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5,  2019

 

 

 

 

 

 

 

 

 

 

 

 

 

 

 

Image result for christmas fine art

 

Santa Painting, Christmas Art, "Let's Try Blue"

by Texas Contemporary Fine Artist Lunell Gi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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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거리의 네온사인

길거리에 가득한 주점

취객들의 혀 꼬부라진 소리에

죄악의 밤은 깊어가고

의미 없이 불러대는 유행가의 가사에

영혼의 순수함이 칼질 당하고 있다

 

학문을 외치는 엘리트 마져도

욕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범죄의 현장

이 소망이 없는 곳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리오

 

하늘을 찌르는 도시의 회색건물 밑에서

아직도 욕심을 부리고 있는 저 웃음을

누가 용서하리오

 

오늘 밤 나의 영혼을 부르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저 머리 놀림

베드로의 배신

혀로 사람을 몇 번씩 죽이고 짓밟아대는

치졸(稚拙)권모술수(權謀術數)

이 어둠의 길에서

누가 건져내리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다짐하던

옛 맹세는 식어 버리고

깨끗한 피 흐르던 자리에

시꺼멓게 그을린 심장 조각을...

 

아직 세상 것을 다 떨쳐버리지 못하는

멍들어 가는 신경조직을...

이 썩어져 가는 나의 영혼을...

무엇으로 깨끗게 하리오  

 

 

 

 

 

 

 

 

 

 

 

 

  

 

 

성탄이 다가오면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아니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동방박사가 하늘의 별을 보았듯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열정]을 보아야 한다.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이다. 그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고자 이 땅에 보내셨겠는가?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모시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을까?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틀리지 않은 생각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은 예수님을 ‘아멘이시며 충성 되신 분’으로 묘사다.

‘아멘’라는 말은 ‘진실’이라는 뜻이다. ‘충성’ ‘열정적’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진실하고 열정적인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미지근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지형적으로 라오디게아교회에서 북쪽으로 11㎞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라는 온천 도시가 있다. 펄펄 끓는 온천수가 넘쳐 나는 곳이다.

한편 인근 지역의 골로새에는 냉천이 있었다. 런데 라오디게아에는 식수로 쓰기에는 너무 따뜻하고 목욕을 하기에는 너무 미지근한 물이 있을 뿐이었다. 라오디게아에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물 만 있었던 것이다.

 

미지근한 신앙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미지근한 영성을 갖고는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작은 영향 미칠 수 없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가 극성을 부리는데 이를 대적해 이길 수 없다.

신앙이 미지근하면 악의 타깃이 된다. 온갖 유혹이 몰려들게 마련이다.  열성적인 신앙과 영성을 품어야 한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의 뜨거운 음의 길 때문에, 바로 그 복음의 열정 때문에 변화를 받아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 나의 믿음은 열정적이어야 한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게도 복음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미지근한 믿음이 이번 성탄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열정을 보고 열정적인 믿음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기도도  좀 열정적으로 하고, 찬송도 좀 열정적으로 부르고, 말씀도 좀 열정적으로 통독하고, "예수 믿으라"고 좀 열정적으로 증거해야한다. 우리의 삶을 예수믿는 사람답게 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사역을 맡았으면 죽도록 충성해야한다. 봉사하는 자는 몸살이 날 정도로 열성적이어야한다.  구제하는 자는 내 주머니가 구멍이 날 정도로 도와 주라. 혹 넘어진 자가 있으면 뛰어 가서 도와주라.

 

열정적인 삶을 살면 옆사람이 먼저 알게 된다. 옆에 사는 사람이 나를 보고 예수믿는 사람인지 예수를 안믿는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면 나는 도둑이다.

 

이사야서에는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사 59:17)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겉옷은 열심]다. 하나님은 열심히 우리를 추적하신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진다. 예수님도 지금 하늘 보좌에서 열심히 우리를 변호하신다. 예수님의 열심 때문에 죽은 자가 살아난다.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된다. 약한 자가 강하게 된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 때문에 이웃이 행복해진다. 예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정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성탄절 보다 더 기쁜 날이 어디있겠는가? 큰 잔치를 베풀자. 아름답게 가꾸자. 값진 선물을 주고받자.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축제를 꾸리자.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열정]을 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Give Thanks]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위대한 감사]를 아버지께 먼저 올려드리는 것이다.(장재언)

 

 

 

 

 

 

 

 

 

 

 

 

 

 

 

김장환 목사는 우리가 잘 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동역해 온 투루디 사모님은 잘 모른다.

성탄 특집으로 투루디 사모님과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트루디 여사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밀가루로 과자를 만들어서 시어머니께 드렸다.

그럼 시어머니는 '미국 사람들은 밀가루로 별 걸 다 만들어 먹는다'며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1959년 12월 12일 밤이었다. 미국에서 출발한 화물선은 18일 만에 부산항에 닿았다. 스물한 살트루디는 한국 땅이 처음이었다. 그의 눈에 부산의 밤 풍경이 들어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산에 있는 마을의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둠과 불빛들, 부산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출항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야경과 똑 닮았었다. 굉장한 도시구나 싶었다.”  

 이튿날 아침, 트루디 여사는 눈을 떴다. 갑판으로 나왔을 때 현실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간밤의 불빛들은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 판잣집에서 토해낸 가난의 자국들이었다.

 

미국에서 대학 졸업 후 1주일 만에 결혼한 김장환 목사의 손을 잡고 찾은 남편의 조국은 정말이지 가난했다.  

 

1960년 2월, 한국에 온 지 두 달만에 트루디(왼쪽에서 두번째) 여사가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요한 목사]

 

1960년 2월, 한국에 온 지 두 달만에 트루디(왼쪽에서 두번째) 여사가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장환 목사는 한국전쟁 때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했다. 온갖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했다. 남달리 영리하고 부지런한 그를 한국전쟁 참전 용사인 칼 파워스 상사가 눈여겨보았다.

 

탄광촌 출신인 파워스 상사는 학비가 없어 대학 진학을 접고 군에 입대한 처지였다. 결국 ‘하우스보이 김장환’은 파워스 상사가 마련해 준 408달러짜리 배표를 들고 1951년 11월12일 미국행 배를 탔다.

 

미국에서 부산으로 보급품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배였다. 이후에도 파워스 상사는 8년간 학비를 대며 ‘하우스 보이 김장환’을 명문사립 밥 존스 고교와 대학, 대학원까지 보냈다. 트루디는 밥 존스 고교에 다닐 때 '코리언 김장환'을 처음 만났다.  
 

트루디 여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지 올해로 꼬박 60년이다.

10일 서울 남대문에서 트루디 김(80) 여사를 만났다. 그는 목회자의 아내이기 전에 먼저 ‘선교사 트루디’의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 예순 번째 맞는 성탄절을 앞두고 그에게 ‘한국 땅에서 60년’을 물었다.  
 
 

전쟁 직후의 가난한 한국, 두렵지 않았나. 

 

“그때 뱃삯이 없어서 화물선을 타고 왔다. 태평양 파도 위에서 남편에게 ‘가ㆍ나ㆍ다ㆍ라’를 배웠다. 시어머니를 만나면 한국어로 인사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유달리 모험심이 강하다. 한국은 두려움의 나라가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부산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갔다. 시댁은 수원이었다. 초가집이었다. 시어머니가 처음 국수를 건넸을 때 그는 포크를 찾았다. 스파게티라고 여겼다. 국수 육수 위에 둥둥 떠다니는 멸치를 보고는 기겁했다. “살아있는 생선처럼 보였다.” 그렇게 1년간 시집살이를 했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미국에서 16세 때 운전면허를 땄던 그에게 한국의 가난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지금껏 남편에게 ‘미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다고 들었다.

“한국 사람의 정(情)에 끌렸다. 그들은 따뜻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스물두 살 때 수원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아주 어린 학생들과 함께 교실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학생들은 나를 ‘뺑코’라고 놀렸다. 그렇게 2년을 다녔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 김장환 목사와

큰 아들(김요셉), 딸(애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트루디 여사

 

 

트루디의 좌우명은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우라’다. 그에게 한국행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렇게 심겨진 곳에서 자신의 꽃을 피우고자 했다.

 

하루는 수원교도소 교도관이 자신을 찾아왔다. 교도소에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여성 재소자들이 있다고 했다. 트루디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전공도 교육학이었다. 그는 재소자들에게 영어와 함께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9년간 교도소 문턱을 드나들었다.

 

교도소에서 어떻게 사람들 마음을 얻었나.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영어를 가르치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파이를 굽든, 화장실 청소를 하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럼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연다. 덩달아 인복(人福)도 생긴다.”

 

실제 그랬다. 김장환 목사가 1966년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트루디 여사는 늘 구석진 주방에서 조용히 파이를 구웠다. 화장실 청소는 빠짐없이 그의 몫이었다. 점잖은 양장 차림의 목사 사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몸빼 바지에 호미를 들고서 땀 흘리는 선교사에 훨씬 더 가까웠다.

 

 

 

2000년 초등학생들을 위해 파이를 만들며 웃고 있는 트루디 여사

 

 

 

“침실 청소는 1주일에 한두 번 하더라도, 화장실과 주방은 매일 청소했다. 화장실이 깨끗하면 다른 곳은 다 깨끗하니까.” 종종 ‘외국인 파출부’로 오해도 받았다. “어디서 저렇게 부지런한 파출부를 구했느냐?”고 물어오던 이들도 화장실 닦던 사람이 ‘목사님 사모’라는 답을 들으면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트루디 여사는 1978년 교회 부설로 중앙기독유치원을 세웠다. 그곳에서 장애아동 통합교육을 실시했다.

“그때 한국에는 장애아동이 다닐 유치원이 거의 없었다. 안타까웠다. 장애아동도 하나님의 자녀다. 함께 생활하면 장애가 없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많이 배우게 마련이다. 남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익히게 된다. 통합교육을 해보니 실제 그랬다.”  
 

 

 

트루디 여사는 "60년 전에는 한국이 이렇게 발전할 줄 몰랐다.

그래도 믿음은 있었다. 한국 사람은 정말 부지런하다"고 말했다.

 

 

트루디 여사는 유치원 원장을 맡아오다가 지난해 은퇴했다. 자신의 월급통장을 40년간 줄곧 직원에게 맡겼다. 유치원에 돈 쓸 일이 생기면 그 통장에서 꺼내 썼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월급을 쓴 적이 없었다. “유치원에는 늘 돈이 부족했다. 내 몫만 덜렁 챙길 수는 없었다.”

생활비는 김장환 목사에게서 받는 월 60만원이 전부였다. 그것도 최근에서야 100만원으로 올랐다. 절약은 몸에 배었다. 여태껏 휴대폰도, 신용카드도 없다. “솔직히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더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쉽지 않은 일이다. 가슴에 새기고 사는 성경 구절이 있나.

“갈라디아서 2장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힘으로 사는 것이라면 얼마나 힘들겠나.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식기 세척기’가 생기는 거다.”

 

왜 식기 세척기(DishWasher) 인가.

“접시를 내가 하나하나 닦으면 굉장히 힘들다. 식기 세척기에 맡기면 훨씬 더 수월하다. 접시도 더 깨끗이 닦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게 마음을 씻어주는 ‘식기 세척기’다.”

 
 

2014년 중앙기독초등학교 내 카페에서 밀대로 파이의 밑부분을 반죽하고 있는 트루디 여사. [사진 김요한 목사]

 

2014년 중앙기독초등학교 내 카페에서 밀대로 파이의 밑부분을 반죽하고 있는 트루디 여사.

 

 
내 손으로 닦는 것과 식기 세척기로 닦는 것. 둘은 무엇이 다른가.  

“그건 확연히 다르다. 식기 세척기에서는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는 뜨거운 온도의 물이 나온다. 그래서 속까지 씻긴다.”

 
언제 갈라디아서 2장20절을 가슴에 처음 담았나.

“미국 미시간주에서 살던 중2 때였다. 집회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와서 설교를 했다. 교회는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 제 가슴을 때린 구절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였다.”  

 

남편 김장환 목사는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통역했다. ‘설교 못지않게 역동적인, 역사적인 통역’이었다. 세 사람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2011년 중앙기독초등학교 도서관에서 트루디 여사가 남편 김장환 목사와 함께 서 있다. [사진 김요한 목사]

 

2011년 중앙기독초등학교 도서관에서 트루디 여사가

남편 김장환 목사와 함께 서 있다.

 

 

2006년에는 골수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어떻게 극복했나.

 

“가을이었다. 강연 초청을 받고 미국에 갔었다. 갑자기 허리가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허리가 아팠다. 그래도 그냥 참았다. 의사는 내게 ‘다발성 골수종 3기’라고 했다. 그때 저는 주님과 대화했다. ‘주님…, 암이라네요.’ 의사는 ‘왜 그리 미련하게 참았느냐’고 나무랐다.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척추의 일부를 절단했다.”

 

힘들지 않았나.

 

“처음에는 걷지도 못했다.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계단 오르는 법, 자동차 타는 법부터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제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이다. 그때 기도를 했다. 한 번은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너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나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었겠느냐. 이토록 작은 일에 감사할 마음이 들었겠느냐. 네가 지금보다 온유할 수 있었겠느냐.’ 수술과 회복 과정은 제가 주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귀한 시간이었다.”

 
 


 

트루디 여사의 곁에 있던 둘째 아들 김요한 목사는 "우리나라는 주입식 교육인데 어머니는 달랐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주고, 시험을 잘못 봐도 혼내기보다 기다려 주셨다"고 말했다. 임현동 기자

 

트루디 여사의 곁에 있던 둘째 아들 김요한 목사는 "우리나라는 주입식 교육인데 어머니는 달랐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주고, 시험을 잘못 봐도 혼내기보다 기다려 주셨다"고 말했다.

 

트루디 여사는 요즘도 이렇게 기도한다.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

 

가난의 땅 한국에서 60년간 피워올린 트루디 여사의 꽃들이 곳곳에 피어 있다. 그 꽃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심겨진 곳에서 당신은 꽃을 피우고 있는가?”  (백성호 기자) 
 

 

 

 

 

 

 

 

 

 

 

 

 

 

 

 

 

 

 

 

 

 

 

 

 

 

 

 

 

 

 

 

 

 

 

 

 

 

 

 

 

 

 

 

 

 

 

 

 

 

 

 

 

 

 

 

 

 

 

 

 

 

 

 

 

도상욱 목사님의 큰딸 도춘섭은 누나가 없는 나에게 누나 노릇을 해 주었다.

영어를 배워주면서 꼭 기억하라는 말이 'Do your Best"였다.

평생을 가슴에 담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무작정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어 짐 스토벌(Jim Stovall)이 쓴 [오늘이 그날이다]는 책 중에서 ..

B ...

E ...

S ...

T ...

라는 글을 읽고 내가 생각해 온 "최선"은 너무 애매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고', 즉 베스트(Best)가 된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살게 되는데 자신의 일에서 '베스트'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베스트의 요소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베스트의 첫 번째 'B'는 균형(Balance)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직업적인 부분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인생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균형 잡힌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면 결코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라 할 수 없다.
 

두 번째, 'E'는 열정(Enthusiasm)이다.

 

열정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엉덩이를 얻어 맞고 처음으로 세상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부터 관 뚜껑이 덮이는 순간까지, 인생의 매 순간 필요한 요소가 열정이다.

만약 내 자신이 자신의 인생 목표나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조금도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당장 그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나는 맥아더 장군을 존경한다. 그가 강조하는 말은 열정(Enthusiasm)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1.26-1964. 4.5)은 미국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 전학점 A인 수석으로 졸업, 미 육군 역사상 최연소(39세)나이로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그의 나이 50세인 1930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40년 미 극동지상군 사령관으로 일본과 싸워 이겼으며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나자 UN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국본토 폭격을 주장 투르먼 대통령과 마찰로 51년 4월 11일 해임 됐다.
 

1951년 4월 19일 미의회에서 71세인 노장군 맥아더 원수는 고별사 중 '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Old sold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명 연설문을 남겼다.

맥아더 장군은 평소 사무엘 울만의 "청춘"(Youth)이라는 시를 집무실에 걸어 놓고 애송하며 시의 내용대로 열정을 품고 살았다.

 

“쉰 살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 짖었다.”

 

명나라 말기, 이탁오(李卓吾)가 나이 쉰이 넘어 공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유(思惟)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한 말이다.

 

공맹유가(孔孟儒家) 사상을 철저히 거부했던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말단 관직을 전전하다가 54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적 사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저서 ‘분서(焚書)’, ‘속분서(續焚書)’, ‘장서(藏書)’ ‘속장서(續藏書)’ 등은 모두 은퇴 후에 쓴 것이다.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은 노년을 그림 그리기에 빠져 보냈다.

"하늘나라에 가서 내 첫 번째 100만년은 그림 그리는 데 다 써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집은 물론 프랑스, 북아프리카, 멀리 미국 로키 산에도 이젤(Easel-그림판을 세우는 받침대)을 세워둔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캔버스는 시간의 시샘, 서서히 밀려오는 쇠락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막이다. 그림을 그리면 빛과 색, 평화와 희망이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한다"고 했다.

현재 그의 그림은 수 십만 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1942년 마산에서 출생한 고석문 씨는 화공학을 전공하고 우주개발 회사인 ‘록히드 마틴’사 등에서 일하다가 1997년부터 울산대학 건설.환경공학 교수가 된다. 그러나 변호사에 대한 동경심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2002년 60세 되던 해에 교수자리를 그만두고 미국에서 변호사 공부를 새로 시작해 2005년 2월 가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제 인생의 원동력입니다.”

 

‘모닝브라이트 파인아트’라는 그림 동호회 회장을 맡고 있는 윤덕기 씨(76세)도 노년을 보람 있게 보내고 있다. 20대에 한국에서 건설회사 대표를 지냈던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난 후에 취미로 배우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면서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해 전시회를 두 차례나 열 정도로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팔순을 지난 노인이 열네 살짜리 손녀에게 말했다. “내가 십년 만 젊었어도 컴퓨터를 배울 텐데...”.  그러자 손녀가 말했다.

“할아버지, 컴퓨터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면 돼” 그 말을 듣고 컴퓨터를 사서 혼자 이리 저리 씨름하던 노인은 이제 손녀와 이메일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청춘은 인생의 한 때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상태이다. 세월은 사람의 살갗을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포기하는 것은 영혼을 주름살 지운다...

(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s a state of mind. Years wrinkle the skin, but to give up enthusiasm wrinkle the soul)’

사무엘 울만의 ‘청춘(Youth)’이라는 시의 구절이다.

 

서울지법원장을 지낸 강봉수 씨는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소년 시절 꿈을 이루려고 수억대 연봉을 받는 대형 로펌 고문변호사 자리를 던지고 66세에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는 고교시절 노벨 물리학상을 꿈꾸던 이과반(理科班) 우등생 이였지만 아버지가 법관이 되기를 원해 서울대 법대로 진학했다. 그리고 인생 황혼에 접어들어서 이제라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열정과 꿈과 도전....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세 번째로 'S'는 집중력(Single-mindedness)을 뜻한다.

 

이것은 매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집중하고, 놀 때는 노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즉 어떤 일을 하든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선택한 그 일 하나에만  오직 온 관심과 애정을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T'는 끈기(Tenacity)이다.

 

어떤 일이든 끈기를 가지고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에 이른다.

'끈기'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윈스턴 처칠은 역사에 길이 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장재언) 

 

 

 

 

 

 

 

 

 

 

 

 

 

 

 

 

예장합동 총회 세계선교회(이사장:김정훈 목사·GMS)가 브라질 선교의 일환으로 브라질 장로교회 개척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표어로, 브라질장로교총회(IPB)가 제안한 브라질 장로교회 교회당 건축에 참여할 후원교회와 기관, 개인 모집에 나선 것이다.

 

 

 

GMS 김정훈 이사장과 전철영 선교사무총장이 3월말 브라질장로교총회의 초청으로 브라질을 방문해 교단 관계자들과 교류하고 있다.

 

 

브라질 장로교 총회는 1859년 미국장로교회의 선교로 시작된 개혁주의 교단으로, 지금도 정통 개혁신학을 견지하고 보수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장합동교단과는 2018년 7월 교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으며, 앞서 예장합동교단은 브라질장로교총회를 최상급 교류 단계인 ‘동반자 관계 그룹’으로 선정한 바 있다.

 

브라질26개 연방주5570개 군이 있는데, 이중 4013개 군에는 브라질장로교총회 소속 교회가 없고 복음 전파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브라질장로교총회 국내선교부는 2020년까지 장로교회가 없는 10만명 이상의 도시에 150여 개의 장로교회를 건축하자는 ‘교회 개척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GMS와 예장합동교단에 이 프로젝트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브라질장로교총회는 교회당 건축 후 매년 사역자 사례비를 25%씩 줄여 5년 안에 자립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교회당 크기는 일반적으로 10×30제곱미터(㎡)이고 건축비는 크기와 지역, 목회자 사택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어, 2200만원, 3000만원, 4000만원, 5000만원 이상 등으로 다양하다.

 

브라질장로교총회는 또 이 프로젝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회당 건축 부지를 이미 확보했으며, 사역자 역시 준비했다. 또 교단이 건축을 직접 주관해 추가 건축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으며, 건축 후에도 교회 운영비와 목회자 생활비 지원이 없도록 했다.

 

또 교회당을 건축한 곳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도록 했으며, 파송된 선교사는 브라질장로교총회에 소속된 수준 높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GMS 김정훈 이사장은 “브라질장로교총회와의 교회당 건축 연합 프로젝트는 건강한 신학 정체성을 가진 현지 교단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선교지 교회를 선교사 파송 교회와 현지 교단이 연합해 건축하고 선교사가 현지 교단과 협력해 선교를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교회당 건축 이후에 선교사가 현장에 지속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고 중요성을 설명했다.

 

GMS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1차로 20개 정도의 교회 건축을 목표로 삼고 있다. 신청 마감은 2019년 12월 30일까지이며, GMS(gmshq@gms.kr)로 하면 된다.

신청은 개인이나 교회, 기관 등 누구든지 가능하며, 건축참여교회 설명회 및 발기인 대회를 내년 1월 9일 GMS선교센터에서 가질 예정이다. 현지 교회당 건축은 내년 2월에 시작하며, 5월 초에 브라질을 방문해 교회별로 헌당식을 열 예정이다.

 

 

 

 

 

 

 

 

 

 

 

 

 

며칠 전 카톡으로 전해 받은 소식입니다.

지난 2018년 11월 11일 주일 오후, 미국 플로리다 오칼라라는 조그마한 도시의 한 가정으로 심방을 갔었습니다. 탈북민 소년 소녀들과 함께 찾아 나선 그 집은 아름다웠습니다.

 

집안에 들어서자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지쳐 있는 한 여인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골든 리트리버 개 한 마리와 앙상하게 메마른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을 지켜 보던 남편. 이들은 모두 밝게 웃으려고 애썼습니다.

 

우리 탈북민 소년 소녀들은 놀랍게도 그녀를 안아주며 기도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녀를 이모라고 부르며 돌아온 후로도 그녀를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저는 여인의 고통스러운 모습보다 천국에서 웃고 있을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한 회원을 잃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분 한 분의 기도가 중요한데 이 분이 회복되지 않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니… 저와 함께 북한 지하교회에 가보기를 소원하셨던 11월 11일 당시의 그 모습을 되새겨 봅니다.

 

이 소식을 탈북민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그때 동행한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생각 외로 저희 아이들이 이러한 떠나 보냄에 익숙해 있어요.’라고 답이 왔습니다. 세상을 떠난 자매와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탈북민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겹치면서 저는 그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역에 염려스러운 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제가 어젯밤도 꼬박 새웠습니다.

 

기도하는 한 회원이 떠나감과 이런 일에 익숙한 탈북민 아이들이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습니다. 제게는 회원 한 분 한 분이 소중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그렇게 소중합니다. 요즘같이 북한의 지하 성도들에 대한 관심이 식어져 가는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복음을 들어본 일이 없는 북한의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한 사람의 기도.

지하교회에서 숨죽이며 기도하는 성도들을 위한 샘물같은 한 사람의 기도.

북한 선교를 위해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위한 생명력 있는 한 사람의 기도.

이 기도들이 이루어져서 함께 북한 땅에서 예배할 그 날을 기다립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2019년 5월 15일

무익한 종 이 삭 드림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 까요?

 

성남에서 활동하던 초창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이 분명하다며 한 남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경기도 이천의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보호를 거부하면서 저희 센터를 알려주었다고합니다.


그 외국인의 외모는 한국 사람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습니다.
무료쉼터에 거주하는 몽골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대뜸 몽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몽골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사람을 쉼터에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쉼터에 머물게 된 그 사람은 말문이 터지자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놓는데
저뿐만이 아니라 몽골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는 몽골말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밤에 일어났습니다.

한숨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며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같은 방에서 자는 이들이 불안에 떨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야 정신이상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불상사라도 벌어질까 싶어 밤마다 지키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몽골로 출국을 시키려고 했지만 여권은 물론

돈도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몽골어 통역을 통해 대화를 시도했지만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름과 고향은 물론 그 어떤 신상정보도 모른 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몽골대사관에 문의를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계속 데리고 살 수도 없고, 보낼 수 있는 방법도 없어 난처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경찰에 불법체류자 신고를 하기로 했습니다.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도 난색을 표했습니다.
데려가지 않겠다는 것에 대해 우리도 난색을 표했습니다.


살다 보니 외국인을 보호해야 할 우리가

신고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지 않겠다는 그 친구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며칠 후, 그가 머물던 자리에 남겨진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검은 비닐봉투 안에 겹겹이 쌓여 있는 물건입니다.

몇 겹을 풀었을까?
상표도 떼지 않은 4~5세용 빨간 여자아이 운동화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신어 보지도 않은 성인용 예쁜 여자 운동화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난감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 나왔습니다.
건전지를 넣어 스위치를 켜니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짖어대는 강아지였습니다.
어린 딸과 부인을 위해 장만한 선물로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며 온전한 정신에서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그처럼 행려병자로 떠돌면서도 놓치지 않은 물건이었을 텐데…

아차 싶었습니다.
선물을 돌려주려고 출입국사무소에 전화를 하니

이미 출국을 해 버렸습니다.
난감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딸과 부인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을

그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더 우려되는 것은 가족을 만나기나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일 가족을 만났다고 해도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선물도 하나 없이 맨 손으로 돌아 온 이상해진

아빠를 맞는 어린 딸의 모습···.
큰돈 벌어 오겠다고 떠났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 온
병든 남편을 맞이한 그 부인의 심경이 어땠을까요.
몽골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거스'라고 말을 합니다.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이지요.
같은 몽골 반점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를 속국으로 지배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들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개와 같은 꿈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가족들에게 한국은 비극의 나라일 것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이 소중한 물건들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까요?
아빠가 사 두었던 예쁜 운동화와 장난감 강아지를 받아 들고

기뻐할 그 어린 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그 사건 몇 개월 뒤에 저와 함께 일하는

몽골 직원이 몽골을 가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그 가족들을 찾을까 싶어 놓고 간 물건을 챙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나게 되면 전달하라고 다른 선물도 마련했습니다.
몽골 신문에 그 가족을 찾는 사연을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몽골 사람과 가족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비극의 코리안드림'은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몽골 사람의 운동화 두 켤레와 장난감 강아지는
너무 가슴 아픈 사연이어서 슬픈 기억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몽골의 대초원이 그 사람과 가족의 아픔을

낫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구촌사랑나눔 김해성 

 

 

 

 

 

 

 

 

 

 

 

 

 

 

 

 

 

비금도 덕산교회(예장 통합)는 112년을 맞는 교회다. 목포노회 신안시찰 소속으로 1907년에 목포선교부의 맹현리(멕콜리)선교사가 해남, 진도, 강진, 완도, 장흥에서 사역하던 중 비금 출신 강낙언을 만나 그를 조사로 채용하는 데서 시작이 된다. 

강낙언은 맹현리 선교사를 10시가이 걸려 배로 비금도로 안내하여 첫 예배를 드렸다.  신안군에는 많은 섬들이 있었지만 비금 덕산교회가 가장 먼져 복음의 터전이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다.

 

 

비금교회의 시작 

 

 

이렇게 시작된 덕산교회는 망동에서 시작하여 매립으로 현 위치(비금면 비금 북부길 31, 전화 275-7304)로 이전 하기까지 초기에는 아동교육을 위한 망동학원(초등학교)을 운영했다.  당시 문맹을 퇴치에 전념하고 지역 문화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와 신앙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성탄절이 되면 연극, 합창, 율동, 암송과 같은 교회학교의 발표회는 학예회의 전신이요 요즘으로 하면 마을의 큰 축제였다. 섬마을에서 들려지는 성탄의 캐롤송은 한밤중에 천사들의 합창이었고 주민들에게 영혼의 잠을 깨우는 소리로 이 복음의 소리를 듣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비금도에서 배출되었다. 

 

 

 

 

 

더욱이 새벽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당시 시계가 없던 마을에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천상이 소리였고 희망의 종소리였다.  

 

해방후 신안군 지금까지 덕산교회는 인근 마을에 14개의 교회분가하고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덕산교회 출신으로는 김수진 목사(교회사학자)로 지난 2008년 덕산교회 100년을 맞이하면서(예수님께서 오신 아름다운 섬-비금 기독교 100년사)을 낸 바 있다. 

한일장신대 전신에서부터 학장과 총장을 역임한 강택현 목사도 덕산교회가 배출한 지도자다.

이외에도 덕산교회에서 분가한 이웃 도초에서는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가 나왔다.

 

 

 

아름다운 섬 비금도  

 

 

비금도(飛禽島)이름은 날아가는 새를 상징하는 데 천혜의 기름진 땅으로  해산물과 농산물등 부족한 것이 없는 섬이었다. 오지였으나 천성이 부지런한 주민들의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가난을 극복했다. 이제는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하트 해수욕장(해안이 하트모양)과 바닷가를 낀 자전거 도로등으로 유명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목포 북항에서 배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지금은  압해대교와 천사대교가 완공되여 목포서 차로 와서 암태 남강에서 차를 배에 실고 30분이면 가산항에 도착을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외로운 섬이 아닌 곳으로 많은 외지인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는 농사와 염전이 주산물이었으나 최근에는 겨울 시금치가 일품으로 주민들의 큰 소득으로 자리 잡았다. 1004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여 천사의 섬으로 불리우는 신안군은 천혜의 자원으로 세계에 유일한 해상공원을 꿈꾸고 있다.

 

암태도는 소작쟁의로 안좌는 김환기 화백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또 세계 바둑계의 천재 이세돌 기사(알파고와 대결)도 비금도 출신이다.   

 

 

 

 1968년 12월 성탄 음악제를 조천기 전도사가 지도하였다.

 

덕산교회의 일제역사와 기록은 부실하지만 해방후 첫 목회자로는 도상욱 목사(1914-2007) 시무하면서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1946년 영광읍교회로 이임을 한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인민위원회 등으로 온 섬이 원치 않는 고초를 겪는다. 

 

9대 김영욱 목사는 1952-1953간 시무하다가 1955년 해남 황산교회로 이임한다. 이후 윤희석 목사가 25평의 기와교회당을 건축한다 그후 미국으로 이민목회를 떠난다. 그리고 안수받지 않은 전도사들의 시무도 이어졌다.

 

 

 

* 윤희석 목사의 미국 송별예배후 기념사진

 

 

역대 교역자 및 장로 임직자

 

1920년 김성규 초대 장로 임직, 

1927년 김금환 장로 임직,

1928년 정인배 전도사 부임,

1938년 김인환, 유정동 장로 임직, 

1944년 김영욱 장로 임직,

1946년 노금섭 장로 임직,

1947년 도상욱 목사 부임,

1952년 김영국 목사부임,

1967년 강명채, 김영희 장로 임직, 

1968년 조천기 전도사 부임,

1971년 이길수 전도사 부임,

1972년 김피즉 장로 임직,

1975년 김일동,강영석 장로 임직,

1977년 주춘옥 전도사 재부임,

1975년 김갑수 전도사 부임,

1980년 이옥재 전도사 부임,

1982년 김종문 전도사 부임,

1984년 김종남, 김일출,강기원 장로 임직,

1985년 박정규 목사 부임,

1988년 차양수 목사 부임,

1991년 장경호 목사 부임,

1997년 주신웅 목사 부임,

2004년 강병고 목사 부임,

2007년 유성광 김남출 장로 임직,

 

비금교회로부터 분가된 신안군내 교회는 다음과 같다. 

비금 서부교회, 제일교회, 보고교회, 당산교회, 서산교회, 영광교회, 동부교회, 송치교회, 신안교회, 신안일교회, 비금중앙교회, 갈보리교회, 가산교회, 비금실로암기도원등 14개 이다.

 

이외 증도는 CCC의 김준곤 목사와 문준경 전도사의 출생지로도 유명하고 100회기 총회장을 지낸 채영남 목사도 신안군 출신이시다.

 

덕산교회의 전설은 신안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것 외에도 이 교회의 에 있다. 이 종은 지금도 현존하는 데 오랫동안 방치된 것을 2016년 부임한 황규석 목사가 이 종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종탑을 세워 보존하게 된다.

 

 

 

현재 황규석 목사와 원로: 강기원, 노용무, 은퇴: 유남출, 시무: 김성관 장로가 있다. 

출석교인은 약 100여명으로 오랜 역사 답게 지역의 복음화와 지역사회에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황 목사는 영주교회 출신으로 남미 선교사와 충청도와 경기도 고양시, 강원도등에서 목회를 하다가 이제 마지막 시무지로 알고 충성하고 있다.  

 

 

 

 

* 22대 황규석 목사 위임식과 임직식

 

비금 덕산 교회 놋종

 

놋종으로 유명한 덕산교회의 이 종의 헌납역사는 이렇다.

덕산교회의 설립자 맹현리 교사는 김경운 조사의 후임으로 김봉현 조사를 임명하였는 데 그는 당시 비금교회 4대 교역자가 된다.

 

조사 제도란 정식 신학교육이 시작되기 이전에 평신도 중에서 기도와 교수능력이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작은 교회들을 시무케 한 제도이다. 이들은 목선교부에서 달(月)성경학교를 이수케 하고 노회가 임명하는 준 교역자였다.

김봉현 조사의 동생 김봉신은 당시 목포 양동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크게 감동을 받아서 고향교회에 자신이 종을 헌납하리라 작정하고 3년간 점심을 금식하여 모은 양식을 팔아 당시 평양에서만 주조가 되는 놋쇠종을 1910년에 주문한다.  이 종을 성종(聖鐘)이라 불렀다.

 

 

 

  

종에는 관서로종이라고 한글로 씌여있는 데 평양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비금교회에서는 이 종을 매일 새벽과 주일낮과 저녁,  수요일에 울려 온 동네시계역활을 하였다. 종소리는 상암, 논골은 물론 죽립리, 망동, 서산부락까지 펴져 이곳의 명물이 되었다.  

이 종소리듣 듣고 성장한 김수진 목사는 광나루문학 제11집(2003.9.10.)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김수진 목사는 덕산교회 출신 목사 중 한분으로 장신대와 단국대를 졸업하고 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과 동지사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미국 훌러와 코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 대광교회 목사와 한영신학대학 교수, 서울성서신학원 원감과 한일장신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비금덕산교회 종소리

 

들녘을 가로 지르면서 조그만 한 재

하나만 넘으면

이느덧 교회 종소리는

초종을 알리고 있었다.

 

그 초종소리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교회 문턱에 들어서면 재종소리는 뒷 봉우리에

메아리 울려 더 크게 울려오고 있었다.

 

교회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친정집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포근할 수 가 없었다.

 

늦으면 앞자리를 빼앗길 텐데

종소리를 듣고

열심히 모여 들었던 비금도 섬사람들

그 종소리가 해방의 종소리로 들릴 날이

머지않아 오겠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알리려 나 했던

비금 덕산교회 종도

어느 긴 칼을 차고 온 일본 순사의 손에 내려지는 순간

교회 종소리는 끝내 멈추고 말았다. 

 

 

 

 

 

 

 

 

 

 

 

 

 

북한에서 탈북한 고위 인사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 김정은의 속임수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워싱턴타임스가 11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 고위 탈북자가 1년 이상 전에 탈북했고 '(미국) 국가 안보 관련 부서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서한에서 자신을 "50년간 북한에 살았고 30년 동안 조선노동당 간부로 일했다"고 했다.

이 서한은 매슈 포틴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과 앨리슨 후커 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에게 전달됐다고 신문은 전했다. 그러나 이 서한이 트럼프에게 전달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탈북자는 서한에서 "김정은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북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며 "김정은은 핵무기가 적의 선제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앞으로 50년간 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이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에 서명한 점, 지금껏 핵무기를 하나도 폐기하지 않은 것 등이 이를 방증한다고 했다.

 

그는 "김정은은 여전히 핵위협을 가하고 당신(트럼프)과의 관계를 이용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북 화해를 주장하는 진보주의자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사기극에 가담했다"며 "김정은·문재인 두 사람이 미국 대통령(트럼프)을 속였다"고 했다.

그는 북한 비핵화를 위해 엘리트를 대상으로 김정은 축출을 위한 심리전을 펴는 것이 "핵폭탄 같은 위력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평양과 대도시, 군에 (김정은의 실체를 알리는) 심리전 정보가 쏟아지면 핵에 집착하는 지도자(김정은)에게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며 "이것이 새로운 정치체제의 탄생으로 이끌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효과적인 심리전 작전을 개시해야 (북한의) 장군들이 위기 때 (김정은의) 공격 명령을 따르지 않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도 했다.

 

 

 

 

 

 

 

 

 

 

 

 

 

 

 

 

 

 

100세의 노교수 김형석은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방안은 교회 지도자들이 책을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가 그렇게 독서를 중시하는지 알기 위해서 그의 책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두란노, 2018)에 나오는 독서에 관한 조언에 귀 기울여본다. 

   

 

 

나는 대학을 정년으로 떠나면서 한 가지 사회적 봉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국민독서운동이었다. 20년 가까이 그 운동을 하면서 얻은 하나의 교훈은 우리 교회가 독서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경우는 옛날이지만 좀 달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비교적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신앙의 수준 높은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중학교 4학년이 되면서는 교회 설교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목사님들의 설교가 대부분 같은 내용이었고, 신앙적 깊이를 더해 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어느 교회에서나 비슷한 설교였고, 반복되는 내용이 강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성경과 기독교 사상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4, 5년 동안에도 단 한 번밖에 한인교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내 친구를 교회에 안내해 주기 위해서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있는 예배 시간에는 언제나 일본 교회에 참석하곤 했다. 새롭고 깊이 있는 설교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 선택이 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한 교회에서는 대학생들이 성경공부를 하는 서클이 있었는데, 신약의 복음서를 히랍어 원전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목사는 더 많은 공부를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미국의 흑인 교회나 보수적인 교단에 속하는 교회보다는 일본 도쿄 중심지의 교회가 앞서 있었던 것으로 본다. 도쿄에는 많은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함께 독서 운동을 해 온 사람이 목사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교회 중심의 독서 운동을 시도해 보았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2017년 경의 일이다. 한 교단에 속하는 장로들을 위한 수련회의 초청을 받아 지방에 간 일이 있었다. 300명 정도가 모인 집회였다.

내 강연이 중심 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중의 몇 사람쯤은 내 책의 독자가 있을 것이고 기념으로 사인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사인을 요청해 오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어떤 저자라고 소개해 주는 사회자도 없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교회 계통이 아닌 일반 사회에 강연을 갔을 때는 적어도 몇 사람씩은 사인을 요청해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 책 『예수』나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종교계의 베스트 셀러가 되어 신문에서도 화제가 되어 있었다. 『백 년을 살아 보니』라는 책은 10만 부 이상의 독자가 있을 때였다.

 

그 지방 모임이 끝난 얼마 후에는 서울의 같은 교단 본부에서, 주로 장로 중심의 평신도 지도자 양성 교육이 있었다. 일정 기간 평신도 지도자를 위한 교육이었다. 7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회원들 가운데서도 내 책의 독자는 없었다. 다른 사회 기관에 가면 연수에 참석하는 전 회원에게 미리 내 책을 배부해 주는 경우가 많던 시기였다.

 

많은 교회에 다녀 보지만, 기독교 신앙에 관한 도서들을 교회에 비치해 두고, 목사님이 어떤 책을 읽으라고 권고하거나 저자를 초청해 강의를 듣게 하는 교회는 거의 없었다.

큰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고 저서에 관한 대담을 나눈 교회는 서울 한남동에 있는 나사렛교회뿐이었다. 교회에 여러 책을 비치해 두고 읽기를 권고하는데 내 책들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천주교의 3, 4곳 성당에서는 내 저서를 중심으로 초청을 받아 신앙 강연을 겸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나는 교회에서 자랐으나 직접 성경을 여러 번 읽었고, 성경과 기독교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신앙의 90% 정도는 독서를 통해 얻고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TV 등을 통해 교회 설교에 관심을 갖는 때가 있다. 설교의 대부분은 성경의 반복이며 어느 목사님이나 비슷한 내용임을 볼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문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며 지성인들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기독교적 해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 칼 바르트나 R. 니버, P. 틸리히 같은 신학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큼도 교회 지도자들이 독서를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앞날을 위해 우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젊은이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왜 스님들이 쓴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어 많은 독자를 갖는데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의 저서는 그렇지 못하냐는 물음이다. 그런 생각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님들은 인생에 관한 생각과 글을 쓰는데, 신부나 목사님들은 교리에 관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은 인생의 문제와 사회 역사를 통한 하늘나라를 가르쳤다. 교리가 율법, 계명을 초월했던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계명과 교리를 위해 살았던 것이다.

 

독서는 성경이나 기독교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에 관한 문제를 알고, 그 해답을 구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가장 소중한 과제이다.

그런 독서를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그리스도인이 외면한다면 어떻게 기독교의 정신이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사실, 세계에는 많은 나라와 인류가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전체 인류에게 문화적 혜택을 베풀어 주는 나라는 다섯 나라 정도이다. 그 다섯 나라가 없었다면, 우리는 문화의 태양 빛은 보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사는 것 같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다섯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아시아에서는 일본이다. 독일 다음에는 러시아가 등단할 것으로 모두 믿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선택하면서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상실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 다섯 나라 국민은 어떠했는가.

국민의 절대다수가 1세기 이상에 걸쳐 독서를 한 나라들이다. 지금도 그 5개국을 제외하고는 독서 수준이 높은 나라가 없다.

 

우리도 이광수, 최남선 같은 선각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독서 활동이 없었다. 그들과 후배들이 일본에 건너가 학업을 닦으면서 독서 습관이 유입되었다. 그 후에는 해방과 더불어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독서하는 풍토를 조성해 준 셈이다.

 

어떻게 보면, 독서가 가장 소중한 애국심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독서를 포기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뜻하는 것은 독서를 위한 독서에 그치지 않는다.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계속하며 과거의 신앙적 개척자들과 지도자들의 사상을 뒤따르는 것은 필수 과제이다.

 

사회의 지적 수준은 해가 거듭될수록 성장하고 있는데, 교인들은 제자리에 머물러 만족한다면 그런 교회는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 독서를 통한 신앙은 교회와 더불어 기독교 정신을 계승하기 때문에 언제나 사회적 지도 이념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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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요?

성 니콜라스는 어떤 분인가요?

 

산타클로스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네덜란드의 산타클로스(신터 클로스)

영국의 산타 클로스=파더 크리스마스

 

프랑스 산타 클로스 =프티 노엘 = 페르 노엘

독일의 산타클로스= 펠체 니콜

산타할머니

산타의 썰매를 끄는 빨간 코의 루돌프

산타를 돕는 난쟁이 요정들

산타 마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산타클로스에게 편지를 써도 되나요?

산타클로스는 왜 문으로 안 들어가고 굴뚝으로 들어갈까요?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대체 몇 집을,

몇 시간 만에 방문해야 할까요?

산타클로스의 선물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1. 생명의 지혜 - 하나님을 아는 지식 -

 16. 믿음 - 감화와 확신 -

  2. 성경 - 하나님의 특별한 학교 -

 17. 회개 - 옛 사람 죽음, 새 사람 삶 -

  3. 말씀과 성령 - 말씀하시는 말씀 -

 18. 그리스도인의 삶 - 자기 십자가 삶 -

  4. 삼위일체 하나님 - 한 본질 세 위격 -

 19. 이신칭의 -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

  5. 피조물 -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 -

 20. 성화 - 그리스도의 중보로 거룩함 -

  6. 사람 -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 -

 21. 그리스도인의 자유 - 순종의 자유 -

  7. 하나님의 섭리 - 하나님의 손 -

 22. 기도 -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 -

  8. 원죄, 자유의지 - 하나님의 은총 -

 23. 하나님의 예정 - 영원한 작정 -

  9. 율법 - 올바른 삶의 규범 -

 24. 최후의 부활 - 부활소망 영원한 복 -

 10. 복음 - 영생의 언약 -

 25. 참 교회 -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 -

 11. 중보자 그리스도 - 중보의 필연성-

 26. 교회의 직분 - 경건과 사랑 -

 12. 그리스도의 사역 - 신성 인성 교통 -

 27. 교회의 권세 - 교리 입법 사법 -

 13. 구속자 그리스도 - 비하와 승귀 -

 28. 성례, 세례 - 은혜의 보이는 표 -

 14. 그리스도의 대속 - 하나님의 의 - 

 29. 성찬 - 성도들의 영적 잔치 -

 15. 성령 - 권능, 은밀한 사역 -

 30. 국가 - 하나님 섭리가 통치 -

 

 

 

 

 

 

 

 

 

 

 

 

 

 

 

 

 

 

 



 

1. 도리도리   2. 좌우로 회전,
3. 앞뒤로 끄덕임, 4. 좌우 옆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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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는 청어목 청어과에 속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중국해와 태평안 연안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바닷물고기입니다.

 

고등어, 꽁치와 함께 대표적인 등푸른 생선에 속하는 정어리는 주로 구이나 조림 등의 형태로 많이 섭취합니다.

 

또한 정어리에는 불포화지방산을 비롯해 여러 미네랄 성분들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에 우리 몸을 건강하게 효능 역시 다양하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정어리의 대표적인 효능 7가지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 동맥경화예방

 

정어리에 풍부하게 함유된 불포화지방산의 주요 성분인 EPA 성분은 100g 기준으로 1.4g으로 등푸른 생선 중에서도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풍부한 EPA 성분이 혈전의 생성을 억제하고 혈액의 흐름을 도와 동맥경화를 예방하는데도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2. 뇌건강
 

풍부하게 들어있는 DHA 성분이 뇌세포 활성화를 돕고 뇌의 혈액순환을 촉진하여 뇌의 전반적인 건강 증진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요. 특히 DHA 성분은 인지능력이나 기억력 등의 뇌기능 향상에도 도움을 주어 치매를 예방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3. 뼈건강
 

정어리에는 뼈건강에 이로운 작용을 하는 칼슘 성분과 더불어 칼슘의 체내 흡수율을 도와주는 비타민D도 풍부하게 들어있기 때문에 골격을 튼튼하게 하고 골다공증 등과 같은 뼈질환들을 예방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4. 고혈압예방
 

정어리에 풍부하게 함유된 불포화지방산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줄 뿐만 아니라 칼륨이 혈관 내 나트륨 배출을 도와 고혈압을 예방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정어리 육(肉)은 대부분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백질은 20여 종류의 아미노산이라는 작은 분자들이 수백 개에서 수십만 개가 뭉쳐 있는 형태이다.

 

아미노산은 각각의 특성과 기능이 있으며 이들이 서로 조합하여 결합된 형태를 펩타이드(Peptide)라고 한다.

펩타이드도 각각의 특성과 기능을 지니게 되며 이 중 정어리육 단백질 속에 바린과 티로신(VALINE and tyrosine)이라는 2가지 아미노산이 결합된 펩타이드혈압을 정상치로 유지하는 데 효과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

 

사실 정어리가 혈압에 좋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지속적으로 정어리를 먹기란 불가능하며 한끼 식사로 먹는 양속에 함유된 성분의 양도 극히 적다.

 

정어리 육에 있는 바린-티로신 펩타이드를 추출하여 정제한 물질을 농축하여 섭취할 때 정상적인 혈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며 임상적으로도 뛰어난 효과를 보여 이를 추출 정제한 제품이 시판되고 있다.

 

혈압이 높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혈관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심장병 및 뇌졸증에 큰 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식사요법이나 운동요법으로도 어느 정도 완화되기도 하지만 약물치료가 단기적인 효과가 크다. 그러나 혈압약은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아 식품에서 유래한 기능성 물질이 부작용 없이 효과가 높으므로 권장할 만하다.

 

 

 

5. 성장발육

 

풍부한 DHA 성분이 성장기 어린이의 두뇌 발달을 도와주고, 양질의 단백질을 비롯해 고루 함유된 칼슘, 인, 철분 등의 각종 미네랄 성분들이 골격 발달 및 성장발육에 이로운 효능이 있다고 하네요.

 

 

6. 기력회복

 

풍부하게 들어있는 단백질과 더불어 골고루 함유된 비타민과 미네랄 성분들이 신진대사와 혈액순환을 도와 원기를 보충하고 기력을 회복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7. 시력개선

 

정어리에 들어있는 비타민A 성분이 시력을 보호하고 시력개선 작용을 통해 눈의 전반적인 건강 증진에도 이로운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요. 특히 장시간 스마트폰이나 TV, 모니터를 봄으로써 생길 수 있는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데도 좋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