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9,  2012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날으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곳 없는 정열을 가슴에 깊이 감추고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중앙양로원에서의 [열린 설 맞이 찾아가는 음악회]


 

 

 

수원시립합창단

 

 

 

 

 

 

 

 

[몽골 특집]으로 장재언 칼럼 쉽니다.  

 

 

 

 

 

 

 

 

 

 

 

 

 

몽골 고비 사막 남부에서 지금 驚天動地(경천동지)할 규모의 구리-금-석탄광산 개발이 진행 중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비행기 편으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도착하는 오유 톨고이에선 구리광산이, 그 옆에 있는 타얀 톨고이에선 석탄광산이 개발되고 있다. 두 곳 모두 세계최대 규모이다.
 

오유 톨고이의 구리-금 광산은 2020년이 되면 몽골 GDP의 3분의 1을 생산할 것이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연간 45만t의 구리와 상당량의 금을 캐내게 된다.

타얀 톨고이 탄광을 중심으로 몽골은 2020년까지 연간 4000만t, 2040년까진 연간 2억4000만t의 석탄을 생산할 계획이다.

한국의 석탄생산량이 최대일 때(1988년)가 연간 2400만t이었다. 몽골은 인구가 인천시 정도인 300만 명이다. 이런 나라가 한국 생산량의 10배를 뱉어낸다.  돈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벌써 아시아의 카타르가 될 것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오유 톨고이 광산에 투자될 돈은 2020년까지 1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현재 몽골의 연간 GDP가 60억 달러이다.

작년 3/4분기 몽골의 경제성장률은 21%였다. 중국의 두 배로 세계최고이다.

 

이 구리광산 개발사업은 몽골 정부가 34%, 캐나다의 아이반호 광산이 66%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아이반호는 리오 틴토 회사가 49%의 지분을 갖고 개발을 진행 중이다.

 

구리와 석탄은 주로 중국에 수출될 것이다. 일부 석탄을 러시아로 실어내 여기서 블라딕보스톡 항구를 통하여 한국과 일본에 수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벌써 몽골인들은 매월 15일에 1인당 16달러씩을 공짜로 받는다. 울란바토르는 지난 수년간 인구가 70%나 급증하였다. 수만 명의 몽골인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들도 귀국, 본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할지 모른다.

 

몽골엔 기름도 많이 매장되어 있다. 한반도의 열 배가 넘는 크기의 몽골은,  인구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몇 년 전 한국과 몽골연방제로 묶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것도 몽골의 정치권에서 시작되었다. 이번 호 비전통신은 한몽 연방제에 관해 논의 되었던 내용을 특집으로 엮어보기로 한다.

 

 

 

 

 

 

 

 

 

 

 

 

 

 

 

 

 

2007년3월20일 외교센터에서 열린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가 2007년 3월20일 외교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세미나 내용 중...

구양근 성신여대 총장의 기조연설,

이상면 서울대 교수(국제법)가 발표한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 분석’,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의 ‘한국-몽골의 역사적 관계 분석 및 향후관계 전망’,

박원길 고려대 교수(역사학)의 토론 요지를 여기 소개한다.

몽골측 발표자는 주한 몽골대사관이 추천했다.
 

세미나가 열리기에 앞서 ‘신동아’ 2006년 6월호 기사가 참석자들에게 배포됐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최근 일부 대선주자 진영과 정치인, 학자들 사이에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이 거론되고 있다. 아직은 ‘아이디어’ 수준이다. ‘남북통일이라면 몰라도 이건 비현실적이다’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역사의 새 물줄기’는 언제나 현실의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에 의해 발원한다. 유럽연합(EU), 독립국가연합(CIS), 영(英)연방 등 국가간 합종 연횡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한-몽 국가연합이 두 나라에 얼마만한 필요성과 현실성이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날 세미나는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소장 이재형·국제정치학 박사)가 주최했고 (주)동원그룹, (주)유한킴벌리가 후원했다.

사회는 최운상 전 자메이카 대사가 맡았으며 외교센터에 입주한 주한 외교사절과 시민 등 100여 명이 방청했다.
 

 

구양근 성신여대 총장 : 기조연설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은 내가 생각해 온 ‘아시아연합’과 일맥상통한다. 개인적으로 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유럽연합식으로 하나의 연합체로 결성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지난해 6월 신동아의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기사에 공감했다. 한-몽 국가 연합론은 4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추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부 국내학자들과 몽골학자들에 의해 거론된 바 있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에 있어서 너무나 많이 닮았다. 또한 두 나라의 신화나 민간설화는 말할 나위도 없고 언어 자체에도 유사점이 많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몽골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인접 강대국으로부터 안보위협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한-몽 양국이 서로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이 점만 보아도 서로 적대적이지 않고 공통의 대외 환경을 지닌 한-몽 두 나라는 연대할 여건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몽골대사 “한-몽은 운명적 관계”
 

정부의 동북아공동체 구상을 보면, 한국 주도의 동북아시대가 도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지역 국가들 중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민족감정이나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를 고려해볼 때 동북아 연대를 검토하기엔 시기적으로 이르다. 그러나 한-몽 양국은 인종·정서·문화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아 양국의 국가연합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

2004년 우르진훈데브 페렌레이 주한 몽골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몽골 사람은 한국을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몽골은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럽연합은 자원·경제공동체를 대변하는 유로달러를 강화하는 가운데 공동안보를 책임질 유럽공동군(軍) 창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유럽은 경제통합과 협력안보를 통한 평화공동체를 지향한다. 아시아연합도 검토해볼 만한 사안이다. 그 예비단계로서 한-몽 국가연합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북한 내 철도통과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몽골 거리는 훨씬 더 가까워질 것이다.
 

이상면 서울대 교수 :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 분석
 

한국과 몽골은 1990년 3월26일에 국교를 수립한 이래 여러 방면에서 관계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같은 몽골로이드 혈통이어서인지 양국 국민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 국민 간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양국 국민간 우호관계가 무르익어 어느새 ‘우리가 남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동질감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몽골어는 어순이 비슷하고 토씨가 있으며 기초적인 어휘에서도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눈’이 같고 ‘귀’가 비슷하며, ‘바른쪽으로’를 몽골어로는 ‘바른쭉으루’라고 말하고, ‘왼쪽으로’를 ‘준쭉으루’라고 발음한다.
 

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양국 사이에 가로놓인 국경의 벽을 낮추고 협력관계의 가속적 증진을 위해 특단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방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국가연합(Confederate)’이다. 국가연합의 형성은 그 명분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사례가 희소할뿐더러 실패한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면밀한 국제법적 분석과 설계를 필요로 한다. 먼저 양국의 동질성 정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민족은 몽고계통으로서 선사시대에 아시아 중앙 문명권에서 공생했다. 족두리는 몽골풍 의상이며 설렁탕도 몽골풍 식품이다. 성황당과 제례의 풍습, 동성동본 혼인금지의 관습도 동일하다. 몽골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으로 ‘솔론고스(Solongos)’라고 불러왔다. 중세 몽골이 세운 세계 최강국인 원(元)제국에선 한반도 문화를 ‘고려양(高麗樣)’이라 해 칭송했다. 오늘날 아시아 각처에서 애호되고 있는 한류(韓流)의 원류라고 할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신의 보고서에는 몽골 병사들이 신흥 명나라 주원장의 공세에 밀려 요동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동족’이라 하여 살상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세종 때에도 몽골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 ‘형제국이니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국서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기엔 일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몽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두 민족 간의 오랜 이해와 우정은 현재의 한몽 우호관계의 전통적 기반이 되고 있다.
 

한국과 몽골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몽골은 한반도의 7배에 달할 만큼 국토가 넓고 세계에서 8번째로 자원이 풍부하지만 인구는 300만명에 불과한 개발도상국가다. 반면, 한국은 국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하지만 인구밀도가 높고 산업이 발전한 신흥경제국이다. 양국은 여러 방면에서 상부상조할 수 있다.
 

교류확대-관세동맹-비자협정
 

몽골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내륙국가로 러시아와 3480km, 중국과 4673km에 달하는 장대한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다. 몽골은 한때 중국을 지배했지만 원나라가 멸망한 이래 수백년을 중국에 눌려 살다가 1924년 11월26일 비로소 몽골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이후 소련의 영향 아래 있다가 동서냉전이 풀리자 실질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몽골에서는 이웃 강대국에 대한 경계심이 적지 않다. 이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온 한민족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몽골에는 1000억t의 석탄과 5.4억t의 구리, 50억배럴의 석유 외에도 철광석, 주석 및 형석, 준보석 등 갖가지 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바가반디 전임 몽골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몽골은 금덩이를 깔고 앉아 굶고 있는 처지”라며 경제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한편 한국은 교역량에서 아프리카 58개국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규모는 일본의 9분의 1 정도, 중국의 3분의 1정도다. 한국도 도약의 새로운 계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몽골의 긴밀한 경제협력은 한국의 경제력 향상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283만 몽골 국민의 소득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다.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
 

한국-몽골의 협력 및 결속 방식을 살펴보자. 현재 국가 간의 장벽을 낮춰 국민의 왕래를 용이하게 하고 관세 등의 무역장벽을 철폐해 거래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유럽 경제공동체에서 발전한 유럽연합(EU), 중미 및 남미공동시장, 북미자유무역기구(NAFTA)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국경의 문턱을 낮추면 물자와 인력은 물론 기술과 자본이 수월하게 국경을 넘나들게 된다. 각 나라는 비교우위의 이득(comparative advantage)을 향유하게 돼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다.
 

한몽 양국은 대외교역을 극대화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 양국이 지리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다 해도 향후 유라시아 철도망을 통해 신속하게 교통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협력의 구도를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 낮은 단계의 관세동맹 관계를 형성해 물자 교역을 자유롭게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추후 이를 한 단계 높인 비자협정을 통해 인력의 왕래를 좀더 자유롭게 하고, 자본과 기술의 이동을 더욱 수월하게 하는 방안도 있다. 이른바 ‘특수한 경제관계(sui generis economic relationship)’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의 성공적 경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역관계는 문화, 사회, 정치 방면에서 종합적으로 보조를 맞출 때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법적 구조(legal mechanism)’를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국가연합도 그러한 발전의 상위 단계에 해당한다. 국가연합은 ‘일종의 꿈’으로부터 이뤄낼 수 있는 것이지만 신중하고도 착실한 접근이 바람직하다.
 

국가연합이란 독립한 국가 간에 조약을 체결해 아주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Union)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연합의 구성국들은 각기 독립한 국가이므로 국가연합 형성 이전과 같이 독립된 정부와 군대를 유지하며 외교권도 종전과 같이 행사한다. 이런 까닭에 구성국은 각기 완전한 국제법상의 주체로서, 국제사회에서 독립한 권리와 의무의 당사자가 된다.
 

다만 구성국들은 일종의 통합된 중심기관을 만들고 그 결속을 과시하기 위해 흡사 유럽연합이나 초기 단계의 미국 국가연합처럼 통합헌장 및 상징 깃발을 만들기도 한다. 국가연합의 ‘통합된 중심기관’은 국가연합 형성 조약에서 명시한 부문에 한해 보조를 맞춰 공통의 외교정책을 취할 수 있고, 안보 면에서도 그 조약에서 합의한 바에 따라 단합된 국방정책을 취할 수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공통의 화폐 사용 및 물자·인력·자본·기술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 국가연합의 ‘통합된 중심기관’은 행정 및 ‘통합체의 지침’을 마련, 공동의 규범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국가연합 내부에 분쟁 해결을 위한 기구를 구비해 양국 국민의 의사를 종합적으로 수렴할 수도 있다. 국가연합의 통합된 의사는 구성국의 국내법을 통해 보조를 맞춰 반영된다.
 

이와 같이 국가연합은 통합된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는 구성국 간의 기구이지만, 그 법적·정치적 행위는 결국 양국의 국내 절차를 통해 ‘각자의 행위’로 나타난다. 따라서 각 구성국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각기 따로 책임을 지게 된다.
 

국가연합과 연방국가
 

국가연합은 구성국의 의사가 합치하는 한 존속한다. 국가연합이 불편하다고 확신하게 되면 구성국의 의사에 따라 탈퇴가 가능하다. 역사상 국가연합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연방국가로 발전한 경우 외에는 이런저런 사유로 와해된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네덜란드연합과 라인연합은 와해됐다. 1984년 리비아와 모로코가 ‘아랍아프리카연합(Arab-African Union)’을 형성한 바 있으나 얼마 안 가 모로코가 탈퇴의사를 밝혀 연방이 깨졌다. 세네갈과 감비아도 1981년 세네감비아 국가연합(Senegambia Confederation)을 형성했다가 1989년 와해됐다.
 

국가연합의 구성국 간에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 그 구성국들이 ‘통합된 중심기관’에 외교와 국방으로 대표되는 주권을 이양하면 ‘연방국가(Federation)’로 발전할 수도 있다.

 

미국 초기 단계의 국가연합이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발전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스위스도 초기단계(1201~1798, 1815~1813)에는 스위스국가연합을 형성한 바 있으나, 1848년에 연방국가로 발전했다.

 

그런데 스위스는 연방국가가 된 다음에도 종전의 스위스 국가연합(Confe·de·ration)이라는 국가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연합 내에서 독립 상태에 있던 필라델피아나 뉴욕 등 구성국들은 연방국인 미합중국이 성립되자 주(State)로 강등돼 제한된 주권만 행사하게 됐다. 스위스의 칸톤(Canton)이나 독일의 란트(Land)도 마찬가지다.
 

현재 세계에는 국가연합보다는 연방국가(federation, federal state)가 더 많다(미국, 캐나다,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인도, 말레이시아, 브라질, 멕시코 등 17~18개국). 연방국가라도 결속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와해된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유고사회주의연방공화국 체제하에 있다가 1990년대 초 유고가 무너진 후 ‘낮은 단계의 연방제(state union)’를 형성했으나 이후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선포했다.
 

영연방은 영어로는 ‘브리티시 커먼웰스(British Commonwealth)’라 불리는데 법적 의미의 연방제는 아니다. 영국 국왕을 상징으로 해 50개의 국가가 연방을 형성하고 있지만 모두 독립국가이며 영국은 회원국에 의례적으로 총독을 파견한다. 연방 내의 타국 국민에게 자국 국적 취득상 편의를 제공하는 등 우의적인 관계를 현시하는 것이 독특하다.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은 1991년 구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이 해체된 뒤 같은 해 12월21일 옛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가운데 11개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 모여 독립국가연합 헌장에 서명함으로써 결성된 연합체다. 그러나 독립국가연합 역시 일반적인 법적, 정치적 의미에서의 국가연합이 아니다.
 

조선족자치주의 경우

 

‘단일체국가(Unitary State)’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정부하에 통치되는 나라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단일체국가에서도 중국의 옌볜 조선족자치주나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와 같이 자치지역(self-governing region)이 있을 수 있다. 이들 자치지역은 대개 중앙정부의 ‘혜량(devolution)’하에 자치권이 부여된 경우다. 경우에 따라 일방적으로 자치권이 해제될 수도 있지만 타당한 이유 없이 함부로 자치권을 환수하는 경우엔 무리가 따른다.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연합은 국제법 주체가 아니므로 그 구성국은 각기 자주적으로 국가 주권의 모든 분야를 그대로 행사한다. 따라서 한국과 몽골 간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국가연합을 성립시킬 수 있다.
 

국가연합은 조약으로 결합한 것이라고는 해도 그 결합의 정도에 따라 ‘느슨한 국제조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결속이 강할 경우에는 그 구성국의 행위가 병행적(parallel)인 것이지만 사실상 통합된(integrated) 것이 되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외교, 국방, 경제 주요 분야에서 구성국 간에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 외적의 침략을 무수히 받아오면서 공동으로 영세중립을 표방해온 스위스의 칸톤들과 신대륙 종주국인 영국에 대항한 미국 초창기 동부의 여러 주가 그런 사례다.
 

현재 유럽연합은 국가연합으로 가는 상당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문화·사회적 결속은 끈끈해 보이지만 정치적인 결속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유럽연합 헌장안(案)이 부결된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연합은 형식적으로 간단한 조약의 체결로 손쉽게 구성될 수 있기에 자칫하면 비현실적인 이상에 치우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다소의 국가연합이 나타났으나 대부분 단명한 사실을 참고해 처음부터 그 디자인을 착실하고 정교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양국의 경제적 융합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경우에는 유럽연합에서 보는 바와 같은 화폐 통합을 고려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환전(換錢)을 편리하게 하도록 하고 자금 이동을 자유롭게 보장한다면 화폐통합이 없어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한몽 양국이 외교적으로 병행적 행보를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국이 추구하는 바가 국방에까지 이른다면 이는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 몽골의 3자 국가 연합론
 

한국과 몽골은 언어의 구조가 비슷하고 상당수의 기초적인 어휘를 공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양국 언어를 공히 잘 구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할 때 몽골이 쓰던 위구르 문자에서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식과 같은 힌트를 얻었다. 현재의 몽골인도 언어의 구조가 비슷한 한글 알파벳을 차용하면 지금처럼 러시아 문자를 쓰는 것보다 편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양국이 한글이라는 공통의 문자를 사용한다면 양 국민 간에는 어순이 같고 기초적 어휘가 비슷한 상대방의 언어를 쉽게 배우게 될 것이고, 양 국민의 관계는 급속도로 친밀해질 것이다.
 

두 나라가 경제적 협력을 가속화하면 국민의 왕래와 교역은 급속도로 증가할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으로도 가까워질 게 분명하다. 이러한 단계가 더욱 성숙하면 양국 사이엔 정치적으로 통합돼도 불편한 점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 것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영국과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와 공조하는 것처럼 한국과 몽골도 병행적 공조체제를 형성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의기투합’에 대해서는 인근 강대국들도 그리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남북통일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국제법적 시각에서 보면 한국이 주장하는 방안은 남북한이 각기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연합’이다.

 

북한도 ‘고려연방제’ 혹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같은 통일정부의 형태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 역시 남북한이 각기 독자적으로 외교와 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서 거의 완벽하게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연합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남북한이 주장하는 방안은 국가연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단일국가로의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남북한은 이러한 과도기 단계를 거치면 단일국으로의 통일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남북한 간에는 휴전(休戰)체제가 건재하고 있다. 지난 2월13일 6자회담에서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변경하는 문제를 적극 고려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된다면 남북한 간에 국가연합을 논의하는 것도 가능하다. 남북한은 동일한 민족이며 언어와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동질성을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남과 북에 각기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으며,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극복해야 할 난제도 적지 않다.
 

그런데 몽골은 건국 초기부터 장구한 세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북한 체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적지 않다. 남북한이 국가연합을 시도할 경우 몽골의 중개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다. 남북한과 몽골 3자(者)가 국가연합을 형성하는 경우에는 그 옛날 한반도와 몽골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공동 번영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동북아에서 ‘힘의 공백 상태’를 채워주게 되어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 :

한국-몽골의 역사적 관계와 향후 전망
 

몽골과 한국은 5세기부터 활발히 교류해왔다. 서기 400년 몽골의 니런(Nirun) 지방과 한국의 고구려 사이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성립됐다. 479년 니런 군주와 고구려 군주는 만주 디고간(Digogan) 지방을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 몽골 학자 달라이에 따르면 400년대 중반에 한국을 지칭하는 ‘솔론고스’라는 명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이미 사용됐다.
 

몽골과 한국은 12세기 후반과 13~14세기에도 활발히 교류했다. 당시 몽골은 대몽골제국시대(1206~1260)와 원제국(1260~1308) 시대였다. 칭기즈 칸은 한국과 연맹을 맺었다. 두 나라의 연합군대는 한국을 공격한 키단(Kidan)국을 1220년에 격퇴했다. 당시의 연맹동의서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들의 가까운 동지 사이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이 날을 잊지 않기를.”
 

이 동의서에 따르면 한국 왕은 몽골로 매년 15명의 특사를 보내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 사후 우게다이 칸 시대에 이르러 두 나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대몽골제국시대에 행해진 6번의 한국 공격 중 3번이 우게다이 칸 시대에 발생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대륙에 원 제국을 창건했고 한국과 다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쿠빌라이 칸은 한국의 태자에게 그의 딸을 주어 정략결혼하게 했다. 이 시대에 몽골은 제주도를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거점으로 이용했다. 이 무렵 몽골의 말들도 전쟁용으로 사육됐는데, 제주도 조랑말의 근원이 바로 몽골의 말들이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략결혼정책을 폈다. 무려 20만명 넘는 여성이 원제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를 ‘신부신랑 나라’ 또는 ‘어머니 나라’로 부르게 됐다.
 

원(元)에서 온 20만 여성
 

고고학과 인류학의 관점에서 몽골인과 한국인은 한 핏줄에서 비롯됐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그 증거 중 하나는 파란 몽골 반점이 몽골과 한국의 신생아 90%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두 나라 국민은 외모, 생활방식, 언어, 문화적 유산 면에서 너무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몽골 연구자 김기소니에 따르면 제주도에 사는 한국인들은 200개도 넘는 몽골어 단어를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몽골 연구자 라그바는 13~14세기 몽골인과 한국인은 유사한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고대 때부터 이미 ‘문화·경제적 연맹’이 몽골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확립됐다. 특히 그 시대 한국인은 몽골어를 공부하기 위해 몽골어 선생들을 초빙하기도 했으며 번역서도 펴냈다고 한다.
 

한국이 일본에 강점된 1910~1930년, 3000명 넘는 한국인이 몽골에서 농장 일을 하기 위해 몽골 정부에 몽골 시민권을 신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8년 10월에 몽골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양국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근거해 발전했다.
 

6·25전쟁 때인 1952년 몽골은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4~7세 한국 어린이 197명을 보호해주었다. 몽골은 이들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교육시킨 뒤 1959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몽골은 6·25전쟁 기간 북한에 많은 구호품을 원조했다. 4만392필의 말, 9094두의 소, 7만9965마리의 양와 염소, 1만7462벌의 모피, 4500벌의 두꺼운 외투, 1만켤레의 가죽부츠, 5만장의 양 가죽, 2248t의 육류, 30t의 버터, 65t의 지방질, 26만5000ℓ의 알코올 등이 그것이다.
 

몽골은 1990년 한국과 수교했다.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 한국과 수교한 첫 번째 나라였다. 몽골은 향후 북한과 한국이 관계를 정상화해 궁극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을 돕는 다리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울란바토르의 ‘서울 거리’
 

1991년 몽골의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이어 2001년 바가반디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에,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에 몽골을 찾았다. 몽골과 한국의 국회 간 우호적 교류도 활발하다. 현재 두 나라 사이엔 20개 이상의 동의서와 10개 이상의 프로토콜이 체결돼 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방문은 대몽골제국 수립 800주년 기념행사 중의 첫 번째 정상 방문이었는데, 이는 몽골로서는 매우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몽골 측 희망으로 한국은 몽골에 연화차관(국제통화인 달러를 빌려주고 현지통화로 상환받는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몽골의 물류-정보통신 인프라 구축에 사용될 것이다. 두 정상은 몽골 사막화 방지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이는 두 나라의 관계가 진일보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2006년 5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로부터 50km 떨어진 바가노르 지역에서 대한항공 직원 100여 명과 몽골인들이 강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를 심고 있다.

 

2006년 5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로부터 50km 떨어진

바가노르 지역에서 대한항공 직원 100여 명과

몽골인들이 강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를 심고 있다.

 

 

1990년 수교 이후 한국은 몽골에 54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했고 1500만달러를 무상원조하기로 했다. 한국은 몽골의 세 번째 투자국이며 두 번째 교역 파트너가 됐다. 두 나라간 교역량은 1990년 50만달러에서 2005년 1억2600만달러로 늘었다. 몽골은 금, 구리, 광석 등을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으로부터는 각종 공산품, 식자재, 소비재를 수입한다.
 

몽골엔 916개의 한국 기업체가 등록돼 있는데 이들의 투자 예상액은 1억달러 정도다. 이들은 주로 무역, 서비스업, 광산업, 정보통신, 운송, 건설, 관광업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몽골은 자원이 풍부한데, 두 나라는 1999년 에너지와 광물채광 부문에서 연합통제위원회를 확립해놓았다. 2002년 현재 9개의 한국 기업이 채광탐사에 관여하고 있다. 이 부문에 대한 한국의 투자는 총 투자금액의 20%에 달한다. 목축사업도 한국 기업에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다.
 

몽골측 집계로는 현재 2만1850명의 몽골인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한국 체류 몽골인들이 몽골로 송금하는 돈은 연간 3억달러로, 몽골 GDP 18억7000만달러의 16%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80명의 몽골 학생이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편 몽골 내에는 한국의 투자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3개의 종합대학과 3개의 전문대학이 있다.
 

2000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서울 거리(Seoul Street)’가 조성됐다. 몽골의 지방도시와 한국의 지방도시가 자매결연을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비정부기구(NGO)와 예술단체는 자선, 나무 심기 교류를 통해 양국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양국을 오가는 관광객 수도 늘고 있다. 2001년 바가반디 대통령의 방한 때 양국은 지식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통일한국’, 몽골에 이익
 

동북아시아는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독특한 지역이다. 불행히도 이 때문에 동북아에 위치한 몽골과 한국의 안보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몽골과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의 안보는 몽골의 국가 안보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 경제·정치적으로 강대한 통일한국 건설은 몽골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 한국과의 교류증진은 몽골 외교 정책의 우선과제 중 하나다. 만일 한국과 북한이 관계 정상화를 이룬다면 남북한에선 과학 기술에 기초를 둔 경제 개발이 촉진될 것이며 통일의 기반이 조성될 것이다. 몽골은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고 천연자원 및 동물 자원이 풍부하지만 인구가 흩어져 있고 항구가 없어 경제 개발이 부진한 상태다. 한국이 북한을 통해 몽골에 한층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몽골에 긍정적인 일이다.
 

몽골에 수출자유지역을 설립하고 인프라와 광업 분야에 투자를 증대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할 만하다. 또한 무역과 생산의 경제특구로 발전할 수 있는 첨단기술생산 단지를 양국이 공동으로 설립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몽골을 바다로 잇는 투만골 프로젝트에 한국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 몽골과 한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도 중요하다.
 

몽골과 한국의 연방국가 모색은 아직은 생소한 아이디어로서, 양국의 연방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의견을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목적을 위해 양국의 학자들과 조사기관에 의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양국의 연방국가 실현은 역사적인 결속과 전통, 지리적 위치, 사회심리학, 기타 많은 요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박원길 고려대 교수 :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에 대한 토론문
 

문화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역사적 관점이나 문화적 가치일 것이며, 변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 벌이는 외관의 변모일 것이다. 현재 몽골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관의 변모가 몽골의 핵심가치일 수는 없다.
 

2006년 칭기즈 칸 제국 800주년을 맞아 몽골 정부가 행한 나담축제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 첫 주제는 칭기즈 칸의 복원, 즉 역사의 복원이었다. 800명의 가수와 800명의 모린호르(마두금) 연주자가 칭기즈 칸이 태어난 성스러운 겔(몽골식 텐트)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현재 한몽 양국은 연구 성과의 부족으로 인해 서로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것들을 집약하기가 쉽지 않다. 향후 양국의 역사, 문화에 숨어 있는 진실이 올바로 양 국민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다.
 

동(東)몽골, 동북공정의 해법
 

국가연합에는 단계가 있다. 양국의 비교우위 이득을 위해 어떠한 협력 구도를 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일까 하는 제안이 우선 필요하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과 몽골의 현실을 고려할 때 양국간의 어떠한 협력방식도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의 이해와 연관돼 있다. 한국과 몽골의 경제·정치적 접근은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과 몽골만큼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민속적으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드물다. 우선 이를 통해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노력은 역사문화적인 접근에서 시작돼야 한다. 역사문화적인 접근은 학문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주변국의 주목을 받더라도 개입의 소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사·문화공동체로의 접근이 이루어진 다음에 양국은 보다 높은 결합단계를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이 바로 동(東)몽골 지역이다.

동몽골은 헨티, 도르노트, 수흐바타르 아이마크 지방으로서 몽골 국토의 약 20%에 해당하는 28만7600㎢의 땅이다. 2004년 1월 현재 22만2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역사지리학적으로 동몽골은 남북으로는 바이칼호 동부로부터 중국 내몽골 자치구와 실링골맹까지, 동서로는 헤를렌강이 시작되는 헨티산맥으로부터 쑹화강의 서쪽까지 광대한 초원지역을 가리킨다.
 

동몽골은 몽골과 한국의 고대 역사를 함께 복원시킬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양국의 경제적 미래가 좌우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선 동몽골은 몽골의 발흥지이자 우리 민족의 고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지역에는 우리 민족의 이주(移住) 설화를 비롯 고려 여인들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고 유적이 산재한다.
 

한국은 현재 고구려의 정체성을 놓고 중국과 대립상태에 있다. 그런데 한국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고대 한민족과 몽골민족의 역사유적 보고(寶庫)인 동몽골에 대해 심도 있는 조사와 연구를 벌일 필요가 있다. 몽골 역시 중국의 몽골사 흡수 시도에 대항해 자국 역사 지키기에 나서야 할 처지다. 한국과 몽골이 고대사 연구에 함께 나선다면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몽골 정부는 2004년 2월4일 내각회의에서 동몽골의 유적을 한국과 공동으로 연구·조사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다리강가와 할흐골에는 한국의 선조들과 관계된 수많은 역사유적이 있으며 전설들이 구전되고 있다. 동몽골의 한국 고대사는 한국인들의 관심에 따라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화려한 대륙, 개척의 무대
 

2004~2005년 고려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과 학술협회가 동몽골의 역사유적 탐구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는 종전의 경제 일변도적 접근보다 한 단계 진전된 형태임에 분명하다. 필자는 동몽골을 매개로 한 ‘한·몽 역사·문화공동체’를 우선 제안한다. 그러려면 지역전문가의 양성이 필요하다.
 

동몽골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세계 최대이자 최후의 천연 초원지대다. 메넨긴탈로 대표되는 끝없는 녹색의 바다에서 아프리카 세렝게티에 필적할 만한 무수한 야생동물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다. 이곳에는 100만마리가 넘는 차강제르(노루의 일종)가 서식하고 있다. 땅에 병풍처럼 내리꽂히는 벼락, 한밤중에 초원을 지붕처럼 덮고 있는 화려한 별빛을 바라보면 동화의 세계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동몽골에 대한 보고서는 모두 그 자연의 황홀함에 숨이 멎을 정도라고 결론짓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석탄, 아연, 우라늄, 석유 등 다양한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그런데 동몽골은 지정학적으로 시베리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루트다. 따라서 동몽골에서 북한 두만강, 한국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한반도와 몽골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개척의 무대가 될 수 있다.

 

1991년 UNDP(국제연합개발계획)는 중국, 북한, 몽골, 러시아, 한국 5개 나라에 지역개발을 위한 협력기구 창설을 제의했다. 이것이 모태가 돼 나타난 것이 바로 두만강계획(Tumen Programme)이다.
 

몽골족은 ‘바람의 민족’으로 불린다. 한국과 몽골이 공유할 수 있는 신바람의 진원지가 칭기즈 칸의 고향이자 한국 고대 역사유적의 보고인 동몽골에서 비롯됐으면 어떨지.   동몽골에 대해 경제적, 역사·문화적인 접근을 병행한다면 한국과 몽골의 관계는 더욱 좋은 방향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정리 장재언) 

 

 

 

 

 

 

 

 

 

 

몽골의 할하몽골족,

이란의 하자르몽골족,

러시아 투바자치구의 투바몽골족,

부리야트의 부리야트몽골족,

중국 내몽골의 내몽골족,

또한 이들을 통해서, 이들과 동류인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에벤족과 사하족

그리고 유목민족의 동류인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족,

그리고 몽골족의 사촌 티벳족 까지.....,

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강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아래 Play 단추를 클릭하여 몽골어로 부르는 [부흥]을 들으시며

아래 글을 읽어주세요. 그리고 몽골선교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 타 아디슬라츠 (부흥_ 몽골찬양)

 

 



 

(몽골에서 단기선교 기간 중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나를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하여 주심과 몽골에 보내심을 감사하며...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우리가 프로그램을 인간적인 계획으로 준비한 것들을 모두 폐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감사하며...(첫날,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의 워십실력과 찬양실력에 놀라서 과연 우리가 왜 여기에 왔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 팀을 돕던 교회청년 뱜바(23)가 갑자기 보여준 말씀)

 

갈라디아서 2장 1절~10절 말씀(이방인 선교가 받아들여짐에 대한 내용)
--몽골 선교가 받아들여짐에 대한 확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단기선교 마지막 날 받은 말씀)

 

군입대에서부터.....

제대하고 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특히 내가 기도하고 간구했던 많은 기도제목들이 응답되었다는 것에서 그랬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우리 능곡교회 청년회의 이름으로 단기선교를 가고자하는 기도였구요..(군대에서 군종생활하면서 시작한 기도였는데. 이렇게 전역하자마자 응답받은 겁니다.)

 

몽골단기선교는 저에게 그렇게 큰 의미의 응답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사실, 제가 단기선교를 가고자 품고 기도했던 나라는 카자흐스탄이었습니다. 제 성급한 마음으로는 카자흐스탄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무슬림의 세력 확장을 막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카자흐스탄이 아닌 다른 길을 예비해주셨습니다. 바로 몽골입니다.

 

몽골에 부흥의 불씨가 당겨지면 몽골은 물론 중국, 카자흐스탄, 러시아 주변 여러 국가들(중앙아시아 주변 국가)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몽골과 인접한 나라 중에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카자흐스탄이 있고 또한 몽골안에도 카자흐스탄인과 러시아인들 소수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몽골과 가장 비슷하다는 제주도에 갑자기 단기선교를 가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몽골은 내가 기도했던 카자흐스탄이 아니었기에 확신이 없었는데 제주도 러빙코리아를 하게 되면서 몽골 땅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확신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몽골에 가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급하게 준비해서 간 우리는 많이 준비하지 못했고 기도도 아주 많이 부족했으며 현지 사정이나 지교회의 사정도 잘 알지못했지만, 그래서 그때 그때 준비한 프로그램 대신에 갑자기 급조된 프로그램으로 대신해야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때그때 마다 잘 풀렸습니다.

 

단기선교는 맨땅에 헤딩하기라고 하죠. 아무래도 선교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알고 준비했어도 우리가 준비한 뜻,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봤자, 날씨가 안 따라주면 할 수 없고 장소가 안 따라주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준비한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들로 인도하신 데로 프로그램을 성공리에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서 열심히 준비해봤자 얼마나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신 주님... 그때 그때 마다 인간의 계획과 준비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을 하게하신 주님...

 

 

몽골에는 라마불교와 무속신앙을 섬기는 사람들이 90% 이상이라고 합니다. 라마불교가 무언가 하니, 불교에 힌두교에 여러 무속이 혼합된 완전 사탄의 종교더군요.

보기만해도 섬뜩한 우상들과 마귀와 사탄, 지옥 사자의 형상들...(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사탄의 상징표시를 손가락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던 박불관의 어느 조그만 라마불상의 모습..) 원래 제가 품던 나라는 카자흐스탄이었는데요.

 

몽골에 와서, 왜 하나님께서 나를 몽골에 보내셨는지 왜, 몽골에 가기 전에 제주도로 보내셨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몽골은 완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비롯한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붙이시고 유업으로 주신 땅이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인들, 특히 한국 크리스천들을 많이 좋아합니다.

 

한국 크리스천들이 몽골땅을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를 설렁거스(무지개) 라고 부르는 나라입니다. 또한 몽골땅에 가서 보니까.. 우리의 전통문화와 닮은 점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친숙했습니다. 성황당과 비슷한 오보.. 또한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비슷한 훈촐로 석인상.. 또한.. 조상숭배를 하는 풍속까지.. 너무나도 친숙하더군요..

(하지만 주로 무속신앙이나 조상숭배에 관한 게 비슷했습니다. 또한 제주도와 많이 흡사해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제주도 교회들이 몽골땅을 여러가지로 열심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우리가 사역할 교회는 몽골땅에서 제일로 큰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라는 곳이었습니다. 조유상 선교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였는데 알고 보니 제가 군대에서 군종 활동 할 때 같이 활동하던 조항영 형제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물론 조항영 형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모두들 보통의 인연이 아니라고 했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인연이라면서..)

 

교회는 매우 크고 단기선교 시즌마다 여러 교회가 다녀가고 여러 교회가 후원하고 있는 교회여서 인지 교회가 꽤 크고 그곳의 청소년들도 워십이나 찬양의 수준이 한국에 비추어 보아도 매우 수준급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연 우리가 왜 이런 교회에 오게 된 것일까?' '이런 큰 교회에 우리가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시험도 들었지만 그것은 기우였습니다.

 

물론 이 몽골민족이 똑똑하고 해마다 많은 팀들이 다녀가고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교회와 실력있는 한국인 워십교사들이 많이 있었기에 그들의 워십이나 찬양 수준은 수준급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믿음과 복음에 대한 충족함 그리고 구원의 확신은 없어 보였습니다.

 

하긴 그 교회가 4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그들이 워십과 찬양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쪽으로 공략하려고 했으나 단순히 그들이 율동과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들의 찬양과 워십에는 신앙이 없는 단순한 외침과 몸짓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전혀 계획에 없던 마지막 프로그램을 진행 했을 때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사탕과 껌.. 그리고 문구류를 바랬지만, 그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진정한 복음과 그들을 위한 뜨거운 기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아주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성도들과 우리를 돕던 청년들,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매일 끊임없이 계속해서 터져나 오는 찬양들(찬양이 아침에 시작되어 밤까지 계속됩니다..절대 멈추는 법이 없죠. 잠도 안자고 찬양부릅니다..ㅡㅡ;)

 

또한 두려움과 스스럼이 없는 적극적인 전도활동(먼저 찾아가서 전도지를 주면서 전도하는 아이들과 찢겨져 버리고 구겨져 버려진 전도지를 보면서 우는 시늉을 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정말 너무나도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와 말씀에 대한 갈급함....우리가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도 하는데 우리는 이렇지 못했구나...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단기선교 기간 동안에 교회 가족 수련회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요. 수련회 장소는 몽골에서 가장 큰 '서지연 선교사 기념 수양관'이었습니다.

 

잠깐 수양관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서지연 선교사는 내가 군대에 막 갔을 무렵, 그러니까 2001년이죠. 이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를 가장 많이 섬기는 교회인 '금호교회'에서 단기선교를 오가던 대학4학년의 학생이었습니다.

 

1차로 몽골선교를 다녀오고 2차 선교여행을 갈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른 멤버들은 다 경미한 부상을 입었지만 서지연 자매는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물론 청년 단기선교팀의 일원이었지만 선교를 가려다 죽었다고 해서 순교한 선교사라는 영광스러운 직분과 함께 서지연 선교사의 순교를 기념하여 수양관을 짓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수양관에서 서지연 선교사의 유품들을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아! 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죽을 수 있다면...!)

또한 수양관에서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는데, 오양가(23)라는 자매였습니다. 신학생이었는데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의 지교회 2곳 중 가장 작은 지방 교회를 맡고 있는 지교회 지도자였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아무리 신학생이라지만 23살의 나이에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혼자서 섬기고 있다는 것에 매우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 자매가 저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헌신하는데 나는 무엇인가?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양관에서 그 자매를 붙잡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 귀한 헌신을 기쁘게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즘도 가끔 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 기도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오양가 자매의 꿈은 한국에 가서 복음성가 사역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노래를 매우 잘 부릅니다..)

 

 

 

가족 수련회 둘째 날이었던가? 첫째 날부터 계속해서 내리던 비가 그쳤더군요. 아침에 나아가서 수양관 앞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또한 이 몽골 땅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이 땅이 주님의 땅이 되길 원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갑자기 소리질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땅이 주님의 땅이 되길 원합니다! 주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소서!' 내가 기도하는 소리가 시끄러웠던지 수양관 옆에 있던 게르(동그란 텐트처럼 생긴 몽골 전통가옥)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른 아침부터 웬 소란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군요. ^^ 개인적으로 가장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주일이 지나고 여름성경학교를 하고 몽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유치부 교사로서 단기선교 기간 만큼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안아주고 기도해 준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우리 유치부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사랑해주었습니다. 또한 교회 사람들도 나를 사랑해주었습니다. 교회를 떠날 때 아이들이 너무 많이 울더군요. 우리를 떠나 보내는 게 너무나도 가슴 아파 보였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능곡교회 청년회의 첫 단기선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작지만 귀한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제 남겨진 씨앗들은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우리 부족하고 부족한 능곡교회 청년부를 들어 귀한 주님의 사역에 사용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 드립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나.. baysaa (광규의 몽골이름...바이사: 기쁨)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신 이방 땅의 형제들..자매들..아이들.. 기도 동역자들..

 

베게마(노아), 아노카, 바상후(민들레)..어요나(하은)..?(미소).. 그리고 뱜바(승권), 바타(바다), 간치미크(미진), 간토야(하연), 얻거(열정), 자그하, 섿게르, 서열머, 청년회장, 아긔, 오양가(주은), 등등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주님이 주신 사랑하는 이방 땅..

몽골 땅을 품고 나아갑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몽골의 수도가 경제, 몬화, 교육 등의 중심지이고 인구는 약 87만 명이며 면적은 1,358 제곱 km이며 총 몽골 인구의 1/3이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살고 있다.

시의 상징은 항가리드 (KhanGarid))이며 이 항가리드(KhanGarid))는 용을 잡아먹고 산다는 전설상의 새들의 왕이다. 1639년 할흐족 부족장 투쉐이트항(Tusheet Khan) Gombodorj 쉐레트차간호수 주변에 유목도시를 건설하고 도시명을 어르거(Orgoo-궁궐이라는 뜻)라고 명명함. 이후 몽골의 수도는 어르헝, 톨, 셀렝그 강 유역을 20여 차례나 이동하면서 도시명도 수 차례 개정되었다. 1778년 현재의 위치에 정착하면서 도시명을 이흐 후레(Ukh khuree- 큰 도시라는 뜻)로 변경했다.

 

1924년 인민혁명이 달성된 후 전국인민 대표자 회의에서 몽골인민 공화국이 선포되고 도시명도 혁명 영웅인 수흐바타르(Sukhbaatar)를 기념하여 올란바타르라고 개명했다. 남방 성산보그드산을 위시한 4 개의 산에 의해 분지로 둘러 싸여져 있으며 톨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해발 1351m, 7월 평균기온17도, 연강수량270mm 중 대부분이 여름에 비가 온다. 특별시로서 시내에는 고층의 빌딩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전통가옥인 게르에서아파트로 이사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1990년 민주혁명이래 꾸준히 발전해 왔으며, 1993년부터 관광이 개방되어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 받고 있는 처녀지이기도 하다. 국영 호텔의 우수한 시설과 식사 등은 외국 관광객에게 조금도 불편을 주지 않으며, 종업원의 영어 실력도 우수하다.

 

 

 

비행기에서 내려보는 올란바타르는 초원의 중간에 떠 있는 섬 같이 보이며 근교에는 전통가옥인 게르가 보이고 시내북쪽으로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이며 서쪽 공장지대 굴뚝에는 연기가 나고 있다.

 

공항은 시내에서 40분 거리로 시내까지 가는 데는 초원으로 연결되어 있어 양이랑 말이 가까이 다가 갈수록 건물, 차, 사람이 많아진다.

 

시의 중심은 몽골 최대의 백화점인 국립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평화(엔흐타이방-Enkhtaiban)의 거리 주위에 우체국, 각국의 대사관, 수흐바타르(Sukhbaatar)광장, 국립극장, 드라마센터, 바양골(bayangol)호텔 등이 있다.

 

 

수흐바타르 광장


 

 

도시의 중심부에는 수흐바타르(Sukhbaatar)광장이있다. 이곳은 1921년 혁명의 영웅인 뎀디니수흐바타르가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한 장소이다. 결과적으로 1989년에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집회를 열었던 첫 번째 장소이기도 한 수하바타르는 각종 국가행사들이 개최되며 평상시에는 조용한 정취를 느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칭기스칸 기념관
 

칭기스칸의 몽골건국 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칭기스칸 기념은 밖으로는 말에 올라탄 칭기스칸의 멋들어진 동산이 세워져있으며, 그 안쪽으로는 칭기스칸의 조각상과 능궁이 전시되어 있다. 그 주변에는 그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면 칭기스칸의 손자 후바리에도 소개되어있다. 또한, 역사적인 장문을 벽화로 만들어 놓아서 그 당시 사용되었던 전통적인 공예품도 감상할 수 있다.

 

 

 

 

 

 

 

 

 

 

 

 
 

 

 

 

 

 

 

 

 

찰스 핸디가 지은 책을 노혜숙 씨가 번역한 [최고의 조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도전적인 구절이 있어서 소개 합니다.

 

개인은 자신을 돌봐야 한다.

현재의 능력이 10년 후에도 수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반듯이 새로운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것인가?

하지만 경험에 의한 실험과 단련이 더 필요할 것이다.

 

 

  

 

 

 

 

 

 

 

 

  
 

 

 

 

 

 

중국, 아프리카연합 본부 청사 쾌척(快擲)

 

자원외교 사활…2억달러 소요
 

아프리카에서 자원 확보를 위해 노골적인 외교 행보를 보이고 있는 중국이 이번엔 아프리카연합(AU) 본부 건물을 지어주는 '통큰 지원'으로 화제다.
 

중국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둔 아프리카연합에 높이 99.9m, 연면적 5만2000㎡ 크기의 복합건물을 기증했다.

 

이 청사는 700여명과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회의장을 갖췄다. <로이터> 통신은 또 중국이 건립비 이외에도 사무실 가구비 등 2억달러(약 2240억원)에 이르는 모든 비용을 "풀로 지불했다"고 밝혔다.
 

중국의 권력 서열 4위인 자칭린 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은 28일 이 건물에서 열린 제18차 아프리카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해 "3년간 6억위안(1064억원)을 지원하겠다"며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그는 "아프리카연합은 중국의 중요한 협력 파트너이자 중국의 핵심이익과 관심사를 지지해준 친구"라며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전략적인 상호 신뢰와 협력을 확대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총리도 "우리 파트너십의 미래는 더욱 밝아졌다"고 화답했다.

 

이를 본받아 한국은 가까운 몽골과 좀더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어떨지. 

 

 

 

 

 

 

 

 

 

 

 

 

 

네팔을 복음화하기 위한 선교회가 창립될 전망이다.

 

 

네팔은 약 3억5천개의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2008년 공산당에 의해 왕정 정치가 끝난 뒤 지금은 7개의 당이 존재하고 있다. 2009년에는 성탄절이 공휴일로 지정되는 등 점차 기독교의 영향도 받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중앙) 총회는 최근 창조중앙교회(담임 서옥임 목사)에서 (가칭)네팔선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이날 예배에는 합동중앙 증경총회장 서옥임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총회장 조갑문 목사가 ‘충성하는 신앙’을 주제로 설교, 유인몽 목사가 헌금기도, 곽정순 목사가 특송, 이연실 목사가 대표기도, 이광원 목사가 네팔 현지 보고 등을 했다.

 

네팔선교회는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도울손·주는손(가명) 선교사를 통해 라디오 방송선교를 후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된다.

 

도울손 선교사는 예장 합신에서 신학을 마친 뒤 합동중앙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경기서북노회 창조중앙교회의 파송으로 네팔에서 활동 중이다. 현지에서 언어 번역과 신학교 사역을 해왔다.

 

도 선교사는 약 5년 전부터 라디오 방송선교를 위해 기도해왔다.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산지가 많은 현지의 특성상, 라디오 의존도가 매우 높아 복음 전파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창조중앙교회에서 처음에 500만원을 모금해 후원했지만, 기본적인 장비 일부를 사는 데 그쳐 쉽게 진행되진 않았다. 다행히 3년 전 익명의 여집사가 2천만원을 후원하면서 꿈이 현실이 되기 시작했고, 이후 방송 허가를 받고 지난해 10월부터 전파를 송출하고 있다. 현재는 방송국 건물을 건축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옥임목사는“과거 우리나라에 선교가 시작될 때 외국인 선교사들이 현지화에 주력했기에 이렇게 국민의 25%가 예수를 믿는 기적을 이루었듯, 도울손 선교사는 이 방송국을 현지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며 “3년 안에 방송국이 자체적으로 운영되면 현지인들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다른 선교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광원 목사는“라디오를 통해 설교 및 건강, 보건, 의생 정보를 전하고 네팔의 의식을 깨우는 일 등 전반적인 삶의 변화가 기대된다”며 “이번 선교회 조직은 범교단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울손 선교사는“방송국에서 헌신하는 직원들 월급과 방송국 운영 경비 등 매달 한화로 약 350만원이 필요하다”며 “자체적으로 방송국을 운영할 시스템을 만들어 놓을테니 3년만 도와 달라”며 후원을 요청했다.

 

 

 

 

 

 

 

 

 

 

 

 

뉴욕정원교회 주효식 목사

세계 문화 중심에서 역동적 선교

 

 

주효식 목사

 

매주 월요일 저녁 맨하탄 타임스퀘어 광장에서는 찬송소리가 울려 펴진다. 젊은 청년들이 주축이 돼 진행되는 이 플래시 몹은 영어와 한국어로 찬양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타임스퀘어 광장에 모인 전 세계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 플래쉬몹(Flash Mob)은 순간을 의미하는 flash와 군중을 의미하는 Mob의 합성어로 인터넷에서 사전에 공지된 지령에 따라서 특정한 시간에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특정시간 동안 그 지령에 따라 행동하고 흩어지는 행위(모임)을 의미하고 이런 형식의 집회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들이 대다수인 이 플래시몹은 뉴욕정원교회(담임 주효식 목사)의 역동적인 맨하탄 선교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불신자가 신앙인으로, 또 세계의 중심인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복음을 외치는 전도자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맨하탄 사역 8년째를 맞는 2012년, 뉴욕정원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소망에 찬 모습으로 새해의 사역을 펼치고 있다.
 

맨하탄 34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불과 두 블럭 떨어진 곳에 위치한 뉴욕정원교회는 8년 전 가스펠 카페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맨하탄의 중심지를 찾은 수많은 한인 및 외국 관광객들이 이 가스펠 카페를 거쳐 갔다. 그 중 유명 스포츠 스타, 기업 CEO, 세계적 학자, 연예인들도 있었다. 도심 속에 카페로 알고 이 곳을 찾았다가 십자가를 보고서 교회인 것을 알고 반가워 하는 이들이 많았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도심 속의 아늑한 카페를 체험하고 이곳이 곧 교회임을 알게 됐을 때 모두 신기해하면서도 반가워했다. 가스펠 카페는 교회가 전도를 위해 세상과의 접촉점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열린 선교를 지향하는 주효식 목사의 목회철학이 반영돼 있다.

 

이런 철학이 뉴욕정원교회가 맨하탄이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100명이 안 되지만 맨하탄을 움직이는 교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맨하탄 목회에 도전해 하루하루 은혜 가운데 맨하탄의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뉴욕정원교회 주효식 목사를 만나봤다.
 

새로운 신자를 전도자로
 

뉴욕정원교회 성도들 중 80%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청년들이다. 그런 이들이 전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전도자로 변화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맨하탄에서의 문화사역과 교회는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는 주효식 목사의 목회 철학이 기인하고 있다. 뉴욕정원교회의 문화를 통한 사역에 신선함을 느낀 청년들이 교회를 찾게 됐고, 단순히 양들을 길러내기보다 온 민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포부로 적극적인 선교에 나서는 교회 분위기에 새로운 신자들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뉴욕정원교회의 선교 열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교회의 장로이면서 평생 거리에서 전도해보지 못한 이들도 있는데, 교회에 처음 나온 청년들이 타임스퀘어라는 곳에서 전도를 하는 것에 대해 주효식 목사는 “뉴욕정원교회 성도들의 특권”이라고 했다.

 

뉴욕이라는 황금어장에 있다는 특권의식을 갖고 거기에 맞는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 주효식 목사의 생각이다. 세상의 화려한 문화 한가운데서 기독교의 문화를 전파하고 그것과 더불어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골리앗과 같은 세상문화를 피하지 말고 오히려 한가운데로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효식 목사는 강조했다.

 

매주 타임스퀘어 광장 한복판에서의 갖는 찬양과 기도 플래시몹은 이런 담대한 마음 가운데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문화를 방어하기 급급하기보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리에서 뉴욕과 세계문화의 중심을 상징하는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고 있다. 주효식 목사는 맨하탄에서 기도를 할 때면 이곳이 바로 황금어장이라는 흥분을 갖고 더욱 열심을 내 기도하게 된다고 했다.

 

문화의 중심지에서 늘 선교하면서 주효식 목사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도 세계 문화의 트렌드와 흐름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요즘은 한류문화의 힘과 저력이 피부와 와 닿고 있다고 했다.

타임스퀘어 광장 플래시몹이 과거에는 영어를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요즘은 오히려 한국말로 할 때 더욱 반응이 좋다고 한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외국인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뉴욕정원교회가 보통의 예배당이었다면 이 처럼 폭넓은 선교의 문을 열어두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효식 목사는 강조했다. 카페를 통해 세상을 향해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주효식 목사는 이 세상과의 접촉점을 늘 연구하고 있다.

 

교회 밖의 사람과 내가 연결되는 그곳이 바로 선교의 현장이란 것이다. 맨하탄 한 가운데서 진행되는 바자회, 선교활동, 기도회 등은 이런 문화와 세상 그리고 교회의 접촉점을 만들어 내면서 맨하탄에 필요한 선교의 모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모두 안 된다고 할 때 도전했던 맨하탄 목회

 

뉴욕정원교회의 타임스퀘어 플래시몹. 정원교회는 이처럼 세계 문화 한가운데서 역동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맨하탄 목회를 시도한다는 것은 마음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당장 막연하게 렌트비를 구하는 일과, 주택가도 아닌 맨하탄에서 성도들을 모은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맨하탄 목회를 시작하는 주효식 목사에게 소위 성공했다는 한인 기업가들을 주위에서 소개시켜줬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그 자리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여기는 목회가 안 되는 곳이니 애초에 포기하라”며 문전박대했다.

오히려 뉴욕정원교회를 도운 것은 믿음 좋다는 신앙인들이 아닌,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자들이었다. 시각장애자가 교회를 찾아 헌금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신앙이 별로 깊지 않은 행인이 불현듯 헌금을 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

 

교회가 카페만 사용하던 공간을 넓혀 지금의 예배장소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어느날 주효식 목사가 예배 장소를 두고 홀로 앉아 고민하면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우연히 카페를 찾은 이가 들은 것이다.

 

이 행인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주효식 목사에게 “목사님! 성전 공사가 필요하세요?”라고 갑자기 물었다고 한다. 와 있는 줄도 몰랐던 생면부지의 사람이 교회 공사를 돕겠다고 했을 때 놀라움과 감사가 교차됐다는 것이 주효식 목사의 회상이다.

 

뉴욕정원교회에 처음 입주했을 때도, 때에 따라 성전을 확장할 때도 이런 기적과 같은 일들이 많이 있었다. 때문에 주효식 목사는 분명한 사역의 목적을 두고 교회를 이끌 때 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식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더 의뢰하게 됐다고 했다.
 

맨하탄 목회를 시작하기 전 격려보다는 “6개월이면 문을 닫을 것”이라는 주변의 부정적인 말들을 뒤로 한 채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세운 교회가 벌써 8년이나 지났다.

 

젊은 청년들도 유흥업소도 많은 32가에 교회가 세워져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지역사회에서 놀라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역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교회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주민들도 있다. 문화의 도시라는 맨하탄의 특성상 일반목회가 아닌 문화에 포커스를 맞춘 사역을 해야 하고 일반 민가가 아닌 상업지에서의 목회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을 교회로 안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효식 목사의 맨하탄 목회 구상은 지역사회의 칭찬과 증거 가운데서 그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문화사역, 그 꿈이 목회를 통해 이뤄지다
 

뉴욕정원교회는 카페를 통한 전도사역, 전도된 이들에 대한 양육사역, 그리고 방송선교사역을 3대 사역으로 삼고 있다. 창세기 1장 31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뉴욕정원교회는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의 문화를 회복하고자 한다. 세계의 경제, 문화예술 중심지인 뉴욕 맨하탄 브로드웨이에 극장을 성전으로 봉헌하고 노력하는 것도 이 말씀에 기초해 있다.

 

미국과 서구의 많은 성전들이 식당, 술집, 카지노장으로 변하고 있는 이 때에 오히려 교회는 더욱 공세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효식 목사는 강조한다.

대중에게 공개된 극장에서 세상 문화보다 더욱 뛰어난 문화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꼭 보여주겠다는 비전이다. 주효식 목사는 바벨탑 문화를 우상화하는 현대인들이기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창세기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문화 명령이자 반드시 수행하고 완수해야 할 우리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뉴욕정원교회 성도들은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플래시몹이 끝나면 성전으로 봉헌하기 위해 눈 여겨 둔 극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기도회를 갖고 있다.

 

목회 불초지와 같았던 맨하탄에서 기적과 같이 길을 열어주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에 브로드웨이 극장이 성전으로 봉헌될 날이 곧 오리라 믿으며 뉴욕정원교회 성도들은 기도하고 있다.

 

주효식 목사는 학창시절부터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목회의 길로 들어선 그는 목회와 문화를 분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문화를 더 수준 높은 하나님의 문화로 품고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주효식 목사는 MBC합창단에서도 활동했었다. 그러한 그의 문화사역은 지금 맨하탄 목회를 펼치면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효식 목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방송국사역도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문화의 변혁과 복음전파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송사역을 위한 소망도 가슴 한켠에 품고 있다.
 

문화의 중심에 세워진 교회, 세상과의 접촉 점 만들어

 

▲젊은 청년과 유학생이 주축이 된 뉴욕정원교회는 늘 활기가 넘친다. 주효식 목사는 활기찬 청년들과 함께하는 목회가 스트레스가 오히려 해소되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주효식 목사는 교회는 사람이 얼마나 모이느냐 규모가 얼마나 크냐는 것보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하는 교회가 중요하고 건물보다는 사역이 중요하다.

 

주효식 목사는 선교의 황금어장과 같은 무대에서 그물을 던지는 것이 뉴욕정원교회의 사명이라고 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매주 순종하며 동행기도회를 갖는다.
 

맨하탄은 복음화율이 4% 이하로 영적인 황무지와 같다. 수 많은 교회들이 문을 열고 닫고를 반복했다.

이 가운데서 무에서 유로, 7년 동안 소수를 이끌고 지금까지 온 것이다. 기드온의 300 용사와 같이 여기고 골리앗과 같은 현장에서 승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매일 기도해 왔다. 맨하탄에서 이뤄지는 세상과의 다양한 접촉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어떻게 들어올 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다. 뉴욕정원교회는 늘 그런 부푼 기대와 새로움을 갖고 맨하탄에 우뚝 서 있다.
 

주효식 목사는 CCM계에도 이수만·박진영 씨와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유명 연예인들이 회심하고 목회자가 돼 일반목회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무조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목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지 교회 안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같은,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기독교 문화 컨텐츠들이 더욱 많이 나와야 하고, 세상 문화에 방어적인 교회보다는 공세적인 교회가 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런 철학을 가진 주효식 목사는 뉴욕정원교회가 단순히 한인 목회를 위해 세운 것만이 아닌, 맨하탄이라는 특수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민족을 선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말했다. 다민족의 인구가 모이는 맨하탄 황금어장에서 열방을 품는 기도를 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이다.

 

주효식 목사는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 철야기도회에서 성령의 강한 임재를 체험하면서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이스라엘어 등 8개 국어를 하는 방언을 받게 됐다. 어린 시절 왜 그러한 방언을 주셨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맨하탄 목회를 하며 사도행전 2장에 천하 각국에서 모인 민족들의 방언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과 같이 세계의 중심 맨하탄에 모이는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한 비전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주효식 목사는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어려 민족들 가운데 이런 은사를 반드시 사용하실 것을 믿고 있다. 맨하탄 목회를 시작하기 전 물고기 뱃속에 있었으나 오히려 이 힘든 기간을 통해서 주효식 목사는 맨하탄 목회라는 더욱 분명한 평생의 목표를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제 입을 언젠가는 사용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임스퀘어광장에서 사도행전에서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제2의 부흥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 꿈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從北 저격수 조영환 / 문성근 잡으러 부산 간다

 

 ‘從北킬러’ 조영환 前올인코리아 대표가 무소속으로 19대 총선 출사표를 던졌다.
 

趙 전 대표가 출마를 결심한 지역구는 <부산 북강서을>이다. 이곳은 민통당(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자 ‘백만 민란’ 선동가인 배우 문성근이 출마를 준비 중인 곳이다.
 

從北세력은 이번 총선에서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던 낙동강 방어선을 무너뜨리겠다는 戰略으로 부산 공략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로 민통당 지도부는 18일 취임 후 첫 지역 방문지로 부산을 택해 부산에서 불게 될 민통당의 바람을 三國志 ‘적벽대전’의 동남풍에 비유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문성근은 “내가 출마하게 될 북강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0년에 서울 종로구 당선이 확실한데도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지역구라 인연이 깊다. 연고도 없고 태어난 곳도 아니지만 정말 정책으로 접근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겠다”고 했다.
 

마음은 늘 北에 있고 몸만 南에 있는 從北세력
 

민통당 원내대표 김진표는 三國志를 예로 들면서 “한나라당에 백 만 대군이 있다면 민주통합당에는 지혜롭고 용맹한 문성근, 문재인, 김정길, 조경태, 김영춘 장군이 있다. 4월 총선 승리로 부산이 정권교체 이루는 적벽대전 동남풍의 진원지가 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지혜롭고 용맹하다’는 민통당 장군들의 그 동안 행태를 보면 하나같이 주한미군철수, 국보법폐지, 연방제통일로 압축된다. 대한민국의 국체를 수호하겠다는 장수는 한 명도 없다. 특히 문성근의 경우 ‘남북국가연합’을 하겠다는 인물이다. 머릿속에는 ‘위수김동’과 ‘친지김동’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듯 하다. 마음은 늘 北에 있고 몸만 南에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北으로 올라가 ‘김정은 애숭이 장군’ 밑에서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어야 어울리는 정치인이다.
 

이처럼 다급한 현실을 직시한 趙 전 대표는 그 동안 운영해온 인터넷 매체 <올인코리아> 대표에서 물러났다. ‘낙동강 전선’ 사수에 ‘올인’(All-in) 한 것이다. 趙 전 대표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돈키호테’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지금 趙 전 대표는 누구보다도 진지하다.
 

조영환 前대표가 부산 출마를 결심한 계기
 

<조갑제닷컴>과 <참깨방송>은 18일 서울 모처에서 趙 전 대표를 만나 총선 출마의 변과 함께 그를 출마하게 만든 시국상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 원래 연고지가 강원도 울진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고 많은 지역구 가운데 경남 부산을, 그것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된 계기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의 의사를 수렴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선거다. 그동안 우리 愛國 右派 단체들이 수많은 집회와 광고를 해왔는데, 직접적인 선거를 통해 정치권에 진입하지는 못했다. 나의 꿈은 원래 全國정치를 하는 것이었으며, 지금 같은 대한민국의 위기가 없었다면 고향인 울진에서 출마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베트남 패망 직전과 같은 理念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左翼은 이념 지향적으로 집단이 통합-강화되고 있다. 반면에 左翼이 아닌 집단은 保守-右翼理念을 포기하고 中道의 이름으로, 또는 中道도 모자라 左傾化 하고 있는 상황이다. 理念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하면서 保守-右翼理念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이 모든 상황이 理念전쟁인 것이다.
 

한쪽은 理念을 가지고 싸우는데 한쪽은 理念이 없다고 한다. 이 가운데 理念을 가지고 싸우겠다는 左翼세력이 이번 총선에서 가장 먼저 타깃으로 삼은 지역이 바로 ‘낙동강 전선’이다.
 

지금 이 지역에서는 문성근-문재인-김정길을 위시한 親盧세력들, 理念的으로는 從北세력들이 6.25사변당시 김일성 군대가 허물지 못한 ‘낙동강 전선’을 60년이 지나서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남쪽에서부터 左翼들이 부산을 중심으로 서울로 쳐들어 올라가겠다는 冷戰時代의 理念전쟁이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를 막으려 부산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대한민국의 內戰的 상황을 일반국민, 그리고 右翼단체와 中道정당에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정당과 단체가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문성근-문재인-김정길과 같은 從北세력이 벌이는 理念전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싸움을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해결 방안은 하나뿐이다. 이들이 싸움을 걸어온 이상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부산은 6.25사변당시 김백일 장군과 같은 愛國者들이 공산군에 맞서 맨주먹으로 싸워 지켜낸 땅이다. 保守-右翼세력에게도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낙동강 전선을 지켜냄으로써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다. 從北세력이 부산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배후를 치겠다고 하는데, 나라도 이들을 상대로 수류탄 한발이라도 던져야겠다는 심정으로 출마하게 됐다.
 

연고지는 강원도 울진이지만 부산은 내 자신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부산 저축은행 비리사건이 ‘광주일고 출신들’에 의해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해왔고, 국민행동본부와 함께 직접 부산에 가서 이 같은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얼마 전 ‘희망버스’란 미명 하에 左翼들이 부산의 영도조선소에서 亂動을 부렸을 때 나는 부산으로 달려와 이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데 부산에 연고도 없는 문성근이 부산을 점령해 대한민국에 보복하려 들고 있다. 左翼革命세력이 부산을 휩쓰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나 혼자라도 가서 從北세력의 부산점령을 저지할 것이다. 그러려면 ‘뱀의 머리를 쳐야겠다’고 생각했고 ‘백만 민란’ 선동꾼 문성근을 상대로 삼았다. 문성근과 같은 부잣집 망나니를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가서 호통을 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는 재미이고 진정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선택은 부산시민들의 몫이다. 문성근이 주도하는 ‘깽판’이 좋고 ‘백만 민란’이 좋다면 그를 뽑아 업보(業報)를 받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성근이 反亂者이자 赤化통일의 앞잡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뽑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  <조갑제닷컴> 

 

 

 

 

 

 

 

 

 

 

 

 

북한이 1월22일 중앙통신, 노동신문을 통해 김정은이 조선인민군 제671 대련합부대 지휘부를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어제 공군 354군부대, 조선인민군 제3870군부대 행각에 이어 오늘 또 다시 671대연합부대 지휘부 방문을 공개한 것이다. 아마도 음력설에 맞춰 김정은의 업적을 조작하기 위한 설명절 정치 행보인 듯하다.

 

그런데 이번 북한의 공개자료를 보니 특이한 대목이 있다.

 

동행 인물들 중 장성택의 이름을 제일 먼저 거론한 것이다. 노동신문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장성택동지,조선인민군 대장들인 김명국동지,김원홍동지,조선인민군 중장 리두성동지가 동행하였다.";;고 했다.

 

단순히 이름만이 아니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장성택동지.";;라고 직함까지 나열했다.

 

이런 전개는 김정일이 생존해 있었다면 노동신문은 물론 중앙당 선전선동지도부 전체 간부들이 해임됐을 대형사고이다. 북한은 그 동안 김정일 유일지도체제 확립을 위해 친척을 지칭하는 ";;곁가지";;를 철저히 차단했다.

때문에 노동신문과 같은 공개자료들에서는 장성택의 이름을 동행 간부들 속에 섞거나, 아니면 마지막에 새겨 넣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더구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명예직일 뿐, 현재 장성택의 실제 직함은 인민보안성, 감찰조직만을 담당한 중앙당 조직지도부 행정담당 부부장이다. 그런 장성택이가 김정은의 군부대 시찰에 군 장성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것은 의도적인 배치가 아니고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거 김정일 군 시찰 공개 자료들에서도 장성택의 이름은 군 장성들 뒤에 항상 소개돼 왔다.

 

북한의 이번 공개는 장성택을 사실상 북한 권력의 제1인자로 인정하고, 또 은밀히 과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장성택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선언한 셈이다. 

 

 

 

 

 

 


5m짜리 나무 위에 올라간 염소떼가 포착돼 놀라움을 주고 있다.

2일(현지시간) 영국 대중지 더 선 등 외신은 모로코 토드라 계곡 인근에서

한 나무에 올라간 염소떼 사진을 소개했다.

사진을 보면 염소떼 중 일부가 이파리나 열매를 먹기 위해

나무를 오른 것으로 보인다. 나무에는 무려 9마리의 염소가

올라서 있고 꼭대기까지 올라간 염소도 있었다.

사진 속 나무는 아르간 오일로 유명한 아르간 트리로 알려졌다.
 

호주 시드니에서 온 사진작가 개빈 올리버(38)는

모로코 일대를 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 도롯가에서 염소들이

나무를 타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사진으로 담아냈다고 한다.

올리버의 말에 따르면 당시 30여 마리의 염소가 있었고

나무에 오른 염소들이 움직일 때마다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는 가수다, K팝스타,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 코리아 갓 탤런트, 메이드 인 유….

 

방송마다 이른바 오디션 프로그램이 봇물입니다. MBC의 ‘나가수’가 끝나는 일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나가수 순위’가 주요 검색어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나름대로 우리 음악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댄스곡 위주의 K팝이 지배하고 있는 대중음악계에서 ‘노래실력’이 가수의 본령이라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지요.

 

고려대 경영학과 장하성 교수는 한 신문의 칼럼에서...

나가수’가 △기득권 없이 실력으로만 경쟁하고 △노래는 시대를 넘어 다양한 장르로 구성돼 있으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많은 사람이 승자가 되며 △청중평가단이 세대를 아우르고 △탈락한 가수에게도 박수를 보내는 점 등이 사람들에게 어필한다고 분석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우리 사회에 비춘, 참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디션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곤 하지만, 뒤돌아서면 왠지 모르게 씁쓸합니다. '엔터테이너 공장'에서 상품처럼 아이돌 스타를 만들어내는 것도 마뜩치 않지만, 이미 일가를 이룬 음악가에게 순위를 매기는 것이 불편합니다.

 

저는 대중가수의 생명은 ‘자신만의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개성을 어떻게 점수화할 수 있을까요?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밥 딜런이나 영시(英詩) 교과서에 소개되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이 ‘나가수’에 등장하면 몇 주를 버틸 수가 있을까요?

 

요즘 대중문화에 대해 생각할수록 대학 때 빠져들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여러 경고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 학파의 학자들은 전체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경고했지요. 문화가 획일화하고 감정마저 계량화되는 사회, 사람들은 일차원적이 돼 선동에 쉽게 휩쓸리고, 이성과 합리성이 설 자리는 잃는 그런 사회를….

 

오디션 프로그램 얘기를 하면서 너무 거창한 주제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획일화와 계량화에 무감각해진 것은 아닌지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저만의 옥 생각 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성은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가 못지않게, 음악을 찾는 사람도 개성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디션 프로의 순위를 놓고 왈가왈부할 시간에 이름 없는 카페에서, 음반가게에서 또는 인터넷에서 자기에게 딱 맞는 음악가를 찾아 사랑을 듬뿍 쏟아 붓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요? 그러면 우리 대중음악이 참 푼푼해질 것 같은데 ..... 

 

 

 

 

 

 

이번 주 쉽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며, 세포 내 각종 화학반응의 촉매물질인 단백질.

 

참치는 대표적인 고단백 식품으로 육류와 비교해도 월등한 우위를 보인다. 100g당 참치의 단백질 비율은 27.4%로 돼지고기의 19.7%, 쇠고기의 18.1%, 닭고기의 17.3%보다 훨씬 높다.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이 찌지 않는 음식으로 참치만한 것이 없어 대표적인 다이어트 식품인 닭 가슴살을 대체할 만한 음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참치를 먹으면 다이어트할 때 흔히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

 

 

 

성인병 걱정 뚝! 오메가3 지방산
 

덴마크 아알보고병원 연구팀에 따르면, 에스키모인들이 육식 중심의 덴마크인들에 비해 성인병에 잘 걸리지 않는데 이는 에스키모인들의 주식인 생선에는 EPA, DHA 같은 오메가3 지방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PA는 혈중의 중성지방 및 인지질을 저하시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출 수 있도록 해주고, 혈액이 응고되는 것을 막아 동맥경화, 심장병, 뇌졸중 등의 예방에도 효과가 크며, 혈압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농촌보다는 어촌 사람들에게 성인병이 적은 것도 EPA가 풍성한 참치 등 생선을 자주 먹기 때문.

 

일본 역시 연간 50만 톤 이상의 참치를 소비하는 등 등푸른 생선을 매일 섭취한 것이 대표적인 장수 국가가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로 꼽힌다.

 

오메가3 지방산 중 DHA는 뇌 지방 속 인지질 구성의 약 10%를 차지하며,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 성장기 어린이들의 학습능력을 좋게 해준다. 노인성 치매 예방은 물론 망막의 중요한 구성성분으로 노안 방지에도 효과적이다. 인체 내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섭취해야 하는데, 가장 효율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참치다.

 

노화방지 & 항암작용 탁월! 셀레늄
 

참치에 들어 있는 셀레늄은 체질이 산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작용을 하는데, 그 효율이 토코페롤의 100배에 해당한다.

체내에 셀레늄이 결핍될 경우 신체 기능에 영향을 미쳐 심장질환, 관절질환, 세포 노화, 면역기능 저하 등 각종 성인병과 노화 유발의 위험이 있으므로 참치를 섭취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 셀레늄은 항암 및 수은 중독을 중화시켜주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빈혈예방과 혈압유지 효과! 황아미노산 & 철분
 

참치에는 콜레스테롤을 저하시키는 타우린, 메티오닌, 시스틴 등의 황아미노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혈중 중성지방을 감소시키고 동맥경화를 예방하며, 타우린 성분은 담석을 제거하고 혈압을 정상으로 유지시켜준다.

 

또한 참치의 붉은 살 중에서 피가 많이 모인 부분에는 헤모글로빈의 주성분인 철분 함량이 높아 여성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는 빈혈을 방지해주는데, 비타민C가 많은 채소와 함께 섭취할 경우 흡수율이 더 좋아진다.

 

 

 

비만의 주범, 트랜스지방 제로!
 

쇼트닝과 마가린으로 대표되는 트랜스지방은 해로운 콜레스테롤의 수치는 높이고, 이로운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추는 작용을 해 고혈압·동맥경화·심장병·뇌졸중 등 혈관질환을 일으킨다.

 

하지만 참치는 지방 함량이 낮을 뿐만 아니라 함유되어 있는 지방도 혈관질환을 예방해주는 웰빙 지방인 불포화지방산이다.

그 중에서도 인체 합성이 불가능해 음식을 통해서 보충해야만 하는 오메가3가 들어 있다. 오메가3는 한국인에게 가장 결핍되기 쉬운 영양분 중 하나. 때문에 적당한 양의 참치를 섭취하는 것은 체지방이 쌓여 비만과 성인병을 걱정할 필요없이 몸에 이로운 지방의 효과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다이어트의 적, 고칼로리 걱정 끝!
 

양이 적어도 엄청난 칼로리를 가지고 있는 음식들에 비해 참치는 100g만 섭취해도 성인의 하루 단백질 필요량의 절반을 충족할 수 있다.

 

특히 콜레스테롤의 함유량이 극히 적고 탄수화물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저칼로리 식품이라 날씬한 몸매를 원하는 여성들이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면서도 다이어트로 날씬한 몸매를 가꿀 수 있는 이상적인 미용식품이다.  

 

 

 

 

 

 

 

 

 

 

  아침반(9:30) 낮반(1:30)  오후반(4:30) 저녁반(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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