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6,  2013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알려드립니다.

 

이번 호(2013년 5월25일자)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약식 편집하였습니다.

 

다음 호에 더욱 풍성한 내용으로

찾아 뵈겠습니다.

 

비전통신 드림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간다

우주의 넓이가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다 돌아온다

그런데, 왜 돌아오나

아마 다시 재나 보다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모습을 본다. 다른 곳도 아닌 호연정(浩然亭) 대청마루를!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따왔을 호연정에서조차 꼭 몸만큼만 재며 나아가는 꼼꼼쟁이 자벌레.

호연지기와는 거리가 먼 묘한 대조다. 하지만 몸을 말았다 펴는 고만큼씩만 전진하는 모습은 똑 구도자의 오체투지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똑같은 자세로 나아가는 수도자의 일생이 아닌가.

그런데 그 자벌레가 봄날 호연정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신다. 아니 건너다가 다시 돌아오신다. '아마 다시 재나 보다'. 죽비를 딱 내려치는 한 줄의 맛. 다시 재려고 돌아오다니! 시쳇말로 빵 터뜨려주는 일품이다. 웃음 속에 눙쳐 넣은 깨달음 같은 한 방으로 불이라도 켠 듯 봄이 더 환해진다.

호연정 대청마루에 시원하게 눕고 싶은, 봄날도 참 환한 봄날이다.
 

               정수자·시조시인

 

 

 

 

 

 

 

 

 

 

 

 

 

 

 

 

 

파도

파도는
힘을 가지고
섬을 부추겨 일으키고 있구나.

섬을 일으켜
푸르게 높게 떠올리고 있구나.

가슴속에서
출렁거리는 사랑이여,
네 힘이 스러지면
나는 곧 한 사발의 물에 불과함을,
엎질러지는 물에 불과함을,

파도는 몸으로 말하고 있구나.
바위에 몸을 던져 깨뜨리면서
말하고 있구나

섬이 가라앉을까 두려워
파도는 그 신 잡힌 몸짓을 멈추지 못하고

사랑이여,
한 사발의 물을 엎지르지 않기 위해
나에게서 떠나지를 못하는구나.
 

(문효치·시인, 1943-)

 

 

 

 

 

 

 

+ 파도는 왜 아름다운가

내가 당신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밖에 없다.
내 몸을 둘둘 말아 파도를 만들어
끝없이 끝없이 부서지는 일
곤두박질을 치며 부서지는 일

파도는 부서지고 싶다.
차라리 닳아지고 부서져 아름답고 싶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므로


(윤수천·시인, 1942-)
 

 

 

 

+ 파도

잠들지 못하는 기억 하나가
되돌아오고
되돌아가고


(정숙자·시인, 전북 김제 출생)
 

 

 

 

+ 파도

죽이고 또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얼마를 더 죽여야만
죽일까 저 바다를,

신 새벽
허연 뼈 하나
일어서는
이 그리움을...


(이구학·시인, 전북 순창 출생)

 

 

 

 

+ 파도

잠들지 않은 영혼이
파도를 타고 온다

풀어헤친 여인의 머리채인 양
해일(海溢)은 바다를 흔들어

어둠 속에 물기둥
하늘에 세우더니

광기들을 내려놓아
바다 깊이 침몰시킨다

고독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까마득히 깊어만 간다.


(장은수·시인, 충북 보은 출생)

 

 

 

 

 

+ 파도

어제도
오늘도
계속
밀려오기만 하였다

어둠이 오고
새벽이 와도
한 번도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박우복·시인)
 

 

 

 

 

+ 파도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파도가 밀려온다.
울고 웃고,
웃고 울고
한나절, 갯가에
빈 배 지키며
동,
서,
남,
북,
소금밭 헤매는 갈매기같이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萬里長書로 밀리는 파도.
 

(오세영·시인, 1942-)

 

 

 

 

+ 파도

누가 저렇게 푸른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놓았는가
구겨져도 가락이 있구나
나날이 구겨지기만 했던
생의 한 페이지를
거칠게 구겨 쓰레기통에 확 던지는
그 팔의 가락으로
푸르게 심줄이 떨리는
그 힘 한 줄기로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궁극의 힘
 

(신달자·시인, 1943-)

 

 

 

 

+ 파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타협하는 마음에
매질하는 소리를 듣는다

못난 놈
비겁한 놈
밤새도록
비난 받아 마땅하다
 

(공석진·시인)
 

 

 

 

 

 

+ 파도의 꿈

하염없이 돌진하여
창백한 포말로
부서지는 저 고행
어느 먼 대양을 지나
도움닫기로 이곳까지 와
넘지 못할
절벽 앞에 부서지는가
얼마나 더
깊은 상처로
수면을 보듬어야만
파도는 절벽을 넘어
떨리는 전율로
뒤돌아서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다볼까


(차수경·시인, 충남 서산 출생)

 

 

 

 

+ 파도의 비명

파도는 왜 밀려오고 밀려가며
울부짖는 것일까

왜 밤이면 별들은 슬픈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기나긴 가을밤을 풀벌레는
왜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 것일까

나는 왜 모두가 잠든 고요한 이 밤
홀로 깨어 뒤척이는 것일까
 

(최다원·화가 시인)
 

 

 

 

+ 파도

파도는 홀로 울지 않는다
파도는 홀로 물결치지 않는다
그것은 절망 속의 기지개 같은
물새들의 몸부림일 뿐이다
누가 보았던가 갓 잡은 생선의
아가미의 벌떡 임을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는 것은
해일로 갯마을을 쓰러 내려는
반역의 폭풍이 아니다
그것은 내일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해맞이다
진군의 용트림이다


(한승필·시인, 경기도 포천 출생)

 

 

 

 

 

 

 

 

 

 

 

 

 

 

 

 

요즘 아침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가끔 오렌지카운티 열린문교회 이영찬 목사님과 커피를 마십니다. 알고 보니 제가 다녔던 신학교에서 세운 서울 수유리의 한 초등학교 출신이라는군요. 그런데 어느 날 이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옛날 일 하나가 떠 올랐습니다. 

 

제가 신학교(사람들은 굳이 신학대학 혹은 신학대학원이라고 말하지만...)를 다닐 때 학교 서무실에 김은희라는 여직원이 일했습니다. 그 분은 곱추였습니다. 건장한 체격을 지닌 장일조 교수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배를 째는 복강경 수술로 건강하고 예쁜 딸을 얻었습니다. 그 딸이 수유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잘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에게 한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담임선생이 엄마를 모셔오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곱추의 모습으로 학교를 찾아가면 자기 자녀가 다른 아이들로부터 곱추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이라는 생각을 한 나머지 이리저리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학교 교문을 들어섰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엄마를 알아보고 단숨에 뛰어 와  엄마 앞에 선 딸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친구들을 불러 이 분이 [우리 엄마야] 하면서 당당하게 소개하더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속으로 걱정했던 것이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곱추엄마지만 배를 째고 날 낳아주신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딸.......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찢고 나를 나 주신 곱추엄마보다 더 큰 고통을 통해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나의 자랑이십니다.

 

부처를 보세요. 그 인자한 얼굴을. 모나리자처럼 우아하게 웃고있는 관세음보살상을. 경주 불국사의 아침 햇살을 받아 얼굴에 광채가 나는 부처의 신비스러운 얼굴을. 공자를 보세요. 그 평화로운 모습을...

그러나 거기에는 솔직하게 말씀 드립니다. 헐뜯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친 뜨거운 사랑의 상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나 공자나 자신의 수명대로 만수무강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사형수의 그 피범벅 된 고통스러운 얼굴.  33살 꽃다운 젊은 나이에 십자가 사형틀에서 사형당한 한 젊은이. 어리석은 십자가, 피범벅된 십자가, 가련한 바보 예수.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의 찢겨진 그 얼굴 때문에 우리가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피묻은 예수님의 찢겨진 얼굴을 슬그머니 뒤로 밀어두고,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기독교, 재미있는 기독교, 흥청거리는 거대한 쇼프로그램 같은 예배, 세련된 고급 기독교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이것이 문제 아닌가요?
 

아무리 그럴듯하게 위장을 하고 포장을 해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몸찢고 피흘려 돌아가신 버림받은 죄인이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공자는 대선생이요, 존경받는 정치가요, 석가모니는 왕자요, 철학자였지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요 무식쟁이 신분이라는 사실을 어찌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무식쟁이 종교에 귀족이, 지식층이, 부자들이 들어와 기독교를 세련되게 회 칠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로 삼게 되었으니 말이나 됩니까?

 

역사를 보십시오. 로마의 황제들이 신부와 사제들에게 귀족 옷을 입히고 성당을 왕궁처럼 지어주자, 사제들은 가난하고 무식한 순수한 예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기독교를 임금들과 귀족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귀족 종교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님만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단순화시켰습니다. 로마 시민권도 버리고, 최고 학부에서 공부한 졸업장도 버리고, 가정도 없이, 삭발을 하고, 바리새도 버렸습니다.

 

무식쟁이 종교는 단순 무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뿐입니다. 인위적인 것, 인간 중심적인 것 모조리 벗겨내고 내 구주는 '십자가의 예수'라고 선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귀족이, 지식층이, 부자들이 들어와 기독교를 세련되게 회 칠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구하는 도구로 삼으며 우롱하지 못하도록 기독교를 예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더욱 단순 무식한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 어느 방송국이 일부 교회지도자와 교회의 어두운 내용을 취재하여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호화 생활을 하는 일부 지도층 목회자와 교회의 비리를 비판하는 내용은 정말 가슴 아픈 내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그런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취재하여 공개한다는 것이 이교도들에게 마치 신성불가침의 아성(牙城)이 약탈당한 것 같은 아픔과 자존심 마저 상하는 불쾌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송국은 아예 교회의 적(?)처럼 그렇게 치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어느 누구도 과연 그 방송국의 처사가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멀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조금 더 맞아야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잘못일까요?
 

맞는 김에 더 맞아서 아예 죽을 정도로 뻗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 알기를 개똥으로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기독교인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그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이 유대인들을 싹 쓸어버릴 힘이 없어서 그냥 무기력하게 십자가를 질질 끌고 골고다로 올라간 줄 아십니까?

 

한국 기독교는 세상에 대항하지 말고 그들의 돌팔매를 맞고 죽어야 합니다.  피 묻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까지 매를 맞아야 합니다. (장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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