난 아기와 함께 할 정도가 아니라 태어난 아기로 인해 가정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난 아기가 중심이 되어버립니다.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기준이 새로 태어난 아기가 됩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우리에게 오신 주님이기 때문이라면 우리의 삶은 주님이 기준이 되어 삶의 중심이 바뀌어야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이 하시고자 하는 구원사역이 우리 삶의 중심이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오겠다]고....... 재림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그 이후]의 삶은 궁극적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맞이 할 준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다시 오실 재림 주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한 소란스러운 성탄절은 세속적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열심히 살다가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처음 오실 때는 구원 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언) 

 

 

 

 

 

 

 

 

 

 

 

 

 

 

 

 

 

 

 

 

 

 

 

 

 

 

성경은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러한 성경구절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9-11)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6)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7)

 

우리는 이러한 성경구절을 통하여 예수의 재림이 우주적이며, 인격적이고, 형태적이며, 가시적(可視的)이고, 영광적인 형태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다른 존재나 대리인이 아니라 직접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언)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Esau)는 자신의 동생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장자로서의 엄청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이다.

 

구약에서 “장자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제공되었는데,

아버지의 유산에서 두 분 깃을 취할 수 있었고(신 21:15-17),

아브라함의 복을 물려받을 수 있었으며(창 12:1-4),

가족의 머리로서 축복하기도 하고 예언하는 선지자로서의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창 20:7; 27:28,29; 48:8-22; 49:1-33; 50:24,25).

 

심지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할 수도 있었다(대상 5:1,2). 그러나 에서는 이러한 특권들 중 단 한가지도 향유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자신 안에 가득했던 육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기 때문이다.

 

창세기 25장에서 에서가 야곱과 주고받은 경솔하기 짝 없는 이 육신적인 거래는 그야말로 순간의 제단 위에 영원한 것을 희생시킨 본보기가 되고 말았다. 성경은 에서의 그와 같은 경솔한 행동의 원인이 “장자권을 경시한 것”에 있었다고 말씀한다(창 25:34).

 

히브리서에서는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를 『속된 자』라 부르고 있다(히 12:16).

“속된”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profane”은 “성당의 문 밖”을 의미하는 중세 라틴어 “프로파에누스”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것은 자기 몸의 절반은 하나님께, 나머지 절반은 세상을 향해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솜씨 좋은 사냥꾼으로 활약했지만 자신의 육신적인 만족을 위해 엄청난 특권을 팔아 버린 에서의 모습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고, 주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특권을 저버리며 살아가는 “속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 역시 에서가 자신의 장자권을 경시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도로서 누려야 할 특권을 경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권”이란, 그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 외에는 그것을 누리거나 향유할 수 없는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권리를 뜻한다.

특권을 악의적으로 남용한다든지, 부당한 방법으로 탈취하여 부정한 권리를 행사한다든지 등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그 특권을 지닌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감사함으로 향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은 무엇인가? 많은 것들을 열거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만 제시해 보겠다.

 

 

 

 

우선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기 원하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들을 행함이라』(요일 3:2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막 11:24).

 

믿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기도는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특권 중의 특권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말씀하는데, 다시 말해 하나님께 항상 밀착해 있으면서 그 특권을 쉬지 말고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이지만, 이 교회 시대 마지막 때에는 마지못해 건성으로 기도하거나 아예 기도하는 것조차 고의적으로 잊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허다하다. 그렇기에 영적인 능력을 상실한 채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스왈드 스미스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약골’로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무작정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고 합당하게 드려야 한다. 자신의 정욕에다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는(약 4:3)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의 기도는 끈질겨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에 찾아와 빵을 달라고 끈질기게 문을 두드린 친구나(눅 11:5-8), 원한을 갚아 달라며 불의한 재판관을 귀찮게 했던 과부의(눅 18:2-5) 이야기를 통해 그분의 자녀들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끈질기게 나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들을 제쳐 두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는 불평만 늘어놓으면서 기도하기를 중단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권을 저버린 매우 비참한 사람이다. 성도가 기도를 쉬거나 게을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기도의 특권을 경시하고 살아가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의 육신만을 의지한 채 세상을 살아 보려는 어리석은 불신의 태도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한 통계에 의하면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1초에 약 3명씩 죽는다고 한다. 오늘날 세계 인구를 약 74억 명(2017년 1월 기준)으로 추산할 때, 하루 동안에 그 중 26만 명 정도가 죽는 것이며, 한 달이면 약 780만 명의 혼이, 일 년이면 약 1억 명에 달하는 혼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수치상으로만 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옥의 대기(待機)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으며, 또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죄인들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권하고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복음 전파”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맛본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특권을 신실하게 사용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풍성하게 보상해 주시는데, 곧 자랑의 면류관으로 보상하신다(살전 2:19).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자랑의 면류관을 보상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내 『오 주여,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 이는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으며, 또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큰 소리로 찬양하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면류관을 다시 그분의 보좌 앞에 기쁨으로 던져 드리게 될 것이다(계 4:10,11).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이 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복음 전파의 특권을 충실히 향유한 성도만이 동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의 가치를 아는 자들로서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위대한 특권이며, 동시에 하늘의 시민권을 지닌 자로서 다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천하보다 귀한 혼을 그리스도께로 신실하게 인도해 오는 사람이야말로 하늘에다 썩지 않을 금, 은, 보석 등의 보물들을 쌓아 놓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반면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여 전파하기를 꺼려하거나 주저하는 자들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귀한 씨를 가지고 나가서 우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의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라는 말씀에 결코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으며,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을 경시하는 가운데 헛된 일에만 분주하다가 어리석게 인생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잠시 거하는 삶을 전부라 생각하지 않고, 장차 다가올 세상과 영원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와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듯 확실하고 영광스런 미래를 대비하면서 “영원의 관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 역시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특권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순간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곳곳에서 말씀하신다. 자신의 특권을 평가 절하했던 에서는 영적인 복을 육신적인 것에 팔아 버린 비참한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가 영원한 것들을 내던지고 눈앞의 현실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죄 가운데 살며, 세상의 향락과 육신의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영원한 유익을 팔아먹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과연 그러한 인생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다가올 영원한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순간의 제단 위에 영원을 희생제물로 드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죄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썩어져 버릴 이 땅에서의 장밋빛 인생만을 좇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순간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만족을 잠시나마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게  된다. 그야말로 순간을 위해 영원을 희생해 버린 꼴이다.

 

또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 살지 않으면, 그 역시 영원에서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모든 상급과 유업과 영광이 전무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만을 추구하느라 바쁘게 살고 있다면, 그는 세상과 함께 불타 없어질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영원을 희생했던 에서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매 순간을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끝없는 영원과 찰나적 순간을 맞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무한한 시간 개념을 한번 상상해 보라... 참으로 그것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특권으로 주어진 영광스런 “현실”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이나 형식적으로 종교 놀이만 하고 있는 교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특권을 행사하거나 향유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특권들을 마음껏 향유하도록 하자.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자기가 지니고 있는 특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진짜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이며, 자신의 특권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향유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의 약속을 경시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신 특권을 경시하지 말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향유하면서 하나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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