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3,  2019

 

 

 

 

 

 

 

 

 

 

 

 

 

 

 

 

 

 

 

 

 

 

 

 

 

 

 

 

 

 

 

 

 

 

 

 

 

 

 

 

사랑의 하나님!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눅2:49)

부모를 놀라게 한 이 말씀은 예수님 어린 시절에 하신 유일한 말씀, 또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찾아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오는 마리아와 요셉의 사흘 길은 우리의 기다리며 견디는 시간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과 평화의 빛이시지만 때로는 고통과 슬픔과 갈등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놓쳤을 때에 마리아와 요셉과 같은 방법으로 풀어가게 하옵소서.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거기에 주님은 어엿이 계십니다.

 

사흘을 잘 견디어 내게 하옵소서. 마리아와 요셉이 어린 예수님을 다시 만나듯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하옵소서.

 

서로가 마음에 받아들이고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서려고 노력하여 찢어진 우리의 마음, 갈라진 관계를 치유하옵소서. 아버지의 집, 성전에서 우리가 함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게 하옵소서.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 평화와 정의와 사랑에 마음을 열게 하옵소서.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쪽으로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더라도 주님은 저를 인도하시고 꼭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뜻에 저 자신을 맞추어 가겠다는 결단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뵙게 하옵소서. 마음에 품은 탐욕으로 예수님을 놓쳤을 때, 죄악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저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오신 줄 생각하지만 평화가 아닌 칼을 주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원만이 아니라 심판도 가져오십니다. 그 분 앞에서 제가 품고 있는 속생각이 밝히 드러날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을 찾으오니 제 옆에 오시옵소서.

 

불의한 길로부터 돌이키고 허영에 들뜬 생각을 고쳐먹게 하옵소서. 자비롭게 맞아주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과 같이 저의 지혜와 키가 자라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ㅡ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이신남 시인

 

적막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어둠이 아니면 표현하기 어렵고 홀로가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그 느낌. 외로움보다도 더 크게 와 닿는 쓸쓸함으로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는 내면의 시간으로 적막은 충분한 사유의 공간이다.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팔찌를 만들었다.

 

팔찌를 만드는 그 시간으로 하여금 쓸쓸함을 밀어내는 시인의 작품에서 마음을 읽어 내린다. 혼자가 아님을 강조하며 사물에 물활론적 기법으로 누군가가 옆에 있는 듯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그 힘으로 인해 순간의 삶에 행복을 누리며 생명 있는 것과의 교감으로 지독한 허무를 극복하려는 느낌. 공감 가는 시 한 편이다.

 

 

 

 

 

 

 

 

 

 

 

 

 

 

 

 

 

 

 

 

요한복음 3장 31-36절

31.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1. 십자가의 대속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렸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은 거의 똑같은 죄인이다.

 

옛날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실험을 통해 무거운 돌과 가벼운 돌을 동시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죄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죄는 깊은 지옥에 떨어뜨리고 경죄는 얕은 지옥에 떨어뜨리는 줄 알지만 지옥에 가는 것이 같다면 중죄와 경죄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때로는 경죄인보다 중죄인이 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빨리 돌아온다.

 

누가 구원의 은혜를 받는가?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는 자다. 오직...

십자가의 진리는 생각을 초월한 진리기이에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다(32절).

 

아무리 잘 설득하고 설명해도 사람은 의롭게 되지 못함을 알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누군가의 변화를 원하면 그를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 먼저 십자가를 짐으로 감동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앞세워 복을 얻는다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의미가 크다.

 

나는 악보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부르는 찬송이 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

 

 

2. 믿음의 고백

 

하나님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라고 고백한다(33절).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뜻이다. 믿음은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만으로 단순히 판명되지 않는다.

영생의 축복을 얻는다니까 말로만 그런 피상적인 고백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라고 진실로 인정하는 경지까지 가야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진정성은 언제 판가름 나는가? 힘들 때도 “하나님의 조치는 언제나 옳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을 통해 판가름 난다.

 

제자에게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가 ‘아멘의 고백’으로 훈련받는 것이다.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을 순수 한국말로는 ‘스승’이라고 한다. 스승은 ‘스님, 승려’에서 나온 말로 추정되지만 어떤 사람은 ‘스스로 승리한 사람’이라고 인문학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앞세워 ‘아멘의 고백을 하며 이기적인 자기승리하고, 어야 할 "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제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인정하는 아멘의 고백이 영생의 은혜와 그 외의 수많은 은혜와 축복을 따라오게 한다.

 

 

3. 순종하는 삶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36절).

 

믿음은 곧 순종이다. 자신을 높여 스스로 주도하려고 하지 말. 구원의 문제는 물론 은혜와 축복을 받는 문제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따라 자기 뜻과 욕망을 내려놓은 것이다.

때로 사랑하는 자녀가 불순종하면 순종을 통해 축복으로 이끌려고 고난도 허락하신다. 내 순종을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하나님이 나의 순종하는 삶을 보고 계심을 기억하.

성공적인 교회생활을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덕목이 순종이다. 봉사와 헌금을 많이 해도 순종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흔히 순종을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알지만 순종은 낮거나 열등한 자의 실천원리가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열등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섭리를 이루려고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

 

능동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최고로 교회를 사랑하고 돕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천만 성도라는 다수의 숫자를 내세우지만 말씀대로 살려는 소수의 성도가 사실상 더 중요하다.

 

 

 

 

 

 

 

 

 

 

공주병에 걸린 박집사님.

 

주일날, 거울 앞에서 갖은 폼 다 잡고 요술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지?"

“바로 박집사님이죠!”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고 착하지?”

"박집사님!"

 

그런데 갑자기 거울이 자기도 교회에 가야한단다.

 

"오늘은 저도 교회 가야 해요! 회개힐 게 있어요!”

 

"뭔 데?"

“오늘도 거짓말을 했거든요!”

 

 

 

 

 

 

 

 

 

 

 

 

 

 

 

‘정통과 이단’, ‘신학과 이데올로기’는 한 끗 차이다.

‘정통(正統)’이 삐끗하면 ‘이단(異端)’이 되고 ‘신학(theology)’이 삐끗하면 ‘이데올로기(ideology)’가 된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 only oneness)이 삐끗하면 ‘단일신론(monarchianism)’이 되고,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삐끗하면 ‘삼신론(tritheism)’에 빠진다.

 

‘하나님의 형상’ 인간관이 삐끗하면 ‘인간의 신격화’로 흐른다. 선택(Election) 교리가 삐끗하면 배타적 ‘선민주의(Ethnocentrism)’로 흐르고, 기독교의 유무상통(행 2:44-45)이 삐끗하면 ‘공산주의’가 된다.

 

전통적 성경 해석의 원리인 문자적·역사적 해석이 삐끗하면 ‘율법주의’가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

그만큼 순수한 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고 성경을 오독(誤讀)하기 쉽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누룩비유에서처럼, 말씀에 인간의 사상이라는 ‘누룩’이 가미되면 온 신앙이 망쳐진다(눅 16:6-12, 고전 5:6).

 

신앙엔 조그만 오류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언제나 종교개혁자들이 모토(motto)로 내걸었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라’는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물론 이 말씀조차 이단들에 의해 ‘이현령 비현령’되어 왔다. 역설적이게도, 이단들이 가장 잘 쓰는 말이 ‘성경적(聖經的)’이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외쳤던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2)”는 언제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이는 단지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일뿐더러, 성경을 듣는 자가 성경을 취사 선택하거나 편견을 갖고 듣지 말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들려지는 대로 들으라는 뜻이다.

 

‘성경신학자’들은 ‘조직신학자들’을 향해 “성경을 ‘조직화(組織化)’하면, 필연적으로 성경의 일부 진리를 간과(看過) 부각(浮刻)시키거나, 혹은 인간의 생각이 개입될 수 있기에 ‘조직신학’이라는 용어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공격한다. 조직신학자들 역시 성경신학자들의 그런 공격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다.

 

그들은 ‘성경 신학’이라는 용어 안에 이미 성경의 조직화가 상정(上程)된 것이니, 둘 다 ‘오십 보 백 보’라고 주장한다. 유치한 논쟁 같아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인간의 사상이 들어가거나 작은 진리라도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성경존중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신학자요 구(舊)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 교장이었던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가 말한 대로, 인간의 이성은 본능적으로 체계적이어서 상호 모순되는 진리를 동시에 수용하거나 비체계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이는 협의적(狹義的)으로는 자기 신앙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서이고, 광의적(廣義的)으로는 이단이나 다른 신학에 대해 변증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인간 이성은 신학의 체계화를 요구한다. 교리 공부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딜레마(dilemma)도 있다. 곧 성경을 교리화, 체계화로 인해 일부 성경 말씀을 간과(看過) 부각(浮刻)시키거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킬까(마 23:24)’하는 우려이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겠지만, 이즈음 디오시니우스(Dionysios)가 부정신학(否定神學, negative theology)을 부르짖었던 것이 혹,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므로서 하나님 개념을 제한할까 하는 염려에서였던가?’ 라는 상상도 해 본다.

 

특히 ‘목회신학(牧會神學)’에서 일부 성경의 간과(看過)와 부각(浮刻)은 ‘이론 신학’에서보다 더 크게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목회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신학 이론을 보이는 현실로 구체화하는 것이기에, 목회에 신학이 잘못 접목되면 성도들의 삶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교회 전체의 방향성까지 잘못 설정하게 한다.

 

이단들이 개인을 광신적으로 만들고 가정을 파탄시키는 것도 거짓 선생들의 왜곡된 목회 부산물이다. 그런 일들은 개인의 성경 오독(誤讀)으로는 생겨나지 않고 거짓 스승들의 구체적인 가르침과 적용을 따름으로 생겨난다.

 

목회자들은 열매(교회 부흥)를 얻는 일에 우선을 두는 실용주의(pragmatism, 實用主義)의 유혹에 늘 직면해 있기에, 성경이나 신학을 목회에 접목시킬 때 자신도 모르게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으로 흐르기 쉽다. 어떤 경우엔 보다 적극적으로, 소위 ‘목회철학(牧會哲學)’이라는 것을 세워놓고, 성도들을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몰아가기도 간다.

 

그러나 사실 ‘목회철학’이라는 용어는 성경적인 용어라기보다는 목회자가 교회를 자기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설정한 목회자의 신념이나 사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목회(실천) 신학’이라는 말을 쓴다.

 

물론 목회자가 신학적 분별력이 있고,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인 목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면 별 문제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잘못된 목회관을 갖게 되면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심리학, 철학, 경영학 같은 인본적인 기법들을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목회철학’을 의식화(意識化)하고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성도들을 이끌어가게 되고, 나아가 에너지를 집약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그 결과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役事)로 굳게 확신하게 되고, 더욱 일로(一路)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거기에는 반드시 다른 성경 진리들이 간과(看過) 부각(浮刻)되거나 희생되게 된다는 점이다. 꼭 이단으로 빠지지는 않을지라도 성경적인 목회를 구현하기가 불가능해지고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못쓰게 하듯, 작은 왜곡된 가르침이 성도들의 신앙과 삶 전체를 오도하게 된다.

 

이는 교회사의 궤적(軌跡) 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계몽주의, 실존주의, 신비주의, 해방신학, 종교다원주의, 뉴 에이지, 자유주의, 무교회주의, 번영신학 등이 다 일부 성경의 간과(看過) 혹은 부각(浮刻)의 결과로 나온 것들이다.

 

수년 전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 Rick Warren)> 역시 그 한 사례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그 책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미국까지 날아가 저자가 인도하는 세미나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 거기에 대한 평가는 성경을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으로 이용하면, 성경을 짜깁기하게 되어 성경 진리를 왜곡, 희생시키게 된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국에서 유행된 ‘3박자 구원’, ‘4차원 신학’ 등도 이미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다.

<불가능은 없다(Move ahead with possibility thinking, 적극적인 사고 철학을 담은 자기계발서)>의 저자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1926-2015)의 수정교회 몰락도 그러하다.

 

미국의 유명한 TV 전도자요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 전도사인 ‘조이스 마이어(Joyce Mayer)’목사가 최근에 “인간에게 닥치는 환난은 믿음의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다”는 고백들을 내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자훈련(disicple training)’은 이미 오래 전에 신학화(神學化)되고 보편화(普遍化)되었기에, 지금 그것에 딴지를 거는 것은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나, 한 마디만 해야겠다.

 

성경은 '제자훈련주의(disicple trainerism)'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마 22:16)’로만 말하지 않고, ‘구주와 죄인(딤전 1:15)’, ‘아버지와 아들(요 1:12)’, ‘목자와 양(요 10:11)’, ‘머리와 지체(엡 4:15)’, ‘남편과 신랑(엡 5:23)’ 등 다양한 관계로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둘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출 때, 필연적으로 여타의 관계는 ‘간과’ 혹은 ‘희생’된다. 춘천 ㅎ교회의 ‘부활신학’도 성경의 특정 부분을 부각(浮刻) ‘간과(看過)’시킨 결과이다. 그리고 근자에 분당 S교회의 ‘ㄷㅎ신학’도 약간의 우려를 들게 한다.

 

그리스도는 동행의 대상이전에 ‘믿음의 주(히 12:2)’이시다. 꼭 ‘동행’을 말해야 한다면, 동행과 유사한 의미를 가졌으면서도 ‘연합’과 ‘친근성’을 포괄한 ‘내재(갈 2:20)’가 더 성경적이다.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근자엔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소위 ‘ㄷㅎ훈련’의 신학화 작업을 하는 듯하다. 초치(招致)된 신학자들이 그것의 신학적 빈틈을 메워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단지 신학적인 담보(擔保)를 해 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크게 염려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목적 지향(志向)’이 아닌, ‘성경 지향(志向)’임을 말하고자 한다. 교회는 ‘꿩 잡는게 매’라는 속담을 구현하는 ‘실용주의 공동체’가 아닌, 성경을 좇는 ‘말씀 공동체’이다.

 

아무리 겉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풍성해도 그것이 진리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열매가 많을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will drive good money out of circulation)’는 서양 속담대로, 진리의 구현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예수님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3-14)”고 했다.

 

오늘 한국교회에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목적 지향(志向)’의 왜곡된 신앙을 버리고, 종교개혁의 정신인 ‘성경으로 돌아가는(Back to the Bible) 것’이다. 심리학, 철학, 경영학에 채색(彩色)된 ‘종교 이데올로기(religious ideology)’를 버리고, 말 그대로 ‘순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은 16세기 일어난 기독교의 한 종파운동이 아니라, 중세 1천년 간 로마 가톨릭이 폐기했던 ‘성경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성경의 재발견’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루터가 주창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5 솔라(Five Solas)로 세분된다. 곧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예수(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 영광(Soli Deo Gloria) 이다.

 

오늘까지 기독교는 종교개혁자들이 전수해준 이 5 솔라(Five Solas)를 5백 여 년 이상 견지해 오고 있다. 이는 5백 년 간 그것이 수많은 검증과 확증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부작용이 없다. 이 하나하나는 성경 전체를 대변하며, 이 하나하나를 가르치는 것은 성경 전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런 검증받은 복음의 핵심이 있는데도, 이것을 제쳐두고 자신만이 깨달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있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지금껏 수도 없이 부침(浮沈)했다. 오늘 새롭게 등장하는 이단들도 다 이전 것들의 복사판일 뿐이다.

 

기독교 역사 2천여 년 어간에 뭔들 안 해 본 것이 있고, 뭔들 안 들어본 것이 있었겠는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전 1:9)”는 말씀 그대로이다.

 

용기인지 만용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어느 한 곳에선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새로운 진리에 감격해하며 그것을 펴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후에라도 자기의 신앙과 신학이 무르익어, 자기가 만들고 파급시켰던 ‘목회 철학’이라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땐 어떡할 것인가?

 

그 동안 자기에게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영혼들을 어떻게 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당할 국문(鞫問)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목회자가 심각하게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특별히 목회자들께! 여러분의 신앙과 목회의 기반은 심리학, 철학, 경영학에 채색(彩色)된 ‘종교 이데올로기(religious ideology)’인가 ’성경‘인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

(인천반석교회)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한국 뿐 아니라 이민교회에서도 교인들이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소위 은혜가 넘치고 훈련을 잘 시킨다는 교회에서도 이단의 꼬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듣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부흥할 때나 약할 때,  언제나 이단의 문제는 있어왔다. 거슬러 올라가 초대교회에서도 이단의 문제는 있었다.

예를 들면 에비온파, 영지주의(靈知主意),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몬타누스주의(Montanism) 등이다.

 

어째서 교인들이 이단에 빠질까?

 

첫째터널 효과 때문이다.

젊은 엘리트가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킨 테러리스트가 됐다. 한 평범한 젊은이를 테러리스트로 변모시킨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일본의 심리학자 오카다 다카시는 ‘터널효과라고 풀이했다.

 

“그들이 변한 이유를 푸는 열쇠는 터널이라는 장치에 있다. 과연 터널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 터널은 가늘고 긴 통로로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가면 출구까지 빛이 없다.

터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외부세계로부터 차단된다는 점과 시야를 작은 한 점에 집중시킨다는 점이다.

터널을 빠져 나가는 동안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차단되고, 출구라는 한 점을 향해 가는 와중에 어느 지점에서 시야가 좁아지는 시야 협착 증상이 나타난다. 이 두 요소가 평범한 젊은이를 가차 없이 수백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테러범으로 변모시킨다”(오카다 다카시, 황선종 옮김, <심리조작의 비밀>, 어크로스, 2016, 26~27pp).

 

평범한 사람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터널에 집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외부와 차단된 곳에 장시간 두면 시야 협착증상으로 시야가 좁아지고 한 가지 출구로만 걸어가게 된다.

 

일본의 심리학자는 테러리스트의 변모 과정을 터널효과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단사이비의 구조와 대한민국 사회유사성을 터널효과와 연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이단사이비단체가 터널 통로가 하나밖에 없는 그래서 시야협착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장소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사회 또한 ‘터널’과 비슷하다.

 

초중고부터 일찌감치 좁은 교실에서 대학이라는 한가지 목표로 교육을 받는다. 대학이라는 지점에만 목적을 두는 게 마치 터널 구조와 같다. 대학에 가선 또다시 취업 준비를 위해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오랜 동안 터널에 있어온 사람들이란 점에서 극단적 선택에 익숙하다.

 

이단 사이비와 관련한 1950년대의 기사를 보면 대다수 ‘무학자’들이 이단에 빠졌다는 기록 있다. 그러나 현대 이단은 전혀 다르다. 엘리트, 지식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터널 속에서 살아온 세월만큼 다른 터널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심리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이단·사이비의 미혹에 취약한 심리적 요인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불안한 미래 때문이다.

 

2인 1조 씩 짝을 지어 다니는 안상홍증인회(하나님의 교회) 신도들의 포교방법의 특징 중 하나는 종말에 대한 공포감을 준다.

 

세계의 테러 소식, 전쟁, 기근, 쓰나미, 지진 등에 대한 기사들을 태블릿PC에 담아갖고 다닌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미래에 대한 공포감을 자극한다. 이는 이단들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접촉점이다.

 

“세계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말하면서 숨 가쁜 세상 멸망의 카운트다운을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절박한 위기의식에 빠지도록 한다.

무시무시한 세상의 종말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 이단들의 공동체에 가담해야 된다고 역설한다. 사람들은 세상의 문제들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일 때 결국 초인적인 해결에 소망을 둔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 기성교회에서는 그렇게 절박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이단들로부터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세상의 위기에 대해서 듣고 나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불안에 떨고 공포감에 젖는다.

그때 바로 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해결방안과 안정을 줄 수 있다고 하여 미혹한다. 한국의 이단 종파들 중에 말세 심판의 위험을 내세우지 않는 집단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98년, 88p).

 

기독교이단연구는 30년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이단사이비단체에 대한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셋째, 확신을 얻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 단체에는 신의 현현을 입은, 하나님이 임재한 실물 우상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귀로 들을 수도 없는 하나님을 그들은 보여준다. 이것이 신도들에게는 다른 매력으로 다가간다.

 

어떤 이단단체 사무실에 ‘주님 집무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신도들은 집회 공간뿐 아니라 사무실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곳에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이들은 2008년에도 “하나님이 현현하신 것이다. 육안으로 보면 사람인데 영안이 열려서 보면 예수님 자체예요”라며 교주를 신처럼 추앙했다.

 

신천지 신도들은 “오늘 나신 만희 왕께 찬양하며 경배하자”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만희 교주가 해외 방문을 마치고 2014년 7월 18일 귀국연설을 하자, 사회자는 ‘만왕의 왕 총회장님!’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단단체에는 실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람을 ‘신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며 하나님처럼 모시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물로 나타내주고 신도들에게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하던 말씀을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풀게 해 주셨다’고 늘어놓는다. ‘이런 말씀은 어디 가도 못 듣는다’ ··· ‘14만4천’(계 7:4, 14:1~5)에 대해서 내세우지 않는 이단은 거의 없다. 모두가 14만4천은 자기네들 만이라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물론 통일교, 전도관, 새일파, 장막성전 모두 다 그렇다” (탁명환, 위의 책 86~87pp).

 

현대인은 틀렸음에도 정확한 확신 ‘다 틀렸어! 이게 진리야’라는 확신을 갖고 싶어 하는데 이 심리가 이단에 빠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넷째, 교회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 바른 복음에 대한 확신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확신은 이 세상을 더욱 당당하게 사는 힘이 된다. 이단의 공격을 능히 이겨낼 힘을 얻게 되기도 한다. 확신이 없는 사람은 이단이 미혹의 손길을 뻗쳤을 때 바로 허물어진다.

 

모 교회 집사가 길을 가다가 버스 광고를 보고 필이 꽂혔다. 대전에서 진행하는 ‘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란 집회였다. 정말 가고 싶었다. 목사님께 전화했더니 “이단단체의 집회다”며 “가지 말라”고 막았다. 이 집사는 ‘목사님이 뭐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도 계속 그 문구가 생각났다. 결국 남몰래 집회를 갔다.

 

기성교회에는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이곳에만 참 복음이 있다는 말씀(?)을 들은 후 결국 그곳에 빠지고 말았다. 이단 집회에 가서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얻어버린 경우다. 만일 이 집사가 원래 다니던 교회에서 만족스런 신앙생활을 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었다면, 거듭남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이단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단대처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단에 대한 상식을 키워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이 이단을 알고 구별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한다. 번영의 신앙만 강조하지 말고.   좀 어려운 말일까? 기독교 변증론을 가르쳐야 한다. 신앙생활은 영적인 싸움이니까.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는 이단도 포함을 시킨다면 10대 교회 중 상당수 이단 단체가 들어가는 게 현실이다. 교주를 신격화하는 단체 중에도 정통교회 부럽지 않게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곳이 있다.

이만희 씨를 보혜사, 구원자, 이긴 자로 믿는 신천지만 해도 20여만명에 달한다. 갈수록 이단이 대형화되면서 이단 신도들은 포교에 더욱 열을 낸다.

반대로 정통교회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있다. 여러모로 성도들이 이단들의 접근에 노출되기 쉬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교회는 복음을 지키고 성도를 지켜야 한다.(장재언)

 

 

 

 

 

 

 

 

 

 

 

 

 

 

KWMA가 7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제29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KWMA가 7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제29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2018년도 선교사 파송 집계 결과 12월말 현재 171개국에서 27,993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대비 557명이 증가한 숫자이다. 지난 7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제29회 정기총회를 개최한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는 이날 '2018년 12월 한국 선교사 파송 현황'을 발표했다.

KWMA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지난 2016년 마감된 파송증가 '0'포인트는 위기감을 포함,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한국선교가 무엇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줬다"며 "다만 2017년 전년대비 231명 증가가 이뤄졌는데, 앞으로 한국 선교사 파송 수는 완만하게 증가 곡선을 그리면서 지속적으로 둔화된 양적 증가를 보일 것"이라 했다.

 

교단 선교부의 약진

특별히 이번 조사결과에서는 교단 선교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물론 주요 교단이나 선교단체에서는 다양한 이유로 마이너스로 마감한 곳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 KWMA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부지런히 힘써서 복음 전파를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라 평가했다.

 

특별히 교단 선교부는 꾸준히 '자기 정화'를 하면서도 선교사 파송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선교단체들 역시 파송 수치에 변화를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미비함을 보이고 있다. KWMA가 보유한 파송 선교사 조사 대상 단체는 190여 개가 되지만, 10명 이상 선교사가 있다고 표시한 단체들은 130여 개 정도이다.

 

KWMA는 "전체적으로 조사 대상 선교단체가 많아 교단 선교부 파송 선교사보다 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유의미한 단체로 제한한다면 교단 선교사 수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면서 "한국교회가 어려워질수록, 단체 파송 선교사 증가보다 교단 선교사 증가가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KWMA는 "비자 장벽이 점점 높아지는 선교 환경과 맞물려서 생각해 본다면, 목회자 배경의 선교사들의 증가 현상은 미래 한국선교가 무엇을 전략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며 "파송수가 ‘늘었다·줄었다‘라는 단선적 결과보다, 통계가 주는 이면적인 의미를 읽는 통찰력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수치로 보는 2018년 파송 현황

 

1000명 이상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선교부는 3곳이다. 100명 이상은 14곳, 20명 이상은 9곳, 그 이하는 12곳으로, 모두 38개 단체들이었다. 또 100명 이상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단체는 36곳이었다. 50명 이상은 30곳, 10명 이상은 72곳, 그 이하는 46곳으로, 모두 184개 단체였다. 전체 교단선교부 파송 숫자는 12,686명, 선교단체는 16,428명이었다.

 

이중 파송의 수는 미비하지만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아래 막대그래프를 통해서 보면, 파송수의 증가가 완만하게 흘러가고 있음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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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명 이상의 파송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국가는 171개국 가운데 한국(본부 사역자 포함)을 포함해서 13개국이다. 13개국의 선교사 수를 합하면 전체 파송 선교사의 수의 50%를 조금 상회한다.

순위를 보면, 동북아X국이 2016년과 2017년에 이어 파송 선교사 최다활동국가로 선정됐으며, 이어 미국, 일본, 필리핀, 태국, 동남아I국 등의 순이었다.

4년간의 추이에서 나타나듯이 한국 선교사들의 주 활동 권역은 아시아 지역이다. 한국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아 권역(한국 본부를 포함해서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중앙아시아)에서 17,751명(61%에 해당됨)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KWMA는 "지리적인 측면을 포함, 돌파가 일어나지 않은 거대 종교권 지역이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또 많이 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사역으로는 교회개척, 제자훈련, 복지/개발, 캠퍼스, 일반 교육 등이며, 어린이/청소년 사역, 의료, 신학교, 비즈니스, 선교행정과 동원 등의 사역도 다수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KWMA는 선교사 자녀 현황에 대해 조사를 벌여 연령과 거주지 등을 파악해 보고했다.

 

선교 과제들의 발견

 

KWMA는 이번 조사를 통해 "선교사들의 고령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고 밝히고, "한창 일할 수 있는 40대가 많은 것은 아직은 한국 선교가 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 감사하지만, 40대 이하인 30대와 20대와의 수치는 격차가 크게 나타난다"면서 "20•30대가 미래 선교를 이끌어 갈 잠재적 리더들인데, 이들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2018년 은퇴 선교사는 응답해 준 것에 따라서 829명에 달한다고 KWMA는 밝혔다.

KWMA는 "60대 이상의 선교사가 2,700여 명인데 전체 선교사(27,993명)로 확대 유추해 본다면 4,748명 정도가 은퇴 직전의 선교사"라면서 "20·30대 선교사보다 60대가 더 많은 것, 미래 무엇을 준비하고 강조해야 할지 말해주는 지표들"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KWMA는 "현장과 한국에서 조사되는 수의 차이가 존재 한다"고 말하고, "2012년, 한국에서 발표되는 전체 파송자 수보다는 적어도 1만 명 정도는 더 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며 "선교 현장과의 협력을 통해서 현장의 실제 수를 조사하는 것도 과제"라 했다. 덧붙여 "기초자료로서의 충실한 통계자료 제작을 위해 협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했다.

 

 

 

 

 

 

 

 

 

 

 

 

 

 

하이얼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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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 Movement(KCCC) 주관, 미주성시 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미주 한인 유스그룹과 대학생들을 예수의 군사로 키우기 위한 Higher Calling 컨퍼런스가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지난달 두주에 걸쳐 진행된 HCC 남가주는 물론, 하와이와 동부 뉴욕에서도 동일한 행사를 열었다.

전체 인원 15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행사에서는 대학생들과 Youth 컨퍼런스로 나뉘어 각기 지역과 모임의 특성을 살려 행사가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UNASHAMED”(롬 1:16) 라는 주제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자랑하는, 더 높은 부르심으로 나아가며, 자기의 자아 정체성을 그리스도안에서 찾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 및 자원봉사자들은 “다음 세대를 세워 갈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도전하며 복음의 능력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설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행사는 샌디에고 ‘타운 & 컨트리 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가운데, 멀리 베이커스 필드 지역교회에서도 참석하였고, 북가주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지역에서도 참가하였다.

북가주의 한 지역교회는 12월 19일부터 21일까지 대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HCC에 참석하고 이어서 크리스마스 이후인 27일부터 29일까지 열린 Youth HCC에도 참석하며 귀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행사의 준비 위원장인 박종술 목사는 “이메일을 통하여 참가자 학생들의 평가서가 계속 도착하고 있는데, ‘Very Nice, Excellent’ 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복음안에서 한 영혼 한 영혼들이 세워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되어서 감동이 된다”라고 평가를 했다.

대회장 송정명 목사는 격려사에서 “이 미국 땅에서 하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다음세대를 이끌어갈 주역들이 바로 여러분”이라고 강조하며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여러분들을 통하여 새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쓰여지게 될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웠다.

 

 

 

 

 

 

 

 

 

 

 

 ‘필리핀의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리는 박누가(60, 본명 박삼철) 선교사가 지난해 8월 새벽 2시 별세했다.
 

의사이며, 목회자인 박누가선교사는 1989년 필리핀 땅을 밟은 뒤 지금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진료사역을 하면서 필리핀 오지의 환자들에게 찾아가 선교활동을 펼쳐왔다. 
 

또한 마닐라 파라냐케에서 진료비가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누가선교병원을 운영해 왔다.
 

박 선교사는 위암, 간 경화, 당뇨 등을 앓으면서도 필리핀 의료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




박누가 선교사 / KBS1 ‘인간극장’ 방송캡처

 

 

박 선교사의 삶은 2012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KBS1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소개돼 반향을 일으켰다. 박누가 선교사는 KBS 감동대상 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 선교사는 2016년 위암 재발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별세했다. 투병가운에서도 필리핀 하오빌에 현지인을 위해 병원을 세우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박누가 선교사를 곁에서 지켜보던 품성사관학교 한창수 교장은 “낯선 이국땅에서 모두 떠나도 살 수 없는 척박한 세상에서 수없이 갈등하면서도 이 땅 필리핀을 사랑했던 이쁜 사람”이라면서 “오랫동안 암과 싸우느라 고생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과 그의 삶의 마무리를 위해서 끝까지 함께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터키 이스탄불

 

터키 이스탄불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터키 최초의 교회 건설이 오는 2월 시작된다. 
 

이스탄불 당국자에 따르면 지난 8일, 2년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한 서류가 완료되었다고 말했다. 

 

에이전시 아나둘로(Anadolu)에 따르면 교회가 완공되면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1만 7천명에 달하는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의 시리아 정교회 대표 유수프 세틴(Yusuf Cetin)은 "우리는 이 땅의 터키 깃발 밑에서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AFP 통신에 따르면 새로운 교회를 위한 계획은 지난 2015년 처음 나왔다. 오스만 제국 이후 지난 1923년 터키에 공화국이 설립 된 이후 처음으로 교회가 건설되는 것이라고 이 매체는 전했다.
 

오래된 교회가 복원되어 대중에게 다시 공개될 경우, 거의 100년 만에 터키에서 처음으로 새롭게 문을 연 교회가 된다. 
 

피데뉴스에이전시(Fides News Agency)에 따르면 새로운 교회는 이스탄불 근처에 있는 바키르코이(Bakirkoy)의 예실코이(Yesilkoy) 지역에 지어 질 것이며 7백명 이상의 신자들을 위한 공간이 준비된다고 밝혔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터키에서 소수 시리아 기독교인이 증가한 것은 터키가 새로운 교회를 짓는 데 동의한 주된 이유 중 하나이다. 터키 당국은 이전에 최대 4천명을 수용하는 시리아 기독교인들을 위한 난민촌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레제프 아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터키 행정부 하에서 종교 자유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 2016년 정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동부 도시 디야르바키르에 남아있는 6개의 기독교 교회를 압류하여 국가 재산으로 선언했다.
 

이 결정은 아르메니아, 시리아 및 칼데아 공동체와 여러 교회 재단들 사이에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정부는 그 당시 "이 결정 뒤에는 종교적 동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마을에 역사적인 이슬람 사원을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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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사람으로 보입니다" (행전 3:1-8)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성경은 너무나 잘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그 자리에 있던 앉은뱅인데 왜 어제는 보지 못했을까?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밤이 아니라 한 낮입니다.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오후 3시경입니다. 장소는 '아름다운 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전 문 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도 베드로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은 유대인의 종교관습을 지켰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서 기도드리는 것은 오래된 유대인의 관습입니다. 성전기도 역시 관습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오늘도 어제처럼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기도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과 그 장소에 가는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 되어서 스스로 걸어서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그 시간, 그 장소에 가는 것입니다.

 

가는 목적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기도하러 갔고 다른 한 사람은 구걸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베드로가 이 문으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니 베드로사람을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어제도 보았고, 그제도 보았습니다.

 

성령강림절 이전에도 보았고 그리고 성령강림절 이후에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었고, 모양도 차림새도 그랬습니다. 시간과 장소도 똑같았습니다.  한 사람은 구걸하고 또 한사람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같고, 장소도 같고, 사람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다른 것은 드로의 눈에 그 사람이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라진 사건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지금까지는 거기 있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거지가 보였을 뿐입니다. 앉은뱅이가 보였을 뿐입니다.

그는 거지를 거지로 보았지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달라진 베드로이기에 앉은뱅이 거지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와 베드로의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거지를 거지로 보던 베드로가 거지를 사람으로 보는 베드로는 다른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혼을 뚫어보는 눈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영혼구원의 초점이 흐려지면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쉴러의 시에 붙인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은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독일에서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 Martin Buber의 '나와 너' 관계를 '나와 그것'과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했고,  '타인의 얼굴이 다름 아닌 나의 얼굴'이라고 보았던 레비나스, 나아가 '타자로서의 나'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리꾀르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사조는 사람을 "사람"되게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을 불어 넣어 지으신 "영의 사람"이 보이고 그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때 세상은 회복되고 기적은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지위나 학벌이나 소유나 외모를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으로 보아야 하고 그들이 구원받아야 하고 그들이 존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누구를 대하든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있는 자나 없는 자 곧 그를 외모로 보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자들입니다.(언)

 

 

 

 

 

 

 

 

 

 

 

 

 

 

 

 

 

 

 

 

 

 

 

 

 

 

최근 설립된 TGC KOREA에서 지난 12월 26일 팀 켈러 목사의 '초대교회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라는 글을 번역해 소개했다.

 

팀 켈러 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전통적 교리를 지켜 온 크리스천들은 시대에 뒤쳐지고, 지나치게 배타적이며, 심지어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며 "그러나 역사가이자 성경 학자인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들을 냈다.

 

바로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이와우)>과 <도대체 처음 3세기 동안 왜 그들은 크리스천이 되었는가?(Why on Earth Did Anyone Become a Christian in the First Three Centuries?)>"라고 소개했다.

켈러 목사는 "그에 따르면 초대 교인들은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이 보기에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세력과 상업의 중심부에서 배제됐고, 때로는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허타도는 로마 권력자들이 다른 종교들에 비해 유독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고 말한다"며 "당시 사람들은 각기 신들을 모시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초대 교인들은 이러한 경배 행위들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유대인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유의 민족적 정체성으로 간주돼 용인됐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종족들로 퍼져갔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교도였다가 회심 후 다른 신들에 대한 경배를 거부했다"며 "이러한 거부 행위는 막대한 사회적 분열과 문제를 초래, 그들을 공적 집회에 참여할 수 없게 했다.

 

가족 구성원이나 노예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경우, 그들은 돌연히 집안의 신들을 경배하는 일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팀 켈러 목사는 "기독교의 확산은 그 문화를 구성하는 삶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사회 질서에 대한 전복으로 간주됐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좋은 시민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배타적인 부류로 여겨졌다"고 했다.

 

켈러 목사는 "1-3세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은 대체 왜 그리스도인이 되려 했을까? 왜 기독교는 그토록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일까? 사회적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기독교의 매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라고 질문했다.

 

그러면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세 가지 이유'를 꼽았다.

 

첫째, 기독교인들은 타인에게 거부감과 호감을 동시에 주는 '사회 변혁'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는 "기독교인들은 낙태와 더불어 원치 않는 아기를 쉽게 버리는 '유아 유기'의 관습을 금지했고, 이성 간의 결혼 관계 외에 모든 성행위를 피했다는 점에서 성적으로도 반문화적이었다"며 "반면 자신의 돈을 사용하는 일에 매우 관대했으며, 가족이나 민족뿐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특별히 그러했다"고 했다.

 

또 "기독교 공동체는 다민족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한 정체성은 각자의 민족적 정체성보다 더 근원적이었고, 종교상 전례가 없는 다민족적 다양성을 만들어냈다"며 "기독교인들은 자기 민족을 죽인 원수들이라도 복수하지 않고 용서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전했다.

 

둘째, 기독교는 창조자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제시했다.

 

팀 켈러 목사는 "당시 주변에는 신들이 내려 주는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동방 종교들도 각성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며 "하지만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사랑의 관계는 그 어느 종교에서도 제공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셋째, 기독교는 영생의 확신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켈러 목사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영생을 확신할 수 없었다"며 "그러나 복음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즉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치기에, 온전한 구원의 확신을 바로 지금 믿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도록 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는 온갖 종류의 신들(deities)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매우 배타적이자 사회 질서에 위협적인 대상으로 간주됐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온갖 종류의 정체성(identities)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매우 배타적이자 사회 질서에 반하는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다"며 "그런데 초대교회는 그와 같은 당시 상황 속에서도 번성했다. 왜 그러한가"라고 반문했다.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다르고 배타적이라고 놀림받은 데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끌린 것은 기독교가 '달랐기' 때문"이라며 "만일 어떤 종교에 주변 문화와 다른 점이 없고, 문화를 비판하여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특징이 없다면, 그 종교는 불필요하게 여겨져 생명력을 잃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자선, 관용, 정의, 다민족성, 평화의 중재자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인식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겠는가"라며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은 그 시작부터 성(sex)과 관련해 세상 문화와 조화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바뀐 것은 교회가 아니라 문화였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어떤 문화나 종교도 갖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와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구원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종교도, 세속주의도 이 구원을 줄 수 없다. 다른 어떤 영적 접근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없다"며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진리는 바로 기독교의 독특한 가치관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팀 켈러 목사는 마지막으로 "초대교회는 분명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며 "그러나 복음에 대한 완고한 소신으로, 그들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우리 역시 이런 변혁을 갈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헐리우드 배우 크리스찬 베일 “사탄에 감사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 “사탄에게 감사한다”는 수상 소감을 말했다.

 

크리스찬 베일은 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비버리힐즈 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바이스'의 주인공 딕 체니 전 부통령 역할로 뮤지컬 코미디 부분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에서 그는 “이 역할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 지에 대해 많은 영감을 준 사탄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사탄교회는 얼씨구나 좋다하고 트위터에 “사탄은 자부심, 자유, 개인주의의 상징이며, 우리의 가장 높은 개인적 잠재력을 외부에서 은유적으로 투영하는 역할을 한다. 베일만의 재능과 기술로 그가 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는 적절하다. 크리스찬 만세! 사탄만세!”라는 글을 남겼다. 해괴한 일이 헐리웃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제 오늘이 아니다.

 

영국 웨일즈의 하버포드웨스트에서 태어난 그는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종교적, 정치적 성향을 관찰해 온 할로우버스에 따르면, 그는 신앙이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한 네티즌은 “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베일의) 영화들을 다 버릴 생각을 하니 슬프다”고 했다.

 

한편, 딕 체니 부통령의 딸 리즈 체니는 자신의 트위터에 "사탄은 아무래도 베일에게 어머니와 누나에게 욕설을 퍼붓도록 영감을 준 것 같다"며 그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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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지평선 끝, 소실점까지 온통 황무지뿐이다. 드디어 사막에 왔다. 태어나 처음 만나는 황홀한 감정이다.

사막이라 마을이 없다. 숙소가 걱정이긴 했다. 하지만 ‘젊음이란, 두근거림이 가슴에 차오를 때 대책 없이 도전도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자약(泰然自若). 붉게 터지는 석양 속으로 돌진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젊음이라면 그 어떤 것도 도전할 수 있다. 용기 내면 환상도 실재가 될 수 있다 믿었다.

 

눈을 씀벅이며 바라본 포 코너스(Four corners·미국 4개 주가 한 지점에 모인 곳)를 관통하는 160번 하이웨이의 풍경은 평생 이야기꺼리가 될 만했다. 금세 광야의 밤이 내렸고, 별들이 불을 켜기 시작했다. 탈진한 난 그대로 모래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님, 전 이제 이곳에 텐트 치고 자려고 합니다. 제가 걱정하지 않는 게 다 주님 때문인 거 아시죠?”

 

자, 이제 텐트를 쳤으니 식사를 해야 한다. 그러데 큰일이다. 신나게 달리다 보니 그만 저녁 챙기는 걸 깜빡했다. 낮 동안 내내 마켓 들러서 음식 챙겨야 한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그만큼 매혹적인 사막에 마음을 빼앗겼던 모양이다. 쫄쫄 굶으며 여행하는 안쓰러움을 언젠가 추억담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다음 날을 생각하니 위기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도로로 뛰쳐나갔다. 진심이 만들어내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볼 때였다. 저기 저 멀리서 불빛 하나가 아른거리면서 가까워져 왔다. 나는 폴짝폴짝 손 흔들고 뛰면서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냈다.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한 대의 차가 속력을 줄이며 멈춰 섰고, 뒤에 오던 차들도 추월하지 않고 그대로 열을 지었다. 얼마든지 차선 변경해서 무관심하게 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입니다. 오늘 제가 저쪽 사막에 텐트 치고 자려고 합니다. 그런데 미처 먹을 걸 못 챙겼네요. 죄송하지만 혹시 차 안에 음식이 좀 있습니까?”

 

첫 차의 주인이 폭소를 터트렸다. 그는 여행 잘하라는 격려와 함께 물과 쿠키를 건넸다.

두 번째 차에선 중년 부부가 음료를 건네주었다.

세 번째 차에선 상황을 미리 간파한 운전자가 음식물 봉지를 통째 건네주었다. 풍성해진 나는 뒤에 선 두 차에는 손을 흔들며 그냥 보내려고 했다. 하나 마지막 차 주인은 내게 쪽지를 건넸다.

 

“용기가 대단하군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주세요. 근처에 사니깐 도와주러 올게요.”

 

모두들 밤중에 사막에 홀로 남겨진 나를 걱정해 주었다. 먹을 게 있나 차 구석구석을 뒤지고, 또 행운을 빈다며 격려했다.

그들이 건네준 그야말로 정 넘치는 음식들에 나는 한없이 감사했다. 텐트로 돌아왔다. 위기의 순간 찾아든 기쁨이었다. ‘광야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사막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실은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셨다. 황량한 사막에서조차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텐트 안에서 멋진 만찬을 즐긴 뒤 여유를 찾고 밖으로 나왔다. ‘어? 별똥별이네….’ 로맨틱한 밤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기적이 찾아든 사막이다. 사랑을 묵상하는 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1. 도리도리   2. 좌우로 회전,
3. 앞뒤로 끄덕임, 4. 좌우 옆으로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있다. 날씨가 너무 추우면 동상이나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고, 심장 마비 발병 위험이 증가한다.

 

하지만 반대로 추위가 우리 건강에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허프포스트’가 소개한 추운 날씨가 건강에 좋은 이유 5가지를 알아본다.

 

1. 염증을 줄여준다

 

다쳤을 땐 얼음찜질이 효과가 있다. 발목을 삐거나 발톱을 찧었을 때 얼음찜질을 하면 부상 부위의 온도를 떨어뜨려 염증을 막는다. 강추위는 이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

 

2011년 연구에 따르면, 극도로 낮은 온도에서 행하는 저온요법은 육상선수의 육체 활동의 피로 해소에 더 많은 효과가 있었다. 낮은 온도에 노출된 달리기 선수들의 경우 다른 처치를 받은 선수들보다 더 빨리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2. 칼로리를 태운다

 

갈색 지방은 우리 몸에 있는 자연 지방으로 다른 흰색 지방을 태운다. 연구에 따르면, 추운 날씨는 갈색 지방을 작동하게 함으로써 그냥 춥게 있기만 해도 상당한 칼로리를 저절로 태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3. 해충을 죽인다

 

겨울이 따뜻하면 여름에 모기가 엄청나게 많아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해충들은 날씨가 온화하면 번성하게 마련이다. 날씨가 영하 이하로 내려가는 추위가 계속되면 해충이 죽게 돼 질병을 퍼뜨리지 못한다.

 

4. 우리를 가깝게 한다

 

날씨가 추운 아침에는 이불 속에 안전하게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날씨 탓에 혼자 오래 떨어져 있다 보면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하게 되고 보통 때보다 더 길게 전화 수다를 떨게 된다고 한 연구는 밝혔다.

 

5. 피트니스에 집중할 수 있다

 

추울 때는 여름과 달리 비키니 차림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피트니스에 열중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