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5,  2013

 

 

 

 

 

 

 

 

 

 

 

 

 

 

 

 

 

 

 

It's summer snow in the deep blue sea

I try to touch, but it fades away

It must be a dream I will never get

Just like my love that's crying for you

 

깊고 푸른 바다의 서머 스노우

만져보려 하지만 이내 사라져 버려요

가질 수 없는 꿈처럼

애타는 사랑처럼

 

If there were something

not to change forever

We could feel it deep in our heart

Today is over with a million tears

Still everyone has a wish to live

 

영원히 변치 않을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의 사랑 안에 있을

수없이 많은 눈물을 넘어서

여전히 우리 모두 살기를 바라고 있어

 

Oh, I do believe everlasting love

And destiny to meet you again

I feel a pain I can hardly stand

All I can do is loving you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어요

그리고 다시 만날 우리의 운명을요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랑하는 일 뿐이에요

 

It's summer snow in the deep blue sea

I try to touch, but it fades away

It must be a dream I will never get

Just like my love that's crying for you

 

깊고 푸른 바다의 서머 스노우

만져보려 하지만 이내 사라져 버려요

가질 수 없는 꿈처럼..

애타는 사랑처럼.. 

 

 

 

 

 

 

 

Sissel(시셀).....

1969년 6월 24일,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출생.

 "시셀"은 영어 식 발음으로 "시셀 슈샤바(Sissel Kirkjebo)" 이며 노르웨이 발음은 "교회의 언덕"이란 뜻의 "시슬 쉬르셰뵈"라고 발음한다고 합니다.

 

 "Summer snow"는 원래 영국의 전래 민요가 그 뿌리입니다.

 

 "피터 폴 엔 메리(Peter Paul & Mary)" 가 이 곡을 새롭게 편곡해서 "There is a ship" 이라는 제목으로 부른 적이 있고 "칼라 보노후 (Karla Bonoff)"가 "Water is wide"라는 곡으로 발표한바 있어서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지요.  제가 이 노래에 심취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가사로 부를 때였습니다.

 

그 후 "시셀"은 노래의 제목은 물론이고 가사까지 바꿔서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Summer snow"는 여름에 내리는 눈을 말하지만, "마린 스노우(marine snow)"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린 스노우"란 바다 속에 존재하는 생물의 사체, 껍질, 배설물 등이 분해 돼, 서로 뭉치면서 바다 속에 마치 눈이 내리듯이 떠 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노래 가사 중, "It's summer snow in the deep blue sea"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 현실에서 느끼기 힘든 어떤 환상의 세계를, 얻을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접목시켜서 상징적 표현으로 Summer Snow 라는 노래를 만들 것 같습니다.

 

전주곡을 듣는 순간 이미 왠지 모를 슬픈 감정에 젖어 들고 이어 It's summer snow 로 시작되는 Sissel의 청아한 목소리에 푹 빠져들어 그 어떤 환상에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천상(天上)의 가수 지셀(Sissel)의 앨범 [Summer Snow]에 수록되었고,  플루트의 달인 쟝피르의 연주와 어울러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언)  

 

 

 

 

 

 

 

 

 

 

 

 

 
 

 

 

 

 
 

 

 

 

 

 

 

 


내 골방의 커어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내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 십이월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 푸른 커어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새 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이육사 시인은 목가적인 필치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1904~1944).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본명은 원록(源祿), 자는 태경(台卿)이며 이명은 원삼(源三)이었으나 뒤에 활(活)로 바꾸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주요 작품으로 <절정>, <광야>, <청포도>, <교목> 등이 있으며, 1946년 유고 시집인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로스엔젤리스 남쪽 내가 사는 오렌지 카운티는 바다가 가까운 지역이다. 시뻘건 해가 태평양 저편으로 풍덩 빠지는 정경을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헌데 올 해도 한 해가 반 토막이나 뚝 부러져 나갔는데도 태평양 저편으로 사라지는 태양을 향해 손 한번 저어보지 못했다.

그렇다. 분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주함의 중요한 슬픔은 황혼을 제대로 볼 겨를이 없다는 점이다.

 

이육사는 골방에서 시를 쓰다가 노을을 만났다. 붉은 빛 줄기가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느낌을 그는 키스처럼 생각했다. 태양과 입맞춘 사나이는, 입술 위의 따스한 온기를 어딘가에 보내고자 하였다.

지구의 모든 곳에 있는, 괴로운 자, 외로운 자, 슬픈 자, 지친 자들에게, 노을 한 점을 보내, 위로하고 싶어했다.

 

평생 식민지를 살다간 서럽던 시인이, 지금 분주함의 슬픔에 잠겨있는 내게도 황혼의 키스를 나눠주고 있는 셈이다. 따스하다.(언) 

 

 

 

 

 

 

 

 

 

 

 

 

 

 

 

 

 

 

 

 

 

 

 

 

 

 

누구나 인정하고 거부할 수 없는 리얼리티 사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프랑스어: Henri Cartier-Bresson, 1908년 8월 22일 - 2004년 8월 3일)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사진작가입니다.

현대 사진에 큰 영향을 준 작가로, 보도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상적인 리얼리티를 잘 반영하고 절묘하게 순간을 잡아내는 '결정적 순간'으로 알려진 그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하며, 1947년 헝가리의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등과 함께 보도사진 작가그룹인 매그넘 포토스를 세웠습니다.

 

라이카(leica)사진 기술의 대표적인 거장이기도하고요. 1947년 '브레송사진집' 을 시작으로 여러 작품집을 출간하였고, 세계 곳곳에서 작품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2005년 5월 21일부터 7월 17일까지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찰나의 거장전'이라는 이름으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작품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달리면서 찍는 사진"이라는 프랑스 사진집이 미국에서는 "결정적 순간"으로 번역되었고 결정적 사진하면 떠오르는 사진가가 된 카르티에 브레송...

 

2004년 그가 사망했을 때 전세계 사진계와 프랑스는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참 오래 사셨습니다. 그 때 당시...  90살이 넘어서 까지 사셨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카메라를 들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셨지요.

 

사진깜이 아닌 것을 찍었던 브레송, 그가 있었기에 평범함을 복제하는 시대가 되었고 일상의 반짝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아이들이 기적을 찾기 위해서 일탈의 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일상의 보석이었던 것처럼 브레송은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가는 그 길과 거리에 보석이 있다고 말해준 사진작가입니다.

 

거창하게 저 멀리 떠나서 사진에 담을 보석을 찾지 말고 우리의 일상에서 반짝거림을 찍어보라고 조언하는 것 같습니다.

 

그 반짝거림은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걸으면서 관찰하고 관찰하며 걷고 느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브레송과 같은 사진 한번 찍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사진 몇 장을 나의 앨범에 올려봅니다.(언)

 

 

 

 

 

 

 

 

너무나도 유명해서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지요.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완벽한 구도와 대비, 리듬감 때문입니다.

1932년 생 라자르 역 뒤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물위를 점프로 건너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빗물이 고인 바닥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진 같기도 하지만 이 포즈는 저 뒤쪽 철망 벽에 있는 포스터의 포즈와 비슷합니다. 우연한 일치일까요?
 

아마 제가 찍었다면 우연의 일치였겠죠. 하지만 브레송은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계산하고 기다렸습니다. 라이카 카메라를 꺼내 들고 저 사람이 점프할 것을 예상하며 숨죽이며 기다렸고 그 결정적 순간을 촬영 했습니다.

사진은 찰나의 예술이라고 하지요. 그 찰나의 예술을 미학으로 발전시킨 분이 바로 브레송입니다.

 

위 사진은 브레송 사진의 특징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역동성과 일상성 그리고 훌륭한 대비와 조화가 함께 공존 합니다.

 

 

 

이 사진을 보세요... 브레송 사진의 특징 중 하는 일상성입니다. 그는 남들이 추종하는 스타나 유명인을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평범한 일상 중 반짝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는 남자아이의 당당함을 그는 순간적으로 담았습니다. 그냥 평범한 포도주 심부름이지만 저 아이의 표정에서는 심부름도 할 줄 아는 자랑스러움이 묻어 납니다.

 

 

 

 

브레송의 사진은 일상성에서 반짝이는 장면들이 녹아져 있는데요. 위 사진을 보면 두 남녀가 테이블 사이에서 키스를 합니다. 아주 사랑스러운 장면이죠. 이 사진이 그것으로 끝났다면 소녀취향의 사진으로 끝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밑에 있는 강아지가 그 모습을 질투하는 듯 쳐다보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요.

 

그의 작품은 시선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그게 또 하나의 매력입니다. 이런 일상성을 위해서 그는 그 지역 사람들과 동화되기 위해서 항상 이등칸을 타고 다녔으며 싸구려 호텔에서 싼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브레송 사진의 특징 중 하나는 정적인 이미지 속에서 꼭 하나의 피사체는 움직임을 담습니다. 위 사진은 뉴욕의 사무실에 한 여비서가 그의 상관의 사무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여자의 다리 한쪽이 움직이는 모습을 찍어 역동적인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정적인 우리의 이미지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사진 안 찍으세요?' '아까 찍었습니다'

 

브레송은 유명 예술인들 사진을 찍을 때 포즈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요. 카메라를 들면 모델이 움찔 하기에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배려를 했습니다

'사진 안 찍으세요?' '아까 찍었습니다'

모델이 사진 찍힌 줄도 모르게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를 들고 모델을 찍은 후 카메라를 내려 놓습니다.(언) 

 

 

 

 

 

 

 

 

 

 

 

 

 

 

 

 

 

 

 

 

 

 

 

 

경험론 철학을 시작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적 판단에 장애가 되는 위험 요소를 '정신의 우상(偶像)'(이돌라-idola)이라는 비유를 통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상(偶像)이란 것은 환상(幻想)과 같은 것으로 마치 고르지 못한 면을 가진 거울과 같아 영혼의 빛을 왜곡시키고 거짓되며 편향된 사고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종족(種族)우상

 

우선, '종족의 우상'은 모든 종족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감각기관이 사물의 척도인 것으로 착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베이컨의 생각이지요.

감각을 무작정 신뢰하는 종족의 우상에 사로잡혀 행성의 궤도가 원형이라고 단순하게 믿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사물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의 지성은 그 사물이나 대상이 만들어 내는 두려움, 희망 등 여러 가지 감정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굴(洞窟) 우상

 

두 번째, '동굴의 우상'이란 플라톤의 동굴과 비유한 비슷한 것입니다 .이 우상의 출발은 여러 개인들입니다. 여러 개인들은 모두 제각기 자신의 판단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읽은 책의 내용, 지적 취향은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기에 저마다 자신의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동굴에서 빠져 나오는 것, 즉 주관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시장(市場)우상

 

세 번째, '시장의 우상'은 언어의 문제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입니다. 시장이란 교환과 소통을 의미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공통 언어란 일상생활에서는 유용한 것이지만 엄밀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철학자들조차도 이 우상의 덫에 걸리고 맙니다. 마치 그 언어에 해당하는 실재가 있다고 믿기 십상인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용'이라는 말은 어떠한 실재도 가리키지 않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말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가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개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베이컨의 생각입니다. 제1질료나 형상과 같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이러한 시장의 우상에 해당하는 오류의 경향인 것입니다.

 

극장(劇場) 우상(偶像)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무엇인가...

극적인 것으로 장식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철학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극적인 구성을 통하여 가공의 체계를 묘사한 철학 논문들은 이러한 극장의 우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베이컨은 체계적 독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럴듯한 연극이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갖추고 있어서 마치 실제의 상황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의 체계도 가공된 진실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래 만에 철학자의 글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언)  

 

 

 

 

 

 

 

 

 

 

 

 

 

 

 

 

 

 

 

 

일본 교토에서는 해마다 4월 셋째 주에는 <오하라메 마쓰리>라는 것을 한다.

오하라 나뭇단장수처럼 나무 단과 깡총한 하오리 옷을 입고 바로 그 오하라 여자들이 걷던 길을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걸어보는 축제이다.

 

참가비는 2천엔. 그 옛날,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고생하던 어머니들을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이 축제의 유래는 이러하다.

여자들은 아침에 죽 한 그릇을 떠 먹고 오전 내내 걸어 교토에 도착한다. 그리고 교토의 장을 찾아 거기서 나무를 판다. 나무 한 단이라야 요즘 돈으로 불과 몇 천 원, 여자들은 그 몇 천 원의 돈으로 보리 한 홉을 사서 다시 오하라로 돌아간다. 오후 내내 걸어야 해가 질 때쯤 오하라에 도착할 수 있다.

 

오하라 마을엔 어린 자식들이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의 보리 한 홉이 있어야 그 날 저녁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하라의 여자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보리죽 한 그릇을 먹고 점심을 건너뛴 발걸음은 천근 만근이다.

 

오하라로 나가는 쿄토의 데마치 거리에 떡집이 있다. 오하라의 여자는 망설이고 망설이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도저히 오하라까지 걸어갈 기운이 없다. 눈앞에 자식들의 얼굴이 어른거리지만, 떡이라도 한 개 사먹지 않으면 기진맥진해서 도저히 집까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여자는 콩떡 하나를 사 먹는다.

 

옷차림은 거지나 진배없이 더럽고, 게다가 장작을 머리에 이고 오느라 땀냄새가 풀풀 난다. 동전 한 푼을 주저주저하면서 꺼내어 콩떡 하나를 사서 입에 문다. 떡집 주인은 행색이 너무나 초라한 여자들에게 떡을 팔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떡을 팔지 않았다. 그러나 곧 이들이 오하라 마을의 나뭇단 장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여자들이 내민 동전 한 푼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눈치챈 것이다. 그 후부터 떡집 주인은 오하라 여자들이 사 먹는 콩떡은 좀더 크고 실하게 만들었다.

 

 


 

쿄토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오하라(大原)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인근의 쿠라마산(鞍馬山)이 귀기(鬼氣) 충만한 일본의 전형적인 산이라면, 오하라는 우리네 시골 마을 연상케 하는 정겨움이 묻어나는 소박한 산골이다. 동네가 땅 뙤기도 얼마 되지 않으니 아닌 게 아니라 예전에는 참 먹고 살기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는 그런 두메 산골이라고 다.

 

 

 

 떡집 주인은 오하라여자들이 사먹는 콩떡을

좀 더 크고 실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리고 <낱개도 팝니다>라고 써 붙였다.

 

비록 단 한 개의 떡을 팔아주는 고객이지만

그들을 없이 여겼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찮은 액수의 손님이라도 소홀히 하지 마라.

그들의 동전 한 잎이 얼마나 힘들게 번 것인가를 생각하라.

손님을 차별하지 하라.

오늘 돈이 없다고 내일도 돈이 없다는 보장이 있는가.>

 

일본의 상인(商人)들은 그런 사실을

오하라메의 나뭇단 장수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을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

 

오늘날 오하라메라는 콩떡은 교토의 명물이 되었지만,

그 콩떡 속에 숨어있는 사연을 일본 과자(菓子)장인들은 알고 있기에

일본의 과자가게에서는 단 한 개의 과자를 사는 고객이라도

정성껏 그 한 개의 과자를 포장해 준다고 한다.

오하라여자들의 콩떡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토 오하라메 마쓰리-축제 ....  이런 사연을 가지고

매년 지켜지고 있다.

참 좋은 축제라고 생각된다.(언) 

 

 

 

 

 

 

 

 

 

 

 

아래로 내려가시면 특집으로 다룬 칼럼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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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4천960명이었습니다.

 

비전통신 발전을 위해 헌금하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름

헌금(8월)

KJB

J.L. Park

S.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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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 Chu

F. Chang

S.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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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Pae

K. Berkley

Mr. Sim

SY Kim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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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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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388.00

B.S. Hwang

5000명분

발송비 부담(한국)

 

 

 

 

 

 

 

 

 

보내주신 헌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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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분들께 전할 수 있는

귀한 밑거름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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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1. 외부에 의한 성형

 

요즘 성형이 많이 발달되어 있는데 적당하게 자신이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성형을 하는 것 자체는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전면 보수작업을 해서 예전하고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면 곤란하지만 신체 일부에 컴플렉스를 느끼는 부분이 분명이 있습니다. 그부분이 과학으로 안되는 것이라면 할수 없지만 혹시 될 가능성이 있다면 살짝 터치를 해서 자신의 인상을 바꿀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면 그런 노력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지나치게 너무 많이 고치려해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곤란하지만...

 

2. 자신에게 맞는 코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바꾸는 방법중에 하나가 헤어스타일, 안경, 옷의 색깔 그리고 어떤 칼라에 매치를 해서 발끝까지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느낌이 다릅니다. 한 실험을 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놓고 헝클어진 머리에 막된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정장을 하고 사진을 찍어 놓고 살인자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고르라고 했더니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을 험난하게 입은 사람을 더 많은 사람이 골랐다는 재미있는 실험결과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얼마만큼 청결하고 단정하고 자기에게 맞는 코디를 연출하느냐가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험결과입니다.

 

3. 심상을 끌어올리는 노력

 

외부를 고치는 노력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마음의 근본적인 자세를 고치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인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입고 코디를 잘했어도 마음이 바르 않으면 상대방이 그것을 겉으로 느낀다는 겁니다. 집에서 강아지를 길러보면 주인이 화가 나면 강아지들이 금새압니다. 심기가 불편하면 금방 알아차립니다. 대화를 나누지 않은 동물도 아는데 사람이 상대방을 쳐다보면서 마음이 어느상태에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겉을 예쁘게만 꾸몄다고 해서 감춰지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반드시 마음을 다스려 심상을 고치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참고한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석학(碩學)들에게 1등 인생을 만드는 말(단어)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설문을 했더니만 "태도"(Attitude)가 1위에 꼽혔다.

태도가 1등 인생을 만들어준다는 말이다.

 

이태리에 베르톨도 디 지오반니(Bertoldo di Giovanni)란 조각가가 있다. 그는 당시 가장 위대한 조각가인 도나텔로(Donatello)의 제자였고, 동시에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미켈란젤로가 14세에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려고 베르톨도에게 갔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미 조각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베르톨도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자칫 자만에 빠져 재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미켈란젤로를 오직 예술에만 전념하도록 엄하게 교육했다.
 

어느 날, 베르톨도가 작업실로 왔을 때 미켈란젤로가 천박한 장난감과 같은 것을 조각하는 것을 봤다. 그때 베르톨도는 망치로 그 장난감 같은 조각품을 쳐서 산산조각 내며 소리질렀다. “미켈란젤로! 재능은 값싼 것이고, 헌신은 값비싼 것이야!(Michelangelo, talent is cheap; dedication is costly!)”
 

헌신이란 자기 사명에 전력하는 것이다. 에디슨은 실험에 몰입하다 결혼식 날을 잊어 뒤늦게 결혼할 정도로 자기 일에 전력해 발명왕이 되었다. 강철왕 카네기는 말했다. “성공의 비결이 따로 없다. 자기가 선택한 일에 전력하는 것이 성공 비결이다.”
 

그러고 보면 재능이나 IQ보다 태도가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하든 탁월함을 보여주는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전력투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작정 열심히 뛰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시간관리의 설계라고 생각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재산]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가 결정된다. 24시간을 어떻게 요리하여 25시간을 만드느냐는 자신의 기술과 노력에 달렸다.

 

사람의 삶을 평균 80년(내가 짐작하는 수명은 따로 있지만)으로 보고 시간을 계산하면 우리에겐 70만 시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 여기서 다시 하루 7시간, 주말과 휴일을 제외하고 40년을 일한다고 가정했을 때 모두 7만 시간 동안 일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한평생의 시간 중 10%를 일하는 셈이다. 일단 이 10%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애가 결정된다.
 

미국에서 성공한 5명의 여성 CEO를 불러놓고 그들에게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을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놀 때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한, 강도 높은 업무량(Hard Work)에 있다”고 대답했다.

운동선수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연습량을 늘릴 수밖에 없고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읽고 쓰는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60대의 당신 모습에서 시작하라. 이것은 [인터넷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 손정의씨의 말이다. 소프트뱅크를 설립하고 야후를 비롯한 수많은 인터넷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거부지만 그의 성공 뒤에 숨은 노력은 그 시작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끝을 보며 앞날을 설계한 인물이다. 19세 때 만들었다는 ‘인생 50년 계획서’에는 이미 60대의 손정의 모습이 들어있다.
 

“.....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사업을 완성한다(매상고 연 1조 엔). 60대에 다음 세대에 사업을 물려준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는 자기 인생의 끝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지 분명한 상을 세웠기 때문에 그의 노력은 이미 정해진 미래상을 완성하기 위한 준비된 과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도달해야 할 끝이 분명했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했고 또 그것을 이루어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게는 틀린 말처럼 들린다. 일단 시작하고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으로 시작하면 그 길은 바로 실패의 길이다. 만약 목표가 분명하게 설정이 안 된다면 빨리 나의 60대 모습(손정의)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나는 60대에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바로 그것이 내 일기장의 첫 장을 장식하는 원대한 목표가 되게 했으면 좋을 것 같다.
 

둘째, 자기 계발을 위한 투자 설계이다.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한 기업체의 발전이 R&D(연구비)투자와 비례하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의 발전을 위해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입의 얼마를 떼어내 배우거나 보거나 체험하거나 하는 일에 투자해야 하고, 각종 정보의 수집, 분석, 가공을 하면서 독서량도 늘려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자기 발전을 위해 무엇을 어디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지 패배의 길을 달리고 있는지 답이 나올 것이다.

 

셋째는, 영적 성숙에 관한 설계이다.

 

성경 잠언에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는 말씀이 있다.

성공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내가 이루었다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그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 계발을 이룰 수 있을까? 이것에 관한 설계가 있어야 한다.

다윗은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고 했다. 이 말은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과 모든 일을 의논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루를 연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그러나 성숙한 자녀는 엄마 아빠의 심중을 헤아려 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

것이 진짜 성공의 기틀이 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다.(장재언) 

 

 

 

 

 

 

 

 

 

 

 

 

 

 

 

 

 

 

 

 

 

 

 

 

지금 대한민국은 개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개들을 위해 고가의 미용실 서비스는 기본이고 개들을 위해 영양제, 앙증맞은 옷, 심지어는 껌도 있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우리를 내다 보는 것은 핑크빛 염색으로 온갖 치장을 한 아름다운 강아지들입니다.

 

 

개들이 묵는 고가의 호텔, 유산 상속은 먼 이웃나라의 일로만 여기던 일이 이제는 한국의 이웃집에서도 벌어지게 생겼습니다.
 

심지어 자기집 개를 걷어 찼다고 따라가서 사람을 죽여 버리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소방관의 구조 활동 업무 1위가 동물 구조입니다.

며칠 전 신문 내용입니다.

 

소방관의 구조 활동에 관한 소방방재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동물 구조 건수가 매해 크게 늘어났다. 2006년 1만6932건이던 동물 구조는 2007년 2만6254건, 2008년 3만9051건, 2009년 7만3038건, 2010년 10만7221건으로 늘었다. 5년 새 6.3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특히 소방관의 동물구조 건수는 화재진압, 교통사고 구조, 자연재해 복구 활동 등을 제치고 2007년 이후 매해 구조건수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는 전체 구조 28만1743건 중

동물구조가 1위를 유지했고,

화재진압이 3만104건으로 2위,

닫힌 문 열어주기가 2만6633건으로 3위,

교통사고 구조가 2만6546건으로 4위를 기록했다......

 

 

 

이 비참한 사진의 유기견

 

한편 한국 사회에 유기견 방치가 날로 늘고 있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애완견을 지나치게 예우(?)하는 것도 문제이고 길거리에 버려지는 유기견은 날로 늘어 날 뿐 아니라 동물학대가 날로 잔인해져 가는 것 또한 커다란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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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온을 선사합니다.

 

 

 

 

 

 

 

 

 

 

 

 

 

자료칼럼 : 긴 글입니다.

 

 

 

 

 

1. 야샤 하이페츠(1902∼1987)
 

하이페츠. 푸르트벵글러, 호로비츠 등과 함께 한 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전설로 남은 그는 누구인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겐, 아니 모든 연주가들에게 있어 그의 이름은 ‘강박관념’이라는 단어에 다름아니다. 그의 연주는 한마디로 인류 역사상 겨우 몇몇만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처절하리만치 철저한 테크닉으로 악보 속의 모든 음표를 하나 빠뜨림없이 영롱하게 악보 밖으로 뿜어내는 정교함. 폭넓은 표현과 탁월한 균형감각. 작곡가의 무의식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통찰력. 강력한 운궁과 강렬한 비브라토. 자유자재의 템포 조절력. 그리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 ‘신이 빚은 바이올리니트’로 통할 만큼 완벽한 그의 연주를 접하고 나면 ‘보통 연주가’들은 피터 셰퍼가 문학 속에 살려낸 ‘살리에리’라는 캐릭터를 뼈저리게 이해하게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완벽성이 전적으로 천재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 러시아의 빌나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바이올린을 손에 잡았다. 이후로 전개된 83년간의 사투. 그 과정에서 그는 ‘완벽의 문’을 두드린 몇 안되는 인간으로, ‘승자’라기보다는 ‘초인’으로 남게 된 것이다.
 

6세 때 처음 공개 연주회를 가진 그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9세때 레오폴드 아우어 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가 아우어에게 배운 것은 얼마되지 않지만 만일 그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전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이페츠 자신도 살아 생전에 인정한 바였다.
 

2년 뒤인 1912년,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 무대에서 그는 전설의 시작을 세상에 공표했다. 이듬해 라이프치히에서 브루흐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그를 본 당대 최고의 거장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린을 박살내고 싶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이어졌다. 이렇게 유럽 각지에서 천재를 과시하던 그는 혁명전야의 위기감이 감돌던 1917년, 공교롭게도 시베리아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역사는 1917년 10월 27일의 하이페츠의 카네기홀 데뷔무대를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11월 7일. 결국 하이페츠는 그대로 미국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가 혁명의 와중에 정당한 활동영역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미국에 도착한 후 하이페츠는 1년 동안 뉴욕에서만 30회의 공연을 기록했다. 그가 발산하는 비르투오시티에 노출된 청중들은 하이페츠란 이름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치명적인 조건반사를 경험했다. 19세 되던 1920년, 런던 데뷔 연주회를 본 버나드 쇼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제발 잠들기 전, 기도 대신 아무 곡이나 서툴게 연주하라.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게 신처럼 완벽하게 연주하다간 자칫 하느님의 시기로 요절할지도 모른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다.
 

20대에 이미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그는 192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1940년에는 비버리 힐스에 평생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사이 그는 “우리는 모든 것을 하이페츠에게 빚졌다”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바이올린 연주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그의 존재 이후 그동안 ‘19세기의 것’이던 연주 스타일은 ‘20세기의 것’으로 변했다. 많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그저 그의 존재로 인해 다친 것도 사실이다. 1940년대와 50년대를 통해 절정에 이른 연주를 들려준 그는 1960년대 들어서는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점점 연주를 줄인 그는 1972년, 마지막 공개 연주회를 갖고 은퇴했다. 1987년, 정말 매일 밤 일부러 엉터리 연주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수한 그는 비로서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RCA에서 내놓은 65장의 방대한 하이페츠 전집은 1917년부터 72년 마지막 연주회 실황까지 하이페츠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협주곡과 실내악, 소품 등을 망라하는 전집으로 최근에는 낱장으로도 발매되었다.
 

2.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
 

다비드오이스트라흐는 살아 생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이페츠에 버금가는 ‘2인자’이기만 했을까. 지난 96년 3월호 ‘객석’의 집중탐구기사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세계’를 보면, 음반부분에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을 역시 평론가와 칼럼니스트의 투표로 선정한 것을 볼 수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으로는 샤를르 뮌슈 지휘, 하이페츠 연주의 것(보스턴 심포니, rca)이 선정되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오이스트라흐(클뤼탕스-프랑스 국립방송향, emi)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도 역시 하이페츠의 연주(라이너-시카고 심포니, rca)가 오이스트라흐(오먼디-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cbs)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람스 협주곡에서는 하이페츠가 아닌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콘드라신-필하모니아, emi)가 명반으로 선정되었고, 오이스트라흐(클렘페러-프랑스 국립방송향)는 그 다음이었다. 이들 모두는 다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음반들이지만 오이스트라흐는 불행히도 어느 하나에서건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엔 협주곡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선 아직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만한 것을 찾아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오이스트라흐는 하이페츠같이 완벽하진 않았으나, 그 연주의 완숙도 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이페츠의 연주는 ‘너무 완벽해 차갑다’는 평을 자주 들었으나 오이스트라흐는 그 반대로 ‘따뜻한 인간미가 넘친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위에서 말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연주도 하이페츠의 것을 ‘불타는 빙산’에 비유한다면 오이스트라흐의 것은 ‘얼음기둥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헤엄쳐 다니는 금빛 물고기’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는 내향적·사념적이고 절제미가 돋보이며, 폭넓은 레가토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이페츠의 연주 특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지만 모든 면에서 하이페츠에 뒤지는 오이스트라흐의 변호를 위해 누군가 지어내준 것은 절대 아니다. 음악은 언제나 치열하고 숨가쁘게 몰아붙여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스트라흐의 미덕은 나름대로 장점을 발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오데사 태생의 오이스트라흐는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가 아니었다. 어린시절 오데사 음악원의 또 다른 명교수 스톨리알스키에게 배운 그는 아우어파와는 다른 러시아 바이올린 인맥을 형성했다. 물론 테크닉은 하이페츠를 제외한다면 최고의 수준이었다.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 2위, 1937년 이자이 국제 콩쿠르 우승 등으로 구소련 밖으로 알려졌고, 길렐스의 경우와 비슷하게 구소련이 정책적으로 서구에 소개하는 연주가로 지목되어 많은 혜택을 누렸다.
 

레프 오보린과 리히테르와의 2중주를 중심으로 한 실내악 활동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져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만년에는 지휘대에도 서는 모습을 보였으나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오히려 교육분야에선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크레머와 올레그 카간 등이 그가 길러낸 제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는 그의 아들.


 

3. 아르투르 그뤼미오(1921∼1986)
 

그뤼미오는 정통 프랑코-벨기에 악파 계보의 큰 줄기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는 인물이다. 벨기에에서 태어났고, 일찍부터 천재의 기질을 보여 12세의 나이로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알프레드 뒤부아를 만났는데, 그는 역시 벨기에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의 제자였다. 1936년 파리로 가 조르주 에네스쿠에게 배웠는데, 그도 또한 이자이의 제자였다. 이자이는 비외탕의 제자였다. 여기까지가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주류를 이루는 사제 관계다.
 

비외탕-이자이-에네스쿠 세 사람은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다. 미리 말하자면, 그뤼미오에게 배운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적자는 오귀스탱 뒤메이다. 지극히 상업화된 20세기 후반까지 이렇게 정확히 한줄기로 이어지는 악파나 인맥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네들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이야말로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뤼미오가 유난히 하이페츠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그뤼미오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22세 되던 1943년에야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그리고 바로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 이어졌고,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949년 스승 뒤부아가 세상을 떠나자 브뤼셀 왕립음악원은 그 뒤를 이을 교수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로 그뤼미오를 지목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아직 20대였다. 그로부터 세상을 떠난 86년까지, 그뤼미오는 전통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50년대 들어 클라라 하스킬과 듀오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의 음악 스타일은 너무나 완벽히 들어맞았다. 이 두 사람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의 연주(필립스)는 이 분야에서는 전설적인 명연으로 남았다.
 

물론 낭만주의 협주곡들을 녹음해 남기기도 했지만 그뤼미오의 연주는 후기 바로크에서 고전주의에 걸친 레퍼토리, 그것도 특히 실내악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뤼미오의 연주들은 조금 빠른 듯한 템포설정 속에서 유려함과 우아함을 빚어내는 세련미를 발하는 것이다. 거기에 균형감과 양식감이 잘 갖추어진 느낌을 주는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낭만에서 현대를 거치며 무르익은 연주법을 제대로 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부각되고 있는 원전 연주가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런 특징은 더욱 명확히 살아날 것이다. 이들에 비한다면 훨씬 강건하고 명확하며 거추장스런 장식들을 배제한 것으로, 듣는 이들에게 곁가지보다는 구조적 핵심에 치중하게 한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의 경우(필립스), 그뤼미오의 연주는 바흐적이라기 보다 훨씬 모차르트적이다. 텔레만의 12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환상곡(필립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다. 바로크적이라기보다 고전적인 취향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더 듣기 편하다고 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단지 취향의 문제일뿐이다.
 

4.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
 

‘크라이슬러’라 하면 왠지 ‘아주 옛날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크라이슬러 작곡의 ‘사랑의 기쁨’이나 ‘사랑의 슬픔’은 너무나 낭만적이고 분위기 있는 소품들이라 그가 도무지 20세기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분명히 19세기에 26년을 살았고, 20세기에 61년을 살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의 선천적인 ‘빈 기질’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신동이던 그는 7세의 나이로 빈 음악원에 최연소 입학해 헬메스베르거에게 바이올린을, 브루크너에게 이론을 배웠다. 10세 때 파리 음악원으로 옮겨 마사르에게 바이올린을, 들리브에게 작곡을 배운 그는 12세의 나이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이듬해 미국 순회 공연을 갖고 돌아와 그로부터 약 10년간은 의학을 공부하고, 군 복무도 하느라 음악과 잠시 멀어졌다. 1898년 빈 필에 입단했고, 이듬해 니키쉬 지휘의 빈 필과 협연해 성공을 거둔 후, 50년 가까이 당대 최고의 스타 연주가의 지위를 누렸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다 부상당하기도 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자 치를 떨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교통사고로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는 불행을 당했다. 하지만 1947년 카네기홀 은퇴 연주회로 무대에서 물러날 때까지 성실히 연주에 임했다.
 

그의 스타일은 지금 들어보면 너무나 고풍스런 것이다. 이미 1백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탓이다. 그의 가장 기교적인 작품에 쓰인 어려운 기교들도 사라사테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과정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크라이슬러가 하이페츠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12년이다. 당시 함께 자리했던 짐발리스트는 크라이슬러의 농담이 진담이 되어 ‘하이페츠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태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는 전쟁중에 부상당하면서도 연주가로 살아남았다. 이는 크라이슬러도 젊은 시절 만만찮은 기교파였음을 증명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무대 위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1947년 은퇴한 후로도 따뜻한 인품으로 친근감을 주는 명사로서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19세기 빈 풍의 전인적 인간형으로 교양인이자 신사였다는 점은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소품일지언정 작곡을 했다는 것도 하이페츠에 대한 열등감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패였을 것이다.

 

 

 

 



 

5. 예후디 메뉴인(1916∼ )
 

메뉴인은 미국이 유럽으로 수출한 음악가로서는 초유의 인물이다. 뉴욕에서 유태인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7세 때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8세 때 독주회를 가진 당대의 대표적인 ‘신동’이었다. 그는 요즘으로 치자면 ‘영재교육’을 위해 9세의 나이로 에네스쿠 밑에서 배우기 위해 파리로 유학했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그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의 ‘신동’들에게 보내는 반응보다 더욱 열광적인 것이었다 전한다.
 

이러한 ‘신동 신드롬‘은 물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완벽한 기교와 성숙한 음악적 표현력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메뉴인의 유년기의 신체 성장속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다는 점이다. 10세 때도 아직 ‘꼬마’로밖에 안 보였고, 10대 중반까지도 귀공자의 이미지를 간직했던 그다.
 

1932년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녹음했다. 그리고 그는 인기절정에서 20대를 맞이했다. 그의 ‘신동 신드롬’은 약효가 떨어져 갔고 1940년대 초반에는 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500회 이상의 전시 위문공연과 첫 아내와의 결별 등이 겹치며 메뉴인은 심각한 상태까지 갔으나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프리마 돈나 다이아나와의 재혼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전후 푸르트벵글러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인연으로 그는 다시 솔리스트로서도 정상을 찾아갔다. 당시의 녹음인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emi)은 명반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는 바이올린에 머무르지 못했다. ‘신동시대’ 이후 그의 연주는 다른 대가급 연주가들과 비교해 약간 낮은 수준에서 연주 평균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메뉴인 자신도 이를 자각한 듯 자꾸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리려 했고, 한때 그는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60년대 들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됐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지나친 자학이었고, 때이른 포기였다. 그가 바이올리니스트로 남긴 레코딩 유산만도 엄청난 것이었고, 하이페츠도 이미 한물가기 시작한 입장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는 순도 높은 스타일로 해석의 깊이와 힘을 느끼게 하는 연주를 들려주었었다. 지휘 분야에서 확실한 돌파구를 찾으려던 그는 점차 지휘 횟수를 늘려갔으나 이 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젊은 음악가들과의 교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는, 타고난 음악교사로서의 자질을 살리며 돌파구를 찾았다. 1963년에 메뉴인 음악학교를 설립해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세계의 민속음악을 서구의 청중들에게 전하는 물꼬를 튼 것도 그였다. 시타르의 달인, 라비 샹카르의 인도음악에 탐닉한 나머지 그는 요가수행법을 배웠다. 82년의 베를린 필 1백주년 기념 연주회의 지휘대에 선 그는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요가 지휘’를 선보이기도 했다. 얼마 전 타계한 재즈 바이올린계의 명인, 스테판 그라펠리와의 공동작업에 의한 레코딩 역시 선구적 크로스오버로 기록됐다.
 

메뉴인은 최근에는 로열 필하모닉의 명예지휘자로서 세계에 음악을 전파하는 ‘음악전도사’로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95년 가을 내한했을 당시 지휘자로서의 모습을 선보이기도 한 그다.

 

6. 헨릭 셰링(1918∼1988)
 

셰링의 연주를 보면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웬만한 연주가들이 공들여 연주할 것을 그는 전혀 어렵지 않게, 마치 부담없이 연습이라도 하는 양 연주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음악은 경탄스러울 만큼 견고하고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감정의 커다란 기복없이, 평탄하고 덤덤하게 끌고 나가는 듯하면서도 전체의 구도는 완벽하게 잡혀 있다.
 

감정과 기교의 조절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 탄탄한 안정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또 항상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도 전체의 구도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시각을 지닌 것이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셰링은 수업기에 후베르만과 칼 플레쉬, 그리고 자크 티보로부터 직접 배우거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모두 위대한 교육자들로 이름 높았던 이들이다. 이들 셋의 장점을 모두 흡수해 내면에 동화시키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이끌어내는 노력도, 시간도 충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로도 당시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멕시코에서 가르치며 한동안 화려함 따위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정진했기 때문이다.
 

1956년 연주여행중이던 루빈슈타인이 그를 보고 당장에 자신의 실내악 파트너로 삼았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베토벤과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rca)은 완성도 높은 귀중한 자료다. 그리고 루빈슈타인은 셰링을 세계 각지에 헌신적으로 소개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연주의 완성도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가 언제 그렇게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깊었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하잘것없는 콩쿠르 입상 경력 하나 없고, 초절기교를 드날리던 젊은 시절도 없었으며, 변변한 레코딩 하나 없었다.
 

최근에 아를레키노 레이블을 통해 소개되는 그의 젊은 시절 녹음들은 협주곡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가 실은 남 못지않은 연주력의 소유자였고,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균형감과 남다른 조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이렇게 세계에 소개되어 나가자 그의 연주는 높은 평가를 얻게 된다. 특히 음반을 통할 경우 그의 안정감있고 정확하며 전체적인 흔들림없는 연주는 더욱 빛나게 된다. 또한 초절기교를 요하는 곡들과는 거리가 먼,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아주 드문 존재로서 인식되었다. 그의 이러한 면을 잘 보여주는 명반은 뭐니뭐니 해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dg)다.
 

7.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밀슈타인의 고향은 러시아의 오데사다. 바로 위에서 소개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20세기 초의 위대한 음악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두 사람 외에 길렐스와 체르카스키, 코간 정도라면 이에 대한 이견은 없을 것이다.
 

밀슈타인도 오이스트라흐와 마찬가지로 오데사 음악원에서 스톨리알스키에게 사사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우어에게 배우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세 살 위인 하이페츠가 이미 와서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머문 것은 잠깐일 뿐이다. 하이페츠는 혁명 전에 러시아를 빠져나갔고, 밀슈타인은 혁명 이후에도 남게 되었다.
 

1920년경 호로비츠를 만났다. 호로비츠가 그의 공연을 보러 찾아왔던 것이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켜나갔다. 1925년, 둘은 함께 묶여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었다. 이로써 이들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첼로의 피아티고르스키도 합류했다.
 

밀슈타인이 서방으로 망명해 연주활동을 시작할 당시 하이페츠는 이미 자리를 확고히 잡고 센세이션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태양과 같은 그의 강렬한 빛에 엘만, 후베르만, 시게티, 티보, 부쉬 등의 1등성들조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원로인 크라이슬러와 신성인 메뉴인만이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하물며 밀슈타인 같은 햇병아리 바이올리니스트야 두말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 기교로서 하이페츠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밀슈타인이 유일했다.
 

1929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미국 데뷔공연을 가진 후 이듬해 미국에 귀화했다. 미국에서 그는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다. 파가니니뿐만 아니라 바흐의 전문가로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교와 음악성을 모두 갖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인식변화였다. 그리고 점점 파가니니의 이미지는 엷어져 가고 바흐만이 남게 되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dg)는 두 번의 녹음이 있는데, 그중 나중에 한 70년대 것이 원숙미가 돋보인다.
 

밀슈타인은 20세기 초, 러시아가 낳은 바이올리니스트, 아니 위대한 예술가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연주했고 또 살아남았다. 물론 슈라 체르카스키가 조금 더 오래 연주, 생존했지만 그는 연주활동에 기복이 심했고, 밀슈타인보다 6년이나 연하였다. 밀슈타인도 체르카스키도 세상을 떠난 지금,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전설로 남은 것이다.

 

 


 

8. 아이작 스턴(1920∼ )
 

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영화 ‘샤인’에서는 어린 헬프갓에게 미국행을 제안하는 스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음악계에 이른바 ‘유태 마피아의 대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스턴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좋은 예다. 그는 연주여행으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도 그곳에 정착한 유태인들 중에 가능성 있는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핀커스 주커만이나 슐로모 민츠 등은 그가 키운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다.
 

스턴은 1920년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첫돌 전에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미국땅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1세 때 데뷔연주회를 가졌고, 1937년에 뉴욕에 데뷔했으며, 43년에 카네기 홀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미국땅에서 자라나 거기서 성공하고 또 그곳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연주가라면 다섯 손가락으로 꼽고 남을 정도로 드물었던 시기에 그는 탁월한 재능을 자랑하며 당당히 ‘미국 연주가’가 되었다. 비근한 예를 찾으라면 아마 번스타인 외엔 찾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또 드물게 성공했기 때문에 그가 미국 음악계에 가진 영향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번스타인도 역시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스턴과는 ‘팔이 안으로 굽는 사이’였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는 블라디미르 펠츠만의 예를 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유태인으로서 구소련에 억류상태나 마찬가지였던 펠츠만을 빼내오기 위해 스턴은 당시 대통령 영부인에게 로비를 펴 구소련의 서기장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한다. 두 나라의 국가간 중대사가 수도 없이 많았을 당시, 사람 하나를 부탁한다는 것이 얼마나 곤란하고 힘든 일이었을까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스턴은 대통령을 통하면 일이 더욱 힘들어질 것까지 계산에 넣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스턴의 연주도 번스타인만큼이나 미국적인 것이었다. 외향적으로 분출하는 남성적이고 힘찬 것으로 낙관이 넘치고 확신에 찬 것이었지만, 기교에 치중하는 면이 강하고 깊은 맛이 좀 떨어진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지금의 이차크 펄만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실내악에 치중했다. 물론 젊은 시절에도 유진 이스토민, 레너드 로즈와 함께 피아노 3중주로 곧잘 어울렸던 스턴이지만 최근 20년내에 그의 솔리스트로서의 활동은 찾아보기 힘든 점으로 보아 어느 정도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 한 시도로서 비쳐지기도 한다.
 

 

9. 지노 프란체스카티 (1905∼1991)
 

지노 프란체스카티는 최근까지 생존했으나 연주활동을 중단한 지는 오래되어 과거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느낌을 풍긴다.
 

1962년 2월 2일자 ‘타임’지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5인으로 하이페츠, 프란체스카티, 오이스트라흐, 스턴, 밀슈타인을 선정해 발표했었다. 이렇게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란체스카티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선정된 프랑스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었으므로 이탈리아계 바이올리니스트를 대표해 선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파가니니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는 시보리에게 배웠으므로 현대에 이어져 내려온 거의 유일한 ‘파가니니파’ 연주가다. 이러한 경력이 그를 파가니니의 전문 연주가, 또는 철저한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식케 한 면도 없지 않다. 그의 파가니니 연주는 물론 뛰어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파가니니’나 ‘초절적 기교’에 한정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부모의 영향으로 3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잡았고, 5세 때부터 공개연주를 가졌던 그는 13세 때인 1918년, 마르세이유에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1924년 파리로 가 라벨을 만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인연이 되었다. 프란체스카티는 이 인연으로 라벨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닐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별로 많지 않은 라벨 스페셜리스트 중에는 따라서 프란체스카티의 이름이 꼭 들어간다.
 

1939년, 뉴욕 필과 역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해 미국 데뷔를 기록했다. 이 연주회로 미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프란체스카티는 전운이 감도는 유럽을 떠나 미국을 주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는 또 다른 라벨 스페셜리스트, 피아니스트 로베르트 카자드쉬를 만났다. 이 둘의 앙상블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묘한 것으로 정평이 나기도 했다. 음반으로는 발터 지휘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 4번(소니), 카자드쉬와 함께한 베토벤 소나타 5번, 9번(소니) 등이 유명하다.
 

10. 기돈 크레머 (1947∼ )
 

크레머. 어떻게보면 ‘기괴하다’고까지 표현할 만한 용모를 지니고 있으며,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식되고 있는 그가 ‘파가니니의 환생’으로 불리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로 연주의 재창조성을 탐구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로서 보여지는 연주는 아무 생각 없이 현란한 기교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대 작곡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그 결과에 의한 작품의 연주, 그리고 숨겨진 작곡가들을 소개하고 부활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현대 음악 레코딩만 하더라도 슈니트케, 구바이둘리나·아르보 페르트·루이지 노노·필립 글래스 등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크레머가 이번에 무엇을 연주하였는가, 크레머의 해석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세계 음악계의 작은 사건이 되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피아졸라’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1947년 라트비아 공화국의 리가에서 태어난 크레머의 외할아버지는 독일에서 활약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칼 브루크너였고, 양친 또한 모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모계로는 독일, 부계로는 스웨덴 계통의 피를 어어받은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다. 1965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본다렌코에게 배웠다. 67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3위, 69년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고, 같은 해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그의 파가니니적인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7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75년에 서방에 데뷔한 이후, 76년에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브람스의 협주곡을, 78년에는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과 번스타인의 ‘세레나드’를, 79년에는 마젤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녹음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하다가 1980년에 급기야 당시의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81년에 로켄하우스 음악제를 창설했다.
 

로켄하우스는 원래 헝가리 국경에 접한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로, 그 마을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로켄하우스 성에서 매년 7월 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실내악 페스티벌인 이 음악제는 현대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연주가들이 모여 이어지고 있다. 로켄하우스의 멤버들은 연주 여행도 행했고, 89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들렀었다. 92년부터는 이 음악제의 명칭이 크레머의 이름을 따서 ‘크레메라타 무지카’로 바뀌었다.
 

그의 여태까지의 음반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들라면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로 더 유명해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한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2번의 음반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 아파나시에프와의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도 주목 할만 하다.

 

 

 

 


 

20세기 바이올린을 풍미한 현의 마법사들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남기고 간 업적과 그들의 연주 스타일을 정리한다는 것은 실로 방대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선 20세기 초에 영향을 미친 바이올린 악파들을 중심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물론 오늘날 바이올린의 계보나 악파를 논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는 위대한 바이올린의 스승을 중심으로 한 바이올린 악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그 이후에도 몇몇 악파들의 특성들은 바이올린 주법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으므로, 20세기 바이올린계의 흐름을 악파별로 조명하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바이올린 악파는 대개 프랑코-벨기에 악파, 독일 악파, 이탈리아 악파, 러시아 악파, 그리고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으로 나누지만, 독일 악파와 이탈리아 악파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일찍 쇠퇴했으므로 프랑코-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체코 및 동구권 악파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랑베르 마사르가 있다. 마사르는 기질적으로 심약한 사람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아주 훌륭해 크라이슬러·비에니아프스키·사라사테·마르시크 등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냈다. 마사르의 제자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지속적인 비브라토를 구사해 우아하고 달콤한 음색을 만들어낸 현대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마사르의 다른 제자인 마르시크는 20세기 초반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칼 플레쉬·자크 티보·조르주 에네스쿠 등을 길러낸 위대한 스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마르시크의 제자 칼 플레쉬는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바이올린 주법을 가장 충실히 계승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주법의 과학적인 연구자로, 바이올린 테크닉에 대한 책을 발간해 바이올린 기술의 총체적인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다루었고, 매우 합리적으로 기술적인 훈련을 하는 방법을 제시해 가장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바이올린 주법을 확립시켰다고 평가된다.
 

프랑코-벨기에 악파 중에서도 벨기에 쪽의 중심 인물로 꼽을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외젠느 이자이다. 그는 밀도있는 비브라토를 구사했고, 여러 가지 변칙적인 주법을 고안해내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법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벨기에에 이자이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자크 티보가 있었다. 티보의 연주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바로 ‘우아함’일 것이다. 그의 톤은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부드럽고 정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 악파는 비교적 늦게 형성되었지만 20세기 바이올린 연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레오폴드 아우어는 러시아 악파의 시조로 야샤 하이페츠·토샤 샤이델·에디 브라운·막스 로젠·미샤 엘만·나탄 밀슈타인·예프렘 짐발리스트·텔마 기븐 등의 쟁쟁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낸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러시안 보우 그립, 즉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을 좀더 감싸쥐어서 활을 현에 더 밀착시켜 소리낼 수 있게 하는 특수한 방법을 개발해 러시아 악파만의 탄력있고 긴장된 음색을 만들어냈다. 하이페츠는 이러한 아우어의 주법을 충실히 계승해 활의 압력에 치중하는 보잉과 그 특유의 강렬한 비브라토, 그리고 완벽하고 화려한 테크닉으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이페츠와는 대조적으로, 밀슈타인은 단정하고 지적인 연주 스타일을 고집했으며, 엘만은 긴장감있는 임펄스 비브라토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관능적인 음색을 만들어냈다. 짐발리스트는 하이페츠의 기술적 완벽성과 엘만의 뛰어난 톤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내면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에서도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것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오타카 세프치크의 체계적인 테크닉 훈련법에 힘입은 바 크다. 세프치크의 교수법은 손과 활의 민첩성을 기르기 위해 단계적인 훈련을 유도하는 것으로, 이 훈련법을 계승한 세프치크의 제자 얀 쿠벨릭은 ‘파가니니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기술적 완벽성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세프치크의 기계적인 훈련법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윤기없는 연주를 들려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전반의 거장들
 

1920년대 중반은 크라이슬러·엘만·하이페츠로 대표되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신동 예후디 메뉴인은 10대의 나이에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연주로 음악계를 경악시키면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선두주자로 부각되고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떤 특정 악파에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을 고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로 폴란드계 유태인인 브로니슬라브 후베르만과 헝가리 태생의 요제프 시게티가 활발한 연주 활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라는 20세기 최대의 비르투오소가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또 다른 악파의 위대한 스승 표트르 스톨리알스키의 제자로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특징을 두루 갖춘 쉬프팅 방법과 아우어식의 보잉, 연주 자세로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음색을 만들어냈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역시 러시아 출신의 레오니드 코간은 선배격인 오이스트라흐와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 비브라토를 억제한 견고한 톤으로 반낭만적이고 금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계승자로 여겨지는 아르투르 그뤼미오는 ‘티보의 재래’라는 평가를 받는 벨기에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 모차르트의 연주에 특히 뛰어나다. 프랑스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남성적인 톤과 놀라운 음악성을 지닌 지네트 느뵈가 있으며, 그밖에도 관능적인 음색과 우아함을 겸비한 지노 프란체스카티가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바이올린 연주 기술에 있어서 상당히 보수적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신중한 음악적 접근 태도에 기인한다. 이러한 독일 전통의 계승자로서 아돌프 부쉬·게오르크 쿨렌캄프·볼프강 슈나이더한·시몬 골드베르크가 있다. 그러나 세프치크의 제자였던 오스트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에리카 모리니는 당대 연주가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개성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 시기에는 체코 및 동구권에서 특히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탄생했다. 체코 악파의 정통 계승자로 여겨지는 요제프 수크는 실내악 연주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으며, 폴란드 출신의 헨릭 셰링은 바흐 연주의 정통파 해석으로 명성을 쌓았다. 요즈음 다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이다 헨델은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느뵈와 함께 플레쉬의 제자였다. 그는 레코딩을 기피하는 연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최근 73세의 나이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음색은 그다지 풍부하지는 않지만 따뜻하면서도 강인하고 표현력이 넘친다.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실내악에 능했고, 지휘자이기도 했던 샨도르 베그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가 있다. 그밖에도 루마니아 출신의 롤라 보베스코는 6세 때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고, 12세에 파리음악원을 수석 졸업한 천재 소녀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밖에도 스위스의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 이탈리아의 조콘다 데비토, 그리고 달콤한 음색을 지닌 알프레드 캄폴리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20세기 후반의 경향
 

20세기 후반의 바이올린계는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들이 독점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러시아 전통을 계승한 20세기의 위대한 스승 이반 갈라미언은 러시아파와 프랑스파의 장점들을 흡수해 매우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주법 체계를 만들어냈으며, 고정된 원칙을 내세우기보다는 연주자 개인의 특수성을 살려 개발하는 교수법으로 유명했다.

그의 교수법은 실로 혁명적이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탄생했다. 그들 중 선두주자는 역시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일 것이다. 그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부자유스럽지만 놀랄 만큼 유려한 음색과 완벽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비르투오소이다. 그와 더불어 갈라미언의 제자로 정경화·김영욱·강동석·핀커스 주커만·제이미 라레도, 그리고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깝게 요절한 마이클 레빈 등이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 이유 중 하나로 핀커스 주커만과 슐로모 민츠 등의 인재들을 발굴해낸 아이작 스턴의 영향력이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스턴은 우크라이나의 유태인 지구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한 대표적인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로 그의 연주 스타일은 정확하고 형식적인 균형미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 뛰어난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빛나는 테크닉과 날카로운 감성의 소유자로 20세기 음악에 뛰어났던 이브리 기틀리스가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고음악을 원래 악기로 연주하는 원전 연주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도 점차 늘어났다. 바로크 바이올린의 명수 쿠이켄 3형제 중 둘째인 지기스발트 쿠이켄은 대표적인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레코드에서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루마니아 태생 유태인이며, 갈라미언과 막스 로스탈의 제자인 세르지우 루카는 고악기와 현대 악기를 두루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밖에 네덜란드 출신의 얍 슈뢰더, 루시 반 달, 그리고 독일의 베르너 크로칭거, 오스트리아의 알리스 아르농쿠르, 영국의 모니카 허젯·앤드류 맨즈, 이탈리아의 파비오 비온디 등의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20세기 후반은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강세를 보였으나,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 중 뛰어난 테크닉과 독특한 음악 해석으로 많은 음악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기돈 크레머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제자인 크레머는 다채로운 음향과 미묘한 음영을 주는 섬세한 주법으로 현대 바이올린 주법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밖에도 러시아에는 이고르 오이스트라흐·타티아나 그린덴코·올레그 카간·보리스 벨킨·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 등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20세기 후반, 유럽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꾸준히 좋은 연주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우선 프랑스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는 피에르 아모얄과 장 자크 캉토로프, 그리고 크리스티앙 페라스, 오귀스탱 뒤메이 등이 세련된 연주를 들려준다. 그밖에 이탈리아에는 파가니니에 비교되는 빛나는 테크니션 살바토레 아카르도와 우토 우기, 펠릭스 아요, 독일에는 비올라 연주자이기도 한 토마스 체트마이어가 있다.
 

21세기를 지향하는 젊은 거장들
 

20세기의 황혼에 접어든 이 시점에서 21세기를 밝혀줄 바이올린의 거장들은 과연 누구일까? 우선 카라얀의 눈에 띄어 급격히 성장했던 안네 소피 무터가 있을 것이다. 이미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터는 특유의 탄력있는 리듬과 긴장감 있는 음색에 점차 음악적 풍부함을 더하고 있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무터와 함께 게르만계 바이올리니스트의 맥을 잇고 있는 프랑크 페터 침머만은 밝고 따뜻하며 섬세한 음색과 신중함을 갖춘 성실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러시아에도 21세기를 이끌어갈 젊고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있다. 무터와 함께 20세기 말을 대표하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는 나무랄 데 없는 테크닉을 보여주며, 차세대의 대표 주자 막심 벤게로프와 바딤 레핀은 왕성한 연주 활동과 레코딩을 통해 대담하고 독특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미국 출신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조슈아 벨길 샤함이 돋보이며, 동양계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일본의 미도리와 우리나라의 장영주가 21세기를 이끌어갈 젊은 거장들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비전통신 종합)

 

 

 

 

 

 

 

 

 

 

 

 

 

 

 

 

 

 

여기 소개하는 산들은 중국의

甘肅省(Gansu) 張掖(Zhangye) 丹霞(Danzia)

형지질학 공원(地形地質學公園)에 있는 산들이다.

각기 다른 색채의 사암(砂岩)과 광물로 이뤄진 층(層)은

24백만 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풍부한층상(層狀) 케이크

(켜 사이에 크림-잼 등을 넣은 스펀지 케이크)

활동이 진행되어 온 산들인데 이를

대과학의 기술(Technicolor)

원색을 또렸하게 나타나게 촬영하여

무지개 색 산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위 사진/ 아래 사진과 비교해 보세요.)

 

 

 

특수 사진 기술로 찍은 모습(아래 사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희미하게 보이는 색채를

특수사진 촬영기술로 원색이 밝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산들은 중국의 장계 단시아 단층지질 공원의 일부분이다.

텔레그라프지에 따르면 이들은 지각변동으로 융기가 된 곳이다.

이것들은 마치 제빵사가 빵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에도 무지개 구역이라 불리는

유사한 단층대가 있다. 그곳도 화산석과 광물질이 혼재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이들 사진은 확실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인데,

사진 촬영에 있어서 채색이 튀어나오는 필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계곡은 수천년의 비와 바람이 형성했는데

2010년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했다.

 

 

 

 

 

 

 

 

 

 

 

 

 

 

 

0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갈보리 산 위에
02.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03.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04. 나의 사랑하는 책,  눈을 들어 하늘 보라
05.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06.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어려운 일 당할 때, 
     이 몸의 소망 무엔가
07. 주의 기도
08. 성자의 귀한 몸, 

     값비싼 향유를, 

     내게 있는 모든 것을
09. 예수 따라가며,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아 내 맘 속에

 

 

 

 

 

 

 

 

 

 

 

 

 

 

 

 

 

 

 

 

 

 

 


 

 

 

주간(Weekly)으로 발행되는 비전통신

2009년부터 2012년 까지 4년 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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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건강한 피부로 보이고 싶다면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평소 꾸준한 노력과 투자로 피부관리를 해야 한다. 피부가 좋아지는 습관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가) 주 1회 각질 정리하기 :

 

모든 피부 관리의 기본은 각질정리다. 아무리 좋은 관리와 화장품을 사용한다 해도 피부 표면의 각질 정리가 되지 않으면 큰 효과를 보기 힘들다. 일주일 한번 가벼운 필링제를 사용하여 모공 속 각질비후현상으로 인한 피부트러블을 예방 할 수 있다.
 

나) 충분한 수면취하기 :

 

옛 말에 잠이 보약이라는 말과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이 있듯이 피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충분한 수면이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 뇌의 뇌하수체에서 성장호르몬이 분비되고 이 성장호르몬에 의해서 피부의 콜라겐과 엘라스틴이 재생되는 시간이 밤 10~2시 사이기에 잠은 꼭 12시 이전에 자는 것이 좋다
 

다) 하루 1리터 이상 물 마시기 :

 

물을 마시면 몸 속에 축적된 노폐물을 땀 과 소변으로 함께 배출시켜 체내에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며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도와 준다.
 

라)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 선택하기 :

 

필자는 여드름을 동반한 예민피부를 가진 여성과 피부트러블에 관해 상담을 하던 중 생활습관과 화장품사용에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여성은 화장품을 선택할 때 친한 친구가 좋다고 추천했던 화장품을 선택하거나 혹은 동생이 사용하는 화장품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잘못된 화장품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성격과 체질이 다르듯 피부 또한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피부타입을 정확히 알고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
 

마) 손은 얼굴에서 최대한 멀리하기 :

 

피부트러블 원인 중 하나는 손이 무의식적으로 자꾸 얼굴을 만지기 때문이다. 여드름성 피부는 여드름을 화농성 여드름으로 더욱 악화시키며 기미, 색소는 더욱 심하게 된다. 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다른 부위에 비해 더 많기 때문에 최대한 손으로 얼굴 만지지 않고 외출 후 반드시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바) 목,어깨 스트레칭하기 :

 

시간이 날때마다 한쪽 손바닥으로 반대쪽 어깨를 지긋이 눌러주고 목을 스트레칭하여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는 것 또한 피부를 좋게 하는 방법중의 하나이다. 간단한 방법이지만 긴장된 근육을 부드럽게 해주고 피로회복에도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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