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던 거대한 독립운동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설움
가득한 외침은 또 다른 해외 식민지 국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5·4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준
울림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3.1운동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장재언)
1919년 3·1운동 직전에 촬영된 탑동공원(탑골공원)의 팔각정.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가 천제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본떠 세운 건축물이다.
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그날이 밝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청명했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먼 길’을 떠나는 채비를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하루 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를
끼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히 참고 견뎌라. 우리 국권 회복에 대해서는 차후 세계 지도의 색채가 바꾸어질 때 각 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킬 날이 올 것이다.…” (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기독교 감리파 대표
이필주(1869∼1942)도 덕수궁 옆 정동교회 사택에서 영문을 모르는 식구들을 위해 마지막 가족 예배를 올렸다.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인
김창준(1890∼1959) 역시 거사의 길을 나섰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되는 어린 아내와 노부모의 생계가 걱정됐지만
‘가정보다는 조국’이라는 불타는 애국심이 먼저였다.(‘김창준 회고록’) 이들 민족대표는 가족이 일제의 보복을 당할까 봐 3·1운동 참여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3만50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지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오늘의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이종일은 홀로 남겨질 어린 손녀(이장옥)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사(聖師·손병희)가 전날 민족대표들과의
최종 회합에서 “가족 생활비로 1인당 매월 10원씩 지불할 것”이라고 약속한 말로 위안을 삼았다. (이종일의 일기 ‘묵암비망록’)
종로구 경운동에서 이종일이 기도를 올리던 그 시각, 인근 북촌 계동의
중앙학교
운동장은 바닥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전단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일찌감치 등교하던 학생들은 한 장씩 주워보고는 아연 긴장했다.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서였다. 그때 교장
송진우가
숙직실에서 내려와 학생들이 서성대는 곳에 다가왔다. 전단 한 장을 주워 보더니만 빙그레 웃으면서 “너희들 공부 잘하라”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넓은 운동장을 횡단해서는 쏜살같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숙의 ‘죽사회고록’)
송진우는 독립선언서를 처음 보는 척 시치미를 뗐으나, 이숙 등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교장 선생님’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은 진작에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등을 통해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행동대 조직을
구축하도록 지도했다.(‘고하 송진우전기’, 현상윤의 ‘3·1운동 발발의 개요’)
학생조직은 후에 기독교 측
박희도, 이갑성
등이 가세해 중등학교
대표들까지 포함하는 조직으로 확대됐다.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학생대표들은
승동교회
예배당에서 최종적으로 독립선언서 살포, 거리 시위
등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3월 1일 새벽 경성에서는 중앙학교뿐 아니라 10여 개의 공·사립중학교와 네댓의 전문학교 등지에 격문(檄文)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시내 곳곳의 집집에도 배포됐다.
오전, 중앙학교 학생들은 평상시와 같이 수업을 했다. 상급생들은 오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술렁거렸고, 영문을 모르는 하급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현상윤이 가르치는 수업시간. 그런데 현상윤은 수업 내용과 관계가 없는 제1차 세계대전, 파리평화회의 전망, 민족자결주의 등등의 얘기로
한 시간을 채웠다. 그는 수업을 마치면서 영어로 “굿 찬스, 굿 찬스(good chance·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의미심장한 힌트를
주었다. (이희승, ‘내가 겪은 3·1운동·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조선요리점인 태화관. 을사늑약, 한일강제병합 등이 모의된 이 터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다.
독립운동의 ‘굿 찬스’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독립선언서 배포와 군중 동원 행동대 역할을 한 학생대표들은 각기 맡은 반의 급장을 통해
탑동공원(탑골공원)으로 집결하도록 밀통했다. 낮 12시 정오를 알리는
남산의
오포(午砲) 소리가 집결 신호였다.
보안을 철저히 했던 때문일까, 경성 시내는 평소처럼 조용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이윽고 종로2가의 탑동공원은 꾸역꾸역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학생들로 삽시간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중앙학교는 상급생에서 하급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교가 텅 빈 바람에
이날로 예정된 졸업식은 취소됐다.
탑동공원의
팔각정을 중심으로 삼밭에 심 박히듯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1897년 조성된 탑동공원은 이전부터 크고 작은 집회와 행사가 열린
곳이자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한민족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공간이기도 했다.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에 의하면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에 건축된 팔각정은 고종 황제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는 제사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쏙 빼닮도록 지은 구조물이었다.
또 대한제국의 군악대가 공원 서편에, 대한자강회를
잇는 대한협회가 공원 동편에 자리 잡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 원 지폐 앞면에 팔각정 모습이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탑동공원은 조선이 당당한 자주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선언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오후 1시 30분경. 약속 시간이 다 돼 가는 데도 민족대표인 듯한 사람들은 탑동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탑동공원에서 불과 300여 m 거리의
태화관(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민족대표들이
일경(日警)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탑동공원의 흥분한 학생·군중과 경찰의 충돌을 우려해
장소를
변경한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무엇보다도 ‘비폭력’을 중요시했다.
요릿집 태화관을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선택한 데도 까닭이 있었다. 장안의 명물인 조선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은 원래 조선왕조의 순화궁(順和宮)
터였고, 이후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었다.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의,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1910년 강제 병탄 조약 준비 등 대한제국을 능멸하고 없애는 행위가 모두 이 집에서 벌어졌다. 바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신석호, ‘(개설) 3·1운동의 전개·3·1운동 70주년
기념논집’)
태화관 주인 안순환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 즉 궁중 연회의 최고
주방장을 지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사퇴한 그는 명월관과 태화관을 차린
배일(排日)사상가였다. (‘고하 송진우전기’)
태화관 산정별실(山亭別室)에 자리 잡은 민족대표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이종일이 인쇄해온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훑어보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등 기독교 측 대표 3인은 지방 행사에 갔다가 경성에 늦게 도착해 이날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병조는
상해로 건너가 불참한 대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고 2선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로 한
함태영이
참석했다.
이때 독립선언서 제1순위에 기재된 손병희가 천도교 청년 이병헌을 불러 탑동공원으로 가서 학생들을 무마하도록 당부했다. 이병헌은 태화관에서
탑동공원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오더니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흥분한 나머지 태화관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민족대표들이 요정에 앉아
있다는 말에 학생들이 격분했다는 것이다. 이윽고
강기덕(보성전문학교 대표),
김원벽(연희전문학교 대표) 등 학생대표 10여 명이 몰려왔다.
“선생님들, 무슨 일로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한다고 해놓으시고 이곳에 와계십니까. 우리는 선생님들이 오시기를 고대했는데 이렇게 되니 일이
낭패를 본 것이 아닙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말입니다. 지금 공원에는 수천 명의 남녀학생과 온 장안의 시민이 기대에 찬 눈으로 선생님들의 선도를
바라고 있습니다. 속히 그리로 가셔서 민중시위 운동을 인도해 주십시오.” (‘묵암비망록’)
그러자 손병희와 최린은 젊은이들이 완력으로 소요를 일으킨다고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면서 간곡히 타일렀다. 물러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대로 따로
거사를 추진키로 했다.
오후 2시.
간략하지만 장엄한 행사가 시작됐다. 일제의 잔인한 무단통치 10년 만에 숨죽여 지내오던 한민족이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엄숙한
시간이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남측의 정자(태화정) 동쪽 처마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근엄한 자세로 경례했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내건 깃발이었다.
한용운이
신명을 바쳐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자는 취지로 인사말을 한 후, 민족대표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미 일제의 정사복 경관과 헌병 수십 명이 태화관을 둘러싸고 있었다.
최린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일본 경무총감부에
미리 알리도록
말해두었던 것이다. 이윽고 일경이 인력거를 가지고 와서 민족대표들을 체포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최린 등 민족대표들은 태연자약한 자세로 이들의
무례함을 꾸짖고 자동차를 가지고 오라고 호령했다.
민족대표들이 서너 명씩 자동차에 분승해 남산 왜성대(현 예장동)의 경무총감부에 끌려갈 무렵, 탑동공원 중앙단상에도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나타났다.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두 손으로 높이 들고 엄숙하면서도 떨리는 목청으로 읽어 내려갔다. 숨을 죽이고 듣던 학생들은 낭독이 끝나자마자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한국독립만세
등 만세 명칭도 여러 가지였다.
감격에 겨운 만세
소리는 마치 우는 소리인 듯했다. 남녀 구별 없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남학생들은 흥분해 “우와! 우와!”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고
모자를 공중으로 날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모자들로 인해 하늘이 까마귀 떼로 덮인 듯했다.
일경이 현장에 출동해 있었으나 이들을 막지 못했다. 태화관에서 붙잡혀가던 민족대표들도 군중의 만세 소리를 들었다.
나용환, 이갑성, 최린,
김창준
등은 체포돼 갈 때 자동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씩 군중에게 던져 주었다.
거리에 있던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을 향해 목멘 소리로 더욱
만세를 크게 외쳤다. 민족대표들은 “우리의 목표는 달성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잡혀가지만 효과는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고 기뻐해
마지않았다. (‘묵암비망록’)
팔각정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독립운동본부의 전위부대로 내정된 학생들이 주도했다. 중앙학교 대표 중 한 명인
최현은 애장(愛杖·밤낮 들고 다니는 지팡이)을 높이 들고 공원 정문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전진했다. 그 뒤를 따라 학생들은 종로통으로
물밀듯이 빠져나갔다. (‘죽사회고록’)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자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났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국장)을
보러 상경한 군중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독립이 된 줄 알고 전부 길로 뛰어나왔다. 길은 흰옷 입은 사람들로 꽉 찼다. 앳돼 보이는 여학생들과 부엌 살림하는 아낙, 상투 꽂은
노인 등도 끼여 있었다.
서울서 가장 넓은
육조(六曹)거리(현 세종로)도 만세군중으로 뒤덮였다. 마침 그때 이 만세군중을 비집으며 일본인 경기도지사가 인력거를 타고
퇴근하다 경을 치르기도 했다. 군중들이 그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자, 도지사는 혼비백산해 고분고분 만세를 부르고
빠져나갔다.
이날
만세의 불길이
오른 것은
경성뿐만이
아니었다. 서북지역의
개성,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와
동북지역의
원산, 함흥
등에서 경성과 첫 거사를 같이했다. 3·1운동 현장에 있었던
유광렬(언론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3·1독립운동은 장엄 바로 그것이었다. 진지했던 그 모습, 혼연일체가 된 단결력, 그 어느 것 하나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감격적인 것이었다.
언제 다시 우리 민족이 그렇게 단결할 수 있을는지….”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1일자)
이필주: 1869년
서울 출생. 22세 때 구(舊)한국군 군인으로 근무하다가 1903년 군복을 벗고 선교와 교육 사업에 종사함. 신학교를 졸업하고 정동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름. 출옥 후 수원 남양교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거하다가 1942년
병사.
이갑성: 1889년
대구 출생.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함.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 살포 등 중책을 맡음. 1924년 세브란스병원 의약 지배인을 거쳐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광복 후 의회 의원,
광복회장 등을 역임함.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가 1981년 사망함.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자립과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만 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를 선언하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아 이를 두루 밝히며, 영원한 민족의 자유와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하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하니, 이는 하늘의 명백한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로이기에 세상의 어떤 힘도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의 희생이 되어 유사 이래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고통을 당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광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슬픈 일입니다.
오랜 억압과 울분을 떨치고 일어나려면, 현재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땅에 떨어진 민족의 양심과 국가의 체면과 도리를 떨쳐 얻으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겨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바로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천만 겨레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듯 굳게 결심하니, 인류 공통의 성품과 이 시대의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주의라는 창과 방패로 호위하고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싸우니 어느 강도를 꺾지 못하겠습니까! 물러가 일을 꾀하니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겠습니까!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배신을 죄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학자들은 강단에서, 통치배들은 실생활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대대로 닦아 온 찬란한 위업을 식민지로 삼아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무도함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를 꼼꼼히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남을 시샘하여 쫓아내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배들의 부귀공명의 희생이 되어 압제와 수탈에 빠진 이 비참한 상태를 바르게 고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하고 인간다운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침략·강점이었으므로, 그 결과는 마침내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실정을 보십시오!
용감하고 현명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과거의 잘못을 뜯어 고치고, 참된 이해와 선린을 바탕으로 우호적인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서로 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인 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원한과 분노에 쌓인 이천만 민족을 폭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오직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시기가 갈수록 두터워진 결과,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이 분명하니, 오늘 우리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의 선진 후원국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악몽처럼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동양의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필수적인 받침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겠습니까!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무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과거 한 세기 동안 갈고 닦으며 키우고 기른 인도주의 정신이 이제 막 새로운 문명의 밝은 빛을 온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통을 막아 꼼짝 못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 때의 형세라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키고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맘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문화를 찬란히 꽃피우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떨쳐 일어났습니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분연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억만대의 조상님들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입니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입니다.
공약삼장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맙시다.
2.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흔쾌히 발표합시다.
3. 모든 행동은 질서를 가장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합시다.
1
We herewith proclaim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liberty of the Korean people. This we proclaim for the world to witness the equality of all humans; this we proclaim for our own posterity to enjoy the inherent right of independence and self-respect.
2
We are declaring our independence by the solemnity of our five-thousand-year history; by the loyalty of twenty million people; by the yearning for the advancement of everlasting liberty; by the desire to take part in the global reform rooted in human conscience. This is a righteous claim to fulfill the holy will of God and the spirit of our age calling for the fair co-existence of all humankind. Therefore, no power in this world shall suppress our independence.
3
For the first time in our 5000 years’ history, we have suffered for over a decade under foreign tyranny while falling a victim to the obsolete imperialism and authoritarianism. How long have we been deprived of our right to live? How immeasurable is the damage to our national pride and honor as well as to our spiritual growth? How many opportunities have we missed to make our own creative contribution to the progress in the world civilization?
4
For certain, if we are to overcome our longstanding resentment; if we are to extricate ourselves from today’s pain; if we are to eliminate the fear for the future; if we are to resuscitate our trampled national pride; if we as individuals are to reach our full potential; if we are to save our children from the legacy of shame; if we are to bequeath to our future generations blessing and prosperity, the most urgent mission is to establish the independence of our people. Now that we people of twenty million keep a sword in heart, and that the common value of the humankind and conscience of the era stand up for us equipped with arms of justice and morality, what can stop us from pressing forward to defeat the strongest and what purpose can we not accomplish?
5
We have no desire to accuse Japan of breaking many solemn treaties since 1876, nor to single out particularly the school teachers or government officials who merely seek a conqueror’s gratification, treating the heritage of our ancestors as a colony of their own, and our civilized culture as savages. We have no intention to find fault with Japan’s contempt of our long and distinguished civilization and the principles on which it rests. We are pressed to reprimand ourselves, and thus have little time to reproach others. Busy with today’s work, we have little time to chastise the faults of yesterday. Today, our only duty is to rebuild ourselves, not to demolish others.
Our aim is to explore our new destiny according to the solemn dictates of our conscience, not to squabble with others over fleeting grudges and old animosities. It is to restore the natural and rational foundation for the world free from the logic of power by rectifying the unnatural and irrational ambition of the Japanese politicians in the grip of obsolete ideas.
Behold the consequence of the annexation formerly made with no national consensus! It has inevitably led to a deep trench of everlasting resentment between two peoples under the influence of intimidation used as a temporary measure, inequality caused by discrimination, and statistics falsified to justify it.
For both countries to avoid disaster and foster amity, the best way is for sure to boldly correct old wrongs and to build up a new relationship based on true mutual understating.
Moreover, the oppression on 20 million Korean people filled up with bitterness and enmity will never secure eternal peace in Asia. Undoubtedly, it will exacerbate the apprehension and distrust of four hundred million Chinese people who hold the key to East Asian stability and, as a result, will lead to the unrest and eventual downfall of the entire region.
Therefore, the reasons why we proclaim the independence of Korea are as follows: 1) to permit Koreans to return to their rightful lives, 2) to enable the Japanese to break away from their wrongful path and concentrate on their responsibility as a major player in East Asia, 3) to free the Chinese from their nightmare of uncertainty and anxiety about Japan, 4) to make an indispensable step from the stability of East Asia toward the global well-being of all humanity and world peace. This is far from a matter of narrow-minded resentment.
6
Behold! A new world is approaching before our very eyes! The age of might has receded, and the age of morality has arrived. The spirit of humanism cultivated throughout the past century now begins to throw its light on a new chapter in world history. Just as a new spring has come hastening the rebirth of every living thing, our pulse, once frozen in the bitter cold and snow, now quickens in the warm breeze and sunshine. The good fortune of heaven and earth has returned to us, and we ride the changing tide of the world. Do not hesitate or flinch! By protecting our inalienable individual right to freedom, we will enjoy our lives to the full. By realizing our bountiful creativity, our national civilization will flower in the warmth of spring that pervades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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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hereby rise up! Conscience is on our side, and truth marches with us. Men and women, young and old, leave your darkened corners and partake in the joyful resurrection along with all creatures! The spirit of our ancestors protects us from inside for thousands of years; the tide of the new world protects us from outside. To begin is to succeed! Let us march straight into the light!
We hereby pledge the following:
1.Today’s undertaking reflects the demands of our people for justice, morality, survival, and prosperity. Therefore, we will act solely in the spirit of liberty, never in the spirit of enmity.
2.To the last person and to the last moment, we will forthrightly express the righteous will of the Korean people.
3.We will respect order in all our actions and ensure that our demeanor and claims are always honorable and upright.
On the first day of the month of March of the year four thousand two hundred and fifty two in calendar year of Dangun (A.D. 1919).
공주시가 3월의 역사인물로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 사애리시 선교사(史愛理施·1871~1972, Alice H. Sharp)를 선정했다고 26일 밝혔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3년 31세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후부터 1940년 일제로부터 강제 출국을 당할 때까지 38년간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사와 교육자로 활동했다.
남편 로버트 아서 샤프 선교사(1872~1906, Robert Arther Sharp)는 서울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이사로 활동하고,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다 1904년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됐다. 사애리시 선교사와는 이듬해인 1905년 결혼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5년 가을 충청도 최초의 여학교인 '명선여학당'(현 영명학교)을 공주에 설립,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등 많은 여성을 교육으로 일깨우고 여성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헌신했다.
특히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아 1914년부터 2년간 영명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화학당에서 교육받도록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 김현경, 광복 후 자유당 정부에서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 최초의 여자경찰서장을 지낸 노마리아, 최초의 여성 목사 전밀라 등 많은 여성 인재가 영명여학교에서 사애리시의 가르침을 받아 한국의 여성사에서 주목받는 인재로 성장했다.
명선여학당은 중등교육을 목표로 하면서도, 교육과 거리가 먼 여성들을 연령이나 능력에 관계 없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1906년 남편 샤프 선교사가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티푸스로 별세하자 충격을 받고 한국을 떠났지만, 남편이 묻힌 공주가 그리워 1908년 다시 공주로 돌아와 명선여학당 교장직을 다시 맡았다.
그리고 '영명여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교육 시설과 교원 보충 등 공주 지역에서 근대 교육의 틀을 구축했다. 공주와 충남 지역에는 20개가 넘는 교육기관을 세워 많은 여성 인재를 양성했다.
강제 출국 후에는 말년을 미국 파사데나의 은퇴선교사요양원에서 지내다 101세의 나이에 소천, 파사데나 납골묘원에 안치됐다.
영명학교 내에는 1938년 사애리시 선교사의 활동을 기념하는 '사애리시 선교 기념비'가 건립됐으며,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과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의 만남을 기념한 동상이 세워졌다.
정부에서도 사애리시 선교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 절차를 심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주시는 오는 3월 말 사애리시 선교사 관련 학술강좌 및 흔적을 찾는 답사를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가 1904년 설립한 공주 명설학교(영명학교).
근대 여성교육의 모태가 되었다.
열, 기침, 인후통, 코막힘, 콧물 등의 가벼운 호흡기 증상이 나타나면 먼저 외출을 자제하고, 일반 감기약을 먹으면서 4~5일 경과를 관찰하라는
조언이다.
우리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나 강아지는 가끔 배를 위로 하고 드러 눞는다. 배를 깔고 엎드리는 일상의 모습이 아니라 배를 위로 보이고 네 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누어있는 모습은 항상하는 짓은 아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행복하다는 눈길을 발견한다.
라저 티터(Roger Teeter)라는 분은 자기 이름을 본따서 TEETER라는 운동기구를 발명했다. 사람을 거꾸로 세워주는 운동기구이다. 인기가 높다.
동물원에 손님이 없자 담당 직원의 제안으로 사람을 가둬보았다. 그러자 손님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사파리(Safari Park)인 것이다.
강바람에 나뒹구는 쓰레기, 그 사이로 파전에 막걸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가지요금에 실랑이를 벌이는 취객들, 누군가는 뽕짝 노랫소리에 맞춰 고성방가를 질러댔다. 남이섬의 모습이다.
행락객으로 몸살을 앓는 것도 모자라 60억 원의 빚더미에까지 올라앉아 있었던 2000년, 남이섬의 침몰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3년 만에 이 쓰레기 섬이 180도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더 이상 행락객이 아닌 관광객이 2001년 20만 명에서 2004년 이후 140만 명으로 무려 450퍼센트가 늘었다. 당시 누구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그 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침몰하고 있던 남이섬에 연봉 '1천200만원'짜리 CEO 강우현이 부임했다.
그는 섬을 둘러보고 섬의 상처를 꿰매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었다. 그러고는 주주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대신 1년 후 방문객 수를 두 배 이상 올려놓을 거라 으름장을 놓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모두 코웃음을 쳤다. 사 측에서는 리모델링 비용을 댈 수 없었기에, 그가 세운 계획이 무엇인지 몰라도 안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이섬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에겐 돈도 없고 지지자도 없었지만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가 택한 아이디어는 거꾸로 하기였다. 침몰 대신 로꾸거 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직원들이 반대하는 일만 골라 하기로 했다. 직원들이 건의하는 걸 모두 뒤집었다. 건물을 새로 짓자고 하면 낡은 것 그대로 팔자고 했고, 마스터플랜을 잡자고 하면 그런 건 무시하자고 했고, 문화상품을 만들어 팔자고 하면 인위적인 건 안 만들고 자연만 판다고 했고, 수익사업을 구상하자고 하면 관광객들이 돈 안 쓰게 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그의 거꾸로 아이디어는 수십 년간 불법 매립된 건축 폐자재와 각종 쓰레기 3천500여 톤을 파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각종 상업 시설은 임대계약 만료와 함께 폐쇄했고, 대신 그 자리를 복합문화 전시관, 박물과, 체험공방, 문학인촌 등으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돈이 없으니 땅에서 파낸 빈병, 고철, 벽돌 등은 건축자재로 재활용했다. 그리고 땅에 농약 살포를 금지시켰다.
그랬더니 얼마 안 가 벌레가 생겼고, 벌레가 생기니 새들이 찾아왔고, 새의 분비물로 야생화가 도처에 피어났다. 동물원 우리를 철거해 동물들을 야생으로 내보냈고, 예전 동물원 부지는 연못으로 꾸몄다. 남이섬은 쓰레기 섬에서 점점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문화의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노래방 대신 숲속 음악회, 각종 문화체험 프로그램과 축제를 벌였다. 인위적인 문화상품 대신 추위에 약한 대만과 싱가포르 관광객에게 모닥불을, 나무를 쌓아 만든 고드름을 팔았다. 결국 그의 거꾸로 아이디어는 먹혔다. 그는 지금의 생태문화관광의 성공적 사례를 만들었다.
이는 남보다 일찍 관광문화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과감히 역발상을 실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를 앞선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섬을 뜨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거꾸로’ 덕분이었다.
미국의 한 가족이 운영하는 피자가게는 카피(광고 문구) 하나로 성공했다. 그 선전 문구는 바로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피자"였다. 온통 제일 맛있다고만 떠들어대는 피자가게들 중에서 이 [거꾸로] 문구는 튀었다. 그리고 먹혔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이 문구를 재미있어하며 피자를 먹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살이도 그렇다. 신앙생활도 그렇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것이
그 전부는 아니다.
신명기
32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
[오늘] 문제가 있을 때 [지난 날]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과거를 묵상하는 일이 중요하다.
솔로몬 왕은 기도 가운데서, 여호와의 백성이 역병(疫病)의 위협을 받을 때, 성전을 향하여 손바닥을 펴고 그분에게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하며, 호의적으로 들어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왕상 8:37-40)
시편 91편에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충실한 종을 영적인 해로부터 보호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고 노래했다.
앞이 아니라 뒤를, 땅이 아니라 하늘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돌아 보는 삶이 생산적이며 또한 발전적인 삶이 된다.(장재언)
페달 거꾸로 밟으면 안 쓰던 근육 발달…
걷기, 달리기, 자전거 타기 등 건강을 위한 일반적인 운동에 쉽고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음식을 통한 식단 조절 역시 시작은 쉽지만 잘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거꾸로' 하는 건강 관리법을 활용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하는 운동에 비해 뒤로 하는 운동은 그동안 사용하지 않은 근육들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고, 식사 순서를 바꾼 '거꾸로 식사법'도 효과적인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거꾸로 운동’에 대해 알아본다.
◆자전거 페달, 거꾸로 밟으면 근육통 완화 효과
자전거 타기는 심폐기능, 복근, 다리 근육 강화에 효과적인 운동이다. 더욱이 하체에 체중이 실리지 않아 관절에 무리가 없으므로 관절염, 골다공증 등으로 인해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좋은 운동이다.
헬스장 등에서 사이클 운동기구를 이용할 때 페달을 반대로도 밟아주면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발달시켜 더욱 효과적이다.
다음으로 팔을 짚고 거꾸로 서는 물구나무서기는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물구나무를 서면 평소 심장보다 아래에 있는 장기 및 신체조직으로 피가 몰려 생긴 혈액순환에 장애에 도움이 되고 머리에도 충분한 피가 공급되면서 머리가 맑아지고 집중력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다.
더불어 중력으로 인해 처진 장기 등의 회복 등 장기와 신체조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거꾸로 매달리는 운동을 자주 하는 것도 건강에 좋다. 줄, 기구 등을 이용해 거꾸로 매달리는 운동법은 중력에 의해 좁아진 척추 사이를 넓혀 주는 스트레칭 효과가 있어 디스크나 요통 환자들에게 좋다. 또한 허리 추간판 사이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주어 허리디스크를 예방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헬스장에 발목을 고정해 거꾸로 매달리는 장치가 있으므로 활용할 수 있다.
줄넘기를 반대 방향으로 하는 것은 팔 관절에 도움이 된다. 열량 소모가 큰 전신운동인 줄넘기를 꾸준히 해주면 심폐기능, 지구력, 평형감각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줄넘기를 할 때 같은 방향으로만 손목을 계속 돌리게 되는데, 이 같은 반복적인 동작은 손목 관절에 무리가 갈 수 있다. 따라서 줄넘기도 앞뒤로 골고루 해주면 관절에 무리를 덜고 더불어 팔 근육을 균형 있게 발달시킬 수 있다.
◆거꾸로 먹으면 식사량 줄일 수 있어
거꾸로 하는 운동이 있다면 음식을 거꾸로 먹는 방법도 있다. 거꾸로 식사법은 밥-반찬-후식을 먹는 일반적인 식사 순서와 반대로 후식-반찬-밥 순으로 식사하는 것이다.
거꾸로 식사법의 핵심은 채소, 고기 등의 반찬을 먼저 먹고 탄수화물인 밥을 가장 나중에 먹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식이섬유와 단백질을 먼저 섭취하고 그다음 지방이나 탄수화물이 많이 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탄수화물보다 비(非)탄수화물을 더 섭취하게 돼 체중 조절이 쉬워진다. 또한 식사 전에 입가심으로 자주 먹는 과일을 가장 먼저 에피타이저로 먹으면, 이는 입맛을 깨우고 포만감을 주어 식사의 양을 줄이는 데 도움된다.
거꾸로 식사법은 연구를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다. 미국 코넬대 소비자 행동학 연구팀이 124명을 대상으로 과일을 먼저 먹는 그룹과 계란·베이컨 등을 먼저 먹는 그룹으로 나눠서 먹게 한 결과, 과일을 먼저 먹은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음식을 적게 섭취하고 지방·탄수화물이 많은 음식에 대한 유혹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 마지막 부분에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부분이 있다. 그 중에 "나라"의 의미가 심상치 않다.
어떤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하다는 것일까? 라티어로 된 기도문을 보면 알게 된다. 라틴어는 "차르"가 다스리는 나라를 뜻하고 있다.
"차르"라는 말은 무소불능의 권력자가 다스리는 나라의 임금, 그 나라는 전지 전능하신 분의 손 안에 있는 나라이다.
역사를 보아도 왕, 임금에 해당하는 권세자들이 절대 권력을 휘두를 때 그 가공할 나라의 통치자를 "차르"라고 불렀다. 그러던 "차르"가 세상에서는 소위 러시아의 황제로 불렸던 "차르"를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차르'가 살아있다. 미국에 있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이다. 미국에 만약 국민을 위협하는 질병이나 전염병이 돌면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는 "차르'에 버금가는 전권(全權)을 행사한다. 그 전문 기관의 결정에 절대 따라야 한다.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마스크를 쓰라면 써야 하고, 병원에 입원해야한다고 하면 따라야 한다.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행사한다고 보아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 앞에서는 정치적인 쇼가 통하지 않는다.
이번 우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대처하는 가운데 미국의 대통령의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질병에 관한 기자회견을 할 때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전문가를 필두로 한 '코로나바이러스 태스크포스(TF)'와 함께 기자들 앞에 섰다. 정치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전권을 맡겨 처리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당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정치적인 쇼를 하고 있다. 이렇게 소통하고 있다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이려는 정치 굿을 하는 것이다. 전문가가 필요할 때에 정치적 비전문가의 목소리가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 최고 방역 전문가들이 모인 질병관리본부와 대한감염학회, 대한의사협회 등이 중국에 대한 전면적 입국 금지나 제한 확대를 이미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은 우리 집 불났는데 남의 집 불길을 챙긴다. 출입국 책임자인 법무부 장관은 미국의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정치적'이라 깎아내린다. 국민 건강 챙기는 보건복지부 장관은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 한다. 이 와중에 외교부 장관은 한국인 입국을 막는 나라들에 항의한다고 한다. 자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기겠다는 나라에 무슨 염치로 항의하나.
정치·외교도 물론 중요하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 안전보다 앞선 정치라는 게 있을 수 있는가?
대통령이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에게 홍삼액이나 주면서 "허탈하겠다. 힘내라"는 격려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정치 논리에 신경 안쓰고 소신있게 뛰게 하면 된다. 순수하게 국민 건강만을 최우선에 두고 전권을 쥔 '방역 대통령' 역할을 하게 하면 된다.
제발 무식한 짓 그만하고 정치꾼들, 비전문가들은 비켜라.
제대로 이끌지 못하겠거든 비켜라도 주는 게 국민을 위한 길이 아니겠는가. (장재언)
미래가 과거의 인질이 되게 하지 말라.
Do not let the future be held hostage by the past. - 닐 A. 맥스웰 -
세뇌 교육이 중국 전역에서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교사들은 교육이 효과적으로 실행되지 않으면
책임을 져야 하고
학생들은 신앙인 친지를
신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탕저(唐哲) 기자
세뇌 교육의 첨병이 된 교사들
지난해 6월, 중국 남동부 장시(江西)성 신위(新喻) 지(地)급시에서 40명이 넘는 교사들이 교내에서 종교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책임지고 단속하겠다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했다. 교장은 교사들에게 각자의 가족들 역시 종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게 만들겠다고 맹세하게 했으며 신앙인 친지를 신고하지 않았다가 적발된 사람은 해고하겠다는 으름장도 놓았다.
사상 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교장은 교사들에게 ‘학습강국(學習強國)‘ 앱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공산당을 믿는 사람은 남아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중국 북동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어느 교장은 반(反) 종교 교육 확산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강력한 이념 통제는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에게 필수입니다. 경제가 침체되는 한이 있어도 중공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신조가 국가 내부로 퍼지는 꼴은 볼 수 없다는 것이죠. 당에게 있어 권력 유지만큼 중요한 일은 없거든요.”
이 교장은 지난해 10월, 교육국에서 발행한 ‘2019 이념 과업 책임 성명’에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구체적으로 그는 담당 학교에서 종교를 근절함으로써 학급에서 종교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거나 학내에서 종교적 전통이 맥을 잇는 일이 없을 것이며 신앙인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통제되도록 하겠다고 맹세했다.
이 학교에는 이미 종교 포기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신앙인 교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현지 교육 당국은 학교 행정 당국에게 매월 정기적으로 그녀를 면담하고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에게는 그녀에 관한 설문지를 정기적으로 작성하도록 했다.
2019 이념 과업 책임 성명서
‘올바른 세계관’ 가르치기
2019년 12월 5일, 장시성 푸저우(撫州)시의 어느 초등학교 교사는 담당 학급 학생들에게 종교를 멀리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라면서 ‘못 하겠으면 다시는 학교에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학생 전원이 서약서에 서명하자 그 교사는 칠판에 ‘종교반대(反對宗教)’라는 네 글자를 쓴 다음 학생들에게 큰 소리로 반복해 읽게 하고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학부모들은 학교로부터 미성년자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결정적인 발달 단계 상태에 있는 까닭에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데 이때가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므로’ 종교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서한을 받았다.
어느 학부모는 비터 윈터에 “특히 학생들이 결정적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붉은 선전으로 세뇌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미성년자가 종교를 가지면 안 되는 이유를 학부모들에게 설명하는 서한
정부에서 발행한 각종 문서를 보면 학교에 ‘미성년 시기를 바짝 잡아야’ 하고 라디오 방송이나 교실 벽보 혹은 게시판을 비롯한 매체를 학급회와 같은 선전 진지에 적극 활용해 ‘반(反) 종교 정서를 퍼뜨려 어린 학생들의 마음과 정신에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사고 방식을 심어서’ 그에 걸맞은 행위로 표출되도록 하라고 명령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반(反) 종교 선전은 학생들의 가족과 사회에 확대되어 ‘상호 작용과 상호 영향’을 통해 전 사회가 젊은이들을 세뇌하도록 참여하게 한다.
10월에는 경찰 두 명이 아동 대상 보안교육을 구실로 장시성 핑샹(萍鄉) 지(地)급시의 초등학교들을 방문했다. 그러나 교육 중에 그들은 어린이들에게 가족 중에 신앙인이 있는지를 물었다. 경찰들은 아이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는 상으로 필통이나 펜, 노트와 용돈 등을 줄 테니 신앙인을 보면 신고하라고 말했다.
가족을 망치는 ‘교육’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反) 종교를 주제로 한 학급회가 장시성 전역의 학교에서 현재 열리고 있다.
가령 지난해 11월, 지안(吉安)시 완안(萬安)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각종 그림과 영상을 보여주며 종교, 특히 그중에서도 사교로 지정된 종교 단체들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당을 충실히 따르고 신을 믿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당이 주는 쓴맛을 볼 것이다.”고 말했다.
이춘(伊春) 지(地)급시의 어느 고교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가족 전체의 장래가 암담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후손들마저도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어느 학생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신자인 자기 어머니에게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아들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제가 체포되는 날에는 가족 전체가 끝장이라면서 그때가 되면 아들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고도 했어요.”
그녀가 아들에게 왜 신앙을 포기할 수 없는지 차분하게 설명하려고 했어도 아들은 그녀가 밤에 잠들었을 때 칼로 찔러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면서 어머니는 비터 윈터에 이상해진 아들의 모습을 그대로 전했다.
우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확진자 수가 8만 명을 넘었고, 피해국도 발원지인 중국을 포함해
50개국을 넘어섰다.
29일(현지시각)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 28일
기준으로 전 세계적으로 우한 코로나 확진자는 8만3652명으로
집계됐다.
국가별로는
....
중국이
사망자 2791명을
포함해 7만8961명으로
압도적이다. 중국 내에서는 후베이(湖北)성이 6만5914명(사망
2682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광둥(廣東)성 1348명(사망
7명), 허난(河南)성 1272명(사망 20명), 저장(浙江)성
1205명(사망 1명) 순이다.
중국 외 지역에서는 51개국에서 사망자 67명을 포함해 확진자가
4691명으로 집계됐다.
한국이
2337명(사망 13명)으로 확진자 수가 가장
많았고, 29일 기준으로 한국의 우한 코로나 확진자
수는 3150명으로 전날에 비해 831명 증가했다.
그 다음이
이탈리아로 650명(사망 17명)으로 집계됐다.
중동 지역에서 우한 코로나의 새로운 거점이 된
이란은 확진자 수는
245명이었다. 이란의 사망자 수는 26명으로 중국 외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사망자가 보고됐다.
WHO는 28일 우한 코로나의 세계적 위험도를 가장 높은 수준인
'매우 높음'으로 상향 조정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지난 며칠
동안 코로나19 확진자와 피해국의 수가 지속해서 증가한 것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He sneaked a glance at her watch.그는 슬쩍 시계를 봤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 항을 찾아서
미국의 건국의 조상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청교도(puritan) 즉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일 것이다.
이들은 1620년에 메이플라워 호(May 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뉴잉글랜드로 온 영국의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ists)이라고 부르는 청교도의 한 급진적 분파이다. 이들이 미국에 도착한 지 올해가 400년이 되는 해이다.
영국청교도 미국 도착 400주년 기념 emblem
이들의 정신과 신앙에 터하여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형성되었으니 참 자랑스럽다. 미국에 청교도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식민지 개척을 위해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위해 건너온 사람들이고 소위 미국의 정신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은 이들 청교도이다.
청교도 미국 이주 400년을 축하하면서 이들이 도착한 Plymouth 항과 그들의 초기의 정착촌 즉 오늘날로 치면 민속촌과 같은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imoth Plantation)을 소개하고 이들의 신앙과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을 소개하고자한다.
청교도가 첫 발을 디딘 곳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은 만의 자연 방파제가 된 반달형의 반도 북쪽 끝 부분에 있다. 여기서 청교도들은 다시 내륙 쪽의 플리머스 항으로 이동해 왔다고 한다.
Plymouth Rock “1620” 영국에서 이주해온 청교도가 도착한 해
이들이 첫 발을 디딘 바위에 그들이 도착한 년도를 음각(陰刻)해 두었다.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이며 이 바위에 그들이 도착한 “1620”을 음각한 것이다. 타원형의 이 바위는 본래의 위치에 배치되어 있어서 현재의 지표면 보다는 좀 낮은 곳에 놓여있고 이 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고대 희랍식인 주랑으로 된 비각(碑閣)이 그 위에 지어져있다.
Plymouth Rock “1620” 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碑閣)
청교도는 누구인가?
이 황량하고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낯선 땅에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영국에서 청교도(puritan) 운동은 17세기에 활발히 일어났다. 당시 정치 상황 때문에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 1509-1547)는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를 세우지만 그 개혁은 반쪽의 개혁일 수밖에 없었다. 교리나 교회조직을 거의 구교의 것을 답습했으니 큰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 1603년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제임스1세(James I; 1603-1625)가 등극하면서 국교회의 정화를 요구하는 청교도를 탄압하게 되었고 1607년 가을, 청교도 탄압이 심해져서 청교도가 투옥되고 일부는 처형당했다. 교회와 왕권을 통합해 강력한 왕정(王政)을 세우고자 한 제임스 1세는 교회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청교도들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청교도들이 갖게 되었고 분리주의자들의 예를 따라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한편 청교도 사이에서도 온건파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처음의 문제는 예배 의식과 교회 조직과 같은 문제였다. 분리주의 청교도는 주교의 권위나 위계적 교회 조직에 반대하고 초대교회와 같이 평등하고 수평적 교회를 요구했다. 청교도들은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자들로 왕과 교회의 권위를 배격하고 쾌락을 죄악시하는 사람들로 경건하고 더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었다.
십자가의 희생과 구원역사:
복음의 진리를 알고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믿음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하고, 매일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며,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의해서만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데 생각을 같이한다.
성도는 오직 복음서에 의해서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생각도 공유했다. 그러나 온건파는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진적 분리주의자들은 오로지 성경에 의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삶 전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어 반지성주의적 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온건파 청교도들에게도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런 청교도들의 신앙운동은 이미 유럽에서 12세기부터 일기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의 결실이라 해야겠다. 대륙에서 변질된 기독교를 바로 잡고자하여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고 지키기 위해 일어난 선각자들은 ....
1. 피에르 왈도(Pierre Waldo, 1140~1217),
2.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3.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
4. 말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5. 기욤 파넬(Guillaume Farel, 1489∼1565),
6.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7.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8. 존 녹스(John Knox, 1513?~1572),
9. 장 테오도르 드 베자(Jean Theodore de Beza, 1519~1605) 등 선구자가 있었다.
이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는데 5,000만 명이 순교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난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미국식민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건너가게 된다. 이들을 스쿠르비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라고 하는데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런던 북부의 스쿠르비(Scrooby)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스쿠루비 분리주의자(Scrooby separatists)로 불리게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로 미국을 향하는 순례자의 조상들
급진적 성향의 청교도들은 왕의 핍박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온건파 청교도들에게도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1608년 암스테르담(Amsterdam)으로 이주 했다가 다시 1609년 네덜란드의 레이던(Leiden, Netherlands)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곳에서도 문제가 생기고 안전하지 못하여 신대륙으로 이주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 신대륙 미국을 향해 떠나게 된다.
지금 메이플라워호 II는 2020년 400주년 기념을 위해 수리 차 코네티컷(Connecticut)에 배가 가 있다.
60여 년 간 매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기 때문에 배에 손상이 많았고 400주년 기념행사에 맞추어 수리하고 있다.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서 모형만 볼 수 있었다.
Plymouth 항에 정박해 있는 Mayflower II
메이플라워호는 180톤급의 배로 전장 106.5피트(32.46m), 폭 25.5피트(7.77m), 흘수선(吃水線, water line)이 13피트(3.96m)에 3개의 돛대를 갖춘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작은 범선이다.
이 작은 배에 102명이 승선했으니 무척 열악한 상황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지금 플리머스 항(港)에 전시되고 있는 메이플라워호 II(Mayflower II)는 베이커(Willam A. Baker)가 본래의 배를 철저히 고증하여 설계에 한 것을 론버그(Erik A. R. Ronnberg, Jr.)가 1955-1957년에 영국 블릭스함(Brixham)의 업함(Upham)조선소 에서 건조한 것이다. 이 배는 1957년 친선호로서 53일간 항해하여 대서양을 횡단했다.
영국에서 이들 순례자의 조상들은 우여곡절 끝에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북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진 허드슨 강 어구에 식민(植民)을 허락하는 특허장을 받아 1620년 9월16일 영국 남서단의 항구 플리머스(Plymouth)에서 메이플라워호로 출항했다.
이 배에 탄 사람은 모두 102명이었는데 레이던에서 온 순례자, 즉 ‘성도(Saints)’가 41명이었고 런던에서 모집한 ‘이방인(Strangers)’이 61명이었다.
메이플라워호로 대서양을 건넌 첫 이주자 중 숫자상으로 보면 순례자가 소수였으며 특히 영국의 스쿠루비(Scrooby) 분리주의자 중에는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8-1644, 부인 Mary Brewster) 부부와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 3명뿐이었다.
이들 청교도는 65일간의 고난의 항해를 하고 도착한 곳은 본래 목적지로 했던 허드슨 강(River Hudson)보다 훨씬 북쪽인 오늘날 매사추세츠 주(Massachusetts) 보스턴보다 남쪽으로 60km 정도 떨어져있는 플리머스 연안 케이프 코드만(Cape Cod Bay)의 프로빈스 타운(Provincetown)에 1620년 11월 21일에 도착해서 여기서 다시 육지 쪽으로 더 이동하여 12월 21일에 플리머스(Plymouth)항에 도착하게 된다.
플랜테이션 공방에서 만든 플리머스 원주민의 머리장식 headdress
메이플라워호로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항에 도착한 이들을 이끌어간 걸출한 인물은 스크루비 출신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90∼1657)이다. 도착 후에도 브래드퍼드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청교도 사회가 유지되었다. 중요한 것은 정신 즉 믿음이 그들의 삶을 지배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정체성이 그들을 악조건에도 이기게 하였다.
브래드퍼드는 배에서 내리기 전에 메이플라워호 계약(Mayflower Compact; 1620년 11월 11일 서명)을 체결했는데 이것이 뒤에 미국 헌정의 기초가 되었다. 이 계약은 청교도 정신이 토대가 되었고 일종의 사회계약정신이 포괄되었다. 그래서 플리머스 식민지 통치의 기본이 되었다.
브레드퍼드는 이 계약이 구속력을 갖도록 전원이 계약하도록 하였다. 14세 이하의 아이들과 여자를 제외한 전원이다. 여기에 여자를 제외하였다는 약점이 있으나 노예까지도 서명하여 평등한 참여를 구현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 계약의 주된 목적은 배에서 내려 개인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고 청교도 공동체를 이어 나갈 구속력을 갖는데 있었다.
메이플라워 계약내용에는 청교도들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건국의 정신이다. 그래서 이들을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 부르게 되었고 오늘의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메이플라워호 계약문을 다음에 소개하도록 한다.
메이플라워호 계약
(Mayflower Compact)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대영제국, 불란서, 아일렌드 왕인 우리의 왕 제임스와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을 위하여, 우리나라와 왕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창설하고자 항해 할 것에 서명한다.
여기 본 문서로 엄숙하게 하나님과 각 개인 앞에서 상호 계약함으로 시민 정치 단체를 만들어 이것으로 공동의 질서와 안전을 촉진하고, 그 위에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령의 제정과 제도 조직을 구성한다. 평등성에 터한 법률, 법령, 조례, 헌법과 행정부를 필요할 때 구성한다.
이 모두는 식민지의 일반적 안전을 위한 간편하고 적합한 생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당연히 복종하고 순종 할 것을 계약한다.
증인으로, 경애하는 영국, 불란서, 아일랜드 제임스 왕 치세 18년, 스코트랜드 치세 54년, 주후 1620년 케이프 코드에서 11월 11일 우리의 이름으로 서명한다.
미국 케이프 코드 만에 도착한
순례자의 조상들
이들이 도착한 때는 겨울이고 땅도 얼고 바람은 강풍이고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주변의 원주민들(native)은 모두가 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청교도 순례자들이 항해하는 중 사망한 자는 1명이었으나, 악조건에서 오랜 시간 항해한데서 오는 신체의 허약함과 플리머스 상륙 후에 상황이 좋지 않아서 사망자가 많이 늘어났다.
브래드퍼드의 기록에 의하면 12월에 6명, 1621년 1월에 8명, 2월에 17명, 3월에 13명이 죽었고 1621년 4월에는 도착해서 플리머스 지사(governor)로 선출되었던 카버(John Carver) 마저 사망했다. 그 지사 자리에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를 선출했고 브래드퍼드는 30여 년간(1621-1657)이나 플리머스 지사로 일 하면서 식민지의 안정을 기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도착하기 전에 원주민이 천연두로 많이 죽어서 상당히 그 수가 줄어있었고 청교도들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해 주셨다.
이들 청교도들 즉 미국의 “순례자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이기도록 도울 사람을 보내주셨다. 이들 순례자 앞에 나타난 사람은 영국인 어부들로부터 영어를 배운 사람 사모셋(Samoset)이었다. 사모셋이 스콴토(Squanto)라는 원주민을 소개하게 되는데 이는 순례자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스콴토는 이 지방 출신으로 영국인의 포로가 되어 영국으로 잡혀가서 2년을 지내다 와서 사모셋 보다 영어가 능숙했다. 플리머스 청교도들이 이 지역사정을 알고 대처하게 도운 사람이다.
플리머스에 있는 순례자들의 박물관(Pilgrim Hall Museum)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해서 스콴토 덕분으로 그 지역의 부족 왐파노억(Wampanoag) 부족과 1621년 3월 22일에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이 계약은 메이플라워호에서 대표자로 선출되어 항해해왔고 도착해서도 플리머스 지사(Governor)로 선출된 카버(John Carver, 1584–1621)가 대표로 서명했다. 이 덕분에 순례자들은 도착한지 4개월 만에 그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첫 겨울에는 사망자가 많이 나왔지만 1621년에는 가을 수확을 할 수 있었고 추수 감사제를 지낼 수 있었다.
왐파노억 부족과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
“서로 상해를 입히지 말 것,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상대에게 보내 처벌 하도록 할 것, 서로 물건을 훔치지 말 것, 훔친 물건에 대해서는 변상할 것, 상대방이 전쟁을 겪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서로 도울 것” 등이다.
이로서 두 부족은 서로 협력하게 되었고 순례자들은 농사와 고기 잡는 법을 배워서 생존에 도움을 받게 되었다.
미국 추수 감사절의 유래
순례자들은 스콴토를 비롯한 원주민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과 낚시 같은 실제적인 생활 기술을 배워서 이듬해 1621년 가을 제법 풍성한 가을걷이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를 올려 드리게 되었고 실질적인 도움을 준 원주민인 왐파노억(Wampanoag) 부족을 초대했다. 추장 마사소이트(Masssoit)는 90여명의 부족과 같이 참석하고 순례자들은 힘닿는 대로 융숭한 대접을 하여 선린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미국에 이주해 온 다른 지역의 이주자들이 대부분 원주민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는데 이들 플리머스 순례의 조상들만은 선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여기에는 좋은 조력자(사모셋, 스콴토 등)를 만나서 이기도하고 특히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의 탁월한 지도력과 사교적 역량 덕분이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을 공식 축일로 정한 것은 1817년 뉴욕 주가 처음이고, 이어 남북전쟁 중인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의 넷째 목요일을 공식적인 추수감사절로 지정하여 시행한 것으로부터 전국적 감사제로 자리 잡았고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미국 청교도들의 정착촌
(Plimoth Plantation)
플리머스 정착촌은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순례자들이 집을 짓고 산 곳이며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도운 왐파노억(Wampanoag) 부족의 추장 마사소이트(Masssoit)가 파견하여서 순례자들을 돕고 통역도 담당했던 호버목(Hobbamock)의 집과 조리장소를 여기에 같이 만들어서 그 선린관계와 도와주었던 일들을 같이 기억하게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도시 이름은 플리머스(Plymouth)인데 정착촌은 왜 Plimoth Plantation인가이다. 400년 전에는 철자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없었고 플리머스 지사인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가 P L I M O T H로 자주 썼던 모양이다. 이런 이유로 정착촌은 Plimoth로 표기하게 되었고 의미상 차이는 없다.
프리머스 플랜테이션(정착촌) 입구
프리머스 플랜테이션(정착촌) information center
밖으로 나가서 처음 만난 곳은 호버목(Hobbamock)의 집터이다. 호버목의 집터에는 짚풀과 나무껍질로 엮은 반타원형의 움막 한 동이 있고, 그 옆에 가건물과 같은 곳에 원주민이 불을 피워 음식을 장만하던 곳이 있었다. 순례자들의 집 보다는 규모도 크고 집을 짓는 양식이 다르다. 순례자의 집은 뱃집 모양인데 비해 원주민의 집은 반타원형이었다.
호버목(Hobbamock)의 집 외양(外樣)
다음 사진은 호버목(Hobbamock) 집의 내부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 앉아서 호버목 역을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호버목(Hobbamock)의 집안 모습
호버목(Hobbamock)의 집에서 순례자들과 회담도하고 농업이나 고기 잡는 방법 같은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을 것이다. 집 내부에는 불을 피워 난방도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정착촌 앞은 바다이고 정착촌 남문으로 나가면 엘 강(River Eel)이 흐르니 어족이 풍부했을 것이다. 호보목의 집은 순례자들이 필요로 하는 농어업 기술 습득과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내부의 분위기는 안온하고 따뜻했다.
호보목의 조리장은 집 밖에 별도로 만든 일종의 가건물 비슷한 아주 허름한 곳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나무 막대를 걸치고 그 밑에 불을 때서 음식을 만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야영에서 조리하는 방식과 같았다. 그러나 왐파노억(Wampanoag) 부족은 이곳에 10,00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들이니 이것이 전통적 방법이었을 것이다.
호버목(Hobbamock)의 집 조리장소
호보목의 집을 나오면 그 북편에 있는 정착촌 공예센터(craft center)가 있다 여기는 당시 원주민들과 순례자들이 사용하던 물건들 의류, 직조, 머리장식(headdress) 등등을 만드는 곳이다. 옛것을 재현 한다고 해야 할까!
정착촌 공예센터(craft center)의 한 방
공예센터를 지나면 순례자들의 거주 지역. 캠퍼스는 대체로 마름모형이고 그 중간에 동서로, 또 남북으로 길이 열려서 십자형의 길이 전개되고 길 주변에 순례자의 집들이 세워져 있다. 동서가 더 길고 남북은 좁은 편이다. 캠퍼스에 북문과 남문이 있고 서쪽이 높고 동쪽 바다 쪽으로 점점 낮아 져서 대서양이 아름답게 시야에 들어온다.
Plimoth Plantation 순례자들의 거주 지역
서쪽, 요새 옆의 서문으로 들어가면 17세기 복장을 한 영국 노인이 정착촌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다. 사진도 촬영하고 설명도 듣고 난 다음에 요새(fort) 아래층을 볼 수 있다.
Plimoth Plantation 안내자 : 17세기 복장을 한 노인
서쪽 제일 높은 곳에 요새(要塞)가 있어서 마을 전체를 방어하였고 때로는 여기는 회의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아래층은 주로 회의나 모임에 사용하고 2층은 대포진지로 사용한 것 같다.
Plimoth Plantation Fort and Meeting Room
요새 2층에는 대포들이 4방으로 포진해 있었다. 적의 침입을 받으면 포를 발사했던 것 같다. 여러 문의 포가 있었다. 그러나 건물은 목조였고 상대방이 화포를 가졌다면 오래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Plimoth Plantation Fort 요새내부의 대포들
당시 왐파노억(Wampanoag) 부족 외에 다른 부족들이 침입해온 일이 있었고 주민은 모두 싸워야했다. 민병대라 할까! 그래서 항상 훈련이 되어있고 일이 생기면 전투에 참가해야했다.
순례자들의 집
순례자들의 집은 초라하다. 4, 5평되는 좁은 공간에 7, 8명의 식구가 기거했으니 얼마나 열악했는가! 침대는 하나뿐인데 갓난아이와 아이 엄마만 침대에서 잠을 자고 나머지 식구들은 바닥에 매트리스(mattress) 같은 것을 펴고 잠을 자고 아침에는 일어나서 접어서 별도로 보관하는 형편이었으니 그들이 겪은 고난은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했다. 도착한 겨울에 많은 희생자가 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순례자들의 집 내부
이 좁은 공간에서 음식 조리도해야 했다. 한간짜리 집 한 구석에 불을 때고 거기서 조리를 했다. 그리고 집 뒤나 옆 부분은 텃밭으로 먹거리를 심고 가축도 길렀다.
에필로그
17세기 순례자들의 조상, 이들 청교도는 왜 이런 고생을 하였는가? 대서양을 건너는 목숨을 건 항해와 플리머스 정착촌에서 악 조건과 싸워야하는 고난의 길을 무슨 힘으로 이겨냈을까? 그들에게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신념도 있었다. 자신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난을 겪을수록 자신들의 삶은 더 빛난다는 확신이 있었다. 권위주의적이고 교권주의에 젖어있는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야만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그 누구도 추종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을 고난 중에도 이기게 하는 힘이었다. 이 위에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다.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떠난 사람 중 청교도는 41명 뿐 이었다. 그들이 항해하는 동안 102명이 하나의 청교도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윌리엄 브래드퍼드의 지도력이다.
그래서 미국 플리머스 캐이프코드 만 프로빈스타운 항에서 하선하기 전에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복음의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믿음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며 원리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우리의 삶의 근간이라면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선민이고 선민은 완전한 갱신(벧후5:17)과 완전한 순종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정신이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일 것이다.
미국이 점차 청교도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미국이 청교도정신을 회복하도록 기도하여야 할 일은 한국교회의 몫이기도 하다.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절망할 자격도 없다.
He who has never hoped can never despair. - 조지 버나드 쇼 -
원중권 선교사는 PCK 파송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24년 사역 중, 아르헨티나 소망교회에서 22년을 이민 목회하며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에게 오랜 선교 경험으로 보고 느낀 남미 기독교의 현주소와 이민자 선교에 대한 그의 비전을 물어봤다. (만난사람박진석 목사)
어떻게 먼 남미 아르헨티나에 선교사로 가게 됐나?
과거 나는 신학대학 때 군종장교 시험에 합격해 15년간 군목으로 사역했다.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에서 푸른 제복을 입고 활동했던 청년 복음화 사역은 매우 보람 있었다.
전역을 앞두고 사역 진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총회 군 선교부를 방문했을 때, 세계 선교부 총무 임순삼 목사를 우연히 만났다. 그때 그분이 초면에 대뜸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선교사를 요청한다는 편지를 내게 줬다. 당시엔 선교사 될 마음이 없었기에 거절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그 편지가 마음에 자꾸 걸렸다. 혹시 이것이 환상 가운데 사도 바울을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해 유럽 선교의 문을 연 것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무엇보다 아내의 동의, 자녀 교육 문제, 선교 후원, 인선, 훈련, 파송, 그리고 언어, 문화 적응 등 많은 문제들이 보였다.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단 준비하겠지만, 과정에 하나라도 막힘이 있다면 이것은 주의 뜻이 아닌 줄 알고 내려놓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놀랍게도 모든 과정이 하나도 막히지 않아서 1996년 9월 아르헨티나에 선교사로 가게 됐다.
지금 내가 목회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소망교회는 38년 역사의 이민교회로 장년 성도가 300명, 아동, 학생, 청년이 150명 정도 된다.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목회하며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과 아르헨티나의 남미개혁신학교에서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현지인 선교 사역으로인 STEPS(Seminario Teologico Pastores Somang)를 하고 있다.
선교 사역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선교지에 가니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후원교회와 기도해주는 분도 많았지만, 선교사들은 타지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지인들과 많이 교류하긴 하지만, 그들과 언어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늘 단절되고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외로움 때문에 더 기도하고 엎드리게 됐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취미 생활을 갖는 것이 외로움을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동료 선교사들, 목회자들과 시간 나는 대로 함께 운동하고 있으며, 미주 목회자 성경 연구원의 목회자들과 모여 함께 성경 공부하며 선교지의 외로움을 이겨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선교환경과 현황은 어떠한가?
아르헨티나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30시간 걸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먼 나라지만, 농업 이민으로 시작한 한인 이민역사는 55년이며, 현재 2만 5천여 명의 교민들이 살고 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30개 한인교회가 있고, 40여 가정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PCK(예장 통합) 선교사는 여섯 가정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가톨릭 전통의 나라로 개신교가 들어와 뿌리내리기 매우 어려웠다. 1980년대 경제가 어려워지고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고 절대화됐던 가톨릭의 영향력도 급격히 약해졌다.
개신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아르헨티나 경제환경에서 하층민에게 들어가 선교를 시작했다. 특히 60년대부터 남미에 들어오기 시작한 오순절 교회는 새로운 분위기로 개신교의 차별화를 일으켰다. 남미의 정열적인 기질과 개신교의 열정적 신앙이 만나니 놀라운 은사 운동이 일어났다.
선교사들과 현지 교회, 성도들의 노력으로 브라질, 칠레, 페루, 볼리비아, 과테말라, 파라과이 등 중남미에 기독교 인구가 많아졌다. 11년 전 아르헨티나의 개신교 인구는 7-8%에 불과했는데 최근 발표에 따르면 15.3%가 되었다. 거의 두 배가 된 것이다. 여기엔 분명 한국 이민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의 역할도 있었다고 본다. 발표를 접하고 여기에 나도 한몫을 담당했다는 마음에 이곳에 와서 사역하는 보람을 갖게 됐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셨듯 이민목회 선교사들도 이민자가 돼야 한다. 선교사에겐 선교사라는 정체성도 있어야 하지만, 더 깊은 곳에 있어야 할 것은 이민 목회자라는 정체성이다.
현지에서 집중하고 있는 사역이 있다면?
먼저 한인 이민자 사역이 주 사역이다. 이민자들은 많은 삶이 애환을 갖고 있다. 이민자 사역은 한인 이민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며, 이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갖고 이민 생활의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선교적 소원을 갖게 해서 현지인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는 것이 사역의 중점이다.
다음은 현지인 사역이다. 아르헨티나에는 노벨상을 받은 우수한 인재들도 있지만, 한국에 비하면 교육열이 낮고 교육 격차와 빈부차가 극심하다. 부패한 정치 상황에서 하층민들은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이용만 당한다. 개신교 교회는 그 하층민들에게 파고들어 갔다. 아르헨티나 개신교 인구가 15.3%라고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이제는 중산층으로 상승해야 하는데,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교회개척도 하고 현지인 목사 후원 사역 등을 하면서 현지에서 가장 필요한 사역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다 목회자 신학교육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에선 목사가 되기 위해 대학교, 대학원 등의 과정을 밟아야 하지만 그곳에선 정식 과정 없이도 목사가 될 수 있다.
더군다나 아르헨티나 현지인 목회자들의 7, 80%가 이중직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위해 건축일, 택시 운전과 일용직 노동을 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 수준이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대중 집회가 발달한 남미 개신교 환경에서 온갖 집회를 여는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구원파가 들어와 개신교의 이름으로 활동하지만, 현지인들은 분별력 없이 한국 개신교에서 와서 집회를 여는 것으로 알고 참여하는 현상을 보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 ‘STEPS(Seminario Teologico Pastores Somang)’라는 현지인 목회자 신학 훈련을 위한 훈련원을 만들어 현지인 목회자들을 모아서 신학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 훈련에서 현지인 목회자들은 1년에 세 차례씩 4년 과정으로, 12과목을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한다.
과정에선 현지에 맞는 교육과 소통을 위해 아르헨티나 현지 교수들이 강의한다. 교육을 마치고 나면 목회자들이 놀랍게 변화한다. 지난 16년 동안 이렇게 해 온 결과 전국에 약 백여 명의 현지 목회자들이 훈련을 받았고,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목회하고 있다. 이렇게 앞으로 현지 목회자 훈련을 통해 아르헨티나 교회를 건실하게 키워나가려 하고 있다.
또한 지금 미주 목성연(목회자 성경 연구원) 중현본(중남미 현지인 말씀 사역 본부)의 책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페루, 과테말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인 선교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중현본은 현지에서 스페인어 교재 번역, 출판하고, 이를 통해 목회자를 훈련하여 중남미의 여러 나라의 현지인 목회자 사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인교회와 한인 디아스포라는 현지 선교환경에서 어떤 선교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나?
선교신학자 아서 글라스(Arthur Glasser) 박사는 디아스포라를 하나님의 왼손 사역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바빌론 유배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오른손 사역으로, 디아스포라로 남았던 사람들은 왼손 사역으로 썼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소 출신인 것은 하나님의 왼손 사역의 결과이며, 그의 사역에 있어서도 흩어진 유대인 회당들이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니 사도 바울의 사역도 왼손 사역의 결과였다.
나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대단한 선교자원이라고 생각한다. 180여 국에 700만 한인들이 있어 세계 곳곳에 한국 사람이 없는 곳이 없다. 한인 디아스포라는 선교사들보다 먼저 곳곳에 들어가 삶의 터전을 이룬 사람들이며, 이들은 먼저 교회를 먼저 세우고 선교사를 초청하기도 했다.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작지만, 한국적인 교회 문화를 갖고 예배, 심방, 새벽 기도회 등을 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세계 문명 속에 외로이 서 있는 돌 감람나무와 같다. 당장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 같지만, 이민자들은 사랑, 위로가 필요할 때 교회에서 위로를 받는다. 마치 소외된 삭개오가 돌 감람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한인 이민 역사가 깊어지면서 이제 이민자 2세들이 현지에서 전문인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미국처럼 이민자들이 아르헨티나에서도 이민자 2세들이 사회 주류가 돼 영향력을 끼칠 날이 머지않았다고 본다. 그들은 한국 사람인 동시에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현지 언어에 완벽하고 문화도 익숙한데 김치도 먹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엄청난 선교자원이다. 예를 들어 이민자 1.5세, 2세 청년들을 훈련시켜 현장으로 단기선교를 나가면 현지인들과 똑같이 말하고 복음을 전한다. 다만 이민자 2세들을 전문적으로 양육할 2세 사역자들이 부족한 것이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선교를 위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기도 제목을 전해주기 바란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이다. 이에 따라 해외에 나와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와 이민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해외 한인교회가 징검다리가 될 뿐 아니라 선교의 최전선에 배치된 교회로서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 기도하고 교단 간의 좋은 협력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선교의 공동 전략을 나누길 기도한다.
사실 디아스포라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교단 정체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단은 방패막이가 되어 이단으로부터 보호막이 된다. 한국교회가 외국 교단들과는 동역 관계도 중요하지만, 해외 한인장로회(KPCA)와 더 깊은 관계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KPCA의 경우 유럽, 호주, 남미 등에 22개 노회가 있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 PCK 선교사들이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들과 협력한다면 총회적 차원에서 디아스포라 한인 이민교회를 잘 보호하고 관리할 수 있다. 2016년 1월 한국 총회(총회장 채영남 목사)와 KPCA(총회장 김종훈 목사) 간에 선교 협약을 맺어 중남미 한인 이민목회 선교사에게 2중 멤버십을 부분적으로 허락한 것은 좋은 출발이다. 앞으로 발전적으로 좋은 동역 관계를 형성해 나갔으면 좋겠다.
후배 이민목회 선교사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은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내가 이민목회를 22년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민자의 정체성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셨듯 이민목회 선교사들도 이민자가 돼야 한다. 선교사에겐 선교사라는 정체성도 있어야 하지만, 더 깊은 곳에 있어야 할 것은 이민 목회자라는 정체성이다.
아르헨티나 사회가 정제, 정치적, 치안이 불안해지고 있다. 이민 사회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사역하고 있는 소망교회를 비롯한 모든 한인교회들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든든히 서서 교민들에게 힘과 소망을 북돋아 주는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에 기도를 부탁한다.)
천재라고 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잡히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을 그린 '최후의 만찬'은 인류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이탈리아어 Ultima Cena, 영어 The Last Supper)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에 수도원 안에 있는 성당의 식당 벽화로 그린 그림입니다.
레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7년 동안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은 미완성 그림이 많은데 이 그림은 완성된 그림 중에 포함됩니다.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들인 공을 안다면 왜 이 그림이 그렇게 가치 있는 그림이 되었는지 공감이 가실 것입니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쏟아 부은 돈은 엄청납니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의 모델을 구하기 위해 유럽의 뒷골목과 빈민가를 이 잡듯이 뒤지며
뿌린 돈의 액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의 모델을 구한 다음 마지막 유다의 모델을 구하기까지 6년이나 걸렸습니다. 잘 아는 이야기로 예수님과 유다는 같은 모델이었다고 하지요.
6년 전에는 예수님 같았던 모델이 타락한 삶을 살더니 6년 후에는 유다처럼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 생존 당시의 음식을 재현하느라 들인 돈도 엄청나다고 합니다. 실제 예수님 당시에 생산된 포도주를 구하러 다녔다고도 하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집요하고 대단한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림의 영감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성찬식을 하셨던 것 같은 그 포도주 와인을 2년 동안 중독이 되도록 마셔댔다고 하니 그림을 부탁한
교황청도 애간장이 다 탔을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같은 천재가 그림 하나를 그리기 위해 이 정도 공을 들였다면 천재가 아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은 작품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는지?
(언)
진정한 성공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True success is overcoming the fear of being unsuccessful. - 폴 스위니 -
분당우리교회가 7년 전 약속했던 ‘일만성도파송운동’의 실현 계획을 밝혔다.
분당우리교회는 연말까지 교구를 30개로 늘리고, 각 교구를 하나의 교회로 세워간다.
분립하는 30개 교회의 담임목사는 분당우리교회 부교역자 15명, 외부의 목회자들에게 추천받은 목회자 15명을 청빙한다. 30교회를 분립개척한 후 이찬수 목사는 1년 동안 안식년을 갖고 교회를 당분간 떠나기로 했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는 2월 23일 주일예배에서 ‘일만성도파송운동의 정신’(막 1:1~8)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 목사는 “지난 7년 동안 준비했던 일만 성도 파송의 방향을 나누는 중요한 날”이라며, 분당우리교회가 추구하는 사역의 목적과 정신을 전했다.
분당우리교회는 7년 전 이찬수 목사 주도로 놀라운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분당우리교회는 성도가 2만 명을 넘어 계속 부흥하는 상황에서 ‘10년 내에 성도의 3/4을 파송하고 5000명 이하로 줄이겠다’고 결정했다. 또한 매입한 지 1년도 안된 교육관(서현드림센터)을 한국 교회와 사회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2월 23일 주일예배 설교에서 일만성도파송운동의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이찬수 목사는 당회의 결정을 전하면서 2022년까지 30개 교회를 분립개척하고, 분당우리교회는 5000명 이하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이찬수 목사는 이날 설교에서 일만성도파송을 선포했던 2012년 당시 상황을 되새겼다. 이 목사는 주위에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들이 많은 현실에서 분당우리교회로 계속 사람들이 오는 상황이 괴로웠다고 말했다.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한쪽으로 쏠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분당우리교회로 쏠리는 것은 비정상이고 두려운 마음을 가졌다고 말했다. 지하실과 상가에서 예배를 드리는 어려운 교회가 많은데, 서현드림센터를 매입한 것에 부담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찬수 목사는 그 부담감으로 “일만성도파송을 선포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어떻게 파송할 것인지 몰랐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무기명투표에서 전체 성도의 97%가 이 운동을 찬성하셨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지난 7년 동안 어떻게 성도를 파송할 것인지 고뇌하면서 두렵고 기쁜 날을 보냈다고 전했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와 당회에서 결정한 일만성도파송운동의 추진 방향은 이렇다.
먼저 교구를 현재 20개에서 30개로 늘린다. 2020년 말까지 30개 교구를 조직하고, 한 교구가 하나의 교회로 설 수 있도록 한다. 일만성도파송 비전선포 10주년을 맞는 2022년까지 30개 교회의 분립개척을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30개 교회를 담임할 목회자는 분당우리교회 부교역자 중에서 15명을 선발하고, 외부의 목회자들에게 영성과 인품을 갖춘 목회자 15명을 추천받아서 청빙한다. 분립 교회들은 분당우리교회와 연관성을 드러내는 ‘우리’라는 명칭을 교회 이름에 사용하지 못한다.
이찬수 목사는 분립한 교회들이 “분당우리교회의 프랜차이즈 교회가 아니라 완전한 독립 교회”라고 설명했다.
이찬수 목사는 “교회분립을 마치고 분당우리교회의 성도 수가 5000명 이하로 줄어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성도들은 분립하는 30개 교회 중 한 교회를 선택해도 되지만, 거주하는 지역의 작은 교회로 출석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찬수 목사가 분립개척의 강한 의지를 밝혔지만, 그의 소망대로 분립 후 분당우리교회 성도가 5000명 이하로 줄어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목사도 이 점을 우려해서 2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이찬수 목사는 분립개척을 진행하는 동안 강제 안식년을 최장 1년 동안 갖겠다고 했다. 또한 안식년을 마치고 분당우리교회에 왔을 때, 성도수가 5000명을 넘으면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목사는 “분립개척에 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안식년을 받아서 없어질 것이다. 이후에도 5000명 이하로 줄어들지 않으면 사임할 것이다. 하나님께 약속 드렸다”며 목회자로서 영적인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와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서현드림센터의 활용계획도 밝혔다. 분당우리교회는 센터를 대가 없이 기증하되, 다음세대 사역을 위해서 마련한 목적에 맞게 계속 사용되길 원한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4가지 사역
△신학생과 젊은 목회자들을 섬기는 사역
△기독 청년들을 위한 사역 및 성윤리연구소를 확장해 기독교의 가치관과 가정의 소중함을 알리는 사역
△이 시대 청년들을 돕기 위한 창업 및 취업 센터 등의 사역
△장애인 사역에 사용하도록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찬수 목사가 가장 강조한 것은 ‘일만성도파송운동의 정신’이었다. 이 목사는 “세례요한의 정신이 일만성도파송의 정신이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가장 귀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분당우리교회가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귀한 복음을 담는 껍데기이다. 분당우리교회가 날마다 비울 때, 하나님의 채움이 있을 줄 믿는다”고 말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 목사는 “우리의 작은 몸부림이 젊은 목회자들에게, 개척 교회와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를 바란다”고 소망을 전했다
1. 도리도리
2. 좌우로 회전,
3. 앞뒤로 끄덕임, 4.
좌우 옆으로
목화석은 나무가 화석으로 변한 것입니다.
수억년 전부터 오랜 세월 흙 속에 조용히 갇혀 지내던 나무숲과 동물들은
목화석과 화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애리조나 레인보우 목화석은 친리 지층(Chinle Formation)으로 불리는
진흙 속에서 미네랄 작용으로 여러 가지 색을 띄는 목화석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애리조나 주도 피닉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3시간 30분 운전 거리에 있는
목화석 국립공원은 애리조나 레인보우 목화석의 원산지입니다.
목화석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 애리조나 목화석은 무지개 빛을 발하면서
가공한 목화석은 보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황량한 이 들판에도 1800년대 후반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습니다.
많은 방문객들이 예쁘고 단단한 돌을 한 두 개씩 들고 나가고
상업적으로 돌을 캐낸 이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인근의 목화석 가공 공장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목화석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하지만 공원측에서는 목화석 반출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반출하다 들키면 벌금에 감옥살이도 할 수 있지요.
매년 수많은 이들이 사과의 편지와 함께 몰래 가져갔던 돌을 공원 측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합니다.
공원은 남북으로 2개의 입구가 있는데 40Fwy에서는 페인티드 데저트 입구가 있고 180Hwy 선상에는 레인보우 포레스트(Rainbow Forest) 입구가 있습니다.
40Fwy로 들어오면서 온통 붉은 색으로 덮힌 페인티드 데저트의 컬러풀한 지형을 볼 수 있습니다. 한바퀴 돌면서 뷰포인트를 하나씩 들러 자연의 경이로움을 목격하고 역사적 66번 루트의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공원을 관통하는 길을 따라 남쪽의 레인보우 포레스트 입구까지
흥미롭고도 재미난 지형속에서 많은 목화석들을 목격 할 수 있습니다.
주요 포인트로는 뉴스페이퍼 록(Newspaper Rock), 블루 메사(Blue Mesa),
제스퍼 포레스트(Jasper Forest), 크리스탈 포레스트(Crystal Forest)가 있으며
아름다운 목화석 광장과 미국 원주민들의 유적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남쪽의 레인보우 포레스트 방문자 센터에서는 공원을 설명하는 짧은 영상을 볼 수 있는데
공원 탐방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방문자 센터 뒤편으로 전시용 품질의 많은 목화석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왕복 2마일의 아게이트 하우스는 원주민들이 이곳에 널려진 목화석으로 지은 집인데
마을 모임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8개의 방이 있는 건물이었으나
폐허가 된후 1930년대에 일부만 복원이 되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젊은이들을 조명한 1969년 피터 폰다(Peter Fonda)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 잭 니콜슨(Jack Nicholson) 주연의 영화
‘이지 라이더(Easy Rider)’ 가 이곳에서 촬영 되었습니다.
만약 목화석을 사고 싶다면 페인티드 데저트 방문자 센터에서
비싸지 않은 가격에 좋은 품질의 목화석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이 난다면 E-bay에서 품질 좋은 목화석을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