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용기를 낸다. 내 주위에 수많은 선교사님과 목사님이 있고, 사랑하는 후배들이 있다. 모두 나에게 '가르치는 교사'로서 피와 살이 되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예수님처럼 삶으로 본이 되어 주시는 분들이다.
이 글 때문에 불편해하고 찔려 할 사람들 눈치를 보자니 글을 시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도 내 글의 포커스는 다음 세대이다. 그들 눈치 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청년들과 학생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다음 세대가 한국 기독교 안에 흐르고 있는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그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말씀 중심으로 바꿔 가길 바란다. 청년들이 용기 있게, 아닌 것을 아니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길 기대하는 마음뿐이다.
"그래도 졸업은 하고, 안수는 받아야지"
"우리 교회는, 평신도임에도 파송해 주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 후배의 선교사 파송 예배에 참석한 나는 축사를 듣고 속이 타들어 갔다. 평신도가 선교사로 나가는 게 무슨 자격 없는 사람이 억지로 선교지로 향하는 것인가.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파송 받기까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래도 덤덤하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며 파송 받은 후배 선교사와 차를 마시면서 조심스레 물어봤다.
"교회에서 재정 후원은 좀 해 주시기로 했어요?"
"네. 20만 원이요."
"혹시 목사 선교사님은 얼마 후원해 주시는지 알아요?"
"*** 만 원이요"
이유가 뭘까.
나는 우리 한국교회 안에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목사'와 '평신도'라는 구분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선교사를 예로 다루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정관념을 건드려 보고자 한다.
성경에도 없는 목사와 평신도에 대한 한국교회 안에 있는 구분을 구구절절 따지자니, 기존에 발간되어 있는 좋은 책이 많다. 최대한 생략하고 요점만 써보겠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들을 참고하시라.
<예수는 평신도였다>(정진호, 홍성사)
< 정말 쉽고 재미 있는 평신도 신학>(송인규, 홍성사)
< 평신도를 깨운다>(옥한흠, 국제제자훈련원)
<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폴 스티븐스, IVP)
<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폴 스티븐스, IVP)
문득 '닫힌 지역'으로 파송을 준비하며, '신학교 졸업'이라는 타이틀이 혹시 사역에 짐이 될까 싶어서 4학년 때 일반대학으로 편입한 필자의 10년 전 일이 생각났다.
"상현아, 너 그래도 졸업은 하고, 목사 안수는 받아야 교회에서 재정 후원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어. 다시 생각해 봐. 안수는 무조건 받아야 해."
내 머릿속에는 목사나 선교사라는 타이틀로 선교하는 것보다 전문인 신분으로 파송받아 효과적으로 선교할 전략만 가득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재정 지원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목사 안수를 권면하는 것 같아 불편한 적이 많았다.
사역하다가 필요하면 신학을 할 수도 있고, 주님이 허락하시면 안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장에 있는 동역자들 중에 목사나 선교사가 있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수도 있다. 선교사가 성경 말씀에 해박한 지식이 있거나, 신학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선교지에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목사가 되어 선교지로 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에 헌신하여 타 문화권에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재정 지원을 안정적으로 받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을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마음일 것이다. 선교지로 가기 전에 반드시 점검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 하나님을 끼워 넣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다시 점검하며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나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한국에서만 있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전통과 고정관념이 말씀을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선교적 관점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그것을 나중 문제로 취급하면서 결국 믿음의 문제로 결론을 내리는 모습을 종종 본다. 나만 그런 걸까.
잘못된 동기는 그렇게 분별력을 흐리고, 본질을 놓치게 만든다. 주변에서, 선교사를 꿈꾸는 헌신자들에게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면하고 교단에서 목사로 안수받을 것을 요구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왜 먼저 신학교를 가라고 하는 걸까.
목사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를 구분하는 까닭은 무엇이고, 파송하는 교회의 관심이나 재정 지원에서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어떤 목사님은 내게 이렇게 답하셨다.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는 바울처럼 '텐트 메이킹'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사역할 수 있다. 그래서 재정 지원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성경적이니 순종하라. 목사 선교사는 목회에 집중해야 하고, 자비량 사역이 불가능하니 교회가 재정 지원에서 차이를 두는 것이다."
아마 교회에서 전적으로 전임 사역자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전통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 같다. 물론 한국의 모든 교회와 목사님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선교지에서 동역하는 평신도 선교사님을 직접 만나고, 선교 단체에서 다양한 신분으로 활동하는 파송 선교사를 접하는 본부 사역자와 대화해 보면 평신도와 목사 선교사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리더는 목사만 할 수 있다?
평신도 선교사나 목사 선교사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 지원하며 협력하는 교회는 지금처럼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몇몇 교회에 도전과 인식의 변화를 주고 싶다. 바울이 선교하던 시대에는 텐트를 치며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은 어떨까.
선교지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언어가 자유로워지고, 정착 과정이 끝나면 자비량 사역으로 전환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파송 교회가 원한다고 그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 어떤 선교사가 몇십 년을 본국에서 살다가 제3세계에 가자마자 돈을 벌 수 있을까.
언어도 부족하고, 문화와 생활을 포함해 모든 것이 낮선 땅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 정착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처음부터 자비량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면, 선교는 선교사만의 몫이 아니라 선교사와 교회가 함께하는 팀 사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역이며, 각자의 역할이다.
성경에는 없지만,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당연한 것들 가운데, 꼭 목사가 리더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좀 깨 보자. 보통 선교지에서 매년 선교사 회장을 선출하여, 선교사님들을 섬긴다. 이 자리가 매우 귀한 헌신의 자리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얼마 전, 선거를 통해 사역한 지 20여 년이 된 평신도 선교사님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는 몇몇 선교사님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선교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목사가 회장을 해야지. 축도도 해야 하고 말씀도 전해야 하는데."
난 정말 궁금해서, 대화에 끼어들어 물었다.
"왜요? 평신도는 회장하면 안 되는 법이 회칙에 있나요? 축도는 목사님이 하시면 되잖아요. 설교는 평신도도 할 수 있지 않아요?"
"에이. 그래도 회장은 목사가 해야지. 지금까지 계속 목사가 했는데."
"…."
우리는 왜 이런 성경에도 없는 법칙을 당연시하고 있을까. 리더는 목사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유가 뭘까. 왜 이런 구분이 우리 대한민국 교계에만 자리 잡고 있을까. 이런 목사와 평신도에 대한 구분이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선교를 뒷전으로 미루게 하고, 많은 선교 헌신자를 무작정 신학교로 보내는 결과를 낳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맹신은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중세 지식인들을 1,000년간 괴롭힌 성경 구절이 있다. 여호수아 10장에 나오는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성구다. 이 구절은 그 시대 모든 이에게 해와 달과 하늘이 아닌,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을 죄악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같은 주장을 한 코페르니쿠스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멍청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그의 제자 브루노는 화형을 당했다. 갈릴레이는 피렌체 자택에서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주장은 그 시대 많은 종교인에게 이단시되며 비판받아 왔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숨어서 자신의 생각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왜 성경 한 구절을 바탕으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며 심지어는 고문을 받도록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차게 만들었을까.
시간이 흘러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주장했던 지동설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천문학에서 큰 역사를 남겼다. 그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배경에는 바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붙잡고 있었던 그들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지구중심설 '상식'으로 통하던 시대에 고정관념을 깨며 새로운 사실을 재발견한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지구를 가차 없이 끌어내리고 태양을 거기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대명천지에서 어떻게 1,800년이 지나서 지동설이 다시 나오게 된 걸까. 무소불위한 절대 권력이었던 교회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 지성이 무색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맹신은 사람의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똑똑한 지식인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천재라 해도 시대의 대세를 거스르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우리 역시 선대부터 내려오는 성경에도 없는 전통을 당연시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평신도 선교사로서 겪은 어려움과 서러움을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시절이 있었다. 앞으로 내 뒤에 나오게 될 많은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하게 되기를 내심 원하기도 했었다. 모든 경험은 유익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같은 경험을 하길 원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파송 교회로부터 큰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여전히 같은 경험을 한 많은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를 만나면 안타깝기만 하다. 앞으로는 우리가 겪은 그 과정을 후배 선교사들이 겪지 않았으면 한다. 이 글을 통해 단 한 분의 담임목사, 단 한 분의 선교부장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 글을 단순히 재정 지원의 차별을 없애자, 정도로 이해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예화는 실화다. 21세기 세계 선교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교회에 충분히 비교·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랬으니 그냥 그런 줄 알고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모습이 있다면 말씀으로 돌아가서 점검하자.
선교 헌신자와 선교적 삶을 원하는 이들을 무턱대고 신학교에 가라고
종용하기보다 먼저 그들이 건강한 세계관으로 차근차근 선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본질을 놓치지 말자.
학부에서 태권도와 신학, NGO를 공부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글로벌거버넌스(Global Governance)를 전공한 박상현 선교사는 인생에서 하나님께 젊음을 드리는 것을 소중한 가치라 여긴다.
박 선교사는 20대에 선교지에 가기 위해 할렐루야태권도선교단 활동을 하며, 29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12번의 선교 훈련을 받은 열혈 청년이다.
지금은 GMP개척선교회 소속으로 탄자니아에서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를 하며, 할렐루야태권도단을 창단하여 태권도를 통한 선교로 탄자니아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내 박새롬 선교사와 두 딸 예나, 조이가 있다.