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승려 법정이 쓴 책과 글을 블로그에 올리고 이메일로 주고받으며 그의 [무소유]에 관한 가르침에 감격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는 것 같아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법정의
유언(遺言)이다.
"모든 분에게 깊이 감사 드린다"
"어리석은 탓으로 내가 금생(今生)에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번거롭고 부질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 의식을 행하지 말라"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갈 것이다"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며,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마라"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마라. 이 몸뚱이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를 베지 마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 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 달라. 그것이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 이상은 시인 유시화가 전하는 유언법정의 주요 어록이다.
다른 글을 소개해 보겠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가지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 <무소유> 중에서...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 삶에 물기를 보태 주는 가락이다.
- <산방한담> 중에서...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
-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 <오두막 편지> 중에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도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 <일기일회> 중에서...
이상의 유언과 어록을 간추려보면 삶의 주제는 [무소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은 [사랑]이며 삶의 본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며 삶의 마감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이며 외로움 속에 즐거움을 준 철쭉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다.
또한 풍요는 병들게 하고 가난은 평화를 이루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고 했다. 구구절절이 시어(詩語) 같은 아름다운 글 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스스로 부처가 되라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에서 본 관점하고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법정의 모든 사상이나 언어가 고매하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밖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 아니 본질적으로 다른 사고와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밖에...]있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인 것이다.
법정은 "삶의 본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 말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대체(代替)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울 사도는 자신의 자신 됨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법정이 감사의 대상을 인간과 철쭉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법정이 수양을 통해서 법정 자신이 된 것이라면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바울이 된 것이다.
수행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비움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모두가 좋은 말이다.
다만 법정은 모든 것을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이며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이다.
법정의 수행의 방법은 무소유였으며 공(空)이였다.
바울의 믿음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해결하였다.
법정은 자아의 문제를 자신 스스로가 풀어 갔고 바울은 자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풀어 갔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관은 유대교의 이단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체포하여 형사 처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었다. 놀라서 땅에 엎드러졌는데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
이때 바울은 소경이 되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다. 엄청난 충격과 도전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믿을 수 없는 예수가 지금 자기의 머리 위 하늘에서 음성을 들려주었고 그 증거로 자신은 소경이 된 사실에 대하여 동서남북에 다니면서 외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바울은 선지자 아나니아에 의해 안수 받고 시력을 회복하고 오히려 죽음을 무릅쓰고 동서남북을 누비면서 '예수는 부활하셨다'와 '예수는 구세주이시다'를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삶의 근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었으며 사고(思考)하는 방법, 처리하는 의식, 관망하는 소망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점을 찾았던 것이다.
[배우게 되는 것]은 법정처럼 나 홀로라도 어느 정도 터득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무소유라는 엄청난 지혜가 깨달아지고 사랑과 용서와 나눔과 감사를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자신의 시신까지라도 불태워 무소유의 아름다운 귀결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공허만 남긴 채...
이에 반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무소유의 가치는 홀로 살다 공(空)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다 내세를 획득하는 데 있는 것이다.
홀로 무소유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무소유,
홀로 비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비움,
공(空)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무소유의 참 의미인 것이다.
우리가 중을 보고 "스님 예수 믿으십니까?" 라고 질문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참된 무소유란 예수 안에서의 무소유여야 하기 때문이다.
[영생]으로 연결되지 않은 미사여구(美辭麗句)는 모두가
헛된 염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장재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