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09,  2013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눈에 찰까


하는 짓이 내내 여리고 순한
열댓 살 적 철부지 아들만 같던


계절은 어느새 저렇게 자라
검푸른 어깨를 으스대는가


제법 무성해진 체모를 일렁거리며
더러는 과격한 몸짓으로


지상을 푸르게 제압하는
6월의 들녘에 서면


나는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
가슴속 기우(杞憂)를 이제 지운다


뜨거운 생성의 피가 들끓어
목소리도 싱그러운 변성기


저 당당한 6월 하늘 아래 서면
나도 문득 퍼렇게 질려


살아서 숨쉬는 것조차
자꾸만 면구스런 생각이 든다


죄지은 일도 없이
무조건 용서를 빌고 싶은
6월엔...

 

 

 

 

임영조 시인(1943-2003)

 

충남 보령 출신인 임영조 시인은 중학교 시절 지리교사로 부임한 신동엽 시인을 만나 문학공부를 시작해 서라벌예대를 거쳐 1970년 「월간 문학」 신인상과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잇따라 당선되며 등단했다.


1985 제1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고려원)
1988 제2시집 [그림자를 지우며](현대문학사)
1992 제3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세계사)
1997 제4시집 [귀로 웃는 집](창비)
2000 제5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민음사)
2003 제6시집 [시인의 모자](창비)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문학사상사,1996)

1989 제23회 잡지언론상(기업 사보 부문) 수상
1991 제1회 서라벌문학상 수상(시 <환절기>)
제3시집으로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5년도 제9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고도를 기다리며>)

 

 

 

 

임영조 시론(詩論)
 

형은 말의 톤을 높인다, 문창과의 시는 창작하는 시인이 가르쳐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작품에 서정을 기본으로 한 서사적 구조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독자에게) 깨어쳐 주는 일/즐거움을 주는 일/또는 그 둘을 겸비하는 일’이 시인의 몫이라는 그의 시론은 더욱 간명하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 300편을 암송하고 200편을 쓰고 100편을 퇴고하라’는 절대 주문을 한다.

 

요즘 문청들의 잘못은 시류에 편승하기에만 급급하지 다른 시인의 훌륭한 시를 깊이 읽지 않음에 있다며 흥분한다. 그러고도 어찌 ‘언어미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겠는가.

 

 ‘시란 무엇인가’와 ‘생은 무엇인가’는 동격이란다. 나는 술을 기피하고 형의 낯은 열이 뜨기 시작한다. 그는 거듭 시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갈파한다.

 

시집 4권을 내고 이미 유명해진 영조 형을 보면 나는 부끄럽다. (그치만 푸른 공기를 나의 폐에 심자! 심장에 팍, 팍, 꽂는 일부터 하자꾸나.)

 

형은 문학적 알레르기가 하나 있다. 1)종교적 엄숙성, 2)철학적 심각성이 주는 폐해가 못마땅해서 못 살겠단다.

 

시란 보편적인 삶터에 있다, 시란 발성·발화법이 특이해야 한다. (이건 형식주의자들의 자기 목소리요 낯설게 하기 아닌가) 이게 영조 형의 구호다. 평범하나 비범하다.

형은 오직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며 터득하려고 애쓴다. ‘지식의 과시’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성으로 독자를 설득하려 들지 말고 진솔과 정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라, 임영조 형의 역설이다. 구닥다리지만 공자의 ‘思無邪’를 아직도 건드려대는 임 시인이다.

시인은 발표하기 전에 <시의 효용론>을 생각하잔다. 아하, 그래서 형이 ‘욕망의 분출이 곧 시는 아니다’고 했구먼. 효용이란 곧 가치일 텐데, 모든 시에 반드시 가치를 부여하라는 주문은 조금 생각할 점이 있지 않을까. 혼자 술에 익은(?) 형이 깨면 좀 물어봐야겠네.
 

‘문학은 진실로 진실해야 한다.’ 형의 말이다. 소월시문학상 수상식에서 낭송한 소감에서 ‘내가 이제까지 본 나는 이미 녹슬고 고장난, 그래서 작동이 뻑뻑하고 불편한 로버트’ 같았다고 형은 실토했다.

 

일상이라는 ‘마음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한 데서 형의 새로운 시작(詩作)은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詩作)을 하고 명상하는 동안 어느덧 종교심이 생겼다. 비록 미사에 잘 참여하지 못하지만, 현재 카톨릭 문우회원이기도 하다. 시업이 종교보다 앞선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앞으로 형은 시 쓰다가 힘이 부치면 삶의 중심축을 신앙생활에도 충실하겠단다.

 

그는 이렇게 말을 접었다. ‘시인 임영조’란 명함이 매우 좋다고, 진정한 프로가 되고 싶다고. 그렇지요, 내 경우도 평소에 ‘시를 쓴다’가 아니라 ‘시를 한다’는 믿음을 확연히 갖고 있는데. 그렇다, 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 그 자체다. (김강태 커버스토리에서 발췌)

 

이 글을 쓴 김강태 시인과 임영조 시인은 2003년 5월28일 같은 날 별세했다.(편집자 주)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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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가 은주에게
 

금요일에 충격으로 인해 넌 화장실에 가서 헛구역질을 심하게 했지? 심적인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구토부터 나오는 너. 그리고 두통으로... 완전 마비가 되는 네 몸... 금요일에는 그 구토하는 소리가 화장실에서 울려 펴져 온 "동네" 사람들이 알아버렸다.
 

넌 그 구토의 사연을 알리지 않기 위해 그냥 농담으로 넘겨버렸다.

 

"임신도 아닌데..왜 이렇게 구토가 날까?"

그렇게..  웃으면서 흘려 버렸다.

 

사실은 그 전날 밤 아주 슬픈 일이 있었고, 또 아침에 학교에 오니 학생 중 한 명이 gang 에게 칼침을 맞아 얼굴 한 쪽이 귀에서부터 턱까지 갈라져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 학교 근방에서는 밤새 안녕...  늘 총격사건이 있고 사람들이 죽는다. 사람들이 죽는다. 너와 같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칼에 찔려, 약물을 복용하다가...  그냥 매일 사람들이 죽는다. 죽는 과정에서 가난에 찌든 이 소수계 흑인과 서바나 사람들, 내 학생들 내 학부모님들...  그냥 한 명 한 명 죽어간다.

 

장사익의 찔레꽃을 들었다. 그리고 또 구토를 했다.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사람들이 딱해...  그냥 마구 영혼이 흔들리는 구토를 했다.

 

 



 

동료교사는...  "이 슬픈 상황을 너무 깊이 삭이지 마. 우리는 늘 이렇게 죽음과 가까이 살고 아이들과 접하고 가르치는 교사야. 너에겐 생소하지?"

 

난 이 말에도 충격을 받았다. 동료의 말이 이해는 되었지만...  그냥 죽음과 늘 가까이 사는 길로 접어 든 내 영혼도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좋은 동네에서 백인 아이들 가르치는 교직생활을 하길 원한다고 하지? 넌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 할렘에..  매일 죽음과, 가난과, 마약과, 혼돈 속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이 학교로 왔지. 교직생활에도 운명이 있는지...  학교장은 널 보고 처음 고용한 교장처럼 그 자리에서 채용을 했지. 물론 많은 조건이 맞았기에..하지만...운명적인 만남에서 한 학교와 한 한인교사의 또 다른 교직생활이 실천되었지.
 

많이 힘이 든다. 그리고 계속 힘이 들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한국인들만이 느끼는 한을 나는 할렘에 있는 학생들, 그 부모들 그리고 주민들의 한도 느낀다. 나는 느낀다. 심장이 펑펑 뛰면서...  넌 이 사람들의 한이 바로 네 한이 되어버렸듯이 매일 죽음에 가까운 이들과 한을 느끼며 산다. 너도 이들과 함께 죽음에 가까워져서 일까?

 




 

사람들은 늘 자신만이 슬픔에 잠기고..자신만의 고민과 문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착각을 하고 있지. 하지만 누가 말했듯...  이것은 다 상대적이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런 것이다...  난 그래도 매일 죽음을 기다리는 할렘가의 아이들보다는 훨씬 낫다. 내 자식이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해 속상하고 부끄럽지만...  매일 죽음 문턱을 왔다 갔다 하는 할렘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냥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연히 장사익씨의 찔레꽃을 비롯한 여러 노래들을 들으며... 난 울음을 터뜨렸다. 열심히 computer 를 재미있게 보고 있던 내 딸들은 "What's wrong Mommy? Why are you crying?" 하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장사익씨의 "찔레꽃" 노래가 내 가슴에 와 닿았을까? 내 학생들을 생각하며??? 목요일 저녁의 일을 생각하며??? 그냥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느끼며? 난, 막 흐느끼며 울었다. 속 시원하게 울었다.

 


 

 

그리고 난 어느 시인에게 편지를 썼다. "밤새도록 이 한(恨)을 함께 느끼며 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恨)의 동지가 필요합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도 들었다. 나는 고 김광석이 뉴욕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연을 왔을 때 봤다. 내가 가르치던 대학생 모임... "우리문화찾기회"의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그 기관이 주최가 되어 김광석을 초청해 Lincoln Center 근방에 있는 concert hall 에서 concert 를 열었다.
 

김광석을 처음 보고, 처음 듣고, 처음 경험했을 때...노래를 들으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뉴욕을 떠나고 2달도 안돼 자살 소식을 접했을 때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 해에 한국에 나간 부모님들에게 부탁해 김광석의 cd 를 몽땅 구입했다. 그리고 내 ipod 에 넣어 걸어 다니며, 운전하면서, 목욕하면서 김광석의 노래에 미쳤다.
 

아직은 너무나 슬퍼서 노래방에 가도 김광석의 노래는 못 부르겠다.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가슴이 미어져 할렘가에 가서 교사가 되었을까? 죽음이 늘 가까이 있는 이 지역 아이들을 내 아이들로 삼아 길을 걸어갈까?
 

때로는 차를 학교 앞에 주차 해 놓고 시내에서 볼 일을 보고 내 차로 돌아오면 사람들이 물었다.

"안 무서워요? 오밤중에 할렘가에 가서 차 타고 집에 가려면?"

 

난 덤덤하게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한다.

 

"사람이 없어야 무섭지..  사람이 있는데..  왜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슬픔에 힘겨워 구토하는 나나...  죽음 앞에서 늘 왔다 갔다 하는 내 학생들이나... 또 서로를 격려하고 챙겨주고 위하는 동료교사들이나... 그리고 세상의 관심사에 푹 빠져 늘 잣대와 저울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며 사는 주위사람들이나...난 그 사람들의 한(恨), 할렘가의 한, 명문대에 목을 매는 내 친구들의 한, 이 모든 한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런 다양한 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또 하나의 한이 생기기에... 그러면 또 치료와 상담을 받아야 하기에... 그냥 그 한의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것도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인가?
 


 

 

학생들은 시험을 치렀다. 내가 맡고 있는 과학시험을 곧 치르게 된다. 난 새벽에 일어나,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과학시험을 잘 볼 수 있는지.. 어떻게 복습을 시켜야 하는지... 어떻게 학생들을 일찍 오도록 해 한잔의 orange juice 와 빵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면서...  Science Breakfast Club 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
 

그리고 내 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공부이야기도 하고 삶의 이야기도 하고 또 인생경험도 하게 할까.. 

할렘가의 한을 생각하면서... 

하나의 한인교사의 한을 느끼고 생각하면서.. 

아침을 울린다.

 

 

 

 

 

 

 

 

 

 

 

 

 

 

뉴욕은 1990년대 들어서 할렘가의 문제를 단순히 빈곤대책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구조 자체를 재생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도시'정책을 추진했다.

 

주민들 스스로 지역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공동주택과 콘도 같은 것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버려진 건물을 매입해 시민들이 구매할 수 있는 주거지로 만들기도 했다.


 


 

주택을 제공하고, 공원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 일으키고, 실업자들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할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재개발 참여, 우리가 가장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만드는 도시재생인 것이다.
 

할렘의 도시재생 '주민의 지역 참여 유도를 통한 도시 재개발과 음악문화의 접목'

 

미국의 뉴욕은 1990년대 들어서 도심재생과 도시확산의 억제를 동시에 도모하려는 성장관리정책이 추진되면서 뉴욕의 중심 시가지인 할렘의 도시 쇠퇴 문제를 단순히 빈곤대책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교통시스템 정비와 도시구조 자체를 재생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로의 발전정책이 추진되었다. 뉴욕의 할렘은 지역 내 모임과 예술을 통해 창조도시형과 성장관리형의 복합 형태로 도시재생을 공동화 현상을 넘어 도심 르네상스로 창조해 나갔다.
 

할렘(Harlem)은 미국 뉴욕시(市) 맨해튼 구(區) 북부의 미국 최대의 흑인 거주 지역으로 센트럴파크 북쪽 116번가에서 155번가에 걸쳐 있다. 빈민가 혹은 흑인 빈민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도 사용된 이 지역의 인구는 70% 이상이 흑인들이다.
 

 

정돈된 할렘의 거리

 

뉴욕의 면적은 787km²로 인구는 830만 명이며 그 중 할렘은 50여 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면적은 수원시 매탄동(4,467km²)의 1/5이 안 되며, 인구는 수원시(107만 명)의 반 정도로 장안구와 팔달구를 합친 인구수와 비슷하다.(수원 시와 비교하게 된 것은 마침 책상 위에 수원에 관한 자료가 있어서 쉽게 예를 들고 있음)
 

1980년대 초 할렘은 구매할 수 있는 부족마약에 찌들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이로 인해 떠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입점하려는 은행과 상점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이러한 문제 외에도 5초에 한 번씩 싸이렌이 울리고 뉴욕에서 흉악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났던 곳이 할렘이었다.
 

범죄가 횡행하는 슬럼가였던 할렘에 1993년 뉴욕 시장으로 부임한 루돌프 줄리아니는 개혁을 시도한다. 줄리아니 시장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마피아와의 전쟁'과 함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쟁'을 병행하는 '더블 윙(Double Wing)'전략, 이른바 2개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최대관건으로 하고 이를 위해 뉴욕의 경찰력을 배 이상 증가시켜 마피아 보스들을 퇴치한 결과 뉴욕의 범죄율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범죄율 저하만으로 할렘의 시민들을 붙잡기엔 부족했다. 이미 거주할 수 있는 집의 부족이 큰 문제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할렘은 집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로 넘쳐나 이로 인해 버려진 건물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빈 건물들은 이민자들로 채워지게 되고 오히려 기존의 가난한 시민들은 홈리스가 되게 된 것이다.
 

할렘을 되살리기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

 

주택난이 심각해지자 주민들은 지역 특성에 맞는 개발과 일자리 제공, 더 나은 환경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이러한 필요는 주민들의 참여를 높일 수 있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역개발 공동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여러 개의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재활의 노력을 시도하게 됐다. 공동회사는 우리나라 동에 해당하는 지역위원회라 할 수 있는데 주민이 운영의 주체인 비영리법인으로, 동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을 개발해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할렘에 흐르는 할렘강

 

 

할렘에서 공연 중인 댄서 팀

 

주민들 스스로 할렘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지역 내에서부터 시작되어 다양한 비영리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2005년,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임차인들 주도의 비영리 단체 '브러쉬'(B.R.U.S.H, 임차인들의 권익을 보장하고 주택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단체)가 할렘에 등장하게 된다.

 

또한 할렘의 성직자들이 모여 만든 '할렘 거주환경 개선단체'(HCCI, Harlem Congregation for Community Improvement, 할렘 지역사회 발전 위원회, 즉 성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할렘 거주환경 개선단체)가 탄생했다. 이들 단체는 재생 규모가 전체가 되어야 하며, 건물 하나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공동주택과 콘도 같은 것을 개발하기도 하고 버려진 건물들을 매입해, 리모델링 해서 시민들이 구매할 수 있는 주거지로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주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도록 한 것이다. 더불어 여러 개의 공원을 만들어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도록 했으며 실업자들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지역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할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재개발 참여, 이것이 우리가 가장 눈 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지역 내 도시재생을 가장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흑인 문화의 대중화와 할렘의 발전
 

할렘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흑인 문화이다. 할렘은 재즈와 소울, 그리고 힙합 등 흑인 음악의 탄생지이다. 얼마 전 사망한 마이클 잭슨이나 휘트니 휴스턴 또한 할렘의 극장 출신이다.

 

지금도 인기 곡이 되려면 할렘에서 불러져야 흥행이 된다고 할 정도이니 할렘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수천 명의 추모객들은 할렘의 대표적인 극장 중의 하나인 아폴로극장 앞에 모여 며칠 밤을 새우며 그를 추모했다.

 

할렘은 미국 대중음악성지로 단순히 흑인 문화, 음악의 메카만이 아니라 전 세계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스타들의 산실로 스타들이 태어나고 전설이 되는 곳으로 성장했다.
 

 

 

마이클 잭슨이 공연했던 극장 앞에 모인 추모객들

 

 

할렘의 거리공연

 

 

 

할렘의 극장에서 공연 중인 재즈팀

 

그레이트 할렘 상공회(GHHDC, Greater Harlem Housing Development Corporation,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비즈니스 협회로 뉴욕의 공공사업과 주택사업에 참여하는 기업)는 전반적인 할렘의 문화를 지키고자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할렘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는 '할렘 데이'와 '할렘 위크'를 통해서 할렘의 긍정적인 면을 사람들에게 홍보해, 이로 인해 해마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할렘의 음악과 문화를 보러 온다.

 

또한 재즈, 스포츠, 영화, 사업 박람회까지 할렘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제공해 예전보다 나아진 할렘을 알리고 있다. 그들 고유의 문화로 관광객을 모으고 있는 할렘, 할렘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를 도시재생의 범주에 넣어 성공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다.
 

할렘의 도시재생 성공의 남다른 이유는 최하 서민층의 문화라 할 수 있는 재즈와 소울을 대중화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도시재생 사업의 큰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를 도시재생과 접목해 성공적으로 이끈 할렘의 미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문화도시로서의 할렘으로 남을 것이다.(비전통신 종합)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거룩한 존재
거룩한 삶이라는 말은
삼가 붙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람에게 거룩하다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

인간은 경건이라는 용어를 쓴다.
거룩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과 행실을 절제 정제해 나갈 때에 이를
경건의 연습을 한다 말하고
경건한 삶을 이루어간다고 말 하는 것이다.

경건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여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형상이 깨어졌을지라도
인간의 영혼은 그 모상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회복되었을 때에
이생과 내생에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형제를 깨우치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6-11)

 

 

 

 

 

 

 

 

 

 

 

 

 

 

 

 

 

길 없는 길
(바타우앙 가는 길)

딱포우에서 바타우앙 가면서
정글 속.

아무리 소리쳐도
앞서간 이들 듣지 못한다.

되돌아가려니 온 길이 너무 멀고
앞으로 가려니 정글이 막는다.

두 손 입에 모으고
하늘을 향해 크게 외치고 또 외친다.

하늘이 내 음성을 들었다.
나처럼 길 잃은
젊은 필립피노 한 명이 뒤에서 다가온다.

그와 서로 의지하며 길 없는 길을 찾아 간다.

겨우 한 사람만 허용된
천 길 낭떠러지
오르락내리락 무너져 가는 가파른 오솔길
아찔한 현기증

출렁다리 네 개 건너
계곡에서 점심 먹고

또다시 구름 뚫고 한나절 올라가니
딱포우보다 더 큰 마을
구름 위에 앉아 있다.

아!
이곳에도 생명의 무리가 있다.
수줍어하는 생명이 있고
뽀얀 새 생명도 있다.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생명
막을 자 그 어디에도 없다.

2013년 4월 26-27일

 
딘웨데 웨스트 바랑가이

바타우앙 마을을 다녀와서

 

 

 

오늘은 읍내에서 가장 먼 지역에 위치한 바타우앙 산악마을 가는 날이다. 시장님과 시의원 전원이 오지마을 주민들을 격려차 함께 가기로 했다.

 

수요읍 근처까지는 시장님과 몇몇 시의원들과 시장님의 지프차를 타고 갔다. 여기서부터 딱파오를 지나 바타우앙까지는 모두가 깊은 산악길이다. 딱파오 까지만도 걸어서 세 시간 걸리는 험하고 가파른 거리다.

 

지난 번 딱파오에 갈 때 첫 번째는 지프차로 갔고, 두 번째는 간호사들과 걸어서 올라갔다. 이번엔 길이 무너져 차가 갈수 없단다. 걸어 올라가려는 참인데 부시장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라고 붙여준다. 나에게 치료를 받는 분이라 특별한 배려를 하시는 것 같다. 세르반테스 읍내서부터 오토바이 대여섯 대가 우리가 탄 시장님 차를 따라오더니 만약을 대비해서 따라 붙었나보다.
 

오토바이 뒤에 타고 한 참 오르다 오토바이가 힘이 없어 못 올라가는 곳에서는 내려서 걸어가고, 걷다가 다시 타고가기를 반복하여 딱파오에 오르니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하였다. 이어서 시장님과 시의원들이 나처럼 오토바이에 의지하여 올라오고 젊은 간호사들과 봉사요원들은 모두 걸어서 올라온다.
 

 

 

 

오늘 산에 가서 나를 어시스트 하라고 수간호사가 어제 오후에 ‘떼이’라는 덩치 큰 여학생을 한 명 붙여 주었다.

떼이는 덩치가 커서 20대 중반은 되었을 줄 알았는데 이제 겨우 16세였다. 그 먼 곳을 걸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3년 전에도 가 본 적이 있다고 갈 수 있단다.

 

그러면서 의료봉사 할 도구를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챙겨갔다. 오늘 떼이는 그 가방을 메고 늠름하게 세 시간동안 험한 산길을 걸어 딱파오에 올라왔다. 참 대단한 아이다. 떼이 뿐만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다 그렇게 강하게 자란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여자들은 스무 살 전에 거의 모두 결혼하여 아이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농사일을 한다. 오늘의 목적지 바타우앙은 이곳에서 다시 두 시간을 산행 하여야 한다. 세 시간이나 힘들게 올라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떼이에게 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갈 수 있단다. 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살펴 주며 가겠다는 눈치다.
 

딱파오에 사는 딘웨데 웨스트 바랑가이 캡틴이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을 준비하여 놓았다. 모두들 시장한 김에 크게 한 접시씩 밥과 고기를 담아 들고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손으로 맛있게 집어 먹는다. 손으로 밥을 먹는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다. 배고프고 바쁜데 언제 숟갈 찾을 시간이 있나! 이런 곳에서 숟갈 찾는 것은 사치스러운 행위다. 나도 손바닥으로 썩썩 비며 한 줌씩 입에다 넣고 허기를 채운다.

 

 

 

 

갈 길이 멀다. 밥 먹자마자 출발이다.

시장님이 은근히 나를 챙기며 함께 가잔다. 혹시나 사고가 날까 봐 그러는 것 같다. 나를 어시스트 한다는 떼이는 어디 가고 안 보이고 시장님과 함께 몇 몇 일행이 오솔길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서 다시 산줄기를 타고 올라가려던 참이다.

 

호기심 많은 나는 가는 곳 마다 신기한 것들이 많이 보여 사진에 담으려고 디카를 들고 이리 찍고 저리 찍다가 앞서 간 일행을 놓쳐버렸다. 곧 따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여서, 계산을 하면서 뒤따라갔는데도 얼마나 걸음이 빠른지 순식간에 일행을 잃어버리고 정글 속에 갇히게 되었다. 나중에 돌아올 때 알고 보니 그 길은 정상적인 길이 아니었는데 시장님이 빨리 가려고 길도 아닌 곳을 질러갔던 것이다. 그러니 초행인 나로서는 길을 잃고 갇힐 수밖에!

큰 소리로 부른다.
“미스터 메이어! 헬로우 메이어!”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다. 그야말로 ‘불러도 소용없는 이름이요,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다. 갑자기 이곳에 살은 적이 있다는 간호조무사의 말이 생각난다.

 

이곳에 큰 뱀이 있단다. 자기 몸체보다 더 큰 뱀이 이곳에 산단다. 직접 봤느냐니까 직접 보았단다. 그 뱀이 닭도 잡아먹고 큰 입으로 염소도 삼켜버렸단다. 사람은 잡아먹지 않느냐니까, 그런 말은 아직 못 들었단다. 민도로에서는 큰 뱀이 사람을 통째로 삼킨 적도 있었다. 칼을 차고 다녀야 되는 건데! 먼젓번 목요 장터에서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장검을 하나 사 놓았으나 무거워서 차고 오지 않은 게 후회가 된다.
 

급하니까 기도도 안 된다. 그저 허공에 대고 “주여!”만 외쳐댄다. 다급해 지니까 특별한 내용도 필요 없고 미사여구도 필요 없다. 그냥 “주여!”만 외친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가 보다. 즉시 응답해 주신다.

 

오토바이부대로 따라온 한 필리피노가 그도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내 음성을 듣고 나에게 다가온다. 그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제자리에 있으라며 여기저기 살피며 정글 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마침내 빠져나갈 한 곳을 발견한다. 그를 따라 힘겹게 정글을 빠져 나가니 앞서가던 시장님과 일행이 우리가 오지 않아 출렁다리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

 

 


 

딱포우 마을 사람들이 우리들의 아침을 해 놓고 기다린 것처럼, 바타우앙 마을사람들도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출렁다리 밑 계곡까지 내려와 연기를 피우며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모두들 기진맥진한 몸으로 물가에 내려가 쉬며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점심을 먹는다. 바나나 몸체를 잘라 만든 접시에 밥과 고기를 넉넉히 담아 맛있게들 먹는다. 난 별로 입맛이 안 당겨 조금 먹다 말았다.
 

갈 길이 멀다 계속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다시 계곡의 출렁다리를 네 개나 지나고, 마의 무너진 산길을 지나고, 걷다 쉬었다 하며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바타우앙 마을에 마침내 도착하다. 마을 오솔길에 어린 남자 아이가 아이를 안고 있다. 사진을 찍어주려 하니 수줍어 고개를 돌린다. 늙은 할머니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이곳의 풍습은 세르반테스 읍내에서도 미니스커트 입은 여인을 볼 수 없는데 이 깊은 산속에서 노인이 입고 있다니! 그것도 분홍색으로! 마치 하늘에서 우리를 맞이하러 내려온 천사가 마을 사람들과 앉아 있는 것 같다.

 

 

가져온 확성기를 설치하고 마을사람과 기도로 모임을 시작한다.

반바지 차림의 시장님이 먼저 나와 보건 위생교육에 관한 소개와 한국에서 온 의료선교사도 소개한다.

 

아픈 이들을 위해 주님의 따듯한 사랑을 전한다. 여기서 치료하는 것은 맛보기일 뿐이다. 이분들은 앞으로 읍내에 나올 때 마다 보건소에 들려 지속적인 치료를 받게 된다. 봉사하다보니 어느 새 다섯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캄캄한 밤이 다가 온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저녁을 먹고 나니,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잘 만한 장소가 없다고 다시 딱파오로 내려 가잔다.

 

야밤에 다시 두 시간을 걸어내려 가다니! 나로선 쉽지 않은 일이다. 시장님이 갈 차비를 하며 나보고 내려 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나 혼자 여기 남으면 내일 아침 일찍 누가 나를 데려가겠는가! 언제나 시장님을 따라가겠다며 따라 나섰다. 각자 손전등을 들고 위험한 꼬부랑 산길을 넘어질세라 조심하며 하산한다.

 

조금 가다보니 내 핸드폰 플래시가 꺼진다.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다. 캄캄한 밤의 별 하늘도 볼 겨를이 없이 혹시 무너진 계곡 오솔길에 발을 헛디디지나 않을까 긴장하며 앞 사람 불빛을 따라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아무도 한 마디도 안하고 긴장하여 열심히 걷기만 한다. 마치 공비들이 야간침투작전을 하는 것 같다.

 

 

 

 

남는다고 할 걸 잘못했다. 오다 보니 연로하신 부시장님은 힘들어 안 오시고 하루 밤 자고 내일 아침에 오시기로 했단다. 그런 줄 알았으면 나도 남아 있을 걸 잘 못했다. 죽겠다는 소리가 입에서 막 토해져 나온다.

 

일렬로 서서 침묵하며 바쁘게 걷기만 하던 이들이, 나의 한숨 소리가 거칠게 밤하늘에 퍼질 때마다 내 소리를 흉내 내며 껄껄 웃으며 걷는다. 한 창 젊은이들이라 피곤한 줄도 모르는 가보다. 오늘 걸은 시간 만 총 7시간 정도는 되는데도 힘차게 잘도 걷는다. 역시 산 사람들이라 틀리다.

 

앞서 가던 젊은 시장님도 힘든지 빛도 없는 컴컴한 중간 쉼터에서 잠시 쉰다. 나는 기회는 왔다 생각하고 그냥 길바닥에 뻗어 버렸다. 모두들 땀을 닦으며 잠시 쉰다. 누워서 바라보니 밤하늘에 은하수가 캄캄한 하늘을 환하게 장식하고 있다.

은하수 속의 별 하나하나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인다. 별들이 나에게 다가와 격려하며 힘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새들과 짐승들도 모두 잠이 든 틈을 타, 은하수 자락에서 별똥별 하나가 건너편 계곡에 떨어진다. 등줄기에 흐르던 땀이 서서히 식어간다. 참으로 맛있는 쉼의 순간이다.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존재의 이유는
삶도 경쟁도 잘사는 것도 아니다.

은하수와 밤의 계곡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기듯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거다.

밤과 낮이 하나가 되고
음과 양이 하나가 되고
동과 서가 하나가 되고

진보와 보수가 하나가 되고
난자와 정자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하나가 되고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존재의 이유이고 구원이다.

성과 속을 구별하지 않고
신이 인간이 되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가
진정한 존재의 모습이며 존재의 이유다.

누군가 출발하자는 소리가 들린다.
가자.  일어나 따라가자.  지금 따라붙지 못하면

어두운 산속에서 짐승 밥이 되고 만다.  
 

 

 

 

이강무 선교사

지구촌 오지 자비량 선교사.
감리교 목사이며 아시아 오지 부족마을을 돌며 아픈 이들의

영육을 돌보는 전인치유 선교사역을 합니다. 

 

 

 

 

 

 

 

 

 

 

 

 

 

 

 

 

 

 

나는 가르치는 사역에 종사하고 있다. 정보문화교실을 통해 정보화시대에 알 맞는 삶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교육방침은 단순하다. 오직 구원 믿음으로 되고 나머지는 훈련으로 된다는 원리다.

 

머리를 내세우는 시대, IQ(지능지수)시대는 지나갔다. EQ(감성지수)와 NQ(공존지수)를 더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천성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훈련을 통해 삶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업그레이드 해주는 훈련의 원칙을 10가지로 정리해 본다.

 

1. 관점(Prospect)이다.

 

좀 모호한 것 같지만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일에 관해 거시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세부사항에 매달려 있느냐 바로 이런 것이다.

코끼리를 만져 본 장님의 예화가 적절하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 본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배를 만진 장님은 벽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래서 바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른 관점을 다른 사람과 잘 나누면 좋은 지도자가 된다. 수완을 내 세우면 결과에만 치중하게 되어 잘못된 과정 즉 뇌물이나 부정이라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다.

 

2. 기도(Prayer)이다.

 

삶을 업그레이드시키는 훈련 중에 기도가 손꼽힌다. 흔히 말하는 기도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바쁜 일과 중에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다. Quiet Time를 가지신 것이다. 이 말을 경건의 시간이라고 번역하면 적절치 않다. 그냥 큐티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리터드 포스터는 [Celebration of Spiritual Discipline] 이란 책에서 홀로서기, 침묵의 시간,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다. 기도하는 행위 자체도 중요했지만 [묵상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조용한 시간을 통해 자기를 점검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말만 늘어 놓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가 필요하다.

 

3. 우선순위(Priority)이다.

 

나는 오래 전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당신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엄청난 도전을 받은 적이 있다.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사는지. 무엇이 더 급하고 덜 급한 일인지 정해 놓고 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어린아이 때부터 삶의 우선순위를 정할 줄 아는 아이가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생산적인 일을 우선순위로 꼽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4.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 이다.

 

고루한 생각의 틀을 깨트려야 한다. 고정관념, 선입감, 자기고집에 지나치게 묶여있는지 살펴야 한다.

 

예수님도 구약의 틀을 깨고 신약시대를 여셨다. 율법의 완성이다.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형을 집행하는 형틀에 불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구원의 새로운 도구로 사용하셨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중역들을 모아놓고 마누라와 자식들만 빼놓고 다 바꾸라는 호통소리가 오늘의 삼성을 이루어 놓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진부하고 고루한 고정관념에서 속히 탈피해야 한다.

 

5. 기대(Expectation)하라.

 

이 말은 피그말리온 신드롬(Pygmalion Syndrome)을 없애라는 말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에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My Fair Lady라는 영화가 있다. 오드리 헵번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꽃 파는 소녀였다. 그런데 어느 언어학자에게 발탁되어 언어교정을 통해 상류사회에 진출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잊지 못할 대목이 있다. 오드리 헵번은 언어학자인 핵스 헤리슨에게 [당신이 나를 계속 꽃 파는 소녀로만 생각 한다면 나는 상류사회의 여인이 될 수 없을 거예요.]

 

바로 이것이 피그말리온 신드롬이다. [기대할 줄 모르는 병(증상)]이란 말이다.

내가 나를 가능성 있는 사람으로 볼 줄 알아야 하고 내가 남을 기대 이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6. 팀웍(Team Work) 훈련이다.

 

일을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혼자서 하는 경우가 많다. 회장의 자리나 어떤 책임자의 자리는 혼자서 일을 많이 하라고 주어진 직책이 아니다. 팀웍을 이루는 자리다. 나 혼자의 승리보다 우리 모두의 승리가 되게 하고 나 보다는 [우리]의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We Feeling] 신앙이 되어야 한다.

 

7 잠재력(Think Grants)을 발견하라.

 

생각 자체가 나는 이것 밖에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조 지라드](Joe Girad)라는 세일즈맨이 [조 지라드의 250명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을 보면 내가 아는 사람이 동창, 옆집 사람 등등 250명이 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는 250명이 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Think Grants에 해당된다. 제한된 자원에도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잠재된 재원을 찾을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하다.

 

8 질문(To Question)하기

 

살다 보면 자기 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집착하다 보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생긴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탁월한 질문공세를 통해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셨다.

내가 기자 생활을 할 때 한국유리 회장인 최태섭장로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누구인가? 시간의 주인은 누구이며 돈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경영학에서 Re-Engineering 이란 말이 있다. 고쳐야 할 부분을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고 혁명적으로 바꾼다는 말이다.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가 질문할 줄 알아야 고쳐진다.

 

9. 감사(To Thank)하기

 

일을 하다 보면 일이 잘 안 될 때가 있다. 이 때 자칫하면 후회하고 자학하고 나아가 정죄하기도 한다. 이 때 정말 필요한 것은 감사이다. 이런 때 감사할 줄 알도록 훈련해야 한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교감선생님이 영국을 갔다 온 후 [선진국 영국의 특징]이 [큐]에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영국 사람들은 만날 때 마다 서로가 Thank you를 빨리 말하다 보니 [큐, 큐]라고 들렸다고 했다.

어려운 인생살이의 뒤집기 명수들은 모두가 감사의 명수들이었다. 감사하는 일도 훈련으로 된다.

 

10. 돌아오기(Returning) 훈련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복음송이 있다. 영어로는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가 반복되는 노래다. 이 노래는 [No turning back. No turning back] 이렇게 끝난다.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그러나 신앙인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반드시 [돌아오기]를 해야 한다. 올라갔으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거둬들였으면 나누어야 한다. 은혜를 받았으면 반드시 섬겨야 한다. 나는 이것을 돌아오기(Returning)원칙이라고 말하고 싶다.

 

교인 숫자가 좀 많은 어느 교회의 책임자가 몇  십 명 안 되는 교회를 향해 [유명무실한 교회]라고 비하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순간적으로나마 오르기만 하고 내려옴이 없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성부성자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할 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보편적인 교회는 선교사 파송 숫자로 평가되는 교회도, 교인 숫자로 평가되는 교회도 아니다. 예수님을 절대 구주로 고백하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인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변화산에 오른 제자들이 너무나 황홀한 장면에 도취되어 [여기에 집을 짓자]고 청 할 때 예수님은 문제가 많고 죽음이 기다리는 산 아래도 [내려가자]고 하셨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교훈과 같이 작은 시절, 어려운 시절, 눈물의 계절로 돌아갈 줄 알아야 복음이 순수하게 전해진다.

 

이스라엘 민족이 왜 초막절을 지키는가 생각해 보라.

광야 40년의 고통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고통 중에서 건져주셨다는 구원의 현장에 돌아가야 한다는 지혜인 것이다. 좋은 신앙인은 자기를 낮추어 초막에 둘 줄 아는 사람이다. (장재언) 

 

 

 

 

 

 

 

 

 

 

 

 

 

 

 

 

 

 

Kiss and tell

 

(누구를 사귄다고 떠들고 다니다)

 

 

I heard that youre going out with Tim.

Is that true?

너 팀하고 사귄다며?

 

Sorry, I never kiss and tell.

미안, 난 절대 누구를 사귄다고 떠들고 다니지 않아.

 

Didnt I see you and Jason holding hands?

Are you guys a couple now?

너하고 제이슨하고 손잡고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너희들 사귀니?

 

Youll have to guess. I never kiss and tell.

마음대로 생각해, 난 절대 누구를 사귄다고 떠들고 다니지 않아.

 

 

 

 

I"m looking for Mr. Right.
난 이상형(남자)를 찾고 있어.

 

남자 이상형을 Mr. Right라고 하고 여자 이상형을

Mrs. Right라고 한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엔 Mr. Right를 찾는다는 광고란이 있다.


A: I think that I am giving up on finding the right guy.
B: Yeah, I know what you mean.

I am also looking for Mr. Right.

 

A: 이상형 찾는 일은 이젠 그만둘까 해.
B: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도 아직 이상형을 찾고 있어.

 

 

비슷한 표현

 

Mrs. Right is so hard to find.

이상형 여자를 찾기는 쉽지 않아.

 

 

미국동네 이야기

 

하루는 한가하게 신문(paper)을 보면서

 killing time을 하고 있었다.

신문 8면인가를 보고 있는데 "Mr. Right"이라는 말이 나와서

주의 깊게 읽어보았다.

근데 아무리 사전을 찾아보고 별 쇼를 다해도

무슨 말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미국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친구 왈

"이상형 남자를 Mr. Right이라고 한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신문을 자세히 보니

Mr. Right이라고 쓰여진 밑에 Single white female, 59

(혼자 사는 백인 여인네, 쉰아홉살)등등이 쓰여져 있었다.

 

한국 잡지의 "애인 구함"이란 난에 해당하는 코너였음.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

농다리’를 건너는 주민들의 여유로운 모습.

광주리를 머리에 이거나 지게를 진 채 일터로 가는 모습이 마치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농다리(충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는 크고 작은 돌로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게 축조됐다.

 

 

 

 

 

 

 

 

 

 

 

 


 

 

 

 

 

 

 

 

 

 

 

 

 

 

 

 

 

 

 

 

 

 

 

 

부신(副腎)을 살려라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스트레스때문에 호르몬이 나오는데 그 호르몬이 바로 부신(副腎)에서 나옵니다.
 

부신은 콩팥, 신장 바로 위에 있는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기관입니다.
 

여기에서 호르몬이 나오는데 이 호르몬이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많이 나오게 되면 호르몬 때문에 우리 몸이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힘들어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계속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부신에 계속 자극을 줘서 결국 부신의 기능이 떨어지게 됩니다.

걸레도 계속 쥐어짜면 물이 안 나오는 것처럼 부신도 스트레스를 잠깐 받고 안 받아야 하는데 1년, 2년 계속 받게 되면 부신이 호르몬을 계속 뿜어내다 나중에는 자극이 와도 뿜어내지 못하는 부신기능이 떨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가 부신 피로증이라고 얘기합니다.
 

만성 피로 환자 중에는 부신 피로증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현대의학에는 부신 피로증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병원에 가서 만성 피로 때문에 검사를 해봤는데 이상을 못 찾습니다. 그렇지만 기능의학에서는 부신검사를 정확하게 침을 통한 호르몬 검사를 통해서 부신 기능을 확인하게 되고 이것을 통해서 부신 피로증을 확인하면 만성치료를 치료하는 경과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많은 부신 피로증 환자들을 만나보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부신 기능이 망가져서 오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 중에 괴롭히는 WS가 있습니다. WS는 원수의 약자입니다.
WS때문에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까 부신 기능이 망가지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증상이 생깁니다.
 

증상을 알아보면
 

1.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다

2. 모든 일에 의욕이 떨어진다

3.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4. 성욕이 떨어진다

5. 일어나면 심하게 어지럽다

6. 쉽게 화가 난다

7. 아침부터 오후까지 피로하고 저녁 퇴근 무렵에 기운이 난다

이렇게 부신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스트레스 때문에도 생기지만 노화현상으로도 생깁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신의 기능이 떨어지면 이러한 증상 등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부신기능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만성피로를 예방할 수 있고 활력을 찾을 수 있고 노화도 더 늦출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가지 말씀 드리면 부신 기능에 나쁜 음식 커피, 커피는 계속 자극을 줍니다. 끊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 단 음식, 단 음식을 먹으면 피로가 풀린다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일시적인 현상이고 장기적으로 드셨을 때는 부신에 별로 좋지 않습니다. 혈당을 높이는 단 음식, 밀가루 음식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커피도 마셨을 때는 각성효과 때문에 피로가 풀리는 것 같지만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커피는 카페인에 중독이 되면서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합니다. 줄여나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충분하게 잠을 많이 주무셔야 합니다. 잠을 잘 자는 것은 부신기능을 유지시키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되고 좋은 음식 현미밥에 많은 과일과 야채를 충분히 드시고 자기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서 마음을 관리하는 방법, 자기만의 마음관리 방법들을 하나씩 챙기시는 것, 부신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더 젊게 사는 방법을 다 같이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이동환)

 

 

 

 

부신은 양쪽 콩팥 위에 위치하는 작은 내분비 기관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무게는 각 5g 정도입니다. 크기가 작다고 절대 중요한 역할이 없는 건 아닙니다.

 

부신 잘라 보면 안쪽의 수질과 바깥쪽의 피질로 나누어집니다. 안쪽 수질에서는 우리 몸의 혈압 유지와 신경활성에 매우 중요한 아드레날린이 분비됩니다.

한편 바깥쪽 부신 피질에서는 세가지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당류코르티코이드, 염류코르티코이드, 성 호르몬 등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호르몬은 각기 다른 부위에서 합성이 되고 각기 다른 역할을 합니다.

 

1. 당류코르티코이드의 역할

 

당류코르티코이드는 신체 장기 여러 부위에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우선 면역체계에 작용하여 항 염증 작용과 면역 억제 작용을 나타냅니다.

 

관절염 등이 있을 때 뼈주사라고 하는 주사를 맞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이 이 당류코르티코이드입니다. 또 간이나 신장 이식 후에 거부반응 억제를 위해 사용하는 면역 억제제로도 사용이 됩니다.

 

항염 작용 외에도 포도당이나 지방대사에 영향을 미쳐 포도당 합성을 증가시키고 인슐린에 대한 반응을 현저히 떨어뜨려 혈당을 상승시키고, 말초에 있는 지방들을 내장지방으로 이동시켜 복부비만이 생기게 합니다.

뼈에서도 뼈 형성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심혈관계에서는 아드레날린을 도와 혈압을 유지하게 합니다.

 

2. 염류코르티코이드의 역할

 

염류코디코이드는 혈압, 혈액량, 체내 이온균형(용액중에 녹아있는 여러가지 이온 간의 균형) 등을 조절합니다.

 

3. 시상하부-뇌하수체- 부신축

 

부신호르몬 특히 당류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은 뇌에서 나오는 호르몬에 의해 합성과 분비가 조절이 됩니다.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시상하부의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유리 호르몬(CRH)을 분비시키면 뇌하수체에서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이 분비되고 부신피질자극호르몬은 부신에서 당류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을 분비시키게 됩니다.

부신의 당류코르티코이드가 어느 정도 충분하게 되면 당류코르티코이드는 뇌의 사상하부와 뇌하수체에 작용하여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유리호르몬(CRH)과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 분비를 억제시킵니다. 이를 시상하부- 뇌하수체- 부신축이라고 합니다. 당류코르티코이드와 달리 염류코르티코이드는 뇌에 영향을 받지 않고 혈압변화나 몸의 이온 균형 변화에 반응하여 분비됩니다.

4. 부신부전증이란?

 

 

 

 

부신 부전증란 부신이 결핵, 자가면역(자신의 조직 성분에 대하여 면역을 일으키거나 과민성인 상태를 말하는데, 빈혈의 원인이 되는 후천성 용혈성빈혈증(後天性溶血性貧血症:자가면역성 용혈성빈혈증)이나 만성 갑상선염 등이 그 예이다) 등의 여러 이유에 의해 파괴되면서 부신에서 나오는 호르몬이 결핍되어 나타나는 신체 장애를 말합니다. 이처럼 부신 자체 문제로 인해 부신부전증이 오는 것을 1차성 부신부전증이라고 합니다.

 

또한 뇌 종양이나 방사선 치료 등에 의해 시상하부-뇌하수체- 부신축의 이상으로 부신 당류코르티코이드 합성이 안 되어도 부신부전증 증상이 나타나며 2차성 부신부전증이라고 합니다. 즉 부신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시상하부나 뇌하수체가 문제가 생겨 부신이 활성화가 되지 않는 것이 2차성 부신부전증입니다.

 

부신부전증은 흔하게 발생하지는 않지만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잘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부신부전증 환자는 10만 명당 4~11명 정도로 추산되고, 발생율은 인구 백만 명당 4.7~6.2명꼴로 발생합니다.

 

원인

 

일차성 부신부전증의 가장 흔한 원인은 한국의 경우 결핵이고 서양에서는 결핵보다는 자가 면역에 의한 부신의 파괴가 주 원인을 이루고 있습니다.

2차성 부신부전증의 원인으로는 당류코르티코이드의 무분별한 사용이 가장 흔한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당류코르티코이드의 지속적인 사용이 어떻게 부신부전증을 일으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당류코르티코이드(일명 스테로이드)는 이전에 언급한대로 관절염이나 면역억제제 등의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최근에는 통증크리닉에서도 진통 목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류코르티코이드를 3주 이상 사용하게 되면 시상하부-뇌하수체- 부신 축이 손상이 오면서 부신에서 당류코르티코이드 호르몬 생산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 때 당류코르티코이드가 지속적으로 투여가 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어느 순간 끊게 되면 외부에서 당류코르티코이드 호르몬도 없고 부신에서도 당류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몸에는 필수 호르몬인 당류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이 없어 부신부전증에 따르는 여러 증상과 합병증이 발생하게 됩니다.

 

 

 

 

 

 

증상

 

우선 피곤하고 전반적으로 힘이 없습니다. 근력도 감소하고 근육과 관절통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체중이 감소하고 식욕도 거의 없으며 먹은 것 없이도 구역질이 납니다. 배가 아프고 설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증상은 특이하지 않아서 부신부전증 환자의 50% 이상이 발병하고 1년이 지나야 병원을 찾게 됩니다.

 

일차성부신부전증의 경우 부신에서 당류코르티코이드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당류코르티코이드를 만들라는 명령을 주기 위해 시상하부와 뇌하수체에서 나오는 호르몬은 증가합니다.

 

특히 부신피질자극호르몬은 많이 분비되면 멜라닌 색소(melanin, 흑갈색 색소로서 일정량 이상의 자외선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한다. 체온을 유지해주며 멜라닌의 양에 의해 피부색이 결정된다.)를 침착시키는 호르몬이 같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피부와 잇몸에 색소침착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당류코르티코이드 과잉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부신부전증은 다른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즉 부신부전증이 생긴 후 느끼는 증상은 비슷하지만 과도한 당류코르티코이드에 노출되어 나타나는 여러 현상이 보입니다.

 

복부는 비만해지고 사지는 가늘어지는 중심성 비만이 생기고 목과 쇄골 부위에 지장침착이 늘어나면서 혹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얼굴이 달덩이처럼 둥그래지고 뺨에는 혈관이 늘어나면서 불그레하게 보입니다. 근력이 약화되고 사지가 가늘어지면서 근육통도 올 수 있습니다. 피부가 매우 엷어지고 멍이 쉽게 들어 사소한 충격에도 멍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골다공증(骨多孔症, osteoporosis : 남아 있는 뼈에는 구조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서 뼈를 형성하는 무기질과 기질의 양이 동일한 비율로 과도하게 감소된 상태)이 쉽게 생겨 허리에 압박골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관절주사를 맞는다든가 통증치료를 받는다든가 성분 모를 한약제나 건강 보조식품 등을 복용하는 중에 위와 같은 증상이 생기면 내분비 내과 전문의와 꼭 상의하셔야 합니다.

 

염류코르티코이드 감소로 인해 혈압이 떨어지고 몸 속에 나트륨 이온이 감소하면서 만성적이 두통이 올 수 있습니다. 성 호르몬도 감소하므로 성욕이 감퇴하고 치모소실 등의 증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진단

 

증상이 있고 신체 검사에서 의심되는 환자에서 진단적 검사를 해볼 수 있습니다. 진단 검사는 부신부전증이 1차성인지 2차성인지에 의해 달라질 수 있습니다.

 

1. 1차성 부신부전증

 

   1) 아침 혈청 코티솔

 

혈중 당류코르티코이드를 측정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의 코티솔은 하루 동안에도 증가와 감소를 반복합니다. 우리가 수면을 취하면 가장 낮은 수치로 떨어졌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활동을 시작하면 가장 높은 수치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신부전증이 있으면 이런 아침에 증가하는 코티솔 양이 낮아 질 수 있습니다. 아침 혈청 코티솔이 3 μg/dl 이하면 부신부전증이 있다고 진단하고 18μg/dl 이상이면 정상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밤낮이 바뀐 사람이나 부신부전증이 아직 심하지 않는 사람에서는 부정확하게 나올 수 있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심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에 있는 경우에도 검사 결과에 대한 해석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2) 아침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수치

 

부신 자체 문제로 인한 1차성 부신부전증의 경우 시상하부와 뇌하수체는 정상반응을 보이므로 부신 호르몬이 낮아지게 되면 시상하부와 뇌하수체가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항상성 유지에 필수적인 부신 호르몬이 부족해지면 우리 뇌에서는 빨리 그 호르몬을 만들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보내게 되는데, 그 호르몬 중 하나가 뇌하수체에서 나오는 부신피질자극호르몬입니다.

따라서 부신부전증이 의심되는 환자에서 부신피질자극호르몬이 정상보다 많이 증가해 있다면 1차성 부신부전증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급속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자극 검사

 

이 검사법은 이전에 설명 드렸던 시상하부- 뇌하수체- 부신 축의 반응을 보는 검사법입니다.

정상적으로 우리의 부신은 부신피질호르몬으로 자극을 가하면 혈중 당류코르티코이드(코티솔) 치가 18μg/dl 이상으로 상승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신에 병이 생기면 이러한 자극에 반응을 하지 못하고 코티솔 상승치가 15μg/dl 이하에 머무르게 됩니다.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공복 여부에 상관없이 기저 상태에서 혈청 코티솔 치를 측정한 후 부신 피질 자극호르몬 250μg을 근육이나 정맥 주사한 후 30분, 60분에 혈액 속 코티솔 치를 측정합니다.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자극검사에 따른 부작용은 거의 없습니다. 검사한 결과 혈중 코티솔 치가 30분이나 60분에 18μg/dl을 넘지 못하면 부신부전증이 있다고 진단하고, 18μg/dl 이상이면 정상적인 반응으로 해석합니다.

최근 부신피질자극호르몬을 체내 생리적 농도에 가까운 1μg만을 사용하여 자극검사를 하는 방법도 소개가 되고 있지만 기존 방법에 비해 진단적 정확도가 크게 향상되지도 않고 준비하기도 힘들어 잘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4) 컴퓨터 단층촬영(CT)

 

1차성 부신부전증이 의심되는 사람에서 부신에 종양이 있는지, 결핵 감염이 있는지, 암 전이성 병변이 있는지 등을 알기 위해 부신 컴퓨터 단층촬영을 할 수 있습니다.

 

2. 2차성 부신부전증

 

   1) 아침 코티솔, 급속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자극 검사

 

1차성 부신부전증과 큰 차이 없습니다.

 

   2) 인슐린 내성 검사

 

시상하부- 뇌하수체- 부신 축이 자극되어 부신에서 당류코르티코이드가 분비되는 기전에는 여럿이 있습니다. 그중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는 중요한 자극제입니다.

따라서 신체에 인위적인 스트레스를 주어 그 스트레스에 정확하게 반응하여 부신에서 당류코르티코이드가 잘 나온다면 시상하부- 뇌하수체-부신 축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부신 기능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이상에 문제가 생기면 정상적인 반응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뇌하수체에 종양이나 수술로 이상이 생겼다면 외적인 스트레스가 시상하부를 자극해서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유리호르몬(CRH)이 분비가 되어도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은 분비가 안되어 부신에서 당류코르티코이드가 합성과 분비가 안됩니다.

이런 현상을 2차성 부신부전증이라고 합니다. 2차성 부신부전증 진단을 위해 우리가 가장 흔하게 줄 수 있고 가장 잘 시상하부뇌하수체- 부신 축을 자극하는 신체적 스트레스가 저혈당입니다.

 

저혈당(低血糖症, hypoglycemia : 혈액 속의 당량이 병적으로 감소되어 있는 상태)은 인슐린을 인위적으로 투여함으로써 유발합니다. 인슐린을 주사하여 사람의 혈당치를 40mg/dl 이하로 낮추면 환자는 저혈당 증상(공복감, 가슴 두근거림, 식은땀, 기운 없어짐 등등)을 느끼면서 시상하부-뇌하수체- 부신 축이 급격하게 활성화되어 혈중 코티솔 치가 상승합니다.

저혈당 유발 후 혈중 코티솔 수치가 18μg/dl 이상 나오면 정상으로 진단하고 이하로 나오면 부신부전증으로 진단합니다. 그러나 이 검사는 입원을 해야 하고 저혈당이라는 스트레스가 있으므로 고령, 경련성 질환자, 관상동맥 질환자 등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3) 기타

 

메티라폰 검사, CRH 자극검사 등이 있지만 실제 잘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치료

 

1. 급성기 치료(부신성 위기)

 

부신부전증이 있었던 환자가 갑자기 수술을 받거나 위중한 감염이 생긴 경우 부신 호르몬(특히 당류코르티코이드)이 평소보다 5~10배까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신 기능이 떨어져 있으므로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환자가 갑자기 의식을 잃거나 쇽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때는 빨리 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병원에 오게 되면 일단 수액제로 혈압을 올리고 고용량의 당류코르티코이드를 주사하면서 환자를 안정시킵니다. 일단 환자가 안정되면 만성기 치료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부신부전증 환자는 부신성 위기와 같은 위험상황이 언제든지 올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은부신부전증 환자입니다.”라는 표식을 항상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2. 만성기 치료

 

1) 당류코르티코이드

하이드로코티손 15~20mg이나 프레드니솔론 5~7.5mg을 매일 먹습니다. 약간의 열이 나거나 가벼운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약 용량을 평소의 2배로 높입니다.

 

2) 염류코르티코이드

1차성 부신부전증인 경우에만 후르드로코티손이란 약물을 하루 한번 복용합니다. 2차성 부신부전증인 경우에는 염류코르티코이드 분비는 정상이므로 보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당류코르티코이드처럼 스트레스 상황에서 용량을 증량하지는 않습니다.

 

3) DHEA 보충

부신에서 나오는 성 호르몬으로 최근 몇몇 연구에서 부신부전증 환자에서 사용하면 삶의 질이 향상되고 성욕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4) 스테로이드 과잉 사용에 의한 부신부전증 치료

생리적 용량의 당류코르티코이드를 9~12개월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축된 부신 기능이 회복되는데 최소 9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약을 1년 정도 복용해보고 급속 부신 피질 자극호르몬 자극 검사를 해서 정상 기능으로 회복됐음이 확인되면 약을 끊을 수 있습니다.

 

3.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치료

 

수술이나 중한 감염 등의 상황에서는 당류코르티코이드 필요량이 5~10배 증가합니다. 따라서 이때는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서 고용량의 당류코르티코이드를 1~3일 정도 투여한 후 감량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신부전증으로 당류코르티코이드를 복용하고 계시는 환자는 꼭 의사에게 자신의 질환에 대해서 미리 알려야만 부신성 위기 같은 치명적인 위험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비전통신 종합) 

 

 

 

 

 

 

 

 

 

 

 



 


 

 

 

 

 

장기려(張起呂, 1911년8월14일~1995년12월25일) 하면 한국의 슈바이쳐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겠습니까.

 

장기려 박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운영하는 청십자 병원에 한 농부가 입원하였습니다. 그는 워낙 가난하여 치료를 끝내고도 입원비가 밀려서 퇴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농부는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하소연 하였습니다.
 

"원장님, 모자라는 입원비는 돈을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제가 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은 장기려 박사는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살짝 도망치시오."라고 마치 남의 병원의 환자에게 인심이나 쓰는 듯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병원에서는 병원비를 받아야 퇴원을 시켜 주겠다고 하는데 낼 돈이 없으니 할 수 없는 일 아니오. 도망을 쳐서라도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그 날 밤, 장기려 박사는 서무과 직원이 모두 퇴근한 다음에 병원 뒷문을 살그머니 열어 놓았습니다. 얼마 뒤 농부와 그의 아내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장기려 박사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사시오."

 

농부 내외는 자신들을 위하는 장기려 박사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나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환자가 사라졌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106호 환자가 간방에 사라졌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사실은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 주었소.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서 마냥 붙들고 있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소? 이 과장도 알다시피 지금이 한창 바쁜 농사철 아니오."
 

서무과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원장실을 나왔습니다.
 

몇 걸음 옮기다 원장실 쪽을 힐끔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조금 전과는 달리 웃음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여느 병원보다 월급이 적은데도 직원들이 즐겁게 일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한학자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이 학교에 들어가게만 해 준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배웠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25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정기구독 하였고 또 10년 연배였던 함석헌으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1940년 1월초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였습니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함석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존경하였고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장인의 권유로 백인제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고 1940년 9월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평양의 연합 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가 병원장에까지 취임하였지만,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질시와 텃세때문에 불과 두달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성실히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희자되고 있습니다.
 

해방후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생활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았고, 1948넌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쟁중 1950년 12월 차남 가용과 남하하게 되는데 평양 종로 앞에서 마지막 본 아내와 다른 가족이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은 일생동안의 가장 가슴아픈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했지만 "결혼은 오직 한번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사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육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려의 부부관계는 영적인 결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참된 사랑이 무엇이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부산에 온 그는 곧 부산 제 3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6월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 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25년간 복음병원에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 서울 카톨릭 의대 외과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다. 간암에 대한 연구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남하한 이후 첫 주일인 1950년 12월 24일 한상동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렸고, 산정현 교회를 재건하여 장로로 봉사해 온 그는 1981년 12월 시무장로에서 은퇴하였고 원로장로로 추대되었습니다. 그후 1987년부터는 '종들의 모임'이라고 흔히 불리는 비교파적, 비조직적 신앙운동 단체에 관여하였습니다.
 

장기려박사는 한국교회에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 혹은 기독교적 사회봉사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료활동 의에도 그는 1956년 전도 및 성경공부를 위한 목적으로 “부산모임"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어느 날, 장기려 박사는 이 모임에서 덴마크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됩니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긴 장기려 박사는 1968년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복음병원 분원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하게 됩니다.

 

 

화상을 입은

생전의 채규철

 

여기서 이 운동을 같이 시작한 채규철님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채규철님을 만난 것은 언론계에 있을 때입니다. 한국 농촌운동을 위해 덴마크에 유학을 다녀온 후 자동차 사고로 전신 3도 이상의 화상을 입고 28차례나 수술하여 살아 난 그가 장기려박사와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와 같이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문둥이 인줄 알고 내 쳐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채규철 님은 두밀리자연학교를 운영하다가 심근경색으로 2006년 69세로 별세했습니다.

 

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가 화상을 입고 죽어갈 때 친구가 찾아와 들려 주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죽어도 살아야 하겠다는 강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Man shall not die until his work has done.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 죽지 않는다.)

 

장박사가 채규철님과 벌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운동은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아프지도 않은데 미리 돈을 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장기려 박사를 보고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청십자 운동을 벌인지 4년이 지난 1975년, 드디어 청십자 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처럼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평생을 살겠습니다."

 

병원 간판을 달며 장기려 박사는 하나님께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습니다. 선생님은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직업과 재능은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장재언)

 

 

 

 

 

 

 

 

 

 

 

 

 

 

 

 

2013년 1월 알자지라는 화려한 팡파르와 함께 경영난에 허덕이는 미국 케이블 채널 커런트 TV(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공동 창업했다)를 약 5억 달러에 인수했다. ‘알자지라 아메리카’로 이름을 바꿔 미국에서 방송을 개시할 계획이다.(이미 시험방송이 시작되고 있다. 편집자 주)

 

알자지라가 미국인 약 800명을 고용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2만2000명 이상이 지원했다. 현재 경영진을 물색 중이다.
 

그러나 알자지라 아메리카를 올 여름 출범시키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내부 소식통들은 가을 이전, 아니 연말까지 방송을 개시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말한다. 한 소식통은 “무척 복잡한 일이라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털어 놓았다.
 

설상가상 최근엔 알자지라의 반이스라엘 노선에 관한 해묵은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알자지라의 영어 웹사이트가 논란 많은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조셉 마사드의 에세이를 실은 일이 계기였다. 시온주의와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라고 주장한 글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국 시사전문지 애틀랜틱의 제프리 골드버그 기자는 격분했다.
 

그는 그 에세이를 두고 “근래 기억에서 가장 반유대주의적인 장광설 중의 하나”라고 질타했다. 한편 권력에 맞서 진실을 말한다고 늘 주장하던 알자지라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 글을 웹사이트에서 슬그머니 내렸다. 그러자 알자지라 잉글리시 채널을 객관적이고 폭넓은 취재만이 아니라 널리 열린 토론의 장으로 기대하는 팬들도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미국, 유럽, 중동에서 알자지라 아메리카의 우여곡절을 추적했다. 그 결과 자금이 풍족하기 때문에 적어도 단기적으로 볼 때 알자지라 아메리카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최소한 방송 개시 전에 파산하진 않을 듯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방송을 개시할 것이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TV 시장인 미국의 뉴스 업계에 신선한 에너지와 논란을 듬뿍 가져다 주리라 예상된다. 아울러 우리가 뉴스를 보는 방식과 뉴스를 대하는 관념까지 바꿔놓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거의 모든 면에서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다.
 

지난 1월 커런트 TV 인수가 발표된 직후 알자지라 잉글리시의 월간 프로그램 ‘엠파이어’를 진행하는 마르완 비샤라와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의 세계 패권에 관한 좋은 면, 나쁜 면, 추악한 면, 그리고 모순적인 면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비샤라는 알자지라의 미국 진출을 대환영했다.
 

“미국만큼 많은 뉴스와 소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우리의 도전은 미국을 TV에 다시 복귀시키는 것이다. 뉴욕부터 LA까지 전체를 아우르는 미국을 말한다. 지금은 TV에서 그런 미국을 볼 수 없다. 엘리트, 코미디언, 유명 분석가, 정치인만 등장한다.”
 

좌익 성향 정책연구소 뉴아메리카 파운데이션 출신으로 현재 알자지라의 아메리카 지국장으로 일하는 암자드 아탈라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 임무는 목소리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자지라는 모든 채널에서 그런 이상을 추구한다. 시청자들에게 홍보 전문가들의 이야기만 지겹도록 듣게 한다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미와 남미를 아우르는 아메리카의 진정한 뉴스를 보도할 목적으로 알자지라는 시카고, 디트로이트를 포함해 8~10개 도시에 지국을 개설할 계획이다.
 

당연히 칭찬할 만하다. 반드시 필요한 언론이며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테러리스트 TV’로 명명했던 알자지라와는 아주 다르다. 옛 알자지라는 무엇보다 알카에다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안들을 전달하는 ‘입’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진화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알자지라 아랍어 채널은 한때 알카에다의 ‘입’이었고 늘 무슬림형제단과 가까웠다. 그러나 2006년 개설된 알자지라 잉글리시는 다르다.

그들에 따르면 현재 130여 개국에서 2억6000만 가구가 시청한다. 진정한 세계 뉴스를 전하는 일류 세계 뉴스 네트워크로 발돋움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알자지라 잉글리시는 중요한 국제 저널리즘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2011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의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알자지라 잉글리시는 하루 종일 진짜 뉴스를 전한다는 느낌이 든다. 외국인은 물론 미국인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뉴스와 소위 전문가들의 논쟁에다 수많은 광고가 난무하는 미국의 일반 매체와 다르다.”
 

6년 전 알자지라 잉글리시는 조시 러싱 특파원을 파견해 미국 소도시의 상황을 취재하게 했다. 그러자 미국 연방 요원들이 노스다코타주 전역에서 그를 미행했다. 러싱은 미 해병 중위이자 미군 대변인 출신이지만 요원들은 그가 인터뷰한 모든 사람을 만나 러싱이 캐나다 국경 부근에서 공격 표적을 물색하는 테러리스트가 아닌지 밝히려고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일이 없다.
 

알자지라 워싱턴 지국이 K 스트리트에 사무실을 열었을 때도 건물주는 정문에 회사 이름을 내걸지 못하게 했다. 올해 초 기준으로 약 140명이 그곳에서 일하지만 “지금도 간판이 없다”고 수석 프로듀서 밥 휠럭이 말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고충도 없어진다. 알자지라는 각국의 대사관, 글로벌 기업체, 은행 등이 밀집한 워싱턴 DC 듀폰 서클 부근의 널찍한 사옥에 회사 로고를 자랑스럽게 내걸 예정이다. 맨해튼의 새 사무실 표지판은 더 두드러져 보일 듯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케이블 방송업자들은 알자지라 잉글리시를 서비스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알자지라의 과거 오명 때문이기도 하고, 세계 뉴스가 미국 시청자 대다수에게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케이블 가입자들은 주로 한 번에 하나씩이 아니라 번들로 채널을 구입한다. 커런트 TV는 시청자가 많지 않지만 여러 인기 채널과 한묶음으로 구입됐다. 알자지라가 노린 점이 바로 그런 포지셔닝이다. 휠럭은 “커런트 TV 인수로 우리는 더 많은 가구에 도달할 수 있고 그들에게 우리 프로그램 샘플을 볼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알자지라의 미국 진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액의 투자가 필요하며, 조만간 또는 영구히 투자 회수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카타르 정부에는 무슨 이득이 있나?” 3자 전화 인터뷰에서 아탈라와 휠럭에게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우리 같은 방송 실무자로선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야심적인 케이블 뉴스 사업의 확장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파괴력이 훨씬 클지 모른다. 카타르는 돈이 흘러넘치기로 유명한 나라다. 지배 가문의 재산은 거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인당 연간 소득10만 달러가 넘는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부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 카타르라는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만에 폴립처럼 작게 튀어나온 무덥고 모래투성이인 반도이기 때문에 그 토후국의 제국주의 꿈이 얼마나 원대한지는 세계가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노련한 외교관인 파리 주재 카타르 대사 무함마드 알 쿠와리는 “카타르의 미래는 소프트파워”라고 말했다. 카타르를 통치하는 알 시니 가문의 지도자들은 21세기에 자신들과 나라를 세계 무대에 투사하려면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 간파했다. 그들은 이슬람 원리주의 와하비즘 계열이지만 세계관은 넓게 열려 있다.
 

국왕 하마드 빈 할리파, 눈부시게 아름답고 영향력이 막강한 그의 애처 셰이카 모자, 그들의 아들 타밈 왕자와 딸 마야사(포브스지는 그녀가 카타르의 화려하고 야심적인 미술관들을 운영한다고 지적하며 “예술계에서 가장 막강한 여성”이라고 평했다)가 핵심 인물들이다.
 

그들은 외무장관이자 총리인 사촌 하마드 빈 야심 빈 야브라 알 사니와 함께 미디어, 스포츠, 문화, 교육, 혁신, 외교, 비밀공작을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카타르는 이스라엘과 교역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하마스(이스라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를 지지한다.
 

2012년 10월에는 전례 없이 국왕 자신이 직접 가자 지구를 공식 방문했다. 알자지라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적으로 보도했지만 카타르는 미군 중부사령부가 들어설 수 있는 부지를 제공했다. 카타르 정부는 이란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도 자국 내 미국의 기지 설치를 허용했다.
 

재정위기에 처한 유럽에서는 카타르인들이 증권거래소부터 근로자들이 사는 교외 지역까지 모든 곳을 파고 들었다. 영국에선 해로즈 백화점, 슈퍼마켓 체인 세인스베리, 올림픽 빌리지, 런던 증권거래소 지분 15%를 인수했다. 독일에선 폴크스바겐, 포르쉐 등 주요 산업체에 투자했다.
 

프랑스에선 카타르인들이 유서 깊은 파리 루아얄 몽소 호텔, 칸의 마르티네즈 호텔을 인수해서 재개장했다. 프랑스 주식시장에도 거액을 투자해 이론상으로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CAC 40 주가지수(프랑스의 다우존스 지수에 해당한다)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다. 카타르의 영향력은 프랑스 정부의 최고 위층에서 잘 드러난다.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을 도와 리비아에 억류된 불가리아 간호사들을 석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2011년 프랑스가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는 전쟁을 지원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현 프랑스 대통령도 카타르와 매우 가깝다. 카타르는 올랑드의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해 프랑스 대도시 교외지역에서 빈민가 주택을 건설하는 중소기업들을 지원하는 재단에 자금을 댄다.
 

영국의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도 카타르인이 구단주인 파리 생제르맹 클럽에서 한 시즌을 뛰었다. 카타르는 미국, 한국, 호주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인기 대회인 2022년 월드컵 축구를 유치했다. 그러다가 중동에서 2011년 초 시작된 아랍의 봄 혁명 이후 카타르는 자금과 관심을 중동에 쏟아부었다. 파리 주재 카타르 대사인 알 쿠와리는 이렇게 말했다. “중동의 모두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카타르는 이 지역의 안정을 원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의 대가는 아직 미미하다. 독재자들이 중동을 지배했을 때 알자지라 방송은 독재에 반기를 든 대중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이 시작된 이후엔 무슬림형제단의 권력장악을 적극 지지했다. 그 때문에 시청자들은 알자지라가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기운다고 좌절했고, 유럽과 중동의 여러 간부들이 사표를 냈다.
 

2012년 알자지라를 떠난 베를린 특파원 아크탐 술리만은 이렇게 말했다.

 

직원들 모두 이건 저널리즘이 아니라 정치라고 판단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타르의 외교정책이다. 카타르 정부는 우방을 찬양하고 적을 공격하는 도구로 알자지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01. 다들 잠들다

02. 아 좋다 좋아

03. 다시 합창 합시다

04. 소주 만 병만 주소

05. 색갈은 짙은 갈색

06. 다 같은 것은 같다

07. 바로크는 크로바

08. 다 이뿐이뿐이다

09. 여보 안경 안보여

10. 통술집 술통

11. 짐 사이에 이사짐

12. 나가다 오나 나오다 가나

13. 다리 그리고 저고리 그리다

14. 소 있고 지게지고 있소

15. 다시 올 이월이 윤이월이올시다

16. 다 가져가다

17. 건조한 조건

18. 기특한 특기

19. 다 이심전심이다

20. 자 빨리 빨리 빨자

21. 자꾸만 꿈만 꾸자

22. 다 같은 금은 같다

23. 다 좋은 것은 좋다

24. 생선 사가는 가사선생

25. 여보게 저기 저게 보여

26. 다 큰 도라지일지라도 큰다

27. 대한 총기공사 공기총 한 대

28. 아들 딸이 다 컸다 이 딸들아

29. 지방상인 정부미 부정인상 방지

30. 가련하다 사장집 아들딸들아 집장사 다 하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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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들, 정작 본인의 몸에 이상을 느끼면 어떻게 할까.
 

1.

 

미국의 위장병학자 닉 리드 박사는 밤에 가스가 차서 배가 불룩해진 것을 없애기 위해오른쪽 아랫배를 가볍게 두드려준다. 가스가 들어 있는 대장 부분이다.
 

신경 쓸 일이 많을 때는 가급적 식사를 피한다. 스트레스가 위에 더 많은 위산을 분비하게 해 식도로 튀어오르면서 속쓰림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2.

 

영국의 면역학자 힐러리 롱거스트 박사코감기에 걸렸을때 자전거를 탄다. 가벼운 운동이 콧물을 없애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코가 막히면 호흡하면서 가슴 윗부분만 사용하게 되지만 운동을 하면 가슴 전체로 호흡을 해 상기도(上氣道)를 터주고 콧물을 내뱉거나 삼키게 한다.
 

그러나 열이 있을 때는 지칠 만큼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면역 체계가 병과 싸우는 데서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3.

 

물리치료사 새미 마고 박사발에 쥐가 나서 심한 통증을 겪을 때면 쭈그리고 앉아 엄지발가락을 자기 쪽으로 가능한 한 세게 당겨준다. 쥐가 풀어질 때까지15초씩 그렇게 반복한다.
 

4.

 

치의학 박사인 앤드루 에더 런던대 교수는 치아와 잇몸 보호를 위해 매일 두 번씩 이를 닦는다. 한 번은 일반 칫솔로, 또 한 번은 전동 칫솔로 한다. 치아 뒷면의 닿기 어려운 부분에 접근하는 데는 일반 칫솔이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5.

 

비만 상담가이자 영양사인 릭 밀러 박사는 체중이 올라가면 그걸 빼기 위해 식욕을 조절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면 칼로리와 지방이 낮은 간단한 음식을 먹지만, 정신적 음식 욕구일 경우엔 서둘러 다른 일을 찾아서 한다.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동적인 일은 하나 마나 소용없다. 특히 TV를 보는 것은 이래저래 역효과만 낸다며 절대 삼갈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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