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4,  2011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제 난 알 수 있겠소

죽어가는 영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

이제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소

그들에게 나 달려 가겠소

영원한 생명 그 십자가 나 따라가오

 

세상 날 버려도 지쳐 쓰러져도

나 놓을 수 없는 십자가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들 주를 볼 수 있다면

나의 생명이라도 두고 가겠소

주님 가신 그 길처럼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 위해 아낌없이 드릴 테요

나의 가슴속에서 흐르는 눈물 내 아버지 사랑이죠

이제 울지 말아요

세상 모두가 주의 이름 부를 테요

 

 

 

 

 

 

 

 

 

 

 

그 정도는 괜찮은 거다

순리를 따라 살아야지

애처롭게 매달리지 말고

인제 그만 훌훌 떠나시오

 

그댄 그리하여도

따스한 새봄이 오면

여린 새순으로

다시 오시지 않소?

 

그러니 매달리지 말고

손 흔들지도 말고

눈인사도 말고 그냥

입 꼭 다물고 가소서

 

바스러지면 어떠하며

한 줌의 흙이 되어도

이 강산에 보탬이 되면

난 여한이 없겠소이다

 

흔들리는 그대여

나도 때론 그대처럼 아련히 흔들리오

그런 그대를 보는 내 마음은

곰삭아 문드러지오.

 

 

 

 

 

 

 

 

 

 

서울시장 선거운동 하러 찾아 온 박원순(오른쪽)과

다정하게 사진을 찍은 최일도(왼쪽)목사

 

최근에 미주에서 실시된 다일영성수련회에 다녀온 이성은 사모박영돈 목사 다일공동체가 인본주의적인 사회봉사정신과, 카톨릭/불교/무속신앙 등을 합친 혼합적 영성을 가르치는 무서운 괴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아래 글을 썼습니다.(언)

길 인도자 북극성’이라고 호칭되는 최일도 목사를 신봉토록 애쓰는 느낌 물씬 초혼음악은 무당 춤 연상부처에게 절하듯 손바닥을 위로 향해 뒤집는 인사도...

 

이성은 사모(GA)

 

나는 평소에 최일도 목사가 쓴 책들을 읽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애쓰고 열정을 갖고 기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하는 다일 영성수련회에 좋은 마음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아틀란타 근교의 기도원에서 45일 간의 수련회 일정을 보내면서 이 수련회는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성경적 영성 수련회가 아니라 다른 종교나 샤마니즘의 원리와 방법들을 이용하여 마치 그것들이 기독교 신앙적인 것처럼 포장하여 참가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수련회를 강력 저지하여 한 영혼이라도 실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320 2011년 저녁 첫째 날부터 다일 공동체 홍보 영상으로 시작하여 21일 아침 화두는 나는 누구 인가?” 였는 데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했다. 별칭 J에게 너는 누구인가?” 라고 물으니까 그 분이 답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졌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최 목사는 흥분된 어조로 이것이 어려서부터 기독교가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세뇌 시켜서 나온 말이다라고 강조하여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최일도 목사의 한번의 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 다음날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S에게 질문하자 S도 역시 하나님의 것이라는 대답에 또 다시 격앙된 어조로 이와 같은 생각은 교회가 성도들을 세뇌시킨 답이라는 것이다.

당시 내 생각은 이 사람의 가르침이 최면술과도 같이 다일 공동체를 무조건 신봉하도록 만들고 최일도 목사 자신만이 깨달음의 해답을 갖고 있는 듯이 부각시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즉 스스로길 인도자 북극성이라고 말하는 최일도 목사 자신만이 참가자들에게 오직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도자임을 인식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모든 화, 감정, 원한, 상처, 등등..으로 인한 마음의 쓴 뿌리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이 밖으로 쏟아 놓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자유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밖으로 쏟아 놓는 치유 방법을 성경적인 가르침에서가 아닌 무속 신앙에서 끌어들여 마치 무당이 귀신을 불러드려 한풀이하듯이 방망이 같은 것을 각자에게 주고 두드리면서 원한을 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욕도 하고 소리도 지르며 울도록 유도하는 무드로 이어져 갔다.

 

최일도 목사는 사람들의 감정을 부추기면서 마침내는 실신할 정도로 쓰러지고 눕게 만들고는 도우미들이 기도하게 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의 치유사역이 아닌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성경은 전혀 들고 가지 못하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문제와 회개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고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가르치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았다. 단지 감정을 다스리고 버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우리가 모이는 기도원 예배실을 우주선이라고 주장하며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화두가 화가 날 일입니까?”였다. 그래서 각자에게 과거 누구로부터 화가 났던 일을 생각하여 육하원칙에 의해서 쓰라고 했다. 그리고 4개의 조를 짜서 두 명의 도우미 지도하에 나뉘어 각자에게 묻는다. 

 

내 경우는 남편이 나에게 안돼! 라고 말한 일이 화가 날 일입니까?”였다. 각자의 다른 상황을 공식화해서 도우미가 계속 화두를 물으면서 지칠 때까지 정신을 빼고 억지로 사람을 우매하게 만들어서 화가 전혀 날일이 아닙니다로 말하게 한다. 

 

화가 나지 않으면 그러면 무슨 일입니까?”하고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답은 그냥 일일 뿐이므로 앵무새처럼 화가 났을 때의 해프닝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답이다. 각자가 마음이 아팠었던 그들의 경험들은 단지 그저 각자의 일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나서 연결되는 다음 질문이 그러면 그때 왜 화가 났습니까이다. 그 공식의 답은 나의 편견, 감정, 느낌, 감성, 정죄, 판단 등의 틀로 상대를 보았기에 화가 난 것이고 그것을 다 버려야 그들이 주장하는 깨달음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듯한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불교의 해탈의 경지를 기독교적으로 각색해서 , , , 이 없는 경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한 예로 M이라는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상처를 그런 방법으로 풀을 수 없어 화가 남아 있다고 하자마자 최 목사는 그 사람에게 무릎을 바짝 붙여 대고 앉아 설득한답시고 거의 강요하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언제인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깨닫게 될 겁니다.”라는 정말 지혜로운 말을 했다.

   

예수님은 전혀 한번도 화를 내시지 않고 교훈과 책망만 하셨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것은 화두에 공식을 대입시켜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간교함이었다. 예수님은 성경복음서를 통해서 신성과 인성을 갖고 계심을 증거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어 쫓으시고 상을 둘러 업으심이 주님의 거룩한 분노라고 저는 믿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마저 부인하는 그들의 말은 예수님을 로보트화 시키는 거짓된 것 임을 알 수 있었다. 

 

찬양은 잠깐만 들려 주고 그대신 거의 들어보지도 못한 한국 무당 한풀이 음악인지 아니면 초혼 음악(혼을 불러들이는 듯 한 기분 나쁜 음악)을 주로 들려 주면서 춤을 추게 했다. 물론 흥이 나는 복음송을 들으면 춤이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고 무당 춤 같은 것이 연상되는 음악이기에 미주 다일 공동체 박00 목사에게 이 음악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물었더니 하찮게 나를 보면서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소름 끼치는 기억은 소위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이 있은 후에 어둡게 만든 우주선 안에 모두 다 눕히고, 죽음을 준비하는 무드로 10 분 정도를 누워 있게 하는 동안 마치 곡하는 것 같은 아주 음산한 음악을 들려 주므로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왔다.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음악이 무서웠다고 했다. 

 

2-3 시간 정도 흐르고 나서 다시 돌아 왔을 때에 세상 음악과 한국 전통 음악으로 을 추게 하면서 옆 사람에게 손을 향하게 하고 마지막 끝 마무리를 절을 하게 했다.

그런데 절을 하는 방법이 이마를 땅에 대고 양손을 바닥에 댄 후에 위를 향하여 손바닥을 뒤집도록 하게 했는데, 끝나고 나서 J 라는 사람이 춤을 지도한 도우미에게 손 바닥을 위를 향하여 뒤집고 절을 하게 하는 것은 불교에서 부처에게 절 할 때 하는 방법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도우미는우리는 하나님께 절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절을 할 때 손바닥을 위를 향하여 뒤집는 행위는 성경 말씀 안에서나 기독교 어떤 문화 속에서 조차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참가자들 중에는 오래 믿어왔던 사람도 있고 초신자들, 불신자들도 있었는데 이런 비신앙적인 수련회의 정체를 알려 더 이상 신앙이 미혹 당하는 일이 없도록 널리 알려야 한다.(이성은 사모(GA))

 

박용돈 목사(다일영성수련회 13기 참여)

 

평소 밥퍼사역 소문으로 존경하던 최일도 목사님의 영성 수련회광고를 보고, 저는 은혜 받기 위해 3일간 금식기도로 준비하고 참석 하였습니다.

 

나는 첫날 주일 예배관계로 2시간 늦게 도착 한데다, 금식 후 무리한 탓에 기침이 심하여, 참석 허락을 받으라 하여 다일 미주대표를 만났습니다.

 

그때 내가 빠진 동안 중요한 것 놓친 것이 없는가 물었더니, “이곳에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북극성님의 말씀만 잘 들으면 다 된다. 북극성님의 말씀은 지금 시작 되었으니 놓친 게 없다였습니다.

   

미주대표의 이런 태도로 봐서 북극성님이란 분의 권위가 대단 하다는 강한 인상을 받고, “우주선이라 명명한 기도원 채플에 들어 섰을 때, 앞에는 최일도 목사님 (별칭:북극성)이 강의 중이었고, 참석자들은 아하” “아하복창으로 힘차게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아하 아멘 + 할렐루야를 줄여 만든 다일의 신생어로 북극성님 말에 동의, 찬성, 격려 등 더욱 말씀을 잘 하도록 격려하는 뜻 입니다. 

 

첫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우미들의 소개였습니다. 각 사람이 하나같이 다일 수련회를 참석하여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는 고백 들을 들으면서 잘왔다는 감동과 내려갈 때는 기가 막힌 횡재를 하고 돌아갈 것 같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첫날 저녁식사는 밤 10-11시 정도에 했는데, 모든 참석자들에게 두 손을 모으고, 추기경님이나 교황님의 기도하는 자세로 식기도를 하도록 가르쳤고, 그 후 매번 식기도는 그 자세로 하게 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45일간, 아침 6시부터 밤11-12시 취침 시간 까지, 하루 15-18시간 스케쥴 중에, 식사, 휴식, 다일 영상물 보여 주는 시간 외에, 하루 7-10시간 정도 거의 전부를 최일도 목사님 혼자 수련회를 진행 했습니다.

 

그 내용은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성경구절을 인용 하는 일도 거의 없고, 대개는 구수한 이야기들입니다. 필기는 일체 금하고, 성경은 가져올 필요가 없다 하고, 오직 들을 귀만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

   

깨달음을 주겠다는 제 4일 오후까지 성경을 보거나, 찬송이나 기도나 한 기억이 없고, 울분을 토해내야 했던 몇 사람을 위한 기도를 했을 뿐입니다.

 

영성 수련회란 말이 무색하게, 개인적으로 단 한 시간도 기도해 볼 수 있는 시간이나 말씀을 볼 시간도 전혀 없었고, 모두 고단하여 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기 전에 영성 수련이란 타이틀 때문인가 저는 기도를 많이 가르치고 또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깨달음(?)이 있은 뒤에는 마지막 날에 격려하러 온 가족들 앞에서 공식적인 기도와 찬양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긴 시간 무슨 말을 하는가?

밥퍼 책에 나온 이야기: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돌아 보면서 첫 5년 동안 고생한 이야기, 연애한 얘기, “생각을 바꾸면 아름다운 세상을 찾는다는 이론: 우주 삼라만상이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부처님 철학, 원효대사의 해골 물이 시원한 냉수 같았다는 같은 맥락의 마음 바꾸기 철학 등을 달변으로 풀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녀인 아내를 주셔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좋은 영성을 조화시키게 한 것을 감사하면서, 천주교, 불교, 기독교의 혼합 영성을 설파 했습니다.

그런 중간 중간 1:1 대화체로 수련회를 이끌어 갔는데, 앞에 둥글게 앉은 (10명 정도) 각 사람 앞에 다가가서, 같은 질문을 반복 하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싫은 것입니까?” “ 누구의 것입니까?” “ 화가 날 일입니까?” 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등의 대답은 다 틀린 대답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에서 세뇌 받은 대답이다라고 각 사람의 대답을 묵살하고는, 딱 부러지게 나는 누구다라고 대답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K라는 청년이 질문 있다고 손을 들자, “질문해야겠습니까?”,

K: “”,

북극성: “꼭 해야겠습니까?” ,

K: “라고 하자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청년의 질문을 받고 나서,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이 자기의 하던 말만 진행해 갔고, 그 후로 아무도 질문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아하에 대해서 잠깐 말할 것은아하를 잘 해야 길인도자 북극성님이 우리를 깨달음의 경지로 더 잘 인도한다며, 도우미들이 앞장 서서 큰 소리로 신나게 아하하면, 나머지 참석자 들은 자연히 따라서 아하로 크게 박자를 넣습니다.

나는 이 아하가 천진스런 참석자들이 의식/무의식적으로 북극성님의 세계로 빨려 들어 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일단 아하라고 긍정적으로 크게 복창 해놓고 나서, 그 다음 말이 받아 들이기 꺼림칙해도, 그냥 자꾸 아하로 넘어가게 되는 관성 같은 것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 혹은 평생토록 닦아도 못 깨달은 것을 내 말만 잘 들으면 4 5일에 깨닫습니다

아하”.

내 말만 잘 들으면 좋은 세상을 찾게 됩니다

아하복창.

내 말만 잘 들으면 이 사람들 같이 됩니다”.

아하복창.

이 사람들 이란 것은 수련회에 참여하여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는 도우미들 입니다. 공적으로 도우미들을 향해서 북극성님이 묻습니다.

 

“00, 화가 날 일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도우미 각 사람이 한 사람 같이 녹음기처럼 대답합니다. 그러고 나면 여러분도 이런 깨달음 얻을 날이 이틀 남았습니다” “아하”, “하루 남았습니다” “아하”, “이제 몇 시간 뒤면 깨달음이 옵니다” “아하”, “내 말만 잘 들으면 됩니다” “아하복창.

나도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생길까? 무슨 말일까?” 하나라도 놓칠세라 북극성님의 말에 귀를 온통 기울이게 됐습니다.

   

화가 날 일이 전혀 없다는 논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북극성님은 성경에 예수님은 화 내신 일이 한번도 없다고 억지 주장합니다. 오직 예수님은 자기 일을 행하셨을 뿐 이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에 37곳이나 진노 하셨고, 신약에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병 고치나 엿보는 바리새인 들에게 분노하셨고(3:5),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성전리더 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2:33). 

 

3일째 오후인가 화가 날 일입니까?” 라는 화두로 각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화 났던 일을 한두 줄로 적어내게 했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소그룹 조를 짜서 두 명의 리더가 한 명씩 묻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00, 남편이 바람 피운 일이 화가 날 일 입니까?” 질문 뒤에 하면 깨달음이 없는 틀린 대답이므로 넘어가고,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자기 차례가 오면, 대답을 바꾸어야 합니다.

   

끝까지 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결국 대답을 그 일은 전혀 화 날 일이 아닙니다라는 답이 나오면, “그러면 무슨 일입니까?” 묻고, 그에 대한 정답은 그냥 있었던 일입니다라는 판에 박은 듯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는 왜 화를 냈습니까?” 하면 내가 만든 일 입니다가 깨달음 있는 정답인 것입니다. 그 외에 내가 용서하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 내가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나의 죄 문제였습니다등등 어떤 대답도 깨달음이 없는 틀린 대답 입니다.

 

 

수련생들은 사진을 찍을 때도

불교식으로 손바닥을 들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자는 자기자신이고 자기생각입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변화 받았다하는 근거가 있고, 일리가 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자기 생각의 변화로 대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입니까?

   

북극성님에게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죄 문제도, 죄를 용서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 결과 구세주십자가의 필요성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생각만 바꾸면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 천주교, 도교, 기독교 다 함께 통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일 측 표현으로(4 19일자 글) ‘무엇이나 받아 들이는 예수제자가 된다입니다. (저는 쪽지에 써서 북극성님께 예수님 외에 다른 종교, 다른 이를 통해서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가?” 도우미를 통해서 전했으나 묵묵 부답이었습니다).

 

식당에 걸어놓은 다일 사명선언서에 작은 예수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말과는 상반되는 궤변입니다. 죄 문제를 무시하고, 죄 용서함 받지 않고, 어떻게 작은 예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성령의 역사없이 어떻게 죄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가 일어 나겠습니까? 그런데 북극성님은 예수님 십자가에 피 흘리사 죄 용서 하신 은혜, 성령의 역사는 일언반구도 언급 없이, 오직 생각을 바꾸라, 북극성/자기 말만 잘 들으면 깨닫게 됩니다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심히 통탄하실 영성 수련회내지 불교식 마음 수련회(?)’를 인도하는 것 입니다. 

 

이틀간 같은 질문만 지치도록 반복하여, 드디어 넷째 날 오후, 조별로 참석자 전원에게서 그게 무슨 일 이든 간에 전혀 화 낼 일이 아닙니다라는 답을 받아낸 뒤, 전원을 우주선/채플에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이제 모두 깨달음이 있습니까?” “아하복창. 그 동안 계속 몰고 온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결국 전혀 화가 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일 입니다라는 두 마디가 전부였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 나는 맥이 탁 풀렸습니다.

 

"이것이 평생 못 깨달은 진리” “ 깨달음이라니.." 첫 날부터 그때까지 침묵훈련 이라며 참석자 전원의 입을 묶어 두었기 때문에, 아무도 말 못하고, 오직 북극성님만 주로 말했습니다. 이때 제 속에서 무엇인가 영적으로 마구 유린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사랑한다, 내가 너를 아름다운 세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 할게. 그런데 무조건 말하면 안돼. 질문하면 안돼. 길 인도자인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해놓고, 하나씩 옷을 벗기고, 끝에 가서는 어린 아이를 영적 성추행으로 이끌고 가는 이미지가 연상됐습니다.

   

북극성님은 끝으로 재확인 했습니다. “아직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지금 뒤 자리로 나가 앉으십시오”. 그 중에 E란 한 분은 아버지 재산분배 이슈로 소송하여, 재판이 진행 중인바, 그것이 끝날 때 까지는 전혀 화날 일이 없다고 답할 수 없다고 뒤로 나가 앉고, 그 다음 내가 유일하게 깨달음 없는 자로 뒤에 나가 앉았습니다. 북극성님은 E와 나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깨달음이 없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는 북극성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지만, 100% 진리로 받아 들여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생각만 바꾸면 아름다운 세상 찾는다는 것은 죄 문제를 외면하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이크를 뺏고, 말을 막으며,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똑바로 보았습니다. 그 눈초리 속에는 감히 너 따위가 내 말에 도전해.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까지 지으며, 그러나 단호하게, “의견을 존중합니다. 여기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가십시오하고 그 자리서 날 내쫓았습니다. 날 내보낸 후 전해들은 바로는 깨달음받은 이들을 인치는 시간을 가졌다 합니다. 불을 끄고, 모두 채플에 누이고, 이상한 음악을 틀어 주고, 불교적인 춤과 절을 가르쳐 주고, 모두 춤추며, 절하게 했다 합니다.

 

 

춤을 추는 참가자들

 

후에 도우미 한 분이 와서 하산하라는 뜻은 아니다. 5일째는 총괄적인 성경공부가 있다해서 나는 나머지 수련회도 참석했습니다. 4일째, 모든 사람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북극성님은 성경 한번 편 일도 없고, 기도나 찬송이나 거의 한 일이 없었습니다.

   

억지 깨달음이 있은 뒤, 수련회를 총괄하는 성구들 이라며, 끝날 오전 중 예전에 녹화한 비데오로 다일의 10개 성구라는 성경 구절을 괄호 채우기 식으로 보여 주었는데, “염려하지 말라” “ 기뻐하라” “두려워 말라이런 말씀들이었습니다.

   

수련회 기간 내내 다일 영성혼합주의 영성이라고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를 그곳에 긍정적으로 앉아 있게 한 것은 열매로 그 사람을 알라하신 말씀과 그가 행한 선한 일에 대한 높은 평가 때문이 이었습니다.

 

또 스태프 전원이 북극성님을 극존 우대로, 마치 교주 모시듯 하는 분위기도, 이전 선행에 대한 하나님 보답이려니 생각하며 긍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북극성님이 나는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 전적으로 영성 수련회만 하기로 했다할 때 경각심이 생겼습니다.

   

이제 독자들과 저는 오직 그리스도만 구원의 길인지, 다른 종교에도 길이 있다고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북극성님이 아무리 많은 선한 일과 수만 명의 영성훈련 제자가 따른다 해도, 오직 예수님만 죄 문제의 해결자로 확실하게 인정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천국에 환영치 않으신다고 나는 확신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하나니 불법을 행 하는 자 들아, 내게서 떠나 가라 하리라마태 7:22, 23.  

 

침묵 해제 후 임원을 뽑는다하더니 실제는 미주 다일대표가 나와서 도우미들의 추천으로 기도 중에 결정했다, 임원단 여러 명 발표가 있자 곧 수련회 참석자 들은 조직으로 변했고, 즉시 그들이 다음 수련회를 위한 모금, 모집 자들이 됐고, 매달 후속 모임의 중요한 조직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어서 다일 후원금 약정서와 헌금 봉투, 자원 봉사자 서약서 등을 나누어 주고 쓰게 했습니다. 그 뒤에 미주 대표는 영성 수련회가 무슨 모금 운동이냐할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 자인 했습니다.

 

이미 최일도 목사님과 다일 공동체는 한국과 미국에 여러 빌딩과 자산을 가진 부자가 되어 있고,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자, 힘 없는 자의 동반자이기 보다, 혼합주의 영성으로 수련회를 통해 사람들을 다일공동체로 영입해가는, 최 목사님의 왕국 같은 것을 이루어 가는 종교세력 단체로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모두 경성하여, “오직 예수로만 구원의 순수복음에서 떠나지 않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용돈 목사 - 다일영성수련회 13기 참여)

 

 

 

 

 

 

 

 

마음이 슬픈 건

 

박충권

 

 

마음이 슬픈 건,

혼자라고 느끼는 건,

거룩한 사랑 속에

있지 못한 까닭이요!

 

타버릴 것 같은,

숨이 쉬어지지 않을 것 같은,

애탄 목마름을 느끼는 건,

거룩한 사랑을 얻지 못한 까닭이라

 

높디높은 푸른 하늘을,

아득해 보이는 수평선을,

끝없이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보아도 답답하기 만 하는

이 가슴!

이 그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왜 나에게

이 숨 막 일 듯한

그리움, 외로움을 주신 것일까?

아마도 고통을 주어

꼭 쟁취하라는 임의 은혜일 것이다.

 

사랑을 그리워한다는 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다른 출구가 없다는 것.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사랑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애타는 목마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예수의 날개를 펴라 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사진기를 가지고 놀았어도 나는 사진작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 평생 사진기를 손에 들고 다닌다.

 

다큐멘타리 사진작가 세바스치앙 살가두(1944)의 사진을 대하면 지금이라도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을 나서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그의 사진은 웅장한 힘이 있다. 죽음과 기근, 굶주림, 질병, 전쟁, 가난을 다루면서도 그의 사진은 아름답고 힘이 있다. 고통과 질병과 죽음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형용모순인 듯하지만, 그의 사진은 고통과 질병과 죽음의 세월을 살아가는 아프리카 인들의 존엄과 품위를 보여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아름답고 힘이 있다.

 

현실을 한갓 수단으로 다루는 조형적인 아름다움뿐이라면 살가두의 사진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극도로 굶주리고 헐벗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현실에 분노하는 작가적 시선을 과도하게 투입할 경우에도 그와 같은 힘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굶주리고 헐벗어도 그들 역시 위엄과 개성을 지닌,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세바스치앙 살가두)

 

그의 철학을 들어보면 더더욱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난다.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1944년 브라질에서 태어나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졸업한 후에 1968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농업경제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73년에 사진가로 입문하여 노동, 기아, 빈곤, 전쟁 등을 테마로 세계 각지에서 취재활동 후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1984년부터 10여년 동안 <매그넘> 정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94년에 <매그넘>을 탈퇴한 후 부인과 함께 아마조네스 이미지(Amazonas Images)를 설립했다.

 

2001년부터 <유니세프> 특별대표로 활동하고 있고, 세계보건기구의 협력으로 아프리카 소아마비박멸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2004년부터는 지구의 인간과 자연, 생물의 원시적 관계를 테마로 <제네시스Genesis>를 촬영 중이다.

 

휴머니즘의 백미를 보여주는 사진가에게 수여하는 유진 스미스 상 이외 50여 개의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한 베테랑 포토저널리스트이다.(언)

 

 

 

이어서  일본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를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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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두툼한 손이다. 빡빡 깎은 머리에 군살 없는 몸매의 노신사가 부드러운 미소로 악수를 청한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챙겨 들고 지구촌의 험한 현장을 찾아 다니며 인간의 존엄성을 증언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걸작을 찍은 바로 그 손이다.

 

일본 도쿄도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아프리카’전의 개막식 참석차 도쿄를 방문한 포토저널리즘의 살아 있는 전설 세바스치앙 살가두 씨(67)를 만났다.

 

전시는 “나는 인류의 비극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잔혹한 상황에서도 살려고 하는 인간의 존엄을 찍고 있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실감나게 한다. 어떤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영혼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낸 흑백사진들. 절망에서 희망을 길어 올린 사진들이 전시되어있다.

 

이번 전시를 소개한다면….

 

“36년 동안 내가 아프리카에서 해온 작업의 르포르타주라고 할 수 있다. 분쟁, 기아, 풍경, 야생동물 등 다양한 사진을 통해 아프리카에 대한 내 시각, 내가 보고 배운 것을 보여주는 전시다. 그곳은 굶주림과 분쟁 이상의 다양성을 지닌 대륙이다. 내 사진을 통해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다시 바라보면 좋겠다.”

 

브라질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친 뒤 다큐 사진가로 변신한다. 우연한 기회에 사진에 빠져들어 독학으로 사진을 익혔고 감마통신사와 매그넘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그는 세계를 돌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렌즈에 담는 장기 프로젝트를 펼친다. 브라질 금광의 헐벗은 노동자 등을 통해 노동의 의미를 캐묻는 ‘노동자들’, 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다룬 ‘이주’에 이어 2004년부터 자연을 다룬 ‘창세기’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에서 생태와 환경으로 주제가 바뀌었는데.

 

“내 모든 작업은 서로 연결돼 있다. ‘노동’과 ‘이주’에서 드러난 인간 파괴는 궁극적으로 자연 파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열대우림과 사막을 담은 ‘창세기’는 문명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과 생명의 뿌리를 찾는 시리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지구의 45%는 아직 파괴되지 않았다. 함께 힘을 모으면 지구의 절반은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작업이다.”

 

그의 사진은 분쟁, 기아, 난민 등을 소재로 하면서도 평범한 보도사진과 구별된다. 고발과 설교가 아닌, 대화와 소통을 원한다. 인간미와 진정성이 스며든 포토에세이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얻은 결실이다.

 

혹한 현장을 찍다 보면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나.

 

“그렇지 않다. 나는 사진의 대상과 함께 살고 여행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됐다고 생각될 때 카메라를 든다. 굶주리고 헐벗어도 그들 역시 위엄과 개성을 지닌,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 내 사진을 본 사람이 동정심만 느꼈다면 그것은 사진이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동정심이 아닌, 희망이다.”

 

사진의 힘은 어디서 오나.

 

“사진의 힘은 내면에서, 자신에게서, 삶에서 나온다. 또 가족과 친구, 사회에서 온다. 좋은 보도사진을 찍고 싶다면 자신이 몸담은 사회를 이해 하고,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과 문화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표작을 한 장 꼽는다면….

 

“나는 글이 아닌 사진으로 말하는 스토리텔러다. 여러 사진이 한데 어우러져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한 장은 꼽기 힘들다.”

 

지구의 미래를 낙관하는가.

 

“나무를 잘라내고 공기를 오염시키며 인류는 제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난 큰 희망을 갖고 있다.

내게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들이 있는데 등산 중 위험이 닥치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보호한다. 이렇듯 인간에겐 생존본능이 있다. 상황에 적응하거나 저항하고 꿈을 현실로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에게 삶과 예술은 둘이 아니다. 1991년 부인 레일라 씨와 함께 고향에 ‘인스티튜트 테라’를 설립한 그는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고 있다.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엔 1500에이커(약 607만 m²)의 새로운 숲이 생겨났다.(언)

 

 

 

 

 

 

사람은 고통이 극한에 이르면

왜 머리를 싸매는 것일까?

 

 

 

힘바족 유목민 여인의 기지개 켜는 모습에서

고향 땅 모잠비크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루한 기다림을 나도 같이 느끼게 한다.

 

 

가난하고 고달픈 현실에서도

생명은 이어져간다.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생명이음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여인의 가슴이 뜨겁게만 느껴진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 여인의 등에 업힌 어린이의 초점 잃은 눈망울

 

 

 

벌거벗은 현대인의 에덴동산을 웅변하는 사진이 아닐까?

 

 

 

앙골라, 1997

루에나 시 교외의 학교.

학생들은 각자 자기가 앉을 의자 대용의 물건을 가지고 온다.

무상급식은 이런 학교가 시급.

 

 

남부 수단, 2006

딩카족의 아마크 방목 캠프의 해질 녘.

소떼가 돌아오는 이 때가 하루 중 가장 활기를 띠는 시간이다.

 

 

 

자니아, 1994

대량학살이 시작되자 3일도 지나지 않아 100만명이 넘는 르완다 난민이

도착해 베나코 캠프가 설치되었다.

 

 

 

남부 수단, 2006

게르 촌의 전통적인 딩카족 가옥의 내부,

벽에 보이는 것은 소뿔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케냐, 1986

소말리아 국경 근처의 마르샤비트에 있는 한 학교의 여학생들.

이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니까... (언)

 

 

 

 

 

 

 

 

함평 국향대전 국화분재(전문가 부분)를 소개합니다.

 

1년생으로 알려진 국화를 분재로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함평 국향대전에 국화분재를 전시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도취(陶醉) 만 남고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달아난 찬양에 빠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죽은 예배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절망 중에서 구속함의 감격이 없는 노래는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니며 기독교의 찬양이 아닙니다.  그러한 찬양이 아닌 찬양의 자리에 거룩하신 성령님이 임하실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령님의 감동이 떠난 자리를 인간적인 설교와 노래로 대신해 보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헛될 뿐 아니라 지극히 위선적인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게 할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쓰디쓴 절망 속에 있는 자신을 아는 자들입니다.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능력하고 소망을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절망하고 소망을 잃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절망 속에서 그들을 건져 주십니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찬양을 우리는 찬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찬양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장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대적의 손아귀에 가장 단단히 붙들린 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의(義)자기 만족(滿足)이라는 쇠사슬에 스스로를 묶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이다'라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처럼 그들 또한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대하여 다른 공동체와 같지 아니함을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드리는 찬양은 바리새적인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바리새인의 그것과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손을 들기 전에... 먼저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배 갱신

양 갱신...

 

 

 

 

 

 

 

 

서울의 한 교회 교인이 담임목사를 살해하고 달아나 경찰이 추적에 나섰다.
 

서울 금천경찰서는 11일 오후 10시40분쯤 서울 금천구에 있는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 유모(69)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혐의로 교인 송모(41)씨의 검거에 나섰다고 12일 밝혔다. 목사 유씨의 곁에 있던 부인 송모(64)씨도 송씨가 휘두른 흉기에 목을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송씨는 지체장애 2급이며, 이날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철야예배를 보고 유씨 부부의 배웅을 받던 중 미리 준비해간 부엌칼로 범행을 저질렀다. 목격자는 “다른 교인들이 빠져나가고 거의 마지막쯤 나오던 송씨가 갑자기 목사를 찔렀다”고 전했다. 
 

 

 

 

"호주 외국인 매춘여성 중 한국인 17%"

우리정부, 대사 급파… 단속 요청키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체류, 일부서 악용… 1000명 넘어

 

외교통상부는 호주에서 매춘 활동을 하는 한국 여성이 1000명이 넘는다는 현지 한국 공관의 보고를 받고 문하영 재외동포영사대사를 13일 호주로 급파했다.

 

주호주대사관과 시드니총영사관은 최근 호주 성매매산업 종사자 2만3000명 중 외국인 비율이 약 25%인데 외국인 중 한국인은 약 16.9%로 추산된다며 대책 수립의 필요성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는 특히 한국 여성 매춘부 일부가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 호주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면서 음성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워킹 홀리데이는 양국 간의 협정에 의해 젊은이들이 상대국에서 제한적인 형태의 취업과 관광, 공부 등을 병행하도록 허가해주는 제도다.

 

호주는 우리나라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무제한 발급하고 있으며 현재 약 3만5000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호주에 머무르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호주에서 한국 여성들의 성매매는 현지 언론에 의해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 왔으며 규모가 계속 커져 1000명을 넘긴 상태"라며 "워킹 홀리데이를 악용한 범죄 조직이 조직적으로 젊은 여성들을 호주에 송출하거나 현지에서 모집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한국 여성이 5000명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는 등 일부 한국 여성들의 원정 매춘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광범위한 인터넷 사용이 정부가 정직하게 행동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슈미트 회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APEC 기업 포럼에서, 전 세계 시민들이 온라인 도구들에 의지해 정부가 정직하게 행동하도록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슈미트 회장은 또 정부가 권력을 가진 '물리적 세계'와 별도로 시민이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진 '가상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라며, 이 가상 세계에서는 악행을 저지른 이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진다고 덧붙였다.
 

슈미트 회장은 그러나 온라인 시위가 실제보다 과장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보선 이후 정국은 안철수라는 유령으로 요동치고 있다.

 

서울시장 출마한다. 안 한다. 박원순에게 양보한다. 한나당을 응징한다, 기존 정치권을 갈아치워야 한다.... 라며 단지 몇 마디 한 안철수에게 각종 언론은 대통령 버금가는 위치를 제공하고 있다.

이 상황은 특히 SNS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젠 모든 언론 정치권은 이 SNS에 지배를 받는 ,  정책하나 결정하고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는데도 SNS의 눈치를 보며 SNS가 하라면 하고...  SNS가 하지 말라면 안 하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실존하지도 않은 안철수의 신당이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지금 존재하지도 않은 유령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 최대 현안인 한미 FTA 조차 안철수는 요?...라고 SNS 빅브라더인 그의 의견을 묻고 있다. 안철수가 찬성하면 SNS도 자동 찬성이요 반대하면 자동 반대가 되는 그런 상황이 지금이다.

이런 현상은 이 사회에서 가장 냉정해야 할 언론이 키운 것으로 SNS 취향에 따라 논조도 뒤죽박죽으로 대체 누가 기자인지 누가 논설위원인지 알 수가 없고 기자는 하루 종일 휴태폰이나 트위터 페이스 북만 체크하는 것이 일거리가 되다시피 한 것 같다.

이런 현상이 나라를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라면 모든 이들이 환영할만하고 권장할만한 일이지만 책임의 주체가 없는 시류와 바람에 따라 나라의 운명 좌지 우지 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염려되는 것이다.

이른바 조지 오웰의 [1984년]이란 소설 책처럼 안철수란 빅브라더가 통제하는 SNS라는 괴물이 온 세상을 감시하는 세상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가지 희망은 있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무언으로 있으면서 작 중요할 때 크나 큰 역을 하는 무당층도 아닌 무언(無言)이 바로 희망이다.

그 어떤 조사에도 응답 율 20% 내외 인데,  굳이 입장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심인 80% 이상을 차지하는 그들인데 그들이 마지막 희망이 되어 버린 상황이 지금 위기의 한국을 대변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유령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탈출구는 하루라도 빨리 진짜 민심을 알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 지지 않으면 그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유령의 지배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Sheep Gate)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양의 연못) 하는 못이 있습니다. 거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이란 정자(亭子)입니다.

그곳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연못에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부글부글 끓게 하는 데 그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병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이 곳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조명하여 볼 수 있습니다.

 

1. 아픕니다.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파하고 있습니다. 영혼육이 모두 아픈 병자들입니다.

 

뉴욕의 생명 연장 연구소에서 45세 이상 된 사람 25,000명을 조사하였더니 단지 20% 만이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조사하니 일의 양과 휴식의 양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뉴저지 스탠다드 오일 회사에 근무하는 간부 340명을 조사하였더니 235명이 건강에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192명이 건강에 지장을 줄 정도의 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 중에 12살에서 20살까지는 지금 약 80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약 40만 명이 살인, 강도, 절도, 음주, 폭행 등으로 경찰 신세를 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난 젖소에서 나온 우유를 마시면 큰 일 난다고 합니다. 성난 어머니 젖을 아이가 마시면 병에 걸립니다.  길거리로 뛰쳐나온 성난 데모 대들이 붉은 띠를 띠고 [결사(決死)]반대를 외칩니다. 어디가 많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38년 동안 아파하였습니다. 영혼육이 아파합니다.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파하고 있으면서 진정한 위로를 기다리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2. 고독합니다.

 

현대인은 고독합니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이덱거는 현대인을 표현할 때 고장 난 에레베이터 안에 갇힌 이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망망대해에 홀로 둥둥 떠있는 사람처럼 고독하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언제 구조하러 올지 망막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입니다.

38년 된 병자 옆에는 식구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독하였습니다.

 

3. 힘듭니다.

 

38년 된 병자는 혼자서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려고 애를 써봅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습니다. 지친 몸, 어쩌면 깡말라 해골처럼 된 몸을 움직여 보지만 마음뿐이지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양보하여 주는 사람이란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만 들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부러워 보이는 대통령도 힘든 자리인 모양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통령직은 내 두 손에 코끼리 한 마리를 올려 놓은 것과 같이 견디기 힘든 자리이다.]

 

텝슨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대통령 자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외로운 자리다.]

 

1980년 11월 4일 레이건 후보와 대결에서 낙선의 쓴 잔을 마신 카터는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꿈도 꾸지 않는 질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부터 한 사람의 국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힘들어 합니다. 쉬운 일이 없습니다. 남녀노소가 모두 자기 문제와 씨름하며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100명 정도의 목사님에게 [목회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라고 물었더니 86%가 어렵다고 대답하였고 무엇이 어려우냐고 물었더니 [목회자 자질이 안 되어서 목회가 힘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다 힘들어 합니다.

 

4. 절망뿐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어디를 보아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여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는 사랑을 잃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다 떠났습니다. 모두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없나이다]라는 말은 체념이었습니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절망 중에 나온 한숨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절망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5.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1. 건강이 없었습니다.

 

이제 38년 병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20년도 아니고 38년입니다. 그의 나이가 50이라면 12살부터 아팠던 것입니다. 40이었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아팠을 것입니다.  건강이 없었습니다.

 

2. 돈이 없었습니다.

 

38년 병 치다꺼리에 이제는 치료비조차 없어 베데스다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병 치료에 모두를 탕진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몸 하나 누울 자리가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3.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된 병자는 두 종류의 사람을 찾았으나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1) 살려 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병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병자들의 가족인 건강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누구 하나 38년 병자를 살려 주려는 이가 없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한 말에는 사람은 많아도 자기를 살려주려는 사람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2) 양보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38년 병자 주변에 있는 병자 중에서는 아마도 38년이나 오랜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많은 병자 중에 [당신은 병든 지 38년이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보호자도 한 명도 없으니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물이 동하면 우리가 양보할 터이니 당신부터 들어 가십시오]라고 양보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주여!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한 말속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양보할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양보 없이 자기가 먼저 들어 간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이런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는 병 고침을 받고 운명이 바뀌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Mr. Konglish : My hobbies are very various.

Mrs. English : I have a variety of hobbies.

‘various’는 형용사... 로 복수형태를 취한다.


< Time Out >

 

Mrs. English : How much is your room and board?

Mr. Korean : 하숙비가 얼마나 듭니까?


< 어휘 >

 

room and board 하숙


< 실전대화 >

 

A :

Oh, my co-worker rubs me the wrong way. I wish I could change my departments.

B :

Well, try not to rock the boat. You only have a few more days before this project is finished.

 

A :

You're right. If I lose my job, I won't be able to pay for my room and board.

B :

Remember that the next time he makes you angry.

 

A :

나와 같이 일하는 친구는 정말 짜증나. 부서를 옮겼으면 좋겠어.

B :

풍파 일으키지 마라.

이 프로젝트 끝나는 거 얼마 안 남았잖아.

A :

네 말이 맞아. 만일 내가 직업을 잃으면, 하숙비를 못 낼 테니깐.

B :

그가 다음 번에 너를 화나게 하면

지금 그 생각을 기억해.


< 어휘 >

co-worker 직장동료 /

rub ∼을 문지르다 (ex. rub a person the wrong way 남을 화나게 하다, 비위를 건드리다) /

department 부서, ...부(部) /

remember 기억하다 /

won't = will not / pay 지불하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니체
 

나쁜 일을 당했을 경우,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 부정적인 말만 하다가 당연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마저 놓쳤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 좋은 일 때문에 다른 일들에 신경 쓸 수 없었기 때문이야’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 좋은 상황이 닥쳤을 때, 오직 그 나쁜 말과 감정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당신 주변의 다른 조건들마저 안 좋은 상태로 변한 것이다.

 

만약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긍정의 말을 할 수 있는 용기와 기술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긍정의 말과 생각에는 상황을 잘 풀리게끔 하고 행복을 증가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입버릇’이 내일을 결정한다!

말에 감춰진 행복과 성공의 법칙

 

‘입버릇’이란 자주 사용해 입에 배어 굳어버린 말이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입버릇’이라는 단어에, 이 책의 저자는 긍정의 힘을 부여했다. 무기력과 불행에 빠져 습관적으로 내뱉는 앓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 넣고 희망을 키우는 의미로 발전한 것이다.

 

“뇌의 자율신경계는 문장 속의 주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당신이 'A씨는 건방지다‘라고 험담을 하면 자율신경계는 ’너는 건방지다‘ 라는 공격을 당했다고 착각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야’라고 생각하고, 그 말을 항상 입으로 되뇌어 보자.

그러면 그 말들은 당신의 잠재의식 속에서 진실이 된다. 그 말들은 쾌감을 유발하는 오피오이드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해 뇌를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고, 밝고 긍정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괜찮다’는 말 한마디가 행운을 부른다!

입버릇에서 시작되는 즐거운 변화

 

인생이 늘 좋은 일들로만 가득하지는 않다.

 

“세상을 바꿀 단 하나의 기적”

‘입버릇’이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강연자이자 뇌 과학자인 사토 도미오의 최신작『기적의 입버릇』(중앙북스 펴냄)이 출간되었다. 평소 긍정적인 말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말을 바꿔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해온 저자는 이번 신작을 통해 ‘입버릇’속에 감춰진 강력한 힘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기적의 입버릇] 중에서 

 

 

 

 

 

 

 

 

 

 

 

 

 

 

 

 

심상필 전 홍익대 총장(75)은 1960년부터 10년간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1968년 5월 일어난 68혁명을 체험했다.

 

196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는 68혁명의 전 과정을 직접 목격한 몇 안 되는 한국인인 셈이다.

 

그가 얼마 전 펴낸 자서전 ‘다시 찾은 시간’에는 68혁명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프랑스 교육의 몰락 부른 68혁명
 

68혁명은 파리 근교 낭테르대에서 시작됐다. 이 대학 여대생 기숙사에는 남학생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프리섹스 등 자유로움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던 학생 142명은 대학 측에 출입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들은 대학본부 점거에 나섰다. 학생들의 대학본부 점거는 프랑스 사회에 일대 사건이었다.
 

프랑스 국민은 전통적으로 대학교수에 대해 강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수업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학생이 교수와 면담을 하려면 먼저 정중한 편지를 보내 약속을 신청해야 했다. 감히 넘보기 힘들었던 대학 권위의 심장부에 학생들이 멋대로 들이닥친 것이다.

 

심 전 총장은 ‘수백 년에 걸친 프랑스 대학 역사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대학 당국이 학교 폐쇄로 맞서자 학생 300여 명은 파리시내 소르본대로 몰려갔다.

13세기 개교한 이 대학은 프랑스 학문의 본산이었다. 캠퍼스는 고색창연했고 건물 벽에는 유서 깊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학생들은 빅토르 위고와 파스칼의 동상이 서 있는 이곳을 점거하고 벽화에 칼질로 낙서를 했다.

 

밤에는 남녀 학생과 부랑자들이 모여 혼숙을 하며 성(性)의 향연을 벌였다. 교육에서 권위는 생명과 다름없다. 프랑스 교육은 치명상을 입었다.
 

시위는 고교생과 노조가 가세하면서 가열됐다. 시위의 열기는 유럽의 다른 나라로, 미국으로 번져 나갔다.

 

68혁명은 지금도 ‘학생운동의 전설’로 미화되고 있지만 프랑스 내부에선 평가가 교차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68혁명이 남긴 폐해 가운데 ‘교육의 권위 추락’을 가장 개탄한다.

68혁명 이후 교수는 물론이고 교사들의 권위도 크게 떨어졌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2007년 프랑스 전국의 교사 85만 명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교사의 권위 회복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편지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교육의 중심에 지식은 없고 아이들의 인격만 있다’면서 ‘학생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고 썼다.

 

한국도 가선 안 될 길 가고 있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교육의 권위 상실은 두드러지고 있다. 교사들이 학생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은 이제 충격적인 뉴스가 아니다. 체벌 금지 이후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학생 통제 수단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학생 인권을 내세우며 학교 내에서 집회의 자유까지 주겠다고 한다. 만약 실현된다면 학생들이 교사나 학교 방침에 수시로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교육의 권위는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교사들이 수업 도중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헐뜯거나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려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생들까지 고발 사이트를 개설하며 반발할 정도다. 일부 교사는 스스로 교육의 권위를 허물고 있다.
 

감사원이 최근 대학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은 대학들이 수입은 줄여 잡고 지출은 늘려 잡아 등록금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받아 왔다고 대학을 나무랐다.

그러나 감사원은 잘못을 저지른 대학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국민에게는 모든 대학이 거대한 범죄 집단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마구잡이 감사로 헌법이 보장한 대학의 자율성도 훼손됐다.

궁지에 몰린 대학들은 내년부터 등록금을 5% 내리겠다고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했지만 대학이 입은 유형무형의 상처는 심각하다.
 

한국에서 등록금이 비싼 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은 정부의 대학 재정지원 비율이 가장 적은 나라다. 상대적으로 등록금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신적 영역에 속하는 대학 교육을 일반 공산품과 같은 시각으로 접근하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다. 2011년 한국에 거세게 몰아친 등록금 파문은 대학의 권위 추락을 가속화할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는 경제규모로 세계 5위이지만 대학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올해 영국 대학평가기관 QS가 집계한 ‘세계 대학 순위’에서 프랑스 대학은 세계 200위 이내에 4개의 이름을 올리는 데 그쳤다.

5개 대학을 200위 안에 진입시킨 한국보다도 못했다.

 

교육은 한번 무너지면 회복이 어려운 법이다. 한국은 광복 이후 폐허 속에서 교육 분야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지금까지 국력을 유지해왔다.

최근 교육 분야의 급속한 추락을 보면서 한국 교육의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불길한 징조를 느낀다.
 

 

 

 

 

 

 

 

 

 

 

 

 

 

 


 

위 그림을 보고 느끼기에 ......

1. 멈춰있다 = 스트레스 0
2.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 = 스트레스 거의 없음
3. 빠른 것 같다 = 스트레스 좀 있음
4. 조금 더 빠르다 =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상태
5. 매우 빠르다 = 의사와 상담필요
6. 빠르게 막 돌아간다 =
입원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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