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은 ‘포스트(Post)’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를 감독 혹은 극작가로 부르지 않고, 굳이 ‘사람’이라 통칭하고 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그 모두이면서, 또한 그 모두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스러운 단어로 설명하자면 장진은 ‘꼴리는 대로’ 사는 자유인이고, 90년대 ‘탈주의 시대’가 낳은 가장 멋진 삶의 아이콘이다.
 

그는 대학 때 이미 방송국 코미디 프로 작가로 데뷔해 ‘웃기는 재주’를 발휘했고, <천호동 구사거리>라는 희곡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세 편의 연극(<택시 드리벌><매직 타임><허탕>) 과 두 편의 영화(<기막힌 사내들><간첩 리철진>)에서 연출 실력을 발휘한 ‘끼’ 있는 사내. 한때 그는 배우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으며, 현재는 영화전문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고 있기도 하다. 혹자는 이런 그를 가리켜 ‘천재’라는 단어를 들이대기도 하는데, 넘치는 끼와 재능을 지닌 장진에겐 참 적절한 칭찬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미 서른도 되기 전에 비싼 몸값의 신세대 연출자가 되었다.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릴 때 연출자의 이름으로 흥행의 키워드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림 잡아 이만희 이윤택 김광림 이상우 정도가 그런 레벨을 확보한 부류. 그러나 겁 없는 29세의 청년 장진은 이런 기라성 같은 유명 연출자들과 어깨를 겨루며, 자신의 ‘이름 값’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른바 ‘장진 사단’이라는 닉네임을 달고서.
 

연극과 영화적인 것의 만남
 

장진이 만든 세 번째 연극 <허탕>은 감옥 같은 세상에 대한 은유로부터 시작된다. 감옥으로 설정된 무대는 호텔처럼 아늑한 공간으로 외화되어 있으며, 객석은 쇠창살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다분히 감옥다운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무대 곳곳에는 다양한 프레임으로 시점 샷 된 모니터가 열 개 남짓 설치되어 정통 연극의 화법을 살짝 부정한다. 이것은 한 화면을 통째로 보여줘야 하는, 혹은 프레임 오버 기법을 살릴 수 없는 연극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진의 계략일까.
 

어쨌든 무대에 설치된 수많은 모니터들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1시간30분의 공연시간을 위해 끊임없이 봉사해주고 있었다. 모니터 속의 화면은 때론 ‘둠2(Doom 2)’를 패러디 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때론 사이버 인간의 기계적인 반복행동으로 자유롭게 뒤엉킨다.
 

덕분에 <허탕>은 사실주의 연극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부류를 쉽게 벗어나 있다. 정통 연극의 화법을 변주한 재치 있는 화면 구성. 아마도 이것은 영화에 연극다움을 섞고, 연극에 영화다움을 섞고 싶은 장진의 ‘크로스 오버’ 욕구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나친 알레고리와 눈에 뻔히 보이는 상징은 이 연극이 지닌 최대 약점으로 작용할 듯하다. 감옥으로 은유된 세상은 너무 익숙한 상징 중 하나고, <허탕>의 주제는 객석에 앉는 순간부터 이미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탕>이라는 연극이 너무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대사 치는 맛이 맛깔스럽기로 소문난 장진은 이 연극에도 코믹 대사의 ‘치고 빠지기 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관객들의 혼을 빼앗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진지한 듯하면서도 재미있고, 뻔한 설정인 듯하면서도 새로운 연극이었다는 이야기다.

감옥 같은 세상에 대한 풍자
 

언급했듯, <허탕>의 무대는 감옥이다. 그러나 얼핏 감옥은 감옥이 아니라 최고급 호텔처럼 보인다. 최고급 식사와 컴퓨터 자동 정화 시스템, 배설물로 건강을 체크해주는 최첨단 건강 체크 시스템. 일찍부터 이런 호텔 같은 감옥에 적응해왔던 덕배는 새롭게 입방한 감방 동료 달수에게 감옥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나열한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갇힌 공간’이란 것만 빼면 이곳은 지상 최대의 낙원이나 다름없다고.
 

새로 입방한 죄수 달수는 처음 호텔 같은 감방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점차 그곳에 적응한다.

 

익숙해진다는 것. 이것은 권력과 부조리에 쉽게 항거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속성을 비꼰 재미있는 설정이다. 쉽게 포기하고 또 그만큼 쉽게 안주하는 사람들. 그러나 가짜 행복을 영위하는 그들은 여전히 ‘뭔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곳은 호텔이 아니라 단지 감옥일 뿐이라는 것을. 감옥에 대한 예의를 다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해야 된다는 것을.
 

<허탕>의 주인공인 덕배와 달수에게도 물론 ‘각성의 시간’은 다가온다. 새로 입방한 여죄수 화이는 원래 삶의 각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투입된 일종의 마약 같은 인물인데, 선배 죄수인 덕배와 달수는 그녀의 존재를 각기 다른 입장에서 받아들인다. 달수는 사랑이라는 마약에 흠뻑 빠져 안주하려는 속성을 보이고, 덕배는 그녀를 통해 삶의 부조리한 단면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임신중인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고, 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할 만큼 몸이 망가진 상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싶은 덕배는 그녀를 사이코 드라마의 주연으로 내세워 잃어버린 그녀의 기억을 찾아주는 데 성공한다.
 

그녀가 발설하는 어둡고 음습한 과거의 기억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삶의 모순과 권력의 속성을 일깨우는 각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허탕>은 감옥 같은 세상에서 결코 안주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뭔가를 깨우친 자는 감옥 밖으로 탈출하고, 안주하려 노력하는 자는 파멸을 맞을 거라는 경고성 메시지가 마지막 라스트신을 장식하고 있다. (황희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