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5,  2018

 

 

 

 

 

 

 

 

 

 

 

 

 

 

 

 

 

 

 

 

 

 

 

 

 

 

 

 

 

 

 

1.

천부여 의지 없어서

Fa-ther, I stretch my hands to Thee

손들고 옵니다

No oth-er help I know

주 나를 박대하시면

If Thou with-draw Thy-self from me,

나 어디 가리까

Ah! whith-er shall I go

 

내 죄를 씻기 위하여

I do be-lieve, I now be-lieve,

피 흘려주시니

That Je-sus died for me,

곧 회개하는 맘으로

And that He shed His pre-cious blood

주 앞에 옵니다

From sin to set me free.

 

2.

전부터 계신 주께서

What did Thine on-ly Son en-dure,

영 죽을 영혼을

Be-fore I drew my breath!

보혈로 구해 주시니

What pain, what la-bour, to se-cure

그 사랑 한없네

My soul from end-less death!

 

내 죄를 씻기 위하여

I do be-lieve, I now be-lieve,

피 흘려주시니

That Je-sus died for me,

곧 회개하는 맘으로

And that He shed His pre-cious blood

주 앞에 옵니다

From sin to set me free.

 

3.

나 예수 의지하므로

O Jesus, could I this be-lieve

큰 권능 받아서

I now should feel Thy pow-er,

주 앞에 구한 모든 것

And all my wants Thou wouldst re-lieve,

늘 얻겠습니다

In this ac-cept-ed hour.

 

내 죄를 씻기 위하여

I do be-lieve, I now be-lieve,

피 흘려주시니

That Je-sus died for me,

곧 회개하는 맘으로

And that He shed His pre-cious blood

주 앞에 옵니다 아-멘

From sin to set me free.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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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 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 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그가 널 구원하시리

그가 널 이끄시리라

그가 널 사용하시리

그가 너를 인도하시리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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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모세의 생물학적 어머니이면서 유모로 처신해야 했던 여인. 제 자식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어머니. 제 자식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 그러나 그는 진정한 어머니였다. 모세를 모세답게 만든 사람이 바로 요게벳일 것이기 때문이다.

 

2. 출애굽기 2장 1-10절에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본문 기자는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냥 레위 가족 중 한 사람, 레위 여자, 그의 누이, 바로의 딸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10절에서 ‘모세’라는 이름이 나온다. 모세라는 이름은 바로의 딸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녀가 아이 이름을 모세라고 지은 까닭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지은 연유를 밝히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3.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아브라함에서 솔로몬에 이르는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법정변론을 하는데, 모세도 언급한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스데반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모세가 애굽 궁전에서 왕자 교육을 받아서, 여러 가지 면, 특히 웅변을 위한 수사학과 행정 능력, 조직 운영 능력, 정보 수집 능력, 전투능력, 이런 것들이 탁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모세에 관한 기록들이 보여주는 것은 모세가 그런 점에서 그다지 탁월하지 못했고, 상당히 무능력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과연 애굽 궁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4. 애굽 공주가 모세를 나일 강에서 구했지만, 그 아이를 궁으로 데려가서 젖먹이 때부터 왕자로 키운 게 아니다. 어린 시절 모세를 키운 건 생모였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출애굽기 2:9-10).

 

5. 모세의 어머니는 요게벳. 요게벳은 “주님은 영광이시다”는 의미이다. 주님이 최고라는 것이다. 주님을 최고로 삼는 삶이 요게벳의 삶이다. 이것은 중요한 가치관이다.

요게벳은 모세에게 그런 가치관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한 어린 시절이 모세에게는 궁궐에서 지낸 세월보다 소중하다.

 

6. 이제 요게벳에 관한 서론적인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요게벳이 모세를 출산하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출애굽기 1장은 산파들을 통해서 남자 아이를 살해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다음,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자 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22절).

 

7. 상황은 더욱 악해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일이 참으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 남자 아이이면 바로 나일 강에 던져서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랬을까 생각하겠지만, 출애굽기 2장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태어난 남자 아이를 나일 강에 던져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산모를 비롯해서 온 가족이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겠는가? 피투성이 아이를 강물에 던져야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어쨌든 제 손으로 제 아이를 죽음의 길로 보내야 하는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 그들에게 그 시절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8. 그런데 바로는 왜 남자 아이를 바로 죽이라고 하지 않고, 나일 강에 던지라고 했을까?

 

해마다 범람해서 애굽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강을 왜 애꿎은 아이들 수장지로 삼으려 한 것일까? 혹시 그 아이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바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왕이다.

그리고 애굽을 비옥하게 만드는 나일 강에 아이들을 던지라는 것은 그 스스로 나일 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애굽을 죽음의 땅, 킬링필드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9. 이러한 대립은 십브라부아라는 두 여인에 의해서 드러난다. 히브리인들의 산파들인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의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에게 저항한다. 이것은 시민불복종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산파들이었고, 산파들은 아이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는 일을 한다.

 

십브라와 부아에게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을 자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는 생명의 왕이신 하나님과는 달리 죽음의 왕이다.

 

출애굽기 1장은 바로가 모든 백성들에게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바로는 나일 강마저도 죽음의 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일 강을 생명의 강․ 구원의 강으로 만드신다.

 

10. 당시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전반적으로 묘사하던 본문기자는 2장에 들어서면서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한 가족에게 초점을 맞춘다.

 

레위 지파에 속한 청춘 남녀가 결혼을 한다. 성경기자는 그들 이름을 나중에 밝힌다.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출애굽기 6:20). 그들은 자식을 낳는다.

 

아들을 낳으면 바로 나일 강에 던져야 하는 그 묵시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아들을 낳았다. 물론 이 아들이 첫째 아이는 아니다. 2장을 읽어보면, 누나 미리암도 있고 형 아론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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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모세를 낳은 그 부부는 그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석 달 동안 숨겨 키웠다. 성경은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고 말한다(2절).

 

모세 부모가 모세를 차마 죽이지 못한 까닭은 그가 잘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 구절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잘 생기지 않았다면, 모세를 나일 강에 버렸을 텐데, 인물이 좋아서 석 달 동안 집에서 몰래 키웠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잘 생겼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보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물론 잘 생긴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어느 자식인들 예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지나치게 외모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 부모만 그랬겠는가? 당시에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들을 낳아서 몰래 키우다가 붙들려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었겠는가.

 

12. 석 달을 어찌어찌 버텼지만, 더 이상 아들을 키울 수 없게 되자, 모세 부모는 그를 나일 강에 버리기로 한다. 그런데 나일 강에 버리는 방식이 특별하다. 갈대상자를 특별 방수 처리한 다음, 모세를 거기에 넣고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둔 것이다.

 

그리고 누나 미리암으로 하여금 지켜보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모세 부모뿐만 아니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태어난 아들을 나일 강에 버릴 때, 갈대 상자에 넣어서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결국 죽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산 채로 물에 던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13. 그런데 그곳으로 바로의 딸이 시녀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나왔다.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그 아이를 버리라고 명령했으니까, 나일 강에는 아이들 시체가 떠다녔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곳에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나왔다는 게 의문이다.

목욕을 하려면 궁중에서 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 굳이 나일 강까지 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마 제의적인 예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는 동안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었다.

 

14. 애굽 공주가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나왔다는 것은 바로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게 한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바로가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해서 나일 강은 죽음의 강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애굽 사람들은 그 강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곳에 와서 제의적인 목욕을 한 것으로 보인다. 7장 15절을 보면, 바로도 매일 아침 나일 강으로 나간다.

 

15. 공주가 그 상자를 보고 그것을 가져오게 해서 열게 하고, 한 아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상자 안에 있는 내내 울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울음소리를 공주가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6. 공주는 상자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그가 히브리 아이인줄 금방 알아채지만, 그 아이를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

 

공주는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라고 하는데,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이는 히브리사람들의 (남자) 아이들 가운데 (하나)이다”이다.

공주는 바로가 내린 명령을 잘 알았고, 나일 강에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담은 상자들을 여럿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모세 외에도 다른 아이들을 모세와 같은 방식으로 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모세 가족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공주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를 살려줄 뿐만 아니라, 자기 아이로 삼으려고 한다. 지극한 모성애다.

 

17.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데, 바로가 내린 명령은 다른 사람이 아닌 공주에 의해서 어겨진다. 애굽 공주는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바로와 달리 애굽 공주는 생명을 보존한다.

 

그는 모세가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구원하고, 결국 그의 어머니가 된다. 그런데 공주가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 여인을 유모로 삼아 그 집에서 아이를 키우게 하는데, 그 아이의 누이가 공주에게 아이의 어머니, 즉 제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해서 아이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 어머니 품에서 자란다.

 

그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제 집에서 키우면서 애굽 공주로부터 수고비까지 받는다. 정말 우여곡절(迂餘曲折)이다. 그리고 여인들의 용기와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19. 특히 미리암이 큰 역할을 했다.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서 나일 강에 띄운 다음, 누이는 그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공주가 상자에서 아이를 확인하는 순간, 누이는 바로의 딸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바로의 딸에게 히브리인 유모를 데려오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바로의 딸이 모세를 죽게 버려두지 않고 자신이 키우겠다고 결심한 것을 모세의 누이가 눈치챘기 때문임을 알려준다.

 

바로의 딸은 미리암에게 히브리인 유모를 데려오게 하고, 미리암은 집으로 달려가서 모세의 어머니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바로의 딸이 모세를 집으로 데려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의 어머니에게 삯을 주고 모세를 제 집으로 데려가서 모세에게 젖을 먹이게 한다.

 

20. 그리고 모세가 젖을 뗄 때, 모세를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자, 그때에 모세를 그의 아들로 삼고, 이름을 “모세”라고 짓는다(10절).

 

그러니까 모세는 어린 시절을 자신의 집에서 친부모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한 것이다. 어린 시절을 생가에서 지내면서, 모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의 딸이 왜 모세를 즉시 궁전으로 데려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를 나중에 궁전으로 데려가서 자신의 아이로 삼는 것이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 궁금한 점들이 많지만,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모세가 어린 시절을 어머니 요게벳과 함께 보냈고, 요게벳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주님을 최고로 삼는 어머니 요게벳의 가치관을 배웠다. 요게벳이 진정한 어머니였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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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남은 달력....

한 장 남은 달력마저 마지막 잎처럼 떨어지면 사람들은 무리 지어 그 서운함을 달래려 심란(心亂)해 질 것이다. 열심히 살았지만 쌓인 것이 없고 한 해도 성공적으로 살지 못한 실패 감에 마음에 찬 바람이 찾아들 것이다.  그렇다. 자꾸 한해성공이라는 잣대로 가늠하게 되니 비관만 쌓인다.

어느 믿음의 선배는 "하나님은 제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주셨"는 삶의 의미를 남겼다.

 

해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일의 성과에 대해 회의를 느껴 좌절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날들에 대해 자신은 어떤 의미를 두고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공의 임무를 다하라고 세월을 주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랑의 임무를 잊고 성공의 임무에 초점을 맞추어 세월을 보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성공을 가늠해 볼 것이 아니라 사랑의 분량을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언젠가 인생의 결산을 하게 될 때 성공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고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주문한 2019년 새 달력이 도착했다. 한쪽 가슴은 설렘이 그리고 한 쪽 가슴은 쉬움으로 차있다. 세상에 아무리 강한 자라도 묵은 달력을 떼어내지 않고 새 달력을 펼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새해는 또 다시 사랑 할 수 있는 시간들이다. 벽에 걸린 저 새 달력에는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가득 채워지기를 12월의 달력 앞에서 기도한다.  한 장 남은 달력은 기도의 달력이다. (장재언) 

 

 

 

 

 

 

 

 

 

 

 



 

 

아프리카를 10월 중순부터 말일까지 다녀왔다. 보름쯤 걸린 여정의 보따리를 풀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쓰는 글을 여행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여유로운 것 같고, 견문록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듯 보여 그냥 ‘시인의 눈길로 본 아프리카 이야기’쯤으로 하련다. 

 

 

 

 

▲ 비행기에서 바라본 아프리카 대륙. 구름사이로 그곳이 나타났다.

 

 

 

‘대략난감’한 아프리카 일정

 

먼 곳이었다. 이런저런 영화 혹은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수도 없이 보아온 아프리카 대륙이었지만 그곳은 낯선 하늘과 낯선 땅, 낯선 물빛이었다. 단지 하나 도착한 순간부터 떠나올 때까지 위안이거나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아프리카에도 우리와 별 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프리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던 길은 쉽게 되새겨지지 않았고, 아프리카인들과 헤어져 돌아 나온 길은 곧장 현실감에서 사라졌다. 과연 그곳을 실제로 다녀온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여정이었지만 떠나는 순간까지도 도착이후의 일정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대략난감’한 보름 일정이었다. 그만큼 여러 변수를 예상한 길이었다. 그 변수는 상수로 작용했다. 떠나기 전까지 아프리카 내륙 국가이며 최빈국의 하나인 말라위 Malawi는 손에도, 마음에도 잡히지 않은 채 둥둥 떠다녔다. 그곳에서 데이케어센터를 운영하는 한국인을 만나고 현재까지의 상황과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는 것이 이번 여정의 주목적이었다.

 

 

드디어 아프리카다!

 

 

 

▲ 케냐 나이로비공항 환승구역의 벽화는 아프리카에 온것을 실감나게 했다. ⓒ 김유철

 

 

인천공항에 모인 일행 9명의 손에는 그곳의 어린이들에게 전달해 줄 물품들이 들렸다. 항공사가 무료로 화물처리해주는 기준에 맞추어 1인당 2개씩의 박스는 팝콘 터질듯 한 긴장감이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물품의 내용보다 가지고 가는 마음이 더 무거웠다. 지원해 줄 물품은 값비싼 것으로 별도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지역의 지인들과 단체에서 기부 받은 학용품, 모자, 운동복, 신발, 사탕류 등이지만 현지에서는 그마저도 귀하게 쓰임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일행을 실은 비행기는 일단 태국 방콕으로 날아갔다. 그곳 환승구역에서 케냐 나이로비행 비행기를 탄 것은 새벽 1시 15분이다. 타자말자 이내 눈을 부치려 했지만 고공에서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은 시간만 되면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 여건이 맞아야 잘 수 있는 것을 깨닫는다. 늘 깨달음은 허둥지둥 다가선다. 7시간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동안 비행기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아프리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아프리카인이었을까?

 

 

 ▲ 인류의 조상 호모 에렉투스를 만났다. Hi! 반가웠다. ⓒ 김유철

 

 

케냐 나이로비 환승구역에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두개골부터 다리뼈까지 조립된 형태의 유골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른바 현 인류의 조상이라고 하는 직립원인(直立猿人) 호모 에렉투스다. 고고학적으로는 인도네시아 자바와 중국 베이징에서도 직립원인의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호모 에렉투스는 수십 만 년 동안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아프리카인이었을까?

 

인류의 조상들이 살던 곳에서 그들의 후손이 겪으며 지나온 과거 역사와 오늘의 상황을 살펴본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마치 이주민이 원주민을 못살게 굴듯이 아프리카 대륙과 그곳의 사람들, 심지어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근대와 현대의 서구문명이 저지른 일은 한마디로 죄악의 역사이고 무력을 앞세운 식민과 약탈의 연속이었다.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말라위 수도 릴롱궤로 들어가다

 

 

▲ 드디어 최종목적지 말라위 수도 릴롱궤 kamuzu공항에 도착했다. ⓒ 김유철

 

 

케냐 나이로비공항에서 다시 비행기 환승을 기다리는 5시간동안 마주친 아프리카인의 수는 평생 만난 아프리카인들 보다 더 많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조용했다.-나는 무슨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나라나 사람들의 언행과 행동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떠나올 때까지 공공장소와 거리에서 마주친 아프리카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음성이 낮았고 조용했다.

왜일까? 지금도 여전히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구석이다. 환승의 최종 목적지는 아프리카 내륙국가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Lilongwe)였다. 몇 나라를 거치고, 출발부터 몇 시간이 흘렀는지 헤아릴 이유는 없었다. 단지 한국보다 7시간의 시차를 가진 이곳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내린 마음과 별 차이가 없었다.

 

취학 전 아동들을 위한 데이케어센터가 있다는 ‘말라위’라는 나라 이름을 듣고 나서야 그런 이름의 나라를 처음 알았다. 지도상으로 본 말라위는 좁고 긴 국토를 지닌 내륙이었다. 나라의 북쪽은 탄자니아, 동쪽과 남쪽은 모잠비크, 서쪽은 잠비아와 접해 있었다. 떠나기 전 그 나라에 대한 것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읽었지만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단지 “왜 그리 가난한 나라”로서 살고 있는지가 가슴으로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 공항 앞길의 간판은 일행들을 환영했지만 험난한 길이 기다렸다. ⓒ 김유철

 

 

정치인의 이름(그가 누구였는지는 별관심을 두지 않았다)을 딴 릴롱궤 KAMUZU국제공항은 겉으로는 그럴싸했지만 입국수속을 하는 곳은 비좁았고 도착비자를 받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과 인내력이 필요했다. 문제는 통관검색이었다.

개인 짐을 제외하고 1인당 2박스 그러니까 모두 23kg짜리 18박스는 세관직원의 관심을 끌었고 그들은 쉽사리 그 물건들을 통관시켜 주지 않았다.

만의 하나를 대비해서 박스마다 영어로 “이 물건은 말라위 어린이들을 위한 학용품과 의류입니다.”라고 적었지만 그것은 말라위 세관직원의 환심을 사지 못하고 단지 세금을 내라고 재촉했다. 이후로도 “이거 뭥미?”의 상황은 떠나는 날까지 이어진다.

 

 

 

 ▲ 맨발의 아이들 ⓒ 김유철

 

 

 

▲ 맨발의 아이들 ⓒ 김유철

 

 

 

맨발의 아이들, 어린 예수였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만났다. 10명중 8명은 맨발이었다. 눈물이 핑돌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눈동자가 맑은 아이들이 어디선가 끝없이 방문자들을 향해 나타났다. 방문자들이 들고 온 보따리보다 노란 피부와 선글라스를 낀 낯선 방문자들이 그들에게 더 신기한 듯 보인 모양이다-그러고 보니 아프리카인들은 선글라스는 물론 안경을 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함께 간 일행들은 초등학교를 가기 전 유치원 나이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위한 데이케어센터(Daycare Center)를 방문했다.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에서 300여km 떨어진 망고치라는 도시의 롯지에 숙소를 마련하고 비포장 길을 달려간 길이었다. 길은 멀고 험했다.

 

말라위 교육제도로는 8년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등이 있었지만 학령아동들이 교육 혜택을 받는 비율은 거의 절반 수준 이하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초등학교 이전 교육은 기대난망인 상태에서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단체, 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이 데이케어센터의 현주소이다. 그나마 그런 단체가 들어간 지역은 좀 나은 편으로 보였고 더 깊숙이 떨어진 곳은 아득해보였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맨발의 아이들, 그들은 어린 예수였다.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 교실 한 칸과 칠판이 교육시설 전부다. ⓒ 김유철

 

 

 

▲ 데이케어센터의 급식을 위한 주방 공간 ⓒ 김유철

 

 

이번 말라위를 방문하게 된 것은 <예수일꾼>이 주축이 된 <말라위 후원회> 구성원으로서였다. 경남의 각계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천주교인들이 <예수일꾼>이란 이름으로 모인 것이 몇 년 되었다.

지금은 은퇴한 원로사제인 김영식신부가 제안하고 그 뜻에 동참하는 평신도들이 하나 둘 모였지만 결속력이 느슨한 형태로 운영되다보니 동력이 떨어지면 흩어지기 여러 번이었다.

 

2년 전 다시 순수(?) 평신도들만으로 재결합하여 사회 민주화와 교회쇄신을 주제로 격월로 모이고 있다. 그곳에서 2018년부터 말라위와 연결되었고 그곳의 어린이들을 위한 데이케어센터에 매월 후원을 하고 있어 그 모니터링을 위한 첫걸음으로 이번 방문이 결정되었다.

 

후원회 구성원들이 소속된 천주교 마산교구 역시 초창기 오스트리아 그랏츠교구 가톨릭부인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교구청과 여성회관 등을 건립할 수 있었고, 마산지역 교육의 뿌리이기도 한 현재의 성지여고도 1910년 프랑스 외방전교회 무세(Mousset, 1876~1957)신부가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인 ‘성지학교’가 출발점이었다. 그런 후원의 의미를 알기에 모토마을과 음타카마을의 데이케어센터를 방문하고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당시의 어려웠던 시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어떻게 이들은 도울 수 있을까?”라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만난 마음은 돌아와서도 여전하다.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고민하다.

 

 

▲ 데이케어센터에 온 아이들 ⓒ 김유철

 

 

 

▲ 데이케어센터에 온 아이들 ⓒ 김유철

 

 

후원금으로 어렵게 마련한 창문 하나 달린 교실과 낡은 칠판, 나무를 땔감으로는 부뚜막형태의 주방공간이 센터시설의 전부이지만 이곳에서 두 명의 현지인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분과 공간을 관리하는 분 등이 근무를 하고 있다.

물론 시설을 운영하는 이들과 후원단체 사이를 조율하는 코디네이터는 또 별개로 존재한다. 후원금이 여러 명의 인건비까지 책임져야 하는 구조는 고민스럽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많은 경우 이런 곳에 나가있는 NGO단체들이 후원대상자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 후원사업의 열쇠로서 작용한다. 시인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물어볼 곳은 늘 ‘예수’다. “선생님, 이럴 때 어떻게 풀어나갔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발의 아이들은 쾌활했다. 물질의 결핍이 가난과 배고픔을 의미했지만 삶은 질기고 강했다. 아이들은 방문자를 둘러싸고 장난치고, 어디선가 보았는지 태권도 품새 동작을 취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감탄을 자아내는 춤을 보였다. 타고난 몸의 리듬. 머리, 어깨, 허리, 엉덩이, 다리, 발의 거침없는 리듬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웠고 마치 일상의 동작처럼 보였다. 분명 여기는 아프리카 한복판이다.

 

 

소녀와 할머니

 

 

 

▲ 소녀와 할머니를 만나다 ⓒ 김유철

 

 

한 소녀를 만났다.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소녀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기도 없었고, 사탕을 나누어 주는 곳으로도 달려오지 않았다. 소녀의 눈은 깊고 슬펐다. 그 슬픔의 깊이는 가름되어지지 않았고 차마 가까이 갈 수도 없는 표정이었다. 아이들 사이에 섞이지 않은 채 몇 발 떨어진 곳에서 무심히 방문자들을 쳐다보던 소녀의 눈은 좀처럼 잊혀 지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스토리가 나왔지만 이 또한 시인의 생각일 뿐. 소녀는 오래 머물지 않았고 동네잔치 같은 소란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부디 견디어 나가길. 모든 것으로부터.

 

한 할머니를 만났다. 모토마을 케어센터 방문을 마치고 마을로 들어가 직접 몇 곳의 민가집을 방문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놀랍게도-놀랍다고 해야 할 것 같다-빈부의 격차가 존재했다.

그곳에서는 자가용처럼 취급받는 자전거가 세 대나 있었고, 집 한곳에는 식량이 쌓여있는가하면 달랑 방 한 칸-아주 작은 방-에 불과한 집에 이부자리와 옷 몇 벌, 밥그릇 두어 개가 전부인 집도 있었다.

그곳에 한 할머니가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1930년생이라는 신분증을 내보인다. 88세였다.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를 일이지만 주무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시길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어린 예수들이 웃음을 잃지 않도록

 

 

▲ 어린 예수들이 웃음을 잃지 않도록... ⓒ 김유철

 

 

최초의 인류라고 할 호모 에렉투스의 고향, 아프리카는 우리와 같은 21세를 맞고 있는가? 개발과 발전이 사람의 행복이나 풍요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맨발의 아이들에게 용서라도 빌고 싶었다.

2018년의 말라위 어린이들이 현재와 같은 삶을 살 때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들의 선조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두려움없이 후원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함께 살아야할 지구촌 형제들을 생각한다면, 어디선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이라는 스승의 목소리를 들릴 것이다.

맨발의 아이들, 아니 어린 예수들이 웃음을 잃지 않도록.

 

 

 

 

김유철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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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는 새 것이 없으니 이미 전에 있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게 된다(전 1:9).

 

절대적 의미에서의 창조나 새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을 아담에 속한 자연인(自然人)을 옛 사람이라 하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새 피조물’(고후 5:17), ‘새 사람’(엡 4:24)이라고 하였다.

 

옛 사람은 욕심과 죄의 종이고 새 사람은 예수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자연 현상을 보면 모든 생물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물체의 운동도 팽이처럼 힘있게 돌다가 차차 약해 지고 마침내는 정지되고 만다. 이것을 열역학의 제2의 법칙이라 한다.

 

다만 제3의 더 큰 요인의 힘을 가해 줄 때는 다르다.

인간도 자연인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는 인간의 영성은 퇴화해 가고 있다.

 

노아의 홍수족(族)이나 소돔 고모라족(族)은 하나님이 멸망시키기 전에 인간의 자체 내부(自體內部)에서 이미 죽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이미 동물 같이 되어 버렸다(창 6:3).

그래서 그 죽은 것을 처분한 셈이다.

 

그리스도 안의 삶이란 날로 새로워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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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

 

어르신들 스물두 명이 모인 그날 수업의 주제는 ‘나이’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주제에 맞는 그림책 서너 권을 함께 읽고 난 후,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활동 기록지(work sheet)에 그림이나 글씨로 자기 마음을 담아서 개인 클리어파일에 차곡차곡 모으는 중이다. 

 

총 10회의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색종이로 알록달록 꾸민 가족나무며, 손을 대고 직접 그린 후 수채화 물감으로 색칠하고 반짝이 스티커로 예쁘게 꾸민 나의 손 그림, 스스로에게 주는 상장 등이 채워져 클리어파일이 제법 두툼해진다. 

 

10주 동안의 활동 기록이면서 동시에 어르신들의 미니 자서전이 되게끔 하나하나 기획하고 구성해서 만든 나의 ‘어르신 그림책 수업’ 결과물이다. 나도 매번 어르신들과 똑같은 순서로 클리어파일을 채워 나가는데, 나중에 열어보면 어르신들과의 만남과 추억이 고스란히 떠오르곤 한다. 

 

나이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선 눈살 찌푸리게 하는 동년배의 꼴불견 노인들을 꼽아보기로 했다.

 

 “자식 자랑, 돈 자랑, 고집불통에 막무가내, 질서를 안 지키는 무법자들, 잔소리 반복, 버럭 소리 지르기 일쑤, 냄새 나는 노인,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기, ‘왕년에 내가…’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나이 유세 떠는 노인.” 

 

젊은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하면 아무리 자기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다 해도 듣기에 불편했을 텐데, 어르신이 어르신에 대해 말하다 보니 중간 중간 맞장구 치는 박수와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르신이 같은 어르신을 보면서 멋있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지 궁금했다.

 

“예의 바른 노인,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잘 듣는 노인, 웃는 얼굴, 젊다고 무시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모습. 박식하지만 겸손한 자세, 자원봉사 하는 노인, 노부부가 같이 걸어가는 모습...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는 이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말이 이어진다.

 

“자상한 어른, 내가 먼저 이해하고 배려해야겠다,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부담주지 않도록 자기관리 잘하기, 예의를 지키는 노인, 자립심 기르기, 책 읽어주는 할머니, 멋을 아는 노인, 나이 많아져도 재미있게 살고 싶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끝까지 인정하기 싫은 마음속에는 아마도 두려움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애를 써도 자칫하면 꼴불견 노인 소리 듣기 십상이니 말이다. 노화공포증(gerontophobia)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남은 인생 내내 나이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 두려움과 싸워 이기든 아니면 화해하든, 어느 쪽이 되었든 두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면 각자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새번역,디모데후서 1:7) 

 

 

 

 

 

두려움1, 건강 :

 

 

나이와 함께 몸에 변화가 오고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진다. 배우자나 자녀 혹은 친구들이 냄새나 생활습관에 대해 지적하거나 충고하면 기분 나빠하지 말고 수굿하게 받아들이면서 좀 더 신경 써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노화를 늦추는 방법 중 하나다.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인 치매도 대체로 가족이 가장 먼저 이상하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두려움2, 돈 :

 

 

지금의 경제력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울 게 분명하고, 수입은 없는데 늘어날 병원비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현재의 재산 규모를 파악하고 지출의 평균치를 계산해서 소비의 규모를 분수에 맞게 조정만 해도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복지제도 활용은 세금을 내고 있는 나의 권리임을 잊지 말자. 

 

 

두려움3, 관계 :

 

 

먹고사느라 바빠 신경을 못 썼을 뿐인데, 언제부턴가 배우자도 자식들도 멀게 느껴지고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듯이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한다. 돈이야 마지막까지 꼭 쥐고 내놓지 말라고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은 주고 또 주어야 한다. 사람 사이는 돈으로도 건강으로도 대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두려움4, 할 일 :

 

 

남아 있는 긴긴 인생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앞만 보며 달려오느라 인생설계의 마지막 부분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공부든 취미든 여가활동이든 봉사활동이든 지금 시작하면 남은 인생 두고두고 쓸 수 있다.  60에 시작하면 30년, 70에 시작한다 해도 20년은 알뜰하게 잘 쓸 수 있다.  두려움에 떨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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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적 사항

 

  ① 요안나는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신다’라는 뜻.

  ② 헤롯 안디바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눅 8:3).

  ③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전도자로서 삶(눅 8:2).

 

2. 시대적 배경  

 

  예수 당시 헤롯안디바(B.C.4-A.D.39년)가 통치하던 갈릴리 지역의 주민이었음.

 

3. 성품

 

  ① 병고침을 받고 소유를 주께 드리며 평생을 전도자로 산 것으로 보아 감사할 줄 아는 헌신적인 여성(눅 8:3).

  ② 예수님 사후, 제자들조차도 도망간 상황에서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으로 찾아간 것으로 보아 용기 있고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눅 24:3).

  ③ 예수의 죽음에도 변절치 않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무덤을 찾고, 또 예수의 부활을 맞아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증거할 정도로 지조 있고,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

 

4. 주요 생애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헌신적으로 예수를 섬긴 여제자.

  ② 예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들 중의 하나.

 

6. 평가 및 교훈

 

  ① 주님께 치유함을 받고 자기의 소유를 주께 드려 감사한 요안나의 갸륵한 마음씨는 구속의 은총을 입고도 이에 감사하기는커녕 불평과 원망이 습관화된 현대의 신앙인들 에게 감사하는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눅 8:3). 이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다(살전 5:18).

 

  ② 요안나는 예수의 죽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모든 제자들이 도피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주님의 무덤까지 찾아갔다(눅 24:3). 이는 오늘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쉽게 신앙과 불 신앙의 탈을 번갈아 바꿔 쓰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정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몸을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신앙의 절개를 지킬 줄 아는 담대한 신앙인 이 되자.

 

  ③ 끝까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요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 중 하나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눅24:1-12). 이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 역시 마지막 날에 구원의 반열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7. 핵심 성구

  

“요안나와…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8:3)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가 ‘제자훈련의 국제화’를 향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했다.

 

지난 10월 29일~11월 2일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 열린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이하 CAL세미나)’에는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 모든 대륙에서 총 93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CAL세미나 개최 이래 가장 많은 외국인이 참석한 것.

 

이번 112기 CAL세미나에는...

동북아시아(중국, 대만),

동남아시아(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남부아시아(스리랑카, 인도),

오세아니아(뉴질랜드),

유럽(마케도니아),

아프리카(가나),

북미(미국)에서 총 14개국 175개 교회, 300여명의 목회자들이 참여했으며 이중 280명이 수료했다.

 

특히 이번 해외 참석자 중 아프리카 가나에서만 48명이 찾아왔다. 가나에서는 몇 개 교회에서 이미 ‘제자훈련’의 가능성을 보았고 전체 교회 차원으로 확대해 각 교단 교단장 및 임원 등이 대거 참석하게 되었다.

 

또 CAL세미나를 마친 후 오정현 목사에게 제자훈련 목회를 위해 사랑의교회와 가나교회와의 협력을 강력히 요청하는 공문을 전달하는 등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과 강한 의지를 보였다.

 

오정현 목사는 주제강의 중 하나인 ‘온전론’ 강의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제자의 삶을 실천해야 하는지, 왜 제자훈련하는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지 그 당위성을 강조했다.

 

오정현 목사와 함께 최홍준 목사(국제목양사역원)와 임종구 목사(대구 푸른초장교회), 김대순 목사(태국 치앙마이 신학대학원) 등이 강사로 나서서 제자훈련이 한국교회에 왜 필요하고, 실제 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전했다. 더불어 7번에 걸쳐 진행되는 소그룹 인도법 강의도 전했다.

 

이번 CAL세미나에서는 또 ‘현장참관’ 프로그램이 진행돼 제자훈련이 가져다 준 열매를 확인했다.

 

한편 CAL세미나는 1986년에 사랑의교회 국제제자훈련원(DMI)이 지역교회에 제자훈련을 소개하고 보급하기 위해 시작했다. 32년 동안 112기에 걸쳐 25,111명의 한국 및 해외 교회 지도자들에게 ‘한 영혼’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김동철 박사가 2016년 3월 25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윗줄 왼쪽).

한 달 남짓 지난 4월 29일 최고재판소에서 10년 노동교화형을 받았다(윗줄 가운데).

김 박사가 올해 5월 9일 석방돼 미국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두 손을 들어 승리 표시를 하고 있다(윗줄 오른쪽).

 

 

 

이달 초 한국을 방문해 서울 청계천을 찾은 김 박사는 “풀려나 북한에서 수감된 얘기를 하는 것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눈을 가린 채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달려 도착한 외진 산골의 이름도 없는 노동교화소에 갇혀 생활했습니다. 때때로 밤 10시까지 노동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스러웠지요. 이렇게 밖에 나와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올해 5월 9일 북한에서 2년 7개월 억류됐다 석방된 한국 출생 미국 시민권자 김동철 박사(65)는 이달 3차례에 걸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북한에서 풀려난 뒤 언론 인터뷰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그동안 미국에 머물며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하다 지난달 자신이 살았던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를 들러 이달 초 서울을 방문했다.

 

김 박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첫 정상회담(6월 12일)을 싱가포르에서 갖기로 합의한 뒤 김학송, 김상덕 씨와 함께 풀려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박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부인 멜라니아 여사, 마이크 펜스 부통령 부부 등과 함께 새벽까지 기다리며 대대적인 환영 이벤트를 펼쳤고 이 모습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 북한이 파놓은 함정에 걸리다 

 

2015년 북한으로부터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 행사에 초대를 받은 김 박사는 나선경제특구에 위치한 두만강호텔에 머물며 행사 참석 준비를 하다 그해 10월 2일 체포됐다.  

 

“오전 일찍 시 인민위원회 해외동포사업처를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을 찾아가 평양에 가져갈 선물 등을 상의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8인승 밴을 몰고 사업처 구내를 벗어나려는 순간 평소 알고 지내던 퇴역 군인 남성 A 씨가 자전거로 차를 가로막더군요.”  

 

인사를 하려고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자 그는 느닷없이 휴대용저장장치(USB)와 서류봉투를 차 안으로 내던진 뒤 자리를 떠났다. 의아한 생각에 그를 따라가려는 순간 시 보위부 간부가 차 조수석에 뛰어오르더니 ‘차를 남산(호텔)으로 돌리라’고 외쳤다. 음모에 빠졌다는 생각이 김 박사의 머리를 스쳤다. 나선의 남산호텔은 보위부가 주요 인물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남산에 도착한 뒤 두 눈이 가려진 채 나선 연안의 비파섬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한 달가량 조사가 진행됐다. 이후 USB와 서류 봉투에 핵 개발과 군사 정보 등이 들어있다는 등의 혐의가 적힌 1000여 쪽 분량의 서류가 만들어졌다. “내용이 맞지 않다고 부인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다시 진술서를 쓰게 했고, ‘평양 가서 알아서 하라’며 조사서에 서명하라는 강요가 몇 차례고 반복됐습니다.” 조사 중 고문이나 심한 구타는 없었다. 대신 벽에 거의 얼굴을 붙이고 한 시간가량씩 세워두는 벌을 서야만 했다.

 

“10년 넘게 대북 관련 사업을 하면서 많은 자선 활동을 했고 나선시 공무원이나 당 관계자들과도 두루 친밀하게 지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북한이 미국과 협상할 때 이용할 미국인 인질로 내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양으로 이송된 뒤 국가보위부 제3국에서 조사를 받았다. 보위부는 이미 김 박사의 죄목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벽을 보고 서있기를 시키고, 진술서를 다시 쓰게 하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구타해서 맞고 끝나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조사가 끝날 수 있게 죄를 만드는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 날조된 사실로 채워진 인터뷰 

 

체포되고 3개월이 지난 2016년 1월 11일 아침. 김 박사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억류돼 조사받던 초대소 문을 나섰다.

 

그가 이송된 곳은 평양 인민문화궁전 내 한 회의실. 그곳에선 CNN 소속 미국인 기자와 카메라맨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고 그의 억류 소식도 이때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두 달여 뒤인 3월 25일 평양 주재 외교 사절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다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 기자들이었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언론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주된 내용은 북한 체제와 최고지도자를 비방하고, 북한에 대한 기밀 및 군사 정보 등을 외부에 전한 혐의 등을 자백하고 참회한다는 것이었다.

 

“CNN 인터뷰 때와는 달리 3월 인터뷰에선 어떤 질문이 나올지 미리 알려주고 혐의를 인정하는 내용을 말하라는 지시를 하더군요.” 

 

김 박사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베이징 주재 동아일보사 특파기자 소개로 서울에서 남조선 통일부 대북정책관을 만났다. 북한 정보가 담긴 SD 카드를 넘겨주고 대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른 날조된 이야기였다. “조사받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한 말들입니다. 실명을 거론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 외로움에 떨며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다 

 

김 박사는 인터뷰가 진행된 2016년 4월 29일 열린 최고재판소에서 10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평양에서 자동차로 2시간가량 떨어진 산골의 노동교화소로 옮겨졌다. ‘죄수 번호 429번.’ 외진 곳에 위치한 교화소 철조망 안에는 허름한 단층집 한 채가 전부였다. 집에는 감방 9개가 있었는데, 그가 수감된 4호실 외에는 모두 비어 있었다.

군인 2명이 2시간씩 교대로 감시하고 방과 화장실에는 감시카메라가 24시간 돌았다. 산비탈에서 땅을 개간하거나 농사하는 게 대부분이었던 작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정해져 있었지만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밤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저녁에는 식사가 끝나면 밤 10시 취침 때까지 나무의자에 앉아 카메라만 바라보는 ‘벌 아닌 벌’을 서야만 했다. 

 

감방의 희미한 전등은 취침 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수건으로 눈을 가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벽에는 ‘교화인 준칙 10가지’가 적힌 종이 한 장만이 붙어 있었다. 준칙 중에는 ‘성경책과 잡지를 볼 수 있다’는 항목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성경을 요구했지만 ‘429번’에게는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더군요.” 

 

김 박사를 가장 괴롭힌 것은 외로움이었다.

 

“동료 죄수도 없어 감시병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외로움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경험도 했다. 수감 중 뇌혈전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지난해 12월 연탄가스에 질식돼 의식을 잃은 게 가장 위험했다. 교화소 경비병은 그를 이불 등으로 둘둘 말아 교화소 외곽 철조망 근처에 던져뒀고, 그는 하루 반 만에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 자선활동으로 목숨을 구하다  

 

 

 

김동철 박사가 2008년 8월 북한 나선경제특구에 ‘두만강호텔’을 완공하고 두 달가량 지나 호텔 내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아래). 입구에 호텔 이름이 한글과 영문자로 표기돼 있다. 김동철 박사 제공

 

  

김 박사는 미국에서 조선족 처를 만나 결혼한 뒤 2001년 옌지에 왔다. 처가의 고향이 북한이고 자신은 미국 시민권자여서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나선에 호텔을 지은 것은 나선시 김모 인민위원장의 권유가 계기였다.

“‘미국인으로서 처음 하는 일이 된다’라는 말에 투자를 결심했습니다.”  

 

중국인 사업가와 관광객 등을 겨냥한 호텔을 짓겠다고 하자 김 인민위원장은 원정리에서 나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1만 m² 규모의 옥수수 밭을 내주었다. 밭을 갈아엎고 그 위에 지하 2층, 지상 3층, 객실 80개짜리 호텔을 지었다.

 

“부속 건물 공사비까지 포함해 총 250만 달러를 투자했고, 직원이 많을 때는 68명에 달했습니다. 나선 일대에서는 가장 큰 호텔이었지요.” 

김 박사는 시의 외국인투자유치위원장도 맡아 나선지역 양식장이나 봉제공장 등에 중국 자본을 끌어오기도 했다.

 

또 자신이 번 돈과 외부 자선단체 지원 등을 합쳐 각각 70여 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두만강 유치원’과 ‘굴포 유치원’을 지었다.

 

‘청학동 요양원’(수용 인원 200명)과 ‘나선 장애인 요양소’(450명)도 지어 시에 기증했다.

 

2011년에는 지린성 훈춘(琿春)에 국수공장을 지어 국수를 나선 및 인근 농촌의 탁아소 유치원 요양소 학교 등에 직접 차를 이용해 날라주기도 했다.

 

“평양의 조사관들이 봉사 기증 활동이 있어 죄는 사형감인데 교화형으로 줄었다고 하더군요.”

 

○ 석방 당일에야 석방 사실을 알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억류 미국 시민권자 3명의 석방 여부가 화두가 됐다. 하지만 정작 김 박사는 석방 당일까지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5월 9일 오전 사복을 던져주며 갈아입으라고 하더니 평양으로 데려왔습니다. 인민문화궁전에서 그날 오후 6시경 미국인 관리 3명과 재판관, 검찰 간부 등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야 석방 절차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재판관은 A4 용지 반 장 분량으로 사죄문을 쓰게 한 뒤 “공화국 관련법에 따라 신병을 미국 측에 인도한다”고 말했다.  

 

평양 순안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한 미니버스에서 30분가량 앉아 있자 김학송, 김상덕 씨가 올라탔다. 김 박사가 그 둘을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학송, 김상덕 두 사람은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 사이였다. 둘은 평양의 고려호텔 맨 위층에 머물며 조사를 받았다는 등의 대화를 나누며 석방을 기뻐했다. 이들이 고려호텔에서 억류돼 조사 받고 있을 때 올해 3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수행했던 기자 등은 같은 호텔에 투숙했다.  

 

평양과기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김상덕 씨와 김학송 씨는 각각 2017년 4월과 5월, 평양 순안공항과 평양역에서 긴급 체포된 뒤 적대행위 혐의 등을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미니버스가 공항으로 출발하려 하자 저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차창 밖에서 ‘나가면 여기서 있었던 일은 뭐든 공화국을 위해 좋은 말을 하라’고 하더군요.”

 

○ “외국 자본 투자 원하면 두만강호텔 돌려줘야” 

 

김 박사 일행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국무장관 전용기를 타고 이륙한 뒤 조금 지나 북한 영공을 벗어났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자 기내에 있던 50여 명은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이들의 석방을 축하했다.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비행기 밖으로 나온 김 박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전용기에서 나와 마중 온 사람들을 보니 감격스럽기도 하고 이제 미국에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안도와 감사로 절로 두 손이 올라갔습니다.” 

 

공항에서 곧장 메릴랜드 국립병원으로 이동한 김 박사는 10여 일간 검진을 받았고, 전에는 없던 척추협착증과 당뇨,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의료진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인터뷰 도중 두만강호텔을 되찾고 싶다는 희망을 거듭 밝혔다.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이나 원산에 미국 등 외국 자본 유치를 원한다면 미국 시민권자의 첫 직접투자였던 두만강호텔을 돌려줘야 할 겁니다. 두만강호텔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건의할 예정입니다.”

 

김 박사가 석방된 뒤 지인을 통해 파악한 결과, 호텔은 나선시가 중국인에게 위탁운영을 맡기고 있다. 그가 중국과 북한을 넘나들며 운전했고, 때로는 구호 물품을 가득 싣고 다녔던 8인승 밴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구자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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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미래당 이언주 의원은 최근 들어 ”박정희는 천재”, ”박근혜 탄핵"은 역사가 평가할 문제” 등 파격적인 발언으로 ‘보수의 아이콘‘, ‘보수의 전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 이 의원에게 일각에서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의원이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은 무엇일까. 이 의원은 21일 YTN 뉴스에 출연해 자신이 강조하는 가치인 ‘신보수‘‘자유주의 우파‘, ‘자국민 중심주의’에 대해 말했다.

 

이날 이 의원은 ”신보수라는 게 헌법적 가치를 제대로 지키자는 것이다. 헌법적 가치라고 하면 크게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질서 그리고 법치주의와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 이런 게 있다”라며 ”현 정권에서는 이런 것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야당이 싸워야 하는데, 과거 보수의 잘못으로 이런 가치가 지켜지지 못한 게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그래서 권위주의 우파가 아니라 자유주의 우파가 필요하다”라며 ”보수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로서, ‘자국민 중심주의‘에 대해 이 의원은 긴 의견을 냈다. 이 의원은....

”‘가짜 난민’에 대해 보수가 입장이 분명하지 않다.

세금을 내고 병역을 제대로 이행하는 국민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며

 ”그래서 난민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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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미국 추수감사절(22일)은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 소설이었습니다.

이날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예로부터 소설 추위를 겪어야 보리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하여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는 산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실종자가 많고 집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화마와 싸우다 보니 절기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기후가 너무나 많이 변했습니다. 눈이 온다는 소설(小雪)은 그리움에 사무쳐있기만 합니다.

한해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눈 없는 소설을 지나면서 그래도 겨의 문턱인지 제법 저녁에는 쌀쌀합니다. 정말 세월이 덧없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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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리도리   2. 좌우로 회전,
3. 앞뒤로 끄덕임, 4. 좌우 옆으로

 

 

 

 

 

 

 

 

 

 

 

 

 

 

 

 

최근 날씨가 추워지면서 감기 증세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기침, 콧물 등의 증상이 없거나 심하지 않은데도 계속 열이 나고 배가 아프다면 상부요로감염을 의심해봐야 한다.

 

여성에게 더 많은 질환

 

요로감염이란 신장, 요관, 방광, 요도로 구성된 비뇨기계의 한 부분에 세균이 감염된 것을 말한다. 감염 부위에 따라 방광 이하에 발생하는 하부요로감염과 신장, 요관에 발생하는 상부요로감염이 있다. 하부요로감염으로는 방광염, 요도염 등이 있으며, 급성 방광염은 요로감염의 가장 흔한 형태이다.

 

여성에게 나타나는 세균 감염 중 가장 발병률이 높은 것이 바로 요로감염이다. 전 세계 여성 인구 중 10%가 1년에 한 번 이상 요로감염을 경험하고, 하부요로감염의 평생 빈도는 약 60%로 보고된다. 특히 50대 이상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며, 이는 폐경기에 들어서면서 호르몬의 균형이 깨져 보호 역할을 하는 락토바실러스균의 수가 현저히 감소하면서 방광염 등 요로감염 빈도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 없이 열나면 요로감염 의심

 

평소 수분섭취가 부족하거나 바쁜 업무로 제때 화장실을 갈 여유조차 없는 직장인들에게 요로감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는 면역력이 떨어지며 증상을 악화시킨다.

요로감염은 발생한 부위에 따라 증상이 다르다. 방광에 염증이 생기면 갑자기 소변을 자꾸 보게 되고, 보고도 본 것 같지 않아 또 소변이 마렵고, 소변을 볼 때 요도가 찌릿하고 통증을 느끼게 된다. 요관염이나 신우신염 같은 상부요로감염이 나타나면 열이 나는 등 전신증상을 동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방광염 증상과 함께 옆구리나 허리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이 같은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요로감염 염증이 전신에 퍼질 수 있으며, 결국에는 신장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한다. 특히, 요로감염으로 인한 방광염은 신우신염으로 진행할 수 있고, 급성신우신염을 방치할 경우 패혈증과 같은 치명적인 상태로까지 진행될 수 있어 신속한 치료가 필수다.

 

재발 잦아…임의로 항생제 중단 금물

 

요로감염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병원을 찾아 초기에 철저한 치료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단순 하부 요로감염은 항생제 치료에 잘 반응하므로 증세가 심각하지 않다면 약 1주가량의 항생제만 복용해도 완치될 수 있다.

 

요로감염의 가장 큰 문제는 잦은 재발과 다제내성균의 발현이다. 적절한 항생제 치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요로감염 이후 6개월 이내에 16~25%, 1년 이내 40~50%의 매우 높은 재발률을 보인다.

 

재발이 잦은 요로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배뇨습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소변을 너무 오래 참는 습관은 매우 좋지 않다. 평소에 충분한 양의 물을 마셔 수분을 유지하는 것은 요로감염 예방의 기본이다. 변비 또한 요로 감염의 위험인자로 알려져 있으며, 요로 생식계의 정상 세균을 보강하고 변비를 예방하기 위해 유산균을 복용하면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요로감염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기 치료와 올바른 항생제 복용이다. 증상이 호전됐다고 항생제 복용을 임의로 중단하면 남아있던 세균이 다시 증식할 수 있다.

 

고대 구로병원 오미미 교수는 “일부 환자들이 비뇨·생식기계에 발생하는 요로감염을 성병으로 오해받을까 두려워 치료를 쉬쉬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 때문에 조기 진단과 치료 타이밍을 놓칠 경우 치료가 쉽지 않고 큰 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