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ctober
14,
2012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 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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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마라.
인생은 한낮 헛된 꿈이라고 ...
잠자는 영혼이란 죽은 영혼,
만물은 겉모양과는 다르다.
인생은 진실, 인생은 진지한 것.
그 무덤이 목표는 아니다.
너는 본디 흙이라, 흙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그 육체를 말할 뿐, 영혼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가야 할 곳 혹은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내일이 저마다 오늘보다 낫도록 하는 행동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빠르다.
우리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하면서도
마치 감싸진 북과도 같이,
무덤을 향해 장송곡을 울린다.
세상의 넓은 싸움터에서는 인생의 선두에 서라.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미래는 아무리 즐겁게 보이더라도 믿지 마라.
죽은 것과는 죽은 채로 남겨두고 활동하여라.
산 현재에서는 활동을 하여라.
가슴에는 심장이, 머리 위에는 산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말해주나니,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떠날 때는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의 자국을 남겨놓을 수 있음을...
아마도 후일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삶의 바다를 향해 하다가
외롭게 난파한 그 어떤 형제를 보고,
용기를 얻게 될 발자국을...
그러니 우리 부지런히 일해 나가자.
어떤 운명도 헤쳐나갈 정신으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추구하며 일하고
기다리기를 힘써 배우자.

A Psalm of Life
What the
Heart of the Young Man Said to the Psalmist
Henry Wadsworth Longfellow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
For the soul is dead that slumbers,
And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Dust thou art, to dust returnest,
Was not spoken of the soul.
Not enjoyment, and not sorrow,
Is our destined end or way;
But to act, that each to-morrow
Find us farther than to-day.
Art is long, and Time is fleeting,
And our hearts, though stout and brave,
Still, like muffled drums, are beating
Funeral marches to the grave.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In the bivouac of Life,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Be a hero in the strife!
Trust no future, howe'er pleasant!
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Act, act in the living present!
Heart within, and God o'erhead!
Lives of great men all remind us
We can make our lives sublime,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Footprints on the sands of time;
Footprints, that perhaps another,
Sailing o'er life's solemn main,
A forlorn and shipwrecked brother,
Seeing, shall take heart again.
Let us, then, be up and doing,
With a heart for any fate;
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
Learn to labor and to wait.


롱펠로우의 또 하나의 시를
소개합니다.
결코 늦지 않았다
Never Too
Late
It is too late!
너무 늦었어요!
Ah, nothing is too late
아니, 늦는 것이란 없다오
Cato learned Greek at eighty;
Sophocles wrote his grand “Oedipus,” and
카토는 나이 80에 그리스어를 배웠고,
소포클레스는 그 나이에 위대한 작품
"오이디푸스"를 썼다오.
Simonides bore off the prize of verse from
his compeers
when each had numbered more than fourscore
years;
And Theophrastus, at
fourscore and ten,
Had begun his “Characters of
Men.”
시모니데스는 80이 넘은 나이에 라이벌들을 제치고
상을 탔으며,
테오프라스토스는 나이 90에 "인간 본성론"
집필을 시작했다오.
Chaucer, at Woodstock, with his
nightingales,
At sixty wrote the
“Canterbury Tales.”
Goethe, at Weimar, toiling to the last,
Completed “Faust” when eighty years were
past.
초서는 나이 60에 우드스톡에서 동료들과
"켄터베리 이야기"를 썼고,
괴테는 바이마르에서 사력을 다해 나이 80이 지나
"파우스트"를 완성했다오
What then?
Shall we sit idly down and say,
"The night has come; it is no longer day?"
그렇다면 뭔가?
우리들은 게으르게 앉아 지껄이고만 있을 텐가?
"밤이 찾아왔구나; 이제 더 이상 낮이 아니야.." 라고!
For age is opportunity No less than youth
itself,
though in another dress.
각각의 나이는 젊음 못지않은 기회란 말일세!
또 다른 새 옷을 입는...!
And as the evening twilight fades away,
The sky is filled with stars, invisible by
day..
저녁 노을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면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별들로 하늘은 가득 찬다네!
It is never too late
To start doing what is right.
Never.
결코 늦지
않았어
지금 그 일을 시작하게나
결코!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우는 백발이 될 때까지
열심히 시를 쓰고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비록 머리칼은 하얗게 세었지만 또래의
친구들보다 훨씬 밝고 싱그러운 피부를 유지하며 활기찬 노년을 보냈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와서 비결을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정원에 서 있는 나무를 보게 . 이제는 늙은
나무지.
그러나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네. 그것이 가능한
건 저 나무가 매일 조금이라도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19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롱펠로우는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평생 동안 병을 앓다가 숨졌습니다.
두 번째 아내는 집에 화재가 발행해 화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을 잃고도 롱펠로우의 왕성한 창작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우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험한 인생공개를 수없이 넘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를 남길 수 있었습니까?”
롱펠로우는 정원의 사과나 무를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저 사과나무가 바로 내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에는
해마다
새로운 가지가 생겨납니다. 그곳에서 꽃이 피고 단맛이 나는 열매가 열리지요.
나는 내 자신을 항상
새로운 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누구나
생일이
있습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 마다 [새로운
가지]가 하나 더
돋아납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입니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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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운 설교
먼저 쉬운 설교는 그가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시작했을 때, 설교의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한 것.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김
목사는 설교 때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성경과 연결시켰다. 당시 김
목사가 교회를 개척한 곳은
서울 청계천 주변의 판자촌.
교인 대부분이 가난한
상인들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교인들은 설교
시간 내내 졸았다. 화가 난
김 목사는 “여기가 여관이냐”며
그들을 나무랐다. 그랬더니
앞에 앉은 할머니 왈(曰).
“우리가 존 게 아니고
목사님이 재우셨잖아요. 방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목사님
설교가 방언이네. 도통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
때 김 목사는 깨달았다.
설교는 자신이 아는 것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 즐거운 설교
설교는 무엇보다 강단에 선
설교자 자신이 설교에 즐거워할
때 그 효과가 배가 되는
것이라고 김 목사는 말했다.
그는 “설교 하는 사람이
설교를 즐겨야 듣는 교인들도
그것에 즐거워할 것이
아닌가”라며 “나의 목회관은
간단하다. 바로 ‘예수 믿어서
행복해지자’다”라고 강조했다.
가끔 김 목사는 주변에서
“설교 준비하는 게 어려워
죽겠다”는 푸념을 들을 때마다
그들에게 “그럼 왜 목사를
했나. 차라리 집사를 하지.
목사한다고 더 좋은 천국 가는
것도 아닌데”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그럼, 설교 혹은 예배를
즐겁게 드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김 목사에
따르면 그 ‘주범’은 다름아닌
긴 설교와 기도. “어느 교회
행사에 갔더니 장로님께서 무려
20분을 기도하더라. 행사가
끝나고 그 분이 내게 악수를
청했는데, 손 내밀기가
싫었다”는 김 목사. 그는
“짜증이 나더라”고 했다.
◈ 깊이 있는 설교
“쉽고 즐겁기만 하고 깊이가
없으면 그것은 말재주밖에 되지
않는다.”
김 목사는, 설교는 교인들의
영혼에 가 닿을 수 있을 만큼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깊은 성경의
진리를 압축해서 쉽고 재미있게
전하되 어떻게 하면 그 깊이를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 한다”며 “말씀이
영혼에 닿아 뭔가 생각하게
해야 하고 묵상하게 해야
한다. 그런 깊이의 차원이
없으면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김 목사는 일부러 말을
천천히 한다고도 했다. 말이
빠르면 그 말을 듣고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김
목사의 설명. 그는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결국 남는
건 그 설교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묵상과 생각”이라고
했다.
깊이 있는 설교를 위해 김
목사는 “설교 준비를 별도로
하지 않고 삶 전체로 한다”고
했다. 그는 “주일 설교를
끝내고 월요일이 되면 다음에
설교할 주제가 대충 잡힌다”며
“주제를 미리 잡는 이유는
그래야 그 주제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주를 사는 동안 그 주제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찾고
수집하고, 그것에 관해
묵상한다. 그것들을 토요일에
정리하고 주일날 설교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고도 따로
없다”고 했다.
◈ 적용 가능한 설교
김 목사는 “설교는 듣는
사람이 설교라는 텍스트를 자기
삶의 컨텍스트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며 “이는
설교자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
김 목사에겐 특별한 설교의
원칙이 있다. 반드시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고민해봤던 것을 설교한다는
원칙. 그렇지 않은 설교는
결코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삶을 변화시켜낼 수 없다는 게
김 목사의 생각이다.
김 목사는 “나는 입으로
설교하지 않는다”며
“발바닥으로, 온 몸으로
설교한다. 설교에는 설교자
자신의 삶이 배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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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자스 주의 농장에서 태어난
지미는 자신의 쌍둥이 형 티미를 매우 증오했다.
그의 형 티미는 항상 그보다 뛰어났다.
부모님은 언제나 티미를 자랑스러워 하셨고
티미의 주위에는 항상
밝고, 건강하고, 똑똑한 친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결국 지미는 형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뉴욕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15세 소년이
살아가기에는 세상은 너무 혹독했다.
가출을 하고 2년 후
지미는 독한 화공약품을 다루는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가족에게는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독하게 살아가던 중
공장에 폭발사고가 있었고,
지미는 화공약품을 뒤집어쓰는 변을 당했다.
병원에서 깨어난 지미는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몸과 마음이 오그라드는 지미에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병원에서 지미는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지미에게는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의 자살이 실패하자
지미는 완전히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자신이 잠을 자고 있는지 깨어있는지,
자신이 병실에 있는지 복도에 있는지,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지미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지미는 자신의 눈을 감은 붕대를
풀고 있는 어떤 손길을 느꼈다.
의사인듯한 사람이 뭐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지미는 그 소리를 신경 쓰지 못했다.
눈이 보였다.
왼쪽 눈은 여전이 보이지 않았지만
오른쪽 눈은 눈앞의 사람들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기쁨의 환성을 내지르려던 지미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형 티미가 오른쪽 눈에
안대를 칭칭 감은 채
하나 남은 왼쪽 눈으로 지미를 보며
눈물과 함께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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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놓으시고
벌판에 바람을 놓아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을 결실토록 명하시고
그것들에게 또한 따뜻한 이틀을 주시옵소서
그것들을 완성으로 몰아가시어
강한 포도주에 마지막 감미를 넣으시옵소서
지금 집 없는 자는 어떤 집도 짓지 않습니다
지금 외로운 자는 오랫동안 외로이 머무를 것입니다
잠 못 이루어 독서하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잎이 지면 가로수 길을
불안스레 이곳 저곳 헤맬 것입니다

독일어
Herbsttag
von Rainer Maria
Rilke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s sehr groß.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ss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uchten voll zu sein;
Gib ihnen noch zwei sudlichere Tage,
dra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u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atter treiben.
영어
Fall Day
Rainer Maria Rilke
Lord, it is time. This was a
very big summer.
Lay your shadows over the sundial,
and let the winds loose on the fields.
Command the last fruits to be full;
give them two more sunny days,
urge them on to fulfillment and throw
the last sweetness into the heavy wine.
Who has no house now, will never build one.
Whoever is alone now, will long remain so,
Will watch, read, write long letters
and will wander in the streets, here and there
restlessly, when the leaves blow.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가정이 화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일곱 살 때까지 여자아이 옷을 입고 자랐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에게서 양육되고,
1886년 장크트푈텐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메리슈-바이스키르헨 육군 고등실업학교에
진학하지만 건강 상 이유로 자퇴하였다.
이후 프라하 대학,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 첫 시집 '삶과 노래'를 출간했다.
1897년 야콥 비서만이 주최한 다과 모임에서 14세 연상의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살로메를 만나고 러시아를 여행하며 릴케의 문학 세계는
더욱 원숙해져, '기도시집'과 '형상시집'을 연이어 출간하였다.
'신 시집'에서는 사물을 관찰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사물 시를 쓰기도 했다.
릴케는 1902년 파리로 이주하여 로댕의 비서로 일했다.
파리에서는 '신시집'과 소설 '말테의 수기'를 발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는 1923년 스위스에서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창작했다.
1926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독일어 권의 위대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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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정보화 시대다. 정보화 시대의 요체는
속도다. 누가 얼마만큼 빠르게 남을
앞지르느냐. 아무리 빨라도 남의 뒤만
따라가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다.
언제나
남보다 한 발 앞서가는 속도여야만
속도의 가치를 지닌다. 더구나
경쟁관계에서의 속도는 절대속도보다
상대속도가 중요하다. 속도는 계속
가속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상태에서 월등한 속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선두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속도의 수치보다
누가 더 빠르냐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경기장에서 1등만이 갈채의 환호 속에
파묻힌다. 1등과 간발의 차이로
2등을 했지만 2등에게는 월계관이
없는 세상이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1등은 역사의
전면에 부상(浮上)하여 그 이름을
길이 남기지만 2등은 1등의 그늘에
가리워 망각의 뒤 안으로 사라진다.
결국 1등이냐, 2등이냐의 차이는
속도의 차이다. 골인 지점에서
시간으로는
0.00000000001초,
공간으로는
0.00000000001mm의 차이가
성공과 실패, 환희와 좌절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수치로는
도무지 계량(計量)하기 어려운 속도의
차이로 인해 한 사람은 영광의 자리에
들리고, 한 사람은 비통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한 때
‘4S’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스피드(속도), 스크린,
스포츠, 섹스가 그것이다. 지금도
4S는 유효하다. 오히려 금세기 들어
지난 세기보다 4S가 현대인과 더욱
밀착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의 키워드는
디지털 신경망이다.
기업내부의 의사전달 체계를 정보기술을
활용해 전환시킨다면 의사결정 속도는
그만큼 빨라질 것이라는 게 빌
게이츠의 진단이다. 그가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속도는 사고(思考)의 속도
수준까지 앞당기는 것이다.
최고경영자의 아이디어가 머리에서
떠오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바로 말단
직원이 알 수 있어야 하고, 일반
고객이 제품에 대해 갖는 불만도
고객의 머리 속에서 바로 기업의
최고경영진에게 전달되는 단계다.
빌
게이츠의 생각의 속도에는 정보의
흐름이 생명줄이다. 디지털 조직은
인체의 신경망과 같다. 신경망을 통해
전달되는 속도가 성패를 가른다.
쏟아지는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에서 승부가 난다.
그
다음은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탄생시킨
인터넷이라는 신경망은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생활방식이 아닌 [웹 라이프
스타일]라는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고, 기업은 [웹 워크
스타일]로 운영된다.
인터넷으로 인해 인재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아웃소싱이 자연스럽게
일반화한다. 사람보다 우월한
정보분류와 검색능력을 가진 컴퓨터는
지식관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개개인의
능력을 기업IQ로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는 최적, 최선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빠르게 가능하게
한다.
정보화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80년대가 질(質)의 시대,
90년대가 리엔지니어링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속도의 시대이다. 우리
시대는 삶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며
웹이 전반적인 생활화를 주도하게
된다.
속도의
기본은
즉시(卽時)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현상을 환히 꿰뚫어
보면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즉시성이다. 생각의 속도는
1초에 지구를 16바퀴 반이나 도는
광속보다도 더 빠르다.
우리는
생각이 느린 사람을 ‘형광등‘이라고
놀린다. 스위치를 넣고 한참 있다가
불이 켜지는 그런 느려터진 감각으로는
빠르게 스쳐 지나는 정보를 포착할
수도, 빠르게 몸을 숨기는 지혜를
소유할 수도 없다.
속도의
시대를 살기 위해서는
생각의 속도가
정보의 속도를
추월할 수 있는 항속(恒速)을
유지해야 한다. 무한대의 공간에 눈
깜짝할 새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한
정보를 적시에, 적소에서 포획하려면
날샌돌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합바지를 입은 것처럼 남의 뒤를
뒤뚱거리며 따라가거나, 자다 일어난
것처럼 멍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찰나 현재는 과거로, 미래는 허무로
침잠(沈潛)하고 만다.
생각의
속도가
생각의 성숙과
만날 때 생각은 날개를 달게 된다.
빠르기만
하면 졸속이 되기 쉽다. 빠른 만큼
속도에 비례하는 여물기가 이뤄지면
완벽한 사고(思考)의 틀을 형성하게
된다.
생각이
여물기 위해서는
세월의 나이테가
필요하다. 나이테는 철두철미하게,
책임감 있게, 진실 되게 살아온
연륜이다. 생각의
속도가 원숙한 연륜의 바퀴를 달 때
인생수레는 거침없는 자기완성의 길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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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whole
office had a
picnic last
Saturday?
너네 사무실 사람들 모두 지난
토요일에 소풍 갔었지?
Yeah, it was a
day to remember.
The weather was
so nice and
everyone had a
great time.
응, 멋진 날이었어.
날씨는 정말 좋았고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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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년은 자신이 마약의 소굴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고 있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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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경제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자본주의가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자유롭게는 하지만 행복은 기대하지 말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장 잘 사는 나라에 속하는
이탈리아가 유엔에서 조사한
국민
행복지수는
66위, 독일 81위, 일본 95위, 영국 108위,
캐나다 111위, 프랑스 129위, 미국이 150위
였습니다.
돈이
많아서 꼭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참된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을 까요? 바울에게서 찾아보도록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이 겪었던 역경
바울은 처절한 역경 속에서 행복지수가 높았습니다. 그의
삶은 위기와 곤경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많이 고생했습니다. 많은 옥고를 치렀고, 매도 수
없이 맞았으며, 여러번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정말 억울한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른 형벌인 태장을 맞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당당히
거부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시민이 유대인의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에 39번씩 죽도록 맞는 태장 형벌을 세 번이나
맞고 죽을뻔 했습니다.
바울은 태장 외에도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기도 했습니다.
돌을 던져 죽게 하는 형벌도 유대식 형벌입니다. 로마의
시민이면서 유대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그를 기다렸다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그를 비방하고,
괴롭혔던 유대 율법주의 신자들의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동족의 위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다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는 고통이 그를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게다가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음에서
오는 또 다른 원초적 인간 고통도 겪었습니다.
이와같은 악조건에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손수 노동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울의 삶이야말로
가장 불운하고 실패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행복은 이와같은 환경속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약함에서 행복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벤치 마크하는 기쁨.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특권을
그 역경속에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말구유]에서부터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까지 처절한 연약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삶에 자신이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벅찬 감동을 느낀 것입니다.
둘째로 심각한 질병
바울은 심각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 마저도
바울에게는 높은 행복 지수의 조건이었습니다. 그의 지병이
무엇인지 아무도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지병으로
그의 고통이 심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몸속의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남들보다 엄청나게 인내심이 강했던 그로서도 그 가시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생명을 내걸고 세 번이나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주님으로부터 매정스럽게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반응은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의 거부를 그는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승화시켰습니다.
몸속의 가시가 주는 통증 속에서 오히려 강렬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셋째로 삶과 죽음의 문턱
빌
1:21절을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고백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로 갇혀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죽을
뻔 한 온갖 역경을 수 없이 거치고 이제는 지병으로 몸속의
가시를 품고 살아야 하는 고통에 더하여 마침내는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
괴로운 처지와 그 답답한 마음이 헤아려 지십니까?
이런
상태보다 더 처절하게 불운한 삶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바울은 같은 편지에서 두
번씩이나 기뻐하라고 오히려 교인들을 격려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런
위로와 격려는 감옥 밖에 있는 자유로운 빌립보 교인들이
감옥안에 있는 부자유한 바울에게 마땅히 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최악의 역경 속에 있던
죄수(?) 바울이 오히려 자유로운 교인들에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기뻐할 객관적 조건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같이 위로를 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된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죽어서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찬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살아서 교회를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해야
할 일 또한 많습니다.
죽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요, 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턱이 두렵고 불행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행복지수를 높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행복지수가 역동적인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인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데서 오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습니까?
바울과 같이 역경,
질병, 삶과 죽음의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면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장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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