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7  2010

 

 

 

 
 
시래기 / 바리톤 송기창
(유영애 작시, 정덕기 작곡, 피아노 엄은경) 
 
 
 
껍데기라고 얕보지 말라
함부로 함부로 얕보지 말라
정월이라 대보름날 오곡밥에 아홉 가지
묵은 나물 중에 시래기가 으뜸 아니던가.

대관령 맑은 바람 햇살이 키워온
고운 속살 다 내주고 남겨진 푸른 자락
헛간에 걸려서 찬바람 맞다가
된장과 된장과 눈 맞은 속 깊은 속 깊은 사랑이라
아름다운 우리네 사랑이라
푹 삶아야 한다. 잘 우려내야 한다.

널부러진 무청 등짝 널부러진 무청 등짝 
뒤척이어 행궈낸 잎사귀
어머니의 허기진 삶처럼 
눈물같이 달라붙은 시래기 한줌
질긴 껍데기 벗겨내고 갖은 양념 더하여
아침상에 내 놓으며

여보 한번 잡숴봐 얼매나 맛있는디

모진 세월 지나면서 어머니의 주름같이 
굵게 패어 출렁이는 고향의 푸른 맛이여
고향의 푸른 맛이여





바리톤 송기창

경원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한국 예술 종합 학교 대학원  졸업, 
이태리 파르마 아카데미아 수료, 
프랑스 파리 에꼴 노르말 최고 연주자 과정졸업.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경원대학교 동대학원 ,배재대 출강하여 
활발한 공연활동과 함께 후학양성.
 

 

 

 

 

 

 

 

 

 

 

 
 
 

 

 

내가 울면 너는 바다가 되어다오

청암 방효필 시인

 

내가 울면

너는 바다가 되어다오

 

내 눈물 삼키어

바다가 된 너의 집에

닿게 하리

 

미처 해보지 못한 사랑을

빚어내어

저 바다 지평선까지

수없이 부서져 내린

저 파도까지

 

정녕 사랑하고 싶었노라고

정녕 그리워했노라고

그 한마디 못했어라

 

내가 울면

너는 바다가 되어다오

나와 함께 울

바다가 되어다오

 

 

 

 

 

 

 

 


 

 

 

 

한국시간으로 6월 8일 새벽2시. 드디어 아이폰 4G(아이폰 HD)가 스티브 잡스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오는 날입니다.

 

그런데 삼성이 6월 8일 오전 10시에 갤럭시S 런칭 행사를 갖는 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정면 대결이란 예기죠. 

 

삼성은 작년 아이폰3GS랑 옴니아2랑 맞붙어서 사실상 패배 한 것에 대해 이를 갈고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번에도 지면 사실상 국내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을 내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이제 애플에 대항하여 삼성이 무시하지 못할 강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금껏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차세대 아이폰과의 정면 대결을 통해 국내 시장 뿐 아니라 전세계 시장을 단번에 휘어 잡으려 하는 겁니다.

 

애플은 올해 아이폰4G를 2400만대를 팔아 치울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팔린 아이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하네요.

삼성은 110여 개국 동시 출시에 벌써 100만대 선주문이라고 합니다. 한 국가당 10만대만 해도 1000만대가 넘어가는 물량입니다. 하반기 스마트폰 시장 전망을 고려하면 전체 스마트폰 시장의 약 30%정도 되는 양이라고 하네요. 둘다 엄청난 물량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플랫폼, 안드로이드 vs 아이폰OS

 

아직 아이폰4G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스펙상으로는 갤럭시S가 앞선다는 예기가 많습니다. 삼성도 이점을 집중적으로 내세우고 있죠.

아이폰 시대로 접어 들면서 스마트폰은 하드웨어 전쟁에서 플랫폼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갤럭시S vs 아이폰4G는 안드로이드2.2 vs  아이폰OS 4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어플을 이용한 활용도가 떨어 진다면 스마트폰으로써 매리트는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이런 면에서 아직은 아이폰OS를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삼성입장에서는 스마트폰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구글에 기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형국. 감출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앞으로의 스마트폰 시장은 누가 주도 할까? 

 

아무튼 이번 6월은 정말 재미있는 달이네요.(언)

 

 

 

 

 

 

 

 

 

 

의외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이로 인한 전 세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지속될 수 밖에 없어 안타깝다.

 

그런 가운데 나는 얼마 전 [한국 은행의 경영 성과와 중소기업 대출 관계]에 관한 한 연구 자료를 본 일이 있다.

 

그 가운데 [비 올 때 우산을 빼앗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켜 중소기업을 살리고 한국 경제의 위기 극복에 기여했으며 자신도 우뚝 선 한 은행이 돋보이고 있음을 발견 했.

 

이 은행은 금융위기 가운데서도 다른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을 기피할 때 시중은행의 두 배를 중소기업에 대출했다.

 

총 대출의 80%였다. 중소기업 대출시장 점유율은 1위였고 전체 은행 중소기업 대출 순증액의 53%를 공급했다.

 

그럼에도 실질고정 여신 비율을 제외하고는 이익, 생산성 등 경영 전반에 걸쳐 우수한 성과를 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은행은 금융위기 중에도 중소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경영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사실 중소기업 대출이나 투자는 길 없는 길을 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데 오늘 날의 금융위기를 따져 보면 길 아닌 길을 갔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라고 말 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비롯한 각종 위기의 근본요인은 한 가지다. 정부건, 금융회사건, 기업이건 당시의 경제주체들이 [길 아닌 길]을 갔기 때문이다.

 

미국 발 금융위기는 모기지 대출회사와 대형 투자은행의 과도한 경쟁과 만연된 도덕적 해이, 인기에 영합한 정부의 주택정책과 금융감독 의 직무 실패.  여기에 서민까지 가세한 부동산투기 붐이 어우러져 초래한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경제주체의 도를 넘은 욕심 때문이었다. 길 아닌 길을 함께 간 결과였다.

 

역사는 길 아닌 길을 가서 위기를 겪은 문명이나 나라 그리고 조직의 그 후 행보에 따라 다른 기록을 남겼다.

 

재기에 성공한 문명이나 나라 조직은 ‘길 없는 길’을 갔다.

반대는 여전히 길 아닌 길을 갔거나 그저 쉽고 편 길 곧  ‘있는 길’을 갔다.

 

앞서 살핀 한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과 투자를 우선했던 것은 한마디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길 없는 길을 가는 선구자적 경영이 있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선구자들이 민족이나 인류에 희망과 빛을 주었듯이 중소기업 대출과 투자는 성장동력의 확충과 고용창출을 통해 한국 경제에 희망과 빛을 준다는 경영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위기 때일수록 우리는 공헌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위기 때일수록 우리는 선구자적 자세로 고단하고 힘들지만 [길 없는 길] 선택해야 한다.

 

세계역사는 [개척한 문명, 나라, 조직]만이 살아남고 번영했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힘들고 고단할 때일수록 이웃에게 공헌하며....

없는 길을 닦아나가는 개인이나 기업은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 남게 될 것이다.(장재언)

 

 

 

 

 

 

 

 

 

 

 

 

 

 

 

 

 

 

 

 

 

 

 

 

 

San Quentin Prison

 

 

 

 

1985년 5월, 미국 L.A 코리아타운 나는 아내와 그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나는 옆구리의 권총을 확인 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Extra탄창에 일곱 발의 총알을 더 채워 넣었다. Extra 탄창 까지 합치면 모두 14발- 이만하면 그런대로 든든하였다. 나는 주차장으로 나가 자동차에 시동을 켜고 다시 한번 생각하였다.
 

꼭 이렇게 해야만 할까?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자동차의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불법체류자였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나와 결혼으로 인하여 영주권을 취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혼 2개월 후 드디어 이민국으로부터 아내의 영주권이 나왔다. 그러나 아내는 바로 다음 날 내가 직장에 간 사이에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가출해 버렸다.
 

그녀는 나를 이용하여 영주권을 얻기 위하여 사기결혼을 했던 것이다. 나는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나의 자존심을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 놓다니..   나는 변호사를 찾아가 결혼 무효소송을 제기 하였다. 이혼보다 결혼무효소송을 할 경우 아내의 영주권은 자동취소 되어 그녀는 추방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취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나를 용서 하지 않았다.
 

코리아타운에서 암약 하는 갱스터를 고용하여 나를 위협 했다. 결혼 무효소송을 취소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해결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기결혼에 협박까지?  도저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었다. 나도 권총을 구입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이 당시 내 심정 이었다. 그러나 나는 갱스터들과 맞설 만큼 조직이나 힘을 갖고 있지 못했었다.  나는 1년6개월간을 그들의 협박과 공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피해 다니는 일이었다.
 

나는 결국 한국으로까지 피신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 가 되어 있었다. 아내가 3명의 갱들을 이끌고 나의 부모님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그녀는 옛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셨어요? 걔 어딨어요? 뭐요?! 한국 갔다고요? 꼭 전하세요. 결혼무효소송 취소 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 생긴다고요, 아셨지요 !"

나는 한국에서 돌아와서 그 말을 듣고 내가 피 한다고 해서 해결 될 일 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나는 찾아 가기로 했다,

그러나 두려웠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 권총과 총탄을 확인했다. 식당에 있다고 했던가? 아내는 어느 사내와 식사 중이었다 사내가 앞을 막았다.

 

"당신, 누구야?"
 

"나 ? 저 여자의 남편인데 당신은 누구야?

그러자 사내의 손이 그의 허리춤으로 들어 가는 것과 동시에 아내가 벌떡 일어 나는 것. 그리고 내가 권총을 빼 드는 시간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야 ! 웃기지마 어따대고 수작부려.!"

 

아내의 그 말은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명한 유언이 되기도 하였다. 탕! 탕! 탕!  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나는 살인죄로 체포 되었다 검사와 변호사의 법정공방이 2년4개월간 계속된 끝에 결국 무기형으로 떨어졌다. 내가 사기결혼 당하고, 위협 받은 것을 다 감안 한다 해도 확인사격은 용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삶을 포기하고 두 번의 자살을 했지만 모두 미수로 끝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는 한 때 억울한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가 있었다는 샌퀸틴 감옥으로 배치되어 갔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무기수들만 가는 샌퀸틴 감옥에서 삶을 포기한 무기수들의 생지옥의 삶을 목격했다.

 

죄수들간의 빈번한 살인, 마약, 성폭행, 인종차별 그리고 사방이 꽉 막힌 장벽.  그런 곳에서 내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을 가진 순간 꽉 막혔던 하늘이 열려 있음을 봤기 때문이다.위에 계신 그 분을 구주로 받아 들이는 순간 하늘이 열리며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살아난 것이다.
 

1991년 미주 중앙일보에 나의 감옥 수기가 6개월간 연재되어 교포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확실한 연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새 천 년을 눈 앞에 둔 해였을 것이다. 우연히 안일권목사님의 신앙 수기를 읽었다. 미국교도소에서 안일권목사님과  나는 책을 통해서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2007년 2월 22년 만에 나는 기적적으로 가석방되었다. 한번 무기수는 영원한 무기수인 미국에서 내가 석방된 것은 기적으로서 지금도 미국교도소에서 한인재소자 선교 사역을 하시는 한인목사님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나를 만나면 하나님 은혜요,기적이라고 한다.하나님께서는 나같이 쓸데 없는 자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석방하셨을 것이지만 내 석방 뒤에는 나의 어머니의 눈물의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LA 충현교회 권사님이시지만 또한 장로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나의 큰형님이 씨애틀 한인교회 장로님였고 동생이 LA 충현교회 장로여서 장로의 어머니로 불리셨지만 한편으로는  [무기수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무기수의 어머니로서 내가 복역한 2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위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셨던 것이다.

 

석방 후 한국으로 추방되어 10년 전 책으로 만났던 안일권목사님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읽었다고 생각하던 안일권목사님의 신앙수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콜중독자 재활사역을 하시는 안일권목사님의 세계 십자가 선교회를 찾아가서 신앙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성경을 열심히 읽고,기도 만 해왔지 Q.T 가 뭔지도 몰랐었다.  나는 Q.T를 통해 성경을 내 중심대로 해석 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그 잘못된 성경지식,잘못된 믿음을 바로 잡아 나갔다. 나의 근본적인 문제는 내 안에 있는 죄 때문 이라는 걸 알았다. 

또한 믿는 자의 삶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기 위한 것 이라는 잘못된 믿음도 교정 하므로 인해서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새롭게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의 모든 옛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고 내가 새로 태여 난 것이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나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분의 본성이시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믿음이라고 하셨다. 3박4일간의 [영성교육] 때였다.

 

참회의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많은 갈등과 묵상을 하면서 결국 죽은 아내 에게 참회의 편지를 쓰기로 하였다.  나는 감옥생활 22년 동안 단 한번도 그 사람을 생각 해 본적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날 기미가 엿보이면 형이상학적 이상한 기도로 비켜 가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마음 한 구석에 꼭꼭 숨기고 하나님께 회개 할 일이 생기면 회개 하기 좋은 것들만 골라서 [맞춤형회개]를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성경을 내 중심대로 잘못 해석 했기 때문이다.
 

나는 참회의 편지에서 그런 것 까지 모두 고백하였다. 죄책감까지 묻어 버려야 했던 회개 하지 않은 죄의 장애물, 나는 참회의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용서 해 주십시오 하고 되 뇌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용서 받을 수 있다면...
 

그 다음날 저녁 안목사님의 안수기도와 통성기도 시간에 참회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어디서 그런 많은 눈물이 나올 수 있었을까?   성인 된 이 후 그렇게 많이 울어 본 적은 없었다. 

 

아침이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하나님께서 새 날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4월6일 이 날을 내가 어찌 잊을까?
십여 년 전 안일권목사님의 신앙수기를 읽었는데 바로 그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될 줄이야... 하나님의 그 멋진 계획에 놀라울 뿐이다.  전율을 느낀다. 
 

지금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도소 선교 사역과 인터넷선교, 경찰서 유치장 선교를 하고 있으며 특히 미주 한인무기수들의 한국 이송을 추진하고 있다.

 

자전적 신앙수기 [회색 벽에 쓴 독백]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미국에 계시는 어머니는 나에게 [에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을 보내 오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렇다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22년 동안 부르짖어 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누가 나의 어머니를 [무기수의 어머니]라고 부를까? 이제 어머니는 [주의 종의 어머니]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셨던 사건이 있었다. 지난 10월24일 인천에서 [하늘문교회]를 섬기는 강향숙목사와 결혼을 하게 하여  믿음의 동역자로 붙여 주신 것이다.

 

무기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요셉과 같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이 종의 신분에서 총리가 된 것은 꿈이 있었기에 종의 신분이었지만 종처럼 살지 않았던 것처럼내가 무기수이면서도 무기수처럼 살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포기하지 않은 믿음의 꿈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

장님이 눈을 뜨는 것은 분명  기적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펄펄 뛰어 다니는 것도 기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예수를 만나 그 분이 내 믿음의 주인이 되었을 때 내 삶이 변화 된 것이 기적 중에 기적인 것이다.

 내 인생막판에 시작임을 알려주시며 아름다운 [인생역전]을 시켜주신 하나님.  나에게 [전화위복의 복]을 주신 하나님. 회복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린다.(이본-Jay Lee)

 

 

 

 

 

 

 

 

 


 

실리콘웍스 한대근 대표

 

 

‘바람은 딴 곳에서 불어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는 김수영의 『풀』 구절을 되새기는 일이 유난히 잦은 곳이 바로 반도체 분야다.

 

출혈경쟁 끝에 파산한 독일 반도체업체 ‘키몬다’의 뉴스가 아니더라도 반도체 업계 하면 규모의 경제, 치킨 게임이 연상되게 마련이다. ‘반도체 영역=단순한 물량 공세 그 자체’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에서 꼭 규모의 경제가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설계 분야는 기술력만 확실하다면 팹리스(공장을 갖고 있지 않은 반도체 설계 전문회사) 형식의 ‘작지만 강한 업체’가 변화무쌍하게 성공 역사를 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허를 찌르는 발전의 흐름(바람)을 탈 수 있는 감각,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오는 구원을 잡을 실력을 갖춘 반도체 설계 기업이 최근 눈길을 끌고 있다.
 

6월 8일 코스닥 상장 예정인 실리콘웍스가 그 곳이다.

 

 

 

이 회사는 애플에 부품을 납품하는 토종기업으로 유명하다.

 

실리콘웍스는 LCD(대형액정화면)에 들어가는.....

 

핵심 반도체인

드라이버 IC

타이밍 컨트롤러(T-CON)

그리고

전원관리IC(PMIC)를 제조....

 

LG디스플레이와 소니 등 글로벌 디스플레이 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2002년 세계 최초로 LCD용 멀티채널드라이버 아키텍처라는 개념을 독자적으로 설계한 후

2005년에는 외주양산시스템을 구축해

2006년 T-CON 개발,

2007년 슬림노트북용 칩온글레스 직렬통신기술 등 발전을 거듭해 왔다.
 

2009년 실리콘웍스는 매출액 1892억원, 영업이익 362억원, 당기순익 385억원을 달성했다.

2006년 이후 연평균 매출 성장률은 78%에 이른다. 국내 팹리스 업체의 경우 매출액이 1000억원을 넘는 업체들이 흔치 않음을 감안하면 팹리스는 영세하다는 상식의 벽을 깬 셈이다.
 

2008년 들어서는 전자종이(EPD) 등을 국산화하면서 사업 확대뿐만 아니라 ‘평판디스플레이 모든 영역의 제품 라인업’을 구축한다는 전략 실현에 전력을 기울였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할 LED(발광다이오드)용 드라이버IC도 개발을 마쳐 차세대 먹을 거리도 이미 개발, 후발업체와의 격차를 넓히고 있다.
 

이러한 성장동력은 다름아닌 한대근(사진) 대표의 이력을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대표는 전자공학도 출신으로 LG반도체 수석연구원을 거치면서 사실상 국내 반도체 산업 성공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이러한 기술력과 글로벌 감각을 기반으로 ‘IT버블’의 역경을 헤쳐내고 이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실리콘웍스의 드라이버IC는 LG디스플레이 내에서 46.7%(2009년 기준), 세계시장에선 11.3%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타이밍 컨트롤러는 LG디스플레이의 50.1%, 세계시장의 11.1%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두 제품은 LG디스플레이를 통해 애플 아이패드에 공급돼 최근 아이패드 수혜주로 꼽히고 있다.
 

이런 성공에도 아직 실리콘웍스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분위기가 아니다.

현재 상장을 앞둔 실리콘웍스는 여기서 유입되는 자금 역시 R&D에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대표적인 구상이 R&D 인력 50여 명의 추가 채용이다. 지난 10년간 반도체 업계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독자적 기술 구축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는 만큼 재투자를 한다는 복안이다.
 

아울러 LG디스플레이와 애플 등 국내외 대기업들에 납품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매출채널 다변화에도 나선다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한 대표는“이번 상장을 계기로 그 동안 축적된 노하우와 기술력을 기반으로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엽 프라임경제 기자)

 

 

참고: 무설비업체 [無設備業體, fabless]

‘fabricationless’의 약어로, 자체 제조 설비를 갖고 있지 않은 반도체 판매업체(fabricationless semiconductor vendor)를 가리키는 용어.

반도체 칩을 설계하고 판매는 하지만, 제조는 주문 생산 공장이라고 불리는 외부의 반도체 제조업체에 주문한다. (언)

 

 

 

 

 

 

 

 

 

 

 

 

 

 

 

 

 

 

 

 

 

사진이 안보일 때 이렇게 하십시오

 

1. 사진이 절반만 보일 때는 화면을 다시 한번 여십시오.(Refresh 단추 클릭)

2. 어떤 사진 한 장이 안보이고  X 표가 보일 때는 그림 위에 마우스포인터를 올리고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한 후 메뉴 중  Show Picture 를  클릭하십시오.

 

 

 

 

 

 

강물에 비친 두 모자(母子)가 기도하는 모습

 

 

 

 

 90도 회전시킨 사진

 

 

 

 

 

 

‘추아오의 춤추는 악마들’

점점 섞여가는 기독교의식


 3일 베네수엘라 아라구아의 추아오(Chuao) 코코아 농장에서

열린 ‘추아오의 춤추는 악마들(Dancing Devils of Chuao)’ 행사에서

한 남성이 가면을 쓰고 있다. 이 행사는 아프리카 캐리비언 지역의

의식과 음악이 기독교의 성체 축일(Corpus Christi) 행사와

결합돼 만들어졌다.

 

 

집 앞이 바다가 됐네…

한국 네티즌본부카페 작성: ← 변조방지표시

 4일(현지 시간) 폴란드 바르샤바 외곽 파이세츠노(Piaseczno)의

홍수 피해 현장에서 한 남성이 고무 보트를 타고 있다.

 

기름오염 펠리컨 구조


세계 환경의 날인 5일 미국 어류야생동물 학자인

케이라 디베네데토가 루이지애나주 그랜드 아일에서

기름에 오염된 펠리컨을 구조하고 있다.

야생학자들은 이 펠리칸을 구하기 위해 두시간이나 쫒아 다녔지만

날이 어두워 실패하고 다음날 아침 다시 시도하기로 했다.

 

잡스 “PC가 시골 트럭이면 아이패드는 도시 승용차”

한국 네티즌본부카페 작성: ← 변조방지표시

 

 미국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가 1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남쪽 팔로스버디에서 열린

정보기술업계 최고 임원들의 모임 D8회의에 참석해

미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애플사의 야심작인 아이패드를 설명하면서

“PC가 농업용 트럭이라면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 PC는

도시의 승용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탱크 차량 뒤쫓는 소년

한국 네티즌본부카페 작성: ← 변조방지표시

 3일(현지 시간) 인도 아그라에서 자전거를 탄 소년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탱크 차량 뒤에 서 있다.

 

총격전 벌어진 카라치 라야리 지역

한국 네티즌본부카페 작성: ← 변조방지표시

2일(현지 시간) 파키스탄 카라치의 리야리(Lyari) 지역에서

사람들이 라이벌 폭력 집단 간의 총격전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파키스탄 일간지 던(Dawn)은 이번 총격전으로 인해

최소 6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사람 중심 자유시장경제’로 경제발전 초석

한국 네티즌본부카페 작성: ← 변조방지표시

1981년 동아일보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대표단’.

왼쪽부터 이원홍 KBS사장(이하 당시 직함),

이원경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고문, 박영수 대표단장,

조상호 대한올림픽위원장, 정주영 전경련 회장, 유창순 무역협회장.

 

 

 

 

 

 

 

 

 

 

 

 

안될 것 없잖아

Why Not?

 

Why Not?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테마는 산책 중이던 시카고 대학의 두 경제학자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명이 땅바닥에 떨어진 20달러짜리 지폐를 발견하고 집으려고 하자, 다른 한 명이 제지하며 말했다.

 

"그건 위조지폐야. 진짜라면 누가 벌써 집어갔겠지." (29p)

 

 

배리 네일버프 외 지음, 이창식 외 옮김 '안될 것 없잖아?' 중에서 (세종서적)

 

 

"좋은 아이디어들은 이미 모두 나와버렸어..."


"그렇게 좋은 생각이라면 왜 아직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겠어..."


새로운 일을 검토할 때, 우리의 걸음을 붙잡는 내면의 목소리들입니다. 창의성을 억누르고, 전진을 가로막는 생각들이지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지폐를 보며, "그건 위조지폐야. 진짜라면 다른 사람이 벌써 가져갔겠지"라고 말하는 경제학자.

 

누구도 자신이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하지 않겠지만,

현실에서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는 창의적인 발상도 불가능하고,

새로운 일의 시도도 힘들어집니다.


어떤 아이디어가 아직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돈을 위조지폐라고 확신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소설을 쓰고, 음악을 작곡하고, 수채화를 그리는 기술이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음에도, 우리는 '그 예술이 그처럼 훌륭하다면 이미 옛날에 창작되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예술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로버트 케네디는 "어떤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왜 저래?'라고 묻는다. 나는 이전엔 없었던 것을 꿈꾸며 '안 될 것 없잖아?'라고 말한다"고 말했습니다.


"안 될 것 없잖아?"와 "그건 위조지폐야. 진짜라면 다른 사람이 벌써 가져갔겠지"의 차이는 분명하지요.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그것을 가로막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 때는 '길바닥에 떨어진 돈' 일화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글쓴이/ 오마리

 

샌프란시스코대학(불어/패선디자인 전공)

The Fashion Works 경영

현재 카나다 거주 아마추어 사직작가

 

 

 

서울시가로 진입해 들어오고 있는 북한군 1개 탱크부대

    이들은 서울에서 불과 40km 떨어진 의정부를 통해

단 3일만에 서울을 점거했다.

    당시 국군의 기갑부대는 한 대의 탱크도 보유하지 못했고

장갑차 27대가 고작이었다 (1950. 6. 28)(편집자 주)

 

 

나는 6ㆍ25 동란 이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6ㆍ25나 1ㆍ4 후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모두들 그 때는 초근목피로 생활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공산당이나 국군에 동조한 죄로 가족들이 죽었다, 이북으로 납치되었다고 하는 가슴 아픈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다행이었는지 내 가족은 이러한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고 나 또한 6ㆍ25 동란 이후 자라면서 먹을 것이 부족했다거나 입을 옷이나 잠자리가 불편했던 기억도 없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입니다. 어려서부터 받은 반공 교육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대부 격인 소련이 무너지면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정치이념인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의 멋진 이상도 굶주림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나는 해외에 살면서 한국의 명절은 대체적으로 잊어버리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지만 6ㆍ25와 광복절은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내 생일도 잊어버리는 내가 이 날들은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기억하다니, 혼자 웃을 때도 있습니다. 나는 6ㆍ25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두 노래를 기억해 냅니다.

 

우리 세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이 노래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 중의 한 노래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6ㆍ25에 대한 노래입니다. 또 하나의 노래 ‘우리의 소원’은 참으로 아름다운 선율, 가사 또한 잔잔하여 가끔 큰 소리로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이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거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달나라에서 살다 온 한국인이 아닐까요? 초등학교의 기억도 희미해져가는 내가 초등학교 때 얼마나 이 노래를 자주 불렀으면 이 나이에도 멀고먼 이국에서 가사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남북통일은 우리의 소원이었고 우리의 숙원입니다. 그 당시 반공의 중요성과 함께 통일은 우리의 피가 끓는 염원이었던 것입니다.
 

통일이 가까이 온 것처럼 낙관적이던 10년 동안 통일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하도 말이 그럴싸하게 들려 나도 처음에는 아, 통일이 드디어 되려나 보다, 마음이 들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의 동족이니 북한의 바람도 우리의 바람과 똑같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던 우리들의 무지함이나 지나친 낙관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천안함 사건으로 다시 정신이 번쩍 든 기분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생명들을 억울하게 거두어 갔으니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금강산의 남한 쪽 재산을 강제 동결한 북한 정권의 허구성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남한에 아직도 결식아동들이 많다고 합니다. 소년소녀 가장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거노인들이 의료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비가 새는 방에서 기거한다고 합니다. 천문학적인 원조금, 북한에 10년간 원조해준 금액이면 남한에 아직도 존재하는 심각한 빈곤층에 많은 혜택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한의 희생을 통하여 이북에 주어진 원조의 대가는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현재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무언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미국 남부 애리조나 주, 나바호 밸리 근방을 가다 보면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나게 됩니다. 나는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저런 황무지에서 인디언들은 어떻게 생명을 연장했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내 85개 인디언 부족 중에서 가장 문명 수준이 높고 인디언 부족 중 유일하게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는 체로키 부족은 어느 날 침탈자인 미국정부의 인디언 탄압정책에 의하여 그들이 살아온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오클라호마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 당한 것입니다.
 

말은 아름다운 인디언 보호구역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메마른 땅에 나무도 풀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1,300 킬로미터의 머나먼 여정, 사막 길을 모카 신발 한 켤레 혹은 맨발로 걸어갔던 이들은 그 길을 눈물의 여로라고 부른다 합니다. 행진 도중에 추위와 굶주림과 병, 사고 등으로 죽은 체로키 인디언이 무려 4,000여명이었습니다. 나는 이 눈물의 여로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한국동란과 1ㆍ4 후퇴 때의 피난 행렬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감동에 젖어 읽었던, 체로키 인디언의 자손이 쓴 자전적 소설에서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이렇게 자주 말하였다 합니다.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 자기 종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는 법.”
 

체로키 인디언. 팔십 먹은 할아버지도 부족의 정체성에 우려를 하며 자손에게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6ㆍ25 동란, 동족상잔의 비극을 잊어버리고 허황된 말에 현혹되어 우리의 현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린아이들이나 젊은 세대들을 위한 반공교육은 실종되었나요? 한국인의 정체성은 결코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태생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근원이 무엇인지 지난 날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통일은 더 요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을 염원한다면 지난 일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공교육도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마리)
 

 

 

 

 

 

 

 

 

 

 

 

 

 

 

 

 

 

팀 버너스 리

 

인터넷과 웹은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인터넷 주소에 쓰이는 WWW 즉 웹으로 통칭되는 월드_와이드_웹이 인터넷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다릅니다.

 

월드_와이드_웹(www)은 1993년 4월 마지막 날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공식적으로 선을 보였습니다. 

35세의 연구원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1990년 11월 13일 인터넷에서 각종 자료를 서로 연결하는 데 성공한 뒤 2년 6개월을 매달려 연구한 끝에 이를 실용화한 것입니다.

 

월드_와이드_웹(world_wide_web 즉 www)은 요즘 통칭 ‘웹’으로 불립니다. 인터넷과 웹이 같은 것으로 알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인터넷은 세계의 컴퓨터를 연결한 망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불과 10 여 년 전만 해도 인터넷을 이용하려면 통신(Telnet), 파일전송(FTP), 편지 보내기(E-mail), 뉴스 보기 등의 기능을 따로 따로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버너스 리는 흩어져있는 파일들을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해 오늘날의 인터넷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URL.  HTTP.  HTML 등의 개념을 혼자서 창안해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 모두는 빌 게이츠 이상으로 그에게 감사와 찬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텔레그래프 지가 그를 현존하는 최고의 천재로 선정한 것은 전혀 물의가 될 수 없지요..

 

인터넷이 나오기 전에는 PC통신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대화했습니다. 그것만 해도 대단했습니다. 하이텔, 천리안에는 각종 동호회가 생겼고 그 동호회의 회원이 되어 온라인에서 새로운 만남이 가능했습니다. 젊음과 늙음을 나누는 기준이 PC통신을 하는지 여부였고, ‘번개’가 시작된 것도 그때였고요.

 

미국에서는 컴퓨USA, 프로디지 등의 통신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만 이 후 인터넷이 이렇게 우리 세상을 지배할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인터넷은 세상을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지만  월드_와이드_웹 즉 www가 없었으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버너스 리는 돈과 명예에 욕심을 낼 수도 있었지만 웹 기술을 무료로 개방하고 MIT에서 학자의 길을 갑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도 극구 피했고 사생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내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이고 두 아이가 있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을 따름입니다.

 

그는 2004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데 이어 핀란드 정부로부터 ‘제1회 밀레니엄 기술상’을 받았을 때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해 [내가 특허권을 주장했으면 오늘날 웹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며 작게 쪼개진 웹들이 대신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거대한 세력이 월드와이드웹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이해 관계에 따라 찢어졌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W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성과에 작은 일을 더했을 뿐]이라며 [웹을 만들 때에도 수많은 사람과 함께 작업했으며 이후 웹이 확산된 것도 수많은 정신이 합쳐져서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버너스 리는 [우리는 할 일이 너무나 많지만 상상력의 부재가 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라며 [학문의 길을 갈 사람은 늘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팀 버너스 리에 의한 웹 탄생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웹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으로 며칠 만에 뚝딱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부터 늘 [정보의 연결]을 생각하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한 팀 버너스 리의 오랜 열정에 의해 탄생한 것입니다.

 

'인콰이어' 프로그램부터 따져도 십 년, 젊은 시절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고생한 끝에 나온 것이 웹입니다. 우리는 웹이 나오기 전까지 하이퍼링크를 연구한 수 많은 사람이 있었고, 젊은 시절을 바쳐서 웹을 연구한 팀 버너스 리와 같은 열정적인 학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이퍼링크과 웹 구현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바쳤는지 기억한다면 웹을 사용하는 우리도 좀더 좋은 문화생산에 노력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에 동감할 것입니다.

 

팀 버너스 리에 의하면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전 세계가 네트워크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서로의 자료를 공개하고 이렇게 공개된 자료를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해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단지 URL의 우주에 하이퍼텍스트라는 교통수단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겸손의 말을 하면서 [인터넷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이 영광을 함께 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노력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동감한다면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지식을 공개하고 공유하면서 좀더 나은 문화생산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장재언)

 

 

 

 

 

 

 

 

 

 

 

 

 

 

 

 

 ★ 오늘의 영어회화 표현 ★

 

"Money doesn`t grow on trees."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니?

  

   

 

 

● Point Expression!!!!!!!!!!!!!!!!!!!!! (핵심 표현)

  

Money doesn`t grow on trees.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니?

 

어른들께서 절약의 미덕을 강조하시며 주로 하시는 말씀 중에 ‘돈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줄 아느냐’또는‘어디 돈나무라는 게 있는 줄 아느냐’라고 하시죠. 이런 비슷한 표현이 영어에도 있습니다.

바로 ‘Money doesn’t grow trees’인데요, 직역을 하면, ‘돈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라는 말이죠. 동사‘grow’는‘성장하다, 자라다’라는 말이고, ‘나무에서, 나무 위에’라는 의미로 전치사 on을 씁니다.
 

 

*돈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야.
You think money grows on trees?
There’s no such thing as money tree.

 

 

● Conversation  (대화)

 

Max: Are you going to buy that expensive suit?


Joy: Sure. I’ve got my credit card.

       You should buy one, too.


Max: I don’t have enough money.

       Money doesn’t grow on trees.


Joy: Yeah, but I really want to buy that suit. 

 

맥스: 그 비싼 양복 살 거야?
조이: 물론이지. 나 신용카드 있어. 너도 한 벌 사
맥스: 난 돈이 넉넉하지 않아서.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니?
조이:
맞아. 하지만 난 정말 저 옷이 사고 싶어.

 

       (해석은 문장을 익힌후 드래그해서 보세요! ^^ )

 

 

● Vocabulary (어휘)

     expensive 값비싼

 

 

 

 

 

 

 

 

 

 

 

 

 

 

 

 

 

 

 

 

 

 


 

1977년에 발표한 미국의 맥거번 보고서는, 미국 국민의 식생활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도 남았다. 미국 국민의 99% 미네랄 결핍해 있다 했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은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대부분 곧잘 잊어버린다. 우리가 먹는 맛 좋은 음식이 우리의 두뇌에 어떤 악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 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1979년, 미국 뉴욕시의 아동 100만 명을 대상으로, 식사에 관한 대 조사를 실시했다.
 

뉴욕시 학구에서는 교내식당에서 아침과 점심을 먹는 아동이 많았는데, 그 식사내용을 변화시켜, 학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4년에 걸쳐 조사했던 것이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의 교내 식당의 메뉴를 보면, 햄버거, 프렌치-프라이, 핫도그, 감자-칩, 후루츠-펀치, 초코레트-밀크, 코카콜라 이었다.
 

조사를 시작한 첫해는, 먼저 동물성-지방과 설탕의 양을 줄였다. 육류의 지방부분을 잘라내고, 식품에 함유된 설탕은 11%이하로 하고, 빵은 식물섬유가 풍부한 것으로 바꾸었다. 1년 후, 학력-테스트를 했는데 평균점이 39점에서 47점으로 무려 8점이나 올랐다.
 

이것은 당시의 전(全) 미국을 통 털어서, 1학구의 평균점이 1년간에 오른 비율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2년째는 1년째의 메뉴를 변경, 합성착색료와 합성감미료를 사용한 가공식품을 식당에서 추방했다.
 

그 결과 평균점이 47점에서 51점 까지 상승, 또 4점이 올라, 조사개시전의 성적에 비해 무려 13점이나 올랐다.
 

3년째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2년째와 똑 같은 내용의 식사를 계속했는데, 평균점이 2년째와 같은 51점이었다.
 

마지막 4년째는 합성보존료를 첨가한 가공식품을 모두 추방했다. 그러니 평균점이 다시 상승, 55점이 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모리야마-아키츠구 지은 [미국은 왜 암이 감소하는가](현대서림, 2003)에 나온 글이다.
 

이를 조사 분석한 “알랙산더-시에라스”씨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뉴욕학구는 이 4년 사이에 교사의 월급을 올렸거나, 교사1인당 학생 수를 줄였거나, 교과과정의 내용을 변경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변한 것은 오직 학교 내의 식사내용 뿐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식사의 파워가 학력시험 성적을 올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아동들이 성적에서는 학교의 톱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식당을 싫어해서 집에서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학생들보다 평균점이 무려 11점이나 오른 것이다.
 

집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 하면, 손으로 만든 반찬이 몇 가지 들어있어 영양밸런스가 어느 정도 잡혔다고 상상할지 모르지만, 미국 뉴욕 주부들은 다르다.
 

그들 대부분 직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빵에 햄 또는 쨈 같은 간단한 샌드위치, 패스트 푸드점에서 판매하는 햄버거와 튀김감자 등 조사 전의 교내식당과 비슷한 내용의 도시락을 먹은 것이다.
 

 

 

 

 

 

 

 

 

 

 

 

 

 

12일 새벽 OC한인 다 모여라

 

 

미국 캘리포니아  오랜지카운티 풀러톤

은혜한인교회에서 즐기는 세계인의 축제.
 

2010 남아공 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예선 3경기 합동응원
 

합동응원전을 기획한 OC한인회와 OC체육회 민주평통 등 OC 지역 9개 한인단체로 구성된 준비위원회(위원장 정철승)와 응원 장소를 제공하기로 한 은혜한인교회(담임목사 한기홍)측은 2일 모임을 갖고 응원 준비 세부 사항을 조율 점검했다.
 

은혜한인교회 본당은 2400석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각종 공연 콘서트가 가능한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 개인별로 좌석이 설치돼 있고 정면에 300인치 크기의 대형 프로젝션 스크린이 그리고 옆면으로 2개의 대형 스크린이 갖춰져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관전할 수 있다.
 

편 교회 본당에서 응원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교인도 있다고 한다. 

 

▷주소: 150 Brookhurst Rd. Fullerton CA 92833

▷문의: (714)446-6200


 

 

 

 

 

 

 

 

 

 

 

 

 

 

 

 

 

 

 

아침반 9:30

오후반 2:30

저녁반 7:30

월요일

중급반 6월7일

 

급반 5월3일

화요일

초급반 6월1일

  

중고급반 5월4일

수요일

Forever반 5월5일

중고급반 6월2일

목요일

급반 5월6일  

특별반 5월6일

초급반 6월3일 

금요일

중고급반 5월7일

 

중급반 6월4일

토요일

중급반 5월1일(외부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