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최북지역 ‘텔 단(Tel Dan)’에 가면, 제1성전기 때의 성문이 남아 있다.
‘텔 단’은 고대 단 지파가 살았던 정착촌으로, ‘텔’은 인적이 끊겨 폐허가 된 언덕을 뜻한다.
제1성전기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봉헌한 후부터(기원전 10세기) 그 성전이 무너진 바빌론 유배까지의(기원전 6세기) 기간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텔 단은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고대 정착촌을 빠져 나오는 출구에 바로 성문 유적이 있는데, 그 앞에는 성읍 수장이나 판관이 앉았을 의자가 보인다.
성문 앞에 놓인 이 의자를 왕좌라고 부르기도 했다. 구약 시대에는 중요한 사람들이 성문 앞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한 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전에 마하나임 성문 앞에 좌정했다(2사무 19,9).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기 전에 예루살렘 성문 앞을 어슬렁거리며, 재판하려고 임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며 마음을 사려 했다(2사무 15,2-4).
북왕국 임금 아합은 남왕국 임금 여호사팟과 함께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마련된 왕좌에 앉아 있었다(1열왕 22,10).
보아즈는 베들레헴 성문으로 올라가 원로들을 앉게 한 후(룻 4,1-2), 룻과 혼인하는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했다.
아모스 5,10에도 성문의 역할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 나온다(“성문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 말하는 이를 역겨워한다”).
곧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성문에서 정치적인 또는 법적인 일들을 많이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이나 원로들이 앉아 공적인 사안을 의논하거나 백성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시비를 가려 주는 재판도 했다.
백성들은 또 성문 앞에 있는 원로들에게 가서, 법적인 문제를 문의할 수도 있었다. 원로들은 경험이 많고 연륜이 깊어, 현인으로 존경 받았던 이들이다.
그래서 주로 조언자 역할을 맡았으며(1열왕 12,6 참조), 임금 대신 재판 소임도 담당했다(곤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성읍 원로들에게 재판을 청하도록 규정한 신명 22,13-19).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도피 성읍으로 피신하려 할 때도, 그 성읍의 성문 어귀에서 원로들에게 자기 사정을 먼저 설명해야 했다(여호 20,3-4).
성 내외 사람들로 붐비는 성문에 앉아 있으면, 바깥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다. 이때 확보한 정보는 민생이나 법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다른 장소가 아니라 굳이 성문인 까닭은, 많은 수의 군중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성문 앞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성읍을 요새처럼 만들고 그 안에 거주했다. 불가피하게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전쟁이 터질 때마다 성읍 안으로 도피해야 했다(예레 4,5-6 참조).
사정이 이러니, 성 안은 주민들의 거주지로 너무 조밀하여, 사람들이 모일 만한 곳은 성문 밖이었다.
성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이기에, 그곳에서 공적으로 인증 받는 일도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성문 앞에서 히타이트 사람(헷 사람) 에프론으로부터 막펠라 동굴을 구입했으며, 그곳에 모인 히타이트 사람들이 그 매매를 인증해 주었다(창세 23,10.18).
신랑이 자기 아내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거짓 주장을 할 때도, 처녀의 가족들은 성문 앞으로 원로들에게 증거물을 가지고 가서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신명 23,13-15).
보아즈가 룻을 아내로 확정 받을 때는, “성문에 있던 온 백성과 원로들이” 증인이 되어 주었다(룻 4,11).
이처럼, 성문 앞에서 임금이나 원로들이 재판을 하거나 정치적•법적 문제들을 논하고 처리했다.
지금은 텔 단 성문이 유적으로 남았지만, 당시에는 그 성읍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였다.
이런 성문의 역할은 잠언에도 반영되어, 하나님의 ‘지혜’가 번화가인 ‘성문 어귀’에서 훈계하고 가르친다(잠언 1,20-23 8,2-4)고 했다.
잠언은, 하나님의 지혜를 슬기로운 여인으로 의인화하고, 성문에서 백성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원로, 곧 현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령화 시대로 접어 들었다. 시니어들이 많아졌다. 다른 말로 말하면 원로들이 많아진 세상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시니어가 많아져 힘이 없는 교회가 되었다느니 소망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느니 하는 말이 자주 들리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원로들과는 다른 원로들이기 때문일까?
원로들인 시니어들이 분발해야 할 세상이다. 그야말로 원로들이 뒤집어져야 할 세상이다. 원로들 때문에 교회가 지혜로워져야 하는데 교회마다 원로 때문에 말썽이라는 소리만 들려 온다. 원로들이 거듭나야 할 때이다. (장재언)
1. 애굽의 주상(Obelisk)은 우상숭배의 상징
애굽(이집트)에 가면 Luxor 또는 Karnak
등지의 옛 신전터에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것이 거대한 돌 기둥들, "오벨리스크(Obelisk)"이다.
사각진 거대한 돌 기둥 꼭대기에는 피라밋 형태로 마무리 되었는데 태양신(the Egyptian's sun-god Ra)을 섬기는 상징이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많은 수난을 겪은 후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 때 애굽의 바로왕은 요셉을 "온(On)"이라는 도시의 제사장인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시켰다(창41: 45).
그 "온(On)"이라는 도시는 태양신을 섬기는 중심지였다. 그래서 애굽의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는 바로 그 "온(On)"도시에 자리잡고 있는데 애굽의 세느수렛(Senusret I) 1세에 의하여 주전 2000(BC)년에 세워졌다.
그 도시가 지금은 헬라어로 바뀌어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고 불려지며, 히브리어로는 "벧세메스"라고 불려지는데 그 뜻은 태양의 집(The house of the sun)이다.
그 곳이 태양신을 섬기는 중심도시였음을 이름이 말해주고 있다. 태양신을 섬기는 상징으로 오벨리스크를 조각하여 애굽 전역의 신전마다 그 입구에 세웠다.
최초로 애굽을 방문하였던 그리스 사람 헤로도터스(Herodotus)가 애굽방문기를 기록하면서 그 돌 기둥을 헬라어로 "오벨리스코스(:기둥)"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태양신을 섬기는 애굽형 주상을 영어로 오벨리스크(Obelisk)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 돌기둥, 오벨리스크를 "마쎄바(: 기둥, Pillar)라고 불렀다. 우리 한글 개역성경에도 주상(기둥형상)이라고 번역되어있다.
2. 계속되는 하나님의 명령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민족으로 삼으신 후 계속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시기를 그들이 떠나 온 애굽이나 그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우상문화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레18:3).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증히 여기시기 때문이었다(레20:23). 그래서 그들의 우상들을 깨뜨리고, 헐고, 불태워 없애버리라고 계속 명령하셨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이 없기 때문이며 그의 백성들이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 우상문화를 즐기고 우상숭배에 빠질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우상문화는 그처럼 묘한 매력을 지니고있다. 오늘날 그러한 우상문화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뉴에이지 우상문화가 바로 현대의 우상문화이며 교회 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현대 교인들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문화도 즐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우상들을 깨뜨리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던 애굽의 주상이 지금도 세계 각처에서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 . ." (출애굽기 23:24-25)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상을 찍을지어다" (출애굽기 34:12-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 .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 . .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신명기 7:1-5)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신명기 12:3)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a standing image of stone) 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6:1)
“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태양의 집)의 주상들(the Obelisks of Bethshemesh)을 깨뜨리고 애굽의 신들의 집을 불 사르라 하셨다 할지니라" (예레미야 43:1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우상숭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상문화의 매력을 떨쳐버리지 못한채 깊숙이 빠져들었으며 그것이 멸망당하는 근본 이유가 되었다(렘 25:6-11).
그들은 그들의 죄악 상태를 고발하고 경고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살해하였다(마23:34-35).
그 결과 솔로몬왕 이후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외세의 공격과 수난 속에서도 끝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BC)년 앗수르에게 망하였고,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BC)년 바벨론에 멸망당하였다.
그것은 곧 구약교회의 멸망이었다.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은 말세를 만난 신약교회에 거울이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기록하셨다(고전10:11).
지금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교회처럼 우상문화에 빠져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각 민족의 문화의 배경에는 우상이 있는데, 온갖 종류의 문화가 지금 교회 안에 넘치고 있다.
3. 이태리 로마로 건너간 애굽의 주상
구약교회를 멸망시킨 우상문화 중에서도 태양신의 상징인 애굽의 주상(Obelisk)이 계속 외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고대 로마 사람들에게 애굽의 주상이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애굽 땅에 있는 애굽 주상의 3분의 2 이상을 옮겨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대부분의 주상들이 파괴되었고 소수만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래도 로마는 세계의 오벨리스크(주상)의 수도로 불려질 만큼 많이 소유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애굽의 주상이 29개가 현존하고 있는데 그 중에 11개가 이태리 로마에 있다(Wikipedia).
이태리 - 11개,
애굽(이집트) - 9개
프랑스 - 1개,
이스라엘-1개
폴랜드 - 1개,
터키-1개
영국 -
4개,
미국 -
1개
총 29개
로마에 존재하고 있는 애굽의 주상 중에서도 제일 돋보이는 것은 역시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St. Peter's Square)에 있는 높이 25.37m, 331톤)의 Piazza San Pietro 이다.
그 주상(Obelisk)은 주후 37(AD)년에 애굽에서 옮겨와 네로황제의 광장 옆(현재의 성 베드로 광장 근처)에 세워졌었다.
애굽에서 바다로 운송해 온 과정을 기록한 Pliny의 글에 의하면 331톤의 거대한 그 주상을 네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거대한 전나무들로 둘러싸서 바다에 띄운후 배로 끌어갔다고 한다.
그 애굽의 주상은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쓰러져 땅에 묻혀있었다.
1500여년이 훨씬 지난후 교황 Sixtus V는 그 쓰러져 묻혀있는 주상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고 여러 각도로 실험을 한 후 1586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은 1,000명이상이며, 말 140필, 47개의 크레인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각처에서 몰려와 구경하는 사람들로 공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주상이 세워진 장소가 바로 지금의 성 베드로광장 이다. 애굽의 주상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로마의 Laterano Basilica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서 높이가 32.18m이고 무게는 445톤이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애굽의 주상을 왜 로마가 그처럼 좋아하며 많이 소유하고 있을까?
또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그 우상의 꼭대기에 십자가를 올려놓아 기독교와 우상숭배를 혼합한 상징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외국에 옮겨진 주상들과는 달리 로마에 세워진 애굽의 주상(Obelisk)들은 한결같이 그 위에 십자가를 결합시켜 놓았다.
하나님은 그 가증한 우상을 깨뜨리고 제거하라고 명령하셨지 보존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로마 카톨릭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 한 복판에 애굽에서 가져온 주상(obelisk)의 꼭대기에 십자가를 올려놓으므로 태양신 숭배의 우상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결합시켰다.
종교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태양신 숭배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를 헐뜯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마치 로마 카톨릭이 기독교인줄로 착각하고, 로마 카톨릭이 장식한 십자가를 보면서, 기독교가 태양신 숭배의 십자가를 섬긴다고 주장한다.
로마 카톨릭이 그러한 빌미를 제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저히 욕되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기독교가 이방종교의 태양신 숭배 십자가를 도입하여 우상처럼 섬긴다고 비난하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오해한다.
4. 프랑스로 건너간 애굽의 주상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the Place de la Concorde)에 가면 한 복판에 세워진 애굽의 주상(Obelisk)을 보게 되는데 오토만(Ottoman)제국의 애굽총독이었던 므헤멧 알리(Mehemet Ali)가 1829년 프랑스에 기증한 것이다.
그 주상은 이집트 Luxor의 Amon 신전 앞에 세워졌던 것인데 약 3300년 전 애굽의 라암세스 2세(Ramses II)와 그의 통치를 신성화 하는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높이는 23m이며, 무게는 250톤이 나간다. 1833년에 이태리에 도착하였고 3년 후 현재의 콩코드 광장에 세워졌다.
5. 영국으로 건너간 애굽의 주상
런던 템스(Thames)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애굽의 주상은 일명 클레오파트라 첨탑(Cleopatra's Needle)이라고 불려지지만 실제로 애굽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Cleopatra's Needle로 알려진 주상은 파리, 런던, 뉴욕에 있는 것이며, 런던과 뉴욕의 주상들은 원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 벧세메스)의 신전에 함께 세워졌던 쌍둥이 주상이다.
런던에 있는 Cleopatra's Needle 주상은 애굽과 수단의 통치자였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가 전승 기념으로 1819년 영국에 기증한 것인데, 애굽의 헬리오폴리스 신전 폐허의 땅 속에 근 2000여년 묵어있었다.
높이는 21m이고 무게는 224톤이다. 애굽의 터트모스 3세(Thutmose III, 1450 BC)의 명에 의하여 신전 앞에 세워질 때는 단순한 석상이었으나 200년 후 람세스 2세(Ramesses II)가 전쟁에 승리한 후 승전기록을 그 주상에 새겨넣었다.
그 주상을 런던으로 옮겨 올 때 큰 풍랑으로 애를 먹고 천신만고 끝에 런던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주상은 1819년 기증 받았지만 운송비 모금이 순조롭지 못하여 58년 동안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877년 영국의 해부학자이며 의사인 윌슨 경(Sir William J. Wilson)이 운송비 10,000 파운드(Pound)를 내놓자 드디어 운송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길이가 28m, 직경이 4.9m인 거대한 철통을 제작하여 그 속에 주상을 싣고, 올가(Olga)라는 선박으로 예인하여 운송하였다. 그 운송과정에서 큰 풍랑으로 인해 6명의 선원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18세기 영국을 복음의 열기로 이끈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죤 웨슬리(John Wesley)같은 인물의 영향으로 영국은 영적으로 살아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와서는 산업화가 급격이 확산하면서 농업 중심의 경제는 자본주의 시대로 전환되는 혼란의 시기가 왔다.
그 후 영국의 복음주의도 사회적 큰 변화와 혼란 속에서 서서히 세속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틈을 타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애굽의 주상이 들어와 도시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6. 미국으로 건너간 애굽의 주상
종교개혁 이후 왕성한 복음의 중심지였던 유럽의 프랑스와 영국의 수도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애굽의 주상이 옮겨지는가 하면 19세기 복음의 열기가 절정에 이르러 온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던 미국에도 그와 같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애굽의 주상이 미국 수도의 한 복판에 옮겨지게 되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던 1869년, 애굽과 수단의 지도자였던 케다이브(Khedive)는 미국의 통상협조를 구하면서 애굽의 헬리오폴리스 신전에 세워졌던 Cleopatra's Needle 주상을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
드디어
1879년에 공식으로 기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 미국의 철도왕인 윌리암 반더빌트(William H. Vanderbilt)가 운송비 $100,000을 제공하자 운송에 착수하여 미국의 증기선 디구스(Dessoug)호에 실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대서양을 거쳐 미국으로 운반되었다. 지금 NewYork, Central Park에 있는 Obelisk가 바로 1881년 2월에 세워진 그 애굽의 주상이다.
애굽의 우상문화가 복음의 열기가 왕성하던 미국 내에도 스며들면서 정부기관의 중심부에도 자리잡았는데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1884년 세워져 백악관과 정부청사를 마주보고 있는 워싱톤 기념관(the Washington Mounment Obelisk)의 주상이
바로 그 애굽형 주상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와싱톤(George Washington)을 기념하기 위하여 1848년에 공사를 착수 하였으나 기금 모금의 부진과 미국의 남북전쟁(the Civil War: 1861-1865) 등의 이유로 공사가 중단 되었다가 근 30년이 지난 1884년에 관석(Capstone: 주상 꼭대기의 피라밋)을 장식하며 공사를 마쳤다.
1885년 2월에 낙성식을 가졌고 1888년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애굽형 주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555 feet)을 자랑하지만 복음이 왕성하던 시대의 미국이 하나님 앞에 큰 수치를 드러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고전10:1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偶像)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嫉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 20장 1-17절...(장재언)
▲강석진 선교사
복음통일 전문가 세미나가 진행되던 2월 14일, "북한지하교회의 실체와 성도의 신앙"을 강의한 강석진 선교사를 세미나 장소인 미국 파세디나 사랑의빛 선교교회에서 만나 그들의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강 선교사는 1992년 압록강 건너편 중국 단동 지역에서 북한선교를 시작해 북·중 접경지대에서 탈북민과 북한 지하교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왔으며, 극동방송을 통해 대북 설교 방송과 통일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현재 북방선교회, 충주양의문교회, 새하늘선교회에 소속되어 선교 담당 목사로 섬기고 있다. 2015년 북한 실존 인물을 소설화 한 "오래된 소원: 반세기만에 평생 소원 이룬 북녘의 나오미 감동실화"를 펴낸 바 있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사역을 소개해 주세요.
"92년 신의주 건너편인 압록강 단동지역에서 북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백석 교단 소속 선교사입니다. 91년도에 하얼빈 지역 조선족 처소 교회를 순회하는 사역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교회를 짓기 위해서 92년도에 다시 들어가서 돌아오는 길에 중국 단동에 들렸습니다. 그것이 북한선교를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때가 92년 10월 10일입니다. 이른 아침에 압록강 강변에 나가서, 건너편 신의주를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이었는데, '하나님 붉은 해가 떠올라 어둠의 땅을 밝혀 주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해가 떠올라서 북한의 주민들을 비춰주소서'라고 기도했어요. 그냥 구경하러 갔다가, 하얼빈교회에 조선족 교회 짓는 일을 위해 갔다가, 그곳을 보고 그런 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그 기도가 북한 선교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그 분이 피난 오시기 전, 신의주의 제일교회 목사님이셨어요. 저는 (북한이) 공산화 되기 전에 영락교회 청년부에 있었고요. 당시 한경직 목사님께 보고를 드렸어요.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 건너편의 신의주 지역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1933년에 단동 제2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옛날에는 신의주하고 단동하고 같은 노회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보린원이라는 고아원을 하셨는데 남쪽에 피난 올 때 꼭 데리고 오고 싶으셨던, 김복순이라는 다리 하나가 없는 고아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강 목사가 단동에 다시 가서 김복순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보고 있으면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영락교회 집사님과 (압록강 단동 지역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한 목사님이 이 부탁을 하실 때 연세가 90세가 넘으셨었는데, 저희 옆에 앉아 계시던 큰 따님이 '우리 아버님은 그 분(김복순) 얘기만 나오면 울먹거린다'며 '지금 살아 계시다면, 연세가 60쯤 됐을 걸요'라고 하셨습니다.
김복순을 찾아달라고 하셔서 찾으러 갔어요. 단동에 도착해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식당 아주머니의 남편(박 사장)이 신의주를 왔다 갔다하면서 무역을 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 남편분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죠.
제가 '가능하겠습니까?' 묻자, 그 분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무역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찾아보라고 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박 사장님도 교회 다니세요'라고 말하며 그분을 전도하기 위해 성경책을 건내 줬습니다. 그리고 '데리고 올 수 없지만 사진이라도 찍어 오세요. 한경직 목사님이 찾고 계신 그 분이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한 목사님이 만족하실 겁니다'라며 부탁했습니다.
그 양반이 신의주의 무역을 하는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에 한 목사님이라고 훌륭한 분이 계신데 김복순이라는 분을 찾고 계신다'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먼저, '해방 전에 예배당을 다녔던 분들이 있는지' 찾아 다녔고 해방전, 한경직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실 때, 신의주 제일교회에 중등부 교사였던 할아버지를 찾아냈어요.
공산화 50년에도,
나무 궤짝 안에 교회 인쇄물 보관
신의주 무역회사를 다니는 북한 사람의 도움으로 밤에 몰래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할아버지 집에 도착해, 낯선 남자 둘이 와서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리니 할아버지가 잔뜩 긴장해서, '무슨 일 때문에 왔습니까'하고 물으셨어요. 그러자 박 사장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박 사장이, 제가 전도하면서 준 조그만 성경책을 꺼내며 '할아버지, 저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자, 할아버지가 마음의 경계를 풀고 박 사장을 신뢰하게 되면서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면서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할아버지 방에 나무 궤짝이 있었는데 그것을 열더니 보따리를 꺼내셨습니다. 그 안에는 해방 전에 신의주 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 교회의 주보와 교회에 관련된 인쇄물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발각되면 큰일 나는데, 공산화가 되어서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지하교회 교인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북한의 그루터기 신앙인, 침묵으로 주일 성수
그 할아버지가 중요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주일 날이면 우리가 다녔던 예배당을 돌면서 침묵으로 주일 성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두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해방이 후 바로 공산화가 되자 자유를 빼앗긴 교회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남쪽으로 내려간 교회가 다시 이곳에 교회를 재건할 계획이 있는 지, 그리고 앞으로 통일이 되면 신의주에 교회를 재건할 계획이 있는 지를 알려 달라'고.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계시다면 90이 넘었는데 증거를 갖고 요세요. 교회 재건 계획과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갖고 오십시오.'
그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어서 한경직 목사님께 갖다 드리며 이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50년 동안 지하교회에서 신앙을 지킨 지하교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공산화를 해서 크리스천이 모두 없어졌고, 지하교인이 있을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가능성을 배제했어요. 그런데 '김복순을 찾아달라'는 목사님의 부탁에 지하교인의 존재가 밝혀졌어요.
그분은 '통일이 되면 무너져 버린 교회를 남쪽에 내려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서 남은 자들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는 꿈'을 갖고 계셨죠. 이 분 뿐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에 의해서 그 땅에 남은 사람들, 그루터기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는 이사야 6장 13절 말씀처럼 예배당을 다 없애버렸는데도 그들의 신앙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복음 통일 세미나를 통해
느낀 점을 나눠주세요.
"왜 금년에 이것을 기획했냐면, 금년이 3.1 만세운동 100주년이고 국가적인 행사들을 많이 합니다. 3.1절 당시 있던 것들을 발굴하면서 계속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동경 유학생 11명 대표가 작성한 독립 선언문을 여대생 2명이 한국에 갖고 들어와서, 그것이 3.1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에는 20만명도 한국 기독교 인구가 안됐지만 나라를 찾고자 하는 자주 독립의 선지자 의식이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민족을 각성시키는 선지자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분단한 지 70년이 지났는데 당시 크리스천들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자들이었듯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자', '믿음의 선지자들이 했던 것을 본받아서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취지에서 이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박 목사님과는 몇년 전부터 알던 사이였고 저를 여러 강사 중의 한 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지하교회의 사례와 그들의 신앙' 그리고 '지하교회의 교회사적인 역사의식과 지하교회가 통일을 여는 데 어떤 사명이 있는지' 그 두 가지 강좌를 맡았습니다."
-지하교회는 어떤 상황인가요?
"지하교회를 15년 전만 해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가 많아지고 한국 선교사들이 국경지대를 통해 사역을 하면서 지하교회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계속 하게 하셨는데, 나이 많은 사람뿐 아니라, 30대 (지하교인) 청년도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자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였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고 성경을 구했냐?'고 물어 봤더니, 밀수꾼을 통해서 성경이 신의주로 들어오고, 깜깜한 밤에 어떻게든 성경을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니 압록강과 두만강 지대에서 그런 방법으로 성경이 들어가고, 호기심으로 성경을 보다가 진리를 발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 뿐 아니라 친구들도 돌려 보고, 관계된 책도 보게 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던 거죠. 그들은 일반 노래에, '장군님' , '수령님' 대신 '예수님'을 넣어서 부르고 있었습니다.
통제된 세상 속 사람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가져
통제된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까 낯설고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신기해 합니다. 사람이라는 게 자꾸 금하면 호기심을 갖게 돼요. 해방 이후에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고 자기들끼리 그룹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1세대 지하교인들 뿐 아니라 1960년 이후에 태어나 자생적으로 크리스천이 된 2세대 지하교인들도 있습니다.
또, 한 경우는, 국경지대의 조선족들 즉, 심양, 하얼빈의 조선족들 가운데 친척이 이북에 혹은 이남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친지 방문이 가능하죠. 북한 주민이 중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하러 왔다가 친척을 통해서 전도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이 먹고 자면서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성경 공부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받는 사람들 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게 왜 가능하게 됐냐면, 92년 10월에, 노태우 대통령 때 중국과 수교가 맺어져서 한국의 선교사, 실업인, 유학생들이 중국에 가게 되었잖아요. 자연스럽게 중국 조선족을을 알게 되고 큰 교회가 없는 작은 마을에는 처소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서탑교회와 동북신학교
수십만 명의 조선속이 사는 동북삼성의 중심지인 심양에 있는 서탑교회에서 동북신학교를 만들었습니다다. 박형륭 목사가 신사참배가 극심해 지니 심양 만주의 동북신학교로 가서 가르쳤습니다. 그 지역 조선족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고 동북삼성에 가정교회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중국의 처소교회들이 상당히 부흥되었습니다. 또,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 선교단체를 통해서 장기 양육을 받고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면, 이들을 통해서 본토의 한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 중국 선교로도 확산되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대기근 통한 북한의 복음화
그러다 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94년에 김일성이 죽고 97년부터 북한의 어마어마한 기근사건, 일명 고난의 행군 때 북한에서 많이 넘어 왔습니다. 그 당시 3~4년 동안 300만명이 굶어죽었습니다. 많은 북한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러 압록강을 건넜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이 압록강 건너편의 조선족 처소교회였습니다. 그 배후는 한국의 선교사들과 미국의 한국 선교사들의 지원이 있었죠.
난민 사태가 96년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졌고, 저도 그때 탈북자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렇게 탈북민이 많아지면서 북한에 복음이 많이 들어가게 됐고 하나님께서 대기근을 통해서 북한이 복음화가 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대량 탈북사태, 중국의 강제 송환으로 이어져
그런데 대량 탈북 사태가 국제적인 문제가 되니까 중국 정부가 탈북자를 체포하는 작전을 썼습니다. 국경지대에 불법 도강해 온 이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북한 당국에 넘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양육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돌아간 사람, 성경 매고 자발적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체포되어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이 가가호호 다니며 잡아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송환됐습니다.
압록강 두만강 접경 지대에 검문이 강화되니 이 사람들이 거기 있을 수 없게 되어 동북삼성의 큰 도시로 도피를 하게 되었죠. 중국이 계속 탈북자를 색출하고 강제 송환하기 위해서 공권력을 투입해서 탈북자가 거주하는 게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에 와서 자유를 만끽하니 돌아가기 싫어졌죠. 그래서 몽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루트가 개척됐고, 2천년대 초부터 대량으로 많이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탈북민, 남성에서 여성으로
처음에는 남자들이 주로 왔는데 점차 여자들로 바뀌었어요. 여자들은 가정부, 식당일 등 넘어 오기만 하면 일자리가 많으니 폭력배들이 취직시켜준다고 유인해서 농촌에 있는 중국인 노총각에게 팔아 넘기고 성매매 업소에 팔아 넘겨서 큰 이슈,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제재가 심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 노동 수용소에 보내고 북한에서는 체제의 위협으로 보고 공개 처형을 시킵니다.
지도자급은 공개처형을 할 때 '남조선의 선교사를 만났다'라는 죄목을 쓰는 게 아니라 '남조선과 연계되어서 첩보활동을 했다'는 죄목을 붙입니다.
그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거의 반세기 만에 복음이 확산된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 땅에 많은 피를 흘리게 됐습니다."
‘3·1운동100주년한국교회위원회’는 지난 3월 1일 2만여 명의 성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3·1운동 100년 한국교회 기념대회’를 열고 3·1운동 100년을 기억하고 3·1운동 정신을 기도운동으로 승화시켜 8천만 민족 복음화와 750만 디아스포라 세계 선교적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서울시청광장 우편에서 시작된 이날 기념대회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트루니스찬양팀이 첫 번째 섹션을 맡아 성도들과 함께 뜨거운 찬양의 시간을 가졌으며 준비위원장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 준비위원장 김종준 목사(꽃동산교회)가 사회를 맡았다.
대회장 이승희 목사(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는 “오늘 우리는 일제 총칼에 맞서 일사각오로 ‘자주 독립’을 외쳤던 3·1정신의 계승과 더불어 순교정신으로 항거했던 선열들의 뒤를 따라 뼈를 깍는 각오와 결단으로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섬기며 민족과 함께하며 희망을 주는 교회로 나가고자 한다”고 대회사를 전했다.
이어 정서영 목사(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박종철 목사(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엄신형 목사(전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권태진 목사(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 송태섭 목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세계복음화중앙협의회 총재) 등 대회장이 나서 인사 및 취지의 말을 전했으며 이주훈 목사(예장백석대신 총회장)가 대표기도했다.
또한 윤보환 감독(영광감리교회)이 ‘거룩한 기도 연합, 3·1운동’, 림형석 목사(예장통합 총회장)가 ‘한국교회의 다음세대에 대한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메시지를 전했다.
윤보환 감독은 메시지를 통해 “3·1운동은 온 교회가 나라를 살리기로 염원하며 일으킨 구국 기도 운동”이라며 “3·1운동은 하나님을 향한 민족의 부르짖음의 기도였으며 교회를 중심 한 거룩한 구국 기도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3·1운동 1백주년을 맞이하면서 기독교는 사상과 이념 싸움이나 정치적 지지 세력의 대립에서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신 나라, 꼬레아 대한민국이 되어 ‘거룩한 기도 연합, 3.1 운동’의 정신과 순교신앙을 계승하여 민족과 세계 복음화의 새로운 1백년의 리더십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림형석 목사 역시 “그때의 젊은이들은 깨어있었고 특히 기독교학교의 기독청년들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일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면서 “이제 우리의 자녀들을 신앙의 사람으로 키우고,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을 가진 민주세대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정오를 기해 한국교회 지도자와 한국교회총무단이 태극기와 3·1운동과 관련이 있는 국가들의 국기를, 300여 명의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함께 입장한 뒤 김진호 목사(기성 총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 대한민국만세!, 평화한국만세!”로 만세삼창을 했다.
특히 당시 16살부터 18살 학생과 청년들이 앞장섰던 3·1운동의 뜻을 기려 기독교학교 학생들과 교목들 24명이 나와 풀어 쓴 기미독립선언서 요약문을 낭독해 의미를 더했으며 다함께 ‘3·1절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어 참석자들이 합심하여 ‘3·1정신과 순교신앙 계승을 위해’ 통성기도 후 진행위원장 설동욱 목사(예정교회)가 마침기도를 했다. 전태식 목사(서울진주초대교회)의 성경봉독과 CCC 찬양대의 특별찬양이 있었다.
이날 ‘진리와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에 나선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100여 년 전 우리 민족의 믿음의 선진들은 일제 침략으로 자유를 빼앗기고, 참된 진리도 잃어버리게 된 현실에 매우 안타까워 했고 그래서 진리와 자유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대 한독립만세를 외쳤다”면서 “이를 본받아 우리도 불의 앞에 일어나 악과 싸워야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진리가 되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목사는 “100년 전 3.1 운동에서 참된 자유를 향해 부르짖은 함성과 정신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진정한 독립만세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것은 바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피력했다.
설교에 이어 찬양사역팀 소리엘의 축하찬양 후 임준식 목사(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대표회장), 김동근 장로(몽골기독교총연합선교회 법인회장), 두상달 장로(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박철규 목사(세계복음화중앙협의회 대표회장), 김봉준 목사(미래목회포럼 대표), 오영자 목사(한국복음화운동본부 여성총재), 김호동 목사(유럽한인기독교총연합회 사무총장) 등이 특별기도를 했다.
국내 최초 장애아동·청소년 전문오케스트라인 ‘헬로우 샘 오케스트라(지휘 : 서진, 과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의 축하연주와 각 교단 총회장인 윤성원 목사(기성 총회장), 홍동필 목사(예장합신 총회장), 윤기순 목사(예성 총회장), 김종현 감독(중앙연회 감독), 이양호 목사(복음교회 총회장), 정상업 목사(예장개혁총연 총회장)가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참가자들은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 선언문’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선배들의 선언과 목숨을 바친 희생 위에 얻어낸 이 땅의 독립과 자유와 평화를 소중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어 “우리 한국교회는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서로 연합하며, 협력함으로써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과 분열의 사슬을 끊어내 거룩한 교회를 이루며, 우리 시대에 주어진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사명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날 기념대회는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위원회’ 주최로 열렸으며, 전명구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과 한국교회 총회장들의 공동축도가 있었다.
축도 후 오야마 레이지 목사외 17명의 일본 목회자들은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라는 펼침막을 들고 사과하고 엎드려 사죄했다.
준비위원장 정성진 목사는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함께 100년 전 3·1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의 정신을 다음세대에 전하며, 계승하기 위한 대회였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최후 마사다의 최후
1. 이스라엘민족 수난의 원인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 많은 시련과 고난의 흔적을 남겼으며, 그 중에 특히 AD 70년에 있은
예루살렘의 멸망은 민족적 큰 재난이었다.
구약시대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한 사건은 끊임없는 우상숭배의 결과였다. 신약시대에 로마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한 이 사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피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임할 이 재난을 미리 바라보시고 우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시기를....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시며 슬퍼하셨다 (누가복음19:42-44).
그리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도중,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따라오는 여인들을 향하여 이르시기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고
하셨다 (누가복음23:28-30).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의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라도 비참하게 학살당할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큰 재난을 스스로 불러들인 자는 유대인 자신들이었다.
유대 총독 행정관으로 재판석에 앉은 본디오 빌라도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요한복음 18:28 - 19:42, 사도행전 3:
13-14)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부르짖기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 . ." 였으며,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 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7:24-25).
빌라도가
유대인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신의 무죄를 다짐하였고, 유대인들은 기꺼이 그것을 용납하고 자기들이 예수죽인 죄의 책임을 짊어졌다.
사실상
예수님께서 3년동안 공적인 복음사역을 하실때 그를 방해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사람들은 빌라도나 로마 군인들이 아닌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며,
그들이 원하고 바라던 일을 빌라도의 법정을 빌려서 마침내 성취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죄값을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장담하였다.
2. 예루살렘의 멸망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드디어 성취되는 시기가 왔다.
처음에는 유대인 분파들 사이에 암투로 시작되던 사건이 동족간의
내란으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로마제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중대한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암투하던 유대분파중에서
친로마파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로마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로마 군인들을 예루살렘에 불러 들였고, 반로마세력인 유대인들이
로마 군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역전의 노장인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과 그의 아들
디도(Titus) 장군을 선발하여 3개 군단과
23개 보병대와 1개 기병대 등 많은 병력을 팔레스틴 정벌에 출병시켰다.
A.D. 70년 8월 예루살렘은 다니엘9:26의 예언대로 "그의
종말은 홍수의 엄몰됨" 같았으며,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사진 -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성전의 기명들을 운반하는 장면, 로마시에 세워진 디도 장군의 개선문에 새겨 있음
이스라엘 땅에 진격해 들어오면서 성읍들을 함락시킬 때마다 로마 정예부대와 보잘것 없는 무기로 끝까지 항거하다가 죽어가는 유대인들의 참상은
처절하기만 하였다.
마침내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성을 포위하여 물샐틈 없이 토성으로 완전 차단하였고 서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 때
예루살렘성 안에서 굶어죽는 부녀자와 노인과 아이들의 수가 늘기 시작하였고, 죽은 시체를 성밖으로 내버린 공식적인 집계만도 60만명이 넘었다.
로마군에 의하여 성벽이 무너지면서 백병전이 벌어졌고 끝내는 예루살렘성전과 온 성읍이 불길에 휩싸였고 닥치는 대로 학살당하였다.
디도 장군은
가이사랴에서 자기 형제 안토니오 생일 잔치를 크게 치른 후, 많은 유대인을 처형하였는데 맹수와의 결투, 십자가에 화형, 유대인끼리 결투하다 죽게
하였다.
이 잔치날에 죽은 유대인이 2,500명이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부친의 생일 잔치에도 같은 일을 저질렀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쫓기고 쫓기면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3. 마사다의 최후
로마군은 마지막 남은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철저히 함락시키므로 로마군의 단호함과 용맹을 보여주려고 철저한 공략을 시작하였다. 우선 산을 전부
포위하여 유대인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 요새의 성벽에 접근 할 수 있는 비탈 언덕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철근과 목재를 사용하여
탑을 건축해 올라가서 마침내 그 탑 꼭대기를 성벽보다도 20 feet나 더 높게 설치하고 유대인들이 성위에 얼씬도 못하도록 계속 활을 쏘고
공성무기로 돌을 비오듯이 날려보냈다. 그렇게 공격하는 한편, 성벽 높이 만한 위치에 토성 탑으로부터 플랫폼(flat form)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성벽 파괴용 공성무기(an iron battering-ram)를 올려 놓은 후 성벽을 계속 때려서 드디어 성벽 일부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성벽을 허물고 보니 그 안쪽에 유대인이 신속히 만든 나무 목재 바리케이트가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다.
로마 군인들은 그 바리케이트를 불로
태워버리려고 불을 질렀으나 바람이 로마군의 탑쪽으로 불어와 오히려 그 탑이 불붙을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면서 바리케이트 전체가 타버렸다. 이제 승리가 확실하게 되자, 로마 군인들은 여유를 가지고 다음 날 아침에 공략하기로 하고 그 밤은 쉬었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날 밤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잘(Eleazar Ben Yair)은 유대인 모두 모이게 한 후,
그들이 로마의 노예가 되거나 로마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수치보다는 스스로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 낫다고 연설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죽이고 남자들만 남게 되자, 10명씩 조를 짜고 각 조에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씩 정한 후에 그 한 사람이 9명을 죽인
다음 그 시체들을 가즈런히 눕혔다. 그렇게 해서 최후에 남는 자는 요새에 있는 모든 비축 물자들을 불태우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그날 밤 엘리아잘이 연설한 내용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 . . . 이같은 상황에서 살아난다 하더라도 견딜 수 없는 수치감 때문에 감히 누가
해를 쳐다보고 살 수 있겠소? 비겁하게 목숨이 아까와서 쩔쩔매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목숨이 아직도 붙어 있는 것에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오. 우리의 도시인 예루살렘이 적의 손에 완전히 파괴되고 우리의 거룩한 성전이
더럽혀지고 완전히 파헤쳐진 모습을 보기 전에 함께 눈을 감자는 것이오. 우리는 우리의 도시와 성전을 파헤친 적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오.
그러나 그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던가가 이제 여실히 드러났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서둘러 용감하게
죽도록 합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처자식들에게 동정을 베풀 능력이 있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오? 아무리 복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니오? 아내가 능욕을 당하고 비참하게 끌려가는 모습이나 자식들이 노예가 되어
팔려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참지 못할 일이오. . . . .
로마군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겠소? 건강한 청년들도 수 많은 고문으로
비참해지겠지만, 고문을 얼마 못견디어 쓰러질 노인들도 비참할 것이오.
양손이 묶여 있어 꼼짝못하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그러나 아직 우리 손은 묶여 있지 않으며 칼까지 들고 있소.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영광스런 계획을 우리 손으로 실행합시다.
아직 자유로울 때에 처 자식들과 함께 이 세상을 하직하도록 합시다 . . . . .
우리를 수중에 넣고 기뻐할 로마군을 생각하고 로마군에게
털끝만큼의 기쁨도 남겨 놓지 맙시다. 오히려 로마군이 우리의 굳은 결의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우리의 죽음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시다 "
다음
날 아침 로마 군인들이 총 공격하여 들어 갔으나 고요한 침묵 뿐이었다. 오직 엘리아잘에 동참하지 않고 동굴 속에 숨어 있던 두 여인과 어린이 다섯명만이 생존해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사학자 요세푸스가 기록
그 때가 A.D.73년 5월이었다. 이 날은 마사다 최후의 날이며,
이스라엘 멸망의 최후의 날이고, 예수님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된 날이었다. 유대인들의 요청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의 형벌은 그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대물려 가면서 당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에 의하여 비참하게 예루살렘이 멸망한 A.D. 70년 이 후에,
유대민족은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으로서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방랑객이 되었고, 어디를 가든지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2000년 가까이 지내오면서 그 후손들은 모진 운명 속에서 생존을 위하여 몸부쳐야만 하였다.
세계 대전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독일의 나치당에
의하여 당한 민족의 수난은 끔직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회복될 것을 누가복음 21:29-33에서 예고 하셨으며,
그 말씀의 성취가 1948년에 이루어져 마침내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다시말하지만 이스라엘이 구약시대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한 사건은 끊임없는 우상숭배의 결과였다.
신약시대에 로마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한 사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피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고 이를 믿는 자에게 만 오직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고 하셨다.
십자가 말고 다른 것으로도 구원을 얻는 다고 외치는 것은 끔찍한 대역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만 얻을 수 있다.
이를 찬양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만 한다. 순수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섞이지 말게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의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오직 보혈의 공로로 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부인하면 심판만 기다리고 있다.(언)
산시과학기술대학교(陝西科技大學)
중국에서는 대학교가 교육을 통하여
사회주의가 고취되는 보루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신앙인 학생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탄압이
끝없이 발생한다.
실제로, 신앙을 지닌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을 박해하는 것은 국가
정책으로 자리했다.
그렇다 보니, 중국 동부 산둥(山東)성 빈저우(濱州)시에
소재한 한 대학교의 학생 두 명이 성(省)급
단위에서 우수 졸업생으로 선발되었지만 이들이 가톨릭 신자로
밝혀지면서 그들의 명예로운 칭호가 철회되는 일이 있었다.
“대학이 신앙과의 전쟁이라는 대규모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요. 이는
중앙 정부 정책을 따른 것으로 그 누구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해당 대학의 교사가 말했다.
“헌법에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 동등한 대우를 누린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지상공문(紙上空文)에 불과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쥐고
최종 결정권을 갖습니다.”
대학교 교내 종교 박해에 따른 고조된 긴장감 때문에 젊은
기독교인들은 직언 한마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동 대학교에 다니는 또 다른 학생은 그가 ‘가나안 스튜디오’라고
이름 붙인 프로젝트의 원서를 제출했다가 대학 행정실의 호출을
받았다. 그의 프로젝트 이름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행정
공무원들에 의해 해당 프로젝트는 자칫 취소될 뻔했다.
“해당 대학교는 그가 붙인 ‘가나안’이란 이름이 성경에서 따온
것이고 종교와 관련해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대학생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가나안이란 이름이 듣기 좋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고 소식통이 전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입시켜 사람들은 학교
캠퍼스에서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에 점차 더 큰
불안감을
느낀다. 궁극적인 공포는 이것이 결국 또 다른 문자의
옥(文字-獄)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문자의 옥이란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글과 연설 내용 때문에 사람들을 수감해온 것을 일컫는다.
경찰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정보를 캐낸다. 그들은 메시지 앱에
침투해 누가 신자인지를 알아낸다. 빈저우시 대학교의 1학년 학생이
그녀의 다른 성(省)에
살고 있는 대학생 친구가 경험한 일에 대해 직접 제보했다.
“경찰은 어떤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학생회 (종교인) QQ
단톡방에 침입해 일부 학생들의 연락처를 획득하고는 대학측에
알렸대요. 그리고나서 대학교 지도부에서 학생들을 찾아가 면담을
했는데, 그들은 마치 죄수를 심문하듯 신앙에 대해 학생들에게
취조를 했다네요.”
양쉐(楊雪)는 가톨릭 신자로 빈저우시 대학교 지도부의 예의 주시
대상이다. 그들은 양쉐를 자주 불러 면담했고 그녀의 QQ 계정을
연락처 목록에 추가하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저는 QQ를 이용해 교회의 동료 신자들과 연락을
했는데요. 이제는 QQ상에 제 삶에 대한 내용까지 포함해 그 어떤
것도 올리지 못하겠어요. 대학교 지도부가 내용을 보고서 또
면담하자고 할까 봐 두렵네요”라고 양쉐는 말했다.
신앙 때문에 조사받고 협박받는 사례들은 산둥성 옌타이(煙臺)시
소재 대학교들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해왔다. 학교 공무원들은 일부
학생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서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주양(朱陽)은 옌타이시에 소재한 대학교의 4학년 학생이다.
최근 그의 선생은 신앙을 갖는 것이 학교 방침에 따라 불허된다고
그에게 경고했다.
선생은 “네가 공산주의청년단을 탈퇴하고 신앙을 고수한다면, 대학은
관련 내용을 서류에 기록해 평생토록 너의 꼬리표가 되도록 할
것”이라면서 “대학원 시험에 지원할 때도 정치 기록이 검토되어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고 국영 기업에 취업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미래와 신앙 포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며 주양에게
하루의 시간이 부여되었다.
주양은 “그 날 저는 정말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전 내내
눈물 범벅이었죠. 계속 하나님께 기도 드렸고 성령(聖靈)께서
‘평생토록 예수를 따르리라(今生跟隨主耶穌)’는 찬송가를 떠올리게
해주셨어요.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제가 추구해야 할 일생의 목표라는 것에 더욱더 마음을 다지게
되었어요”라면서 “결국 저는 제 신앙을 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옌타이시의 사범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펑리(馮麗)는 교사로부터
거듭 호출돼 신앙과 가족에 대해 질문받았다. 교사는 대학생들의
신앙을 조사하고 제약하는 것이 중앙 정부의 명령이라고 그녀에게
경고했다.
또한 교사는 신앙이 여러 측면에서 그녀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그녀에게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펑 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 신앙 기록이 문서로 남게 될 것이고 미래에 구직 활동에
영향이 미쳐 아마도 많은 좋은 일자리 기회들을 놓치게 될 거에요.
그러나 저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믿어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신앙을 지킬 거에요”라고 펑
리는 말했다.
이와 유사하게 중국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대학들은 학생들의 신앙에
개입해 공격을 펼치고 있다.
학생들에 대한 종교 탄압을 돕고 교내의 종교 관련 활동 일체를
신고하도록, 산시성 과학기술대학교(陝西科技大學)는 대학교를
기점으로 하는 ‘국기 호위대’를 채용하고 있다.
이는 2013년
설립된 준(準)군사적인 학생 단체로, 1966년과 1967년에 마오쩌둥이 동원한 문화 대혁명의 홍위병과 유사하다. 국기
호위대들은 교내에서 매일매일의 국기 게양식을 감독해야 하고, 대학
주관 행사 시에 치안 유지를 이행해야 한다.
해당 대학교
웹사이트에 따르면, 국기 호위대의 목적은 ‘애국주의를 지지하고
국방 교육을 고취시키는 선두 주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 동 대학의 국기 호위대는 거의 200명에 달하며, 이들은
모두 학생이다. 대학 캠퍼스의 미래와 자유에 있어서 이 단체가
진정 대변하는 것은 흉보나 마찬가지다.
(본 글에서 사용된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뉴욕실버선교학교에 등록한 학생들이
개강예배가 끝난 후 함께 모여 있다.
뉴욕실버선교학교(훈련원장 김경열 목사) 제28기가 개강했다.
선교학교는 지난달 25일 뉴욕교회(김성기 목사)에서 개강예배를 겸한 교육을 본격 시작했다.
28기에는 현재 17명이 등록했으며, 앞으로 10주간 매주 월요일 '뉴욕교회(142-08 32 Ave, Flushing)에서 선교에 필요한 전문 교육이 실시된다.
훈련 과정을 마친 졸업생들은 오는 5월 6일부터 11일까지 5일간 니카라과로 파송돼 의료.한방.미용.안경.사진.어린이 사역을 맡는다.
훈련원장 김경열(뉴욕영안교회 담임)목사는 "선교학교는 은퇴 후 여생을 복음의 일꾼으로 헌신 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을 훈련하기 위해 초교파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선교에 필요한 모든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또 "올해 28기 주제는 '가든지, 보내든지'로 정했다"며 "선교는 현장에 직접 나가는 이들과 또 보내는 이들이 한마음 한뜻이 돼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한편 노년층을 대상으로 선교훈련을 하고 있는 뉴욕실버학교는 2004년 출범한 이래 지난해 가을 27기까지 총 631명이 교육훈련을 받았으며, 목회자를 포함해 총 850명이 단기선교에 참여했다.
성경 속에 묘지명(墓誌銘)이 한 군데 있는데, 야곱의 집 노 유모의 장사를 지낸 이야기와 그 묘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창 35:8)’
알론바굿이란 말은 ‘눈물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이다. 신구약 성경 속에 130여 명의 각양의 크고 작은 여인들과 선하고 악한 여인들이 나오는데 그 묘지명이 명명된 곳은 리브가의 유모의 묘지뿐이다.
구속사의 원천 가족 야곱(이스라엘)의 집의 한 노예 노파가 죽어서 온 가족이 슬피 울고 상수리나무 아래 묻은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불멸의 문자로 온 성도에게 교훈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드보라는 ‘벌’(Bee)이란 뜻이다. 독침으로 쏘는 도둑벌이 아닌 근면과 희생의 상징인 꿀벌 같은 이 노예 노파, 90평생 야곱과 리브가와 레아와 라헬과 그 집 열 두 자녀들과 요셉, 베냐민 모두에게 친할머니처럼 인자했고 정다웠던 아름다운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의 크리스천 표본을 본다.
요즘 "잘 살고", "잘 죽자"라는 바람이 불면서 죽기 전에 자기의 묘지명(墓誌銘)을 자기가 미리 써 놓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묘지명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별세는 별세이고 떠나신 다음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 묘지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궁금하지 않은가? 내가 죽은 다음에 이웃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표현해줄 것인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에비니저 스크루지(Ebenezer Scrooge)는 돈욕심이 아주 많은 고리대금업자였다. 남에게 늘 인색하게 굴었다. 어느날 밤 죽은 친구의 유령과 함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본 뒤 깨달음을 얻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었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을 흔히 [스크루지 영감]이라 부른다. 과연 이웃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불러 줄런지...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에서 ‘하고 싶어지는 은혜’라는 제목의 칼럼을 SNS에 게재했다.
유 목사는 “복된 삶을 사는 원리는 단순하다. 해야 할 것이 하고 싶어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기 싫어지는 것”이라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것이 반대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녀를 여덟 두신 선교사님이 계신다. 저는 그 선교사님에 대해 ‘복이 많구나’ 하고 생각하기보다, ‘그 많은 자녀를 어떻게 키우려고 낳기만 하는가’ 하는 걱정을 했다”며 “그러다 제가 자녀를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제 마음 속에 ‘자녀는 짐스럽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유기성 목사는
“이것이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짐으로 여기다니”라며....
어느 순간부터 산다는 것이 힘들게만 여겨진다면,
‘누가 새벽기도회는 만들어 가지고 이 고생인가?’ 하는 마음이 든다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부담으로 여겨진다면,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면,
가족이 짐스럽기만 하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다면,
즉시 예수님께로 달려가,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할 때이다.
어느 순간부터 복을 짐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 목사는
“주위 사람이나 주어진 형편에 문제가 있어 힘든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시험에 든 것”이라며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제게 일어난 변화는 복이 복으로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느껴지고, 해야 할 것이 하고 싶어지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기 싫어지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신기하고 놀랍다”고 했다.
그는 “한 시간 기도를 하면서, 좋은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며 “그래서 더욱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의 원함이 달라지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후에는 누군가에게 받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직장에서 남들은 안해도 되는 일을 제게만 시킬 때 짜증이 많이 났었는데, 생각을 고치고 보니 그 시간이 정말 즐겁습니다. 혼자 외진 곳에서 30분-1시간 작업하면서, 두 손으론 일을 하지만 성경 앱으로 성경 말씀을 듣거나 설교를 들으며 혼자 예배를 드립니다.
보통 근무 때는 그런 호사을 못 누립니다. 그래서 제게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업무 교대을 기다리며 예수동행일기도 쓰고 목사님 칼럼도 편안하게 읽습니다. 주님과의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그 노동이 즐겁기까지 합니다.”
유 목사는 “기도도 하고 싶어야 기도하게 된다. 성경도 읽고 싶어야 읽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안 된다”며 “그런데 꾸준히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기도하고 싶고, 성경 읽고 싶어진다. 주님을 더 알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기성 목사는
“생각과 원함이 복되지 않아 힘드신가?
오직 주님만 바라보기 바란다.
그러면 해야 할 것이 하고 싶어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기 싫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며
“우리는 우리 마음을 바꿀 능력이 없다.
단지 그렇게 하실 주님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어 주신다”고 강조했다.
‘전통모델’ 53% 지지로 통과, 반대로 진보그룹 이탈 가능성
감독회의‧입법 특위 ‘하나의 교회 모델’ 불발로 정치적 부담
플로리다 연회의 레이챌 숨너(왼쪽 앞)와 자클린 레버론 목사(앞)가 주요 투표를 하기 전 감독과 다른 대의원들과 함께 기도에 합류했다.
동성애 허용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특별총회에서 당초 예상과는 정반대로 동성결혼 및 성소수자(LGBTQ)의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강화하는 개정안이 채택됐다.
UMC는 26일 세인트루이스 컨벤션센터(America’s Center Convention Complex)에서 폐막된 특별총회(Special Session of the General Conference)에서 최종안으로 상정된 ‘전통 모델’(Traditional Plan)에 대한 표결을 실시하고 찬성 438, 반대 384(53%와 47%)로 통과시켰다.
‘전통 모델’은 동성애 문제를 허용하는 최근의 추세와 달리 그동안 느슨하게 적용돼온 UMC의 불가 입장을 더욱 강화해 스스로를 동성애 관계에 있다고 공언한 사람을 목회자로 안수하는 것과 동성결혼의 주례를 금지하는 법을 어긴 사람에 대한 의무적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찬송’과 ‘항의’ 교차한 표결 직후 분위기
‘전통 모델’의 투표 결과가 화면을 통해 발표되자 총회 현장은 참관인들이 부르는 찬송가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로 채워졌다.
대의원 일부도 원형으로 모여 그 찬송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의원 일부와 방청객이 있는 관중석에서 투표에 항의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또 결과에 불만을 표시한 몇몇 참관인이 총회장 입장을 시도하다 경비원들에 의해 끌려 나가는 소동도 벌어졌다.
감독회 의장인 케네스 카터 감독(Kenneth H. Carter)은 폐회예배를 통해 “총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 일을 통해 주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카터 감독은 총회 폐막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감독들이 특별총회 이후 대화를 많이 시도해야 한다”면서 “특별히 상처를 받은 진보적인 사람들과 만남을 많이 가져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반면 텍사스 연회의 스콧 존스 감독(Scott Jones)은 성명을 통해 “이번 투표로 오랜 논쟁은 종결”됐다면서 “이번 결정은 1972년 이후 장정에 명시된 인간의 성에 관한 교단의 역사적인 입장과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존스 감독은 특히 “우리는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성소수자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신성한 가치를 인정할 것”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는 다양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며 함께 더 강해졌다”면서 “하나의 교단으로서 앞으로 나아가고,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 안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로버트 호시바타 주교가 전통 모델의 통과에 항의하는 시위자들과 마주하고 있다. 사진출처 Paul Jeffrey, UMNS.
‘전통 모델’ 무엇을 담고 있나
이번에 채택된 ‘전통 모델’은 당초 배포된 자료에 따르면 “동성애에 관한 현행 교단의 입장을 고수하며 책임소재를 강화한다”는 기본 원칙 아래 “이에 따를 수 없는 연회나 교회, 목회자들을 위해서는 은혜롭게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안은 ...
▲동성애를 행하는 자는 안수나 파송을 받을 수 없고
▲목회자는 장정이 정한 동성 결혼 금지 조항을 따라야 하며
▲감독은 이유 없이 처벌을 기각시켜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으며 동성결혼 집행의 경우 1차 1년간 무보수 정직, 2차 안수증 반납 등 강력한 처벌조항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 모델’의 일부 내용이 헌법에 불일치한다는 지적이 있어 최종 상정안까지 부분적인 수정이 계속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총감독회의 및 입법 특위의 공식 지지를 받아 채택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온 ‘하나의 교회’ 모델(One Church Plan)은 특별총회 이틀째인 24일 상정안 채택과정에서 찬성 386, 반대 436로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 안은 소수 의견((a minority report) 형식으로 재상정이 시도됐으나 374대 449로 오히려 반대표가 늘었다.
‘하나의 교회 모델’은
▲장정에 동성애와 관련 제한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결혼에 대해 두 성인이라는 표현으로 사실상 동성간 결혼을 인정하며
▲목사들은 동성결혼을 주례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동성애를 수용하는 최근 미국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UMC내 보수적인 교회들의 반발 및 탈퇴 움직임을 경계해
▲이 문제는 미국 내 지역총회에만 해당하며 해외지역 총회의 경우 장정을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으로 동성애 문제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아프리카 및 아시아 교회들을 다독이고
▲금지조항을 제거해도 교회나 연회에게 동성행위를 자인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목사들과 개체교회들의 신앙 양심을 보호할 수 있는 용어를 포함시킨다는 일종의 타협안으로 “성정체성 이슈로 연합감리교회가 나눠져서는 안된다”는 감독회의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
특별총회 개막 전 이외의 제안으로 주목을 받았던 ‘연대적 총회 모델’이나 ‘단순 모델’ 등은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해 모두 폐기됐다.
‘연대적 총회 모델’은 UMC를 동성애 관점에 따라 3개 연대적 총회로 재구성하자는 제안이었으며, ‘단순 모델’은 교회 안에서 동성애에 대한 모든 금지규정을 제거하자는 가장 급진적인 제안이었다.
찬반 격렬한 논쟁, 내부 갈등 표출
특별총회에서는 상정안의 채택과정에서부터 최종 표결에 이르기까지 찬반입장의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소수의견을 상정한 버지니아 연회의 톰 베를린 목사(Rev. Tom Berlin)는 ‘하나의 교회 모델’은 교회나 목회자에게 동성결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성경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을 바꾸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만일 ‘전통주의적 모델’이 통과된다면, 그것은 미국교회를 병들게 할 것”이라면서 “많은 목회자와 연회가 떠나는 시련의 고통이 있을 것이며, 교회는 뉴스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부 오하이오에서 온 린지 스턴스(Lyndsey Stearns)는 자신을 ‘곧 목회자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지난 24시간 동안 젊은 청년 1만 5529명이 ‘하나의 교회 모델’을 지지하는 서명을 했다고 밝히며 대의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린지 스턴스는 특히 서명한 청년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 “그러나 함께 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서로의 은사와 열매를 보았으며 독특한 상황에서 믿을 수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했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서부 펜실베이니아 연회의 낸시 데나르도(Nancy Denardo)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기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중지해야 하며 복음의 진실이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하나의 교회 모델’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젊은 복음주의자 대의원이라고 자신을 묘사한 텍사스 리오 연회의 애스린 데빈니(Aislinn Deviney)는 “많은 젊은이가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진다’고 강력하게 믿는다”고 말했다.
라이베리아 대의원이자 아프리카 이니셔티브의 지도자인 제리 쿨라 목사(Rev. Jerry Kulah)는 “전통 모델은 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라고 강조하고 “이 모델은 하나님의 말씀이 연합감리교회의 성장과 생명의 기초가 유지되도록 보장한다”면서 이와 동시에 “성소수자 친구들을 사랑할 것을 제안한다”고 발언했다.
요르단 대표 샤일라(마이크)가 ‘하나의 교회 모델’을 지지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 Mike DuBose, UMNS.
동성애 허용 주장을 펴는 뉴욕 연회의 제프리 J.J 워렌. 무지개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사진출처 Mike DuBose, UMNS.
동성애, UMC의 고민
UMC는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 연회를 운영하며 79개 연회, 4만4122개 교회, 성직자 5만4474명, 교인 1261만4618명의 교세를 갖고 있는(2016년 총회 보고서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의 감리교단이다.
미국 내에서도 남침례교회(SBC)와 쌍벽을 이루는 개신교단이어서 동성애 허용 여부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UMC 안에서는 그동안 많은 목사들이 동성결혼식을 주재하고 동성애자의 성직 안수를 승인해 논란이 돼 왔다.
샌프란시스코 글라이드 메모리언 교회의 담임 목사인 캐런 올리베토 목사는 동성애자라고 밝혔음에도 감독에 선출되었고, 트랜스젠더로 알려진 M. 바클레이에게 사역자(Deacon) 안수를 행하는 등 동성애 정책과 관련한 혼란은 지속돼 왔다.
UMC는 이런 혼란을 종식하기 위해 지난 수년간 이 문제에 대한 내부 논의 절차를 밟아왔으며 그 결과로 이번 특별총회가 소집된 것이다.
세이트루이스에서 열린 특별총회 광경, 사진출처 김응성 목사, UMNS.
대표단과 감독들이 핵심 투표에 앞서 무대 앞쪽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출처 Mike DuBose, UMNS.
이제는 진보그룹이 이탈 고민
UMC는 특별총회를 통해 공식 입장을 정리했으나, 이 문제를 둘러싼 내부 갈등 및 분열 가능성은 여전한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UMC 주변에서는 이번 특별총회에서 동성애를 사실상 허용하는 ‘하나의 교회 모델’(One Church Plan) 채택이 유력한 것으로 예상해 왔고, 이에 반발해 전통적인 신앙노선을 지키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그룹은 WCA(Wesleyan Covenant Association)를 결성, 최악의 경우 교단 이탈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러나 총회 결과가 예상과는 정반대로 나옴에 따라 이번에는 동성애 허용을 주장해온 진보적인 그룹의 이탈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실정이다.
또 ‘하나의 교회 모델’을 적극 지지해온 감독회의 등 UMC 지도부의 입장도 매우 난처해 질 것으로 예상하는 이들이 있다.
관계자들은 ‘전통 모델’ 채택 결과나 ‘하나의 교회 모델’ 부결 결과가 근소한 차이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쉽게 봉합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특별총회는 ‘신탁조항에 구애받지 않고 비교적 쉽게 교단을 탈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disaffiliation(교단탈퇴, 재산분리법안)와 관련 ‘Taylor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쉽게 말해서 교단의 결정을 수용하지 못할 경우 교회의 재산을 포기하지 않고 탈퇴가 가능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은 추후 사법위원회의 합헌성 판단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안도한 한인교회,
그러나 깊어지는 고민
특별총회가 동성애 허용이라는 결론을 내릴 경우 이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던 UMC 내 한인교회(KUMC)들은 일단 ‘전통 모델’의 채택에 안도하는 분위기다. '전통 모델'의 시행을 적극 지지 촉구하는한편 당분간 교단내 상황변화를 예의주시하며 공동으로 대응해 간다는 입장이다.
UMC 세계선교부 한인목회강화협의회 사무총장 장학순 목사는 이번 특별총회 결과와 관련해 “UMC 안에 오래 동안 쌓여 온 여러 가지 갈등이 임계점에 이르러 파열되는 지점”이라고 진단하면서 “교단 일치 및 화해와 치유에 대한 소망은 여전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인한 분열과 해체의 위기도 더욱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버지니아주 헌든에 위치한 제일감리교회 정성호 목사는 특별총회가 끝난 뒤 SNS에 올린 글에서 “보수적인 ‘전통 모델’이 선택된 것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기뻐한다”면서 “대체로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우리 한인교회들로서는 여러모로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정 목사는 그러나 “이번에 통과된 ‘전통 모델’에 담긴 조항들과 문장들이 의외로 과격해서 놀랐다”고 전제하고 “어제까지 함께 한솥밥 먹어온 목회자들과 형제자매 교회들을 향해 장정의 조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떠나라는 문장은 ‘결연한 의지’로 보이기보다는 ‘배타적 거부’로 보인다”고 염려했다.
정 목사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가지는 위험한 특징이 바로 다른 가치관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는 것”이라고 지적한 뒤 “미국의 보수가 힘을 쥐면서 기독교적 사랑을 잃어버릴 때는 항상 인종차별과 이민자 차별정책이 나왔다”면서 “한인교회를 담임하는 이민자 소수인종으로서 한인교회들이 또 다른 불이익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식의 염려를 한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또 “미국 내 교회들과 미국 바깥의 교회들의 신앙적 차이가 크다”면서 이번 일로 “서로를 정죄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많이 염려된다”고 말한 뒤 교단 분열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주장하면서 ‘하나의 교회 모델’을 말하던 이들이 ‘전통 모델’이 선택되자 불복과 분리를 이야기 한다면 많이 혼란스러울 것 같다”고 꼬집었다.
후러싱제일교회 김정호 목사는 총회 직전 공개한 SNS 글을 통해 “‘본질적 사안’이 아닌 ‘인간 성문제’(human sexuality)로 인해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도록 강요받는 현재 교단의 구조와 문화가 이번 기회에 바뀌기를 바란다”면서 “강요된 하나 됨이라면 양심 지킬 분열을 달라”고 말했다.
김정호 목사는 이 글에서 “신앙은 보수 복음적이야 하고 신앙의 실천은 정의평화 지향적이어야 한다”면서 자신은 얼마 전 뉴욕연회 감독에게 △“이번 특별총회에서 동성애자 목사안수를 불법으로 규정할 경우에도 교단법을 어길 것인가?” △“왜 그리 동성애 목사안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연회에서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제대로 부흥하는 것을 볼 수 없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한적 있다고 공개했다.
김 목사는 이어 “UMC 내 복음주의 진영도 동성애자들의 인권은 물론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면서 “그들을 무지하고 불의한 사람들로 치부하는 것 온당치 않다”고 지적한 뒤 “UMC 목사들이 사회정의 투쟁한다고 교회를 지켜내고 부흥시키는 일에 소홀히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덧붙였다.
김 목사는 특히 “이번 ‘특별총회’가 끝나면 교단문제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라고 말하고 “결정에 승복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총회’라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다”고 개탄했다.
뉴욕연회 한인교회연합회(회장 양민석 목사)는 특별총회 개막 직전인 지난 21일, 후러싱제일교회(담임 김정호 목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혼인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정의하는 전통 입장의 고수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규정한 현 장정의 입장을 지지
▲동성 결혼 및 주례, 동성애자 안수를 불허하는 규정의 지지 등을 발표한 바 있다.
현지 교계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교회의 성도의 신앙과 목회자의 신학적인 입장을 보호하며 나아갈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UMC 한인총회와 연대하여 결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혀 특별총회에서 동성애 허용 쪽으로 결론이 나올 경우 집단 이탈의 가능성도 시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자회견에는 참석한 이는 연합회장 양민석 목사를 비롯해 이용보 목사(뉴욕한인코커스회장), 김종훈 목사(한인총회 증경총회장), 김종일 목사(뉴욕성서교회), 강원근 목사(뉴욕감리교회), 이종범 목사(뉴욕만백성교회), 김남석 목사(뉴드림교회), 찰리윤 목사(미국교회)등이다.
특별총회 직전 동성애 반대입장을 발표한 뉴욕연회 한인교회연합회.
한편 위스콘신 연회 정희수 감독은 특별총회에 대한 논평을 통해 “대의원들의 논쟁과 투표 과정을 보면서 확연하여진 것은 인간의 성 문제의 이해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논쟁은 거의 절반과 절반의 숫자로 갈려 있는 모습이었다”면서 “총회 진행 과정에서 격한 감정과 격렬한 논쟁 가운데 서로 주고받은 상처는 그리 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정희수 감독은 그러나 “어느 편이 이기고 지는 문제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LGBTQ 커뮤니티는 성소수자로 거절당하고 혼돈 속에서 상처를 받았지만, 저들을 향한 돌봄과 사랑의 기도와 연대의 모습도 또한 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정 감독은 이어 “이번 특별총회 기간 한인교회는 전 교회와 함께 기도하는 교회로 초점을 두었다”면서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복음의 아름다운 전령들이 되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으로,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로, 갈등이 있는 곳에 화평을 꿈꾸고, 부흥하여 가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지속해 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혜은 기자
황교안 신임 자유한국당 대표는 피난민 고물상의 아들이다.
검사-법무장관-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치면서 탄탄대로만 걸어왔을 것이란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그의 삶엔 많은 굴곡이 있었다. 때문에 황 대표는 자신의 삶을 ‘새옹지마(塞翁之馬)’로 표현하곤 한다.
◇고물상의 아들
황 대표는 1957년 서울 서계동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과 모친은 황해도 연백에서 살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피난민이었다.
그의
자서전 『황교안의 답』(2018)에는 “유년시절 도시락을 제대로 챙겨가지 못해 담임 선생님과 나눠먹어야 했고, 산에서 나물을 직접 따와 식구들의
반찬으로 삼았다”는 회상이 담겨있다.
경기고 재학 시절의 황교안 대표(왼쪽).
그는 봉래초-광성중-경기고 시절 반장과 학생 대표를 도맡아 했다. 중학교 땐 문예반에서 활동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땐 KBS ‘우리들의 새
노래’란 경연 프로그램에 직접 작사ㆍ작곡한 곡 ‘오솔길’을 출품해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부친이 작고하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자 한때 대학을 포기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친이 “내가 머리칼을 팔아서라도 네
대학 졸업 모습을 꼭 보겠다”고 만류했다.
황 대표는 재수 끝에 성균관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법조인의 길을 걷는 계기를 맞게 됐다. 모친이
1995년 뇌출혈로 별세하자 황 대표는 이듬해부터 모친의 이름을 딴 ‘전칠례 장학금’을 매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고 있다.
◇미스터 국보법
황 대표가 청주지검 초임 검사 때만 해도 그는 상사와 견해 차이가 심해 검사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결국 사의를 표했다. 하지만 당시
차장검사가 “내가 야단을 치는 것은 자네에게 기대가 크기 때문”이라며 만류해 사의를 접었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재임 시절 공안부에 결원이 생겨 그를 급히 충원됐던 게 본격적인 ‘미스터 국보법’의 시작이었다. 그는 대검 공안과장과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을 거치면서 2002년 한총련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점거 농성 사건, 2005년 국정원ㆍ안기부 도청사건 등을 수사ㆍ지휘했다. 공안
수사의 교과서로 불리는 『국가보안법 해설』(1998)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 그는 검사장을 목전에 두고 두 차례 승진에 실패했다.
당시 법조계에선 그가 2005년 ‘강정구 동국대 교수 사건’ 수사로
정부와 각을 세웠기 때문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우파 투사’라는 이미지가 생겼고, 박근혜 정부에서 초대 법무장관이
되는 발판이 됐다.
황 대표는 박근혜 정부 초대 내각에서 최장수(2년 3개월) 장관으로 재임했다.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 ‘성완종 리스트
사건’ 등 굵직한 현안을 처리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2015년 6월엔 국무총리로 발탁됐고, 탄핵 정국에선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으며 보수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유료 독서모임 스타트업 트레바리, 50억 투자 유치
독서모임 스타트업 ‘트레바리’가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으로부터 총 50억원을 투자받았다고 12일 밝혔다.
소프트뱅크벤처스가 45억원, 패스트 인베스트먼트가 5억원을 투자했다.
트레바리는 국내 최초로 독서모임을 유료화해 회원들을 모집, 사업화에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다음(현 카카오)에 다니다 퇴사한 윤수영(31) 대표가 2015년 설립했으며 그해 독서모임 4개로 시작했다.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뒤 오프라인으로 만난다. 현재 300개 모임이 있으며, 회원 수는 4600명이 넘었다.
정보기술(IT), 과학 등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끄는 독서모임은 인기가 더 많다. 참가비는 4개월 기준으로 19만~29만원이다.
최지현 소프트뱅크벤처스 책임은 “현대인들의 지적, 소속감 욕구를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높은 참석률과 재가입률로 독서모임의 유료화 모델을 증명했다”고 설명했다. 트레바리는 그간 별도의 외부 투자 유치 없이 자체적으로 성장해왔다.
참고로 트레바리
독서 모임의
이벤트를
소개합니다.
1. 도리도리
2. 좌우로 회전, 3. 앞뒤로 끄덕임, 4.
좌우 옆으로
남성이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면서 갱년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테스토스테론 분비량이 감소하면 피로감, 우울증, 무력감이 몰려오고, 근골격의 양은 떨어지고 체지방량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성욕 감퇴 증상까지 생기면서 삶의 질도 떨어지고, 고지혈증, 당뇨병, 비만, 골다공증 등의 질병에 걸리기 쉽다. 이런 현상을 막으려면 운동과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하는 음식 섭취를 병행해야 한다.
우선 1주일에 3회 이상 걷기나 조깅 등의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해야 한다. 이와 함께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저해하는 카페인과 알코올의 섭취를 줄이는 대신, 분비를 촉진하는 음식을 먹는 게 좋다.
‘프로스테이트닷넷’이 소개한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돕는 식품 5가지를 알아본다.
1. 굴
아연은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하는 성분이다. 이런 아연이 많이 든 식품으로는 굴이 대표적이고 이외에 게, 새우 등의 해산물과 콩, 깨, 호박씨가 꼽힌다.
2. 마늘
마늘을 비롯해 양파, 견과류에는 셀레늄이라는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 연구 결과, 혈중 테스토스테론과 셀레늄의 농도가 비례하며 임신이 어려운 남성에서 셀레늄과 테스토스테론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3. 달걀
테스토스테론의 원료는 콜레스테롤이다. 하루 한 개 정도의 달걀을 먹는 등 콜레스테롤을 적당히 섭취하면 테스토스테론 분비 촉진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4. 연어
연어를 비롯해 고등어, 참치 그리고 우유에는 비타민 D가 많이 들어 있다. 비타민 D의 혈중 레벨이 높을수록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크게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5. 홍삼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홍삼을 매일 복용했을 때 혈중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증가하고 정자의 운동성과 정자 수도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삼에는 고환에 작용해 이런 효과를 내는 성분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한국 천안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1919년 3월 1일 당시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2시리아 바구즈에서에서 어린 소녀가 '시리아민주군(SDF)' 소속 군인이 건네주는 빵을 받고 있다.
3폭우가 내린 이스라엘 예루살렘 외곽의 도로가 침수됐다.
4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열린 카니발 축제에서 산타 크루즈 카니발 여왕으로 지목된 19명 여성 중 한 명이 무대에서 의상을 보여주고 있다.
5독일 쾰른에서 열린 카니발 축제에서 수 천명의 참가자들이 축제의상을 입고 행사를 즐기고 있다.
6미국 캘리포니아주 레이크엘시노어의 양귀비꽃밭에서 여성이 사진을 찍고 있다.
7오스트리아 비에나에서 주립발레단이 리허설을 하고 있다.
8몰타 발레타의 포트 세인트 엘모 인근 바다에 번개가 치고 있다.
9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에서 모델들이 디자이너 마니시 아로라의 2019/2020 F/W 컬렉션 의상을 선 보이고 있다.
1상공에서 본 중국 푸젠성 장핑의 차밭.
2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단독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3도널드 트럼프 전 개인비서인 마이클 코언이 연방 의사당에서 열린 하원 감독개혁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코언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차별주의자에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4이집트 카이로의 람시스 기차역에서 경찰관이 검게 그을린 기차 앞으로 보초를 서고 있다. 기차가 역 내의 이탈방지 장치를 들이받은 후 연료 탱크가 폭발하며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적어도 20명이 숨지고 40명이 부상했다.
5시리아에서 이슬람 무장조직 IS와 싸우는 시리아민주군(SDF)가 IS 최후 거점을 점령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시작한 가운데 여성이 갓난 아기를 데리고 피난가고 있다.
62차 미북정상회담이 열리는하노이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 앞에 경찰관들이 앉아있다.
7윌리엄 영국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북아이랜드의 수도이자 축구연합회 본부가 위치한 벨파스트의 경기장을 방문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
8독일 벤스하임-아우어바흐의 맨홀뚜껑에 끼인 쥐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9영국 디글의 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10나이지리아 카노의 거리에서 재선에 성공한 무함마두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환호를 하고 있다.
1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만나 저녁 만찬을 하고 있다.
2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저녁 만찬이 예고된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 앞에서 베트남 시민들이 성조기와 인공기를 들고 있다.
4예멘 하자의 임시캠프에서 어린 소년들이 물을 퍼기 위해 빈 플라스틱 통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6베네수엘라 접경도시인 우레냐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국경다리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퇴진 운동을 주도하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 지지자들이 베네수엘라 보안군과 충돌하고 있다.
7아랍에미리트 알 아인에서 열린 자전거 투어에서 참가들이 세번 째 구간을 지나고 있다.
8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에서 모델이 디자이너 안토니 바카렐로(Anthony Vaccarello)의 2019-2020 가을/겨울 컬렉션 의상을 선보이고 있다.
9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카니발 축제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아카데미코스 도 바이사 어거스타(Academicos do Baixa Augusta)'로 불리는 연례 거리 파티(block party)에 참여했다.
10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열린 FIS 노르딕월드스키챔피언쉽 여자 10km 클래식에서 노르웨이 선수가 경기하고 있다.
11해가 지는 프랑스 해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예술가가 붙여놓은 깨진 유리조각들로 장식된 벙커가 보인다.
1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동당역에 도착해 전용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2베네수엘라 경찰관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어 브라질 로라이마 주 파카라이마로 탈출하고 있다.
3인도 아마다바드에서 건설 노동자가 지하철 터널 건설 작업을 마친 후 갱도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4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 스타 이즈 본(The Star Is Born)"의 주인공인 레이디 가가와 감독이자 제작자인 브래들리 쿠퍼가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6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멜리사 맥카시가 의상상 시상자로 등장했다.
7모로코를 방문 중인 영국의 헨리왕자와 메건비가 라바트에서 열린 사회적기업가 행사 참석 중 앞에 지나가는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
9멕시코 멕시코 시티의 로마 지역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멕시코의 알포손 쿠아론이 감독한 "로마"가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으로 호명되자 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10독일 베를린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인근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모나리자'를 복제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11나이지리아 카두나에서 열린 육류 시장에서 가득 쌓인 소 뿔 너머로 빨간색 히잡을 두른 여자 소녀가 서 있다.
12스링랑카 콜롬보에서 노동자가 교량 가로등의 전구를 해체하고 있다.
15한국 서울에서 블랙이글즈 곡예비행팀이 3·1절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1베네수엘라 접경지역인 브라질 로라이마 주 파카라이마에서 시위가 열린 가운데 남성이 국경을 지키고 있는 볼리바리안 국가수비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2콜롬비아 국경 인근의 베네수엘라 우레나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검은연기를 내뿜으며 불에 타고 있는 버스를 밀고 있다.
3나이지리아 아다마와 주 욜라에서 남성이 대통령 선거 결과를 기다리며 라디오를 듣고있다.
4모로코를 방문한 헨리 영국 왕자와 메간비가 민간단체 "모두를 위한 교육(Euducation for All)' 이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열린 '헤나(Henna)' 기념식에 참석했다.
5인도 자카르타의 마우마라 바루 항구에서 소방관들이 어선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화하고 있다.
6포르투갈 리스본의 경기장에서 투우 날을 맞아 남성들이 경기를 선보이고 있다.
7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제5회 '유럽의 종을 지는 자 축제(European Bell Bearers Festival)' 에서 참가자들이 도로 위를 행진하고 있다.
8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 와이프(The Wife)"의 글렌 클로즈가 상을 수상하고 있다.
9중국 하이난 성 하이쿠 도로에서 시민들이 건물발파해체를 구경하고 있다.
10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베니스 카니발에 가면과 의상을 착용한 한 시민들이 참가했다.
13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열린 FIS 노르딕월드스키챔피언쉽 남자 HS130 스키 점프 단체전에서 슬로베니아의 지가 젤라르 선수가 하늘 높이 날고 있다.
14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모델들이 돌체앤가바나 2019/2020 가을/겨울 컬렉션 의상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