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종종 무슬림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든가, 혹은 한 선교사님이 이슬람 국가에서
15년 동안 사역을 하시고 10명의 무슬림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기독교가 무슬림 전도에 제대로 된 전도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의심이
납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이스라엘로 내려오셔서 3년
반
만에 200명 이상의 믿음이 깊은 제자들을
키우시고, 2000년 후에는20억이 넘는 기독교인을 내놓으신 영원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전도를 하신 것일까? 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이 시점에서 제가 관찰한 두
가지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 째는 소위
말하는 세계의 위대한 종교가 장악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기독교가 발을 부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이 그렇고, 힌두교 국가들이 그렇고, 동남 아시아의 불교 국가들이 그렇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선교사님들의 활동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일본이나 대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나라들의 기독교 인구는 오랜 세월의 기독교 선교 활동에도 불구하고 1-2% 혹은 그
이하입니다. 이것은 제가 처음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기독교 역사 학자Kenneth S. Latourette
박사가 그의 역작인 A History of Christian Expansion이란 저서에서 이미100여년 전에
관찰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종교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내적 인간과 내적 관념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과거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하고 특별한 대화법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타종교인에게 선교나 전도할 때는 특별한 대화법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영향력있는 심리학자Carl Ransom Roger는
A
Way Of Being이란 그의 저서에서 자신의 심리 상담을 통한 대화의 경험을 근거로 인간의 성품을 건전하게 바꿀 수
있는 좋은 대화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listening empathically (공명해서 듣고),
an acceptance or prizing of the other (상대방을
존중해서 용납하고),
and genuineness (그리고 솔직함으로서),
in experiencing and giving of love (사랑을 경험하고
주어야 한다)” 라고 설명합니다.
간략히 줄이면, empathy (공명), acceptance (용납), 그리고 telling
the truth (진리를 말하기를) in love (사랑안에서 하면), 성품을 바꾸고 인간의 변화를 갖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약자로 “eat
- E. A. T. in love”라고 표현합니다. EAT는
empathy, acceptance, 그리고 telling the truth의 약자입니다.
Carl Roger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대화법은 바울 사도의
“speak the truth in love. (진리를 사랑으로 말하라)”라는 가르침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기독교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타종교인들에게 전할 때 이런 훌륭한 대화법을 사용할까요? 불행히도
저는 선교사님들이 그러지를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님들은 그저 복음만 전하면, 진리만 말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성경과 예수님의 사역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가 복음과 누가 복음에 중복된 구절을 제외하고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12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말만 따르라”고 하신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만 따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두번째 관찰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주위
사람들에게 전도하셨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따르라” 하셨지 “내 말을 따르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의 삶을 따르고 당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도하신 방법을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 생활의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이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 한 영역이 바로 타 종교인들에 대한 전도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전도하셨는 지를 살펴 볼까요? 예수님이 고대 이스라엘인들을 가르치실 때는
항상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원하시면 복음서의 진리만을 따로 가르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르치셨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비법이고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이
중요시하지 않는 점입니다.
그러면 구약으로 시작해서 가르치신 것이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구약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최고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을 사용해서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인들은 예수님을 구약과 똑 같은 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복음 4:32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마태와
마가 복음서 역시 똑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Carl Roger의 말을 빌리면, 예수님은 구약을 사용함으로해서
이스라엘인들과 공명하시고 (empathy), 그들을 용납하시고 (acceptance),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telling the truth).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인들이 최고의 권위로 생각하는 구약을 사용함으로서 사랑으로
E. A. T 하셨습니다.
이에 반해서, 대부분의 기독교 선교사님들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려고, 진리만 전하려고 합니다.
E 와A, 공명과 용납을 잊어 버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구약을 사용하시지 않고 사역을 하셨다면 3-4년에 사역을 마치시지
못 하시고, 현재의 기독교 인구가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
세계의 다른 위인들의 예를 보면 20년 내지 40년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발판으로 사용하셔서 사역을 짧은 시간에 마치시고 후세에 더욱 큰 영향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전에 구약을 사용함으로서 20세기의 가장 진보된 대화법을 이미
사용하셨고 또한 가장 큰 권위를 받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현대의 기독교 선교에서는 어떻게 예수님의 방법을 따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전도 방법을 따르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코란을 사용해야하고,
힌두교도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힌두교의 경전인Veda, Upanishad 그리고 Gita등을 사용해야하고, 불교도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금강경과 같은 불경을 사용해야하며, 유교의 인본주의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논어와 같은 유교의 고전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저는 이 결론을 얻은 후 기독교 선교의 방법론에 대한 신학적인 논문을 EMQ라는 Mission
Journal에 기고할 계획입니다.
여러 목사님들께 논문을 쓰기전에 먼저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2010년에
COTARI를 설립한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무조건 복음만 전하는 방법이 전혀 무효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권에 속한 지역에서는 이 방법이 매우 주효했습니다. 고대 유럽의 로마 주변
민족들은 종교다운 종교도 없었고, 그들에게는 로마의 문명은 동경의 대상이 었습니다. 기독교의 성장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복음만 전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기독교가 성장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Kenneth S. Latourette 박사가 지적했듯이, 복음만 전하는 전도
방식이 세계의 중요한 종교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완전히 무기력합니다.
현재 존재하는 중요 종교들은 엉터리 종교가 아닙니다.
세계의 중요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혜택을 몸으로 경험하고 그런 종교를 바탕으로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자신들의 최고의 영적 권위로부터 기독교를 따라야겠다는 믿음이 오지 않는 한, 그들이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인도의 한 구루가 한 말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300년 이상
지배했지만 인도가 영적으로 새로운 것을 배운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타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예수님의 구약을 쓰신
방법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Perspectives 선교학 강의를 들으신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최근에 두가지 새로운 선교 방법이 개발되었습니다. 바로 무슬림 전도를 위해서 개발된 C5 Movement와 Insider
Movement 입니다.
이 선교법들은 E와 A , 즉 무슬림들과의 공명과 용납에 중점을 두고 진리를 전하는 데는
이슬람교와 많은 타협을 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학자들이나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아랍 사람들이 이 방법들이 융화
주의, syncretism에 빠진다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 선교사들이나 학자들은 이 새로운 선교 방법들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사생아인
Chrislam을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이 방법들보다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타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방식대로 전도하는데, 어떠한 구체적인 방법을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다른 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약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타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면,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타종교의 경전들을
잘 아셔서, 그들의 경전으로부터 시작해서 복음을 전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배우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우리들의 차이 때문에 우리가 타종교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타종교의 경전을 공부해서 알아야 합니다. 무슬림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코란을 성경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힌두교도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Vedas, Upanishads, 그리고 Bhagavad
Gita를 성경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불교도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불경을 성경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유교적 인본주의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유교의 고전들을 성경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이 방법은 중국의 손자 병법과도 일치합니다: “만일 우군과 적군을 모두 알면 100 번 싸워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나, 우군만 안다거나 적군만을 안다면 100 번 싸워서 50번밖에 이기지 못 하리라.”
타종교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한 첫번째 project로서 2년 전에 “성경을 통한 코란의 해석”
이란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코란은 성경과는 달리 이야기 (narrative)로 엮어
진것이 아니라 잠언서와 같이 모두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명령만 있기 때문에 배경이나 문맥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멋대로 해석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성경과 코란이 정반대인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이슬람교에서 쓰는
코란의 해석 방법이 잘 못 되었습니다.
이슬람이 잘 못 된 해석 방법을 쓰는 것은 16세기에 종교개혁전에 카토릭교회에서 성경을 잘 못
해석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슬람에서는 무하매드가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적용한 해석을 벗어 나지 못 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카토릭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잘 못 된 해석의 결과는 면죄부를 팔고, 교직자들의 직책을 돈을
주고 팔며, 교황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고, 마리아를 숭배했습니다.
오늘 날의 이슬람교 역시 16세기의 카토릭 교회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란에서는 처녀를 사형시키지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코란에 처녀들은
Paradise에 간다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코란이 처녀들을 처형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나 결혼한 여자들과는 달리 처녀들은 죽은 후에
Paradise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Paradise의 처녀들을 종종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이란 혁명후 외국에서 교육받은 여자들을 처형하기 위해서 모두 잡아 드렸습니다.
코메니와 이맘들의 생각에 외국에서 교육받은 못 된 여자들을 Paradise에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Basiji guard들을 보내서 모든 여자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하도록 시켰습니다.
그후 여자들을 모두 간통죄로 몰아서 처형했습니다. 여자들이 항소를 해도 여자의 권리는 남자의
반이기 때문에 여자들의 항소는 무시됩니다.
코란에서 처녀가 Paradise에 간다는 원래의 의미는 이런데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세미나를 할 수 있고, 코란을 어떻게 무슬림 전도에 사용할 수
있는 예들을 들기 전에, 제가 하는 이 project(Power
Point-자료)의 몇 가지 혜택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코란을 사용해서 무슬림들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과거에 사용되던 “bridge 선교”나 “insider movement” 혹은 “C5
movement” 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기독교 선교에 이 새로운 방법이 꼭 필요합니다.
둘째로, 이 project를 통해서 이슬람교의 개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이슬람교는 골수까지 썩은 종교입니다.
이슬람교는 코란에 있는 대로 실천하지 않습니다.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코란이 이렇게 말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을 가르칩니다.
온건파 무슬림들은 코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의 잘 못 된 가르침에
대항해서 맞 설 수가 없습니다.
카토릭 교회가 14세기 동안의 부패후에 개혁이 필요했듯이, 이슬람교 역시 14세기 동안의
부패후 개혁이 필요합니다. 코란을 따르지 않는 이슬람교는 부패한 종교입니다.
여러모로, 현재의 이슬람교는 종교 개혁 이전의 카토릭 교회와 매우 흡사합니다. 왜 우리가
부패한 이슬람교 걱정을 해야 할까요?
현대의 세계는 모두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때문에, 부패한 이슬람교가 국제 테러를 비롯해서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줍니다.
개혁된 이슬람교는 무슬림들과의 대화를 수월하게 해주고,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됩니다.
세째로, 이 project는 앞으로 있을 과격파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무력 투쟁을
완화시켜 주거나 없애 줄 것입니다.
과격파 무슬림들과의 무력 투쟁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과격파 무슬림들의 궁극적 목표는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는 것이며, 기독교가 그 목표의 걸림돌
입니다.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25 % 이상이 과격파 무슬림들에게 동정적이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과격파입니다. 코란을 옳바로 이해함으로서 코란에 저촉되는 과격파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습니다.
네째로, 이 project를 통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촉진시켜 주며, 서로의
경전을 배움으로써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더 훌륭한 종교로 만들 수 있습니다.
Seminar의 구체적인 내용
1. 코란이란 무엇이며, 무슬림에게 전도하는데 코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2. 코란은 폭력을 가르치나?
3. 코란은 인간이 죄 없이 태어난다고 가르치나?
4. 코란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가?
5. 코란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가?
6. 코란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부인하는가?
7. 코란은 무하매드를 코란보다 높은 권위로 여기나?
8. 코란은 성경이 날조되었다고 주장하는가?
9. 코란은 종교의 자유와 용납을 부인하는가?
10. 샤리아 법은 현대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11.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점 – 경전의 해석과 생활에의 적용
12. 결론
여기서 No. 2 에서부터
No. 10 까지의 답은 전부 No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교의 대부분의 사실들은 코란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에서 만드러 낸 것입니다.
11가지 제목들이 매 제목 마다 약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코란의 인용과 해석, 성경과의
비교, 그리고 각 항목에서 배운 사실을 어떻게 전도에 적용할 것인가를 설명합니다.
Some Examples: 이제 예수님이 구약을 사용해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셨듯이,
코란의 잘 못된 해석을 바로 잡고 코란을 이용해서 무슬림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예를 몇 개 들겠습니다.
무슬림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코란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구약을 비판하지 않고 잘 못 해석한 부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코란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가 전도하려는 사람들의 부모를 비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다시
부활하신 것을 잊지말고 예수님을 가장 높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신 무슬림들이 주장하는 것을 코란으로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증명토록 해야합니다.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코란을 통해서 전도하고 그런 연후에 성경을 통해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성경을 통한 코란 해석을 시작한 후로 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깊어지고 풍성해
졌습니다.
어떤 무슬림들은 코란이 예언자 무하매드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경전이기 때문에 성경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과 논쟁을 하시지 마시고 코란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리십시요.
그들에게 Q. 2:4을 읽어 보라고 하십시요.
이 구절은 무슬림들이 꼭 믿어야 하는 사항들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무하매드에게 계시된 것을
믿고 무하매드 이전에 계시된 것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즉 코란과 성경을 믿는 것을 무슬림이 되는 필수 조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은 말이
여러번 코란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과격파 무슬림들은 Jihad를 합리화하기 위해서Q. 2:191을 인용합니다:
"어디서든지 보이는 대로 죽여라." 그 뿐이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도 이 구절을 인용해서
이슬람은 폭력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주장합니다.
이 경우에도 과격파 무슬림들이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피하시고, Q.
2:190-195을 읽어 보라고 하십시요.
이 구절은Jihad를 어떻게 해야 하지를 가르치는 구절입니다. 이 중에서 한 구절만 빼어서
인용을 하면 안 됩니다.
특히 Q. 2:190은 Jihad를 할 때 필요한 조건을 가르쳐 줍니다. Jihad의 세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Jihad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
(2) 공격을 받았을 때, 정당 방위로쓰여져야 한다.
(3) Jihad는적절한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적들을 필요없이 광폭하게 죽이면 안 된다.
예를 들어서 자살 폭탄은 코란에 의하면 정당한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살 폭탄자들을 공격하지 않았으므로 정당 방위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살 폭탄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한계를 넘습니다 - 적들과 자기 자신을 필요없이 광폭하게 죽입니다.
Q. 2:191은 공격을 당해서 정당 방위를 하기위해 싸우게 되면, 철저히 싸우라는 뜻입니다.
무슬림들은 대부분이 예수님의 신성을 강력히 부인합니다.
그들과 논쟁을 하는 대신 코란을 사용해서 그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 줘야 합니다. Q.
3:45-51을 읽으라고 하십시요.
코란의 이 단락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리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예수님이 행하신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진흙으로 빚은 새에게 예수님이 입김을 부으셔서 생명을 주셔서 새가 날아 갑니다.
이 단락에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락을 종합해 볼
때, 상식을 가진 누구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신성을 지니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코란의 이 단락에 대한 전형적인 이슬람의 해석은 예수님의 신적인 행위와 신적인 칭호는 모두
비유적인 표현이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허지만 바로 밑에 있는 예수님의 인성을 기술하고 있는 단락은 모두 사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해석입니까? 이런 해석은 사람은 두 가지의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을 가질 수
없다는 이슬람의 생각을 예수님에게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코란에 위배된 생각입니다. Q. 6:9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천사를
너희 중에 보내지길 바라면 천사를 인간의 형태로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 사람은 천사도 되고 사람도 되며, 두 개의 본성을 갖게 됩니다. 코란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두 가지의 본성을 갖을 수 있다고다고 말씀하시는데, 어째서 이슬람 학자들이 불가능 하다고 합니까?
이것은 순전히 예수님을 무하매드의 인생에 맞추려는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무하매드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코란의 말씀 보다 무하매드를 높이려 합니다.
이것은 또한 무하매드 자신의 가르침과도 정반대 되는것입니다. 무하매드는 코란이 자신 보다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무하매드는 생존시에 제자들이 자신의 말과 코란을 섞어 놓으려 할 때 그렇지 못 하도록
막았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슬람의 해석은 코란을 무시하고 무하매드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예말고도 다른 여러가지 예들이 많습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서 인간이 죄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코란에서도 성경애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아담을 불쌍히 여겨서 당장 죽이시지는
않으셨지만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에서 좇겨나고 영생을 누리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와는 다르지만, 코란 역시 삼위일체를 지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무하매드를 코란보다 높이지 않습니다.
사실 코란의 기록대로 하면 예수님이 무하매드보다 훨씬 훌륭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예수님을 매우 높히 생각합니다.
코란은 성경이 날조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코란은 종교적 관용을 가르칩니다. 작은 지면에 이
모든 것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이 이 project에 관여 하면서 느낀 것은 거의 모두가 코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코란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코란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16세기에 카토릭 교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 못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코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서 무슬림들에게 사랑으로 진리를 전해서
그들을 옳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건파 무슬림들이 코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서 과격파 무슬림들이 잘 못 된
가르침을 전할 때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선교사님들이 코란을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서 예수님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셨듯이, 무슬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모두가 코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과 기독교의 무력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친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게 아랍 친구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착실한 무슬림으로서 코란을 많이 읽었었습니다.
어느
날 Q. 4:159에서 예수님이 종말에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읽고, 코란에서 무하매드도
종말에 다시 오는 지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친구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제가 이 친구의 간증을 여러분께 전하게 되었습니다.
김평육 선교사님이 제가 준비한 PowerPoint Slide를 보신 후 아프리카에서 두 시간
동안 무슬림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함께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제가 말씀
드린 식으로 이 무슬림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두 시간 후, 이 무슬림 친구가 교회를 가겠다고 김평육 선교사님께 말했고, 김 선교사님은 제게
이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코란을 앎으로서 생기는 무슬림들을 향한 전도의 능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