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

6.25 전쟁 한가운데 불렀던 찬양

[간호장교 박옥선]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1948년 팔월 십 오일, 우리 정부수립의

그 벅찬 기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괴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끔찍한 동란,

그 날로부터 어언간 70년의 세월 앞에 섰다

 

3일만에 적들의 수중에 들어간 수도 서울,

한강을 넘어 낙동강까지 밀린 불리한 전세

한 미 국제연합군의 필사적인 방어 저지와

9. 15인천상륙작전으로 9. 28수도탈환,

 

북진공격으로 10월 19일 평양을 지나서

10월 26일 압록강의 초산까지 밀고 갔건만

중공군 개입으로 적을 다 궤멸시키진 못했다

 

전쟁 발발 3년 뒤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란 이름으로 잠시 포성은 멎었으나

종전은 아니어서 지금도 실상 전쟁 중이다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획책하며

온갖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는 북의 도당들,

3대를 세습하며 남한에 괴롭힘을 일삼는

최소한의 상식도 안 통하는 저 붉은 무리들,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핵무기를 만들어

국제사회의 지탄을 자초하는 괴뢰집단,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풍긴

저들의 잔혹사는 역사에 길이 기록되리니

 

잊지말자, 6. 25 한국전쟁의 참혹한 진실을!

잊지말자, 전사자들과 참전국가유공자들을!

 

잊지말자, 유엔 16개국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말자, 1천만 이산가족들의 큰 아픔을!

결코 잊지말자, 북한의 적화통일 그 야욕을!

(2020. 6. 25)

 

………………………….

필자:오레곤문인협회 명예회장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개역개정)

 

“Don'be afraid, for I am with you. Don't be discourag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hold you up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 (Isaiah 41:10, New Living Translation)

 

안녕하세요. 새로운 금요일 아침입니다.

 

이번 주에는 6·25전쟁 기념일이 있습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 땅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21일 주일, 한국교회는 이날을 기억했습니다.

교회들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재현돼선 안 된다. 교회가 평화와 화해의 사도 역할을 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격전지였던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선 평화대회를 가졌고 전국 교회에서는 북한 복음화를 위한 ‘2020 북한선교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625를 생각하면서 구순을 넘긴 두 노병을 소개합니다.

장로님이신 지경수, 오만균 노병은 이번 6·25가 더욱 뜻깊게 다가옵니다. 지 장로는 ‘우리나라의 위기였으나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셨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오 장로는 최근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장면을 보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목숨 바쳐 지킨 한반도가 평화통일을 이루는 모습을 천국 가기 전에 보고 싶다 했습니다.

 

지난 19일 별세한 한국 세계선교의 개척자인 조동진 목사 역시 평생을 통일을 위해 기도했던 분입니다.

향년 97세로 영원한 나라로 옮겨간 그는 서울 후암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중 부친의 유업인 통일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선교사로 헌신합니다.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여러 차례 투옥된 기독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조상항 선생으로, 해방 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통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경기도 성남 만나교회는 ‘프레이 온(Pray on), 그래서 기도회’를 온라인으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비전통신 애독자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위태롭고 두렵고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낙망하기보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 주님만 더욱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비전통신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시면서 주님을 만나시고 영적 도전과 변화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50년 8월 29일, 한 손에 꽃을 들고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영국 군함을 환영하는 남한 여성의 뒷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1951년 4월 9일, 색동 저고리를 차려 입은 한 소녀가 미군 전사자 묘역을 찾아 국화를 헌화하고 있다. 순결한 여성의 이미지를 이용한 이런 전쟁 사진들은 한국 전쟁 참전에 유리한 여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선전기구’로서 기능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부두에 홀로 선 소녀는 한복 자락을 나부끼며, 품 한가득 꽃다발을 끌어안았다. 마주 보이는 군함엔 나라를 대신 지켜줄 타국 군인들이 타고 있다. 배가 다가올수록 가냘퍼지는 소녀의 뒷모습에서 스스로를 온전히 지킬 수 없었던 조국의 비탄이 느껴진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휩쓸렸던 나라의 운명과 전쟁 속 여성의 운명은 꼭 닮았다. 

 

우리가 알고, 기억하는 전쟁엔 여성이 없다. 피가 튀고 살이 터지는 전장의 주역은 언제나 남성들로 기록됐고, 여성은 '만들어진 이미지'로 남았다.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 참전한 영국 군함을 환영하는 소녀 또한 이 같은 '선전물'의 일부였다.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선 필사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던 '진짜 여자'들이 있었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가로지르던, 마침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억척스럽게 새 터전을 일궈내던, 여자들이 있었다. 죽음보다 더 지난하고 무거운 그들의 ‘삶’이 거기 있었다.

 

여기 소개하는 사진들은 6ㆍ25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당시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들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부터 수집한 수만여 건의 사료 중 일부로,  미군이 촬영한 것들이다.

 ‘전쟁 속 여성’들에 대한 기억을 빛바랜 사진을 통해 복원했다.

 

목숨을 건 고난의 피난길

 

전쟁이 터지자 너나할 것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장성한 남자들은 징집을 피해 먼저 떠났기 때문에, 어린 자식과 늙은 부모를 챙기는 일은 오롯이 어머니와 딸의 몫이었다. 갓난아기를 둘러업은 채 한 손으로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죽음의 전장을 가로질렀다.  

 

 

경북 동해안 영덕에서 피난길에 나선 한국인 아낙네.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걸음을 재촉하는 여성 뒤로 서너명의 군인들이 견인포를 장전하며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유엔군의 네이팜탄 공중폭격으로 부상을 당한 3명의 한국 여성이 수원 인근지역 야전응급구호소에 응급치료를 받고 줄지어 앉아있다. 얼굴과 몸 전체에 깊은 화상을 입어 붕대를 두껍게 감은 모습이다. 휴식중인 모습. 1951년 3월 6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할머니고 처녀고 없어, 여자면 다 겁탈하는 거야. 길거리 가다가 아무나 끌고 가서 겁탈을 했어.” (전쟁피해 여성 한모(90)씨의 증언, <딸들의 한국전쟁>(2007, 안태윤) 中)

 

당시 여성들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건, ‘성폭행’의 공포였다. 피난길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몸뻬 바지를 입히고 어린 동생을 등에 업혀 ‘기혼 여성’처럼 보이게 했다. 머리를 짧게 잘라 남장을 시키거나, 오줌에 숯을 섞어 얼굴을 검게 칠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폭행은 도처에서 일어났고 ‘재수가 없으면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을 잃고도 삶은 계속됐다

 

6.25 전쟁  중 남편을 여읜 ‘미망인’은 무려 50만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한 여성들은 서른 안팎의 나이에 몇 년 함께 살아보지도 못한 남편을 잃고 만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을 제대로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아이들은 종일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쳤고 어머니들은 이 집 저 집의 뒤주와 장독대를 비웠다. 그조차 여의치 않을 땐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다가 죽을 쑤어 먹였다. 열 살을 갓 넘긴 딸들은 걸음마도 못 뗀 동생을 등에 업고 어머니를 도왔다.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지만, 전쟁은 딸들을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다.

 

 

 

1950년 9월 29일, 인민군에 의한 전주 학살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이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식은 남편의 시신을 내려다 보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1951년 8월, 서울 영등포의 한 난민수용소에서 한 소녀가 어린 남동생을 등에 업고 있다. 두 손아귀에는 저녁식사 거리로 캐온 나무뿌리가 한아름 쥐여져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강해야만 했던 당신, '어머니'   

 

 

1950년 11월 1일, 거대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에 남겨진 여성과 아이들이 건물의 잔해 속에서 땔감을 찾고 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이들은 빈집에 남겨진 식량과 땔감을 끌어 모아다 유난히 혹독한 겨울을 났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단어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못한 아내’라는 뜻의 이 단어는 전후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비딱한 혐오의 시선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소설가 정비석은 그의 작품 <유혹의 강>에서 “미망인은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무주공산적 존재”라고 일컬으며 노골적인 멸시를 드러냈고 언론 매체들은 “현모양처라는 가치관이 파괴돼 여성들이 향락과 허영에 빠지게 됐다”며 개탄했다.

 

시장으로 나선 여자들

 

남쪽으로 떠났던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귀환하면서 폐허로 변한 서울도 조금씩 활기가 돌았다. 고향도 남편도 잃은 여자들에게 이곳은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대개가 충분한 배움이 허락되지 않은 이들이었기에, 유일한 생계유지 수단은 ‘파는 것’뿐이었다.

 

광주리 행상에서부터 노점까지 시장에 자리를 잡은 상인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밥벌이에 나설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시장에 자리를 튼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밑천을 조금이라도 마련할 수 있는 이들은 시장 좌판으로 나섰고, 그마저도 없으면 식모살이를 전전하다 매춘으로까지 내몰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51년 3월, UN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서울 도심이 곳곳엔 장이 서기 시작했다. 여성이 야외 시장에 나와 직접 담은 김치를 팔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1951년 3월, 서울의 한 야외 시장에서 한 여성이 빈대떡을 굽고 있다. 뒤집개를 움켜쥔 손이 겨울 바람을 맞아 한껏 거칠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매일 새벽 십 리를 걸어 시장으로 나간 어머니들은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근근히 번 돈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전쟁통, 여성들의 밥벌이는 유난히 가혹하고 팍팍했다. 

 

40~50대 어머니들이 시장에 나가는 동안,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딸들은 전시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향했다. 일사불란하게 기계를 돌리는 소녀들의 앳된 얼굴에서도 삶의 고단함이 진하게 배어난다.

 

 

부산의 한 면사 공장에서 소녀들이 티셔츠를 만들기 위해 목화에서 실을 뽑아내고 있는 모습. 1951년 9월 9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다소의 지식기술 또는 지조가 있는 여성은 취업전선으로, 그렇지 못한 여자는 남의 첩으로, 또 이도저도 될 여력이 없는 여자는 ‘살아야 한다’는 엄숙한 사실 앞에 드디어 윤락의 길을 택하였다” (동아일보, 1955년 12월 12일)

 

 

'제 5의 보급품' 성매매 여성 

 

6ㆍ25전쟁 당시 국군은 ‘특수위안대’를 조직해 병사들의 ‘성적 위안’을 꾀했다. 군부대 안에 댄스홀과 위안소를 설치했고, 성매매 여성들로 하여금 미군 간부들을  겨냥한 외화벌이에 나서게 하기도 했다. 공식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위안소는 1950년 8월 초 경남 마산에 설치된 ‘연합군위안소’다

 

 

 

1952년 8월 6일, 미제3보병사단 응급구호소에서 한국인 의사가 성매매 여성을 진료하고 있다. 당시 미군은 성매매를 하는 한국여성에게 의무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당시 한미 정부는 이 같은 방안이 '양국의 우호관계를 진전시키고 남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미군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외교) 수단’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방식의 군 사기 진작 전략은 일본군 출신이 대다수인 군 지휘부가 과거에 습득한 경험을 답습한 결과였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들을 ‘제5 보급품’이라고 불렀다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장장 70년, 6ㆍ25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시간 이어지고 있는 전쟁이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여성들은 온몸으로 말한다. 죽지 못해 필사적으로 살아내야 했던 전쟁 속에서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당사자'였다고.

그들은 어미이자 가장, 생계부양자였고, 그 이전에 피와 땀, 눈물, 뜨거운 체온을 가진 ‘인간’이었다.

 

“저도 이제는 강해졌습니다. 옛날에 당신이 알던 가냘프기만 한 그런 여자는 아닙니다. 밟혀도 밟혀도 고개 쳐드는 민들레같이 몇 번인가 쓰러질 듯 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이렇게 싸워 나오고 보니, 이제야 삶에 대한 자신과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1955년, 한 전쟁 미망인의 구술 中)

 

 

 

1951년 1월 8일, 미군 사령부 근방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조선인 여성들. 이들의 뒤로 거꾸로 처박힌 러시아제 T-34 탱크가 보인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요즘처럼 [얼굴 가리개](Face Mask)가 사회적 이유가 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뉴욕주, 캘리포니아주, 미시건주, 조지아주, 플로리다주, 루지애나주 등 약 15개주와 워싱턴 DC가 복면금지법(Anti-mask law)으로 복면을 규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은 것 같다.

 

각 주의 규정은 조금씩 다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극우 비밀결사단체인 KKK(Ku Klux Klan)가 KKK Hood나 마스크를 쓰고 흑인 등 소수인종 등에 대한 폭행이나 테러를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복면금지법이 제정되었다.

복면금지법은 두 가지 형태다. 일반 범죄를 범하고 있는 동안 마스크(Mask)를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Criminal anti-mask laws가 있다. 또 하나는 범죄를 범하고 있는 것 과는 관계 없이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의 신원을 감추기 위하여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General anti-mask laws가 있다.

Criminal anti-mask laws의 경우에는 마스크를 쓰고 강도를 하거나, 마스크를 쓰고 유괴를 하는 경우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경우보다 가중 처벌된다. General anti-mask laws의 경우에는 공공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시위를 하는 경우 경찰에 의해 복면금지법 위반으로 체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복면금지법에는 예외 조항 있다. 할로윈(Halloween) 같이 축제를 위한 마스크 착용이나 교육, 종교, 역사와 관련된 행사를 하기 위한 착용, 카니발이나 페스티벌 같은 행사에서 마스크 등을 착용하는 것은 복면금지법상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사건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오히려 복면을 쓰지 않으면 위법이다. 공공 장소와 공공 기관에서는 필수적으로(Mandatory) 착용해야 한다. 무섭게 번지는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한 법적인 조치이다.

 

'복면'(覆面)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 전부 또는 일부를 헝겊 따위로 싸서 가림. 또는 그러는 데에 쓰는 수건이나 보자기와 같은 물건'이라고 되어 있다. 복면이란 용어는 [가면(假面)]이란 말과 같은 것 같으면서 다르다. 영어는 둘 다 Mask이지만. 복면의 용도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비해 '가면'(假面)의 의미는 좀 더 복잡하다. '가면''탈'과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며 '얼굴을 감추거나 달리 꾸미기 위하여 나무, 종이, 흙 따위로 만들어 얼굴에 쓰는 물건'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에 더하여 남들에게 보이는 부분을 꾸며서 보여준다는 성격이 강하다.

 

형태적으로 본다면 복면은 얼굴을 덮는다는 한자의 뜻처럼 천을 뒤집어쓰거나 얼굴을 덮는 형태이며, 얼굴만 가리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장식이나 모양이 없어도 된다.

가면은 한자의 뜻처럼 '가짜 얼굴'이기 때문에 진짜 얼굴을 대체할 수 있는, 꾸며진 모습이 있어야 다.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은행 강도나 테러리스트들이 단순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쓰는 것은 복면이고, 오페라의 유령이나 배트맨이 원래 자신의 모습과 다른 위장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은 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복면과 가면이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가면은 '속뜻을 감추고 겉으로 거짓을 꾸미는 의뭉스러운 얼굴'이나 '위선'과 같은 추상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때의 가면은 흔히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리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실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이 추상적인 의미의 가면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순간 누구나 쓰게 되는 것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친한 척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여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강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말하고, 위악(僞惡)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모두 추상적 의미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람들이 복면을 쓰게 되면 억눌렸던 악한 성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요즘 극악으로 내닫는 [인터넷익명]으로 악플을 다는 행위는 일종의 복면을 쓴 사람들의 행위이다. 다른 사람을 무차별 공격하여 사회적 매장이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복면이나 가면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감추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에 권장할 일이 아니다.

 

면과 가면은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Pauline Clance)와 수잰 임스(Suzanne Imes)가 말한바와 같이 일종의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의 병적 증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로 지금 쓰고 다니는 [얼굴 가리개]를 어서 속히 벗을 날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다. 그 가리개가 복면이 되었든 가면이 되었든 벗어야 한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 이렇게 찬송했으면 좋겠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하나님 앞에서는 복면이나 가면이 필요 없다. 내 모습 이대로 설 수 밖에 없다.(장재언)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지경수(왼쪽) 오만균 장로가 지난 18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전쟁의 기억과 신앙 이야기를 들려준 뒤 손을 잡은 채 미소 짓고 있다.

 

‘살아도 죽은 것과 같은 것. 손상기. 1928년생. 복무기간 5년....’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박태규. 1929년생. 복무기간 17년....’

 

손바닥만 한 종이에 비뚤 배뚤 적힌 손 글씨엔 글귀를 적을 때의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76개의 글귀 위엔 같은 제목이 달려 있었다.

 

‘나에게 6·25란?.’

70년 전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의 전장을 누볐던 한국전쟁 참전용사 76명의 증언록엔 6·25에 대한 한 줄의 기억이 첫머리를 장식했다. 그중 한곳에 시선이 꽂혔다.

‘우리나라의 위기였으나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셨다. 지경수.’

 

스물넷 청년 지경수는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한 1950년, 대구에서 15일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전선에 투입됐다. 지난 18일 대전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에서 만난 노병 지경수(94·대전중앙교회) 장로는 또렷하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6사단 19연대 3대대 11중대 1소대에 배치받았습니다. 총알 500발, 수류탄 5발을 받아들고 전투에 나섰지요. 명령은 딱 하나였습니다. 고지를 반드시 사수하라.”

 

지 장로는 1·4후퇴 후 방어선이 경기도의 평택 용인 이천 여주까지 내려오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1951년 3월 고지 방어에 나섰다. 목숨을 걸고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이 참호에서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몰려왔다. 그때 스치듯 어머니께서 기도해주시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계획하신 일을 행하시기 위해 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다.’

 

“옆 참호에 포탄이 떨어지고 기관총 탄환이 제 옆으로 쏟아져 귀가 먹먹해졌는데 모든 걸 내려놓고 기도했더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겼습니다. 4~5m 앞에서 달려드는 중공군들을 사살하고 적의 기관총을 빼앗았지요. 밤새워 전투하고 해가 뜨는 고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부상당한 전우들이 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독백하듯 전사를 풀어놓던 지 장로는 슬며시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봤다. 69년 동안 절뚝거리던 다리였다. 고지 전투 후 적의 동태를 살피며 용문산 전선으로 이동하다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얻은 전흔이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몸에 배었던 기도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지 장로 옆에서 얘길 듣던 오만균(90·대전 선창교회) 장로는 전쟁 발발 후 피난길에 올랐던 기억부터 꺼냈다.

 

“가족을 지키려고 피난하던 중에 대전 신탄철교 아래 토굴에서 보수공사를 돕다가 다리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당시엔 ‘왜 이 난리 중에 다리를 다쳐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게 됐나’ 싶었는데 다친 다리 덕분에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어요. 돌아보니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거지요.”

 

오 장로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군경력증명서를 보여줬다. ‘군번 705476. 1953년 12월 1일 제10전투비행단 하사 임관.’ 그는 피난 생활을 이어가다 첫아들을 얻은 지 4개월 만에 자진 입대를 결정했다. 조국을 지키는 게 곧 가족을 지키는 것이란 생각에 결심이 섰다. 고교 시절 기계 분야를 배웠던 경험을 살려 공군비행단에 지원했고 전투기 정비대 하사로 임무를 시작했다.

 

“F51 전투기를 수백 번 정비했죠. 통신장치를 확인하고 무기 장착이 완료되면 조종사가 탑승을 준비하는데 통신병 무기병 전우들과 함께 전투기에 손을 대고 무사귀환을 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출격한 전투기가 무사히 돌아오면 모두 기뻐하며 서로를 다독였고 그러지 못한 날이면 서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어요. 슬프고 무거운 침묵만 가득했어요. 전쟁은 그렇게 잔혹했습니다.”

 

그는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장면을 보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목숨 바쳐 지킨 한반도가 평화통일을 이루는 모습을 천국 가기 전에 보고 싶었는데”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구순을 넘긴 두 노병은 손을 꼭 잡은 채 미소를 지어보였다. 눈가 인중 목선 손등 할 것 없이 주름이 깊이 팼지만, 환한 미소만큼은 목에 걸린 호국영웅장 메달보다 빛이 났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지 장로가 오 장로에게 말했다.

“오 상사님, 고생 참 많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전쟁의 고통 아픔 없이 잘 살겠지요.” 

 

 

 

 

 

 

서울시 강남구 율현동에 있는

‘라이프미션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

담임 박재홍 목사(46).

 

박 목사는 원래 재료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다. 이후 미국에서 비즈니스 전공을 수료해 미국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2011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소재 게이트웨이침례신학대에 입학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케냐와 소말리아 접경 지역에 있는 ‘EL-TOTO(엘토토, 대표 곽희문 선교사)’라는 선교단체를 다녀왔다.

 

그는 그곳의 한 교회 성도들이 이슬람 과격 단체로부터 테러를 당할 위협에도 목숨을 내놓고 예배드리는 모습에 강한 도전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교회가 위치한 마살라니 지역은 이슬람 과격 단체 ‘알 샤바브’가 활동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들로부터 숱한 테러를 당하는 마살라니에서 예배를 드리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그럼에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 교회 성도들의 모습에 강한 도전을 받았다. 우리도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리자는 마음에서 2019년 4월 이태원에서 라이프미션교회를 개척했다”고 했다.

 

Q. 교회 개척을 결정하게 된 배경은?

 

A. (박재홍 목사) 원래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비즈니스 전공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일을 하다가 도중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갔다. 2011년부터 게이트웨이침례신학대학교에서 공부했다. 2013년에 한국으로 넘어와서 침례신학교 목회연구원에서 학위(M.Div)를 마치고 2019년 2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2019년 4월 율현동에서 라이프미션교회를 개척했다. 6개월 뒤인 10월, 두번째 예배처소인 이태원에 있는 마크로비(쿠쉬 마크로비오틱 코리아) 쿠킹스튜디오에서 이태원 채플을 시작했다.

 

그 전에 케냐에서 곽희문 선교사가 섬기고 있는 EL-TOTO(엘토토)라는 선교단체라는 곳을 방문했었다. 이곳을 통해 소말리아 국경 지역에 간 적이 있다. 소말리아는 무슬림이 90%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교회 활동을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는 마살라니 지역으로 ‘알샤바브’라는 이슬람 과격 무슬림 단체가 활동하고 있던 곳이었다.

 

크리스천들은 경찰이나 무장 군인들의 보호 아래서 예배를 드렸다. 그곳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2018년 2월경에 폭탄 테러를 당했다. 그 시점에서 2주전, 지역에서는 버스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큰 도전을 받았다. 나에게는 매일 드리는 예배인데 그들에게는 다음 주에 예배드릴지가 기약이 없었다. 이들이 마지막 예배라는 자세로 드리니까 목회자인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또 선교사의 발걸음을 소말리아 접경지역까지 끌고가신 위대한 하나님께 압도돼서도 그렇다. 굳이 복음을 전하러 소말리아 접경지역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데, 이들을 그렇게 이끄신 하나님을 봤다. 

 

그 하나님이 빵 없이 오직 예수만으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자신감으로 예수에 목숨건 예배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그것을 보고 목숨 건 예배를 목격한 후, 이 예배가 생명보다 값진 것임을 기쁘게 보았기 때문에 개척소명이 탄력을 받았다. 한국에서 내가 너무 안일하게 신앙을 했었다.

 

이분들의 목숨을 건 신앙인의 고백들이 어마어마하게 강력했다.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로 강한 임팩트였다. 생명을 걸고 선교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분들을 보면서 2018년 12월에 개척 소명을 받았다.

우리도 생명을 걸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자는 마음으로 ‘라이프미션교회’를 2019년 4월부터 강남구 율현동에서 개척했다.

 

 

 

엘토토 선교회에 방문 중인 박재홍 목사 모습.

 

Q. 교회를 개척하면서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이있다면?

 

 A. (중앙대 심리학과 3학년, 이하현 형제) 교회를 개척하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교회를 세워 가는 일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개척하는 교회가 별로 없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다 보니까 주님께서 성도들을 붙여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고려대 일반대학원 상담심리 석사과정, 조수린 자매) 어려운 점은 딱히 없다. 인원이 적다보니까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경험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이 머리 되시고 예수님의 몸에 각 성도들이 지체가 된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다.

평일에도 예배가 있다. 그런데 한 성도가 한 번이라도 빠지면 ‘왜 안 나왔을까?’라는 걱정이 된다. 누군가가 기쁘면 같이 기쁘고. 인원이 적다보니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한 영혼에게 쏟을 수 있다.

 

Q. 교회 개척에 있어 추구하는 방향이 있다면?

 

A. (박재홍 목사) 우리는 예수 빼고 다 버린다. 주님의 임재에 압도되는 교회를 추구한다. 땅의 것을 안쳐다볼 수 없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땅에서 어려운 고초들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주님이 워낙 크시고 하늘나라가 아름다우니까 그것들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랄까? 마치 자갈길을 유모차로 가면 어렵지만 자전거로는 잘 갈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자갈길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주 되심’만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추구하고 그 원이 커지다보면 유모차가 못가는 길을 자전거로는 갈 수 있다. 하나님의 크심, 주 예수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는 교회를 추구한다.

 

(조수린 자매) 우리는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나를 택해주셨다.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예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감사를 잊은 채 땅의 것을 바라보는 죄송스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또 받아주시고 그 은혜에 동참하게 하신다. 그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내게 있어 라이프미션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인 것 같다.

 

 

박재홍 목사가 조수린 자매에게 침례식을 행하는 모습.

조수린 자매는 올해 6월 중순에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Q. 이를 위해 교회가 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역은?

 

A. (박재홍 목사) 특별히 우리교회는 무슬림 전도에 집중한다. 무슬림과 크리스천은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무슬림들이 바라보는 하늘에는 예수님이 없다.

 

그들은 기독교인들보다 종교적 열심이 뛰어나다. 그 누구보다, 어느 나라보다도 종교적 열심에 타오르는 무슬림들의 마음이 너무 안타깝다. 예수 없는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이들이 그렇게 헌신을 하고 자기의 모든 인생을 다 바치면서 국가 체제 곧 샤리아법에까지 삶을 맞춘다. 그 열심이 하나님이 보기에 안타까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고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우리가 한국에 있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목숨을 걸고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에게 선교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죄송스러울 것 같다. 그 마음을 가지고 2019년 4월 개척을 하고 그해 여름, 8명이 케냐 ‘EL-TOTO(엘토토)’ 선교단체를 통해 단기선교를 갔다. 케냐는 기독교 국가다. 그래서 포교활동이 필요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케냐와 소말리아 접경지역은 주민 99%가 무슬림이다. 무슬림 커뮤니티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에게 무슬림은 경쟁 대상이 아니다.

 

무슬림이 예수를 안 받아들인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지 이들을 경쟁적으로 꺾는 모습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십자군 전쟁이 그 예라고 본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볼 목표지점이다. 하지만 그 진리가 옳다고 해서 무슬림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조수린 자매) 이태원 근처에서 무슬림과 만나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이들은 구원을 경쟁적으로 노력해서 얻는다는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전적인 은혜인데…

 

(박재홍 목사) (무슬림들과의) 이런 토론을 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가 보는 하나님 백성은 일치하지 않는다. 야곱과 에서를 보더라도 그렇다. 에서 가운데 야곱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슬림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건져주실 하나님의 자녀가 있을 것이다. 그 자녀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를 바라보며 신앙 고백을 하는 그 날을 상상한다.

 

그리고 언젠가 무슬림 사역자가 우리 공동체에 나오게 되는 그 비전까지 품고 있다. 결국에는 무슬림 출신의 기독교인이 라이프미션교회 이태원 채플을 끌고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무슬림친구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라이프미션교회 성도들

 

 

Q. 현재 무슬림에 대한 전도 열매가 있는지 궁금하다.

 

A. (조수린 자매) 컨택은 계속 하고 있다. 이태원에서 마주치는 무슬림들이 있다. 이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언젠가 예수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마음 문을 닫는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를 생각한다. 만일 개종하는 무슬림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찬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무슬림을 찾아서 9주 동안 이태원과 고려대 근처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박재홍 목사) 현재 이 사역을 한국 엘토토 선교회 멤버들과 같이 하고 있다. 이태원은 이슬람 사원 근처에서 무슬림들과 만나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다.

 

Q. 사역하면서 붙들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

 

A. (박재홍 목사) 2020년 올해의 성구로 뽑았다. 바로 베드로전서 2장 4~5절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올해 산돌이신 예수님만 붙들고 사역하고자 한다. 그런 우리가 산돌이신 예수의 터 위에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제사장으로 우리 교회가 세워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예수님을 통해 화목케 되는 일이 우리 교회 성도들과 무슬림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박재홍 목사가 라이프미션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한 성도의 집에서 성도들과 성경공부하고 있다.

 

Q. 끝으로 나에게 복음이란?

 

A. (박재홍 목사) 마가복음 1장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니라’이다. 예수 그 이름에 우리 삶의 의미를 투영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 핏빛 복음이다. 우리에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우리가 가는 길도 예수여야 한다.

그 이름과 그의 부활을 전하는 게 초대교회 사도들이 지녔던 복음의 핵심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며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분이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바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선포한 내용이다.

 

최근 설교에서 사랑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에 대해 전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용납이다. 신뢰는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내 삶에서 성취하시고 성취하실 그 일을 믿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과 신뢰를 이룰 이 땅의 유일한 소망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가 운행되는 기본적 진리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성도들 가운데서 보이면 좋을 것 같다. 믿음도 마찬가지. 우리 눈에 보기에 ‘왜 이런 행동을 하지’라고 생각되는 성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럴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셨던 신뢰와 사랑을 그 지체에게 보여줌으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 회중 가운데 더 끈끈해질 수 있다.

 

(조수린 자매) 대형교회를 다니다가 여기로 왔다. 이 교회에서 코이노니아를 배워서 더욱 행복하다. 교회 선배들이 전적으로 섬겨주신다. 이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알아서 행복하다.

목사님 댁에서 같이 요리도 하고 식사교제도 한다. 우리 엄마는 교회를 안 다니신다. 그런데 성도들이 꽃과 인형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서 선물로 드리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너는 교회 다니는데, 왜 이리 사랑을 많이 받니?’라고 물으신다. 그러면 나는 ‘내가 예뻐서도 잘나서가 아니야. 이분들이 예수님 안에서 나를 사랑해주기로 결단하셔서 그런 거야’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빼도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는 에베소서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의 앞잡이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각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서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쓴 것을 보게 됐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마치 무슬림처럼 극단적으로 신앙훈련을 했던 내 모습을 보았다. 그랬던 내가 라이프미션교회에 와서 예수를 배우고 내 신앙의 문제가 바로 ‘예수가 빠져서 그랬구나’를 절실히 깨달았다. 바울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됐다.

나처럼 예수를 모르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 무슬림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학기에 복학을 하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무슬림 사역을 위해서다.

 

(이하현 형제) 12월, 혼자 케냐로 단기선교를 갔다. 목사님이 개척소명을 받은 곳이다.

목사님이 ‘케냐의 어떤 모습 때문에 예수를 더 사랑하게 됐는지’가 궁금해서 ‘EL-TOTO(엘토토)’라는 선교단체로 선교를 갔다. 케냐 ‘고르고쵸’라는 지역에 갔다. 거기에는 쓰레기장이 있었고 근처에서 거주하는 어린이들을 돌봐주는 사역을 했었다.

 

케냐 크리스천 지체들과 축구도 했다. 우리와 함께 성경 나눔을 하기도 했다. 언어는 안 통해도 같은 그리스도인임을 예배에서 많이 느꼈다. 무엇보다 엘토토에 속한 케냐 크리스천 지체들은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렸다. 그분들과 함께 예배드릴 때 언어를 뛰어넘는 뭔가를 느꼈다.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에서 깊이 감명을 받았다.

 

 

라이프미션교회(박재홍 목사) 성도들 모습.

 

 

 

이번 코로나 사태로 특별히 붙들게 된 말씀이 있습니다.

미가 1장 8-12절의 말씀입니다.

 

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10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11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12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특히 이 말씀 중에 [도무지 울지 말라]는 말씀은 나에게 기가 막힌 말씀 중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사마리아의 심판에 대해 미가는 상징적인 행동과 태도로 극심한 애통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의 상처]는 고칠 수도 없고 오히려 유다와 예루살렘까지 확산되었습니다. 그런데 미 선포합니다.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미가는 사실 그의 선포를 이미 사울 왕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블레셋 성읍인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했(삼하 1:20)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든 것입니다.

 

미가가 그 역사적 사실을 인용해서 이스라엘의 패망을 염두에 두고 그 비극을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는 모습으로 대적들의 비웃음을 사지 말라는 뜻입니다.

 

비참한 일을 당했을 때 너무 슬퍼하지 말. 그 일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 눈물을 흘려야 했다면 조만간 하나님 품에 웃으며 안길 날이 올 것이란 뜻입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는 것 같아도 너무 외로워하지 말. 외로울 때 믿음의 선진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니까. 내게 사람 친구 숫자가 많았던 것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가 작게 보이고 내가 외롭기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가 크게 보인다면 차라리 외로운 처지에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많은 것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인 것 입니다.

 

가진 것이 적어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전체적으로 적게 가진 것이 아닐 것 입니다. 세상 권력보다 큰 힘인 믿음의 능력을 가진 것은 많이 가진 것 이상 입니다. 사실상 가난한 사람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한과 상처와 슬픔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 예레미야는 힘든 멍에가 주님이 메워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애 3:28).

 

내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메워주셨다면 비틀거리면서라도 지고 가. 주님이 그 멍에를 질 능력도 주실 것이기에. 멍에 혹은 힘들게 하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이 내게 힘든 상황을 허락하신 것은 나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재앙은 사실상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앙입니다. 결국 힘들 때는 복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 입니다. 사람을 너무 믿거나 바라보지도 말.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살아야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사람도 인정해준다는 것. 물론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나의 스타일이 모든 사람에게 맞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니까.

 

하나님은 내가 남의 길이 아닌 나의 길을 가도록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남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정형화시키면 나만의 독특한 탁월성 사라집니다.

 

남이 뒤에서 수군거려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 나를 환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환대 받으려고 집착하지 말. 하나님의 환대를 받으면 족한 줄 알. 남의 시선에 신경 쓰면서 남의 평가와 너무 투쟁하지 말. 내 말을 외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들려주려고 하지 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 나의 사명과 탁월성이 보존될 것 입니다. 남이 나를 떠나는 것을 겁내지 말. 믿음을 가지고 바른 길로 꾸준히 걸어가면 더 많 좋은 사람을 얻게 되고 궁극적인 의미의 패배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시선을 두고 하나님의 시선이 내게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남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으면 어떤 깊은 상처나 어둠의 세력도 나의 정해진 복된 길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에는 끔찍한 무기가 있었다. ‘인유포(人油砲)’라는 무기였다. ‘인유포’는 글자 그대로 ‘사람 기름 대포’였다. 몽골군은 사람 몸에서 짜낸 기름에 불을 붙여서 화포를 발사했던 것이다.

 

몽골은 쳐들어가는 곳마다 6가지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이른바 ‘몽골 6사(六事)’다.

인질을 바칠 것 ② 군사를 내서 몽골을 도울 것 ③ 식량을 제공하고, 운반할 것 ④ 역참을 설치하고, 교통편의를 제공할 것 ⑤ 호구를 조사해서 보고할 것 ⑥ 총독인 다루가치를 둘 것 등이었다. 이 ‘6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면 ‘싹쓸이’를 당해야 했다.

몽골군의 ‘싹쓸이’는 가차 없었다. 쓸모없는 늙은이와 어린아이부터 제거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지는 않았다. 기름을 짜서 ‘재활용(?)’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전사한 적군에게서도 기름을 짰다. 그 기름을 ‘인유포’에 써먹은 것이다.

 

몽골군은 고려를 침략할 때도 예외 없이 ‘인유포’를 들이밀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인유포의 재료’가 될 판이었다.

 

그렇지만 고려는 굴복하지 않았다. 유명한 귀주성 싸움에서 김경손(金慶孫) 장군은 날아온 화살이 팔뚝에 꼽혔다. 그래도 쥐고 있던 북채를 놓치지 않고 북을 울렸다.

 

처인성 싸움에서 김윤후(金允侯) 장군은 적장 살리타이를 화살 하나로 끝내 버렸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황급하게 철수해야 했다. 고려는 꿋꿋하게 나라를 지켰다.

 

그런 가운데 혼자 살아보겠다는 배반자도 있었다. 대표적인 배반자가 ‘홍다구(洪茶丘) 패밀리’였다. 패밀리였으니, ‘일가’였다.

 

홍다구의 할아버지 홍대순(洪大純)은 몽골과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항복했다. 홍다구의 아버지 홍복원(洪福源)은 살리타이가 쳐들어왔을 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길잡이 노릇을 했다.

홍다구는 아예 몽골에 귀화해서 몽골 군사가 되었다. 대를 이은 ‘배반자 가문’이었다.

몽골에 잘 보이기 위해 백성을 괴롭혔다. 덕분에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랬으니 ‘이완용의 대선배’ 격이었다.

 

그런데, 이 배반자 홍다구가 어느 날 처음 보는 과일을 개성에서 길러서 냠냠하고 있었다. ‘수박’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더위를 식혀주는 수박은 ‘배반자의 과일’이었던 셈이다.

 

수박은 달콤하고 시원했다. 냉장고라는 게 없던 당시였다. 냇물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으면서 더위를 견딜 수 있는 과일이었다.

 

이 맛좋은 수박은 곧바로 유행할 만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배반자의 과일이란 이유에서였다. 배반자의 과일은 환영받지 못했다. 뜻 있는 사람들은 더욱 수박을 외면했다.

 

그 바람에 수박이 널리 보급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려야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냉장고가 흔치 않은 때 였어도 될 수 있으면 달덩이 만한 큰 수박을 골라서 사왔다. 온식구가 수박을 배부르게 한바탕 먹어야 한 여름의 무더위가 떠나갔다.

 

그런데 요즘은  미니수박, 반쪽 수박, 반의반 쪽 수박, 반의반☓2 수박을 판다. 겨울에도 수박이 있다. 먹을 것이 넉넉한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수박도 꼭 먹어야하는 과일 목록에서 점점 사라지는 경향이다. 그리고 배가 부르도록 먹지도 않는다. 그래서 생각난 ‘수박의 과거사’였다.

 

   

 

 

기(Ghee) 버터는 ‘천연 정제 버터’로 주로 인도 음식에 많이 쓰인다. 기 버터는 제조과정에서 락토스, 카제인 같이 소화 장애나 알러지 등을 유발하는 불편한 성분들이 빠져나가고 오로지 유지방만 남은 정제 버터이기 때문에 기존의 버터보다 건강한 버터로 주목 받고 있다.

 

기 버터를 맛본 할리우드 스타들이 인스타그램에 몸매를 유지하는 건강 버터로 포스팅을 한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글로벌 이미지 공유 및 검색 플랫폼인 핀터레스트(Pinterest)에서 사용자들이 검색하고 공유한 게시물을 분석한 결과, ‘2018년 푸드 트렌드’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에 기 버터가 뽑혀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인도 오가닉 식품 및 건강 관련 온라인 사이트인 오가닉 팩츠(Organic Facts)가 밝힌 기 버터의 장점과 효능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몸에 좋다고 과다하게 섭취하면 지나친 고지방 섭취로 오히려 부정적인 식이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며 하루 섭취량은 15~30g 정도가 좋다고 한다.

 

1. 락토스, 카제인 Free

 

우유가 들어간 식품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고 배탈이 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기 버터는 락토스, 카제인이 전혀 함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던 사람도 쉽게 먹을 수 있다.

 

2. 체중감량

 

코코넛 오일처럼 기버터는 저탄수화물 고지방 성분이기 때문에 체중감량에 도움을 준다. 실제로 많은 인도 요리에도 기 버터가 사용 될 뿐만 아니라 커피에도 넣어 먹기도 한다. 빵에 발라먹으면 진한 고소한 맛을 느끼며 즐길 수 있다.

 

3. 튼튼한 심장

 

기 버터에 들어 있는 오메가 3 지방산은 심장 건강에 좋지 않은 지방의 일종인 콜레스테롤을 줄여준다.

 

4. 눈 건강

 

기 버터에는 비타민A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 눈 건강에 좋다. 또한 카로티노이드 성분이 들어 있어서 노화로 인해 급격히 황반의 색소 밀도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색소 밀도를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5. 염증 완화

 

기 버터에 들어 있는 뷰트릭산이라는 성분은 체내에 있는 염증을 제거시켜 준다. 그래서 궤양성 대장염이 있는 환자들에게 섭취를 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