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게를 느낄 때 ...

항상 가볍고 흥미를 위주로 만 편집을 할 수 없다는 점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장재언 칼럼]부터 내용이 좀 무겁습니다만 씹을 맛이 있을 것입니다. 나노 테크날러지가 발달 해서인지 하나님 마저 분석하려 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 독특한 시 한편..

이번 호의 [초대 시]도 매우 독특합니다. 길이도 좀 길고요.

Lawrence는 이 작품을 통해 무의식, 충동, 생명력, 원시성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교육, 문명, 제도, 관습과 대조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Lawrence는 이 시를 통해 격렬하게 관습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  헌 책방......

고서점... 혹은 헌책방 하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몇 개국의 통신원의 글을 모아 헌책방의 중요한 구실을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삼았습니다.

 

@ 부산의 명소.....

서울 청계천에 산재한 고서점들이 부산으로 옮겨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산 보수동의 많은 고서점들이 부산 시민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많이 제공하리라 믿습니다.  (언) 

 

 

 

 

 

 

 

 

 

 

 

January 13,  2013

 

 

 

 

 

 

 

 

 

 

 

영화 [1492 콜럼버스]의 타이틀곡
콜럼버스 미대륙발견 500주년 기념 영화


 

 

 

 

 

There shines a light in the heart of man

That defies the dead of the night

A beam that glows within every soul

Like wings of hope taking flight

A sunny day, when a baby's born

The little things that we say

A special sparkle in someone's eye

Simple gifts, every day

 

Somewhere there's a paradise

Where everyone finds release

It's here on earth and between your eyes

A place we all find our peace

 

Come - open your heart

Reach for the stars

Believe your own power

Now, here in this place

Here on this earth

This is the hour

 

It's just a place we call paradise

Each of us has his own

It has no name, no, it has no price

It's just a place we call home

A dream that reaches beyond the stars

The endless blue of the skies

Forever wondering who we are?

Forever questioning why?

 

Come - open your heart

Reach for the stars

Believe your own power

Now, here in this place

Here on this earth

This is the hour

 

There shines a light in the heart of man

That defies the dead of the night

A beam that glows within every soul

Like wings of hope taking flight

Like wings of hope taking flight

 

사나이 가슴에서 빛이 발하고 있구나

그것은 어둠을 없애려는 도전이다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부터 발하는 빛이다

그것은 비상하려는 날개와 같다.

햇빛 찬란한 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때

우리는 하찮은 것들이라 말한다

어느 누군가의 눈가에서 이글거리는 번쩍임

매일 얻어지는 간단한 선물들

 

어딘가엔 낙원이 있고

그곳엔 모든 이에게 해방이 있노라

이 지구상에 그리고 그대들의 눈 속에 있지

우리 모두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이로다

 

어서, 그대들의 가슴을 열어봐요

별들에게 손을 뻗어봐요

그대들의 힘을 믿어요

자,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서있는 바로 여기

지금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우리가 낙원이라고 부르는 그곳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기만의 낙원을 갖고 있다

이름도 없고, 돈이 들지도 않는다

바로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그곳이다

별 저 너머에 있는 꿈

하늘은 끝없이 파랗구나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영원한 질문

영원한 의문

 

어서, 그대의 가슴을 열고

별들을 잡아봐요

그대의 힘을 믿으세요

자, 여기

이 땅의 바로 여기

지금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사나이 가슴에서 빛이 발하고 있구나

그것은 어둠을 없애려는 도전이다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부터 발하는 빛이다

비상하려는 날개와 같이

비상하려는 날개와 같이

 

 

 

 

 

 

 

 

 

 

 

 

 

 

 

 

 

 

서쪽 바다로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에스파냐 왕국으로 이민 온 이태리 출신 탐험가 콜럼버스. 그는 어린 아들 페르난도를 데리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의 모습을 보고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지구는 평평한 땅이라 끝까지 가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며 그곳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공포와 미신이 난무했고 기존의 권리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들의 탁상공론까지 콜럼버스의 제안에 제동을 건다.
 

그러나 이자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을 지원하여 1492년, 드디어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3척의 배로 항해를 시작한다. 극심한 공포와 난관을 헤치면서 예정의 2배가 넘는 2개월여 동안 서쪽으로 항해하던 콜럼버스 일행은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과나하니 섬을 발견하고 그곳을 인도의 일부라 생각하고 식민지로서 개척한다.
 

본토 대륙을 발견하기 위하여 2번째 항해를 한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에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신세계를 건설하던 중 시련이 닥친다. 원주민과의 갈등과 동행한 귀족 목시카의 반란과 더불어 불어 닥친 허리케인으로 그의 신세계는 황폐화되는데... ..... 

 

참고

 

*** 콜럼버스(1451-1506)는 에스파냐(스페인)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항해하다 도착한 곳이 지금의 카리브해 연안의 산살바도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서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곳을 인도인 줄 알았다.

세계지도를 보면 뜬금 없이 카리브해 연안이 '서인도 제도'라고 명명이 되어 있고, 아메리카 본토에 사는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콜롬버스가 이 땅을 인도로 착각해서 붙여진 이름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는 현재의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본토를 발견했기 때문에 대륙의 이름에 그의 이름을 빌어와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다.

 

*** 바스코 다 가마(1469-1524)는 포르투갈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항해하다 아프리카 대륙의 연안을 따라 남하한 후 남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인도 서해안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케랄라주는 이들이 인도에서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지금도 포르투갈풍의 건축과 카톨릭 신자가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인데, 인도 내에서도 이국적인 지역으로 여겨질 만큼 이색적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다.

 

 

 

 

 

 

 

 

 

 

 

 

 

오늘은 [장재언 칼럼]을 먼저 읽고

초대 시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서양인은 대나무를 볼 때에 땅 속에서 올라온 가지 숫자를 헤아려 여러 그루로 봅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가지가 여러 개가 나와 있어도 한 그루로 봅니다. 한국인은 땅 속의 뿌리를 포함하여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은 분석적, 계량적 사유(思惟)를 하지만 한국인들은 직관적 통합적 사유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선우 교수-홍익대)

 

영적 사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분석만으로는 거룩한 존재에 대한 것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습니다.

지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전개된 분석적 사유로 접근한 성서해석은 결국 유식하게 죽어버린 낱말만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서양세계는 교회도 죽고 기독교의 본질도 교리와 윤리와 이성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서양은 물질주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직관과 통합적 사유 속에서 바라다보아야 알 수 없는 존재의 그 신비를 신비로 받아들이고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때에 신비의 안개 속에 숨어 계시던 하나님과의 조우(遭遇)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입김을 쏘임 받아  마침내 계산에 능하고 약 싹 빠르며 거짓되고 구차한 인생을 벗어버리고 싶어지며 거룩한 사랑의 세계로 불타 들어가게 됩니다. (이주연)

 

일례로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을 개발해 오늘날 천재 과학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아인슈타인이 정작 수학에 취약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사물의 원리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복잡한 이론이나 공식보다 중요시했던 것은 직관(直觀)이었습니다.
 

[직감(直感)과 직관(直觀), 사고(思考)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心想)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수단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던 아인슈타인의 주장에서 창조적인 일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지식보다 상상력의 활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 의미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상(心想)들을 내버려둔다면 그저 공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생각의 탄생](로버트 루트번스타인 / 미셀 루트번스타인 지음)이라는 책을 보면 상상(想像)과 공상(空想)을 구분하는 공식으로 13가지 [생각의 도구]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관찰 - 형상화 - 추상 - 패턴 인식 - 형성 - 유추 - 몸으로 생각하기 - 감정이입 - 차원적 사고 - 모형 만들기 - 놀이 - 변형 - 통합입니다.
 

겉보기엔 난해한 듯 하지만 이것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보완적인 하나의 과정입니다. 지식은 사물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과 관찰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패턴화됩니다. 그리고 현실과 상상 사이의 끊임없는 조화와 통합의 과정을 거쳐서 생각은 비로소 하나의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예술이란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곧 상상(생각)은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확장하고 구체화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기독교의 본질도 교리와 윤리와 이성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 버리면 고사(枯死)하고 맙니다. 쪼개기보다는 덩어리로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되 하나님의 뜻을 직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어찌 하나님의 신비를 계산기로 산수(算數) 하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를 받아드려 신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이 진리의 길입니다. (장재언)

 

 

 

 

 

 

 

 

 
 

 

 

 

 

 

 

 

 

 

 

 

 

 

로런스(David Herbert Richards Lawrence, 1885년 9월11일-1930년 3월2일)는 영국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이다.

 

이 시는 다소 난해하고 내용이 길어서 시에 대한 해설을 먼저 해드리고 본문을 소개하기로 합니다. 본문 사이사이에 주석을 넣어드립니다.

 

자유시.

이 시는 로렌스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있었을 때의 경험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는 물을 길러 갔다가 황금색 뱀을 만나는데, 뱀의 아름다움에 끌리면서도 그것을 죽여야 한다는 세속의 가르침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뱀에게 나무토막을 결국 던집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이런 행위를 후회한다는 내용으로 작품은 끝이 납니다.

 

이 작품은 산업문명, 인습적인 교육 등으로 말살되는 인간의 본능과 생명력을 되살리려는 그런 자세를 보여줍니다. 뱀이라는 작품의 중요한 소재는 기독교적인 관념에서 알고 있는 악의 상징이 아니라 원시적 본능의 힘으로서 찬미가 되고 습니다.

civilization(문명), education(교육)이라는 항목과는 반대되게 원시주의(primitivism), 본능(instinct), 충동(impulse) 등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언)

 

 

Snake

 

A snake came to my water trough

On a hot, hot day, and I (came 생략) in pajamas for the heat, To drink there.

뱀 한 마리가 나의 수조로 다가왔다.

어떤 뜨겁고 뜨거운 날 덥고도 더운 날, 나는 이 더위 때문에 실내복 차림을 하고 그곳에 물을 마시러 갔다.

 

※ trough : 펌프나 샘물을 담는 바닥에 놓여있는 큼지막한 물통

 

In the deep, strange-scented shade of the great dark carob tree

I came down the steps with my pitcher

And must wait, must stand and wait, for there he was at the trough before me.

 

짙은 그리고 기이한 냄새가 나는 그림자

크고 울창한 콩나무의 짙은 야릇한 향내가 나는 그림자 속에서

나는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서서 기다려야 했다.

나보다 앞서 그 수조에는 그 (의인화. snake를 인격화, 존중하는 모습)가 있었기 때문이다.

 

※ 한 행에 deep, dark 라는 단어가 반복 →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 본능의 세계, 우리의 의식 깊이 있는 어두운 세계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He reached down from a fissure in the earth-wall in the gloom (무의식의 세계를 상징)

And trailed his yellow-brown slackness soft-bellied(목적어) down, over the edge of the stone trough

And rested his throat upon the stone bottom,

And where the water had dripped from the tap, in a small clearness,

그는 어두침침한 컴컴한 흙담에 있는 틈새로부터 내려와서는

황갈색의 부드러운 배를 가진 느릿느릿함을 끌고 내려왔다.

돌 수조의 가장자리지 너머로 끌고 내려와서는

바닥 돌 위에 그의 목을 내려놓았다.

물이 꼭지에서 작게 또렷또렷하게 작은 방울을 지며 떨어지는 그곳에

 

He sipped with his straight mouth,

Softly drank through his straight gums, into his slack long body, Silently.

 

그(뱀)는 곧게 뻗은 입으로 들이마셨다.

그는 곧은 입으로 물을 한 모금씩 마셨다.

그리고 곧은 잇몸을 통해서 부드러이 마셔서 그의 느릿한 긴 몸체 속으로 그것을 조용히 빨아들였다.

 

→ s의 alliteration(두운법). 뱀이 내는 쉿쉿소리(hissing)를 상기시키고 있다.

 

→ 물을 마시는 동작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 slackness라는 추상어를 목적어를 삼고 있다. slack-belly(느릿느릿한 배)라는 구체물대신에 slackness라는 추상어를 쓰면서 전체적으로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Someone was before me at my water trough,

And I, like a second-comer, waiting.

He lifted his head from his drinking, as cattle do,

And looked at me vaguely, as drinking cattle do,

And flickered his two-forked tongue from his lips, and mused a moment,

And stooped and drank a little more,

Being earth-brown, earth-golden from the burning bowels of the earth

On the day of Sicilian July, with Etna smoking.

누군가 내 물통에 나보다 먼저 와 있어서

나는 두 번째 온 사람으로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소들이 그러하듯이 물을 마시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그리고는 물 마시는 소들이 그렇게 하듯이

멍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두 갈래 난 혀를 그의 입에서 하늘거리다가는

잠시 명상에 빠졌다.

그리고는 몸을 숙이고 조금 더 마셨다.

대지의 불타는 내장(창자)에서 나와서 흙의 갈색,

황금색을 하고서

에트나 화산이 연기를 뿜는 시칠리아의 7월의 낮(날)에

 

→ 앞의 내용들을 요약을 하면서 앞의 내용을 반복. 이런 반복 어구는 영탄조(chanting)의 느낌을 만든다.

 

→ 뱀의 행위를 looked at me vaguely, mused 마치 사색하는 듯한 몽상에 잠긴 듯한 그런 모습을 보여줌. 뱀을 완전히 인격체로 보고 묘사한 것.

 

→ 화산이 폭발한다는 것은 내면에서부터 무언가 솟아나는 것. 무의식, 인간 내면의 본능적인 충동이 솟아남.

성적인 충동일 수도 있다.

 

※ earth-brown, earth-golden : Lawrence가 만든 단어

※ 화자와 snake가 대면하는 초반 상황

 

The voice of my education said to me

He must be killed,

For in Sicily the black, black snakes are innocent, the gold are venomous.

 

내가 받은 교육의 목소리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는 죽여야 된다.’

시실리에서는 검고 검은 뱀들은 무해하지만 황금색 뱀은 독이 있기 때문이다.

 

※ education : 그 앞의 burning bowels, 이것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떤 무의식의 세계, 이것을 프로이트심리학에서는 그것을 id라고 표현하는데, 이 id를 억누르려고 하는 것 → education은 프로이트적인 용어로 하면 superego(초자아)라 고 한다. superego와 id의 대결로 해석할 수도 있다.

 

And voices in me said, If you were a man

You would take a stick and break him now, and finish him off.

 

내 내면의 그 목소리는 말을 한다.

‘네가 인간이라면 너는 막대기를 집어 들어 그를 부서야 된다. 그를 끝장내버려야 된다.’

 

But must I confess how I liked him,

How glad I was he had come like a guest in quiet, to drink at my water trough

 

하지만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나의 수조에 물을 마시러 그가 조용히 손님처럼 왔다는 사실에 내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기뻐하는지를

 

→ 뱀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본능이나 무의식에 화자가 상당히 심하게 경사하고 있다.

 

And depart peaceful, pacified, and thankless,

Into the burning bowels of this earth?

 

그렇게 왔다가는 평화롭게 만족하며

그리고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고

이 대지의 불타는 내장 속으로 그가 다시 떠났다는 사실에 즐거웠는지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Was it cowardice, that I dared not kill him?

Was it perversity, that I longed to talk to him?

Was it humility(겸손보다는 비굴함), to feel so honored?

I felt so honored.

 

내가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은 비겁함 때문일까?

내가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한 것은

이야기하기 갈망한 것은 나의 왜곡됨, 사악함,

뒤틀림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영예로운 느낌을 받은 것은

(뱀이 방문해주어서 내가 영광을 받은 것 같은 것은)

나의 비굴 감 때문일까?

나는 너무나 영광을 받은 느낌이었다.

 

※ cowardice, perversity, humility : education이 화자에게 만들어 둘러 씌운 허위의식

 

And yet those voice:

If you were not afraid, you would kill him!

 

그럼에도 내가 받은 교육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겁쟁이가 아니라면, 너는 그를 죽여야 된다!’

 

And truly I was afraid, I was most afraid,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너무나 겁이 났다.

 

→ 본능을 추구하면서도 그 본능이 발작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But even so, honored still more

That he should seek my hospitality

From out the dark door (무의식을 나타내는 표현)

of the secret earth.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더더욱 영광을 받은 것 같았다.

은밀한 대지의 어두운 문에서 나와 그가 나의 환대를 찾아준 것에 대해 더욱이나 나는 영예로운 느낌이었다.

 

→ 뱀에 대해서는 일시적으로 이렇게 두려움을 가지지만, 그러나 이것은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 education과 instinct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물론 화자는 instinct를 따르려고 애쓰고 있다.

 

He drank enough

And lifted his head, dreamily, as one who has drunken,

그는 충분히 마셨다.

그리고 마치 물을 마신 사람처럼 꿈꾸듯이 그렇게 머리를 치켜세웠다.

 

And flickered his tongue like a forked night on the air, so black,

대기에 갈라진 밤 즉, 번개에 갈라진 밤하늘처럼 너무도 검은 그의 혀를 그는 날름거렸다.

 

※ forked night : 번개가 쳐서 하늘에 포크처럼 쇠스랑처럼 갈라진 것.

 

Seeming to lick his lips,

입술을 마치 핥으려는 듯이

 

And looked around like a god, unseeing, into the air,

뱀은 보지도 않고서 대기(대지)속으로 공중으로 마치 신처럼 그렇게 사방을 둘러다 보았다.

 

→ 뱀을 a god으로 표현. 찬미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

 

And slowly turned his head,

그리고는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And slowly, very slowly, as if thrice adream (a+dream 형용사 ; 꿈결의)

마치 세 겹의 꿈을 꾸는 듯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했다.

 

Proceeded to draw his slow length curving round

And climb again the broken bank of my wall-face.

그의 느릿느릿한 길이(느린 몸)를 둥그렇게 구부려 당기기 시작하더니 → 몸뚱이라는 구체물을 추상으로 바꿈

내 집 담의 부서진 둑으로 다시 올라가기 시작을 했다.

 

And as he put his head into that dreadful hole,

And as he slowly drew up, snake-easing his shoulders, and entered further,

그리고 그가 그 무서운 구멍(땅속)으로 그의 머리를 집어넣을 때,

그리고 그가 뱀답게 그렇게 어깨를 움직여서 몸을 끌어당기고는 더 안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A sort of horror, a sort of protest (overcame의 주어) against his withdrawing into that horrid black hole,

Deliberately going into the blackness, and slowly drawing himself after,

Overcame me now his back was turned.

일종의 공포, 일종의 항의 이런 것이 나를 사로잡았다.

암흑 속으로 용의주도하게 들어가면서 그리고 그 뒤로 그의 몸을 느릿하게 끌어당기면서

그가 끔찍한 검은 구멍으로 사라져버린데 대해서

그가 등을 돌리는 그 순간, 공포와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 본능이 위축되고 사그라진 데 대해서 화자는 분노를 느낀다.

 

I looked round, I put down my pitcher,

나는 상황을 돌아다보고 주전자를 내려놓고는

 

I picked up a clumsy log

And threw it at the water trough with a clatter.

모양 없는 통나무를 집어서 그것을 수조에다가

탁 하는 소리가 나게 그것을 던졌다.

 

I think it did not hit him;

나는 통나무를 던진 것이 그를 맞추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But suddenly that part of him that was left behind convulsed in undignified haste,

Writhed like lightning, and was gone Into the black hole, the earth-lipped fissure in the wall-front,

 

그러나 갑자기 그의 몸의 뒤에 남은 부분이

볼품없이 급하게 경련을 했고

번개처럼 몸부림을 치면서 검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담벽의 흙 주둥이 같은 틈새로 사라졌다.

 

At which, in the intense still noon,

I stared with fascination.

그 구멍을 나는 그 작렬하는 고요한 한낮에

황홀한 듯이 쳐다보았다.

 

→ 사라진 충동에 대한 동경심이 남았다.

 

※ 뱀에게 몽둥이를 던진 사건

 

And immediately I regretted it.

I thought how paltry, how vulgar, what a mean act!

I despised myself and the voices of

my accursed human education.

나는 즉시 그것을 후회를 했다.

얼마나 하찮고 속되고 얼마나 비열한 행동인가 생각했다.

나는 내 자신을 경멸했고, 저 저주받을 인간의

교육의 목소리를 멸시를 했다(경멸을 했다)

 

And I thought of the albatross,

나는 알바트로스를 떠올렸다.

 

※ Coleridge의 시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에서 주인공인 늙은 선원은 Christ의 상징인 알바트로스를 죽임으로 해서 죄의 징벌을 받게 되는데, 마치 화자도 뱀에게 이렇게 알바트로스를 향한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And I wished he would come back, my snake.

그가 되돌아 오기를 바랬다.

 

For he seemed to me again like a king,

Like a king in exile, uncrowned in the underworld,

Now due to be crowned again.

 

그는 나에게는 왕처럼, 유배당한 왕처럼

무의식의 세계, 즉 underworld 하계에서

왕관을 뺏긴 왕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이제 마땅히 왕관을 써야 될 그런 존재로 보였다.

 

→ god에서 king으로 묘사

→ id가 이제 왕관을 써야 되는데 현실에서는 superego가 왕관을 쓰고 있다. 이것을 되찾아야 된다.

 

And so, I missed my chance with one of the lords Of life.

그래서 나는 생명의 한 군주를 만날 내 기회를 놓쳤다.

 

And I have something to expiate;

A pettiness.

나는 속죄할 거리가 있다. 나의 비열함.

 

 

※ 화자의 후회로서 이 시는 종결 됨.

※ Lawrence는 이 작품을 통해서 무의식, 충동, 생명력, 원시성을 미화하고 있다.

이것들은 교육, 문명, 제도, 관습과 대조가 된다.

Lawrence의 이 시는 관습을 파괴하는 격렬성을 보여주고 있다.

 

 

 

 

 

 

 

 

 

 

 

 

 

 

 

 

 

 

 

 

 

빛 바랜 옛 책의 향기에서 미래를 읽는다

정재숙

 

시간이 잠시 멈추는 곳 지식과 문화가 쌓이는 창고 헌책이 보물로 재탄생하는 산실(産室). 바로 고서점이다. 한국에선 하나 둘 사라지고 있지만 선진국에선 국격(國格)을 말해 주는 문화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

 

 

 
 

큼큼한 곰팡내인 것도 같고, 싸한 잉크 냄새 같기도 하고, 해묵은 콩기름 향내인 듯도 하고···. 고서점에선 그런 냄새가 난다.

 

옛사람은 이를 일러 ‘서권기(書卷氣)’라고 했다. 책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이렇듯 근사하게 표현했으니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조선시대에는 책(冊)·시(詩)·서(書)·화(畵) 순으로 가치를 매겼다. 시와 글씨와 그림 앞에 책을 두었던 것이다. 책 한 권과 그림 한 점을 맞바꿨다고 하니 이미지보다 정신을 훨씬 높이 친 셈이다. 오늘날 그림 값이 뛰고 책값이 떨어지는 것은 ‘이미지 시대’를 맞은 책의 운명일까.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이란 말이 있다. 비단은 500년, 종이는 1000년을 간다는 얘기다. 종이로 만든 책은 세월을 제 몸 속에 지니고 태어난다. 인류가 쌓아 온 문명과 역사를 간직한 채 신간으로 탄생한 뒤 다시금 시간을 천천히 보태 가며 늙어 가는 것이 고서(古書)다. 고서는 자신이 품은 오랜 시간의 경험으로 견고하면서도 지혜로운 존재가 된다. 빛 바랜 고서 속에 빛이 있다.
 

하지만 고서들이 모이는 고서점은 골동품이 돼 버렸다. 누렇게 바랜 책들이 모여 말 없이 사람들을 맞아 주던 지혜의 곳간, 손때 묻어 켜 켜로 주름진 헌책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던 보물섬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서울 인사동 거리는 어느덧 관광객의 쇼핑가로 변하고 있다. 오르는 임대료를 못 견뎌 가게 문을 닫는 곳이 늘고 있다. 이제 인사동의 고서점은 10여 곳에 불과하다.
 

75년의 연륜을 지닌 통문관(通文館·사진)에는 ‘적서승금(積書勝金)’이란 편액이 손님을 맞는다. 책을 쌓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요즘에야 물정 모르는 말일 수 있으나 책을 경외하는 속뜻만은 되새김직하다. 고서점의 부흥과 경제 성장은 같이 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나라 살림이 어려우면 고서점이 망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고서점들이 죽을 쑤는 건 경제 사정이 안 좋기 때문일까, 책 사랑이 식었기 때문일까.
 

얼마 전 일본 도쿄의 고서점 거리 간다진보초(神田神保町)에서 열린 ‘도쿄 명물, 간다후루혼(神田古本) 축제’는 책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성품을 보여 줬다. 유서 깊은 이 거리가 늘 북적대는 건 일본인의 학구열을 잘 말해 준다. 쉴 새 없이 고서점을 드나드는 젊은 학생과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의 모습은 부러움을 자아낸다.
 

한국 고서점 몰락하는 이유를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책을 안 읽는 풍토다.

 

안 읽으니 안 산다. 독자가 없으니 서점도 없다. 이 대목에서 일본 국회가 내년을 ‘국민 독서의 해’로 정했다는 소식이 신선하게 들린다. 정쟁의 늪에 빠진 한국 국회가 이런 산뜻한 결의안 하나 내주면 얼마나 좋을까.

 

둘째, 유통 질서가 엉망이다.

 

고서점 업계 내부에서 적절한 가격을 내놓지 못한다. 잣대 통일이 안 되니 값이 천차만별이다. 이 서점에서 50만원 부른 책이 저 서점에 가면 10만원일 때 독자는 고서점 전체를 믿지 못하게 된다.

 

셋째, 전문가 집단이 없다.

 

선진국처럼 3~4대(代) 대물림으로 식견과 경륜을 쌓아 가는 고서점 주인이 드물다. 고서점을 하려면 서지학자 못지않은 뛰어난 안목을 갖춰야 한다. 무슨 활자로 찍었느냐 하는 판본은 물론이고 발행 연도와 지질, 시대별 한자 쓰임새 등을 감식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과 오늘날 살아 움직이는 한국학 수준과의 관계를 꿰고 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인물이 드물다. 책 장사를 잘하려면 학자 못지않게 공부를 많이 해야 하지만 돈 안 되는 사업에 인생을 투자할 젊은이가 드물다.
 

이런 현실에서 요즘 인사동을 중심으로 한 고서점 업계는 고서점 전문 경매회사를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가격 산정을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편리한 방법은 ‘경매’라는 논리를 담아서다.
 

하지만 문제의 뿌리는 역시 독자다. 독자 없이 책방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 헌책은 새 독자를 만나 새 생명을 얻는다. 젊은 독자는 늙은 책을 만나 늙음의 지혜를 받는다. 그 피 돌기와 순환을 이어 주는 곳이 고서점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문화 복원 바람을 타고 부흥하고 있는 중국의 고서점 업계는 주목할 만하다. 발상을 180도 바꾼 영국의 ‘헤이 온 와이’도 벤치마킹 대상이다.
 

연극학자인 안치운 호서대 교수는 최근 펴낸 책 『시냇물에 책이 있다』(마음산책)에서 이렇게 한탄한다.

 

 “책방의 경험이 사라지고 있다. 책방이 망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갈 곳은 어디인가?” 

 

 

 

 

 

김무곤 동국대 교수(신문방송학)

 

“만약 신분을 감추고 좋아하는 장소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지난 5월 유럽 방문을 앞둔 일본 미치코 왕비의 기자회견 때 한 기자가 던진 질문이다. 왕비의 대답은 이랬다.

 

“학생 시절 자주 다녔던 진보초(神保町)의 고서점에 가서 다시 한번 오랜 시간 선 채로 책을 읽고 싶습니다.”

 

‘책을 사러 가고 싶다’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선 채로 책을 읽고 싶다’는 왕비의 소박한 소망은 일본 사회에 진보초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그렇다. ‘진보초에 간다’는 말은 ‘헌책을 사러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복한 시간을 보내러 간다’는 의미인 것이다.
 

진보초는 도쿄 중심부 지요다(千代田)구 북부에 있는 세계 최대의 고서점 타운을 일컫는다. 180곳이 넘는 고서점은 대부분 야스쿠니 거리와 하쿠산 거리가 교차하는 진보초 사거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그러나 이곳뿐 아니라 스이도바시와 오차노미즈역(驛) 등 주변에 넓게 자리 잡은 고서점가를 통칭해 ‘진보초’라고 부른다.
 

에도(江戶) 말기에 중앙정부인 막부(幕府)가 근대 최초의 국립교육기관인 한쇼초쇼(蕃書調所)를 이 근처의 히토쓰바시 거리에 옮겼는데 이것이 도쿄가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 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의 도쿄대학(東京大學)이 된다.

 

근대 신학문의 근거지가 바로 진보초였던 것이다. 그 후 주변에 외국어학교·고등상업학교뿐만 아니라 사립인 메이지(明治)·센슈(專修)·주오(中央)·니혼(日本)대학 등이 차례차례 세워지면서 일본 최대의 대학촌이 만들어졌다. 당연히 학생 상대의 하숙집도 많이 생겨났다. 학생과 학자가 모이면 자연스레 책의 수요가 생기는 법.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출판사·도매상·인쇄소가 모여 있는 ‘책의 거리’가 형성됐다.
 

하버드대 교수, 맥아더에게 ‘폭격 말라’ 청원

 

이런 진보초도 한때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공습이 도쿄 시내를 초토화했다. 그런데 종전 후 포연이 자욱한 도쿄 시내에서 진보초 부근만 멀쩡했다.

 

동양 학문의 보고(寶庫)가 사라질 뻔한 위기를 구한 사람은 세르게이 엘리세프(1889~1975)였다. 그는 서양인 최초의 일본학 연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10대 시절 베를린대학에서 중국어·일본어를 배웠고, 19세 때 서양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한 수재다.

 

 

도쿄 진보초 거리를 걷는 시민(사진 왼쪽)과 서점 입구(가운데),

서점 안에 진열된 책들(왼쪽).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에게도 배웠지만 그의 가장 큰 스승은 진보초 고서점이었다. 러시아의 부유한 집안 후예였던 덕택에 그는 진보초 서점가를 종횡무진하면서 수많은 책을 구입해 읽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당시 하버드대학의 일본학 교수이면서 미군의 고문을 겸하고 있던 엘리세프가 맥아더 장군에게 진보초 일대를 폭격하지 말 것을 청원했다는 일화는 이제 진보초의 전설이다.
 

진보초 고서점가를 걸으면 문학·예술·사회과학·자연과학·스포츠·연예·오락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만날 수 있다. 3∼4대째 대를 이어 경영하는 노포(老鋪)가 있는가 하면 젊은 점주가 영화 팸플릿 한 분야만을 들고 진입한 신생 서점도 있다. 작고한 작가의 육필원고만을 다루는 3평짜리 가게가 있는가 하면, 5층 건물 전체에 건축 전문서적만을 전시하는 중형 서점도 있다. 현재 이들 고서점이 보유한 재고 도서만도 약 300만 종, 1000만 권에 이른다고 한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고서 축제’에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 진보초는 일본 국민 모두에게, 아니 전 세계인에게 열려 있는 거리의 개가식 도서관이다.
 

진보초는 한국사 사료의 숨겨진 서고이기도 하다.

국제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씨가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목격한 일본 순사의 수기를 발견한 곳, 안중근 의사의 옥중서기 『안응칠 자서전』을 찾아낸 곳도 바로 진보초의 고서점이다.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표기한 최초의 서양 고지도(古地圖)를 공개하고, 동해(東海) 표기가 있는 세계 각국의 지도들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여는 등 오롯이 지도라는 외길을 걷고 있는 경희대 혜정박물관 김혜정 관장. 김 관장이 옛날 지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30여 년 전 우연히 진보초 고서점가에서 프랑스에서 제작한 세계지도를 발견하던 순간의 감동 때문이었다.

 

그는 말한다. “진보초가 없었으면 독도가 한국 것임을 밝히는 고지도는 물론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보초는 내 학문의 근거지이자 내 인생의 출발점, 내 고향, 내 학교입니다.”
 

진보초는 평생 한 우물만을 파는 사람들의 성지(聖地)다. 20여 년 전 필자의 유학 시절. 진보초의 단골 고서점 한구석에 하루는 못 보던 책장 하나가 서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원저와 그들에 관한 연구서를 비롯해 번역서·학술잡지, 거기다 전 주인이 꼼꼼히 기록한 철학 노트까지 커다란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책과 노트들은 낱권으로 빼 볼 수 없게 빨간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그 책들을 30년 이상 모으고 공부하던 옛 소유주가 세상을 떠났는데 형편이 어려워진 부인이 한꺼번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부인은 내놓으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이 책을 낱권으로 흩뜨리지 말고 한꺼번에 모두 해당 분야의 전공자 한 사람에게 팔아달라는 것. 서점 주인은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평생을 바친 한 사람의 길이 다른 한 사람에 의해 이어진다.
 

日 노벨상 수상자 16명 탄생시킨 자양분

 

진보초.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한 거리…. 이곳에는 인형극 무대 뒤의 연희자들처럼 연구자와 독자들을 보이지 않게 돕는 장인들이 있다. 바로 전문성으로 잘 무장된 고서적상과 점원들이다.

 

창업 2세인 할아버지는 산악서적, 3세인 아들은 요리책, 4세인 손자는 미술서를 각각 담당하는 유큐도쇼텐(悠久堂書店). 1882년 창업 이래 4대째 고지도·고미술서·우키요에(浮世繪) 등 에도 시대의 고전적(古典籍)을 취급해 온 오노쇼텐(大野書店). 당서(唐書)와 중국문학·동양사에 강한 야먀모토쇼텐(山本書店). 지질학 연구에 공헌한 공로로 일본지질학회의 감사장을 받은 광물·지질·암석 전문의 오쿠보쇼텐(大久保書店)….
 

이들 서점의 점주와 점원들은 해당 분야의 젊은 대학교수들을 한 수 가르칠 수준의 지식과 정보로 무장돼 있다. 이들 또한 평생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다. 문고판 전문서점 분코가와무라(文庫川村)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소설가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의 휘호가 그들의 마음가짐을 대변한다. “이 길 외에 내가 살 길은 없다. 나는 이 길을 걷는다.”
 

누구나 일본 하면 도요타자동차나 닌텐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도요타나 닌텐도의 성취 뒤에 숨어 있는 진보초의 존재는 잘 알지 못한다. 렉서스의 아름다운 젠(禪) 스타일 곡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진보초의 침침한 서가 앞에 서 있었을까.

 

발매되는 족족 지구인의 가슴을 뒤흔드는 닌텐도의 게임 소프트웨어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진보초 고서점에서 구입한 몇백 엔짜리 동화책과 만화책을 빨리 읽고 싶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뛰어가던 청소년들의 꿈이 녹아 있다.

 

일본이 지금까지 받은 노벨상은 16개. 그 배경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평생 묵묵히 한 우물만을 판 수많은 사람의 일생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지식(知識)의 자양분과 책을 읽는 지복(至福)의 순간을 생명줄처럼 공급하는 ‘진보초’가 있다. 

 

 

 

 

50년째 진보초 '헌책 축제'

도쿄 김동호 특파원

 

지난달 27일 일본 도쿄의 고서점 거리 간다진보초(神田神保町)에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올해 50주년을 맞이한 진보초 헌책 축제가 열리면서 주변 골목이 헌책을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책방 곳곳에는 ‘숨어 있는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축제 기간 중에는 야외 책 판매가 실시됐다. 일부 골목은 300m 이상 길게 늘어선 헌책 판매 수레로 장관을 이뤘다. 골목에 자리 잡은 300여 개의 고서점은 문고본과 사전류 외에 희귀 도감과 미술책을 대거 내놓았다. 도쿄에 거주하는 이토 아오키(80)는 “축제가 처음 열린 해부터 50년째 찾고 있다”며 바퀴가 달린 대형 가방에 가득 책을 실었다. 도쿄에서 남서쪽으로 500㎞가량 떨어진 오카야마(岡山)시에서 온 30대 여성도 “소장하고 싶었던 메이지(明治) 시대 풍속도를 발견했다. 역시 진보초에는 언제나 보물들이 넘친다”고 말했다.
 

해마다 일본의 책 애호가들을 흥분시키는 이 헌책 축제의 공식 명칭은 ‘도쿄 명물, 간다후루혼(神田古本) 축제’다. 볼거리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고서 100만 권을 내놓고 정가의 20~30%에 판매하는 ‘마른 하늘 보물찾기 시장’과 함께 희귀본을 내놓는 ‘특선 고서(古書) 즉석 판매전’ 이 열려 주목을 끌었다. 국민적 축제가 되면서 유명 화가가 나서 행사 포스터를 직접 그렸다. 탤런트 등 유명인의 애독서나 권장도서를 전시하는 이벤트 행사도 발길을 끌었다.
 

일주일간 열리는 축제에서는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졌다. 1일 열린 진보초 북 페스티벌에서는 책 수레 150대에 약 3만 권의 신간 서적을 전시했다. 사실상 새 책이지만 얼룩이 지거나 손때가 약간 묻었다는 이유로 정가의 반값이면 살 수 있다. 유명 작가들의 사인회와 강연회, 재즈 연주회 등도 열렸다. 책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축제 기간 중 몰려든 인파는 50만 명으로 집계됐다. 한국을 비롯해 외국에서 달려온 ‘열성 팬’들도 있다.
 

이곳에서 4대(代)를 이어 오며 100년간 고서점을 운영해 온 다무라(田村) 서점의 50대 여사장은 “인터넷을 통해 책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지만 직접 실물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맛은 인터넷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축제는 올해 63회인 독서주간과 맞물려 열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독서주간이 따로 없을 만큼 독서열이 뜨겁다. 해마다 열리는 헌책 축제는 독서에 대해 느슨해진 관심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는 계기일 뿐이다.
 

일본 국회는 2010년을 아예 ‘국민 독서의 해’로 정했다. 젊은 층의 활자 매체 이탈이 일본의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판단에 따라 1년 내내 독서 진흥 캠페인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런 바람을 타고 진보초는 내년에 연중 할인 판매는 물론이고 워크숍·강연회·사인회·독서회 같은 다양한 헌책 축제를 벌일 계획이다.

 

 

 

 

 

박정경 런던 통신원

 

영국 웨일스에 있는 '헤이 온 와이(Hay-On-Wye)'는 마을 전체가 도서관이었다.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에 서점이 40개를 넘는다. 통행료(50펜스)를 받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 마을 경계로 들어서니 초입부터 서점 간판을 단 농가가 있었다. ‘와이 강에 있는 헤이’라는 마을 이름은 파주의 문화 마을 헤이리가 본떴다. 와이 강은 영국의 남서 지방인 웨일스에서도 내륙으로 쑥 들어가 있는 매우 외진 시골 지역을 흐른다.
 

이런 산골에 왜 고서점 마을이 있을까. 마을 전체가 헌책방으로 뒤덮인 것은 불과 반세기 전 일이다. 옥스퍼드대학 출신 리처드 부스(62)가 1961년 고향으로 돌아와 시작한 사업이 낙후돼 가던 탄광촌을 한 해 50만 명이 찾는 세계적 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부스는 먼저 쓸모없던 중세 시기의 성(城)과 극장, 소방서, 빈집 등을 사들였다. 그리고 전 세계를 돌며 고서들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아 자신이 세운'헌책 왕국'의 서가에 차례차례 들여놨다. 심지어 성벽 자체를 서가로 꾸몄다. 헤이 온 와이의 서가는 낡은 농가와 창고 등을 개조해 만든 것이 많다.
 

부스가 서점으로 개조한 헤이 성은 이 마을 언덕 꼭대기에 있다. 100만여 권의 헌책과 희귀 고서가 알파벳 순서로 3개 층에 촘촘히 진열돼 있다. 14세기 책부터 최근 나온 신간까지 연대도 다양하고 규모도 방대하다.

특정 주제에 관한 전문서들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이웃들이 운영하는 서점들도 소박한 개성이 넘친다. 19세기 소설, 추리 소설, 그림책, 건축, 원예 등 분야별로 전문화돼 있는가 하면 심지어 벌이나 권투 등 지극히 좁은 주제의 책도 주인이 척척 구해다 준다.
 

주인만 아는 정리법이 있다는 듯이. 각 가게가 인터넷 사이트까지 운영해 외국에서도 주문이 가능하다. 이곳을 찾은 사람 가운데는 고서 수집가도 있지만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구경 온 40대 아빠도 보였다. 책을 꼭 읽고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는 분위기를 체험시키기 위해서였다.
 

책을 매입한 과정도 재미있다. 리처드 부스의 자서전 『헌책방 마을 헤이 온 와이』에 따르면 고서의 가치를 잘 모르는 지방 유지를 꼬드겨 어마어마한 장서를 얻기도 한다. “얼마면 되겠느냐”는 부스의 물음에 그는 “암캐 서너 마리 살 돈이면 되지 뭐…”라고 답변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너무 많은 책을 사들이는 바람에 한때 파산의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서가가 불에 탄 적도 있다. 어쨌든 헤이 온 와이에 가면 ‘어떤 책도 구할 수 있다’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전 세계 고서 수집가들이 모여들었다.
 

 

 

1.헤이 성 서점을 찾은 방문객들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앞쪽 성벽이 서가로 꾸며져 있다.

2.시골 농가 두 채를 개조한 헌책방.

3.헌책과 새책을 모두 판다며 책을 바깥에 전시한 서점.

 

 

77년 독립국 선포, 쌀종이 화폐 발행

 

부스가 처음 고서점을 시작할 때 마을 사람들은 부스의 행동을 이상하게만 여겼다. 부모는 명문대 보내 놨더니 취직은 않고 엉뚱한 짓을 한다고 한숨을 쉬고 이웃은 조롱 섞인 농담을 던졌다. “장담컨대 내가 아는 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 책을 안 보거든.” 그러나 중고 서적을 사고파는 게 여러모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데는 점차 수긍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의 ‘기행’이 언론의 관심을 받자 주민들이 하나 둘 동참했다. ‘대형 마트에선 살 수 없는 물건’이란 슬로건 아래.
 

1977년 4월 1일 만우절, 부스는 헤이 온 와이를 독립국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왕좌에 오른다. 쌀 종이로 된 먹는 화폐도 만든다. 나아가 중앙집권적인 통제와 거대 자본의 침투, 영국 관료들의 몰개성적인 지역 관광 정책으로 지방이 죽어간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헌책왕 부스의 괴짜 같은 마케팅 전략에다 영국인들의 조금은 각별한 기질과도 맞아떨어져 이 마을은 '고서적 왕국'이란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헤이 성의 직원 마이크 스네이프(27)는 “우리는 원래 쓰던 것을 좋아한다. 책은 또 볼 수 있는 거고 버리면 환경에도 안 좋다. 영국은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것들의 의미를 알아주는 전통이 깊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오래되면 될수록 유물로서의 가치가 격상된다. 예술 제본이나 북아트가 발달한 것도 이 덕분이다.

 

영국은 공예 예술가이자 책 디자이너인 윌리엄 모리스의 나라 아닌가. 책을 앤티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이 마을엔 골동품 가게와 갤러리들도 즐비하다. 찻집과 식당, 작지만 기품 있는 여관도 여럿 생겼다.

매년 5월이면 ‘헤이 문학 축제’가 열려 닷새간 콘서트, 시낭송 대회가 열린다. 고서점 동네는 책도 100만 권 넘게 팔리지만 관광객들이 즐기고 갈 수 있는 문화공간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 영국에서 고서점들이 즐비한 곳은 런던 채링 크로스 거리다. 대표적 대형 서점 포일스(Foyles)와 학술 전문 블랙웰(Blackwell), 대형 체인 워터스톤(Waterstone), 미국 체인 보더스(Borders)뿐만 아니라 고전 셰익스피어와 추리소설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등을 취급하는 고서점을 레스터 스퀘어 가든 근처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포일스의 서가는 너무 오래돼서 어떤 곳은 옛 서적 냄새가 코를 찌른다. 뉴욕 작가 헬렌 한프의 자전적 소설 『채링 크로스 84번가』의 배경도 여기다.
 

“저는 속표지나 책장 모퉁이에 적혀 있는 글을 참 좋아하거든요. 예전에 누군가 보았을 그 책장을 넘기면서 느껴지는 동질감이 좋아요.” 잉크 냄새 나는 새 책보다 헌책을 갖고 싶은 한프는 절판 서적 전문인 84번가의 ‘마크스’ 서점 직원에게 편지를 써 빈티지 북을 달라고 요청한다. 소설에는 전형적인 과묵한 영국 청년 프랭크와 한프 간의 책을 통한 20년 서신 우정이 담겨 있다.
 

 

 

 

 

 

영국도 출판시장 전체가 위기를 맞은 건 사실이다. 대형 체인 서점들도 온라인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북비즈니스에 밀리는 마당에 고서점들이 설 땅은 더욱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헌책의 유통체계만큼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뛰어나다. 앤티크 시장과 채리티 숍이 워낙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헤이 온 와이를 벤치마킹한 책 도시는 네덜란드·노르웨이·이탈리아·벨기에·핀란드·독일·프랑스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벨기에의 책 마을 레뒤(Redu)는 1984년 기자 출신 노엘 엉슬로가 해발 450m의 숲 지대에 창고를 개조해 서점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프랑스의 몽톨리외(Montolieu)도 인구 1000여 명의 시골이지만 고서 12만 권을 갖고 있다. 한 해 방문객은 10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는 센 강변을 따라 고서점이 많다. 특히 노트르담 성당 맞은편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가 유명하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주연의 영화 ‘비포 선셋’에 나온 이 가게는 오랜 역사와 작가의 서재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1919년부터 22년간 이 서점을 운영한 실비아 비치는 당시 영문학에 목말라 있던 파리 지성인들의 감수성을 사로잡았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내외 작가들의 사랑방이 됐다.

 

앙드레 지드, F 스콧 피츠제럴드, T 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등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녀가 사망한 지 2년 후(64년) 다시 세워진 이 서점은 프랑스 고서점의 대표 주자로 평가 받는다. 

 

 

 

 

中國 국학 열풍 속, 청나라 과거시험지 1부에 1100만원

양젠샹(楊健翔) 신화통신사 기자

 

 

중국의 대학자 고(故) 지셴린(季羨林) 선생은 2년 전 출간된 자서전에서 고서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를 고백했다. 그는 한때 베이징(北京) 둥단(東單)에 있는 ‘중궈(中國)서점’에 자주 다녔는데 한 번은 사마광(司馬光)이 쓴 송(宋) 판본의 『자치통감』 한 질을 봤다. 책값은 당시로선 큰 액수인 1000위안이나 돼 못 샀다고 한다. 하지만 지 선생은 그 후 이 책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때 바지를 팔아서라도 책을 샀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중국에서 고서 산업이 가장 번성한 지역은 베이징이다. 사람들은 류리창(琉璃廠:전통문화거리)에 가면 중궈서점과 룽바오자이(榮寶齋)·원우(文物)상점, 이 세 곳은 꼭 가 봐야 한다고들 말한다. 류리창은 수많은 국내외 명사와 학자들을 맞이해 왔다. 1960년대 마오쩌둥(毛澤東)은 몇 차례나 비서를 보내 낡고 오래된 고서를 류리창의 이야탕(肄雅堂)에 보내 수선하게 했다. 마오는 이곳의 기술에 찬탄을 보내면서 기술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중국에선 요즘 국학(國學:전통문화) 열풍과 유물 수장열(收藏熱)을 타고 고서점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8월 8년간 사라졌던 청두(成都) 고서점이 영업을 재개했다. 전문가들은 “고서점은 국학과 문학의 정수를 담은 문화산업”이라고 말한다.
 

고서적(古籍)은 일반적으로 왕조 연대에 따라 구분한다. 보통 1911년 이전에 인쇄된 것을 가리킨다. 요즘 고서점은 사회 발전 속도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새 책 판매와 고서 감정, 경매, 수선, 전시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고서점들은 과거 몇 년간 고통을 겪어 왔다. 매장을 줄이거나 번화가를 떠나거나 신화(新華)서점에 합병되거나 아예 문을 닫았다.
 

중궈서점 사장인 위화강(于華剛)에 따르면 전국의 국영 고서점은 현재 20곳도 되지 않는다. 베이징의 고서점들은 주로 류리창과 룽푸쓰(隆福寺)·중관춘(中關村) 일대에 많다. 상하이는 푸저우루(福州路)에 있다.

 

베이징에서 가장 큰 고서점은 단연 52년 세워진 중궈서점이다. 58년엔 시내 111개의 민간 고서점을 인수했다. 중궈서점은 도시 재개발에 밀려 90년대 초 25개이던 점포망을 몇 년 전 12개로 줄였다가 요즘 15개까지 회복했다.

이 서점은 출판사와 경매회사, 예술화랑, 공예품점 등 다양한 업을 겸하고 있다. 이 서점은 경매를 연결고리로 삼아 고서 출판물의 발굴·보호·유통을 강화하고 있다. 중궈서점은 또 진귀한 옛날 도서들을 정리해 출판한다.




베이징의 헌책 시장에서 시민들이 책을 고르고 있다.

 

헌책 더미서 루쉰 형제 『역외소설집』 발견

 

고서적의 민간 소장이 활발해지면서 고서점들은 경매 업무를 확대하고 있다. 상하이도서공사(上海圖書公司) 산하 경매회사는 몇 차례의 고가 경매로 화제를 모았다. 청(淸)대 건륭(乾隆) 시대의 전시(殿試:과거의 일종) 시험지는 한 부에 6만 위안(약 1100만원)에 낙찰됐다. 명(明)대의 『문헌통고(文獻通考)』는 한 권에 10만 위안에 낙찰됐다. 상하이도서공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1억 위안이었는데 그중 경매회사가 3000만 위안을 차지했다.
 

중국의 고서점들은 전국적으로 침체 단계를 넘어 안정적인 발전기에 접어들었다. ‘국학 열풍’은 이런 변화를 촉진한 중요 원인 중 하나다. 출판계 관계자들은 고서점이 일반 서점과 달리 문화 전파 측면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서점(書店)은 고대 중국에서 서사(書肆)라고 불렀다. 당(唐)대에는 필사본 책이 성행했고 서사에서는 서화도 함께 팔았다.
 

당 초기에 발명된 조판인쇄는 다시 한번 서사의 발전을 촉진했다. 명대에 베이징·난징(南京)·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는 ‘4대 서사 지역’이었다. 그 시대의 서방(書坊)은 민간에서 즐겨 찾는 문예서·일용서·의서 및 과거시험을 위한 책자들을 목판본으로 찍어 팔았다. 청대엔 베이징 류리창, 난징 싼산제(三山街), 쑤저우 창먼에서 서점들이 번영했다. 명대 사대부들은 송원(宋元) 시대 각본(刻本)을 지극히 숭상해 ‘송 각본 한 권마다 금으로 계산해 주는 현상’까지 있었다. 더 심한 경우 저명한 장서가 마오진(毛晋)은 쪽당 값을 매겼다.
 

인터넷 시대의 물결은 고서점 역시 비켜 가지 않는다. 인터넷 고서점으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2002년 설립한 쿵푸쯔넷(중국 이름:孔夫子舊書網)인데 중문 고서 사이트로는 최대라고 알려져 있다. 쿵푸쯔넷은 주로 C2C 공간으로서 고서 온라인 거래에서 95%의 점유율을 자랑한다. 등록 회원은 52만 명, 판매 도서는 1500만 종이다. 지난해 상반기에만 온라인 거래액이 1억2000만 위안(약 220억원)이었다.
 

2년 전 쿵넷의 한 고객은 베이징 헌책방에서 일본책 한 상자를 구매한 뒤 그 속에서 『역외(域外) 소설집』이라는 중문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것은 대작가 루쉰(魯迅:본명 周樹人)과 저우쭤런(周作人)이 공저한 것이었다. 저우(周) 형제의 유일한 공저 작품인 이 책은 당시 일본에서 40권만 발매됐다. 훗날 남아 있던 판본이 화재로 소실돼 중국 대륙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다. 쿵넷 경매에 나온 이 책은 호가를 100위안에서 시작했는데 금방 2만 위안까지 치솟았다. 그러자 판매자는 이 책의 진귀함을 깨닫고 거래를 중지했다. 중궈서점의 감정을 거친 이 책은 다시 경매에 부쳐져 결국 27만 위안을 받았다.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누더기 우편물 네 포대를 쿵넷에 보내 감정을 의뢰했다. 모두 첸중수(錢鐘書:문화계의 태두)가(家)의 사적인 편지였고 대부분 복원 가능했다. 첸가의 보모가 편지들을 빼돌린 것으로 추측됐지만 판매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다.
 

고서점 순례는 학습→감상→도취 과정

 

오프라인 고서점인 중궈서점 또한 홈페이지를 개설해 네티즌에게 ‘고서 경영의 적자(嫡子)’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위화강 사장은 “인터넷은 보조 수단이며 나름의 특징과 우위가 있다”며 “그러나 고서 산업에서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고서를 찾는 사람은 실물을 보고, 표지를 만져 보고, 책장을 넘겨 보고, 책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책의 연대를 추측해 보고, 진품인지 감별해 보는 게 습관이 됐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온라인 서점이 고객을 만족시키기 힘든 영역이다. 위 사장은 “고서점을 순례하는 것은 ‘학습→감상→도취’라는 세 가지 행동이 하나의 과정으로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고서점은 중국 전통 문화의 방패 역할을 해 왔다. 중궈서점의 경우 오랫동안 고대 전적(典籍)과 문물을 발굴하는 데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수십 년간 진귀한 각종 고서·문헌 600여 만 부를 찾았다. 그중에는 기록에 없는 송 판본의 소철(蘇轍)이 편찬한 『시집전(詩集傳)』, 송 판본 주자 주석(朱注)의『초사(楚辭)』, 옹정(雍正) 초본 『이사(異史)』 등 5000여 권의 국보급 책자가 있다. 그뿐만 아니다. 귀중본 30만여 권을 수선하고 중요 고서 1만 부를 보충했다. 그 가운데엔 청동활자판 『고금도서집성』도 있다. 귀중한 혁명문헌 2만여 부도 찾아냈는데 1920년 11월 7일 출판된 『공산당(共産黨)』 월간 제1호가 대표적이다. 중궈서점은 각종 고서 7000만 권을 구매하고 판매했다.
 

고서적 전문가 쉬자루(許嘉)는 『중국 서점 50년』에서 “고서점의 주인은 도제 출신이 많다”고 말한다. 이들은 학교에서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늘 책과 교류하고, 책을 깊이 연구해 대부분 판본 목록학에 정통하다. 이들은 전문가·교수와 공감대를 나누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번역=이정은 기자  

 

 

 

 

 

'국립 책 박물관'지어 한류 테마로 키워야

여승구 화봉책박물관 관장

 

 

조선 말기에 서적은 잡화점의 한 모퉁이에 진열돼 팔렸다.

 

옛날에는 기업 개념의 서점이 없었다. 조선시대까지 중앙정부가 책을 발간해 특정 집단에만 나눠 주는 제도가 계속됐다. 중국에서 들어온 신간들을 중앙정부가 목판 또는 활자로 인쇄해 배포하거나 소량 인쇄한 활자본을 지방 관서에 나눠 주면 이를 다시 목판으로 찍어 배포했다.
 

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출판인쇄 문화는 봉건체제를 지키려는 중앙정부에 의해 장악됐다. 반면 우리보다 200여 년 뒤 금속활자 기술을 발명한 독일의 구텐베르크 이후 유럽의 출판계는 인쇄 기술 개발과 상업적 발전을 통해 르네상스,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 영국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선도했다.
 

역사적으로 우리 서점의 기원은 무엇일까?

 

중종 시대(1506∼1544)의 학자 어숙권이 쓴 『고사촬요』(1554)에는 서적 간행에 필요한 종이량과 인쇄·장정 비용이 기록돼 있다. 그 무렵 서사 설립 논의가 있었다고 하여 이때를 서점의 기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국가기관에서 정부 관료들이 국가 예산으로 제지·인쇄·출판·유통을 장악하고 특정 계층에 분배했던 시기보다 민간 자본으로 상업적 이윤을 위해 소설책을 찍었던 17세기의 방각본(坊刻本)에서 기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생각한다.
 

방각본은 발행 장소에 따라 경판(京版:서울), 완판(完版:전북), 안성판(安城版:안성)으로 구분된다. 전라도 지방에서 책자를 간행한 손기조·전이채·박치유 등은 당시 출판산업의 대표 인물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곧 출판사이자 서점을 뜻했다. 방각본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출판됐다. 신식 연활자 출판이 시작되는 조선 말기엔 출판과 유통이 동일한 주체에 의해 이뤄졌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도쿄 유학 뒤 귀국해 인쇄시설을 수입해 신문관과 광문회를 설립하고 한국 최초의 종합지 '소년'과 계몽서적들을 간행했다. 부유한 집안이었던 육당의 가족이 파산을 걱정해 육당에게 준(準)금치산 선고를 받게 했다는 일화는 당시 출판·서점 경영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말해 준다.
 

6·25 직후엔 자루에 책 담아 ‘무게’로 거래

 

한국의 고서점에는 어떤 책들이 많이 있을까?

 

한국 출판의 꽃봉오리는 고려시대의 초조대장경(1011~1087)으로부터 피어났다. 이후 고조선 단군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한 『삼국유사』 『제왕운기』,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 등이 만들어졌다.

조선 태종은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책을 인쇄해 문화대국의 틀을 닦으려 했다. 당시에는 계미자(1403) 등 고활자본이 발행됐다.

개화기엔 외세 침략을 막고 국민 계몽운동을 위한 간행물이 많다. 신문학운동을 펼친 육당·춘원·소월·만해의 작품, 일제에 맞서 한민족의 얼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간행한 한글책들, 그리고 해방공간의 책들이 소장되고 유통된다.
 

해방 이후 격렬했던 좌우 충돌과 물자난은 출판 위기 시대였다.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6·25전쟁 후 부산으로 피란 갔던 정부가 환도하면서 고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부터 1970년대 말까지가 가히 고서점의 황금기였다. 책을 한 권씩 세어 매매하는 게 아니라 미군 구호물자 부대자루에 담아 팔거나 차떼기로 매매되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고물(古物)은 항상 공급이 수요를 따를 수 없는 법이다. 80년대부터 고서점가에서 귀중본이 사라졌다. 어쩌다 나오는 것도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21세기에 고서 시장의 주도권은 ‘큰손 수집가’로부터 공공예산을 쓰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으로 넘어가게 된다.
 

필자는 지난 50여 년간 세계 각국을 찾아 필요한 책을 사고 사람들을 만났다. 80년 초에는 고 안춘근 선생의 지도 아래 고서 수집을 시작했다. 87년에는 통문관 이겸노 사장, 호고당 김재갑 사장, 관훈고서방 심충식 사장 등 원로들과 함께 한국고서협회를 창립했다.

90년엔 도쿄에서 ILAB(International League of Antiquarian Booksellers) 총회가 열릴 때 회원국으로 가입해 각국의 북페어와 고서점을 순례했다. 선진국에선 2∼3대(代)를 잇는 고서점이 수두룩하다.

 

그 중 일본은 고서점의 천국이다. 전국에 3000여 곳이 있고 도쿄만 1000곳 넘게 성업 중이다. 한국은 일본의 학문·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군소 경매회사 난립도 문제

 

한국의 고서점은 어떤가?

 

전국에 50여 곳이 있지만 대부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한자교육의 중단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교수들마저 한문을 전공하지 않으면 고서를 읽지 못한다. 더욱이 국·공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는 고서 구입 예산이 별로 없다. 학생이나 학자들이 찾지 않는 고서에 돈을 쓸 수 없다는 논리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수장된 고서 목록을 보면 개인 소장가의 장서에도 미치지 못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물려받은 고서에 비해 질과 양에서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하다.
 

아쉽게도 한국 고서점들은 고사(枯死) 일보 직전이다. 노포(老鋪)들의 폐업이 잇따르고 고서점 창업주의 후손들은 ‘먼지를 뒤집어쓰는 작업’을 기피한다.

 

고서를 사서 곧바로 팔면 그것은 고서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최소한 50년, 100년을 소장해야 고서점의 존재 의미가 있다. 더욱이 요즘엔 수십 개의 군소 경매회사가 난립해 고서점에 있어야 할 책들을 흡인하고 있다. 고서점 딜러와 수집가들은 이제 인터넷과 경매장으로 몰려든다. 이런 쏠림 현상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선진국에선 오프라인 서점을 운영하면서 미래 비전 차원에서 인터넷 거래를 일부 활용할 뿐이다.
 

한국 문화 가운데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경쟁력을 갖춘 것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와 이를 활용한 출판인쇄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수년간 ‘국립 책박물관’을 설립하자는 주장을 펼쳐 왔다. 소장·전시·출판·홍보·국제교류의 기능을 갖춘 책박물관을 만들어 대한민국의 문화 브랜드로, 한류(韓流)의 대표 테마로 키워 나가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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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경제 전문가인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는 오스트리아 린츠대(요하네스 케플러 대학)의 경제학 교수이자 지하경제(Shadow economy)의 국제비교연구로 유명하다.

 

슈나이더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지하경제 형성엔 세금과 규제를 피하겠다는 나름의 동기가 있고, 그 자체가 생산활동으로 시장경제에 기여한다. 세수(稅收) 목적으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려면 구체적 정책수단이 필요한데 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의견이다.

 

지하경제를 공식 경제로 끌어내려면 그만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세금 감면 같은 적극적인 유인 책이 동원돼야 할 것이다.
 

지하경제 양성화가 박근혜 정부의 주요 정책과제로 떠올랐지만 실행부터 효과를 내기까지 험로가 적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누리당 복지공약 실행을 위한 연평균 27조원의 재정을 충당하는 방안으로 무리한 증세 대신 지하경제 양성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슈나이더의 지적처럼 정책 한두 가지로 쉽게 이뤄질 일이 아니라는 반론이 만만찮다. 자칫 전시효과에 매몰될 경우 생산활동을 위축시키고 개인정보를 침해하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
 

지하경제는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제활동이다. 마약·매춘 같은 불법거래에서부터 조세피난처 같은 편법 절세 행위, 일용노동처럼 기록되지 않는 현금거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하경제를 국내총생산(GDP)의 15~30%로 추정한다. 금액으로는 최대 370조원(2010년 기준)에 이르는 지하경제에 제대로 세금만 매겨도 매년 수십조원의 추가 세수가 가능하다는 계산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한국의 지하경제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여 개 회원국 중 여전히 큰 편이지만 신용카드 거래 활성화 등의 영향으로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추계치인 올해의 경우 GDP의 24.3%에 해당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2004년 26.5%보다 2%포인트 이상 줄어든 수치다.
 

국세청은 강도 높은 지하경제 양성화 시책을 인수위에 보고했다. 여기에는 신종 첨단 탈세기법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의 특정금융거래정보를 공유하는 방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0만원 이상의 금융거래를 과세당국이 확보할 경우 세원 노출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현동 국세청장은 이미 신년사에서 “현금거래를 이용한 탈세가 만연해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에 집중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새누리당입법을 통해 이를 뒷받침할 방침이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는 지난해 8월 ‘특정금융거래정보법’ 개정안을 발의해 놨다. 그는  “법이 통과되면 연간 4조5000억원에서 6조원 정도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거래를 투명하고 선진화해야 한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역외거래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직인수위는 최근 지하경제 1호로 가짜 석유 시장을 지목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가짜 석유만 발본색원해도 연간 5000억원의 세수를 추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올해 예산안에 가짜 석유 유통 단속을 위한 시스템 구축 비용을 반영했다.
 

그러나 지하경제 양성화가 박근혜 당선인, 인수위원회, 새누리당의 단순한 계산법으로 다스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홍익대 전성인 교수(경제학)의 말마따나 탈세 방지와 지하경제 양성화가 함께 간다고 보는 건 오산이다. 과세를 강화하면 세금을 덜 내려고 애쓰고 지하경제는 부풀어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말대로 되지 않은 것이 지하경제다.

지금 박근혜 당선인 측은 이 문제에 대해 너무 단순하고 지나치게 당당한 것 같다.(언)

 

 

 

 

 

 

 

 

 

 

 

 

 

 

 

 

 

북한이 새해부터 소학교 과정과 중학교 과정에 컴퓨터 교육을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프로그램 작성법부터 가르치던 기존의 컴퓨터 교육방법에서 탈피해 기초적인 하드웨어 교육부터 시작하게 된다고 현지 소식통들이 전해왔습니다.

 

북한이 올해 4월부터 ‘전반적 12년제 의무교육’ 시행을 위한 준비과정에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고등중학교 과정에서만 배워주던 컴퓨터 교육을 소(초등)학교와 중학교과정까지 확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컴퓨터 교육과정도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현지 소식통들이 밝혔습니다.

 

최근 연락이 닿은 함경북도 소식통은 “12년제 의무교육을 위한 학교개편안에 소학교와 중학교 컴퓨터 교육과정도 포함됐다”며 “소학교 5학년부터 배워주게 될 컴퓨터 교재들이 벌써 장마당에서 팔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1986년부터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고등중학교 5~6학년과정에 프로그램 작성법을 위주로 한 컴퓨터 교육을 시작했고 2006년부터는 이러한 교육과정을 고등중학교 4학년까지로 확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도마다 수재교육을 위해 세워진 ‘제1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 1학년과정부터 프로그램 작성법 위주의 컴퓨터 교육을 시작해 주민들로부터 ‘교육불평등’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고 소식통은 말했습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소학교 5학년과정부터 컴퓨터 교육을 시작하는데다 교육과정도 기존처럼 프로그램작성법부터가 아닌, 컴퓨터의 형태와 구성 원리부터 이해하기 쉽게 배워주게 된다고 소식통은 설명했습니다.

 

이와 관련 양강도의 소식통도 “각 도마다 교육과정에 필요한 컴퓨터들을 자체로 해결하라는 지시가 내렸다”며 “이 때문에 도당과 시 당 교육부에서 대책마련을 위한 회의들이 연일 열리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소학교 과정은 주로 컴퓨터의 외형이나 구조에 대한 교육이기 때문에 고장 난 컴퓨터라도 있으면 되지만 중학교 교육과정부터는 실제로 작동이 되는 컴퓨터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컴퓨터 기초사용법과 컴퓨터사무화의 개념을 교육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학생들이 실제로 컴퓨터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소식통들은 “컴퓨터 교육에 필요한 교원들도 부족한데다 사용 가능한 컴퓨터는 거의 없는 실정”이라며 “컴퓨터 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학생들에게 부담시키게 되지 않을지 벌써부터 학부모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1945년 9월 오재식이 6학년으로 편입한 평양 숭덕초등학교에는 마침 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인 광조가 다니고 있었다. 재식은 원산에서 평양으로 옮겨온 뒤 둘째형 재길을 따라 산정현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광조는 주일학교 친구여서 학교에서도 재식과 잘 어울려 다녔다.

 

그때 산정현교회에 주 목사는 없었다. 해방되기 전인 44년 4월20일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끝내 순교했기 때문이다.

 

 

재식은 추자도를 떠나온 이후 제대로 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 중학교 시험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그때 광조가 가정교사를 자처했다. 광조는 공부를 잘하는데다 남을 가르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늘 여유 있는 태도로 재식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이윽고 해가 바뀌어 46년 3월 재식은 광조와 나란히 숭인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적 또한 좋아서 광조가 전체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하고, 재식은 2등을 했다. 그 덕에 각각 1, 2반 반장을 맡았다.

 

숭인중학교는 본래 숭의상업중(학교)이었는데, 광복 직후 소련에 의해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된 뒤 ‘제2중’(학교)으로 바뀌었다. ‘숭’자가 붙은 곳은 거의 기독교학교였는데, 기독교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공산주의 정권에서 그런 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재식의 중학교 입학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입학시험을 치르는 동안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일찍이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배격했던 까닭에 주일날 교회 나가는 일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행사나 공공 행사 날짜를 일요일로 정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숭인중학교 입학시험의 마지막 절차는 면접이었는데 하필 재식의 날짜가 주일과 겹쳤다. 광조는 다행히 주일을 피해 별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재식은 일요일 면접을 포기하고 교회로 향했다. 게다가 이런 중대한 일을 어느 누구하고도 상의하지 않았다. 멀리 추자도에 계신 부모님은 물론이고 함께 살고 있는 재길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혼자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다.

 

입학시험과 교회 출석 중 교회를 택한 것은 재식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재식이 다니던 산정현교회는 개신교 교파 중에서도 신앙에 있어서 원칙적이고 보수적인 곳이었다.

 

이튿날 학교에 간 재식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전날 면접시험을 보지 않았으니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복도를 걷고 있는데 선생님 한 분이 재식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재식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요량으로 그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제가 어제 면접시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오늘이라도 시험을 볼 수 있을까요?”

“너 몇 번이야?”

“287번입니다.”

 

재식이 내민 수험표를 본 선생님은 대뜸 “너, 오재식이지?” 하고 되물었다. 이론시험을 잘 쳤는데도, 면접에 안 나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이리 와.”

재식은 말없이 선생님을 뒤따라 교무실로 갔다. 마침 다른 선생님들은 없었다. 선생님은 재식을 바라보며 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 솔직히 얘기해. 너 어제 교회 갔지?”

“네.”

“인마, 입학시험날에 교회를 가면 어떡해? … 너, 교장 선생님하고 면접할 때 교회 갔다고 하면 낙방이야. 어제 아팠다고 해. 설사 났다고 해. 알았어?”

 

그 선생님은 재식에게 교장 선생님과 면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교장 선생님은 재식에게 전날 면접에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이 일러준 대로 갑자기 설사가 나서 오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별다른 말 없이 합격을 시켜 주는 게 아닌가.

 

하지만 재식은 또 다른 걱정에 휩싸였다. 거짓말을 한 것 때문이었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산정현교회에서 철석같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일에 교회로 간 재식은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이던 오정모 전도사에게 면접시험 때문에 거짓말한 것을 먼저 고백했다. 상황을 듣고 난 오 전도사는 재식을 안아 주며 말했다.

 

“야 이 자식, 착하구나. 거짓말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으니 잘한 일이다.”

주 목사의 부인(사모)이었던 오 전도사는 영리하면서도 순진한 재식을 특별히 예뻐해 주었다.

 

 

 

 

 

 

 

 

 

 

 

 

 

 

 

 

노년은 노년대로의 창조적인 충동과

힘을 발달시킨다.
 

 

오래 살았다는 것밖에는

남길 것이 없는 늙은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없다.
 

 

하루 해가 벌써 저물었으되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 해가 장차 저물려 해도

귤 향기가 더욱 향기롭다.

 

 

그러므로 일생의 말로인 만년은 군자가

마땅히 정신을 백배나 더 차려야 할 때이다.

 

 

어떻게 늘어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슬기의 걸작이요

삶이라는 위대한 예술에서 가장 어려운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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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온천

 

 

임금님이 이용한 왕실온천 '온양온천'
 

온양온천은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 통일 신라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온수군(溫水郡)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의 역할을 수행해 온 기간은 600여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15년(1433년) 정월에 안질치료차 행차한 후, 세조, 현종, 숙종, 명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다수의 기록과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또한 현종, 숙종, 명종때에는 온천에 임행하여 과거를 보게하여 인재를 발굴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때에는 온양온천주식회사가 독점 온천장을 경영하고 1927년 이후는 경남 철도주식회사가 경영하던 신정관과 일본인 소유의 탕정관 등 2개소 뿐이었던 것이 1963년 신천개발이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38개 공의 온천공이 온양온천 중심부에 걸쳐있다.
 

온양 온천은 지질이 단상흑운모, 각섬석 화강암으로 되어있으며 용출되는 온천 수의 수온이 58℃ 내외로 고온온천이다. 온천수의 수질은 약알카리성으로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숙박시설, 상가, 음식점, 유흥업소, 온천장 등 주변시설이 잘 발달된 곳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온천 지역 최대의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효능

피부미용, 혈관경화증, 신경통, 부인병, 위장병, 빈혈 등


 

온양온천


 

유황을 함유해 각종 질병 치료에 탁월한 '도고온천'
 

아산시 도고면 기곡리에 위치한 도고온천은 온양온천역에서 서쪽으로 15km 지점에 위치한다. 신라 시대부터 약수로 이름난 곳으로 200여년 전부터 온천으로 개발되었다.
 

특히 물이 부드럽고 유황을 함유하고 있어 피부나 음용을 통해 이온상태로 체내에 흡수되어 인체의 생리작용과 신진대사를 촉진함으로 신경통, 피부병, 위장병, 관절염, 류마티즘, 부인병, 당뇨병, 생식기질환, 소화기질환, 피부미용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고온천의 온천수 수온은 25~35.2℃를 유지하는 함유황 온천으로 물이 매끄럽고 부드러워 피로회복에 탁월하다. 수소이온 농도가 8.7도에 이르고 그밖에 고형 잔유물, 규산,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등의 성분으로 되어있다.
 

현재 보양온천 시설인 파라다이스 스파 도고지점이 위치해 있으며, 숙박 시설은 호텔 1개소를 비롯하여 콘도 4개, 10여개의 여관, 2개의 찜질방 등과 대중탕, 사우나, 워터파크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도고골프장을 비롯하여 승마장, 수영장 등과 세계꽃식물원이 근거리에 위치해 있어 볼거리와 레크레이션 시설을 완비한 최고의 온천휴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또한 도고 온천은 故 박정희 전대통령이 지방순회 시 아산에 방문하면 묵던 곳이 있는데, 그 당시에 사용하시던 물건들과 필랜드식 사우나 시설 등을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효능

신경통, 피부병, 위장병, 관절염, 동맥경화증, 만성기관지염, 변비, 외상후유증, 류마티즘, 부인병, 당뇨병, 생식기질환, 소화기질환, 피부미용

 

인체 유익성분 다량 함유한 알칼리수, 아산온천
 

아산온천은 1987년 발견되어 1991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중수산나트륨을 포함한 알카리성 온천으로 20여종의 인체에 유익한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림욕까지 겸할 수 있는 다용도의 온천이다.

 

국내최초의 건강보양 테마온천 시설인 스파비스는 국내최대 규모로서 4월14일 개장되었으며 3,000 여명을 동시수용할 수 있는 대욕장 및 수영장, 한방크리닉등 이용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광지내 주요시설로는 1,500여명 동시수용 가능한 아산온천탕, 일반호텔2개, 여관20여개등의 시설이 개장되어 있으며 계속적으로 관광호텔, 콘도, 편의시설등이 시공 또는 계획중에 있어 앞으로 국제적인 관광지가 될 전망이다.
 

효능

혈액순환촉진, 세포재생촉진작용, 신경통, 관절염, 고혈압, 위장병, 풍, 피부미용

 

▲ 도고온천 노천탕

 

▲ 아산온천 노천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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