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춘기 때 에드가 앨런 포의 시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대해 깊은 연민을 품었었다.
특히 <어셔가의 몰락>, <검은 고양이>로
잘 알려진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생애 마지막 48시간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가슴 찢어지게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가 죽기 전 48시간의 슬픔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일생 전반에 걸쳐 자욱이 깔려있던 불행이 다시 한번 응축돼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는 1809년 1월 19일 보스턴에서
유랑극단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아버지는 생후 18개월 된 아들을 놔두고 집을 나가버렸고,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그의 나이 두 살 때 결핵으로 죽는다.
고아 아닌 고아가 된 포는 세 살 때까지
극장 분장실 커튼 뒤에서 자라다가 담배상인인 숙부 존 앨런에게 입양된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에드거 앨런 포가 된다.
1826년 포는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했는데
도박과 술에 빠지게 되어 화가 난 숙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못 받게 된다. 결국 입학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삶이 비참해질수록 그는 점점 더 술을 마셨고
그럴수록 마음의 상처도 깊어졌다는 건 뻔한 일이다(<검은 고양이>의 남자 주인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1833년 그는 단편소설 <병 속의 수기>로
상을 받은 덕에 1835년부터 37년까지 <남부문학통신>지의 편집자로 일하게 되었다. 폭음이란 나쁜 버릇이 있긴 해도
명석했던 그는 편집자로서 독창적인 글을 많이 써 그가 일하는 동안 발행부수 500부에서 3500부로 늘어날 정도로 독자층을
넓혔다. 그럼에도 그의 월급은 달랑 주당 10달러에 불과했다.
1835년 스물여섯이 된 포는 열세 살짜리
사촌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둘의 애정은 깊었는데 그 시기에 포는 <어셔가의 몰락>이나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같은
작품을 쓰면서 언젠가는 자신만의 잡지를 내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가 신혼이었던 1836년이 바로
미국의 공황시기여서 그와 아내, 장모는 극도로 궁핍한 결혼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1842년경부터 버지니아는 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5년 뒤 죽을 때까지 가난과 결핵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847년 그녀가 죽었을 때 포가 쓴 시가
우리가 사춘기 때 사랑을 꿈꾸며 열렬히 환호해 마지 않던 <애너벨 리>
(Annabel Lee)라는
시이다.
여러 해 전일입니다.
바닷가 어느 마을에 애너벨 리라고 하는 이름의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그 소녀는
나를 사랑하고 내 사랑 받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렸고 나도 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닷가 왕국에서
사랑
이상의 고귀한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포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이 문장을 큰소리로 외우면, 마지막 문장의 애절함이 바로 포의 슬픔 그 자체란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포는 버지니아가 죽고 몇 주 동안
그녀의 무덤가를 배회하며 정신을 놓고 울곤 했다고 전해진다.
달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꿉니다.
별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동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밤새도록 애너벨 리의 곁에 눕는 답니다.
그녀의 죽음 때문인지 그의 글에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 떠도는 이야기는 포의 경제적 빈곤함을 말해주는 건데, 장례식
때 그녀가 덮고 있던 것은 포의 낡은 외투뿐이었고 그 곁에는 기르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단 얘기다
1845년 시 <갈가마귀>를 발표하면서 그는
일약 유명 작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갈가마귀>의 주인공 청년 역시 이제는 가고 없는 연인에 대한 떨칠 수 없는 사랑과
추억에 가득 차 있다.
어느 폭풍우가 치는 밤에 창문을 통해 쉴
곳을 찾아 갈가마귀 한 마리가 날아오는데 갈가마귀는 어떤 질문에도 “nevermore”(더 이상은 없어, 혹은 이젠 끝이야
등등으로 번역된다) 라는 대답 밖에 못한다. 그래도 청년은 계속 물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
내 연인이 다시는 이 보랏빛 쿠션에 기대앉지 못하겠지?
– nevermore
슬픔을 고치는 향이란 게 있을까? 나에게 말해줘
– nevermore
슬픔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 가련한
영혼에게 말해 주오.
저 멀리 에덴에서도 성스러운 소녀를
껴안을는지.
세상에 둘도 없이 빛나는 소녀를
– nevermore
슬프고 괴롭지만, 뭐라고 묻든 같은 대답을 들을 걸 뻔히 알지만 계속 물을 수 밖에 없는
절망적인 매달림이 <갈가마귀>란
시의 전체적인 정서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불행과 사라진 희망에
대한 추억, 그것이 갈가마귀의 대답 “nevermore”와 함께 울려 퍼지는 동안 우리도 함께 아득한 슬픔을 느낀다.
포는 버지니아가 죽은 뒤 2년 밖에 못
살았다. 그 사이 그는 우울증을 앓았고 아편을 복용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약간의 애정을 맛보기도 했다.
여류시인 사라 휘트먼으로부터 자신의 시를
동봉한 발렌타인 카드를 받고 점차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둘은 포의 좋지 않은 소문 때문인지 여자 쪽 부모의 반대
때문인지 결혼에까지 이르진 못했다.
대신 그는 예전의 약혼녀 새라 엘머러
로이스터를 만나 그녀와 결혼하려 했다.
죽기 전에 포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사람이
바로 새라인데 포는 새라의 권유대로 의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볼티모어행 증기선에 올라탄다(그 즈음 그는 금주회에도
가입하는 등 새 사람이 되려 했다. 그 여행의 이유는 자신의 결혼식에 숙모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즉 그는
신랑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났을지 모른다).
그리고 9월 28일 아침, 그는 볼티모어의
한 병원에 빈사 상태로 나타나는데 이번에도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다시 길거리로 나섰다. 그 뒤 그의 행적은 완전히 안개
속에 있고 이것이 비참하고 소외된, 스스로 타락시키는 예술가로서 전설의 정점을 이룬다.
포가 다시 발견된 것은 10월 3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에서였다 그는 혼수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고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사흘 반나절 고통을 겪다가 10월
7일 일요일 새벽 다섯 시에 숨을 거뒀다.
“하나님이시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
이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신문 기사들은 미치광이 알코올 중독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정도였다.
그는 미국 문학의 사악한 천재, 저주받은
나쁜 시인(보들레르나 랭보처럼)으로 불렸다.
하지만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도 나오는
뒤팽이란 탐정을 등장시켜 코난 도일에게 영감을 준 점, 개인적 강박 관념을 소설의 주제로 써서 도스토예프스키 등에 영감을
준 점, 또 다른 대륙 파리의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에게 영감을 준 점, 중세의 성과 숲이 아니라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혼의 공포물을 써 현대의 공포란 인간 내면의 공포라는 것을 보여준 점 등은 공포물, 범죄물, 심리소설, 추리소설의 새로운
개척자로서 그의 위상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라진 아버지, 죽은 어머니, 젊은 아내의
죽음, 이상화된 여인, 술, 조울, 광기 같은 천재성, 안개 속에 있는 죽음 전 몇 시간, 마음 속의 공포, 지하실,
경고로 가득 찬 운명, 아편, 도박, 행복을 희생 제물로 바친 창조력, 정신 착란 등 전체가 모여 에드거 앨런 포라는
하나의 괴로운 전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밤의 세계를 사랑하는 취미가 있어서
낮에는 방문을 닫고 강렬한 향료가 든 초에 불을 켠 채 그 신비스러운 조명 아래에서 독서와 명상에 몰두한다. 그리고 진짜
밤이 찾아오면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며, 대도시의 호화스런 불빛과 그림자 속에서 정신적인 즐거움을 찾는다. 그는 한마디로
야행성 탐미주의자였다.
애드가 앨런 포는 너무나 불행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망나니였다. 사랑의 갈증을 느끼며 살았다. 그리고 그런 안타까움을 글로 남겼다.(장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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