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2,  2012

 

 

 

 

 

 

 

 

 

 

Sometimes love would bloom in the springtime

Then my flowers in summer it will grow

Then fade away in the winter

When the cold wind begins to blow

 

봄이 되면 때때로 사랑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내 사랑의 꽃도 활짝 피어납니다.

그리고는 겨울이 다가와 꽃은 시들어가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지요.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하지만 그 사랑이 푸르고 푸르러 있다면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푸른 채로 남아 있지요.

사랑이 푸르고 푸를 때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처럼..

 

So hold my hand and tell me

You'll be mine through laughter and through tears

We'll let the whole world see our love will be

Evergreen through all the years

 

그러니 나의 손을 잡고 말해줘요.

웃음과 눈물 속에서도 나의 사랑으로 남겠다고..

푸름을 간직한 우리사랑

모든 세상이 볼 수 있게 말이에요.

 

For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하지만 사랑이 언제나 푸르고 푸르러 있기에

여름 뿐 아니라 겨울에도 푸른 채 남아 있겠죠.

사랑이 푸르고 푸를 때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처럼..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 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1952년 1월 25일

전남 해남군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1980년 문학과 지성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단

2006년 옥관문화훈장 수상

 

 

 

 

 

 

 

 

 

 

 

 

 

 

 

시의 출발은 항상 사춘기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를 처음 썼던 때가 중학교 3학년 때 쯤으로 생각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고 괜히 누군가 보고 싶어지곤 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동경이라고 할까, 설렘이 있던 바로 그 자리가 시가 태어난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자신 대학에서 시작법을 가끔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 느낀 적이 많습니다.

시에 대해서 일정한 이해나 믿음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약속 아래서 시 쓰기를 해야 할 텐데 딱히 '시는 이런 거다'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제 경우에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곤 합니다. 후줄근한 차림새의 우편 배달부 청년이 망명 생활 중인 대 시인 네루다에게 자꾸 접근하면서 시가 뭔지 좀 가르쳐 달라고 하지요. 이 청년이 시를 필요로 하는 목적은 뻔해서, 시인 하면 떠올리는 것은 여자들한테 편지가 많이 온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술집 종업원 아가씨에게 접근하기에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써 시를 쓰고 싶어했고, 네루다를 계속 졸라댔지요. 거기서 네루다가 청년에게 알려준 시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은유(隱喩)였습니다. 네루다는 시를 물으러 온 첫 순례자라고나 할까, 순진무구한 청년에게 '시는 은유다'라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수영을 즐기다 나온 네루다는 편지 한 통을 들고 찾아온 청년에게 지금 자기가 쓰고 있는 시를 읊어주죠.

 

'바다는 일곱 개의 초록 혀이다/나는 바다다/나는 바다다/그 이름을 부르며 절벽을 내리친다'

 

이런 시를 읊어주니까 청년은 '말들이 어지럽다. 말들이 출렁이는 배처럼 어지럽다'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네루다가 '그래, 그게 바로 메타포라는 거야'라고 일러줍니다. 말들이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 말들이 반복되면서 출렁출렁거린다는 것을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라고 말하는 게 은유라는 거죠.
 

은유의 눈부신 매혹 앞에서
 

모든 시가 은유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저 장대한 교향곡, 어마어마하게 큰 대성당 따위의 건축물, 저 신나고 스피디하고 스펙터클한 영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매력을 지닌 연극… 이런 여러 장르의 예술에 비한다면 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미디엄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시는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일 뿐이죠. 다른 예술 장르들은 미디엄이 굉장히 크고 매체 자체가 주는 파워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입니다. 시는 미디엄 자체가 언어 외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여러 예술 가운데 시는 가장 시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언어라는 미디엄을 같이 공유하는 게 소설일 텐데, 시는 짧기도 하고 압축시켜야 하는 등 모든 예술 장르 가운데 어떤 면에서 가장 초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라하고 시시한 시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힘, 눈부신 매혹을 자랑하는 것은 많은 시인들이 구사하고 있는 은유 덕분입니다.

은유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보들레르의 시들을 흔히 예를 듭니다. 보들레르는 「원수」라는 시에서 '내 청춘은 한갓 캄캄한 뇌우(雷雨)였을 뿐'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 내 청춘은 캄캄한 날벼락이었다'

 

이 시가 언어로써 성립시키는 '청춘은 번개다'라는 은유를 피카소 같은 대 화가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위대한 작곡가라 하더라도 언어로써 딱 완성되는 청춘의 번개를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건축가가 청춘의 뇌우를 대리석을 얹어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은유는 시의 가장 고유한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은유로 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 멋진 표현들로만 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금방 질리고 맙니다. 어떤 삶의 비밀을 알려 주는 내용이 배제된 채, 수사적으로만 은유를 사용할 때 그것은 공허해집니다.

 

삶의 비밀을 압축하면서 하나의 은유가 성립되었을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이를테면 젊은 시절의 보들레르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악이라고 표현한 현실 속에서, 금치산자로 알콜 중독자로 매도 당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자신만의 지고한 이상을 모순어법적으로 이 더러운 현실 속에서 언어를 보석화시켜서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라는 놀랄 만한 은유를 성립시켰을 때 시는 어떤 예술 장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시를 쓸 때에는 자전거를 끌고 대 시인을 찾아 다녔던 우편 배달부와 같은 수준도 못 되었습니다. 연애 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 쫓아다니다가 은유라는 것을 체감적으로 터득했지만, 시가 처음 찾아온 사춘기 무렵에 내가 생각했던 시란 지금 생각해도 유치 무비한 것이었습니다. 김소월의 '초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혹은 이발소 그림과 함께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라는 속된 경구 수준이었거나, 아니면 소월류의 직설적인 감상주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손위 형님이 자기가 쓸려고 사다 둔 60년대 일기장이 있었어요. 그 일기장에는 매월 그 달에 어울리는 우편엽서 같은 풍경에 시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11월이면 낙엽이 쌓여 있었고, 거기에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시가 적혀 있는 걸 좋아서 외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6월이었던가, 사슴이 멀리 있는 숲을 배경으로 릴케의 '고독'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어요. 별것도 아니었는데 '고독 너의 희푸른 이마에 나를 눕히노니' 하는 부분을 읽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너져내려 견딜 수 없게 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아마 다른 많은 분들도 시를 읽으면서 얼마쯤 다르기는 하지만 저와 마찬가지의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주저앉는, 길을 걸어가다가 무릎의 힘이 푹 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리는 느낌을 경험한 사람만이 시를 읽을 수 있고 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읽고 즐기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눈, 시의 눈이 가슴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이게 주저앉아 버려야 합니다. 시를 향한 눈이 먼저 열려야 다른 사람의 시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감흥이 반복되면서 눈높이가 점점 올라가고 시적 수위가 높아질 때에 시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가 나를 찾아와서, 시가 들어갈 가슴에 있는 경락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흔히 낙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낙서를 하고 그 낙서가 떨어지는 글자로 끝나지 않고, 대개는 친구건 이성이건 누군가에게 편지, 혹은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모든 시의 출발은 이 일기장과 연애 편지가 아닌가 합니다.

밑 모를 두려움과 함께 자기 자신이 항상 못마땅해 자책하는 심정이 되었을 때, 또는 마음이 밖으로 열려서 누군가가 보고 싶어질 때, 혹은 어떤 곳으로 훌쩍 가버리고 싶어질 때에 품는, 이른바 먼 곳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낭만성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시의 출발점은 이 낭만성, 자기의 다른 것에 대한 그리움, 설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40이 넘고 전업작가로서 시집도 내고 하는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모든 시인들은 최초의 그 자리, 낭만성이라고 하는 불편한 공명 통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백발이 성성한 정현종 선생님을 연세대에 가서 뵈었는데, 제가 약간은 속으로 비난하는 투로 '선생님, 선생질 재미있습니까?' 했더니 파안대소를 하시면서 '지금도 젊은 여 제자를 보면 연애하고 싶어' 그러더라고요. 아! 저게 시인이구나 항상 어떤 동경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가 시인이구나 하는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문예반 한답시고 고등학교 때부터 벌써 머리가 벗겨진 조숙한 친구 녀석과 같이 서로 불량배 흉내를 내면서 교복도 이상하게 입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를 대학에서도 만났는데, 저보다 시적 수준이 높고 시 써놓은 것을 보면 진도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녀석이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시를 노트에 써서 읽어 보라고 주었습니다. '왜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가'라는 시를 보여 주었는데, 당시 나는 '무슨 시가 이러냐? 이미지도 없고 시어도 아름답지 않고…' 하며 김수영의 시를 못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몰랐고 대학에 와서 접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문학지인 「현대문학」 등을 읽으면서 나도 금방 시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김수영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또 정현종의 시들을 만나면서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 이전에 내가 시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유치한 한낱 감상주의의 똥물에 불과했는지, 얼마나 거짓되게 언어만을 이쁘게 다듬은, 마치 가성으로 입을 모으고 점잖게 노래 부르는 여학생 같은 시 만에 길들여져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시적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경멸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일정한 시들에 대한 경멸 혹은, 그 동안 자기가 시라고 생각했던 것, 자기가 써놓았던 시들에 대한 혐오감 따위가 젊은 시절의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내가 써 놓았던 것들이 밤에는 위대한데 아침에는 형편없어지는 그게 정말 속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쓰라림이 진하면 진할수록 시의 눈높이가 올라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눈높이만 높다고 해서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눈높이는 높은데 시는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을 높여야 한다는 것. 자신의 눈높이만큼 시를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는 것, 그리고 낙차에 대해서 진실로 괴로워해 보는 것 그런 괴로움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좋은 시에 대해서 찬탄할 수도 있고, 이런 경멸과 찬탄이 반복되면서 시적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서구적 교양의 굴레를 벗어나
 

대학 시절의 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한국어로 된 시가 너무 시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외국 시들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되고, 외국 시들을 볼 때에 영어나 불어나 독일어로 되어 있는 시들은 너무 멋있는데, 왜 우리 조선말로 된 시들은 멋이 없을까 하는, 어쩔 수 없는 서구적 교양으로 무장된 그 당시 우리 세대들의 분위기를 조장했던 학교 교육 탓으로 문화적 사대주의에 깊게 침윤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감탄했던 것은 영시(英詩)든 불시(佛詩)든, 어떤 나라 시든 간에 그들의 시 자체에 자기 형식이 있다,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규제 장치가 있다, 그런 규제 장치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어렵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규제 장치를 맞추고 시를 썼을 때의 성취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시라고 생각할 때, 시와 시 아닌 것의 차이를 대체로 어디서 봅니까?

외적인 형식으로 볼 때 풀어 쓰면 다 산문인데, 시라고 행 갈이를 합니다. 우리 나라 시에서 시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행을 끊거나 잇달아 쓰는 것입니다. 행 갈이 했다고 해서 그게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도 아닌 것을 행 갈이 해서 억지로 시인 체하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단테 신곡의 '세 번째 칸토(Canto)'를 참 좋아하는데 지옥의 문 입구는 신곡 전체가 3부로 되어 있죠. 지옥, 연옥, 천국 그리고 각 부가 33칸토로 되어 있습니다. 3부 33칸토, 각 연이 3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곡을 지배하고 있는 숫자는 3입니다.

신곡 전체가 33 곱하기 3이니까 99칸토죠. 서시가 1칸토 더해져서 전체가 100칸토입니다. 이 숫자는 기독교적인 상징입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중세인들을 사로잡았던 종교적인 강박관념에서 연유한 거죠. 99에 하나 더해서 100, 100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건축가가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를 만드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고 할까, 3행으로 되어 있는 각 연은 한 행이 11개의 음절로 되어 있습니다. 각 행의 마지막 단어들의 모음들이 전부 일치해 있습니다. 각 음절은 강약강약 이런 강세에 의한 음악적인 박자감이 있습니다. 13세기 이탈리아 무연시의 형식인데, 14세기에서 셰익스피어 시대까지 소네트 형식과 함께 어떤 것이나 시이기 위한 음악적인 구조, 건축술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식으로 감정만 읊조려서는 안 됩니다. 언어를 그야말로 연금술사처럼 가공을 해야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세 번째 칸토(Canto terzo)' 지옥의 입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PER ME SI VA NE LA CITTA’ DOLENTE,

PER ME SI VA NE L’E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GIUSTIZIA MOSSE IL MIO ALTO FATTORE:

 

전부 'e'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음, 모음, 자음, 모음이 뚜렷이 구분되어, 이태리어 특유의 투명성이 반향처럼 울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음향만이 아니라 여기에 깃들인 의미도 기가 막힌 걸 알 수 있습니다.

나를 거쳐서 슬픔에 잠긴 도시로 가거라/

나를 거쳐서 영원한 괴로움 속으로 가거라/

나를 거쳐서 사라져 버린 족속 곁으로 가거라 - 라고 지옥 입구에서 단테가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그 당시 피렌체의 현실이고, '슬픔에 잠긴 도시', '영원한 괴로움' 등은 모두 피렌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억압하고, 견디기 힘든 현실을 두고 '자기를 통해서 가라'고 첫마디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나를 통해서 현실로 가는' 강렬한 주관성은 곧 단테의 문학적 근대성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절절함과 음향적인 자기질서가 보기 좋게 교직 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145'-러브송에서도 마찬가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Those lips that Love's own hand did make
Breathed forth the sound that said 'I hate'
To me that languished for her sake;
But when she saw my woeful state,
Straight in her heart did mercy come,
 

1행과 3행의 'make', 'sake'라는 단어로 각운을 맞추었습니다. 2행과 4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운(rhyme)이 잘 맞아 있고, 10음절을 한 행으로 12행을 만들고, 여기에 2행을 추가해서 14행 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태리어와 영어는 전혀 다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음향적인 질서를 지킨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이런 점은 보들레르에게서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이런 외국 시들을 읽으면서 한국어로 시 쓰는 것에 대해서 깊은 콤플렉스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은 부착어여서, 우랄알타이어, 티벳어, 일본어까지 음절이 부착되면서 의미가 발생한다. 속어로는 굴절어라고 하는데 활용에 의해서 그런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닐까. 소월 시에 들어 있는 7.5조 4.4조에는 이런 미터 개념의 가락은 있지만 그냥 가락만 직선적으로 지나갈 뿐이지, 행과 행 사이에 어떤 화성적인 기둥이랄까 음량의 부피가 없다. 우리 시는 평면적이고 가늘다. 나는 왜 이런 후진국에 태어났나...'

따위의 정말 터무니없는 자책감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가스레인지를 켰는데 파란 불꽃들이 돋아났습니다. 그게 풀잎같이 보이더라고요. 파란 보랏빛 풀잎처럼 보여요. '불 속의 풀, 불 속에 피어 오르는 풀' 하면서 주절주절거리다가 책상에 와서 그 구절을 하나 써놓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불 속에 피어 오르는 불, 풀 따위의 각운(脚韻)이랄까 하는 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한번 써보면 어떨까 하고 앞 단어를 맞춰 봤습니다. 졸시 「메아리를 위한 각서(覺書)」가 그렇게 쓰여졌는데, '불 속에 피어 오르는 푸르른/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하는 대목처럼 '불'하고 '풀'을 앞에다 뺐습니다.

술이란 단어가 금방 떠올라 불, 풀, 술, 술 처마신 몸과 넋에 제일 가까운 등 울, 물, 줄, 둘 첫 단어의 유음 현상을 의도적으로 뺐습니다. 불에서 둘에 이르기까지 소리가 메아리 되어 나가는 그런 의도라고 할까, '불 속에 피어 오르는 푸르른/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소리 들릴락말락/줄넘기하는 쌍무지개/둘레에 한세상 걸려 있네'라고 읊었습니다.

 

줄넘기하는 무지개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까. 이걸 써놓고 그날 밤은 흥분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 아, 나는 천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두려움이 왔습니다, 이건 한밤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다음날 봤는데 견딜 만해서 다시 정서해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나는 굉장하다고 말해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재미있다고 하시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제가 시를 발표한 지 20년이 넘습니다만, 그 어떤 평론가도 이 시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 실린 「뱀풀」이라는 시에서는 음향적인 조건을 더 작위적으로 했어요. '열'자도 맞추고 두운, 각운을 다 맞춰 봤습니다. 역시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즉 어떤 평론가도 여기까지 의식이 안 와 있었습니다.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습니다. '현단계 한국시에서 이 두 시는 실패했다.

 

우리말로 시를 쓸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행 갈이로도 음향적인 장치로도 이미지로도 시가 되게 하는 절대적인 보존을 못해주는데,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그래 내가 시를 쓰지 말자.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쓰자. 시적인 것을 찾아보자. 결국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일 거다. 시적인 것은 뭐냐. 시적인 것은 모든 성공한 시 속에 들어 있다. 모든 시가 성공한 시인 것은 아니지만, 시적인 것은 성공한 시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은 그 말을 압니다. 시라는 것은 도사들만 하는 건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시를 아는 사람만이 정확하게 알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시와 관련된 여러 현상들 속에, 얼마만큼 시적인 것에 대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를테면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등에서 여고생들이 줄 서 있는 시집들 속에는 사이비 시들이 대부분입니다. 시 비슷한 것을 우리가 시라고 생각하거나 제가 사춘기 때 시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눈높이는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시적인 것의 추구를, 형태 파악을 통해 지금까지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떤 반시(反詩)적인 것 가운데서 찾았는데, 시를 쓰는 전략만이 아니라 80년대의 고통스러웠던 권위주의 독재체제하에서 현실에 항의하고자 하는 메시지로서 형태를 비판하고 이상한 짓을 한동안 자행했었습니다. 대단히 파괴적이고 한국문학의 자폭에 이른 수준이죠. 그런데 자폭이라도 해서 우리 언어가 얹혀져 있는 현실이 참으로 문제 있다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지옥의 입구에서 번뇌하는 피렌체(단테의 신곡)

 

 

 

 

 

 

 

 

 

 

 

 

다음 주 월요일(7월23일)에는 미국 TV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작품과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에미상(Emmy Award) 시상식이 있다. 이미 후보가 발표되어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레드 카펫 행사도 그렇지만 시상식에 오른 사람들이 올해는 또 어떤 수상 소감을 밝힐지 궁금하다.  이런 관습이 한국에도 전해 져 미국과 비슷한  관행으로 시상식이 진행된다.

 

그런데 한국의 시상식에는 미국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 보인다.

언제인가 연말 한국 각 방송사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거머쥔 스타들 중에 수많은 관중과 카메라를 응시하며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수상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TV 앞에 앉아 시상식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어머, 저 사람도!” 라며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을 한 번쯤 가져보지 않았을까?

“우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수상 소감 하나만 가지고도 생방송으로 전 국민의 안방을 강타(?)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크리스천에게는 순으로든 역으로든 파워풀한 진리다. 크리스천에게는 이름 석 자 뒤에 따라오는 한마디의 천명(天名)이 있다. ‘크리스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는 말씀처럼 우리는 하늘의 성씨를 가졌다.
 

독일의 발달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갓 태어난 유아는 자신을 돌보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사회에 대한 신뢰감을 발달시킨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 형성되는 신뢰감 대 불신감은 어머니와 유아의 관계의 질에 의해서 결정되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맺게 될 사회적 관계에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적응하는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에릭슨의 이론은 크리스천들의 인간관계 형성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복음으로 거듭난 크리스천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되고, 사랑의 관계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신뢰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세상 속에서 얼마나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이끄느냐를 결정한다.
 

인간관계는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에서 출발한다. 유아들이 낯가림을 하듯이,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기인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방황하듯이,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관계와 공간을 넓혀가기 어렵다.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알리는 것만큼 가장 성공적인 관계를 이끄는 자기 소개는 없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자기 소개서 작성의 테크닉을 가르쳐주고, 자기 소개 시나리오에서 공연까지 기획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도서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그에 비길 만한 창의적인 크리스천 PR법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첫째, 관계의 포문을 여는 당신의 실탄에 글귀 한 구절을 새겨 넣으라.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네주는 명함에 성경 구절이나 축복의 글 등을 적어 넣어 활용하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색함이나 망설임 없이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알릴 수 있다.

 

탤런트 한인수 장로는 자신의 명함 뒷면에 다음 글귀를 적어 놓았다.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당신은 잃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분을 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요즘은 명함에 QR코드를 넣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곳에 신앙에 관한 좋은 정보를 소개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명함 한 장이 자기를 잘 전해줌과 동시에 전도의 기회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둘째, 이메일을 통해 감동의 메시지를 날려라.
 

교보생명 송기정 상무는 한 주에 한 번씩 직장 상사와 동료, 부하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평안의 복음이 담긴 글귀들을 간단히 출처만을 밝히고 전송한다. 이를 위해 평소 한 달에 2~3권의 신앙 서적을 읽고, 주일날 설교 시간에는 필히 노트를 준비해 메시지들을 기록한다고 한다.

 

나는 이메일을 보낼 때마다 자동으로 따라가는 서명에 다음 성구를 넣어두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된것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

 

길거리 깡통처럼 굴러다니는 이메일을 포워딩(fw)만 하지 말고 단 한 줄이라도 생명의 말씀을 보내라.

 

세째, 회식 자리(이민사회도 의외로 회식자리가 많다고 한다)에서 물이나 사이다를 술처럼 즐기며 마셔라. 술자리는 공식적으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드러낼 수 있는 데뷔 무대이기도 하다. 그 자리를 모면하려 애쓰기보다 상사와 동료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섬겨라. 취중진담을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마지막으로 대접하기와 손해보기를 즐겨라.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며 궂은 일을 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모은 자료를 공유하라. 섬김으로 크리스천임을 확증하라. (장재언)

 

 

 

 

 

 

 

 

 

 

 

 

 

 

 

 

 

 

 

 

 

 

 

 

 

 

 

 

자연적인 사람은 결코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것 같다.

인간 본성에서 그런 사랑이 나올 수 있을까? 가끔은 부모의 사랑이 그렇게 보일 때가 있지만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직 내가 부모가 되지 않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를 위해서 내 자식을 키우는 어그러진 사랑들을 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이번 학기에 문예창작과 수업을 하나 듣고 있다. 시창작 수업인데 나로선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운 숙제들로 진작에 드롭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후회도 살짝 하는 중이다.

현대시인 작품 중에 5편 골라 알레고리(은유(隱喩))에 대해 써오고 아포리즘(aphorism-격언 ,경구, 잠언)이 드러난 시를 뭐 어쩌고...  라는 데, 그냥 마구마구 시들을 읽다가 참 공허하고 싸한 느낌이 들어 몇 개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예수님 없이 내가 사랑했던 자리는 폐허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내 꿈틀거리는 사막, 고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하는 나에게 왔던 사람들은 어딘가 다 부서졌을 것이다.

사죄하는 마음과 더불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도 함께 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고 싶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은 다 허무하다, 헛되고, 생명도 없다. 내 헌신, 희생, 나의 자기부인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든 것이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위한 것이었길, 또 그렇게 되길 기도한다

주님, 매 순간 눈을 내게 두셔서 나를 살펴주소서 !

 

 

 

 

 

 

 

 

 

 

 

 

 

 

Central and Eastern Europe are the most exposed to the euro area and could suffer disproportionately from an accelerated withdrawal of bank funding or portfolio capital. Asia appears better shielded from the euro area crisis, reflecting limited direct financial linkages and strong foreign exchange buffers.

 

Nonetheless, conditions in regional dollar funding markets have tightened since mid-March and rising global uncertainty and weaker external demand are causing headwinds for export-dependent economies such as the Republic of Korea. Growth in China has also slowed, weighing on markets across Asia, as well as on global commodity prices.

 

'Global Financial Stability Report -GFSR Market Update. Intense Financial Risks: Time for Action' 중에서 (IMF, 2012.7.16)

 

국제통화기금(IMF)이 어제 발간한 보고서 ''Global Financial Stability Report'에서 유로존 위기와 관련, 한국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국제경제의 불확실성 증가와 대외적인 수요 감소로, 한국처럼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가 '역풍'(headwinds)을 맞고 있다."

 

"... and rising global uncertainty and weaker external demand are causing headwinds for export-dependent economies such as the Republic of Korea."

 

우리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수출감소'에 따른 불황심화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IMF가 유로존 위기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중부유럽이나 동부유럽과는 달리 유로지역의 위기로부터 보호막이 잘 쳐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융 부문에서 직접적인 연계성이 제한적인데다 외환 부분에서도 강력한 완충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중순 이후에는 달러 조달 사정이 빡빡해졌다..."

 

중국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중국도 경제성장이 둔화됐으며, 이것이 국제 상품이나 원자재 가격은 물론 아시아 경제 전반에 부담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IMF는 같은 날 'World Economic Outlook'라는 보고서에서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올해 8%, 내년 8.5%로 전망했습니다. 이는 지난 4월의 전망치 보다 각각 0.2%포인트와 0.3%포인트 감소한 수치입니다.

IMF는 중기적으로 중국경제의 경착륙 가능성도 '꼬리 리스크(tail-risk)'로 평가했습니다.

 

'꼬리 리스크'는 발생할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발생하게 되면 자산가치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2007년부터 조금씩 기미를 보이다가 2008년에 전세계에 예기치 못한 엄청난 영향을 미친 글로벌 금융위기가 대표적인 '꼬리 위험'의 사례이지요.

 

유로존 위기의 여파로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경제에 불어오고 있는 '역풍'에 대비할 때입니다. 

 

 

 

 

 

 

 

 

 

 

 

 

 

 

 

 

 

 

강철왕 카네기가 좋아하던 이 그림을 나도 좋아합니다.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 벽에는 낡고 커다란 그림 하나가 그의 일생 동안 걸려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거나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그림내용은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와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으로, 무척 절망스럽고 처절하게까지 보이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카네기에게, 왜 이 그림을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청년시절에 세일즈맨으로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았는데, 어느 노인 댁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그림이 퍽 인상적이었고, 특히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는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8세 되던 해에 기어코 그 노인을 찾아가 용기를 내어 청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이 그림을 자기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렸던 것입니다.
 

노인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이 그림을 일생 동안 소중히 보관했고,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말을 그의 생활신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언) 

 

 

 

 

 

 

 

 

 

 

 

 

 

세계 방방곡곡에서 특히 오지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역하시는 비전통신 애독자님들께 위로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 호에는 [미전도 종족 속에서의 선교전략]이라는 제목의 좀 긴 내용의 특집을 보내드립니다. 사역하시는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늘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장재언)

 

 

 

글쓴이 : 신바울 선교사

 

신약성경은 유대사회 안에서와 이방인 사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고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자기 종족 가운데서 예수님 복음을 강력하게 전파했는지 그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종족 가운데 아주 역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시며 그리고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아주 독특한 전략을 가지고 계신 듯 하다.

 

예수님께서는 ‘겨자 씨’ (마13:31,32), ‘씨 뿌리는 자’ (마13:23) ‘누룩’ (마13:33)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 세 가지 비유는 각기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대해 설명한다.

‘씨’는 ‘새로운 땅’에 심겨져야 하며

‘씨 뿌리는 자’는 오직 ‘좋은 땅’에서만 풍성한 결실을 거둘 것이며

‘작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극적인 방법으로 자라난다

위 세가지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 복음은 아주 작은 것처럼 보이나 종족마다 서로 다른 종교문화를 가졌다 하더라도 어느 종족이던 그 전체를 통째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 주위에서는 복음이 그런 모습으로 힘 있게 전파되고 있는 것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 성장 비결 중에 어떤 중요한 것을 잃어버려서 그런 것은 아닐까?

 

120명의 초기 유대 성도들은 ‘누룩’이 되어 ‘할례 받은 유대인’ ‘반죽’을 부풀게 해서 ‘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들로 하여금 ‘할례 받은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되게 했다.

 

다른 반죽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반죽’은 바울을 중심으로 유대인(이방인도 포함)으로 구성된 사도 일행이라는 ‘누룩’에 의해 부풀어져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들은 ‘할례 받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역시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유럽의 헬라 종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역사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해 준 유대인과 복음을 받은 헬라인 사이에 종교와 문화적 차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차이를 극복하면서 순수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 있다.

 

복음이 일단 헬라인에게 전달된 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복음이 유럽전체에 퍼질 수 있도록 헬라인 인사이더들이 유럽종족이 가지고 있었던 이교도적 사안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루었는지를 몇 가지 예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1. 새로 믿은 사람들의 정체성: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새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느냐가 가장 큰 사안이다.  메시아를 모르는 개인이나 집안 권속들이 예수님을 알고 따르게 되었을 때 그들의 정체성 변화에 대한 성경적 지침은 과연 무엇인가?

 

고전7:17-19에 기록되었기를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성경은 새롭게 주님을 알게 된 사람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바꾸지 말 것을 명하신다. 이와 동일한 지침을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토론’에서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 지도자들 간에 벌어졌던 토의의 주제는 주님께 돌아온 헬라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15:5).

 

그들은 헬라인 믿는 이들은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랜 토의 끝에 열 두 제자와 야고보와 다른 장로들 등 유대 지도자들과 교회 전체는 다행히 공동의 합의에 이르렀다(행15:22). 그들은 이렇게 편지를 썼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15:24-28) 유대 지도자들은 헬라인 믿는 이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고 무할례 그대로 있으라고 조언했다.

 

같은 맥락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갈라디아 믿는 이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대항하여 갈라디아인들이 무할례자로서의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그들을 변호해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6)”라고 일갈했다. 물론 그 ‘도’에 속한 유대인 믿는 이들은 메시아를 믿은 후에도 변함없이 할례 받은 상태 그대로 머물고 그들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성경은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행21:20).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게 되면서 율법과 유대의 전통에 더욱 열심하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전보다 더 훌륭한 유대인이 되었던 것이다. 정체성에 관한 한 믿는 이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자신이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종교 문화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 지침이다.

 

기독교인인가 아닌가?

 

내부자는 새로 믿은 이들이 문화 종교적 측면에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눠 주신 그대로, 각 사람을 부르신 그 곳에 머무르라고 격려한다.

 

반대로 많은 기독교 동료들은 주장하기를 그들 새로 믿은 이들은 그들이 가진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나 믿지 않는 다른 사람을 향한 믿음의 증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물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상이한 두 의견 사이에서 새로 믿은 이들은 혼돈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그들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된다.

예루살렘 토의에서 합의 한 결론에 의하면 주님께 돌아 온 불교도나 회교도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불교도나 회교도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면서 꼭 ‘물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입장이 불교도나 회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물 세례를 받아야 하는 “짐을 그들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고 성령과 기독교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것처럼 보인다(행15:28).

 

그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새로 믿은 이들의 미래뿐 아니라 장래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공동체 속에 복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해질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새로 믿은 이들이 ‘물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 라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와는 생소하게 다른 외국적 정체성을 가진다면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공동체로부터 격리되고 거절당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 사회공동체에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전파는 방해를 받을 것이며, ‘새로운 땅’에 여기저기 믿는 이들 모임을 만들 뿐 ‘반죽’ 전체를 부풀게 만드는 일은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종족은 그들이 어떤 종교적 배경을 가졌던지 차별이 없고 어떤 훌륭한 기독교적 의식을 치르던지 상관없이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도’에 속한 유대인들이 ‘할례 받지 않고 물 세례를 받았던 헬라 믿는 이를 믿음의 형제로 환영하고 지지해 주었듯이 우리 기독교인들도 ‘물세례는 받지 않았으나 할례를 받은, 이사(예수의 회교식 이름)를 따르는’ 회교도나 ‘물세례를 받지 않은 불교도 믿는 이’들을 우리의 형제로 환영하고 지지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반죽’을 통째로 부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 기존의 공동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관계:

   끊을 것인가 가꿀 것인가?

 

새로 믿은 이들은 기존의 믿지 않는 가족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기존의 공동체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건전한 조언을 받을 필요가 있다.

 

내부자는 그들 새로 믿은 이들이 그 동안 가족과 사회 속에서 살면서 형성해 놓은 기존의 관계를 잘 보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변화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기존 관계를 더욱 가꾸어 나가고 결국에는 그들의 가정과 기존의 공동체를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기존의 관계는 미래에 복음이 아무 막힘 없이 잘 흘러갈 수 있는 잘 뚫린 길의 역할을 할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새로 믿은 이들을 기존의 믿지 않는 가족과 우상숭배하는 기존의 사회로부터 세상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격리시키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존의 가족과 사회 관계를 끊도록 지침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고 기존 사회 공동체 속에서 격리되는 일이 종종 생기고 결국에는 그들의 이웃에게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시키게 된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 복음을 전달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관계라는 소중한 자산을 몽땅 잃어버리게 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믿는 이들이 외국의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이해될 경우 새로 믿은 이가 속해 있는 종족 공동체로 복음이 흘러 들어가는데 심한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어떤 가정은 부모가 결정하는 중매 결혼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해서 다른 종교로 개종한 자녀들을 다시 그들의 기존 전통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러한 상황을 만나게 될 경우 내부자는 그렇게 시도되는 중매결혼을 오히려 다른 가문과 새롭게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잘 가꾸어서 복음을 더 넓게 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마귀적인가 토속적인가?

 

거의 모든 공동체는 연합과 조화를 강조하며 결혼식, 생일, 장례식 및 종교 문화적 색채가 짙은 공동체적 연합활동을 통해서 가정의 친밀함과 공동체의 연합을 꾀한다.

그 중에 우상에 드린 제물이나 신전에서 행해지는 종교행사는 새로 믿은 이들에게는 아주 민감한 사안으로 떠 오른다. 많은 전통적 기독교인은 새로 믿은 이에게 그러한 공동체 행사를 마귀적으로 규정하고, 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엄중히 금지하시는 우상 숭배의 일환으로 해석하고는 그런 활동에 절대 참여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금한다.

 

그러나 내부자는 새로 믿은 이들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기거나 양다리를 걸치는 위험이 없는 한 그러한 공동체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격려한다.

 

고린도전서 8장 4절은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더 나아가 고전 8장 7절은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악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라고 설명한다.

 

고전 8장 8절에서는 계속해서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라고 마무리한다.

우상숭배는 마음의 문제이지 음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우상을 섬기는 것에 마음을 드려 전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단연코 죄이다. 더 이상 변론이 필요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후 시리아 본국으로 돌아가서는 내부자로 살도록 지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예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집으로 “평안히 가라”, 가서는 왕의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하도록 엘리사로부터 격려 받는다. (왕하5:19)

 

나아만 장군은 시리아 왕이 림몬 신전에서 림몬에게 절할 때 그 역시 왕을 보조하면서 왕과 함께 절해야 했다. 내부자로서 행동하려면 건전하고 균형 잡힌 분별을 할 필요가 있다.

 

고전 8장 9,10절은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 주의를 준다.

 

우상이 있는 신전에서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 내부자에게 허락되었으나 동시에 내부자는 양심이 약한 형제를 고려하여 사랑과 자기 양심 사이에서 지혜롭게 행동할 것을 요구 받는다.

 

 

 

 

3. 기독교의 전통과 절기:

   대체하나 변형하나?

 

만약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토의에서 졌다면 그들은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방문해서 말하기를....

“친구들 미안하네, 우리가 잘못했네. 여러분에게 할례를 베풀어야겠네. 다음 공부는 레위기로 정했는데 우리가 유대 절기의 의미와 준행방식을 철저하게 다 배워야 하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유대의 전통 교리 공부를 위해서 ‘미쉬나’로 넘어갈 것일세.”

 

만약에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 왜곡된 복음을 전했더라면 (갈1:7) 초대교회 그 당시 기독교 운동은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토론에서 승리했고 유대 종교와 전통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난 순수한 복음을 이방세계에 마음껏 자유롭게 전할 수 있었다.

성경에 조금이라도 더하면 과하게 된다. 그렇게 무언가를 더하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왔고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서 일어났던 일이며 현재도 긴장을 불러오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은 복음에 약간의 무언가를 더하고 싶은 욕망을 거부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작은 행동 하나가 장래 복음이 다른 종족에게 흘러가는데 얼마나 심각한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채 예수님 복음에 소위 기독교적인 작은 장식을 하나를 달아주고 싶어한다.

 

많은 경우에 새로 믿은 이들에게 기독교 전통과 절기가 소위 거룩한 것으로 소개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주는 기독교도가 예수님의 복음에 잘못 연계시켜 놓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다.

 

새로 믿은 이는 믿게 된 후 갑작스럽게 한 손에는 그러한 외국적 종교문화 체제를 감당해야 하고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기존의 전통과 절기를 버려야 하는 이중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소위 기독교 전통과 절기라는 것은 예수 중심적이 아니고 단순히 유럽인들이 편안하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럽 문화에서 기인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의미는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문화 배경을 가진 비-유럽 종족들에게 기독교적 전통을 강제할 아무 권한도 권위도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소중히 여기고 보전해 온 하나님께서 주신 유대문화였지만 한갓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 당시 유대 문화와 비교할 때 열등한 수준의 태양신 숭배 유럽문화를 가졌던 유럽인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사도행전 17장 26-28절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라며 하나님께서 각 종족이 독특한 장소에서 살면서 자기들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도록 허락하셨으며 모든 종족은 결국 한 혈통에서 났기 때문에 종족들 간에 우열이 없으며 그들이 발전 시킨 문화간에도 차별이 없음을 밝힌다.

 

하나님께서는 각 종족이 하나님을 아는데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지를 아시는데 그것은 바로 각 종족이 낯선 외국문화체제를 통하기 보다는 자기 고유의 종교문화 체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유럽출신 믿는 이는 유대 출신 사도일행 덕분에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보호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유대교 믿는 이가 배경으로 가졌던 유대교 체제와는 상이한 진정 그들에게 편안한 그들만의 독특한 기독교 체제를 만들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 기독교인은 태양신 부활일로 지켜오던 12월 25일을 지혜롭게도 예수님 탄생일로 변형시켰다. 또 다른 이방신 섬기는 절기였던 ‘이스터(Easter)’를 예수님의 부활절로 변형시켰다. 굳이 질 필요가 없는데 서양 기독교가 잘못 지워 준 부담으로 인해 고유의 문화 전통에 예수님을 소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시아 종족들을 향하여 이제는 서양 기독교인이 과거 그들 조상이 향유했던 복음의 자유를 아시아 종족에게 주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모든 종족은 그들만의 종교 문화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 절기들은 아름다운 의미들을 담아 지켜지고 있다. 내부자는 믿는 자기가 속한 종족공동체 일원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고유의 종교문화 전통을 재조명하여 보고 성경적인 의미를 가지도록 수정하여 문화적 충돌 없이 복음이 특정 종족 가운데 잘 흘러가도록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싱할라 종족의 부모들은 구정절기 동안에 불교승려들이 정해 준 특별한 길조시간에 자녀들에게 복을 빌어주면서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 불행하게도 싱할라 종족의 기독교인은 그같이 아름다운 의미를 가진 전통구정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오래 전 서양선교사들이 이 의식이 기독교가 아닌 싱할라 종족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이유로 그 의식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기름 바르는 행위는 성경도 확증하는 것으로 축복, 임명, 확증 및 치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의식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민감한 종교문화적 사인들을 세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각각 다루는 방법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첫 번째 종류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아시아 여러 종족들 가운데에 널리 보전되어 있는 친절함,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관계 등이 있다.

그 다음은 ‘변형되어야 할 것’이다. 모임 방법이나 절기를 지키는 형식 등 그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되 모임이나 절기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메시아의 영광을 기리기 위한 의미로 변형시켜야 할 것이다.

마지막 부류는 “분명히 버릴 것’이다. 그 종족이 지니고 있는 풍토적 죄 등 성령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은 과감히 버린다.

 

 

 

4. 믿는 이를 위한 모임 형태:

   토착적 아니면 외국적?

 

새로 믿게 된 사람은 극도로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 외에는 대개가 이미 잘 조직된 사회의 일원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종교적 체제의 일원으로 속해져 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종교적 행사를 가져오는 종교배경을 가진 새로 믿은 이가 갑자기 일요일 아침에 별도의 종교 행사를 새로 갖게 되면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갈등하게 되며 이런 갈등은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자칫 외국적이고 낯선 것으로 보이기 쉬운 기독교적 형태를 강제하는 기독교 전통보다는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 성경의 지침을 따라서 상황에 조화되는 형태를 가진 교제나 모임을 내부자는 만들어 갈 수 있다.

성경적 지침에 의하면 믿는 이는 모임이나 조직보다는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내부자는 믿는 이 모임이 모임의 목적을 최대한도로 달성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자유를 가지고 기존의 사회 공동체에 잘 맞고 정서에 일치하도록 모임의 형태를 개발할 수 있다. 어떤 지역은 주변상황에 따라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갖는 종교 행사를 바로 예수님 중심의 의미를 가진 행사로 변형할 수 있다.

다른 상황 에서는 기존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기존에 갖던 금요일이나 토요일 종교 행사를 그대로 가지면서 믿는 이를 위한 별도의 모임을 별도의 장소 (주로 집)에서 서로 세워주고 격려하는 목적으로 편리한 날에 추가로 가질 수도 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요가 있다. 그러면 별 다른 장애 없이 더 넓은 지역으로 그 형태를 통해 복음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게 된다.

 

교제는 조직이나 간판이 붙은 건물이나 전임 사역자 중심으로 공식적인 느낌을 주기 보다는 평신도 지도자에 의해 유연성을 가지면서 비공식적인 정서로 인도되어야 널리 퍼지게 된다. 기존의 믿는 이를 위주로 조직하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교제의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형태인가 기능인가?

 

유대 믿는 이들 공동체는 그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할례와 물 세례를 그들의 종교의식에 접합시켰다. 그러한 종교의식은 전혀 그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은 동일한 목적으로 물 세례를 접합시켰는데 물세례는 유럽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전통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기독교인은 성찬을 나누는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성경은 물세례보다는 (롬1:17) 성령세례를 강조하고(막1:8) “떡과 포도주” 자체 보다는 애찬(유1:12)을 강조한다.

그래서 내부자는 믿는 이들이 세례와 성찬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최대한도로 살리기 위해 기존의 공동체 사람들도 잘 공감할 수 있는 형태를 찾아 개발하도록 격려 받아야 한다.

 

내부자는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 말씀에 근거하여 논란이 많은 물세례보다는 하나의 세례, 즉 성령 세례를 강조해야 한다.

또한 믿는 이들이 모일 때 모이는 집에서 사랑으로 베풀어 주는 식사를 ‘성찬’을 상징하는 ‘애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맺는 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능력 있는 복음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선언한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능력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동시에 바울은 복음을 맡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잘 다룰 줄 아는 자질이 요구된다며 주의를 준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2:15).

 

복음의 전달자로서 우리는 복음이 다른 종족에게 막힘 없이 강력하게 전해지기 위해서 성경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제대로 전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혹시라도 복음의 흐름을 방해하는 방해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제시된 예수님의 선교전략을 따라서 복음이 효과적으로 힘있게 전해지기 위한 비결은 “상황화”다.

 

외부에서 온 복음의 전달자는 당연히 수신자의 관점과 상황에 무지하므로 수신자가 속해 있는 특정 종교문화 배경에 적합한 내부자의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인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존의 상황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가장 적합한 길이 무엇인지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경 말씀의 도움아래 찾고 분별할 수 있느냐는 그 지역에 사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다.

 

복음 전달자는 다만 특정 종교 문화 배경 속에서 사는 새로 믿게 된 이들이 그들의 상황에 맞게 복음을 살아냄으로써 그 종족 전체를 복음화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내부자의 길을 통해 모든 종족들 가운데 복음이 힘있게 전파될 수 있으며 사도 요한이 예언으로 보고 들은 24장로들의 노래에 담긴 웅장한 모습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계 5:9-10).

 

어느 누구도 획일화된 하나의 모습을 가진 기독교 문화를 주창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다문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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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울 선교사

 

인천 산성침례교회 출신으로 서울 대학교 농과대학에서 네비게이토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는 국제 네비게이토 선교회 아시아 지역 소속이다.

지난 20년간 아시아 불교국에서 BAM을 통해 복음을 전했으며,

현재는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인사이더로 사는 평신도 공동체”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고풍스러운 하바로프스크

유기남선교사(알타이선교회 대표)

 

 

이 땅은 예로페이 하바로프(Yerofey Khabarov)라는 러시아 탐험가에 의해 1649년에 발견되었습니다. 하바로프는 벨리키우스튜크(Veliky Ustyug) 지역 출신입니다. 하바롭스크라는 도시 이름과 시베리아철도의 예로페이 파블로비치라는 철도역의 이름이 하바로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1625년 토볼스크(Tobolsk)에서 만가제야(Mangazeya)까지 항해하였습니다. 3년 후에는 그의 탐험대와 함께?타이미르(Taimyr) 반도의 동쪽 부분에 있는 헤타강(Kheta River)에 도달하였습니다. 1632-1641년 그는 레나강에 도착했고 쿠타강(Kuta River)과 키렌가강(Kirenga River)의 어귀에 있는 레나강을 따라서 제염소를 갖춘 농업 정착촌을 발견하였습니다.

 

1651-1653년에는 우르카강(Urka River)이 아무르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서부터 우수리강(Ussuri River) 어귀까지 내려갔던 것입니다. 이 아무르강은 우리말로는 흑룡강, 중국어로는 헤이룽강이라고 불립니다.

하바로프스크 시내를 흐르는 아무르강은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하여 중간에 송화강, 우수리강 등과 합치면서 넓어져, 하바로프스크 동북쪽의 오호츠크 해(海)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극동지방의 물류 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곳은 하바롭스크 지방의 행정, 산업, 교통의 중심지이자 극동지방 최대의 도시로서 인구는 60만 명 정도입니다. 우수리강(江)과의 합류점에 가까운 헤이룽강(江) 중류 우안(右岸)에 있는 요충지로서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며, 헤이룽강 수운의 중심을 이루는 하항(河港)이 있습니다.

이 현대적 도시는 1858년에 군사전초기지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시베리아 철도의 부설과 함께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케이블, 터빈, 디젤기관, 기계, 정유, 조선, 목재가공, 식품 등의 제조업이 성하며, 석탄, 철광석, 망간, 주석, 금, 올리브덴, 텅스텐  등 광물자원이 풍부합니다.

 

알래스카, 일본, 한국, 중국 등과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습니다. 극동과 연안주의 역사, 풍속, 자연에 관한 자료 및 매머드 상아, 고대 원주민의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향토박물관(1896)과 적군의 극동전사에 대한 상세한 자료 및 일본, 중국, 소련군의 전투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또, 교육도시로서 의과대학, 교육대학, 농업대학, 사범대학, 철도공학대학, 기술대학 등과 더불어 많은 고등 과학연구소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한국에서 2,000km 정도 북쪽에 위치하며, 차가운 대륙성 기후로서 1월 평균기온이 영하 섭씨 22도이고 7월에는 영상 18-22도 정도 됩니다. 한인들은 하바로프스크 시(市)에 4,000 여명, 하바로프스크 주(州) 전체에 19,000 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과의 교통편도 좋은 편이며, 러시아를 통과하는 중계무역의 요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의 교역량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요 수출품은 버스, 합성섬유, 절연전선 등 케이블, 냉장고, 냉동고, 세탁기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기증기, 선박, 특수 선박, 고철, 원목 등이 있습니다.

 

1990년 개방된 이후 그곳에 들어간 한국선교사들에 의해서, 정원교회, 찬양교회, 브니엘교회, 복음교회, 하바장로교회, 사랑의교회, 하나교회, 중앙교회, 하바침례교회, 소망교회, 참빛임마누엘교회, 빌라델비아교회, 하바순복음교회 등이 하바로프스크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비로비쟌 지역에 비로비쟌장로교회와 우림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블라가베쉔스크 지역에는 소망교회와 하늘소리교회 등이 세워져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곳 영혼들을 위해 30여명의 한국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사역과 건강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바롭스크 소녀합창단

 

 

 

하바롭스크 소녀합창단

 

 

 

 

 

 

 

 

 

 

 

 

 

 

 

 

 

 

 

 

 

 

하바롭스크의 일정은 무척 여유롭다.

강변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는 이들과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바로 인근의 콤소몰광장에서부터 레닌광장까지의

대로에는 주말이면 너무나 활기찬 곳으로 변한다.

아시아의 극동지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시아와는 전혀 다른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러시아의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변 주변으로는 민속박물관, 전쟁박물관, 미술관과 같은 문화시설이 즐비하다.

도시는 작지만 극장, 식당가도 많아 여행자들에게는

전혀 지루하지 않는 도시가 하바롭스크가 아닌가 싶다.

 

이제껏 중국, 일본, 미국 쪽의 역사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러시아는 논외대상이었던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하바롭스크의 중앙역이다.

 

유럽풍의 느낌이 들지만 역의 크기에 비해 사람들이 많지 않는 듯 하다.

역사를 나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파블로비치 하바로프의 동상이다.

하바로프는 러시아의 탐험가로 17세기 인물이다.

2008년은 하바롭스크 도시가 만들어진 지 150년이 되는 해이다.

그로 인해 하바로프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게 된 해 이기도 하다.

특이하게 역사 주변에서는 조선족 노동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로 유명한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은

오늘도 책 한 권 쥐어 들고 상념에 젖어 있는 듯 하다.

하바롭스크 거리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명사들의 동상은

러시아의 문화, 역사를 잠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아무르스키의 동상은 영광의 광장의 반대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아무르강의 또 다른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아무르 강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아무르스키의 이름에서 강의 이름을 지었을까.

멀리 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무르스키의 모습에는 당당함이 서려있다.

 

 

 

영광의 광장 추모비.

하바롭스크의 가장 높은 언덕에 조성되어 있는 중앙광장에는 오늘도 꺼지지 않는 불이

 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으며 때때로

국가적인 행사가 열릴 때에는 이곳에 초병들이 나와 있기도 한다.

광장에서는 아무르강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좋다.

 

 

 

꺼지지 않는 불. 영광의 광장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2차 세계대전을 기념하기 위해

새워진 기념비와 추모비가 있다. 365일 꺼지지 않는 불은 전쟁으로 인해 전사한

극동군 병사들을 추모하고 있으며 불을 둘러싼 벽에는 이들의 명부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St. Transfiguration Cathedral.

하바롭스크의 중앙거리에서는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지만

성당의 모습은 무척 장관이다. 이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 이란곳이 있어 여행자들이 들러간다.

성당의 황금빛 돔은 아무르강의 어느 곳에서나 보일 정도로 인상적이다.

성당내부에 들어가보자.

높은 천장에 성화들이 걸려있고 미사를 집행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출입구에는 성당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걸인들이 있다.

 너무나 깨끗한 외벽으로 인해 백년은 지나야 고풍스런 맛이 느껴질 것 같다.

영광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콤소몰광장.

토요일저녁의 화려함은 잠시 피곤함에 묻어두었을까.

다음날이 되자 너무나 고요하게 변해버렸다.

도시는 새벽을 맞이하고 거리엔 청소차들만 오갈 뿐이었다. 신기했다.

콤소몰 광장에 꽉찬 인파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주변에는

온통 맥주병이며 쓰레기가 쌓여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원된 경찰들로 인해 순식간에 청소가 마무리되고 오후 들어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콤소몰 광장은 늘 활기찬 곳이다. 아무르강을 마주하고 있어

가족보다는 연인들이 데이트하는 곳이기도 하다.

 

 

 

Hotel Parus. 하바롭스크의 콤소몰 광장 바로 인근에 숙소를 정했다.

아무르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근처의 박물관, 명소, 공원들이 가득해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호텔은 무척 깨끗하고 고급스럽다.

최근 러시아는 백야로 인해 11시가 되어도 초저녁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해가지지 않으니 졸려도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이날도 하바롭스크 도시건립 150주년 기념행사로 인해 콤소몰 광장에서는

새벽 3시까지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레닌 광장은 언제나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붐빈다.

주말이 되면 많은 행사들이 펼쳐지고 작은 시장도 열리는 곳이다.

레닌광장에서 출발하여 대로를 따라 걸어가면

하바롭스크의 또 다른 명소인 콤소몰 광장에 이르게 된다.

 

 

 

레닌광장에 세워진 레닌동상. 크과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작다.

레닌동상은 러시아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르강.

중국에서는 흑룡강이라 부르고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이라 부른다.

아무르강의 뜻이 아빠 강이라고 한다.

볼가강은 엄마 강이라고 부른다는데...^^

 

 

 

 

 

 

 

 

 

 

 

 

2013년 대한민국, '두 명의 대통령'이 필요하다

 

오늘(21일) 기준으로 대통령 선거일이 153일 남았다. 새누리당 후보는 박근혜(이하 모든 사람 존칭 생략)가 99% 거의 확정되었고, 야권은 문재인·손학규·김두관·정세균·조경태·김영환·박준영 등이 경쟁에 나섰다. 그리고 '안철수'가 있다.

 

안철수는 자신의 입으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은 그의 이름을 올린다. 지지율은 양자대결에서는 40%대 중반, 다자대결에서는 20% 안팎이 나온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도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 머무는 사람이 대부분임을 비하면 놀라운 수치다.

 

언론은 안철수 강연 취재를 하면서 "나 오늘부로 대통령 출마합니다"라는 말 듣기만을 바라고, 그런 말이 나오지 않으면 괜히 딴죽을 건다. 정치권도 "빨리 출마를 결정"하라고 닦달한다. 급기야 새누리당 '박근혜 경선캠프'의 홍사덕은 "나폴레옹은 권력을 위해 필요하면 노동자 계급이든 소농민이든 붙고, 어떤 때는 귀족계급과도 그러면서 20년을 집권했다"며 안철수를 나폴레옹에 비유하기에 이른다.

 

유권자들도 안철수가 출마 의사를 자꾸 늦추자 '피로도'가 쌓여간다. 지난 12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문재인은 18.3% 지지율을 기록했고, 안철수는 16.1%에 그쳤다. 이에 대해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안 원장이 정치참여 문제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며 유권자의 피로도가 쌓이고 관심도도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나 역시 피로감이 든다.

 

하지만 안철수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통령'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중앙일보>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매일 실시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안철수 지지율은 17일 조사에서 23.1%로 앞날인 16일 19.6%보다 3.5%포인트 상승했다.

 

이런 가운데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이 안철수 현상을 분석한 책 한 권을 내놨다. <안철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김헌태·오연호 공저)이다. 90여 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안철수 '개인'에 대한 탐구나, 그저 안철수 현상만 다루지 않고 12월 대선을 앞둔 현 시점에서 안철수를 둘러싼 사회적 '화두'에 답하고 있다.

 

안철수, 민심이 원하는 '권력의지'가 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5월 30일 저녁 부산대 경암체육관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먼저 공동저자인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는 안철수가 대통령직을 향한 권력의지가 있음을 밝힌다. 안철수는 사석에서 지인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오세훈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은 누구나 다 한다. 나 같은 사람도 그렇다. 포털사이트에도 하루에 수만 명이 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댓글을 달고 있다. 오세훈 전 시장은 '5세훈'이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한다고 안철수에게 권력의지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럼 무엇이 있다는 걸까? 오연호의 진단은 매우 색다르다. 우리는 그 동안 '개인'에게서 권력의지를 찾았지만 오연호는 '민심'에서 권력의지가 온다고 진단한다.

 

권력의지는 민심에서 나온다. 자신이 아무리 대통령이 되고 싶어도 지지도가 바닥이면 권력의지는 있다가도 사라진다. (줄임) 민심이 '당신이 대통령감'이라고 인정해주면, 그전까지 없던 권력의지도 생길 수 있다. 그 지지도가 의미있게 지속되면 권력의지도 진화한다.(본문 가운데)

 

생각하면 안철수는 이런 말을 자주했다.

 

내 개인의 명성은 내가 잘해서가 아닌고 사회가 나에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 사회에 보답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그 과정에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

 

나는 결정권자가 아니다. 결정의 주체는 국민이다. 나 같은 사람을 국민이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상황 변화에 따라 나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본문 가운데)

 

즉 안철수에게는 민심이 원하는 '권력의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듣기에 따리서는 굉장히 무책임하게 보인다. 주권자 국민의 뜻을 높이 산 것은 맞지만 지도자는 자기 결정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민심만 아니라 스스로도 권력의지를 드러낸다.

 

그는 "누구의 봉이 돼서 이용만 당하는 것은 싫다"거나 "대접만 받고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자리"는 거부한다. 대한민국 최고 결정권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로 읽힌다.

 

안철수 "노무현 모든 것 버렸다"... 안철수도 준비됐나

 

 

'안철수'가 구원자가 아니라 바로 '시민' 자신이다.

 

그런데 유권자가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아직 안철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안철수가 아직 결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과연 대통령 업무를 잘,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고 오연호는 말한다. 안철수와 사업 파트너로 함께 일했다는 한 중소기업인은 안철수의 약점을 이렇게 말한다.

 

안철수는 정치 경험이 너무 없다. 아직 그릇이 작다. 그는 어떤 정치적 큰 문제에 부딪혀 그것을 해결해본 적이 없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김대중은 삶과 정치를 동일시하던 사람이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줄임) 내 한 몸 산산조각 나더라도 나를 던져서 하겠다는 그런 결단을 안철수는 아직 보여준 적이 없다. 그런 결기가 없다. 우리가 노무현에 대해 불안불안하면서도 좋아했던 이유는 그런 결기가 있어서가 아니었겠나?(분문 가운데)

 

안철수도 알았다. 그는 지인에게 "노무현은 모든 것을 버렸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도 못 당하더라. 기존 정치판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뭔가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 이제 안철수에게는 남은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이다.

 

사람들은 안철수가 머뭇거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머뭇거림은 '책임의식' 결여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버린 노무현"과 같은 희생정신이 없다고 타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13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생각은 다르다.

 

안 교수는 "(안철수는) 무한한 책임의식이 있다. 일반인의 정서와 다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굉장히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한국 정치인 중에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안철수 드래프트 시작되면 박근혜는 진다"고 단언했다.

 

역사에 무한한 책임의식을 가진 안철수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는다. 안철수는 '표'는 얻을 수 있지만 '세력'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혼자'가 아니라 '세력'을 통해 국정을 운영한다. 안철수에게 세력은 결국 '민주진보진영'이 될 수밖에 없다. 안철수 스스로 고백했듯이 '새누리당'은 아니다.

 

안철수 세력은 민주진보진영, 곧 '99% 시민'

 

 

'안철수'가 구원자가 아니라 바로 '시민' 자신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1%가 아닌 99%를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아직도 20세기식 정치공학과 '나를 중심으로'라는 인식에 머물러 있는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은 아니다. 이런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이 안철수와 정치공학적으로 단일화를 해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 길은 무엇인가? 공동저자인 김헌태(정치평론가 및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국제정치 전공 겸임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즉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이 뼈를 깎는 각성과 99%를 위한 정치세력으로 거듭나는 길이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민주통합당이 먼저 국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민주진보진영의 이름으로 하기 싫으면 정치의 이름으로라도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죄'를 깨닫고 사죄하는 것이 맞다. 또 마지막 변수로 남은 '안철수'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부끄럽지만 도와달라"라고 말해야 할 때다. 이 시점에는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서민과 중산층의 친구임을 자처하는 50년 전통 민주 세력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본문 가운데)

 

이런 각성을 하면 시민은 다시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으로 눈을 돌릴 것이며, 거대한 파도를 일으킬 것이다. 그 파도가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은 '1%'다.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진짜 적은 이름도 없으며, 얼굴도 없고, 정당도 아니다. 그는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고 당선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배한다. 나의 적은 금융자본이다."

 

1% 탐욕을 견제할 유일한 힘은 '시민' 자신

 

 

안철수와 민주진영 만남은 '나를 중심으로 한 만남'이 아니라

'국민을 중심으로 한 만남'이 되어야 한다.

 

1% 탐욕을 견제할 수 있는 힘과 자질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의 원천은 '시민'자신이다. 민주헌정을 유린한 '5·16 군사반란'을 "구국의 혁명", "대한민국 초석"이라며 강변하는 세력이 1%다. 그들은 아직도 견고하다. 대한민국 지배세력으로 남아 자신들 배를 채우면서도 '애국'을 말한다. 속임수요, 거짓이다.

 

안철수와 민주진보진영이 만나 대한민국 60년을 지배한 1%의 견고한 아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김대중-노무현'은 공성전을 펼쳤지만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안철수와 민주진보진영이 "나를 중심으로"가 아니라 오직 '국민'만을 위해 함께한다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이 안철수도 아닌, 민주진보진영도 아닌 '새로운 연합'을 지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당연히 대선주자 간 약속이나, 권력 배분 얘기가 먼저 오가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즉, 정파 간 연합의 성격이 부각되기보다는 시민의 참여가 바탕이 된 '시민연합'이 되어야 한다고 김헌태는 강조한다.

 

2013년 "국가 수반'과 '시민 수반"이 등장해야

 

나아가 그는 야권대선주자들(안철수 포함)과 대중성과 정통성을 지닌 인사들이 민주지도자 회의를 구성해 국민들이 "너희들을 딱 한 번만 더 믿어보겠다"는 연합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김헌태는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대선에 승리했다고, 자리다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국민들이 승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철수와 민주진보진영 모두는 이 말을 새겨야 한다.

 

대선 승리를 정치인 자신들이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하며 자축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국민이 아직 승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엄숙한 날, 비장한 선언의 날이 되어야 한다. '정의가 이겼다'는 말은 그날 나올 말이 아니다. 정의는 '1%'의 항복을 받아내는 날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이 풀리는 날도 아니다. 한은 정치인들이 풀어야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 승리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특히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연합정부의 틀이 사라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공식적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민정부가 한날한시 동시에 출범해야 한다. 즉 헌법상의 '국가 수반'과 시민들의 열망을 대표하는 '시민 수반'이라는 두 명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본문 가운데)

                                                        (서평-김동수)

 

 

 

 

 

 

 

 

미국의 한 여성은 <집에 돌아왔더니 키우고 있는

11마리의 강아지들이 동시에 나에게 달려들었다>고 설명했다.
 

 

 

사람은 여기서 인간을 깔아뭉개는 짓을 배웠을까?

 

 

 

 

 

 

 

 

 

 

 

 

 

 

 

 

 

 

 

 

 

 

 

 

 

 

1. 호두기름은 폐질환의 선약이다

 

신약본초에는 폐의 기능을 개선하면서 치료하는 유일한 식품이 바로 호두이기 때문에 호두를 기름으로 짜서 복용하면 어린이 천식이나 폐렴에 좋다고 밝히고 있다.

호두는 사람의 신, 폐경으로 들어가 기침을 멎게 하고 숨헐떡임을 평정하는 천연신약으로, 다소 독성이 있어 이를 법제하여 은행, 살구씨 등과 함께 기름을 내어 쓰면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여러 기관지 폐질환의 좋은 약이 된다.

 

2. 신장기능과 조혈작용을 도와준다.

 

호두의 약성을 살펴보면 기관지 천식뿐만 아니라 기혈과 근골의 보(補), 산후풍, 자궁출혈, 타박상, 오줌소태, 위산과다, 뾰루지, 피부염(여드름, 아토피)등에 두루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장이 허하여 허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연약한데는 물론 암환자나 노인성 변비에 매우 효과가 좋다. 임산부에게도 매우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중병을 앓고 난 환자가 계속적으로 호두를 먹으면 건강 회복이 빠르고 불면증이나 신경쇠약이 치료되며 조혈작용이 왕성해진다.

또 오래 먹으면 살이 찌고 힘이 생기며 피부가 고와지고 머리칼이 까맣게 된다고 한다.

 

3. 체력증진, 노화를 방지해준다.

 

호두는 콩팥의 기능을 강화시켜 이뇨작용이 촉진되고 요통, 관절통, 어린이 변비치료에 두드러진 효과가 있다.

그리고 입시생들의 건강증진과 정신을 맑게 해준다. 원칙적으로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폐의 기능을 개선시키면서 치료하는 유일한 건강식품이다.

또한 호두에는 인체에 좋은 여러 성분들이 골고루 들어있다. 지방, 단백질, 당질, 수분, 섬유질, 인, 칼슘, 비타민 A,B,C,D 등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고 특히 비타민 B1과 칼슘, 인, 철분 등은 노화방지와 강장에도 두드러진 효과가 나타난다.

 

4. 고혈압, 당뇨와 각종 성인병을 예방, 치료를 도와준다.
 

호두는 당뇨병의 예방.치료에도 유용하다.
호두 등 견과류를 매주 5회 이상 먹으면 당뇨병 발생 위험이 20%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두의 지방은 불포화 지방산이 대부분인데다가 혈중 콜레스테롤의 양을 감소시키는 필수지방산이 많기 때문에 동맥경화,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5. 버짐 치료 및 예방
 

한의학에서는 버짐은 영양상태를 나타낸다. 잘 먹고 영양이 좋으면 버짐이 없다. 대개 버짐이 피어있는 경우는 식욕이 없고 비위가 약한 경우. 잣과 호두를 하루에 20g정도씩 2∼3주 이상 간식으로 복용하면 도움이 된다. 잘 먹는 데도 버짐이 피어있다면 소화기 계통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6. 여성들의 질 분비를 윤택

 

소변을 이롭게 하고 머리를 검게 하며 기를 보하고 피를 기른다. 폐를 따뜻하게 하며 장을 윤택하게 한다. 때문에 변비를 치료하며 남성들의 조루증과 유정에도 효과가 있다.

또한 노화방지를 해주며 머릿속을 맑게 하여 두뇌가 활발히 움직이도록 도움을 준다. 호두는 폐를 튼튼하게 하므로 천식과 숨 가쁨을 치료하고 심장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으며 기운이 허하고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다.

 

7. 최고의 스테미너식품

 

호두는 몸에 쌓여있는 노폐물을 정화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중년기에 접어든 사람에게는 최고의 스테미너 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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